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 샨티 샨티 옴
4장, 5, 업의 존재에 대한 증명을 따라
왕은 물었다.
『존자여, 그대를 불교인들은「지옥의 불은 자연의 불보다도 훨씬 더 강렬하다. 자연의 불 속에 던져진 조약돌은 하루동안 태워도 녹지 않지만, 큰 집채만한 바위도 지옥의 불 속에 들어가면 순식간에 녹아 버린다」고 말합니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습니다. 또 한편 그대들은「지옥에 태어난 생명체는 수십만 년 동안 지옥의 불 속에서 타더라도 녹아 없어지는 일이 없다」고 말합니다. 나는 그런 말도 믿지 않습니다.』
장로는 대답했다.
『대왕이여, 암상어와 암악어와 암거북과 암공작과 아비둘기들은 단단한 돌이나 자갈, 모래를 먹습니까.』
『존자여,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그 돌이나 자갈이나 모래는 뱃 속에 들어가면 녹아 버립니까.』
『그렇습니다. 녹아 버립니다.』
『그렇다면 뱃 속에 든 그들의 태아(胎兒)도 녹습니까.』
『어째서 녹지 않습니까.』
『존자여, 업의 제약(制約)에 의하여 녹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대왕이여, 마찬가지로 지옥에 태어나는 생명체는 수천 년 동안 지옥 속에 있어도 숙업의 제약에 의하여 녹지 않습니다. 지옥에 있는 생명체는 거기서 태어나 거기서 성장하고 또 거기서 죽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악업(惡業)이 소멸될 때까지 그는 죽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한 번 비유를 들어 주십시오.』
『대왕이여, 암사자와 암호랑이와 암표범과 암캐들은 단단한 뼈나 고기를 먹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들은 그런 것을 먹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것이 뱃속에 들어가서 녹아 버립니까.』
『그렇습니다. 녹아버립니다.』
『그들의 뱃속에 든 태아도 녹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째서 녹지 않습니다.』
『존자여, 숙업(宿業)의 제약에 의하여 녹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대왕이여, 마찬가지로 지옥에 태어난 생명체는 수천 년 동안 거기 있어도 숙업의 제약에 의하여 녹지 않습니다.』
『또 한 번 비유를 들어 주십시오.』
『대왕이여, 오나카인의 부녀자와 크샤트리야의 부녀자와 바라문의 부녀자와 궁성의 부녀자들은 단단한 과자와 고기를 먹습니까.』
『단단한 것들이 뱃속에 들어갔을 때 녹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녹습니다.』
『그러면 뱃속에 든 어린애도 녹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째서 녹지 않습니까.』
『존자여, 숙업의 제약에 의하여 녹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대왕이여, 마찬가지로 지옥에 있는 생명체는 수천 년 동안 태우더라도 숙업의 제약 때문에 녹지 않습니다. 만일 지옥에 태어나면 그들은 거기서 성장하고 거기서 죽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악업이 소멸되지 않는 한 그는 죽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존자여.』
(<밀린다팡하>
- (‘서재영의 불교 기초 교리 강좌’에서)
주님, 내가 주님을 부르니, 내게로 어서 와 주십시오. 주님께 부르짖는 내 음성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내 기도를 주님께 드리는 분향으로 받아 주시고, 손을 위로 들고서 드리는 기도는 저녁 제물로 받아 주십시오.
주님, 내 입술 언저리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 앞에는 문지기를 세워 주십시오.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지지 않게 해주십시오. 악한 일을 하는 자들과 어울려서, 악한 일을 하지 않게 도와주십시오. 그들의 진수성찬을 먹지 않게 해주십시오.
의인이 사랑의 매로 나를 쳐서, 나를 꾸짖게 해주시고 악인들에게 대접을 받는 일이 없게 해주십시오. 나는 언제나 그들의 악행을 고발하는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그들의 통치자들이 돌부리에 걸려서 넘어지면, 그제서야 백성은 내 말이 옳았음을 알고서, 내게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맷돌이 땅에 부딪쳐서 깨지듯이 그들의 해골이 부서져서, 스올 어귀에 흩어질 것입니다.
주 하나님, 내 눈이 주님을 우러러보며, 주님께로 내가 피하니, 내 영혼을 벌거벗겨서 내쫓지는 말아 주십시오.
