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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Ej1TYiN6W9c?si=u5DXl-rmpNTPrn7V
(ATOS Trio: R.Schumann - Trio no.1 in d-minor, op.63)
정신질환 때문에 요양을 위해 드레스덴으로 옮긴 슈만이지만 나중에 그를 죽음으로까지 몰고갔던 이 병은 잠시 좋아졌다가 다시 발병하는 일을 반복합니다. 1846년 무렵부터 슈만을 괴롭히던 정신질환이 다시 악화되기 시작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만의 작품활동은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드레스덴 시기 슈만은 결혼 초와 같이 작품을 쏟아내듯이 작곡하지는 못했습니다. 라이프찌히 시대의 풍성한 결실들에 비하면 대단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음악적으로는 더욱 원숙해져 가고 있습니다.
1847년에 접어들자 슈만은 오페라 '게노베베'의 서곡을 스케치했구요. 그해에 피아노 3중주 2곡을 작곡했는데요. 1846년 봄부터 피아노 3중주를 쓰려고 계획했던 슈만은 1847년 6월에서 9월 사이에 피아노 3중주 작품 63을 작곡합니다.
이 시기 슈만 부부는 18개월된 아이를 잃는 슬픔도 겪었습니다. 이 일이 생긴 것이 바로 6월이었는데요. 클라라는 임신중이기도 했습니다. 슈만은 아이의 죽음으로 괴로워하는 아내를 옆에서 위로해 줬습니다.
당시에 이런 일을 겪었기 대문인지 슈만은 이 곡을 '어두운 기분일 때 만들었다'라고 쓰기도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슈만은 이 3중주의 작곡을 아내의 생일인 9월 13일 이전에 마치려고 했구요. 9월 7일에 작곡을 끝낸 뒤에 클라라의 생일에 이 작품의 악보를 선물했습니다.
초연은 1847년 9월 13일에 슈만의 집에서 이루어졌고, 같은 해 12월 11일 화가 벤더만의 집에서 공개 초연되었습니다. 슈만은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의 편성으로 된 3중주를 모두 4곡 남겼는데요. 그 가운데 한 곡에는 <환상 소곡집>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피아노 3중주로 불리는 3곡 가운데 1번에 해당되는 이 작품 63은 이 중에서 가장 자주 연주되는 곡입니다.
슈만( 1810.6.8~1856.7.29)
교양이 있고 예술적 감수성이 풍부한 가정(아버지는 학식이 많은 서점 주인, 어머니는 우수한 피아니스트)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로베르트 슈만은 거의 조숙한 재능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아홉살에 마적과 모셸레스의 리사이틀을 듣고 그는 피아노의 명수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그에게 전통적인 지식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 〈아비투어〉(고등학교 졸업시험)를 받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고전을 많이 읽었고 자연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예술에도 관심을 기울였던 슈만은 음악의 길로 향했고 12세 때 김나지움의 친구들과 오케스트라를 시작했으며 시편 제150편을 작곡하기도 했다. 1826년 잔 파울 리히터의 소설을 알게 되었고 의식적으로 리히터를 닮으려고 했으며 매사에 과묵해졌다.
1826년에 누님의 자살과 아버지의 죽음, 마지막으로 친구인 의사의 아내 아그네스 카루스 Agnes Carus에 대한 이룰 수 없는 사랑이 성장기의 위험의 빛을 더욱 짙게 만들었다. 어머니와 가장이 된 형은 그에게 라이프찌히에서 법률 공부를 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프란켄 지방과 뮌헨 여행(뮌헨에서는 H. 하이네가 냉정하게 맞이해서 그를 몹시 슬프게 만든다) 후에 라이프찌히에 정착했다. 아그네스 카루스가 그를 비크 Wieck에게 소개했고, 정확하고 횡폭하기까지 한 엄격한 비크의 교수 방법은 이 낭만주의적 젊은 예술가에게(특히 바흐에 눈을 뜨면서) 어느 정도의 엄격성을 가지게 했다.
