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水軍のうち李舜臣の艦隊は日本水軍の先鋒を叩くことに成功したが、日本水軍本隊の圧力を支えき
조선수군의 이순신의 함대는 일본수군의 선봉을 공격하는데에 성공하지만 일본수군 본대의 압력을 견대지 못하고
れず、主力艦の温存策を取って全羅道北端まで撤退したために制海権を失い、朝鮮水軍は非主力艦や根
주력함의 보존을 위해 전라도 북단까지 철퇴했기 때문에 제해권을 잃고, 조선수군은 비주력함이나 근거지를
拠地を失った。朝鮮水軍の再進出は日本の陸軍と水軍の撤退を待たざるを得なかったため、鳴梁海戦は
잃었다. 조선수군의 재진출은 일본의 육군과 수군의 철퇴를 기다려야만 했기때문에, 명량해전은
戦局の大勢には影響を与えなかった局地的勝利と言えよう。
전황의 대세에는 영향을 주지않은 국지전의 승리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韓国側はこの戦いを“鳴梁大捷”と呼んでいるように「日本に大勝した海戦」と認識しており、日本水軍
한국측에서는 이 싸움을 "명량대첩"이라 부르는 것과 같이 [일본에 대승한 해전] 이라 인식하고 있고, 일본수군의
の参加兵力が「軍船133隻、運送船200隻」、損失が「沈没31隻、大破92隻、8000~9000人が戦死」とす
참가 병력이 [군선 133척, 운송선200척], 손실이 [침몰 31척, 대파 92척, 8000에서 9000명이 전사]
るなどの、戦果の誇張と思われる主張が見受けられる。 実際には船手衆として左軍に加わった日本水軍
라 하는 등의 과장된 전과라 생각되는 주장이 눈에 띈다. 실제로는 수군으로써 좌군에 참가했던 일본수군의 병력은
の兵力は藤堂高虎(2,800)、加藤嘉明(2,400)、脇坂安治(1,200)、来島通総(600)、菅平右衛門達長(200)
도도다카도라(2800), 가토요시아키(2400), 와키자카야스하루(1200), 구루지마미치후사(600) 칸헤이에몬 미치나가(200)
の7,200名であり, これに若干の他家の水軍を加えたとしても8,000人に満たないと思われ、さら
의 7200명이고, 이것에 약간의 다른 집안의 수군을 더한다 해도 8000명에도 미치치않는다 생각되고, 더욱이
に鳴梁海戦においては大型船(安宅船)を用いず、中型船である関船を選抜して攻めかかった旨が「高
명량해전에 있어서는 대형선(안택선)이 아닌, 중형선인 세키후네를 선발해서 쳐들어갔던 취지가, [타카야마공 실록]에
山公実録」に記されていることからすれば、上記のような韓国側の挙げる数字に無理があることは明白
기록되어있는 것을 본다면, 상기와 같은 한국측에서 말하고 있는 숫자에 무리가 있는 것은 명백
といえる。また、李舜臣自らが著した「乱中日記」には“賊船三十隻撞破”とあるだけである。
하다 할 수 있다. 또한 이순신 자신이 저술한 [난중일기]에는 "적선 30척 당파"가 있을 뿐이다.
なお、韓国ではこの海戦は歴史教科書にも載っており、国民に広く知られているが、内容としては「西
더욱이 한국에서는 이 해전이 역사교과서에도 게제 되어있고, 국민에게도 널리 알려져있지만, 내용으로써는 [서진
進しようとした日本軍に大打撃を与えてそれを阻止した」ということのみが強調されており、戦闘
하려하는 일본군에 큰 타격을 주었고 서진을 저지했다]라는 것만이 강조되어 있어, 전투후
の後に李舜臣が北方に退却し、日本水軍が西岸に進出して戦略目的を達成したという事実は、一般的に
이순신이 북방으로 퇴각하여 일본수군이 서해안에 진출하였고 전략목적을 달성했었다라는 사실은 일반적으로는
はほとんど認識されていない。
거의 모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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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일단 오해의 소지가 있을 것도 같아서 분명히 밝히겠지만, 이 글은 '위키피디아'에서 퍼온 글이며 저의 생각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또한 이 의견이 일본의 인식중의 하나 일 수는 있지만 일본 전체의 의견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번역에 관해선 번역기를 이용하지 않고 제가 직접번역을 하였습니다(의역과 직역을 섞어서 번역하였습니다).
