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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569
11월4일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연중 제31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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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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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njhCyUC68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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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나 혼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함께 구원받는 것이 참 하느님의 뜻입니다!>
먼지 자욱한 황량하고 험난한 이 세상, 끊이지 않는 고통과 악이 창궐하는 이 세상,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상을 살아가는 오늘 우리에게, 바오로 사도께서 건네시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이 참으로 눈물겹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십시오. 무슨 일이든 투덜거리거나 따지지 말고 하십시오. 그리하여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 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필리피서 2장 12절, 14~15절)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감동입니다. 명문장입니다. 동시에 오늘 우리들의 정곡을 콕콕 찌릅니다. 오늘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씀들입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십시오.”
한때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로 여기고 헛발질을 하던 바오로 사도, 그러나 크신 주님 자비에 힘입어, 무엇이 진리인지를 온몸으로 깨달은 바오로 사도였습니다.
이제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을 통한 구원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은총 체험 이후 바오로 사도의 가장 큰 관심은 자신에게 맡겨진 사람들 영혼의 구원이었습니다. 그냥, 적당히, 쉬엄쉬엄이 아닙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 각자의 구원을 위해 힘쓰라고 하십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 가운데 ‘너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란 표현을 눈여겨봐야겠습니다.
복수형입니다.
결국 바오로 사도는 나 자신 개인의 구원을 위해 전력투구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다시 말해서 함께! 공동체적인 구원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맛있는 음식은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 먹어야 그 맛이 더합니다. 좋은 경치 역시 혼자는 별 의미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봐야 풍광이 더욱 멋지고 아름답습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들 불붙는 지옥에서 부르짖고 있거나, 연옥벌을 받으며 쌩고생하고 있는데, 나만 떡 하니 천국에 와있으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결국 나 혼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함께 구원받는 것이 참 하느님의 뜻입니다.
“무슨 일이든 투덜거리거나 따지지 말고 하십시오.”
투덜거림, 불평불만이 일상인 우리의 가슴을 확 내리치는 강렬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불평불만의 원조는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영도자 모세의 인도 아래 노예살이하던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평불만의 전문가였습니다.
이집트에서 불러내신 주님께서 어련히 잘 인도해주실텐데, 일단 무사히 탈출했으니 마음 너그럽게 먹고 기다려면 될텐데, 조급증이 심한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 여기저기 불평불만이 터져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빨리 우리 눈앞에 펼쳐지지 않는가? 왜 집행부는 정확한 스케줄을 제시하지 않는가? 민족의 영도자라는 모세는 왜 저리 동작이 느린가? 왜 좀 더 맛있고 다양한 급식을 제공하지 않고, 줄창 맛대가리도 없는 만나와 메추라기만 먹도록 하는가? 왜 우리를 잘 지내고 있던 이집트에서 빼냈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불만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주님의 진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불평불만한다는 것, 투덜투덜거리는 것은 주님을 거스른다는 것, 주님을 불신한다는 것입니다. 불평불만은 주님께 불순명한다는 것입니다. 불평불만의 대가(大家)요 전문가들인 우리들입니다. 불평불만은 하느님을 욕되게 하는 행위인 동시에, 공동체를 파괴하고 분열시키는 행위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권고를 백번이고 천번이고 마음에 깊이 새겨야겠습니다.
“무슨 일이든 투덜거리거나 따지지 말고 하십시오. 그리하여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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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맛있는 사람, 맛없는 사람>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7WbMkTJNHq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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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혼인 잔치 비유’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처음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밭을 사서, 소를 사서, 결혼해서 등의 핑계를 대며 혼인 잔치 초대를 거부합니다. 결국, 이것은 자기 자신을 버리지 못한 데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고 하시며 당신을 따르려거든 모든 애정까지 포기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와 자매는 물론이요,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렇듯 예수님을 따르는 과정은 자기를 버리는 과정입니다. 만약 자기를 버리는 것과 예수님을 따르는 과정을 병행하지 못하면 우리는 탑을 세우려다가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이나, 혹은 싸움에 질 것이 뻔한데도 무작정 싸우러 나가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고 하시며 마무리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을 때, 처음엔 이것저것 아는 게 많아서 이 사람에겐 이 충고, 저 사람에겐 저 충고를 하며 살았습니다. 그때마다 그들의 표정은 “밥맛 없어!”라는 것이었습니다. 옳은 말을 해 주는데 왜 밥맛이 없을까요? 사실 그들은 살아있는 나를 만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죽은 나를 먹고 싶었던 것입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 누구에게도 좋은 양식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과정은 내가 죽어 맛있는 사람이 되는 과정입니다.
1992년 어느 봄날, 보스턴의 작은 교회에 많은 목사가 모였습니다. 보스턴의 청소년 살해가 부쩍 는 것에 대한 대책을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보스턴 시내에서 한 해 73명의 청소년이 살해당했는데, 이는 3년 전에 비하여 두 배가 훨씬 넘는 숫자입니다. 흑인 갱단이 서로 죽이는 보복의 살육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임은 별 소득이 없이 끝났습니다. 다만 갓 목사가 된 ‘제프리 브라운’과 몇몇은 밤에 돌아다니며 갱단과 대화를 해보는 방법을 택합니다. 수십 명의 목사로 출발했던 이 운동은 브라운 목사를 포함하여 단 네 명만 남게 되었습니다.
갱단은 야밤에 자신들에게 설교하려고 돌아다니는 목사들을 탐탁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꾸준함을 보며 그들도 대화를 시도하였습니다. 처음엔 그들에게 이런저런 좋은 말을 해 주려고 했지만, 목사들은 자신을 비우고 들어주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갱단은 자신들에게 설교하지 않는 이 목사들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브라운 목사는 그들의 말들을 들어보고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11월 네 번째 목요일인 추수감사절부터 신년 행사가 열리는 1월 1일까지는 평화를 유지하자는 제안이었습니다. 만약 “싸움 좀 그만하십시오!”라고 제안했다면 그들은 콧방귀도 안 뀌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제안은 그들의 귀에 솔깃했습니다.
“네, 추수감사절에서 1월 1일까지만 총질을 하지 않으면 되는 거죠?”
