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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열왕기 상권의 말씀 12,26-32; 13,33-34>
그 무렵
26 예로보암은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였다.
‘어쩌면 나라가 다윗 집안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27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주님의 집에 희생 제물을 바치러 올라갔다가, 자기들의 주군인 유다 임금 르하브암에게 마음이 돌아가면, 나를 죽이고 유다 임금 르하브암에게 돌아갈 것이다.’
28 그래서 임금은 궁리 끝에 금송아지 둘을 만들었다.
그리고 백성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일은 이만하면 충분합니다.
이스라엘이여, 여러분을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여러분의 하느님께서 여기에 계십니다.”
29 그러고 나서 금송아지 하나는 베텔에 놓고, 다른 하나는 단에 두었다.
30 그런데 이 일이 죄가 되었다.
백성은 금송아지 앞에서 예배하러 베텔과 단까지 갔다.
31 임금은 또 산당들을 짓고, 레위의 자손들이 아닌 일반 백성 가운데에서 사제들을 임명하였다.
32 예로보암은 여덟째 달 열닷샛날을 유다에서 지내는 축제처럼 축제일로 정하고, 제단 위에서 제물을 바쳤다.
이렇게 그는 베텔에서 자기가 만든 송아지들에게 제물을 바치고, 자기가 만든 산당의 사제들을 베텔에 세웠다.
13,33 예로보암은 그의 악한 길에서 돌아서지 않고, 또다시 일반 백성 가운데에서 산당의 사제들을 임명하였다.
그는 원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직무를 맡겨 산당의 사제가 될 수 있게 하였다.
34 예로보암 집안은 이런 일로 죄를 지어, 마침내 멸망하여 땅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 복음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8,1-10>
1 그 무렵 많은 군중이 모여 있었는데 먹을 것이 없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말씀하셨다.
2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3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저들 가운데에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
4 그러자 제자들이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5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일곱 개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6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땅에 앉으라고 분부하셨다.
그리고 빵 일곱 개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나누어 주라고 하시니, 그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7 또 제자들이 작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것도 축복하신 다음에 나누어 주라고 이르셨다.
8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나 되었다.
9 사람들은 사천 명가량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돌려보내시고 나서,
10 곧바로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올라 달마누타 지방으로 가셨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너희에게는 빵이 몇 개 있느냐?”>
군중이 모여 있었는데,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저 군중이 가엽구나.
~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마르 8,2-3)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소중히 여기시고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이 청하지도 않는데도 이미 먹이셨고, 미처 바라지도 않는데도 이미 용서하셨고, 가엷게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에게는 빵이 몇 개 있느냐?"
그러자 그들이 "일곱 개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마르 7,5)
그렇습니다.
빵은 이미 ‘우리’에게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일깨워주시고 확인시켜 주십니다.
사실 그들에게는 빵이 이미 '일곱 개'나 있었습니다.
‘일곱’은 완전함의 숫자입니다.
곧 이미 차고 넘치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빵'이 없거나 부족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것을 모르고 있거나 인정하지 않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있는 것’을 없다고 여기는 것이 무지요, ‘있는 것’의 가치를 모르는 것이 어리석음일 것입니다.
만약 오늘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하느님의 말씀과 사랑을 보지 못하고 또한 찾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무지요 어리석음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그 '빵'이 있습니다.
'말씀의 빵'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은총입니다.
이 ‘있는 것’을 보는 눈이 곧 감사의 눈이요, 관상의 눈입니다.
우리가 이 빵의 가치를 진정으로 안다면 벅찬 감격에 까무러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빵'을 찾아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름 아닌 ‘우리에게 있는 바로 그 빵’으로 감사드리셨고, 제자들은 그 빵을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이 '빵'을 먹었습니다.
성찬의 전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을 먹을 뿐만 아니라, 말씀의 전례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먹었습니다.
그래서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는 말씀을 듣는 것을 일컬어 “파스카의 어린 양을 먹는 것”이라 하였고, 오리게네스는 “성경 독서 중에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람' 에제키엘처럼 ‘말씀의 두루마리’를 먹었습니다(에제 3,3).
그런데 우리가 먹고도 먹은 줄을 모른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먹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살아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말씀을 나누는 일, 곧 복음 선포가 될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성경을 풀이해 주는 것은 빵을 떼어 주는 것과 같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저 군중이 가엾구나.”
(마르 8,2)
주님!
속 깊은 곳을 환히 보시고 깊이 숨겨진 말도 다 들으시니, 제 마음 안에 당신의 빛을 비추소서.
약한 이들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게 하소서.