요즘들어 다시 불멸의 이순신 드라마를 보고 있는데요, 기왕 일본에 있으면서 일본어도 어느정도 아니까 일본의 대표적
인 싸이트에서는 임진왜란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나 해서 뒤져본 겁니다. 예전에 불멸의 이순신 드라마가 한창 인기가
있을때도 일본네티즌들과 해전을 두고 싸운 적이 많았었다고 들었는데, 어쨌든간 '큰 윤곽'(예를 들면 언제 전투가 있
었다 등)은 거의 일치 하는데, 병사의 수와 그 밖에 전투의 평가는 '확연히' 다르더군요.(뭐 위의 명량해전에전에 대한
평가만 봐도 아시겠지만). 실제로 부산포 전투에 관한 건만 해도 우리측에서는 일본배들을 대파했던 승리로 보고 있지
만 일본측에서는 이순신의 공격을 저지했고(어쨌든 상륙해서 점령 못 했으니까), 이 전투이후 이순신이 부산을 공격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다들 아시지만 결국 이것때문에 역적으로 모함 받고, 원균이 부산으로 갔다가 칠천량에서 패배 조
선수군 전멸)일본측의 승리로 평가하고 있더군요. 전투의 평가야 다를 수 있다고는 해도, 동원된 함선의 수와 병력에
관해서는 어느나라의 자료가 더 정확할 지는 의문이 들기도 하더군요. 일본측에서야 당연히 한국측의 자료를 믿으려
하지 않을 테고, 우리측에서도 당연히 일본측의 기록을 믿으려 하지 않을 테니까요. 어쨋든 관심 있으신 분은 밑에 링
크를 걸어두니 원문을 봐 두시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생각합니다.
http://ja.wikipedia.org/wiki/%E9%B3%B4%E6%A2%81%E6%B5%B7%E6%88%A6
첫댓글 일본수군의 전략적 목표가 명량해협 돌파라는거 부터가 궤변 아닌가?
해협을 돌파만 하면 뭘하나 관광하러 왔나? 걔들 원 전략목표는 후방침투+육군에 대한 보급선 구축아니었나...
전투 끝나면 후방으로 정비&보급을 위해서 함대를 철수하는건 당연한거고 승리하긴 했지만 정말 기적일 정도의
신승인 상황인데 전력보존을 하는게 당연한거지 그러면 그 상황에서 한줌밖에 안되는 함대로 역공을 펼쳐서 나머지 일본군 본대를 전멸시키기라도 했어야 조선군의 승리라는 소린지? 누가보면 양측이 대등한 입장에서 전투를 벌인줄 알겠네. 아무리 우스개 소리로 치트공이라지만 너무한다.
좋은 정신승리이다...
일본위키가 극우들 놀이터라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요.
명랑해전 직후에 해얀선으로 급히 귀환하는 일본육군의 기동만 봐도 말 다한거 아님?
글쎄요, 정신승리가 아니라 자국의 자료에 기초해서 잘 작성한 글인데요? 상당히 객관적 사료=진지표 같은 것-을 잘 제시하여서 증거도 부족함이 없고, 일본군이 서해안에 횡횡헀던 것은 강황의 납치기록으로 잘 설명되니 헛소리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를 목표로 삼고 열심히 왜성을 쌓은 것도 사실에 부합하구요. 다만 직산전투 이후 결국 충청도로 진출하지 못하고 후퇴했던 것이랑, 명랑대첩 이후 전라도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던 것이랑은 설명하지 못하고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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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위기는 넷우익의 놀이터임여. 감안하시고 보셈.
그것을 잘 알지요. 그러나 그 사람들이 제출한 것은 상당히 신뢰성이 강한 사료입니다. 무작정 부정할 수 없는 것이지요. 물론 자신들에게 불리한 다른 측의 사료는 별로 인용하지는 않지만-가령, 이순신 장군의 장계- 최소한 자신들의 사료는 정확하게 제시하는 것이 저들의 특징입니다. 저 애들을 비판하려면, 교차검증 쪽에서 비판을 해야지, 그들이 제시한 사료가 틀렸다는 식으로 해서는 안되지요.
선전선동과 왜곡기술이 높은 수준에 올라가면 자료 자체를 손을 대지 않고 자료를 교묘하게 배치해서 입맛에 맞는 프레임을 짜는 형태로 나옵니다. 99%의 사실에 1%의 거짓을 섞는 것만으로 최고의 효과를 내던 괴벨스의 그것이 대표적이죠.
일본위키의 저것도 그 식입니다. 명량 이후 서해에 일본수군이 진입한건 국내에도 예전부터 (저는 4~5년 전에 워포그에서 처음 봤군요. 소설 '임진왜란' 에서도 삽입된 에피소드고.) 알려져 있던 일이니 특이할만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료소스를 조합해서 왜곡된 프레임을 짜는 건 딱히 바람직하진 않지요.