갱단은 서로 이 제안을 따랐고 총질하지 않고 사는 그 한 달의 기간이 얼마나 평화로운지 그들 스스로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싸움은 보복 때문에 일어나는데 한 달이라도 보복이 일어나지 않으니 살인은 최저치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사례는 사회심리학 분야에서 가장 많이 연구되는 사례 중 하나라고 합니다. 갱단과 비슷한 나이인 이십 대 중반인 한 흑인 목사가 갱단에게 설교하지 않고 그들의 말을 경청하며 그들이 원하는 제안을 함으로써 이뤄낸 성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 끝에 이렇게 결론을 내리십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하겠느냐? 땅에도 거름에도 쓸모가 없어 밖에 내던져 버린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자신을 비우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야 사람들에게 맛있는 소금이 되고 양식이 됨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같은 책에 이런 예도 있습니다. ‘윌리엄 유리’라는 협상 전문가가 2003년 지미 카터 대통령의 연락을 받고 베네수엘라 대통령 우고 차베스를 만나기 위해 떠났습니다. 당시 거리를 가득 메운 시위대가 차베스의 하야를 요구했고 당장 내전이라도 터질듯한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리가 차베스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은 매우 짧았습니다. 유리는 차베스를 만나는 그 짧은 시간에 어떤 제안을 해야 할지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잠깐 산책을 하였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그냥 들어주자!’라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대통령의 지시로 차베스를 설득하기 위해 간 것이지만 그에게 먼저 마음을 열어주려 한 것입니다. 차베스는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냈고 유리는 듣고 그냥 갈 기세로 잘만 들어주었습니다. 자신에게 이래라저래라 하기 위해 미국 대통령이 보낸 줄 알았던 차베스는 유리에게 마음을 열었습니다. 유리는 그때 작은 제안을 했고 차베스는 군중들의 의견도 수렴하겠다고 마음을 누그러뜨렸습니다. 그런 정책을 세우는 데는 불과 몇 분밖에 소요되지 않았습니다. [참조: 『자존감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에이미 커디, 알에이치케이]
욥이 원인 모를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그의 친구 세 명은 각자 자신이 아는 바대로 욥에게 충고를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욥에게는 그 친구들의 충고가 더 가슴 아팠습니다. 다 맞는 말이기는 했지만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와 가까운 사람이 다 아는 옳은 말만 할 때 더 마음이 아플 수 있습니다. 그 옳은 말은 상대를 위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함일 때가 많습니다. 진리를 배우는 것보다 자신을 버리는 것이 우선입니다. 자신을 버리면 맛있는 소금, 맛있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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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14,25-33 :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26절) 이 말씀은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모순처럼 들릴 것이다. 주님께서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고 하신다.
‘나보다 더’라는 말을 덧붙이신 것은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당신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라 하셨다.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때, 우리는 우리 이웃도, 가족도 참으로 잘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이렇게 하느님을 우리 삶의 첫 자리에 모셔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주님께서는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27절)고 하시면서 어떤 마음 자세로 따라야 하는지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마지막 단계는 십자가라는 것이다. 박해 때에는 그분을 따르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십자가였고, 평화를 누리는 이 시대에는 하느님의 뜻에 반대되는 자신의 뜻을 철저하게 죽이는 것이 십자가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십자가를 잘 질 수 있도록 주님께서는 탑과 전쟁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첫째로 탑을 세우려는 사람은 먼저 그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계산하는 것과 같다. 완성하지 못하면 비웃음을 당한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로 결심한 사람도 우선 충분한 열성을 쌓아 두어야 한다. “얘야, 주님을 섬기러 나아갈 때 너 자신을 시련에 대비시켜라.”(집회 2,1) 이런 다짐이 없다면 어떻게 목적지에 닿겠는가?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31절) 철저하게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에페 6,12) 여기에 육정, 정욕, 재물욕 등도 우리가 싸워야 할 적이다.
이제 하느님의 자녀로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큰 뜻을 품었으면 결실을 보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돌 하나로는 탑을 완성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계명 하나 지킨다고 온전한 성숙을 일룰 수 없다. 기초를 놓고, “그 기초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집”(1코린 3,12)을 지어야 한다. 계명을 지키며 사는 것은 금이나 은보다 소중하다. 시편에 “저는 당신 계명을 금보다 순금보다 더 사랑합니다.”(시편 119,127)라고 하신다.
이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하늘의 시민으로서 살아가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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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교무부처장) 신부님]
공관 복음에서 제자가 되는 것을 말할 때, 공통적인 것은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진다는 것은 우선 무엇이 나의 십자가인지 고민하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십자가를 짊어지고 당신 뒤를 따르기를 요구하십니다. 어쩌면 우리는 나의 십자가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고, 또 쉽지 않지만 그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따르는 모습 안에서 제자로서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두 가지 예가 들어 있습니다. 탑을 세우는 사람은 공사를 마칠 수 있는지 계산해 봅니다. 탑을 완성하지 못한다면 시작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전투에 나서는 임금은 상대방의 전력을 헤아려 싸울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아무런 승산이 없다면 화해를 청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이 예시들은 제자가 되려는 이들에게 식별이 필요하다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탑을 세우는 사람이나 전투에 나서는 임금처럼,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루카 복음은 그것을 “자기 소유를 다 버리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이렇게 ‘내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것’을 지는, ‘나’에 연연하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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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버림과 따름>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
이 말씀은, 실제로 가족을 미워하라는 뜻도 아니고, 가족을 버리라는 뜻도 아닙니다. (신앙인에게 가족은 가장 중요한 영적 동반자이고, 가장 먼저 사랑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나에게 오면서” 라는 말은, “내가 주는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얻기를 바라면서”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얻는 것을 방해하는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라는 말씀도 바로 그 집착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누구든지’ 라는 말은, 아무도 이 가르침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필리 3,7-8) ‘나에게 이롭던 것들’은, 세속의 기준으로 볼 때에 출세와 성공에 도움이 되는 것들입니다. ‘해로운 것’은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얻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을 가리킵니다.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과 구원만이 추구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것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모든 것을 잃었다는 말은, 모든 것을 버렸다는 뜻입니다.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긴다는 말은,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얻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은, 가지고 있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는, 즉 버려야 할 쓰레기일 뿐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일이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이 보물처럼 아끼는 것들을 신앙인들이 쓰레기처럼 버리는 것을 보면, 신앙인들이 자기들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래서 신앙인들을 미워하고 박해합니다.(요한 15,19) 그런 어려움들을 참고 견디는 것도 십자가입니다. 만일에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굴복한다면, 예수님의 뒤를 따라갈 수 없습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루카 14,28-30)