제 가슴 속에 가엾이 보는 눈과 마음을 주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광야에 있다고 느낄 때>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4천 명을 먹이신 얘기입니다.
아시다시피 얼마 전에 5천 명을 먹이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수많은 군중이 다시 주님께 모여든 것입니다.
그런데 5천 명을 처음 먹이실 때는 굶주린 군중의 상태를 염려한 제자들이 주님께 와서 어떻게 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씀을 드려 기적을 일으키셨지요.
그러던 제자들이 이번에는 굶주린 군중을 수수방관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나서서 어떻게 해야 하지 않냐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 이에 제자들은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 불릴 수 있겠습니까?"하고 되묻는데, 할 것이 없다는 태도지요.
이에 우리는 불과 얼마 전에 같은 기적을 직접 목격하고서 어찌 이런 태도를 제자들이 취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운데, 그들이 망각의 늪에 빠지기라도 한 걸까요?
더 기가 막힌 것은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라는 표현입니다.
5천 명을 먹이실 때 마을 빵 가게 옆에서 기적을 일으키신 것이 아니고, 또 주님께서 친히 빵을 먹이신 것을 보고도 누가 먹이겠냐고 하니 말입니다.
광야는 모세 때부터 하느님께서 빵을 주시는 장소입니다.
광야가 아니라면 하느님께서 빵을 주실 리도 없고, 사람들도 스스로 빵을 구하지 하느님께 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제자들과 같은 잘못, 다시 말해서 광야에서 빵을 주시는 하느님 체험을 하고도 또다시 어디서 누구에게 구할지 묻는 잘못을 범하지 말 것이고, 반대로 신앙인인 우리는 다른 곳이 아닌 광야에서 다른 누구가 아닌 주님께 청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다른 어디서 구할 곳이 있다면, 다른 누구에게 구할 수 있다면 왜 주님께 청하겠습니까?
광야, 그곳은 아무것도 없고 아무도 없는 곳이며 그렇지만 우리가 주님을 찾는 곳, 그러니 광야에 있다고 느낄 때 우리는 주님께 구하고 주님께 얻을 것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풍요로움의 원천>
병자 봉성체를 하였는데 한 할머니께서 주님께 인사를 드려야 한다고 다소곳이 절을 하셨습니다.
주님을 모신 제가 부끄러웠습니다.
이 집, 저 집 다니면서 경건함을 잃고 있었는데 제가 주님을 모시고 다닌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좀 더 준비된 마음으로 주님을 모셔드려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기위해 모인 군중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려고 하였습니다.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저들 가운데에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 ”하시며 걱정을 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겠습니까?”(마르 8,4)하고 말하였습니다.
지극히 인간적인 계산을 하였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 놓을 생각은 않고 머리로 따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감사를 드리고 축복하신 다음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나누어 주라고 이르셨습니다.
사천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나 되었습니다.
아무리 적은 것이라도 주님의 손을 거치면 풍요로워집니다.
그리고 그 기적은 먼 옛날이 아니라 오늘도 지속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성체성사를 통하여 우리를 배 불리시고 영적으로 풍요케 하십니다.
그러므로 자주 영성체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언제나 풍성하게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재료를 사용하였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함으로써 인간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또한 하늘을 우러러 감사를 드리신 행위를 통해 능력은 아버지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과 당신이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물러 있음을 말해 주셨습니다.
더군다나 먼 데서 온 사람들의 걱정을 통해 이방인들도 예수님의 배려에 배제되지 않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유다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하지 않으시고 모두를 풍요롭게 해 주시는 능력의 주님을 모시고 있음을 기뻐하고 언제나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지금 우리 학교는?>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4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입니다.
이는 ‘5천 명을 먹이신 기적’과 무엇이 다를까요?
전반적인 내용은 같습니다.
그러나 마르코 복음에서는 분명 5천 명을 먹이신 기적과 4천 명을 먹이신 기적, 두 개를 별개의 기적으로 여깁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실 때 제자들은 빵이 없다고 걱정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 빵 조각을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열둘입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빵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에는, 빵 조각을 몇 바구니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일곱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르 8,17-21)
분명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나 4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빵에 대한 걱정을 없애라’라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생존 욕구’에 치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책임져주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5천 명을 먹이신 기적과 4천 명을 먹이신 기적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탈출기의 광야 생활’을 상징하고, 4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에덴 동산의 삶’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오는 숫자들의 상징이 그렇습니다.
5천 명을 먹이실 때 빵 5개 물고기 2마리를 사용하였습니다.
숫자 ‘5’는 우리 몸에 오감이 있는 것처럼, 인간의 몸, 혹은 사람을 상징합니다.