북마크님이나 무장공비님의 의견과 저의 의견은 차이가 없습니다.이미 위에서도 저들이 교차검증은 접어두고 자기들의 사료만 가지고 했던 것을 지적했습니다. 다만, 저는 일본 넷우익 어쩌구라고 해서 저들의 사료를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가령, 저들이 제시한 진군서-총 7천8백명 어쩌구 저쩌구-는 매우 신뢰성이 있는 자료입니다. 즉, 명랑해전 당시에 투입된 일본군의 수량을 알 수 잇게 해주는 것이지요. 그러나 한국측 연구에서 일본의 저런 사료를 얼마나 인용하며 교차검증을 했는지요? 제가 알기로는 이순신 장군의 장계만 의지하고 일본측 사료와 교차검층 작업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통상어른 장계 말고도 강향의 귀국보고부터 해서 명량해전 관련 일본군 병력규모 추정치를 조선 내에서 평가한 자료는 구하려 하면 얼마든지 구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군서에서 확인되는 그것, 한국측에서 추정한 병력규모에 비하면 상당히 부족하며, 실제로 간양록 등을 통해 하치스카 이에마사의 참전 가능성이 매우 높게 점처지고 있고 시미즈 요시히로 또한 최소한 후원했을 가능성이 점처지고 있습니다만, 그런거 하나도 계산을 안하고 있습니다. 일본위키측 주장만 따지면 임진년 해전 규모는 죄다 대폭 감소해요. 통상어른 장계 등에서 '일본육군 영주들 깃발을 단 함대'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데도 말이죠.
한국 학계에선 엄밀히 말하면 '전투같은 사소한 일' 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보이지 않는 데 가깝지요. 관련 논문을 예전에 모아봤을때도 일본해군 규모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철쇄설을 논파해 버리고 전투 전후의 조선수군과 통상어른의 동향 등이나 좀 파악하고 끝냅니다.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 가 아니라, 아예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가 현실이지요.
예, 북마크님의 말이 맞지요. 그러니 일본의 기록과 한국의 기록을 서로 교차검증 하면서 보다 정확한 상황을 파악해야지요. 일본 위키측의 주장이 아무리 넷우익 어쩌구 저쩌구라도 하더라도 그들의 사료가 신뢰성이 매우 높은 이상은-어떤 바보 멍충이가 가문 기록도 아니고 원숭이에게 제출할 군 문서를 가지고 장난을 칠련지요?- 무장적 비판하기보다는 왜 그러한 차이점이 생겼는지를 살펴봐야지요. 아니면 일본측 문서를 뒤지면서 다른 다이묘들이 참여했다는 기록을 찾아내던지요.
우리들이 반박해야 하는 것은 제대로 교차검증도 하지 않고 무작정 와, 일본수군 짱이다고 서술한 저들의 주장-그리고 한국측이나 중국측이나 다른 나라들이나 모두범하는- 이지, 저들의 사료가 아니지요.
정신승리.txt
서해에 진입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게 전략적, 전술적으로 무슨 의의가 있는지가 중요하지요. 아니 서해에 진입한 걸로 끝인가? 육군에 보급을 해준다는 목표가 실패했는데 그걸 승리로 볼 수 있는 건가? 좋은 정신승리로군요.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정말 조선 수군과 왜 수군이 대등한 전력으로 싸운 줄 알겠습니다.
아니 그러니까요. 서해에 진입해서.. 했는데 어쩌자구요. 모든 기동과 공격에는 전략적 목표의 획득이란 전제가 있는데 이 전략적 목표를 왜군이 획득했느냐? 그건 아니거든요. 하다못해 조선수군을 괴멸시켰느냐? 이후로 조선수군 버프받고 생산 잘만 찍어냅니다.
이순신 : 빨리 함대를 재건해야 우리 장병들이 좀 편하게 지낼텐데.....
조선왕조실록같은거에 적힌거 못믿으면 어쩌자는겨 임진왜란 찌발린거 하나도 빠짐없이 다적어놨는데 해전 몇번 이긴걸 우왕굳임 이거 과장해서 널리널리 퍼트리셈 이라고 할 인간들이 아니라서 그리고 명랑해전 이런건 이순신이 치트써서 이긴거 다알고있음 저건 치트안ㅁ썼을떄 예상 시나리오임 그리고 솔직히 쪽수 가후달리는데 몇첫씩 나눠서 서해에 떠있는걸 어찌 다잡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