이 말씀은, “끝까지 갈 자신이 없다면 시작도 하지 마라.”라는 뜻이 아니라, “끝까지 갈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하여라.”라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그 안으로 들어가야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만일에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가다가 어떤 이유로 중간에 멈춘다면, 그래서 그 나라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 남아 있게 된다면, 그것은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 것이고, 그러면 ‘멸망’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근처까지 갔더라도, 그 나라 입구의 바로 앞까지 갔더라도 들어가지 못하면, 또는 들어가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사는 것이 아니면 죽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냉담을 하거나 다른 종교로 넘어간 이들이, “나도 전에는 성당에 다녔었는데...”라는 말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전에 다닌 적이 있다는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입니다. 지금 신앙생활을 하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회개’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에 회개한 적이 있었다는 말은 하나마나한 말입니다. ‘회개하는 삶’은 항상 ‘바로 지금’ 해야 하는 일입니다.)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 맞설 수 없겠으면, 그 임금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평화 협정을 청할 것이다.”(루카 14,31-32)
만물의 주님이신 하느님께 맞서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죄입니다. ‘코헬렛’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젊음의 날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불행의 날들이 닥치기 전에.”(코헬 12,1) “먼지는 전에 있던 흙으로 되돌아가고, 목숨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로 되돌아간다.”(코헬 12,7)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라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면서 무릎을 꿇는 것은, 패배도 굴복도 항복도 아닙니다. 죽어서 소멸될 수밖에 없는 먼지 같은 피조물의 운명을 극복하는 승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모든 사람’이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얻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그 뜻은 내가 응답하고 노력해야 이루어집니다.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33)
자기 소유를 다 버린다는 말은,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얻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을 모두 버린다는 뜻입니다. 그게 내 마음속과 머릿속에 있는 것이라면 끊어내야 할 것입니다. 욕심, 이기심, 자존심, 명예욕 같은 것들도 모두 버려야 합니다. “너무 어렵다.” 라고 불평할 사람도 있을 텐데, 불평만 하지 말고, 도와달라고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또 노력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되는 일이라면, 그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일입니다.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하려고만 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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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소국장으로 있을 때입니다. 예비 신학생들 중에 교구장 추천으로 입학하는 학생들이 2명 있습니다. 나이가 많지만 사제가 되기에 합당하다고 생각되는 경우, 성적은 조금 부족하지만 사제가 되기에 합당하다고 생각되는 경우 추천을 하였습니다. 대부분은 신학교에서 받아주지만 선발의 권한은 전적으로 학교에 있었습니다. 본당 신부로 있을 때입니다. 가톨릭 대학교에 입학하려는 본당 학생들 중에 추천서를 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부모님이 신앙생활에 충실한 경우, 학생이 본당 주일학교에 열심히 나온 경우에 추천서를 써 주곤 하였습니다. 추천서를 써 주지만 역시 학생의 선발권은 전적으로 학교에 있었습니다. 교구에 있을 때입니다. 직원을 뽑는 경우 본당 신부님의 추천서를 받습니다. 같은 추천서가 있어도 직원의 선발은 전적으로 교구의 부서에서 하였습니다. 추천서는 선발의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까지는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대상자의 실력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추천서가 아니라, 선발하는 기관의 의지였습니다.
세상의 일에는 분명 ‘아빠 찬스, 엄마 찬스, 배우자 찬스’가 있습니다. 언론에서도 그런 표현을 쓰곤 합니다. 생물학적으로 자녀들은 부모님의 성격을 닮을 수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자녀들은 부모님의 영향을 받습니다. 배우자의 능력, 성격은 결혼 생활에 큰 영향을 줍니다. 저는 어머님의 성격을 많이 닮았습니다. 아버님의 체질은 똑같이 닮았습니다. 아버님은 지혜롭고 강한 성격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유순한 성격이었습니다. 주도하기보다는 따라가는 편이었습니다. 아버님은 혈압이 높았고, 치아가 좋지 않았고, 머리카락일 일직 하얗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혈압도 정상이었고, 치아가 좋았고, 머리카락도 검었습니다. 예전에는 아버님의 성격과 어머님의 체질을 닮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저의 성격과 체질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부드러운 성격이 사목에 도움이 될 때가 많았습니다. 적당한 운동과 습관으로 건강을 챙기고 있습니다. 보좌 신부 때 7분의 본당 신부님을 모셨습니다. 어떤 분은 엄격함으로, 어떤 분은 관대함으로, 어떤 분은 성실함으로, 어떤 분은 기도로, 어떤 분은 말씀으로 제게 사제의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3분은 하느님 품으로 가셨고, 2분은 은퇴하여서 원로사목자가 되셨고, 2분은 열정적으로 사목하고 계십니다. 중요한 것은 상황을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시련과 고통은 디딤돌로 생각하면 좋습니다. 행운과 축복은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면 좋습니다.
신앙 안에서 하느님과 만나는 일에는 추천서와 찬스는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성별, 나이, 피부색, 학연, 지연과 상관없이 하느님 앞에 똑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그대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나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충실하게 질 수 있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소유보다는 존재의 삶을 살 수 있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주어진 현실에 지나치게 비관할 필요도 없습니다. 지나치게 교만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주님의 제자가 되는 길을 말하고 있습니다.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니십시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십시오.” 신앙은 은총을 받는 것이지만, 신앙은 받은 은총을 이웃들에게 나누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실천입니다. 신앙은 나와 나의 가족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우리 모두는 한 형제요 자매라는 연대의식을 키워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의 십자가는 타인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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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나인 길이 여럿으로 보이는 까닭>
루카 14,25-33 (버림과 따름)
그때에 많은 군중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돌아서서 이르셨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 맞설 수 없겠으면, 그 임금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평화 협정을 청할 것이다.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하나인 길이 여럿으로 보이는 까닭>
길은 하나인데
어찌 걷는 사람만큼
길은 여럿으로 보일까
한 걸음 한 걸음
길에 스미어
길과 하나 되는 이
길에 묻혀 보이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자신을 새기며
길을 어지럽히는 이
또렷하기 때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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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주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것들>
+찬미예수님
강의를 나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 같습니다.처음 강의를 맡게 되었을 때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과목들이 점차 늘어나게 되니 사실은 조금 힘에 부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저는 현재 신학교에서 세 과목을 가르치고 있는데 당연히 저마다 주제가 확연이 다른 각각의 과목들입니다. 미리 가르칠 주제를 검토해야 하고 혹시라도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항상 검토해야 합니다.