곧 작센의 도시에 싫증을 느껴 1829년에 하이델베르크로 간 슈만은 그곳에서 무대에서의 최초의 성공을 거두었고,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한 후에-그러나 많은 독일의 예술가들과는 달리 이탈리아는 전혀 그에게 영향을 주지 못했다. 비크에게 계속 레슨을 받기 위하여 라이프찌히로 돌아왔다. 비크는 슈만의 어머니에게 그의 음악적인 재능을 납득시켰고 그를 훌륭한 피아니스트로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그때까지 시와 문학, 그리고 음악 사이에서 방황하던 슈만은 그때부터 자신을 가지고 자신의 예술에 몰두했다. 즉, 푸가와 대위법을 도른 Dorn에게, 피아노를 비크에게, 오케스트레이션을 뮐러 Mller에게 배웠다. 이미 몇 곡의 〈왈츠〉와 〈4중주곡〉, 〈피아노 협주곡〉(미완)의 작자였고, 하이델베르크에서 고전적인 형태를 따르면서 이미 전형적으로 낭만주의적인 아베크 변주곡으로 알려진 그는 잔 파울 리히터에 기초한 나비 op. 2를 작곡했다.
이어서 피아노의 연주 기술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미친 듯이 시도를 했으며 다른 손가락을 발달시키겠다는 이유로 오른손의 약지손가락을 지나치게 묶었기 때문에 결국 관절에 경직을 일으켜서 손이 마비되고 말았다. 명수로서의 장래는 끊어지고 작곡가의 길만이 남았다는 사실을 알고 동요하였으며 1833년 가을에는 심한 우울 상태에 빠졌고 형 율리우스와 형수의 죽음이 더욱 병을 무겁게 만들어 10월 17일 밤 슈만은 발광하고 만다. 그것은 1854년의 발작을 비극적으로 예고하는 발작이었고 이때부터 고소(高所) 선단공포증(先端恐怖症)이 후유증으로 남게 된다. 두려운 무기력 상태는 몇 달 후 회복되었고 1833년부터 1834년 겨울에 걸쳐서 라이프찌히로 돌아갔으며 즉시 음악신보 Neue Zeitschrift für Musik의 창간과 편집에 착수했다.
처음에는 몇 사람의 친구와 함께 했으나 대개는 혼자서 했으며, 그는 예술적인 속물들크라머, 체르니, 탈베르크, 루크가버 Ruckgaber, 마이어베어 등에 대한 다비드 동맹 Davidsbündler의 공격에 앞장섰다. 현학적이고 소심하며 보수적이어서 모짜르트, 하이든, 베토벤이 구현한 위대하고 진실한 음악을 망가뜨리는 자들이라고 고발했던 것이다. 이 지극히 중요한 출판물에서 슈만은 그 시대의 비판자가 되었고 편집 동인들은 여러 가지 펜 네임을 사용하면서도 서로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슈만 자신은 〈오이제비우스 Eusebius〉(우울한 몽상가)와 〈플로레스탄 Florestan〉(혈기로 서두는 정열가)이라는 두 이름을 사용했다. 같은 무렵 슈만은 헨리에트 포이크트 Henriette Voigt(a단조의 영혼)에게 열중했고 이어서 에르네스티네 폰 프렌켄 Ernestine von Frincken을 사랑했으며 한때는 약혼으로까지 진전하여 그 사랑에서 사육제 op. 9와 교향적 연습곡 op. 13이 태어났다.
