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 중 <허밍 코러스>, 맨 밑은 영화 <보바리 부인> 동영상 일부입니다
[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의 고향을 찾아 ]
<보바리 부인>은 작가 플로베르가 그의 고향 부근인 리(Ry)라는 소촌(小村)에서 실제 일어났던 일을 소재로 하여 쓴 소설입니다. 이 마을의 들라마르라는 의사의 부인이 여러 정부(情夫)와 놀아나다 빚에 몰려 26세의 나이로 자살한 사건이 1848년에 있었습니다.
루앙에서 동쪽으로 리까지의 20km는 사과나무의 과수원들 사이로 난 시골길이 향기롭습니다. 나지막하게 일렁이는 들녘에는 젖소들이 떼를 지어 풀을 뜯고 있습니다. 사과와 소는 이 노르망디 지방의 명물이기도 합니다.
* 리 마을 전경
리 마을은 한가운데의 길 양쪽으로 집들이 길게 늘어서 있습니다. 길이 한 가닥 뿐입니다. <보바리 부인>의 제2부 서두에는 이 마을의 묘사가 자세합니다. 소설에서는 이 마을을 용빌 라베라 부릅니다. 플로베르는 "단 하나의 길은 길이가 착탄(着彈)거리 정도"라고 말했지만 차라리 지호(指呼)의 거리라고나 할까요.
이 끝에서 부르면 저 끝에 들릴 듯한 손바닥만한 시골입니다. 교회가 아직도 맨 한쪽 끝인 것을 보면 동네는 아직 당시보다 크지 않았습니다.
플로베르는 그의 사실주의 정신에 따라 이 무대를 세밀히 현지답사했고 등장인물 하나, 건물 하나도 실재 인물, 실재 장소를 이름만 바꾸어 소상히 그렸습니다.
보바리 부인 엠마의 모델이 된 들라마르 부인의 집은 마을 중간쯤의 길가에 있습니다. 집은 마을 중간쯤의 길가에 있습니다. 2층 위로 지붕 밑방이 딸린 길다란 집입니다. 아래층에 약방을 들이고 하얗게 칠을 새로 했을 뿐 나머지는 옛날 그대로입니다.
* 약방 사진
지금의 집 주인은 이 동네의 촌장(村長) 메르 씨. 전직이 의사인 메르 촌장은 <보바리 부인> 한 권을 거의 줄줄 외다시피하는 플로베르 애호가입니다. 플로베르 이야기를 끄집어내면 전문가 못지않은 일가견을 늘어놓습니다.
그러면서도 전에는 약방 문 위에 <보바리 부인의 집>이라는 기념판이 붙었던 것을 최근에 칠을 새로 하면서 자신의 손으로 떼어 버렸습니다.
" 사람들은 우리 집을 보바리 부인의 집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여부는 분명치 않습니다. 아무 확증이 없죠, 아무 확증도 없는 것을 가지고 집 앞에 써 붙일 양심은 없습니다. 전설을 전설로 족한 것이 아닐까요?"
보바리 부인을 영원한 촌민(村民)으로 가지고 있는 촌장으로서, 또 이 소설에 심취해 있는 한 애독자로서 불확실한 것은 한 가지도 이 작품과 관련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가 단호히 고집하는 것은 가히 과학정신의 작가 플로베르의 진정한 이해자답습니다.
그러나 이 마을에서 이 집이 보바리 부인의 집이라는 데 의문을 가진 사람은 집주인이자 촌장인 메르 씨 본인 한 사람뿐입니다.
* 들라마르 부인이 살던 집
리 마을 일대의 거리는 그대로 소설 <보바리 부인>의 책장 속입니다. <보바리 부인의 집>은 간판을 내렸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여러 건물들은 대부분 잔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러는 작중(作中)의 이름을 문 앞에 문패처럼 내붙여 놓았습니다.
길 건너 맞은편은 보바리 부인의 젊은 애인 레옹이 일하던 <공증인 기용의 집>. 기념판을 단 채 지금은 구둣방이 되어 있습니다. 레옹은 실제에 있어서는 이 공증인 사무실의 보테라는 서기였습니다.
그 이웃에 소설에서는 <리옹 도르(金獅子)>라고 불리는 <오텔 드 루앙이라는 여관이 있었습니다. 이 집은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은행지점의 새 건물이 들어섰습니다.
보바리 부인이 독약을 먹은 약국은 집에서 50km 정도의 거리입니다. 장난감 가게가 된 이 집 또한 <오메 약국>이라는 소설 속의 간판을 내걸고 있는데 원래는 <주안 약국>이었습니다. 보바리 부인이 어린 딸을 유모에게 맡기는 <롤레 농가>는 교회 옆에 아직도 농가인 채입니다.
