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음반 세계의 끝』(장호연 옮김, 마티 펴냄) - 명반 10장
노먼 레브레히트(66)는 독설로 이름난 영국 음악평론가 겸 소설가다. 그가 2007년에 펴낸 『클래식 음반 세계의 끝』(장호연 옮김, 마티 펴냄)은 불멸의 명반 100장과 나오지 말았어야 할 악반(惡盤, 똥반) 20장을 꼽아 화제가 됐다. 얼마나 신랄하게 비판했는지 음반사 NAXOS가 소송을 제기해 출간 6개월 만에 판매 금지조치를 당하기도 했다. 이 책에 소개된 명반 10장을 소개한다.
(1) 멘델스존/슈만: D단조 3중주(알프레드 코르토, 자크 티보, 파블로 카살스) EMI 1927~28
=음반에서 3중주 형식을 확립한 리코딩 시대의 걸출한 피아노 트리오가 남긴 걸작이다. 우울한 기운이 감도는 멘델스존의 3중주곡은 이들 손에서 세 악기가 주고받는 활달하고 철학적인 성격의 대화로 반전됐다. 유쾌한 기세의 연주 속에 삶의 의미에 대한 성찰이 드러난다. 첼리스트 카살스는 1934년 스페인 내전과 파시즘 등 정치에 빠져 음악 활동을 접었다. 피아니스트 코르토는 나치가 남프랑스에 세운 괴뢰정권인 비시 정부에서 예술 감독관을 지냈다. 바이올리니스트 티보는 결백했으나 결국 팀은 해체되고 말았다. 음악도 어쩔 수 없었던 이데올로기의 벽이었다.
(2)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 D단조(아르투르 루빈슈타인,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프리츠 라이너) RCA 1954=폴란드 출신의 거장 피아니스트 루빈슈타인은 낭만주의 시대 특유의 풍부한 색채와 따뜻함으로 가득한 이 협주곡을 오히려 투명하고 정확하게 연주해 명반을 탄생시켰다. 지휘자 라이너는 이와 대비되게 벨벳처럼 부드러운 현악기 소리, 매콤한 양념 같은 관악기 소리로 절묘한 균형을 맞췄다. 녹음 전 티격태격하던 고집쟁이 독주자와 과감한 지휘자가 서로 한 발씩 양보해서 얻은 아름다운 결과였다.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은 좋은 음반이 많지만 균형의 아름다움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 이 음반이야말로 최고라 할 수 있다.
(3)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글렌 굴드) 컬럼비아(소니-BMG) 1955
=온갖 기행과 전설로 서구 음악사에서 자주 논란의 대상이 되는 캐나다 출신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 생전의 그를 아는 이들은 “그는 마치 신이라도 된 듯 연주했다”고 증언한다. 음반 표지는 굴드 모습을 찍은 사진 30장으로 구성되어 변화무쌍한 그의 파격적 연주 스타일을 은유했다. 수많은 음악애호가들을 열광시킨 굴드의 바흐 해석은 자신만이 뚫고 들어갈 수 있는 탈속의 세계, 신비한 평행 세계를 들려준다. 타오르는 천사처럼, 다른 행성에서 온 이방인처럼 피아노 무대를 점령한 기인 굴드를 추억한다. 이 음반이 나오고 9년 뒤 굴드는 대중 앞에서 연주하는 생활을 버리고 여생을 레코딩과 라디오 기획에 바친다.
(4) 버르토크: 관현악 협주곡(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프리츠 라이너) RCA(소니-BMG) 1955=1943년 조국 헝가리를 떠나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작곡가 벨러 버르토크는 백혈병을 앓고 있었고 의료비 탓에 근근이 버티고 있었다. 보스턴 심포니가 위촉해 작곡한 이 작품은 44년 초연되자마자 명곡 반열에 올랐다. 오케스트라의 모든 악기가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처럼 각자 장기를 발휘하며 서로 조응하는 하모니가 멋지다.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조국에 대한 그리움, 모든 악기들에 대한 진심 어린 경의가 울려 퍼진다. 그런 마음이 통해서일까. 이 관현악곡은 이후 10년 동안 200차례가 넘게 연주되었고 당대에 이렇게 사랑받은 관현악곡은 드물었다.
(5) 엘가: 첼로 협주곡(자클린느 뒤 프레,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존 바비롤리) EMI 1965
=1965년 8월 허리까지 금발을 기른 스무 살의 소녀 첼리스트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영국 런던 홀번에 있는 킹스웨이홀에 들어섰을 때, 아무도 이날 녹음이 역사적 사건이 될 줄 짐작도 못했다. 제1차 세계대전 말미에 태어난 이 협주곡은 전쟁으로 파괴된 세상에 대한 짙은 애도를 담고 있다. 뒤 프레는 사랑의 고통,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떠는 인간애를 휘몰아치는 열정으로 연주해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자아내며 듣는 이들의 넋을 빼놓았다. 그녀의 연주는 엘가 첼로 협주곡의 결정적 표준이 되었다. 첼로의 대가였던 로스트로포비치는 이 음반을 듣고 나서 엘가의 협주곡을 자신의 레퍼토리에서 지웠다.
