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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의 즉위전 행적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1년 1월 24일(1820년 음력 12월 21일) ~ 1898년 2월 22일(음력 2월 2일)은 조선 후기의 왕족이자 정치가, 대한제국의 추존왕이다.
본명은 이하응(李昰應)이다.
부인은 여흥부대부인 민씨이다.
남연군(원래는 인평대군의 6대손이나 후에 양자 입적)과 군부인 민씨의 넷째 아들이며,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부친이다.
영향력이 있었던 풍양 조씨 세도 집안과 양주 조씨 고급 관료 집안, 안동 김씨 세도 집안에게 각기 서예(붓글씨)를 써서 바치고 서화(그림) 등을 그려다가 바쳐 보신책을 강구한 그는 1864년 1월 21일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국정을 이끌었으며, 안으로는 유교의 위민정치를 내세워 전제왕권의 재확립을 위한 정책을 과단성 있게 추진하였고 밖으로는 개항을 요구하는 서구 열강의 침략적 자세에 대하여 척왜강경정책으로 대응하였다.
또한 서원을 철폐하고 정리해 양반·기득권 토호들의 민폐와 노론의 일당 독재를 타도하고 남인과 북인을 채용하였으며, 동학과 천주교를 탄압, 박해하였다.
1864년 1월부터 1873년 11월까지 조선의 국정을 이끌었다.
직접 며느리 명성 황후를 간택하였으나, 도리어 명성황후에 의해 권좌에서 축출되었다.
1873년 11월 명성황후와 유학자 및 (신)안동 김씨, 풍양 조씨, 여흥 민씨 등에 의해 축출된 이후 명성 황후와 권력투쟁을 벌였다.
일본인과 결탁하여 며느리 명성황후의 암살을 기도한 것으로 전해진다.
유길준에 따르면 흥선대원군은 차라리 명성황후를 제거해 달라고 일본 공사관에 수시로 부탁했다고 한다.
명성황후와 민씨 일족 및 고종을 폐출하고 완흥군, 이재선 등을 조선 군주로 옹립하려는 쿠데타를 기도했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손자 영선군 이준용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여러 번 정변을 기도하였으나 모두 실패했다.
을미사변을 주도한 조선인 주요 협력자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통상 수교 거부 정책과 천주교도 대량 학살, 무리한 경복궁 중건, 일본에 명성황후의 제거를 청탁한 점 등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성 출신으로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해동거사(海東居士)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1907년 10월 1일 대원왕(大院王)으로 추봉되었고 헌의(獻懿)를 시호로 받아 흥선헌의대원왕(興宣獻懿大院王)이 되었다.
생애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한성부 북부 안국방 소안동계(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안동궁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 남연군은 본래 인조의 넷째 아들 인평대군의 6대손 진사 증 의정부영의정 이병원의 둘째 아들이었으나 후사가 없이 사망한 은신군의 양자로 입양되어 남연군의 작위를 받았다.
어머니 여흥민씨는 인현왕후의 큰아버지인 노봉 민정중의 4대손 선공감가감역 증 의정부우의정 민경혁의 딸이었다.
흥선헌의대원왕신도비명과 흥선대원군묘지명에 의하면 그가 태어나기 전 어머니 여흥군부인 여흥민씨의 꿈에 신선이 동자 하나를 데려와 그에게 주며 잘 기르라 부탁하는 꿈을 꾸고 그를 잉태했다 한다.
8세에 맏형 흥녕군 이창응의 사망에 이어 12세에 어머니 여흥군부인 여흥 민씨를 여의고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으나, 아버지 남연군으로부터 한학을 배웠고 인척인 인연으로 추사 김정희의 문하에 들어가 글과 그림을 수학하기도 했다.
후일 그가 난초나 매화, 대나무 등 사군자 그림, 특히 난초 그림으로 유명한 석파란 등을 그린 것은 모두 김정희에게서 배운 미술로 인한 것이었다.
17세 때에는 아버지 남연군을 여의었다.
소년 이하응은 삼년상을 마치고 풍수가들이 길지라 일컬은 충청남도 예산군 가야산 중턱의 석탑(石塔) 자리인 현재의 위치로 이장되었다.
일찍 고아가 되었으나 13세에 외가의 먼 일족인 여흥부대부인 민씨와 결혼하였다.
여흥부대부인은 흥선대원군의 외6대조 민정중의 동생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5대손 민치구의 딸이다.
여흥부대부인에게서는 딸 1명과 장남 완흥군 이재면, 차남 재황(왕으로 즉위)이 태어난다.
그밖에 소실 계성월에게서는 완은군 이재선과 서녀로 우봉 이씨 이윤용에게 출가한 딸 1명을 더 얻는다.
