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s://www.fmkorea.com/7121097499
1967년 1월 2일, 충칭의 최대 홍위병 조직이었던 '8.15파'는 당 조직을 공격하라는 마오쩌둥의 교시에 따라 충칭시 주둔군이었던 인민해방군 54군단과 손잡고 쿠데타를 일으켜 충칭 시내 모든 정부기관과 당 조직을 장악하고 지도부를 모두 죽였으며 충칭시 문혁위원회에 소속되었던 보수파 홍위병과 정부 관료들, 그들의 가족들을 구금했다.
8.15파는 '충칭대학교 8.15투쟁단'이 시내 노동자와 중고등학생 홍위병들을 끌어들이면서 만들어졌으며 충칭의 각급 학교의 8.15파 학생들이 교사들을 조리돌림하고 때려죽인 '8.28사건' 이후로 충칭 시내 촤대 조직이 되었다.
2월 8일, 8.15파와 54군단은 다른 50여개 '조반파(급진파)' 홍위병 조직들을 끌어들여 '충칭시무산계급혁명반란연맹위원회(속칭 혁명연맹)'을 구성한다. 혁명연맹의 명목상 대표는 54군단장이었으나 실제로는 8.15파의 수장이었던 류제팅의 독재 정치가 벌어졌다.
2월부터 4월까지 충칭시에서는 혁명연맹에 동조하지 않은 모든 대중조직들이 탄압받았고, 반동분자라는 누명을 씌워 공개적으로 비난받게 만들었다.
그러나 5월 16일이 되자 마오쩌둥과 중앙 문화 혁명 소조에서 조반파를 깎아내리고 보수파를 옹호하는 의견을 발표하였고, 혁명연맹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혁명연맹에 의해 탄압당했던 홍오류(보수파 홍위병)들, 구 혁명위원회 인원들, 당 조직을 장악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아예 쓸어버린 다음 인민이 직접 통치하는 코뮌을 건설하려던, 조반파 안에서도 극좌로 배척받던 코뮌파,
8.15파 내에서 의견 차로 갈라져 나와 류제팅에게 배신자로 찍힌 황옌의 10.27파, 반우파 투쟁 시기 반동우파로 찍혀 고초를 겪고 문혁에 참여조차 하지 못했던 작가와 예술가들, 전임 충칭 당서기 뤄팅을 따르던 홍한파 등등 온갖 잡탕 세력들이 혁명위원회 부조장이었던 리무썬을 중심으로 모여 혁명연맹을 타도한다는 대의 아래 '분쇄파'가 되었다.
두 파는 곧이어 격렬한 무력 투쟁의 늪 속으로 빠져들었다. 자링강 남교두에서 최초의 총격전이 벌어졌다. 서남사범대에서 두 파벌의 대충돌이 벌어지고 40여 명이 죽었으며 학교는 완전히 불탔다.
훙옌 디젤 엔진 공장에서는 분쇄파가 혁명연맹 간부 9명을 죽이고 20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충칭 제3 유리공장에서는 분쇄파의 폭동이 발발해 10명이 죽었다. 노동자들은 칼과 망치를 들고 바로 옆의 충칭 공업 학교로 쳐들어가 혁명연맹이라고 하면 닥치는 대로 찔러 죽였다. 중앙대로에서는 3일간 전투가 벌어져 군데군데 시체가 널려 있었다.
혁명연맹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54군은 중앙당의 명령을 따르려는 정치위원들과 독자적인 군정권을 행사하려는 지휘관들 사이의 극렬한 정치투쟁으로 완전히 마비 상태였다. 일부 지휘관들은 자의적으로 무기고를 열어 혁명연맹에게 기관총과 고사포, 장갑차를 공급했다.
8월 5일, 혁명연맹의 대반격이 시작되었다. 분쇄파가 장악한 칭수공장에 박격포탄이 떨어져 22명이 죽었다. 부상자는 셀 수 없이 많았다.
8월 6일, 왕광빌딩에 기관총이 놓여졌으며 지나가던 행인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해 28명이 죽고 다쳤다. 분쇄파의 보급로였던 강룽교는 폭파되었다.
8월 8일, 망강기계공장의 분쇄파는 자체 제작한 포선 3척을 동원해 창강을 따라 항해하며 둥펑빌딩, 홍강호텔, 충칭전기공사 등등을 포격해 24명을 죽이고 129병을 부상시켰으며 54군의 고속정 3척을 침몰시켰다.(충칭 8.8해전) 충칭 전체가 창강을 기준으로 혁명연맹과 분쇄파로 양분되었다.
8월 10일, 자룽 기계공장을 중심으로 장갑차가 동원된 만 명 단위의 대규모 전투가 발발해 최소 500명이 죽었다.
8월 11일, 충칭 공업공사 서기와 교통국 관계자 4명이 영화관 앞을 지나가다 분쇄파의 총격을 받아 전원이 숨졌다. 소식을 접한 혁명연맹의 폭동이 일어나 베이베이한에서 80명이 죽었다.
8월 12일, 충칭시 시청사에 54군의 전차 포탄이 작렬해 청사가 붕괴하고 13명이 죽었다. 54군 경비중대가 특수작전에 투입돼 분쇄파 32명을 사살하고 54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8월 18일부터 8월 20일까지 펀자벙 지역에서 기관총을 동원한 대규모 충돌이 일어나 128명이 죽고 900명이 다쳤다.
9월에 이르어 투쟁의 강도는 절정에 달했다. 양가평 지역을 차지하려는 두 세력의 충돌로 지역 내 건물의 절반이 전소되었고 30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공장 노동자들이, 교사들이, 중학생들이 서로를 반혁명주의자라고 비난하며 총을 쏘아댔다. 시민들은 길거리에서 쇠몽둥이와 날붙이를 들고 '반대파'들을 찔러 죽였다. 그가 정말 인민에게 반하는 반동분자인지, 단순히 서로에게 원한이 있던 사람인지는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치안을 유지할 공안조직은 와해되었다. 조폭들이 혼란을 틈타 홍위병 뱃지를 달고 날뛰었다. 54군은 시민들과 내전을 벌였다. 식량 배급이 중지되어 아사자가 속출했다. 석탄 공급도 중지되어 난방이 끊겼다. 기차는 들어오지 않았고 충칭을 떠나려는 난민들은 적대세력으로 몰려 무차별 사격을 받았다. 충칭 전체가 마비되었다. 모두가 모두의 적이었다.
충칭 전쟁은 국무원 총리 저우언라이가 1968년 5월 2일 충칭을 방문하여 두 파벌의 해산을 직접 명령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공산당 공식 기록으로만 3000명이, 비공식 추산으로는 최대 2만여 명이 전쟁의 직접적인 희생자가 되었다. 간접적으로 사망한 아사자, 동사자, 병사자와 부상자들은 집계조차 불가능했다. 전쟁 이전에 비해 충칭의 생산량은 75%이상 급감했다.
이런 전쟁이 중국 전역에서 벌어졌음.
문화대혁명의 본질은 '의도된 내전'임.
마오쩌둥이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잃어버린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당과 인민이, 인민과 인민이 누가누가 더 주석에게 충성하는지를 기준으로 서로 죽이도록 만든 정치적 공작임.
문화재 좀 때려부순게 중요한 문제가 아님.
첫댓글 진짜 악랄하다
고마워 글쓴여시! 삼체보다가 궁금해서 연어중인데 대체 저딴혁명이 왜 일어났나 이해가 안됐는데 이거보니까 이해됐어 ㅎㅎ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