물고기 두 마리는 몸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총과 진리’입니다.
모세가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면 주님께서 그를 통해 주시는 만나와 물이 진리와 은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남은 빵이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고 하는 것은 12지파, 곧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4천 명을 먹이실 때, 숫자 ‘4’는 ‘땅’을 상징합니다.
에덴동산에서 물이 한줄기 흘렀는데 모든 땅을 적셨다고 할 때 그 하나의 물줄기는 ‘네’ 개로 갈라집니다.
동서남북의 네 방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땅은 7일 동안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물고기 숫자보다는 빵의 숫자가 중요합니다.
일곱 광주리에 가득 찼다고 하는 것은 먹을 것이 풍부한 에덴동산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먹을 것이 없다고 하느님께 원망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물과 만나를 주시며 그들이 가진 것들을 감사히 봉헌하여 성막을 짓게 하셨습니다.
거기에 당신이 머무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에게 무언가 요구하는 하느님보다는 자신들에게 무언가 해 줄 수 있는 소를 섬기는 것으로 선택하였습니다.
또 에덴동산에서 하느님은 선악과를 봉헌하라 하셨지만, 그들은 자신들에게 더 많은 소유를 줄 것 같은 뱀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3천 명이 죽고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이 모든 것은 ‘생존 문제를 주님께 맡기지 못한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 안의 자아는 오로지 육체의 생존밖에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육체가 죽으면 자신도 필요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생존을 다 책임져 줄 테니까 그것을 믿는 증거로 십일조를 봉헌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하느님을 충분히 믿지는 못합니다.
교회는 생존의 문제를 주님께 맡기는 연습을 하는 학교와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에덴동산에서처럼 또 쫓겨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넷플릭스 좀비 드라마 ‘지금 우리 학교는’이 인기입니다.
우리 세상이 이 학교와 같습니다.
여기서 사람은 정확히 ‘네’ 부류로 나뉩니다.
첫 번째 부류는 이미 좀비가 된 인간입니다.
그들은 항상 배가 고픕니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남을 해치면서도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다며 그냥 좀비가 되어버린 인간을 상징합니다.
두 번째는 그 좀비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살아가는 아직 좀비가 되지 않은 인간입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살아가는 목적은 죽지 않기 위함입니다.
남을 해치지는 못하지만, 여전히 좀비가 될 가능성이 있는 존재입니다.
세 번째 부류는 좀비가 되었는데 의식이 있는 좀비가 된 존재입니다.
그들은 분노에 차서 누군가를 지독히 미워합니다.
이제 죽을 걱정이 없어서 다만 자신의 미움과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살아갑니다.
귀남과 같은 존재입니다.
네 번째 부류는 역시 좀비가 되었지만 사랑 때문에 좀비가 되어서도 의식을 가진 존재입니다.
이 좀비들은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죽음도 불사합니다.
왜냐하면 이들도 세 번째 부류처럼 죽음에 대한 걱정이 별로 없습니다.
반장의 경우입니다.
2차 세계 대전을 생각해 볼까요?
독일 군인들은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일을 하는 첫 번째 좀비와 같은 부류입니다.
이들은 생존을 위해 누군가를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이히만도 자신은 살아야 했기에 나라에서 시키는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모기가 피를 빨아먹는 게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다만 자신이 모기인 줄 모르고 평생을 산 어리석음이 죄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살 가능성도 있고 죽을 가능성도 있는 두 번째 부류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생존을 위해 좀비와 같은 독일 군인들을 피해 다닙니다.
그러다가 잡히기라도 하면 이들도 똑같은 신세가 됩니다.
여전히 죽음에 대해 걱정하며 살아가는 우리 대부분의 모습입니다.
두 번째 부류입니다.
그런데 별로 죽을 것 같지 않아서 자신의 꿈을 펼치는데 그 꿈이 누군가의 생명을 앗아가게 만드는 부류입니다.
히틀러의 경우입니다.
그는 굶어 죽을 걱정은 없습니다.
하지만 좀비들을 이용해 자신의 분노를 표출할 수는 있습니다.
보통 사람을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지시에 좀비가 되어버리게 만드는 좀비 우두머리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세 번째 부류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 부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약한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좀비들과 좀비 마왕들에 맞서는 이들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를 위해 대신 죽음을 선택한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님과 같은 분들입니다.
또 유대인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수많은 의인들입니다.
우리는 어느 세상에 속해있건 이 네 부류에 반드시 속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으려고 하는 자는 살 것이고 살려는 자는 죽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심판의 기준에 따르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 사람들은 네 번째 부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가장 닮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5천 명을 먹이시고 4천 명을 먹이시며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요?
