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울음(哭)은 불가분의 관계다. 울음은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는 표현이기에 우는 것을 죽음의례의 시작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고인故人과 친한 관계일수록 울음의 크기와 길이는 늘어나게 된다.
전통적으로 산 사람들은 3년 동안 울음으로 고인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기간을 가졌는데, 고인에 대한 여운餘韻을 해소하는 방법이었다. 예서에서 울음은 ‘곡哭’이라 했고, 불효를 뉘우치는 뜻으로 곡소리가 끊이지 않도록 했다. 급기야 번갈아가면서 대신 곡을 하는 ‘대곡代哭’까지 생겼고, 이를 해결하려고 ‘곡비哭婢’라는 신종 직업이 생기기도 했다.
곡에 대한 상례의 규정, 산 사람을 위하는 배려
의례를 규정한 예서禮書들에는 고인의 숨이 끊어지면 가슴을 치고 발을 동동 구르며 슬픔에 겨워 곡을 한다는 뜻의 애곡벽용哀哭擗踊을 상례喪禮의 시작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는 어버이의 죽음은 자식의 불효라고 여겼기에 나타난 현상이다. 그래서 3년에 걸친 대서사시였던 전통 상례의 19개 절차는 곡을 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곡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도록 규정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주자朱子(1120~1200)의 <가례家禮>에는 대곡하는 시기를 정하고 있다. 시신을 싸서 묶는 절차인 소렴小斂을 하면 번갈아가면서 곡을 하더라도 곡소리가 끊이지 않도록 하고, 시신을 입관하는 대렴大斂을 마치고 시신을 임시로 가매장하는 빈殯을 하면 대곡을 그치도록 규정한다.
또 성복成服(상주가 상복으로 갈아입는 의례)을 하고 조석전을 올리면서부터 시도 때도 없이 슬픔이 복받치면 곡을 하는 무시곡無時哭을 하도록 안내하고 있다. 상여가 장지로 떠나는 발인 하루 전에 대곡을 시작해 상여가 장지에 도착할 때까지 대곡을 하여 곡이 끊이지 않도록 하고 있다.
정리하자면, 상례를 치르는 전 과정에서 대곡을 하는 것이 아니라 첫 번째는 소렴부터 대렴을 마칠 때까지 대곡을 한다. 대렴 다음 날 성복한 후 무시곡을 발인 이틀 전까지 한다. 발인 하루 전부터 고인의 상여가 장지에 도착할 때까지 대곡을 하여 곡소리가 끊이지 않도록 한다.
그 이후부터는 삼년상을 마칠 때까지 대곡 규정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번갈아 가면서 곡을 하여 곡소리가 끊어지지 않도록 한다(代哭不絶聲)’는 규정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고인 때문에 산 사람의 몸이 상하는 걸 방지하려는 목적이 강하게 내재돼 있다.
<의례儀禮>라는 예서에는 대곡을 하는 이유를 ‘효자는 슬퍼해서 초췌해지므로 예법으로써 죽은 이 때문에 산 사람의 몸이 손상되는 것을 막고자 번갈아 가면서 대신 곡을 하도록 하여 곡소리가 끊어지지 않게만 한다’고 했다.
즉, 상주는 진이 빠지도록 슬피 울어야 하지만 그로 인해 몸이 상해 상례를 치르지 못할까 봐 어쩔 수 없이 번갈아 가면서 곡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는 외형상 고인의 죽음을 처리하는 것으로 보이는 상례가 실제로는 산 사람을 위한 의례의 성격도 강했음을 알게 해준다.
대곡의 방법, 신분·계급에 따라 달라
대곡을 하는 방법은 신분과 계급에 따라 다르다. <의례> ‘사상례’에 따르면 ‘군주는 관리의 계급 순위에 따라 순서를 정하고, 선비는 친한 관계에 따라 순서를 정한다. 관리들은 물시계를 매달아 두고 시간에 맞추어 교대로 곡을 한다. 그러나 대부와 선비는 물시계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로써 대곡이란 서로 번갈아 곡을 함으로써 상주가 몸이 상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초기 예서에서는 사람을 사서 대곡하게 한다는 내용은 찾아 볼 수 없다.
그런데 세종 3년(1421) 2월 12일 예조에서 ‘국장이나 대신의 예장禮葬때 곡비는 이전에 시전의 여자를 시켰다. 그러나 공정대왕과 원경왕후의 국장 때는 옛 제도에 따라 궁인이 곡을 하며 따르게 했다. 그러므로 이후로는 대신의 예장에 본가의 노비를 곡비로 쓰도록 하소서’라고 건의하니 왕이 그렇게 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사례편람四禮便覽>(1844)에는 발인을 할 때 ‘속칭 곡비라 하는데 2명 혹은 4명이며, 베로 된 너울을 쓴다’는 여종이 등장하다. 또 <사의士儀>(1870)에는 ‘상비喪婢(여자) 두 사람이 영거靈車(혼백을 운반하는 가마) 앞에 서고, 상노喪奴(남자) 두 사람이 향탁香卓과 의자를 나눠서 지고 영거의 좌우에서 곡을 하면서 간다’고 했다. 이 곡비나 상비, 상노가 바로 곡을 대신해 주는 대곡자였을 것이지만 여염집의 여자를 사서 대곡을 했다는 이야기는 없다.
슬픔을 달래고 도리를 일깨우는 대곡 문화
곡비가 전통사회의 애환으로 각인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국어사전>에는 ‘양반의 장례 때 주인을 대신하여 곡하던 계집종’이라 풀고 사례로 <혼불>(1981~1996)이라는 소설에서 ‘곡비의 울음소리 온밤 내내 구슬픈 물굽이를…’이라는 대목을 들고 있다. 또 2014년 3월 KBS2에서 방영된 ‘곡비’와 2015년 4월 ‘총체적 난극-곡비’라는 연극이 그 주인공이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같이 ‘곡비=천민’이라는 등식으로만 바라보고 있어 곡비와 대곡 문화의 실체와 본래 의미를 읽어내지 못했다.
실제 곡비는 극히 드문 일이었고 소설 외에 어떤 형태로 존재했는지 알 수 없기에 일반화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 곡비라는 슬픈 역사로 알려져 버린 ‘대곡’은 슬픔에 빠진 상주를 보호하고 고인에 대한 여운을 풀어주며 자식 된 도리를 일깨우는 배려의 풍습이었다. 그래서인지 대곡 문화는 세계 여러 곳에서도 나타나는 보편적 문화현상이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