그밖에 기녀 출신으로 오래 그를 시중든 추선(1885년 사망)과 평민 출신으로 서씨 성을 가진 첩(1914년 1월 7일 사망)이 더 있었다.
1834년(순조 34년) 흥선부정(興宣副正)에 봉작되고 자신대부(資信大夫)의 품계를 받았다.
1835년 보신대부(保信大夫)로 승진, 1836년에는 동몽교관에 임명되었다.
1841년 (헌종 7년) 창의대부(彰義大夫)로 승진한 뒤 흥선정(興宣正)에 봉작되고, 흥선도정(興宣都正)을 거쳐 1843년(헌종 9년)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지고, 효현왕후(孝顯王后)의 국상 때 수릉관(守陵官)으로 참여하여 소의대부(昭義大夫)로 승진한 뒤 다시 중의대부(中義大夫)로 승진하였다.
1844년(헌종 10) 승헌대부(承憲大夫)와 숭헌대부(崇憲大夫)로 승진했다가 같은 해 다시 가덕대부(嘉德大夫)로 승진했다.
1845년 의덕대부(宜德大夫)로 승진했다가 같은 해 다시 흥록대부(興祿大夫)로 승진했다.
1846년 수릉)(綏陵)의 이장 때 수릉천장도감(緩陵遷葬都監)의 대존관(代尊官), 수빈관(守殯官)이 된 후 도감(都監)에 참여한 공로로 가자(加資)되었으며[7], 현록대부(顯祿大夫)가 되었다가 다시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임명되었다.
이후 비변사당상을 거쳐 1847년(헌종 13년) 청나라에 파견되는 동지사(冬至使)로 선발되었지만 가지 않았고, 같은 해 종친부 유사당상(有司堂上)이 되었다.
그해 청나라에 동지사가 파견될 때 주원(厨院) 제조 겸 전의서, 사포서, 전설서, 조지서 제조에 겸임 임명된 뒤 동지사의 수행원으로 베이징을 다녀왔다.
그해 다시 종친부 유사 당상(有司堂上), 오위도총부 도총관이 되었다.
1847년 종친부(宗親府)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직책인 유사당상(有司堂上)으로 재직할 때, 선파인(璿派人·전주 이씨 중에서 왕실에서 갈려 나온 파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신역 면제를 관장하는 등 종친부의 권한 확대를 추진하였다.
종친부의 권한확대를 위해 흥선군은 당시의 세도가인 안동 김씨 세력과 정치적 거래를 시도하였다.
종친부 유사당상 재직 중 그는 왕실의 족보 편찬을 종친부에서 간행할 수 있도록 추진하였다.
청년기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던 흥선군은 난과 그림을 그려 양반가에 매각하며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난을 잘 치기로 유명하였으나 석파란으로 알려진 난초화를 계속 그리자 그의 난초값은 하락했다.
일각에서는 그가 다른사람을 고용해 난을 그린 뒤 자신의 낙관을 찍는다는 소문도 유포되기도 했다.
심의면 등은 흥선군을 궁도령이라 부르며 조롱하였는데, 이 일로 고종 즉위 후 불이익이 가해졌다.
이때 그를 보필하던 인물은 김병학과 김병국 형제로 이들은 안동김씨이지만 대원군 집정 후 불이익을 면하게 되었다.
판소리 서편제의 대가인 판소리 달인 박유전도 흥선군과 가깝게 지냈다.
후일 박유전은 흥선군이 집정이 되자 특별히 무과에 급제하게 된다.
그러나 고종 친정 후 명성황후 일파의 보복을 피해 호남에 숨어 살았다.
그 뒤 1895년 흥선대원군이 다시 권력을 잡자 한양으로 올라왔다가 1910년 한일 합방 후 그는 나라 잃은 가객이 노래 부를 수 없다며 전라도 어느 땅에 칩거하다가 겨울에 굶어죽었다 한다.
이후 사복시 제조, 오위도총부 도총관 등을 지냈다.
1853년(철종 4년)에는 궁궐에 무상으로 출입하지 않는다 하여 칭찬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왕족들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밑에서 불우한 생활을 하였고, 청년기의 이하응은 세도정치하에서 그들의 주목을 피하기 위해, 고의로 시정의 무뢰한들과 어울려 난행을 일삼으며 생활했다.
투전에 가담하기도 했고 세도 가문의 잔칫집을 찾아다니며 걸식도 서슴지 않았다.
소설가 김동인은 《운현궁의 봄》에서 당시 흥선대원군의 모습에 대해 겉모습은 술에 취해서 사는 모습이지만, 실제로는 대장부로서의 기개가 있었다고 묘사했다.
그는 식은 전조각에다가 침을 뱉어 내던지면 그것을 얼른 주워 도포 자락에 닦아 크게 웃으며 게걸스럽게 먹어대는 모욕까지도 감수했다고 한다.