생존을 걱정하지 말고 네 번째 부류의 사람이 되라는 것이 아닐까요?
살기를 원한다면 절대 네 번째 부류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유대인 어린 고아들이 무서워하자 자신은 유대인이 아니면서도 192명 아이의 손을 잡고 함께 가스실로 들어간 야노쉬 코르착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사람들을 만드는 학교가 바로 세상입니다.
우리는 이 학교에서 어느 부류가 될 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네 번째 부류의 특징은 예수님처럼 작은 것으로 ‘감사의 기도와 봉헌’을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나의 생존을 책임져주신다는 증거로 감사의 십일조를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모범을 보여주신 것이 오늘 기적의 핵심 내용인 것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결국 우리 인간의 결핍이 하느님의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킵니다>
어린 시절 동네 마을 잔치 풍경이 아스라이 떠오릅니다.
잔칫날에 되면 동네 사람들은 물론이고 조무래기들, 지나가던 행인들, 걸인들조차 너 나 할 것 없이 와서 뜨끈한 국밥이며 떡이며 한 상씩 받습니다.
없이 살던 시절, 깡통 들고 다니며 구걸하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당시 걸인들에게는 이 동네 저 동네 잔칫날이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그 누구라도 와서 원 없이 주린 배를 채우던 동네잔치를 떠올리며 하느님 나라를 생각합니다.
하느님 나라, 과연 어떤 곳인가 묵상해 봅니다.
겹고 정겹던 동네잔치 분위기 같지 않을까요?
하느님 나라의 우세한 특징 중에 하나를 꼽으라면 아무래도 풍요로움일 것입니다.
육적인 먹거리뿐만 아니라 영적인 먹거리도 흘러넘치는 곳, 지상에서의 모든 결핍과 제한이 원 없이 충족되는 곳, 기쁨도 감사도 흘러넘치는 그런 곳이 하느님 나라가 아닐까요?
더 이상 차별도 없고, 더 이상 그 누구도 풍요로움에서 제외되지 않는 곳, 모두가 하느님 은총을 흘러넘치게 받고 또 받는 곳이 하느님 나라일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했던 군중들은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신 기적을 통해 잠시나마 풍요로운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서 체험했습니다.
예수님의 그 너그럽고 넉넉한 마음에 군중들은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시는 기적, 그 기적의 원동력이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드러내심, 하느님 나라 도래의 선포,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성 확증...
생각해보니 또 다른 이유도 있었습니다.
우리 인간들을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측은지심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그 측은지심의 발로는 또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인간이 지니고 있는 어쩔 수 없는 부족함과 나약함입니다.
인간인 이상 항상 끼고 사는 죄와 결핍입니다.
하느님께서 왜 우리 인간을 당신 눈동자처럼 애지중지 여기시고 영원한 생명과 구원에로 인도하시는가,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쌓아온 선행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가 당신 마음에 딱 드는 예쁜 행동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당신 계명에 고분고분 따랐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게 다가 아니더군요.
우리의 한계, 우리의 죄, 우리의 눈물, 우리의 고통...
이런 우리 인간의 결핍이 하느님의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키며, 그 결과가 결국 구원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결국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모든 결핍은 곧 있을 하느님 축복의 한 표현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지금 우리가 견디고 있는 이 모든 불행 역시 오래 가지 않아 변화될 하느님 위로의 손길이라 저는 믿습니다.
지금 우리의 상황이 최악이라면 머지않아 하느님 도움의 손길이 다가오리라 저는 확신합니다.
지금 우리가 생의 가장 밑바닥에 서 있다면, 올라갈 순간이 멀지 않았다는 표시입니다.
지금 눈물 흘리고 있다면, 지금 깊은 슬픔에 잠겨있다면, 사랑의 하느님께서 천천히 나를 향해 다가오심이 확실합니다.
- 살레시오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의 참 좋은 최고의 선물 - 성체성사의 가르침>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며 정점이다.
교회의 모든 교역이나 사도적 활동과 마찬가지로 다른 여러 성사들은 성찬례와 연결되어 있고 성찬례를 지향하고 있다.
실제로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 안에 교회의 모든 영적 선이 내포되어 있다.
곧 우리의 파스카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계신다.”
(교리서 1324)
성체성사를 요약한 위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말씀에 가톨릭 교회의 모든 사제들은 전적으로 공감할 것입니다.
제가 33년 수도사제로서 봉직해오는 동안 미사 시 강론 때는 늘 성체성사의 은총으로 결론지었음이 생각납니다.