1835년 4월, 슈만은 단 하나의 진정한 사랑에 눈을 뜨게 된다. 상대는 바로 클라라 비크였다. 그래서 슈만은 에르네스티네와 헤어지고(에르네스티네는 그 일로 인해서 슈만을 원망하지는 않았다), 클라라를 위하여 정열이 넘치는 소나타 op. 11, 14, 22를 작곡했다. 그 무렵 어머니가 작고(1836년 2월 4일)하자 비크는 예의 음악잡지를 떠나고 딸과 슈만의 교제를 일체 금했다. 그것은 다비드 동맹의 내분과 헨리에타 포이크트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있던 슈만에게 새로운 타격이었으며 그는 또 한차례 작곡에 몰두하게 된다. 피아노곡의 걸작인 환상곡 op. 17(음악에 있어서 낭만주의 헌장이라고 할 수 있다), 환상 소곡집, 8개의 노벨레트, 어린이의 정경, 크라이슬레리아나 등의 곡에서는 클라라에 대한 사랑과 또 그의 시각의 힘과 시적이고 낭만주의적인 감정이 돋보인다. 슈만이 충분한 수입을 갖게 되고 라이프찌히를 떠난다는 두 조건으로 비크가 결혼에 동의했기 때문에(동의하는 척했다) 슈만은 빈으로 갔으나 그곳에서 병적인 무기력에 빠지게 되었고, 그때부터 갑자기 열에 들떠서 잇따라 아라베스크, 꽃의 곡집, 1839년 3월 11일에 완성한 규모가 큰 유모레스크, 그리고 녹턴 op. 23과 빈의 사육제의 어릿광대 op. 26 등을 작곡했다. 클라라는 법률적 권리를 이용하여 아버지를 승복시키고 1840년 9월 12일 마침내 쇠네펠트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이 행복한 결말을 예감한 슈만은 봄부터 들뜬 기분으로 작곡에 몰두했다. 1840년은 실제로 가곡의 해로서(전 246곡 중 136곡이 만들어졌다) 이 가운데에는 여인의 사랑과 생애, 시인의 사랑, 리더크라이스, 두 사람의 척탄병, 미르테의 꽃, 로망스와 발라드 op. 45, 49, 53, 가곡집 제1집이 있다. 라이프찌히에서 소박한 생활을 하면서 클라라와 공동으로 감동적인 2개의 음성의 일기를 쓰면서 슈만은 작곡에 몰두하였다. 1841년 〈교향곡의 해〉에는 장녀 마리 Marie가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교향곡 제1번, 서곡, 스케르쪼와 피날레,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환상곡(1845년에 유명한 협주곡이 된다), 교향곡 제4번 등이 완성되었으며 이 곡들에는 슈만의 마음의 평정과 정열까지도 나타나 있다. 1842년에는 3개의 현악4중주곡 op. 41, 뛰어난 피아노5중주곡 E♭장조, 피아노4중주곡 같은 우수한 실내악곡들이 탄생한다.
1843년에는 엘리자 Elisa가 태어난 해이며 이 해에는 낙원과 요정 페리를 작곡했다. 그러나 경제적 곤란에 직면한 슈만은 러시아로의 연주여행을 결심한다. 이 여행 중 클라라는 때때로 슈만의 몇 작품을 연주하였고 성공을 거두었다. 라이프찌히로 돌아온 후 슈만은 다시 현기증과 류머티스가 발작하고 피로감이 겹치게 된다. 특히 친구인 멘델스존의 사임 후에 게반트하우스가 슈만을 빼놓고 게제를 후임 지휘자로 선출하자 라이프찌히를 몹시 싫어하게 된다. 그래서 1844년 가을 라이프찌히를 떠나 드레스덴으로 옮겼다. 곧 슈만은 음악생활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 힘썼으며(4개의 푸가 op. 72, 바흐의 이름에 의한 푸가), 리히테 라이니히 Reinich, 바그너 등과 친교를 맺으려고 하였으나 잘 되지 않았다. 작곡만이 그의 기분 전환의 수단이었다(교향곡 제2번). 그러나 대부분의 우울증 환자처럼 슈만에게는 변화가 필요했다. 빈에 재차 체류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결과는 별로 좋지 않았다). 드레스덴으로 돌아온 그는 낭만주의자들이 모두 그러하듯이 오페라를 통해서 자신의 가치를 남에게 인정시키려고 했다. 그래서 게노페파를 썼지만 가정 내의 여러 가지 걱정거리로 뜻대로 되지 않았다(딸 하나와 아들 셋이이중 한 아이는 곧 죽게 된다. 드레스덴에서 태어나게 된다). 특히 새로운 신체적 장애공포증, 환각, 청각 장애와 멘델스존의 죽음(1847년 11월 4일)에서 받은 충격 때문에 자연히 일이 늦어졌다.