그러나 풍수지리를 굳게 믿어 아버지 남연군(南延君) 묘를 충남 예산으로 옮기고 때를 기다리기도 하였다.
그의 가난하고 빈궁한 생활에 안동김씨 세도가는 그를 멸시했고, 사영 김병기는 노골적으로 그를 무시하였다.
사영 김병기 외에도 안동김씨 집안의 문객으로 출입하던 심의면, 안동김씨 세도가문과 적당히 거리를 두던 문신 출신 천문학자 남병철은 대놓고 흥선군을 멸시했다.
이 중 심의면에게 앙심을 품은 흥선군은 1863년 음력 12월 집권하자마자 심의면의 벼슬을 해임해버린다.
윤효정에 의하면 그는 이용은에게 면박을 당하고는 오랫동안 그에게 앙심을 품었다 한다.
어느 대감 집의 연회에서 이용은을 만났다.
이용은은 큰 소리로 흥선군을 나무랐다.
이용은은 그에게 '종실의 군이라고 하는 사람은 능묘에 제사를 지내는 일에나 연고가 있을 것이고, 궁중에 조용히 머무르며 그 체면을 유지해야 할 것이오. 그런데 대감은 어째서 집에 머무는 날 없이 그리도 함부로 날뛰면서 돌아다니시오? 다시는 양반 재상 집에 출입하지 마시오."라 하였다.
호된 질책에 흥선군은 얼굴을 붉히며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자신을 욕한 이용은을 미워해 마음에 새겨두었다.
윤효정은 흥선군이 김병기에게 청탁을 했다 한다.
흥선군은 일부러 김병기를 찾아가 아들 이재면의 문과 합격을 청탁했는데, 김병기는 마음 속으로는 몰지각함과 비열함을 비웃으며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한다.
흥선군은 똑같이 김병기의 외조카 남병철에게도 똑같이 아들의 등과 합격을 청탁하니, 남병철은 몹시 분개했다.
왕실의 금지옥엽인데, 이렇게 초라해진 형편으로 아들의 등과를 청탁하니 이렇게 어리석을 데가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런데 박제형의 근세조선정감에는 흥선군을 대놓고 멸시하던 인물의 한 사람으로 남병철을 지목했다.
한때 김병기는 흥선군의 의도를 의심해서 왕의 자리를 제안했다.
그러나 흥선군은 장남의 과거 합격 자리를 달라고 천연덕스럽게 청탁했다.
흥선군의 집권 전 가난하고 불우한 처지였던 것은 김동인 등 여러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러나 반론도 있다. 그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파락호가 되어 찌그러진 갓을 쓰고, 시장터나 돌아다니며 민중과 어울려 살지는 않았다.
단지 인간관계가 넓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흥선군의 집은 뒤에 덕성여대가 들어선 곳 근처의 큰 기와집이었다.
따라서 그의 가계는 어느정도 부유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가 전 국민의 0.1% 안에 드는 부자였음을 증명한다는 시각 까지도 있다.
충청도 화양동의 만동묘에 갔을 때는 그를 따라온 사람들이 그를 부액(부축)하려 하자 화양동 서원의 한 유사가 그것을 말리며 나무라 하였다.
다른 안동김씨 인물들은 흥선군을 구박하거나 쫓아냈지만 김좌근은 쫓아내지 않고 귀찮아하거나 약간의 돈을 주어 내보냈다.
생계가 궁했던 흥선군은 매란국죽 등을 그려서 양반 사대부가와 중인가문, 역관 등에게 팔았는데, 중인과 역관들을 통해 석파란의 명성이 청나라와 일본에도 알려졌다.
한편 대원군은 이호준과도 교분을 쌓게 되었다.
이호준은 첩에게만 아들 이윤용이 있었고 정실부인에게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이완용을 양자로 맞이하였다.
흥선군은 이들 형제를 신임하여 이윤용에게 자신의 첩이 낳은 서녀를 시집보내 사위로 삼았다.
훗날 이완용·이윤용 형제는 친일파가 되는데, 그 빌미를 흥선군이 만들어준 셈이었다.
흥선군은 이호준을 통해 조성하와 그의 사촌동생 조영하와도 접촉하였는데, 조성하와 조영하는 이하전이 사사된 후 왕위계승감을 찾지 못하던 조대비에게 그를 소개하고, 흥선군은 그들을 통해 종친이라는 명분으로 조대비에게 접근하게 된다.
그는 숨은 능력을 감추기는커녕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며 살았다.
비록 실권이 없는 명예직이기는 하지만 그는 왕족에게 주는 관직을 계속 맡았다.
왕족이 맡는 관직 중에서 유일하게 실무가 있는 관청이 왕족들의 문제를 처리하는 종친부인데, 대원군은 1847년부터 계속해서 종친부의 유사당상을 지냈다.