강론을 할 때마다 얼마나 미사전례가 결정적 도움이 되는지 깨달았습니다.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제 영성생활의 0순위는 성체성사, 미사전례입니다.
하루가 시작되는 한밤중 우선 일어나 전날부터 준비했던 일이 강론 준비입니다.
저에게 강론 준비는 그대로 미사 준비가 됩니다.
참으로 헤아릴수 없이 많은 분들의 애환과 소망을 듣다보면 미사는 간절한 기도가 됩니다.
정말 하느님을, 그리스도 예수님을, 교회를 사랑하는 이들은 미사를 사랑합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바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 셋은 성서, 예수님, 미사입니다.
교회의 미사 중 살아 계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의 살아 있는 만남을 통한 치유의 구원을 이뤄주는 미사 은총입니다.
예전 두 사제의 고백이 생각납니다.
“노인들에게 낙이라곤 미사 하나뿐이데, 내가 이 양노원의 노인들을 두고 어찌 휴가갈 수 있겠는가?”
“아침 미사 안하면 수녀님들 아침도 안 먹기에 미사 안할 수가 없습니다.”
세월 흘러 나이 들어갈수록 믿는 이들의 미사에 대한 애착은 더해 가는 것 같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을 통해 성체성사의 은혜가 얼마나 우리의 인생 광야 순례 여정 중 결정적인지 새삼 크게 배웁니다. “사천명을 먹이시다”(마르8,1-10), 오늘 복음과 “오천명을 먹이시다”(마르6,30-44), 가 참 좋은 대조를 이루며 상호보완합니다.
오늘 복음은 그리스계 교회의 성체성사를, 앞서 복음은 유다계 교회의 성체성사를 반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의 성체성사는 유대계 교회를 넘어 온 인류의 성체성사로 향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두 복음이 왼딴곳의 광야를 배경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광야 인생 순례 여정중의 신자들 삶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인 사막의 오아시스, 사막의 쉼터이자 샘터요, 배움터 역할의 미사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미사를 통해 참으로 중요한 가르침을 배웁니다.
오늘 제1독서 열왕기상권의 예로보암의 우상 숭배의 악행을 보면서 순간 악순환의 역사를 생각했습니다.
참으로 벗어나기 힘든 우상 숭배의 악순환입니다.
이런 면은 조선시대 500년 당쟁사를 보면서, 지금까지 반복되는 유사한 현실을 보면서 아프게 깨닫는 진리입니다.
20권으로 된 조선시대 실록의 만화를 보면서도 한권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끊임없는 보복의 악순환같은 역사이기 때문이요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는 참 답답한 현실입니다.
통합보다는 분열을 조장하는 혐오, 차별, 배제가 주류를 이루는 현실입니다.
바로 이에 대한 통합의 모범을 보여줘야 할 가톨릭 신자들이요, 이에 결정적 역할이 미사 은혜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반복되는 우상숭배의 악순환을 단! 끊을 수 있는 결정적 답이 오늘 복음을 통해 배우는 성체성사의 은총뿐임을 깨닫습니다.
‘예로보암은 그의 악한 길에서 돌아서지 않고, 또 다시 일반 백성 가운데에서 산당의 사제들을 임명하였다.
그는 원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직무를 맡겨 산당의 사제가 될 수 있게 하였다.
예로보암 집안은 이런 일로 죄를 지어, 마침내 멸망하여 땅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1열왕 13,33-34)
하느님에게서 떠난 우상숭배에 따른 자업자득의 업보입니다.
참으로 이런 우상숭배의 유혹에서 벗어나 바른 삶을 위해 성체성사의 생활화가 성체성사적 삶이 얼마나 우리 삶에 결정적 도움을 주는 지 깨닫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의 마음을 배웁니다.
예수님을 통해 대자대비(大慈大悲)의 하느님 마음을, 연민의 사랑을 배웁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가엾이 여기는 마음, 측은히 여기는 마음, 바로 이런 한없이 깊은 연민의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문득 한암 대종사에 관한 책 서문에서 도올 김용옥의 고백이 생각납니다.
“나는 ‘각(覺)’자 앞에 ‘비(悲)’자를 하나 더 써주었다.
모든 깨달음은 슬픈 것이다.
각(覺)하고 나면 보이는 것이 다 슬픈 것이다.
나 혼자 욕망을 벗어 던질수는 있다 해도, 중생의 욕망은 무슨 수로 다스리랴!”
이래서 깊디 깊은'“자비(慈悲)'의 사랑입니다.