* 리 마을로 가는 길
보바리 부인이 살던 집은 리 마을에 두 군데 있습니다. 촌장의 약방이 된 집은 두 번째 집이고 첫 번째 집에는 어떤 공증인이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대개 두 번째 집만을 보바리 부인의 집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소설의 주인공이 그 집에서 극적인 죽음을 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집에서 뒤쪽을 돌아나가면 소설에서 <리욀 천(川)>이라 부르는 크르봉 천(川)이 흐릅니다. 보바리 부인이 대지주인 애인 로돌프에게 전하는 편지를 돌 밑에 꽂아두던 돌층계가 이 물가에 아직 있습니다.
* 크르봉 천
크르봉 천을 건너 2km쯤 가면 로돌프의 집 <위셰트>입니다. 보바리 부인은 로돌프를 만나러 이 길을 걸어 다녔습니다. 주인이 집을 잠가놓고 딴 데서 살아 지금은 아무도 없습니다. 플로베르가 말한 두 개의 바람개비는 여전히 지붕 위에 있습니다. 소설 속의 로돌프는 이 집 주인이던 루이 캉피옹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보바리 부인이 무도회에 참석하는 <라 보비에사르> 성관(城館)은 실제의 에롱 성관이었습니다. 건물은 무너져 버리고 넓은 정원만 옛 모습입니다. 플로베르는 소년시절에 아버지를 따라 성관의 주인이던 후작의 초청으로 이곳에 온 적이 있습니다.
보바리 부인, 정확히 말해 들라마르 부인은 농부의 딸이었습니다. 들라마르 부인이 처녀 때까지 살던 <베르토의 농가>가 리 마을에서 서북쪽으로 6km 떨어진 볼랭빌 크르봉 마을에 남아 <보바리의 농가>라 불리고 있습니다. 역시 빈 집입니다.
1839년 8월 7일 저녁 8시, 17세의 델핀 쿠튀리에(들라마르 부인의 처녀명)는 28세의 의사 외젠 들라마르(샤를 보바리릐 실명)와 마을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린 뒤 이 농가에서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비극의 탄일(誕日)이었습니다.
리 마을로 다시 돌아옵니다.
뷔르고 씨는 이 마을에 사는 자동인형(自動人形)의 제작자입니다. 보바리 부인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하여 개인적으로 전시관을 차렸습니다. <갈레리 보바리>라는 이 사설 기념관에서는 움직이는 인형들이 소설 <보바리 부인>을 연기하고 있습니다.
* <보바리 부인> 전시관
샤를 보바리가 학교 교실에 들어가는 장면에서 시작하여 보바리 부인이 약을 먹는 장면까지 30여 주요 씬들이 진열되어 선 자리에서 소설 한 권을 일독(一讀)시킵니다. 한쪽 망에는 약방이 차려져 있습니다. <주안 약국(소설 속의 오메 약국)>이 폐업할 때 거기서 빈 약병과 판매대, 문짝 등을 옮겨다가 재구성한 것입니다.
* 전시관 내부
예술은 모방이라지만, 또한 현실은 작품을 모방하기도 합니다.
이 전시관 가까이 마을 한쪽 귀퉁이의 공지는 귀스타브 플로베르 광장이라고 불리고 거기 이 작가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보바리 부인 같은 여인을 낳은 것이 자랑일 리 없을 것 같은데도 명작의 고향인 것이 영광이기만 하여 마을은 그 작가를 이렇게 모십니다.
* 플로베르 기념비
플로베르는 실제로 보바리 내외인 들라마르 부부를 직접 알았던 것 같다고 연구가들은 판단하고 있습니다.
저명한 외과의사였던 플로베르의 아버지가 루앙의 의학교 교장일 때 외젠 들라마르는 학생이었습니다. 루앙이 고향인 외젠은 1836년 25세 때 리 마을에 왔고, 소설에서는 45세 돈 많은 과부와 결혼하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39세의 뮈텔이라는 여자와 이 해에 결혼을 했습니다.
이 첫 부인이 이듬해 유산 끝에 죽자 2년 뒤 재혼한 여자가 델핀 쿠튀리에입니다. 델핀은 소설 속의 보바리 부인처럼 살다가 1848년 3월 6일 자살했습니다. 남편 들라마르 의사는 아내의 불륜을 모르고 있었는지 그 죽음을 연일 상심하던 끝에 이듬해 12월, 사과나무에 목을 매어 따라 죽었습니다.
플로베르가 <보바리 부인>을 쓰기 시작한 것이 1851년이니까, 들라마르 부인은 죽은 지 3년 만에 부활한 셈입니다.
* 플로베르의 고향이자 노르망디의 중심도시 르앙(아래 화살표시 바로 오른쪽에 위치)
그후 40년이 지난 1890년 루앙의 한 신문기자가 들라마르 의사네의 하녀로 있던 오귀스틴 메나즈라는 당시 67세의 여인한테서 증언을 들은 기록이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들라마르 부인은 밤색 머리에 성격이 명랑했고 하도 목소리가 고와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다 주워담고 싶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약을 먹고 나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어린 딸이 무릎을 꿇고 울자 실토하더라는 것입니다.