나아가 학생들이 잘 이해하고 현실에 잘 대입하여 숙고할 수 있도록 흥미를 유발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자칫 윤리라는 과목은 현실과 동떨어진 과목, 혹은 타인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도구로 여겨지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에 더해 또 다른 걱정이 있으니 다름 아닌 우리 성당입니다. 나도 모르게 강의 준비에 몰두하다 보면 아이들과 신자 분들께 소홀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본의 아니게 정작 중요한 일을 잊어버리고 있지는 않은지 신경 쓰려 하지만 시간은 언제나 한정되어 있기에 혼란스러울 때도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저의 개인적인 시간을 통제하게 됩니다. 몇 가지 취미들을 절제하고 개인적인 약속들도 줄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사실 매우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집니다. 부족하게나마 맡은 바 책임을 다 하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이런 행위는 일종의 투자라는 생각도 듭니다. 사실 우리가 무언가를 하고자 한다면 희생은 반드시 요구됩니다. 운동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서는 힘겨운 훈련이 요구되고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때론 잠도 줄여야 합니다. 악기를 잘 연주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연습 시간이 필수적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은 이러한 희생과 대가의 집합체가 아닌가 싶습니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는 어쨌든 나의 시간을 내어주어야 합니다. 나에게 가치 있는 물건을 사기 위해서는 그것을 구입하기 위해 어디론가 이동해야 합니다. 인터넷으로 무언가를 주문한다고 하더라도 다른 물건과 가격을 검토하는 희생을 치러야 하니 우리는 언제나 무언가에 투자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투자와 희생을 우리가 기꺼이 감수하는 이유는 대부분 그에 응당한 대가 혹은 그보다 더한 이익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가 저의 취미생활에 시간을 쏟는다면 학생들에게 더 좋은 강의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현재의 저의 강의가 좋은지 나쁜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그 질이 더 떨어질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기도 생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미사에 모여 함께 기도드리고 있는 것은 우리가 들이는 시간보다 훨씬 더 큰 주님의 사랑과 은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날씨도 춥고 조금 더 잘 수 있음에도 새벽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하느님께 기도드리고 그 안에 머무르는 것이 훨씬 더 소중하고 의미있는 일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예수님께 많은 무리의 사람들과 함께 걸어가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가고 있는 길이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함께 걷던 제자들과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의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행하고 계신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결국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참된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세상의 권세와 영광이 아닌 자기 목숨까지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다 큰 영광을 위하여 다른 것을 희생해야 하듯 구원 받기 위해서,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응당 그에 합당한 대가가 필요합니다. 그 구원이 영원한 것이라면,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의 은총이라면 사실 우리는 무엇이든 내어드릴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충분히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을 용서하는 일의 대가가 영원한 생명이고 무한한 은총이라면 사실 몇 번이라도 타인을 용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용서를 위한 개인의 노력은 감히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어떠한 노력과 희생 없이 주님의 사랑만을 갈구합니다. 그러다보니 사소한 어려움들은 피하고 싶고 남을 용서할 만한 마음의 여유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좋은 성적을 바라는 어리석은 학생과도 같은 자세입니다. 어떠한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값비싼 물건을 원하는 도둑과도 같은 마음, 먹고 싶고 마시고 싶은 것을 마음껏 취하며 건강한 몸을 원하는 미련한 마음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 앞에서 우리는 스스로 질문을 던져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위해 우리는 어떠한 희생을 하고 있습니까? 영원한 사랑과 은총을 갈구하며 정작 자신은 생색을 내고 있지는 않은지요. 어떠한 노력도 없이 그저 청하고만 있지는 않는지요.
혹시라도 여전히 아까우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독서의 바오로 사도의 권고를 반드시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니십시오. 그러면 내가 헛되이 달음질하거나 헛되이 애쓴 것이 되지 않아,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그를 몇 배의 은혜로 갚아주실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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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렛선교수도회 김대열 프란치스코사베리오 신부님]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가끔 젊은 친구들이 사랑 문제로 상담을 청하는 경우가 있다. 그 중,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을 부모들이 반대를 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상담 내용도 제법 많다.
부모들이 반대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상대의 경제적 능력, 학벌, 자라온 환경, 가족사항, 연령 등등 그 가지 수가 헤아릴 수 없다. 늘 자기 자식이 아깝기 마련인가 보다. 이에 대한 생각은 나중에 다룰 기회가 주어지리라 본다.
상담을 청하는 젊은이에게 일단 몇 가지 질문을 던진다.
“그 사람을 정말로 사랑하는가?”
“그 사랑의 결과가 어떻다 하더라도 그 사랑에 책임을 지고자 하는 결심이 섰는가?”
보통 이러한 질문에 답을 주저하기보다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또 질문을 던진다.
“부모님을 사랑하는가?”
역시 그렇다고 답한다. 그러면 나의 답이 이어진다.
“부모는 자식의 행복을 바란다. 그저 다 퍼주고 싶은 것이 부모다. 그러기에 자식에 대한 욕심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부모의 반대가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그리고 너의 선택이 옳을 수도 있고, 너의 예상이 빗나갈 확률도 있다.
중요한 것은 부모는 너의 행복을 원한다는 것이다. 행복할 자신이 있다면 밀고 나가라. 아니, 그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끝까지 선택한 사랑에 책임을 지고 행복하게 살려 노력할 자신이 있다면 결혼을 해라.
부모에 대한 진정한 효도는 자식이 행복해지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마라. 당장은 부모에게 상처나 배신감을 줄 수 있다. 하지만 너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면 부모 역시 행복해진다.”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돌아간 선남선녀들이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는 알 수 없다.