슬플 비는 바로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요 오늘 광야의 굶주린 중생을 바라보는 예수님이 그러하며 우리는 이런 가엾이 여기는 비의 마음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참 '기쁨(喜)'도 이런 하느님 '비(悲)'의 마음을 체험할 때 솟아나는 것입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둘째, 예수님의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삶을 배웁니다.
사랑의 기적이요, ‘진인사 대천명’ 믿음의 삶에 따른 기적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하느님께 대한 철석같은 신뢰의 믿음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바로 다음 대목이 이를 입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땅에 앉으라고 분부하셨다.
그리고 빵 일곱 개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는 다음, 떼어서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시니, 그들이 군중에 나누어 주었다.’
그대로 광야에서 온갖 정성을 다해 진인사대천명의 절실한 자세로 미사를 봉헌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바로 이런 믿음의 자세를 배우자는 것이며 이런 절실한 자세로 미사에 참례하자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미사로부터 감동과 나눔을 배웁니다.
하느님을 감동시킴과 동시에 군중을 감동시킨 예수님 자비의 사랑이요 진인사대천명의 믿음입니다.
감동이 빠진 우리의 삶은 아닌지 반성해야 합니다.
정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감동입니다.
감동을 통한 마음의 정화요 성화입니다.
참으로 감사, 감동, 감탄의 삼감의 순수한 마음이 절실한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나 되었다.
사람들은 사천명 가량 되었다.’
예수님의 사랑과 믿음에 회개한, 감동한 군중들이 갖고 있던 것을 다 나누니 이런 풍부한 기적입니다.
극심한 빈부의 격차로, 정의와 공정의 결핍으로 굶주림입니다.
정말 가진 자들이 이웃과 가진 것을 나눈다면 차고 넘치도록 풍부한, 온 세상이 번영하여 화평하게 되는 '대동(大同)' 세상일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미사로부터 배울 바는 이런 감동과 나눔입니다.
넷째, 예수님의 홀가분한 떠남의 마음을 배웁니다.
예수님의 미련없는 떠남이 참 멋지고 매력적입니다.
애당초 군중들이 광신이나 인기에 휩싸일 소지를 없앱니다.
참으로 홀가분한 집착없는 이탈의 초연한 떠남입니다.
노자의 “공성이불거(功成而弗居)”란 말씀처럼 공을 이루면 거기 머물지 않고 곧 떠나는 그런 삶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참으로 지혜롭고 겸손한, 정말 자기를 완전히 비운 그런 사랑입니다.
다음 대목이 이를 입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돌려보내시고 나서, 곧바로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올라 달마누터 지방으로 가셨다.’
예수님의 지체없는 떠남은 얼마나 멋진지요!
진짜 불가 스님 이상으로 진짜 '사랑의 운수행각(雲水行脚)'의 여정에 오른 예수님과 제자들 일행같습니다.
사랑의 기적이요 기적은 끝이 아니라 떠남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깨닫습니다.
늘 새로운 시작의 삶을 살게 하는 미사 은총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 미사로부터 참 귀한 가르침을 배웠습니다.
인류가 존속하는 한 영원히 계속될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운(ever old, ever new)'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 은총이 우리 모두 광야 인생 순례 여정을 성공리에 마치도록 도와 주실 것입니다.
아멘.
- 성 베네딕토회 성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미사의 말씀들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예배를 만납니다.
"그 무렵 많은 군중이 모여 있었는데"
(마르 8,1)
이 이야기는 어제와 같이 이방지역을 배경으로 합니다.
예수님 곁에 모여든 군중은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에 대한 가르침을 얻으며 "사흘 동안이나"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광야에 머물렀지요.
사천 명가량이나 되는 무리가 모인 광야를 떠올려 봅니다.
인가도 시장도 없는 곳에서 사흘이나 머물렀으니 이제는 스스로를 지탱할 자원이 남아있을 리 없습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마르 8,2)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 마음을 열어보이십니다.
마음에 흐르는 연민의 사랑에 제자들도 동참하기를 바라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겠습니까?"(마르 8,4) 하고 반문합니다.
제자들의 답변은 냉정히 들리긴 해도 틀린 말은 아니지요.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마르 8,5)
"또 제자들이 작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마르 8,7)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이 소유한 바에 관심을 가지십니다.
자의건 타의건 먼저 자기 것을 내놓은 이들은 제자들입니다.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나 되었다."
(마르 8,8)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올리신 "감사"(마르 8,6)와 미소한 양식에 베푸신 "축복"(마르 8,7), 그리고 제자들을 통한 "나눔"이 큰 기적을 이룹니다.