철종이 언제 사망할까 불확실하므로 흥선군은 궁중의 환관과 궁녀를 포섭해서 정보를 알아냈고, 조대비에게 접근해서 자신의 아들을 양자로 주겠다고 약속하여 동맹을 형성했다.
사돈인 이호준을 통해 조성하, 조영하와도 가깝게 지냈다.
흥선군은 안동 김씨 가문에도 자신의 세력을 만들기도 했다.
안동 김씨 문중에 반감을 가졌으면서도 일부 안동 김씨 인사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까지 했다.
안동 김씨 문중에서 흥선군과 줄이 닿은 사람은 김병학과 김병국 집안이었다.
매천야록에 의하면 김병학은 자기 딸을 고종의 비로 삼기로 흥선군과 밀약을 맺었다고도 한다.
철종이 후사없이 앓게 되면서 후사 논의가 진행됐고, 그 중 김홍근은 흥선군을 추대하자는 주장도 했다.
흥선군이 어리석은 인물이라는 계산에서였으나, 그의 파락호 행실과 그의 나이 등 여러 가지 조건에 걸려 반대에 부딛쳐 묵살당하였다.
김병기는 그에게 야심이 있는가를 시험하려 하였으나, 그는 일부러 어리석음을 가장하여 그에게 장남 이재면의 관직을 청탁하기도 했다.
그러나 1886년(고종 23) 박제형이 쓴 근세조선정감(近世朝鮮政鑑)에 의하면 흥선군은 아들 이재면을 과거에 급제시키려고 자기 집 재물을 저당잡혀 일부러 잔치를 벌였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박제형에 의하면 "흥선군의 맏아들 이재면은 똑똑하지 못했다. 흥선군은 그 아들을 과거에 급제시키고자 했으나 꾀를 낼 수가 없었고 기회도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의 생일을 며칠 앞두고 부인 민씨(閔氏)와 작전을 꾸몄다. 그래서 비녀와 옷가지를 전당 잡혀 생일잔치를 차리되 기생과 악단까지 부르기로 했다"는 것이다.
김병기는 이하전 사사와 이세보의 유배 이후 흥선군이 신정왕후와 오랫동안 만났다는 것을 눈치채고 흥선군에게 왕위 계승권을 보장하겠다고 제안하였다.
김병기는 흥선군을 멸시하면서도 그를 의심했다.
그러나 흥선군은 끝까지 바보행세를 하며, 장남 이재면이 부족한데 관직이나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고의로 파락호 생활을 하며 천하장안으로 알려진 천희연, 하정일, 안필주, 장순규 등을 측근으로 삼아 가까이 했으며, 이상지, 이경하 등도 포섭하여 측근으로 삼았다.
하지만 그는 왕실의 족보 편찬 사업 등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흥선군만이 왕실 족보상 왕위 계승에 가장 근접한 인물은 아니었기에, 왕위를 계승하려면 능력을 보여야 했고, 정치적 작업도 해둘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철종 말년, 도정궁 이하전이 계속 탄핵당하다가 1862년 제주도에 위리안치된 뒤 사사당하고, 얼마 후 경평군 이승응(景平君 李昇應)도 탐학했다는 이유로 유배되었다.
이때 종실들은 죽음에서 면하지 못할까봐 전전긍긍했고, 흥선군은 더욱 몸조심을 했다.
철종이 병석에 눕자 누가 차기 대권을 잇느냐가 화제가 되었다.
김좌근과 김흥근은 철종이 병석에 눕자 만나서 비밀리에 숙의했다.
김좌근과 김흥근이 내린 결론은 "만일 흥선군이 대원군이라는 위치를 믿고 국정에 간섭해서 그 위세로 나라의 법을 변경하면 이 일을 감히 누가 막을 자가 있겠소? 그리 되면 나라는 불안한 상황 속에서 종묘사직에 위험이 미칠 것이다."라는 것이다.
윤효정은 흥선대원군의 섭정을 놓고, 그들의 예상대로 됐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합리적인 반대 이유는 묵살되었다.
윤효정은 이를 두고 김좌근과 김흥근 두 정승의 통찰력과 먼 훗날을 염려하는 마음이라 평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둘의 만남을 전해듣고 앙심을 품게 된다.
다른 이들은 흥선군이 어리석은 인물이며 그가 집권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흥선군에게는 아들들이 있었고, 그의 아들들은 그와 다른 사람이었다.
결국 김흥근은 차라리 흥선군을 왕으로 추대하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후사 결정권을 가지고 있던 조대비와 밀계(密計)가 있어 자신의 차남인 명복(이재황)을 익종의 양자로 삼아 익성군(翼成君)으로 봉하고, 익종의 양자 자격으로 즉위시킨 뒤 자신은 대원군(大院君)이 되어 정책 결정권을 부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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