축복 속에 결혼을 한 이들도, 그렇지 못한 결혼을 한 이들도 성공과 실패의 가능성은 똑같이 열려있다. 그만큼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만나 함께 하나가 된다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둘 사이에 넘기 힘든 난관에 부딪히는 상황이 오더라도, 넘어설 수 있는 유일한 힘은 두 사람 각자가 옳음에 의지하려는 마음이다.
평생을 함께 할 사람을 선택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것이 바로 삶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람을 선택함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기준은 사랑이고 그 사랑은 진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으로 시작해도 사랑으로 끝을 내기 힘든 것이 한계 많은 우리네 사랑살이다. 하물며 사랑으로 맺어지지 않는 부부의 연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오늘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 결혼 이야기를 예로 들어봤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여기서 “미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은 진짜 사랑을 하라는 말씀이다. 당신께서 맺어주신 가장 큰 인연을 버려야 한다는 무정한 하느님이 아니시다.
거짓이 아닌 진실을 선택하는 것이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길이고, 사랑하는 가족이 행복해지는 길임을 기억해야 한다.
욕망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해 많은 죄를 지어온 세상이다. 사랑은 제대로 해야 사랑이다. 서로가 아름답게 살 수 있고, 그래서 행복할 수 있다면 서로에게 행복을 안겨주는 것이라는 진실을 기억하자. 부모든, 자식이든 행복한 모습을 보일 수 있다면 서로에게 행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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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인생은 끊임없는 선택과 결단, 후회의 연속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결정 장애를 겪는 이유는, 어떤 선택이 후회 없는 선택일지 알 수 없거나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십시오.” 내가 세상에서 원하는 것을 얻느냐 잃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내 인생을 통째로 책임져야 하는 순간을 기억하고 살라는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하느님의 구원을 얻는 데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은 나의 무능과 나약함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의 새로운 회심과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거나, 때로 나를 너무 잘 알아서 미심쩍어 하는 가족과 같은, 가까운 사람들의 편견과 오해가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차라리 가족이 아니라면 무시하거나 신경 쓰지 않고 살아도 괜찮지만, 늘 마주해야 하고, 함께 같은 공간에 살면서 서로의 약점을 뻔히 알고 있는 가족은 내게 십자가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나 버릴 수 없는 인연이 있고, 던져 버리고 싶은 상황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끌어안고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숙명과 같은 인연과 인생의 십자가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바오로 사도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투덜거리거나 따지지 말고 하십시오.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니십시오. 나와 함께 기뻐하십시오.”
때로는 이것이 인생의 정답이라는 것을 느낄 때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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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염철호 요한 신부님]
바오로 사도는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이미 예수님께서도 단언하신 바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십니다.
당신을 따르려면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라고 가르치시는 예수님께서 무엇을 미워하라고 가르치시다니 다소 의아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자기 목숨을 미워하라는 가르침이 아니라 당신을 그 무엇보다도 더 사랑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마태오는 오해를 살 만한 표현을 조금 바꾸어, 가족들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에 합당한 자격이 없다고 표현합니다
(10,37-39 참조).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철저히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뒤 예수님께서는 탑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탑을 세우려고 할 때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계산해 보아야 하듯, 당신을 따르려면 그 경비를 철저히 계산해야 하는데, 당신을 따르는 데 필요한 경비는 자기 자신까지 철저히 버리는 것임을 강조하십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이만 명을 거느린 임금을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헤아려 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만약 맞설 수 없겠으면, 임금이 아직 멀리 있을 때 사신을 보내어 평화 협정을 청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는 스스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도, 그분의 마음에 들 수도 없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호의가 필요하기에 먼저 우리 부족함을 고백하며 하느님과 화해를 청해야 합니다.
이렇게 보니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는 길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 호의에 기대며 자신을 철저히 내어놓는 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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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미국의 26대 대통령이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는 시력이 좋지 않아서 늘 2개의 안경을 들고 다녀야 했다고 합니다. 근시와 원시 안경을 따로 강철 안경집에 담아서 들고 다녔지요. 이를 좋아했을까요? 당연히 싫었을 것입니다. 너무나 무겁고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처럼 안경이 가볍지도 않았을 테고, 시력교정 수술 같은 것도 없었으니 그는 늘 불평이 많았을 것입니다. 루스벨트 대통령도 처음에는 이 안경을 너무나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계기를 통해서 무거운 안경과 강철 안경집을 정말로 애지중지할 정도로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밀워키시에 연설할 때, 한 사내가 그를 향해 총을 쐈습니다. 가슴에 정확히 총을 맞았지요. 하지만 루스벨트는 멀쩡했습니다.
잠시 놀래서 당황스러워했지만, 벌떡 그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강철 안경집에 총알이 맞아 튕겨 나갔기 때문입니다. 평소 불편해했던 강철 안경집이 그를 보호해준 것이었습니다. 그의 생명의 은인이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통과 시련을 떠올려 보십시오. 어쩌면 이 강철 안경집과 같은 것이 아닐까요? 고통과 시련은 불편하지만, 좀 더 멀리 보면 더 유익했을 때가 더 많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고통과 시련을 무조건 거부하기보다는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나를 진정으로 살리는 ‘강철 안경집’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대단한 역설적인 내용입니다.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도 받아들이기 힘들지요. 그런데 이번에는 더 이해하기 힘든 말씀을 하십니다.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라 말할 수 있는 가족을 미워할 뿐 아니라,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라는 것입니다.
원수는 반대로 사랑하라고 하고, 평생 사랑해야 할 자신과 가족은 미워하라는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가 있을까요? 이는 자신과 가족을 사랑해서는 안 되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영원한 생명을 얻는데 자기 자신과 가족이 장애가 된다면 과감하게 미워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을 따라오는 제자가 되라고 명령하십니다.
십자가, 분명히 세상의 관점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 자체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가 앞서 루스벨트의 ‘강철 안경집’처럼 생명을 살리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불굴의 의지와 흔들리지 않는 열성이 있어야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필리 2,17-1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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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함>
살다 보면 우울함이 찾아옵니다. 특히 실패를 경험한 뒤, 애인과의 이별 뒤, 사람들의 무관심을 체험한 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경험한 뒤… 등입니다.