건강이 회복되자 슈만은 현지의 합창단을 위해서 여러 가지 무반주 합창곡을 만들었으며 지휘도 했다. 이어서 1848년에는 피아노를 위한 새로운 작품(연탄곡 동양의 그림, 어린이를 위한 앨범과 만프레드 등)을 작곡했다. 풍요한 결실의 해라고 불리는 1849년에는 독창, 2중창, 합창을 위한 가곡, 피아노를 위한 작품(특히 op. 85), 미뇽을 위한 레퀴엠, "파우스트"의 정경 등이 꽃피게 된다. 1850년 5월 25일 라이프찌히 극장에서 게노페파가 상연되었다. 이 작품은 전문가에게만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슈만은 절망하였고 드레스덴이 싫어져서 뒤셀도르프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처음에는 원기를 회복하였고 건강해지는 것 같았던 슈만은 레퀴엠 op. 90, 레나우의 6개의 시를 썼고 10월에는 첼로 협주곡, 11월에는 교향곡 제3번("라인")을 작곡했다. 이렇게 쇄신하려는 의지로 창작을 서두를 생각으로 배 이상으로 노력했는데 그 이면에는 불치의 병이 감추어져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때부터 슈만은 창작을 위하여 그에게 남겨진 시간이 짧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다. 그래서 빨리 더욱 명쾌하게 작곡에 열중했다. 1851년에는 메시나의 신부, 줄리어스 시저, 헤르만과 도로테아를 위한 서곡, 피아노를 위한 무도회의 정경, 3개의 환상적 소품 op. 111, 엘리자베스 퀼만 Elisabeth Kühlmann과 뫼리케의 가사에 기초한 가곡, 실내악에서는 피아노3중주곡 제3번 op. 110, 바이올린 소나타 2곡(주제가 팽창하였고 지나치게 굳어 있다)을 작곡했다. 1852년에는 클라라가 휴양을 시켰는데도 불구하고 장미의 순례, 미사, 레퀴엠 등의 탄생을 보았다. 그러나 슈만은 점차 〈고통〉을 느끼게 되었고 그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나의 힘의 슬픈 고갈, 1852년 10월 28일에는 단념이라는 글귀도 보였다. 슈만은 이때부터 얼마 전까지는 열광하면 나타났던 숭고한 상태가 이미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한 모양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지니고 있던 언어를 이미 초월할 수 없었고 광기 속으로, 그것도 자신의 광기 속으로 도피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이었다. 1853년 5월 잠시 동안 자신을 되찾아서 협주곡, 이어서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환상곡을 작곡하게 된다. 그리고 또 몇 곡인가를 썼고(op. 134나 클라리넷과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옛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피아노곡으로 돌아와서 아침의 노래 op. 133을 작곡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침이 아니라 밤의 시작이었다.
