그리스도인들이 기억해야 할 한국교회 위인들 [20-21]
조덕삼(趙德三, 1867-1919)과 이자익(李自益, 1879-1958)⑥
이자익 목사는 생전에 20개 교회를 설립하고 목회를 했습니다. 그의 아들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장남 이봉호는 숭실중학교를 다녔을 때 영어웅변대회에 참가해서 1등을 차지했다고 합니다. 이자익은 해방 이후에는 함태영 부통령으로부터 장관직 제의까지 받았지만 거절하고 오직 교회를 섬기는 일에 전념했습니다. 1947년에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가 대전 선교부 개설을 허가하면서 이 일을 맡은 이자익은 대전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대전에서 충남고등성경학교 부교장이 되어 학생들을 모집했지만 얼마 후 6·25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전북 완주로 피신했고, 얼마 후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김제 내무서에 이첩되었습니다. 그러나 김제에서는 삼남 이성환이 있어서 그 집에서 머무를 수 있었습니다. 1950년 우리 군과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9월 15~28일)으로 서울을 되찾게 되면서 이자익은 대전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다시 시작한 고등성경학교 졸업생들의 진로가 걱정이었습니다. 대전 노회에서 지방 신학교를 설립해서 신학생을 양성하자는 여론이 생겨났고, 이자익은 1954년 8월 대전신학교 초대 교장으로 추대되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은 12월에 사임을 했고, 김제 원평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58년 사망했습니다. 손자 이규완은 대전제일교회에서 1985년 장로가 되었고, 2003년 연변과기대 초빙 교수(독일에서 고분자화학으로 박사학위 취득) 겸 선교사로 섬기다가 2014년 5월 18일 사망했습니다. 또 다른 손자 이규석은 목사가 되어 동막교회(청주)를 담임했고 현재는 원로목사입니다. 교회당이 세워진 후로 116년이 된 지금도 조덕삼과 이자익의 김제 금산교회당은 매주 방문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