이 우울함이 찾아오는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는 새로움을 경험할 때입니다. 성공이라는 익숙함에서 벗어났을 때, 사랑하는 이와의 만남이라는 익숙함에서 벗어났을 때,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을 더는 만날 수 없을 때……. 저 역시 지난 4월, 어머니의 죽음 이후 우울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냥 눈물이 나고 우울한 마음이 가슴 한편을 차지하더군요. 더군다나 당시 코로나바이러스 확진으로 인해 미사도 신자들과 함께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새로운 일이 제게 주어졌습니다. 성지에 봉안당을 시작하면서 바쁘게 새로운 일을 맡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머니 잃은 우울함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우울함 그 자체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새로운 일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우울의 의미를 찾고, 그 의미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도 느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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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을 사랑하고 따르는 제자들>
-예수님 공부, 예수님 살기, 예수님 닮기-
오늘은 16세기 만46세로 선종한 이탈리아 출신,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입니다. 주교님은 하느님의 백성들을 섬기는 데 전적으로 온힘을 다한 참으로 이상적 목자였습니다. 그대로 예수님 공부, 예수님 살기, 예수님 닮기의 모범을 보여준 예수님을 사랑했던 제자이자 참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어제 코이노니아 자매회 월례 모임에는 여섯분의 자매들이 참석했습니다.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 공부, 예수님 살기, 예수님 닮기에 전념, 정진하는 아름다운 분들이라 미사후 사진을 찍으며 나눈 덕담입니다.
“성호경후에 찍은 성화같은 사진입니다. 이제 모두 성녀가 되었으니 각자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제자답게. 성녀답게 사십시오.”
어제 한겨레 신문의 한국의 대표적인 성서신학자 정양모 신부(1935-)의 인터뷰 기사가 감동적이었습니다. 예전 서강대에서 3년간 강의들을 때 신부님의 예리하게 빛났던 형형한 눈빛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2001년 성공회대에서 은퇴한 정양모 신부는 이미 타계한 유명한 사상가 신영복 선생의 결혼식을 주례했던 분이기도 합니다.
“내가 나이가 많아요. 내년이면 우리 나이로 여든 일곱입니다. 살아있는 동안 다 마쳐야겠다고 생각해 애를 써 결판을 냈어요. 다석 유영모 선생이 남긴 유일한 저서인 ‘다석일지’ 번역을 다 끝내고 원고를 출판사에 넘겼어요. 책은 빨라야 1년뒤에 나올 겁니다. 번역 원고가 200자 원고지 만장이 넘어요.”
참고로 다석 유영모 선생은 함석헌의 스승으로 기독교 사상을 동양의 유불선과 하나로 사유한 20세기 한국의 대표적 사상가로 노벨상을 받은 타고르 같은 위대한 종교 시인이기도 합니다. 86세 노령에도 그 업적이 참 대단한 ‘영원한 현역’의 예수님의 제자, 그리스도인 정양모 신부의 이어지는 기사내용입니다.
“사도행전 11장26절을 보면 우리 신앙의 선조들을 일컬어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죠. 그리스도인의 이런 정체성을 확립하려면 예수 공부와 예수 닮기가 가장 중요해요. 정교회나 가톨릭, 개신교 대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그리스도인들이 이름값을 못해요.”
문득 생각나는 박기호 신부의 산위의 마을 예수 살이 공동체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사랑하고 따르는 제자들은 1.예수님 공부, 2.예수님 살기, 3.예수님 닮기, 셋이 필수 전제 조건임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께 갑니다. 그러니 예수님 공부는 하느님 공부요, 예수님 살기는 하느님 살기요 예수님 닮기는 하느님 닮기가 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이를 명쾌하게 밝혀 줍니다. 예수님 친히 당신의 제자가 되기 위한 길을 제시해 줍니다.
첫째,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말그대로 친지나 자기를 미워하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람 집착은 물론 자기 집착에서 벗어나야 예수님의 참제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공부는 예수님 사랑하기 공부임을 깨닫습니다. 분도 성인도 ‘아무것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더 낫게 여기지 말라’ 하셨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대자유인이 되어 무엇에도 걸림이 없는 이웃과 자기에 대한 참사랑, 즉 생명을 주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깨끗한 사랑, 아가페 사랑도 가능할 것입니다.
둘째,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제자가 될 수 없다.”
예수님 살기는 바로 내 책임의 십자가, 내 운명의 십자가, 내 구원의 십자가를 끝까지 지고 주님을 따르며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제몫을 다하는 것이겠습니다. 남과 비교할 것도 남을 부러워할 것도 없는 자기만의 고유한 십자가입니다.
이 또한 주님을 사랑하듯 내 십자가를 사랑할 때 주님의 은총으로 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예수님 살기도 가능하겠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할 때 자발적 기쁨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항구히, 충실히 따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가 예수님을 진짜 사랑하는지는 제 십자가를 지는 모습을 통해서 그대로 검증됩니다.
이어지는 탑의 비유와 전쟁의 비유는 주님을 끝까지 따를 수 있을지 깊이 성찰하고 분별해야 함을 가르칩니다. 예수님은 절대 무리하게 제 십자가를 지라하지 않습니다. 남과 경쟁하듯 제 십자가를 질 것이 아니라 분별의 지혜를 발휘하여 제 분수에 맞게 제 십자가를 지면 됩니다. 하느님은 등수를 보지 않습니다. 도중하차 하지 말고 제 십자가를 지고 제 페이스대로 끝까지 완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셋째,“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말그대로 다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소유로부터 자유로워져 존재를 사는 대자유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 또한 주님 사랑의 열매입니다. 주님을 사랑할수록 탐욕에서 벗어나 자기를 비움으로 재물에 집착함이 없이 초연한 마음, 무소유의 자유로운 정신으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 좋은 살아있는 최고의 보물, 사랑하는 주님을 모셨기에 버림과 비움, 따름은 저절로 뒤따르게 될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 닮기에 결정적 요소가 자기 떠남, 자기 버림, 자기 비움임을 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닮는 예닮의 여정중 부단히 ‘자기 모음에서 자기 떠남’으로, ‘자기 쌓기에서 자기 버림’으로, ‘자기 채움에서 자기 비움’으로 전환되야 함을 봅니다.