내 원수들이 나를 잡으려고 쳐 놓은 덫에서 나를 지켜 주시고, 악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의 함정에서 나를 건져 주십시오.
악인들은, 자기가 친 덫에 걸려서 넘어지게 해주시고, 나만은 안전하게, 빠져 나가게 해주십시오.
-(<시편> 141편)
오늘 <밀린다팡하>에서 “지옥에 있는 생명체는 거기서 태어나 거기서 성장하고 또 거기서 죽습니다.”를 보자.
천국과 지옥이 같이 있는 현재의 삶을 만든 것은 지옥행과 천국행을 운영하기 위한 사전 과정이라는 말인가?
다음으로 [『그러면 뱃속에 든 어린애도 녹습니까.』『그렇지 않습니다.』『어째서 녹지 않습니까.』『존자여, 숙업의 제약에 의하여 녹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를 보자.
비유가 섬뜩하다. 그런데 신기하기는 하다.
오늘 시편에서 “주님, 내 입술 언저리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 앞에는 문지기를 세워 주십시오.”를 보자.
말을 잘해야 한다는 비유인 것 같은데 확 다가온다. 멋진 문장이다.
요즘 어떻게 해야 말을 잘 할 수 있는지, 열심히 준비한 내용은 어떻게 해야 잘 전달될 수 있는지, 잘 전달되는 내용은 또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많은 생각들이 밀려오고 있다.
현장에서 해설을 하거나 실내에서 강의를 할 때 나는 질의응답, 질의응답, 질의응답, 이런 식으로 많이 한다. 말을 길게 할 때도 이 두 가지가 병행해서 간다. 그런데 방송은 내가 질문을 받고, 거기에 대답을 해야 한다. 잘 모르는 질문을 받으면 버벅거린다. 이렇게 쓰고 보니 이제야 알겠다. 나는 지금까지 내 위주의 질의응답에만 익숙했다. 이제부터라도 모르는 질문에도 최선을 다해서 진정성 있게 응답을 하는 자세를 진지하게 가져야겠다.
<꽃의 제국>에 나오는 글이다.
[필자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코스타리카의 한 열대우림에서는 연중 여러 번 반복해서 피는 나무와 한 번만 피는 나무가 각기 약 30~40퍼센트를 차지한다. 나머지 나무는 1년 내내 피거나 몇 년에 한 번 꽃을 피운다. 또한 열대의 꽃은 보통 하루면 지고 말기 때문에 1년 내내 꽃피는 나무는 거의 매일 새로운 꽃을 몇 개씩 피운다. 다만, 매년 딱 한 번 피는 나무는 여러 번 피는 나무에 비해 오랫동안 꽃을 피운다. 아마도 1년에 한 번 피기 때문에 대신 꽃이 피는 기간을 늘리게 되었을 것이다.]
그저 몰라도 오묘한 세계로 보인다.
<길고 긴 나무의 삶>에 나오는 글이다.
[참나무의 힘은 한눈에 뚜렷이 알 수 있다. 평범한 들판으로 통하는 대문 옆에 꼿꼿하게 서 있는 참나무 한 그루를 우연히 마주치든, 푸릇푸릇한 너른 정원 곳곳에 흩어진 참나무 군락을 마주치든 참나무의 물리적 힘은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어떤 나무도 참나무처럼 차분하면서 세상과 하나 되지는 못한다. 하늘로 가지를 뻗어올리는 너도밤나무나 마로니에 시커모어와 달리 다 자란 참나무는 팔을 벌린 듯이 옆으로 퍼지며 울창하고 무성한 잎사귀로 거대한 반구를 창조한다. 작은 잔가지 끝마다 사랑스럽고, 고르지 않게 동그란 잎이 네다섯 개쯤 나오고 잔가지마다 더 작은 잔가지가 몇 개라도 나올 수 있으니 나무 한 그루 전체를 덮는 나뭇잎은 25만 개에도 이를 수 있다. 8월에 기온이 올라가면 참나무는 초여름 나방 애벌레 때문에 생긴 대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잎사귀를 한층 더 많이 걸친다.]
위 글에서 “어떤 나무도 참나무처럼 차분하면서 세상과 하나 되지는 못한다.”를 보자.