리 마을의 교회에는 정문 옆 풀섶에 하얀 묘석(묘석)이 나둥그려져 있습니다. 새긴 글씨가 다 닳아 <들라마르 부인>이라는 이름이 간신히 읽힙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것이 보바리 부인의 무덤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갈레리 보바리>의 주인 뷔르고 시는 이것이 들라마르 의사의 첫째부인의 무덤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둘째부인 즉 보바리 부인이 이 교회에 묻히기는 했으나 여기 있던 무덤들은 19세기 말에 딴 데 새로 묘지를 만들면서 모두 이장했습니다. 그 얼마 뒤 보바리 부인의 묘석은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당시 묘지기가 이 돌을 동강내어 <보바리 부인>의 팬에게 팔았다는 말도 전해집니다.
<보바리 부인>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의 후문(後聞)에 대해서는 뷔르고 씨가 환합니다. 공증인 사무소 서기 보테(소설에서는 레옹)는 1888년 71세의 나이로 보베에서 죽고, 대지주 캉피옹(소설에서는 로돌프)은 평생 독신으로 지내다가 1868년 58세로 죽고, <주안 약국(소설에서는 오메약국)> 주인은 1895년 76세로 죽고, 마차 <제비>호의 마부는 본명이 테랭이었는데 1903년 83세로 죽고....
<보바리 부인>의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아버지가 외과 과장으로 있던 루아의 시립병원에서 태어났습니다.
* 플로베르가 탄생한 집
노르망디 지방의 중심도시로 세느 강변의 하항(河港)인 루앙은 2차대전 때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전후하여 폭격의 피해가 극심했던 곳입니다. <보바리 부인>에서 엠마와 레옹이 밀회하는 루앙 성당은 모네의 그림으로 유명한 곳이지만 전쟁 때 많이 파손된 것을 원형대로 복구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엠마와 레옹을 태운 포장마차가 한나절을 돌아다니던 루앙의 거리들은 그때 모습이 아닙니다. 다행히 플로베르가 태어난 건물은 살아남아 지금도 여전히 <오텔 드 듀>라는 시립병원입니다.
플로베르 일가(一家)가 살던 한쪽 모퉁이 방은 기념관이 되어 흰 가운의 의사복 차람을 한 관리인이 지키며 안내를 하고 있습니다.
* 플로베르 기념관 내부
플로베르는 25세 때 아버지가 죽자 이 병원 집을 떠나 루앙 교외의 세느 강변에 있는 크르와세의 별장으로 거처를 옮겼고 여기서 <보바리 부인>을 완성했습니다.
이 별장의 본채는 현재의 제지공장을 세우면서 헐려 버리고 외따로 섰던 정자 하나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플로베르가 <보바리 부인>을 쓰던 없어진 방의 모양은 콩쿠르 형제의 일기 1863년 10월 29일자에 "세느 강 쪽으로 창문이 2개, 정원 쪽으로 창문이 3개 있었다"고 쓰인 기술(記述)로 짐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 <보바리 부인>을 쓴 별장
입구에 보리수나무가 줄을 선 정자는 플로베르가 글을 쓰는 사이 나와 쉬면서 손님을 맞아들이고 밤이면 강물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기곤 하던 곳입니다.
플로베르는 밤을 도와 쓴 글을 고치고 또 고쳐서는 큰소리로 읽어대는 버릇이 있었고 그 낭랑한 소리는 세느 강의 대안(對岸)에까지 들렸다고 합니다. 세느 강이 <보바리 부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흐른지 130년 넘었으나 그 물처럼 이 명작은 항상 새롭습니다.
* 당시 대작가들 모습, 왼쪽부터 도데, 플로베르, 졸라, 투르게네프
[ 귀스타브 플로베르와 <보바리 부인> ]
귀스타브 플로베르(1821~1880년)는 사실주의 문학의 완성자입니다.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니요, 작품이 모두"라는 것이 신조이던 그는 뼈를 깎는 노력으,로 글을 한자 한자 다듬은 <말의 연금술사(鍊金術師)>였습니다.
5년 걸려 써낸 <보바리 부인>은 사실주의의 금자탑이라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보바리 부인>의 주인공 엠마는 농부의 딸로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다가 화려한 인생을 꿈꾸며 시골 의사인 샤를 보바리와 결혼을 합니다. 그러나 따분한 생활에 환멸이 느껴지자 대지주인 로돌프, 공증인 사무소의 젊은 서기 레옹 등과 차례로 통정(通情)을 하고 결국은 허영심이 끌어댄 빚 때문에 궁지에 몰려 비소(砒素)를 먹고 자살하고 맙니다.
엠마는 사랑을 사랑하다 파멸하는 한 여인상(女人像)입니다.
<보바리 부인>은 1856년 <파리 평론>지에 연재되자 사회 도덕을 해친다는 이유로 기소되었고 이것이 면소(免訴) 판결을 받음으로써 작가와 작품이 유명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