예수님을 참으로 사랑하여 평생 ‘주님의 학인’이 되어 예수님 공부에, 평생 ‘주님의 전사’가 되어 예수님 살기에, 평생 ‘주님의 형제’가 되어 예수님 닮기에 정진하는 자가 예수님의 참 제자입니다. 제1독서 필립비서에서 바오로가 고맙게도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는 구체적 처방을 가르쳐 줍니다. 그대로 예수님의 참 제자, 바오로의 삶을 반영합니다.
1.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십시오.
2..무슨 일이든 투덜거리거나 따지지 말고 하십시오.
3.비뚤어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
4.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니십시오.
5.순교적 봉헌의 삶중에도 기뻐하십시오. 나와 함께 기뻐하십시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의 참제자가 되어 한결같이 당신을 사랑하여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부단히 자기를 버리고 비우며 자발적 기쁨으로 당신을 따르게 하십니다. 다음 아름다운 화답송 시편 고백이 이 은혜로운 미사시간에 너무 잘 어울립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로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 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시편27,1ㄱ.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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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먼저 추구해야 할 가치>
서로의 의견은 다를 수 있고 그것이 당연합니다.그러나 그 ‘다르다’는 것이 서로 ‘틀리다’는 것으로 인식되어 서로 등을 돌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그래서 부모와 ‘의견이 틀리다’는 이유로 집을 뛰쳐나가기도 합니다. 이때 우리는 그가 ‘가출’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똑같이 집을 나간 행위이지만 어떤 뜻을 품고 구도의 길을 걷겠다고 나가면‘출가’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그야말로 ‘출가’의 길입니다. 집착을 버리지 않고서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단순히 집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모두를 내려놓고 떠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미워한다는 것은 대립하고 등진다는 것이 아니라, 더 곰곰이 더 열심히 추구해야 할 것이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탑을 세우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우듯 우리 신앙인이 추구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민감하게 식별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식별의 결과는 다른 여러 유대관계를 뒤로하고 모든 것에 앞서서 주님을 첫째 자리에 모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맥에 매이게 되면 자유를 잃고,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데 장애가 됩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주님께 집중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랑이신 주님께서 다음 일을 안배하십니다.
가출한 사람은 온갖 것에 마음을 쓰며 궁리합니다. 그러나 출가한 사람은 지금 당장은 집을 버린 것 같지만 결코 집안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따르는데 어찌 사랑을 외면하고 자기 실속만 챙기겠습니까? 많은 사람이 출가한 사람을 존경하고 우러러봅니다. 어떻게 그 어려운 길을 가시게 되었느냐고 묻습니다. 참 훌륭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 자녀의 출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훌륭하다고 한 그 길에 자기 자녀는 가지 않기를 바라고 있으니 안타깝습니다.
제자의 길에 신중함이 있어야 하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에는 다른 것에 앞서 단호한 결단과 응답이 요구됩니다. 내 자녀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하느님의 자녀임을 인식하기 바랍니다. 혹 남의 자녀가 출가하는 것은 환영하고 내 자녀의 출가는 막는 이가 있다면 그 집착을 버리기를 희망합니다. 내가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오히려 소유를 당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출가하는 자녀가 많아지길 기도하며 그 길에 은총 충만하길 빕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에 서 있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더 챙기고 더 채우는 준비가 아니라 더 내려놓고 더 비우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먼저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탈랜트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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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어떻게 그리스도를 따라야 하는지 알려 주십니다.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루카 14,26)
"제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으면"(루카 14,27)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루카 14,33)
첫째 조건은 자기 가족을 미워하라는 뜻이라기보다, 그 누구에 앞서, 자기 목숨보다도 주님을 더 사랑할 수 있는지 헤아려 보라는 초대입니다. 둘째 조건은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허락하신 십자가를 기꺼이 질 수 있는지 스스로를 살펴보라는 의미지요. 그리고 셋째 조건은 물질뿐 아니라 지식, 관계, 취향, 능력, 미래의 가능성까지 모두 주님을 위해서 비워낼 수 있는지 가늠해 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 속 인물들은 탑을 세우기 전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고, 또 다른 임금과 맞서 싸우기 전에 이길 승산이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았지요. 우리도 그리스도를 따라 나서기 전에 자신의 신앙과 사랑의 의지, 실천력을 신중히 따져 보아야 합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필리피 신자들에게 구원의 길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은 당신 호의에 따라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시어,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필리 2,13)
우리 구원의 시작은 우리 안에서 저절로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주님을 믿고 사랑하여 따르겠다는 의지를 우리 안에 일으키시고, 실천할 힘까지 주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이 요구하는 조건들, 즉 주님을 다른 모든 피조물보다 더 사랑할 수 있는 마음과, 용감히 제 십자가를 감내할 힘과, 자기 소유를 다 떠날 수 있는 자유는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심어주시는 은총입니다. 실천할 힘 역시 그분의 선물이지요. 그러니 처음부터 지레 겁먹고 물러설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제 힘인 양 자만할 일도 아니지요. 그저 하느님께서 우리 내면에 일으키신 의지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니십시오."(필리 2,16)
"비뚤어지고 뒤틀린" 세상에서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뜻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머물러 굳게 지키는 이는 '바로 그 말씀'에 순종해 하느님의 의지를 실행합니다. 비록 우리 자신은 하찮고 보잘것없더라도 우리 안에서 움직이며 활동하시는 그분 덕분에 이 세상에 뿌려진 구원의 씨앗은 매일 자라납니다.
모자라고 부족한 채로 주님을 따르는 우리 모두를 응원합니다. 만유 위에 주님을 더 사랑하려고, 버거운 제 십자가를 지려고, 세상 물질과 애착에서 자유로우려고, 자신을 잊고 힘껏 애쓰는 가운데 우리 존재가 주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포도주로 익어갑니다.