참나무가 차분하다는 표현이 무엇인지 참나무를 보면서 오래 생각해봐야겠다.
<나무처럼 생각하기>에 나오는 글이다.
[나무의 영향력은 심지어 진화하는 우리의 기억력을 넘어선다. 열악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학습 능력이 떨어진다. 자연환경에서 얻은 경험과 관련된 자극이 결핍되면 지적 자각이 더디게 발달한다. 과잉 행동이 증가하고 사회 적응에 어려움이 생기며 질병이 생기기도 한다. 그런데 숲이 우거진 곳에서 산책하면, 미국 심리학자들이 이름 붙인 자연결핍장애의 징후와는 정반대로, 아이들의 독서 능력이 향상된다. 근시가 생기지 않을뿐더러 주의력도 향상된다. 결론적으로 나무와 가깝게 지내는 아이들이 더 강한 사회적 소속감을 보여주었다. 또한 다른 아이들에 비해 덜 예민하고 덜 호전적이며 더 친절하다.]
옛날 사람들은 매일 나무와 함께 살았을 텐데. 그때는 전쟁이 더 많았는데. 종합적인 이해와 판단이 필요할 것 같다.
<생물 세계의 이해>에 나오는 글을 보자.
[여기서 본능이라는 행동을 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자각적이 아니라든가 무의식적이라고 한다면 우리들이 하고 있는 것 중에서도 적지 않을 줄 안다. 잠자고 있어도 벼룩이 물으면 가려워서 우리는 손으로 긁는다. 일어나 있어도 내장기관의 운동이라는 것이 일일이 의식되고 있지 않다. 이것도 처음에는 하나하나 의식되고 있었으나 점점 복잡한 세계에 우리가 살게 된 때문에, 말하자면 의식의 경제로서 일일이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그대로 지내게 하는 것도 하나의 해석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원래 우리들이 말하는 의식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러나 차차 의식이라는 것도 필요에 따라 발달되어 온 것이며 별로 필요치 않다고 보는 부분은 그대로 남겨진 것이라 생각이 든다. 따라서 하나 하나의 세포 현상이나 소회기관의 활동 등은 우리들에게 유전된 식물적 현상, 식물적 성질이라고 할 수가 있다.]
위 글에서 “의식의 경제로서 일일이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보자. 일일이 의식하지 않고 무심히 평온하게 일어난 듯 일어나지 않은 듯 사는 게 최고의 삶일 것이다. 그걸 위해 수행이라는 걸 하는데, 최고의 수행은 남을 돕는 거라고 하는데, 그러면 나는 잊혀지는데, 말은 그런데 내가 하기에는 어려울 것이다. 난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인지적 본능의 내면화를 위해 인식을 넓혀가는 행동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기적인 인간이라는 것이다.
<생명을 보는 마음>에 나오는 글을 보자.
[식물은 오래 산다. 움직이지도 못하는 식물이 움직이는 동물보다 오래 산다. 이 또한 아이러니다. 동물 중 가장 오래 사는 종은 그린란드상어로 400년 정도를 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린란드상어의 장수 비결은 낮은 체온이다. 변온동물인 상어는 수온이 낮은 곳에서 체온도 따라 낮아진다. 체온이 낮으면 체내의 물질대사 전반이 느려진다. 이 때문에 성장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고 그만큼 노화도 늦어 수명이 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최장수 동물 2위는 북극고래로 수명은 200년이 조금 넘는다. 북극고래의 장수 비결 역시 낮은 체온을 든다. 북극고래는 항온동물이지만 북극해에 서식하면서 체온이 낮아졌다고 한다. 북극고래 다음으로 수명이 긴 장수동물은 150년 이상 사는 코끼리거북이다. 무척추동물 중 가장 오래 사는 동물은 북미 대서양 연안의 대합류 조개로 500년 정도를 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식물은 어떤가? 올드하라 브리슬콘 소나무는 5000살이 넘는다. 정확히 5065살이다. 나이테로 센 나이다. 현재까지 나이가 밝혀진 나무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다, 얼마나 더 살지는 알 수 없다.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지 않은 시스템은 모두 버리고 아주 적고 제한된 영양분으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산 나무는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리의 느티나무로 1300살이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 문무왕이 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새천년을 앞둔 1999년 산림청이 지정한 밀레니엄 나무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나이가 많고 키가 큰 나무 하면 경기도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를 떠올린다. 키가 42m, 밑동 둘레 15m, 나이 1100살로 추정한다.