(6)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빈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게오르그 솔티) 데카 1958
=바그너는 음반 종사자들에게 난제 중 난제였다. 나흘에 걸쳐 15시간 이상 계속되는 그의 ‘반지’ 전곡 녹음은 특히 LP가 발명되고 스테레오 녹음 기술이 개발되기 전에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대형 프로젝트였다. 이 대장정에 도전한 이가 젊은 프로듀서 존 컬쇼였다. 헝가리 태생으로 당시엔 이름없던 지휘자였던 게오르그 솔티와 손잡은 컬쇼는 음악의 민주화에 대한 사명감이 투철했다. ‘반지’를 실연으로 무대에서 접한 사람보다 음반으로 들은 사람이 훨씬 더 많은 건 이 명반 덕이다. 컬쇼는 "오페라가 구역질나는 건 돈이엄청나게 들면서 배타적으로 향유되는 문화라는 점”이라고 말했다.
(7) 말러: 대지의 노래(크리스타 루트비히, 프리츠 분덜리히,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오토 클렘페러) EMI 1966
=“과연 이 작품이 연주될 수 있을까?” 죽기 전 구스타프 말러는 “사람들이 이 음악을 듣는 순간 삶을 끝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자문했다. 지휘자 클렘페러는 고분고분하고 말랑말랑하던 기존 해석을 버리고 그 누구보다 엄정하고 정확하게 말러를 연주했다. 삶은 어둡고 죽음은 머지않았다는 이 곡의 정서를 곧고 빳빳하게 드러냈다. 자연은 아름답긴 하지만 누구든 떠날 때면 뒤에 두고 가야 한다는 이별의 아픔이 오히려 절절하다. 위대한 작품이야말로 모순에 열려 있어야 함을 보여준 셈이다. 이 음반은 전후 말러의 부활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8) 홀스트: 관악 모음곡(클리블랜드 심포니, 프레데릭 페넬) 텔락 1978
=1970년대 말 에디슨의 발명품인 축음기는 퇴화의 조짐을 보였다. 음반 표면이 너무 쉽게 긁혔고, 앰프와 스피커의 성능이 향상되자 역설적이게 표면에 긁힌 홈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바늘의 접촉을 피해 소리를 디지털로 변환시키고 레이저로 정보를 읽어 들이는 기술 개발이 시급했다. 그 첫 시험대에 오른 곡이 홀스트의 모음곡이다. 클리블랜드 심포니 단원들은 부드럽게 연주했고 역동적 선율의 구별이 섬세해 LP의 다이내믹 압축에 길들여져 있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 최초의 디지털 LP는 확연히 줄어든 잡음으로 찬사를 받았다. 음반 제작자들이 디지털 연구에 박차를 가하게 한 기폭제였다.
(9) 브루크너: 교향곡 7번(빈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DG 1989
=안톤 브루크너의 교향곡 7번은 리하르트 바그너의 죽음에 바치는 비가였지만 전쟁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히틀러의 심사에 딱 어울리는 곡이 되었다. 베를린이 연합군 손에 함락되기 전에 라디오에서 마지막으로 흘러나온 음악이었다. 수십 년 뒤 음반 산업에서 히틀러 못지않은 권력을 휘두르던 지휘자 카라얀은 여든한 살 나이에 다시 이 곡에 도전했는데 그의 숭배자들이 놀랄 정도로 거칠었다. 천하의 거장도 불완전함이야말로 삶의 중요한 일부이며 슬픔과 애도를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이 음반을 마지막으로 석 달 뒤 그는 세상을 떠났다.
(10) 드뷔시: 전주곡(파스칼 로제) 오닉스 2004
=클래식 음반 시장이 무너지면 연주자들은 어떻게 하지? 이 물음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탄생한 음반사가 오닉스다. 잘나가던 메이저 음반사에서 떨려 나온 예술가들과 손잡고 예전에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레퍼토리를 녹음해 내놓았다. 프랑스 피아니스트 파스칼 로제는 그중 가장 바람직한 결과를 얻었다. 여덟 살 때부터 마음속에 담아왔던 드뷔시의 ‘전주곡’을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연주했다. 따뜻하고 서늘하며 음울하고 쾌활한 곡들로 구성된 이 음반은 큰 호응으로 팔려 나갔다. 가늘지만 지속적으로 음반 작업을 해나갈 수 있는 전달의 힘을 보여준 모델이다. 음반 세계의 끝은 어디인가.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하리. [사진 도서출판 마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