사랑하는 벗님!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으키시는 사랑의 의지를 잘 살피고 따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를 통해 하느님의 의지가 완성되어 가는 것이니 기뻐합시다. "여러분도 기뻐하십시오. 나와 함께 기뻐하십시오."(필리 2,18) 이 기쁨이 벗님과 함께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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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우울증은 부정적인 생각을 바꾸려는 노력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치유될 수 있다
노인 우울증 상담을 하다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우울증은 부정적인 생각을 바꾸려는 노력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치유될 수 있는데, 노인들은 오랜 세월 우울한 생각에 빠져 있던 것이 습관처럼 굳어서 좀처럼 마음이 바뀌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치 헌옷을 오랫동안 입고 있던 사람에게는 그 옷이 제일 편안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바람 자주 쐬고, 재미있는 친구들 많이 만나 맛있는 거 많이 드시라는 말씀밖에는 더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노인 우울증에 걸리지 않으려면 젊은 시절의 좋은 추억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게 좋습니다. 노인들의 심리 상태는 추억거리의 내용과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즐겁고 행복한 추억거리가 많은 사람들은 친구도 많고 할 이야기도 많습니다. 물론 인생을 살아오면서 항상 즐겁고 행복한 추억만 쌓아온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편한 기억은 내려놓고 되도록 즐겁고 행복한 기억만 떠올리려 노력하는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요.
-「나는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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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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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진정한 “제자”가 되는 조건을 세 가지로 제시하십니다. 그 세 가지 조건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은 3개의 동사입니다. 동사는 행동하는 것을 표현합니다. 따라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3가지의 행동실천이 따릅니다.
<첫째 동사>는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 할 때의 ‘미워하다’(μισει)는 동사입니다. 너무도 매정하게 들리는 ‘미워하다’는 이 동사의 뜻은 제대로 알아들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히브리어의 방언인 아람어에는 비교급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성경>에서 ‘누구는 미워하고 누구는 사랑한다.’는 표현이 나오는 경우에, ‘미워하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미워하다’는 것을 뜻하지 않고, ‘누구보다 뒤에 사랑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사랑하다’는 말은 ‘앞세워 사랑하다 혹은 선호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는 결코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무시하라는 가르침이 아닌 것입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신 분께서 부모 자식과 가족에 대한 사랑을 금지하거나 적대시 하실 리 만무합니다.
결국, 세상의 일보다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일 중에 더 궁극적인 가치를 앞세우고 더 우위에 두라는 말씀입니다. 곧 부모형제를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더 앞세우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산상설교에서 말씀한대로,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는 말씀입니다.
<둘째 동사>는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 할 때의 ‘지다’(βασταξω)라는 동사입니다.
여기서, ‘지다’라는 동사는 억지로 마지못해 어깨에 지는 짐처럼, 압박감에 눌려있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무거운 짊진 자 다 나에게로 오라’고 하신 분께서 짊을 덜어주시기는 커녕 더 무겁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다’라는 말의 원래의 뜻은 ‘어머니가 아기를 가슴에 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끌어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십자가는 어머니가 아기를 품듯, 소중하게 자의로 스스로 품는 것을 말합니다. 곧 십자가를 통하여, 십자가와 함께 오라는 말씀이요, 십자가 속에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셋째 동사>는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 할 때의 ‘버리다’(αποτασσεται)라는 동사입니다.
‘버리다’의 의미는 단지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것, 자신을 버리고 욕심을 비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어의 뜻은 ‘거부하다’, ‘거절하다’, ‘부인하다’입니다. 곧 자신의 뜻을 부인하는 것이요, 자신에게 신뢰를 두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신 하느님께 신뢰를 두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의 능력을 부인하는 것이요, 하느님의 권능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곧 사랑으로 ‘바치다.’, ‘가납하다.’를 뜻합니다. 쓸 데가 없어서 버리는 것이 아니라, 무익해서 버리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값지고 소중한 것을 본래의 주님께 ‘향하여’ 봉헌하는 것이요, 건네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오니 주님,
제자인 저희가 당신보다 그 무엇도 앞세우는 일이 없게 하소서.
그 무엇보다 앞서, 항상 당신을 앞세우는 제자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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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하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
주님!
당신의 제자가 되게 하소서!
제가 당신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제 자신을 따르기보다 당신을 따르며, 당신만을 바라게 하소서.
제 자신이 바라는 것보다 당신의 뜻을 따르며, 저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게 하소서.
당신의 사랑을 배신하지 않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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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14,33)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
예수님께서 가시던 길을 멈추시고 돌아서서 당신을 따라 함께 길을 걸어가고 있는 많은 군중에게 당신의 제자가 되는 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14,26)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14,27)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14,33)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이 참으로 어려워 보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이 이렇게 어려워서야 누가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가?'라고 투덜거리는 말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요약해 보면, '비움'과 '자기포기와 희생'과 '무소유'의 언어로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창고의 본질은 채우는 공간입니다. 우리 마음의 창고도 본성상 채워져야만 하는 공간입니다.
따라서 '비움'이라는 말은 '다른 무엇으로의 채워짐'을 의미하고, '무소유'라는 말은 '또 다른 어떤 소유'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을 통해 들려오는 예수님의 말씀이 내 마음의 창고는 내 것이 아닌 '하느님의 것'으로 먼저 가득 채워져야 하고, 인간 사랑이 아닌 '하느님 사랑'으로 먼저 가득 채워져야 한다는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그렇게 되면 나머지의 것들, 곧 우리가 바라는 것들도 채워주신다는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생명의 말씀'인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어봅시다!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니십시오. 그러면 내가 헛되이 달음질하거나 헛되이 애쓴 것이 되지 않아,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필리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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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vxal7GA52_A&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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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 33)
다 버리기에
아름답고
다 비우기에
가벼웁다.
버리고
비우는 것이
성장의 삶이다.
버리고
비우는 것이
복음의 삶이다.
버려야 비로소
평화로울 수 있는
우리 삶의
신비이다.
버리기에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자연의 섭리이다.
모든 것을
버려야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길 수 있다.
버려야
하느님을
따를 수 있다.
버리는 것이
결국
찾는 것이다.
버려야 할 것을
다 버리는 것이다.
자기 소유라
여겼던 모든
거짓과 모든
교만을 이제
버리는 것이다.
다 버리는 것이
아버지 하느님께
돌아가는
길이 된다.
버리는 것이
생명의 길임을
믿는다.
다 버리는 것이
하느님을
만나는 길임을
믿는다.
잘라내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버리는 것이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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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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