보잘것없는 소량의 빵과 물고기가 예수님의 연민과 기도를 통해 사천 명을 먹이고도 남는 잔치상으로 변하게 된 것이지요.
굶주린 큰 무리의 사람들이 어디서 나온 줄도 모르는 양식을 받아들고 서로 나누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받는 이들이나 나누는 이들 모두 영혼과 육신의 허기를 채우며 흥겨워하고 흡족해합니다.
이렇게 이방인 지역 광야에서 펼쳐진 기적의 현장이 흡사 말씀을 듣고 빵을 나누는 우리의 미사를 떠올리게 합니다.
제1독서에서 우리는 예로보암의 근심을 읽습니다.
왕위 정통성에 자신이 없는 그는 솔로몬의 아들 르하브암에게서 갈라진 북쪽 지파들을 다스리면서 백성의 마음이 다시 예루살렘을 향할까 걱정하지요.
"여러분의 하느님이 여기에 계십니다."
(1열왕 12,28)
그는 금송아지 둘을 만들어 베텔과 단에 두고 여기서 예배하라고 백성에게 이릅니다.
사실 여기까지는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보통 고대 종교에서 신상을 만들 때에는 주조된 짐승 위에 놓습니다.
사실 이 송아지도 그 자체가 신이라기보다 그 위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떠받치는 밑받침 정도에 불과했지요.
그런데 단지 예루살렘과 구분된 장소를 제공하려는 예로보암의 의도는, 그곳에 온 이스라엘 백성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아니라 밑받침인 송아지 상을 신으로 여겨 경배하는 바람에 죄로 굳어지고 맙니다.
게다가 그는 "레위 자손들이 아닌 일반 백성 가운데에서 사제들을 임명"(1열왕 12,31)합니다.
얼핏 보면 기회의 균등화나 공정화인 듯 보이나, 어쩌면 유다 자손이 아니면서 임금이 된 그가 레위 자손의 사제직 세습이라는 정통성 역시도 부인하고 파괴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리시고, 말씀으로 사람들을 위로하시며, 빵을 축복해 사람들을 배불리십니다.
사제직의 원형이 오늘 우리가 만나는 그분에게서 드러나지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면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에게서 왕직과 사제직, 예언직이 하나의 본류로 합쳐지고 있습니다.
또 예루살렘이 아닌 이방 지역 광야에서 이 축제가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합니다.
이는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요한 4,21)는 예수님의 말씀을 반영합니다.
이제는 장소가 아니라, 신분이 아니라, 지파나 가문이 아니라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요한 4,24) 하는 때가 도래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이 정한 사제 지파와 가문의 규정을 뛰어넘는 사제이십니다.
그분 사제직의 완전성은 당신 자신을 친히 제물로 바치는 희생 제사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사랑하는 벗님,
예수님은 많건 적건 제자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가진 바를 내어놓게 하심으로써 이 제사의 완전성으로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얼마 안 되는 자기 소유가 내어놓는 과정을 통해 엄청난 기적이 되는 것을 확인한 제자들은 아마도 결코 이 맛을 잊지 못하고 결국 그 길을 갈 겁니다.
그렇습니다!
직무 사제직이건 보편 사제직이건 자신을 내어놓고 바치는 희생 제사와 하느님께 올리는 감사 기도, 백성을 향한 끊임없는 축복으로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이 세상이라는 광야에서 우리는 감사와 축복과 나눔으로써 세상을 위한 사제직에 참여합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 주님께 진실한 예배를 바치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예전에 ‘건강한 남자와 부실한 남자의 하루’를 텔레비전에서 보았습니다.
건강남과 부실남은 하루의 시작이 달랐습니다.
먹는 것도 달랐고, 일하는 것도 달랐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니 건강남은 더욱 건강하게 되었고, 부실남은 더욱 부실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둘 모두 건강한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진 사람은 더 갖게 되고, 못 가진 사람은 더 빼앗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건강남은 일정표를 3곳에 정리하였습니다.
스마트폰, 사무실 책상, 집의 거실에 일정표를 표시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주어진 업무를 효율적으로 처리하였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운동을 하고 밥을 먹습니다.
담배는 끊었고, 술도 적당히 마십니다.
주어진 일은 기쁘게 하고, 동료들의 일도 도와줍니다.
가끔씩 명상도 하고, 책도 읽습니다.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긍정적인 사고를 지니고 있으며, 월급은 잘 관리해서 적금도 들어 놓았습니다.
앞으로의 진로를 위해서 자격증을 따 놓았고, 외국어 학원도 등록했습니다.
시민단체에 가입을 했으며 정기적으로 후원금도 보냈습니다.