은행나무는 2억 년 전 쥐라기 공룡시대부터 지구에 뿌리 내리고 살아온 살아 있는 화석이다. 온갖 환경의 변화를 극복한 것과 더불어 은행나무는 대체로 수명이 길다. 은행나무가 수명이 긴 이유로는 지속적인 생장, 노화방지 시스템의 작동, 외부 스트레스에 대한 강력한 저항력 유지 등을 꼽는다. 동물의 경우 노화는 줄기세포의 활력이 떨어지는 형태로 나타난다. 식물에서 동물의 줄기세포에 해당하는 것이 분열조직이다. 은행나무도 나이가 들면서 분열조직의 세포분열 속도가 느려진다. 하지만 유전자를 분석한 결과 노화와 관련한 유전자의 발현은 늘어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세포분열의 속도만 느려질 뿐 은행나무는 사실상 늙지 않는다. 은행나무가 죽는 것은 노화가 축적돼서가 아니라 가뭄과 같은 자연적 이유와 사람에 의한 훼손 등의 인위적 이유 때문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또한 은행나무는 늙어도 기후변화를 비롯한 외부 스트레스에 대응하는 저항력이 떨어지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저항력 유지 정도를 가늠하는 이차 대사물질인 플라보노이드(flavonoid), 테르페노이드(terpenoid) 등의 합성능력이 끝까지 유지된다. 20살 된 청년 은행나무나 1000살의 나이 든 은행나무나 저항력 수준은 같다. 산다는 것만 생각할 때 식물은 어쩌면 동물보다 한 수 위에 있는지도 모른다.]
은행나무 스토리텔링으로 너무 좋아 적어둔다.
헤세의 <싯다르타>를 보자.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그는 물 속을 응시하였다. 그리고 거기에 비친 자기 얼굴에 침을 뱉어버렸다. 극도로 지친 상태에서 그는 아래로 똑바로 떨어져 물 속에 가라앉기 위하여 나무 줄기에 감고 있던 팔을 풀고 이리저리 약간 움직였다. 두 눈을 감은 채 그는 죽음을 향하여 떨어질 참이었다.
바로 그때, 그의 영혼의 후미진 곳에서, 지칠 대로 지친 삶의 과거로부터 어떤 소리가 경련하듯 부르르 떨며 울려왔다. 그것은 한 음절로 된 한 마디의 말이었는데, 그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혼잣말로 웅얼거리듯 그 말을 내뱉었다. 그것은 모든 바라문들이 기도를 시작하는 말이자 마치는 말로서, <완전한 것>이나 <완성>을 뜻하는 성스러운 <옴>이었다. 그리고 그 <옴>이라는 소리가 싯다르타의 귓전을 울리는 바로 그 순간, 깊이 잠들어 있던 그의 정신이 갑자기 눈을 뜨고 자신의 행위가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위 글에서 “ 눈을 감은 채 그는 죽음을 향하여 떨어질 참이었다.”를 보자.
이런 마음이 자주 들면 안 되겠지만, 자주 들기도 한다. 그것은 진짜 죽으려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온다고 생각하며 현재를 다시 살펴보려는 것이다. 그러면 새로운 생각들이 차오른다. 그러면 또 삶은 흘러간다.
오늘도 게송으로 마무리하자.
옴 샨티 샨티 옴
오랜만에 말해본다
옴 샨티 샨티 옴
요즘은 왜 하지 않을까?
내가 만든 나무교[我無敎]가 빈약하고 초라해서인가
교리를 만들 자신이 없어서인가
믿고 밀어나갈 만한 의미 부여가 퇴색해서인가
처음부터 황당하고 허무맹랑해서인가
다 해당될 것이다
그저 훌륭한 어르신들이 남겨 놓은 좋은 텍스트에 의지해
거기에 나의 약간 진전된 사유를 붙여
흘러가는 삶 잘 흘러가게 하자
그래도 오랜만에 해보니 좋다
옴 샨티 샨티 옴
가끔 해보자
옴 샨티 샨티 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