얼굴 표정은 늘 밝았고, 또래 젊은이들보다 젊어 보였습니다.
행운보다는 행복을 추구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고, 신앙생활을 통해서 영적인 위안을 받습니다.
부실남의 하루는 이렇습니다.
아침은 먹지 않습니다.
전날 술을 많이 먹었기 때문입니다.
낮은 층수도 엘리베이터를 이용합니다.
입에 좋은 컵라면을 즐겨 먹습니다.
운동보다는 컴퓨터의 게임에 몰두합니다.
회식자리에서는 빈속에 먹어야 좋다며, 안주를 거의 먹지 않습니다.
2차는 기본이고, 기분이 좋으면 3차, 4차까지 가서 술을 마십니다.
집에 돌아와서도 속이 쓰리니, 또 라면을 먹고, 컴퓨터 게임을 합니다.
부실남은 점점 건강이 나빠지고, 허리도 아프고, 얼굴에 윤기가 없어집니다.
아직은 젊기 때문에 몸이 버티지만 둑이 무너지듯이 언제 건강이 나빠질지 모르는 상태가 됩니다.
주변으로부터도 좋은 이야기를 듣지 못하니, 어른들을 만나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부모님께 용돈을 타려니 미안하기는 한데, 달리 돈을 구할 방도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되겠지’라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지내고 있습니다.
불평과 불만을 입에 달고 삽니다.
일정관리를 못해서 늘 분주하지만 실속이 없습니다.
건강남과 부실남은 원래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나의 선택이 나를 건강하게 할 수도 있고, 부실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몸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은 우리의 마음에 의해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우상 숭배를 강요하는 ‘왕’의 이야기입니다.
준비 안 된 사제를 임명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그릇된 길로 이끄는 왕입니다.
하느님과 멀어지는 삶의 방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로보암은 하느님과 멀어지는 삶의 방식을 선택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다윗과 솔로몬에게 베풀어 주었던 은총과 자비를 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리에 이방의 신을 세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방의 신을 섬기도록 강요하였습니다.
예로보암 집안은 이런 일로 죄를 지어, 마침내 멸망하여 땅에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복음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헌신하는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준비된 제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삶의 방식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에 배고픈 사람들의 사정을 헤아리게 됩니다.
가지고 있던 빵과 물고기를 모아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웃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기도하며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누면 하느님께서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나 되었다.
사람들은 사천 명가량이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을 믿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일하는 것을 싫어하고 단지 놀면서 먹고 마시기에만 관심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며, 삶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새기고 열심히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 둘 중에서 누가 로또복권에 당첨될 확률이 높을까요?
많은 이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의 당첨 확률이 더 높으리라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노는 것만 좋아하는 사람이 로또복권에 당첨될 확률이 훨씬 높습니다.
왜냐하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요행을 바라는 복권을 절대 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놀기 좋아하는 사람은 일확천금을 노리는 경우가 많아 복권을 살 확률도 높아집니다.
놀기 좋아하면서 복권만을 열심히 사라는 것이 아닙니다.
당첨된다고 행복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점은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복권을 사야 당첨된 확률이 조금이라도 생기는 것처럼, 우리 삶 안에서도 스스로 시도해야 하는 노력이 꼭 필요합니다.
그런데 본인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으면 하느님께만 해결해달라고 청하기만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너무나 큰 억지입니다(복권을 사서 무조건 당첨시켜 달라는 것도 억지입니다. 하느님은 요행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프랑스 후기 낭만주의 작곡가인 엑토르 베를리오스는 “재능을 타고났다는 정도의 운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운이 따르는 재능도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재능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노력이며 정성입니다.
무조건 하느님께 해달라는 억지는 이제 그만해야 합니다.
사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는 빵의 기적을 행하십니다.
군중이 예수님과 사흘 동안 함께 있으면서 먹을 것이 떨어져 난처한 상황입니다.
먼 곳에서 온 사람이 집으로 돌아가다가 길에서 쓰러질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자, 제자들은 눈치를 채고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 불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답합니다.
그들 모두를 배불리 먹을 수 없다는 불가능의 이유를 말하는 것이지요.
그때 예수님께서는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라고 하셨고, 제자들은 빵 일곱 개와 작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져옵니다.
아무것이 없음에도 그들 모두를 배불리 먹일 수 있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노력을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그 노력은 모두 배불리 먹고도 일곱 바구니가 남는 기적을 가져왔습니다.
무조건 하느님께 해달라는 억지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노력을 먼저 기울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작은 노력도 아주 크게 쓰시는 분이십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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