1854년 2월 13일 정신 착란이 그를 엄습했다. 소강 상태 후에 그달 27일 슈만은 자신이 엔데니히의 정신 병원에 가기를 원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집을 뛰쳐나와 라인강에 몸을 던졌다. 그것이 심신 상실에 의한 행위였는지 아니면 반대로 절망의 최후의 행동이었는지는 수수께끼이다. 선원들에 의해 구조된 슈만은 5일 후에 엔데니히로 보내졌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참기 어려운 고통 끝에(정신적으로라는 것은 그가 자신의 상태를 자각하고 있었음을 말한다) 1856년 7월 29일 슈만은 그곳에서 죽게 된다. 2일 후 본의 묘지에 슈만이 매장된 후 클라라는 부지런히 생활을 위해서 나섰다. 그리고 7명의 아이(네 아들과 세 딸)와 함께 남은 클라라는 1896년 죽을 때까지 남편의 작품을 세상에 결정적으로 인정시키기 위하여 콘서트를 거듭하였다. 완전한 의미에서의 〈낭만주의자〉는 그 생애도 작품도 내면성과 정열의 영역안에서만 펼쳐지는 것인데 로베르트 슈만이 바로 그런 사람으로 보인다. 내면적이건 외면적이건 모든 현상의 자발적인 배양으로서의 내성, 탐구의 노력이 그에게 있어서 시적 창조의 기초를 이룬다. 그는 잔 파울 리히터가 1804년 이래 분명히 해온 이상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 이상이란 〈시적, 회화적, 음악적〉인 동시에, 우주의 한가운데에서 생물과 무생물의 조화를 발견하고 그 생물, 무생물의 숨겨진 생명을 통해서 그 감추어진 의미로서의 진정한 본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곳에서부터 광대한 부분이 꿈이나 환상(환상 소곡집, 노벨레트, 환상곡 op. 17)으로, 또 자연과 숲의 깊은 생명(숲의 정경)으로, 경이로움을 간직하고 다시 만들 수 있는 어린시절(어린이를 위한 앨범, 어린이의 정경)로 충만해 있다. 그리고 특히 영감, 이 내면의 힘으로 가득찬 부분이 정열을 위해서 작렬하고 예술작품이 되기에 이르렀다. 열광의 순간이 재빨리 파악되고 작곡에서(그러나 또한 대개의 경우 고통 속에서) 결정을 이루었고 영속성을 얻게 된다. 그것은 화가 프리드리히 Friedrich가 다음과 같이 바르게 보고 있는 바와 같다. 진정한 예술작품은 어느 것이나 신비할 때 구상하고 기쁠 때 종종 예술가 자신도 알 수 없는 가운데 마음 속 깊이 감추어진 충격을 받고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밑바닥에 있는 자아〉를 찾아내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숨겨져 있지만 예술가는 자신을 비출 수 있는 진정한 거울이라고 믿고 있는 또 다른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 몇 겹으로 닫혀진 문을 여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이 자기 자신의 〈분신 Doppelgänger〉과 슈만은 늘 함께 하고 있었다. 그는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의 이중성을 자각하여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가난한 동시에 부유하고, 쇠약한 동시에 힘차며, 인생에 지쳐 있으면서 정열에 차 있다. 파우스트적인 2개의 개성적인 존재에 대한 분열은 그것을 알게 되면 인격을 찢어서 팽개치고 또 곧 스스로의 운명적 비극을 불러일으킨다. 이때 이래 슈만의 이미 갈고 닦인 감수성은 자연 그대로인 동시에 병적으로 되기 시작한다. 그를 광기에 쫓기게 하는 자아의 붕괴는 결국 유전적인 요인만을 제외한다면 영혼이 감추어진 비밀을 찾아내려는 예리한 눈초리에 의한 것일 것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탐구하기 시작하는 것에는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다.
거기서 슈만의 언어와 창작 형식이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서법은 뛰어난 개성적인 것이며 그러면서 역설적으로 그 시대의 문법에 표현의 독자성, 슈만의 개성을 나타내고 있다. 형식은 그 대신 새로운 성격을 얻고 있다. 고전주의에 은밀히 사로잡힌 슈만은 소나타의 틀을 이용하려고 했던(특히 op. 11, 14, 22) 것이고 얼핏 가장 자유스럽게 보이는 곡(환상곡 op. 17)조차도 조직하는 의지, 저 유명한 〈감정을 바로잡는 규칙〉이 인정된다. 그러나 넘치는 상상력에 대하여 구원의 장벽으로 추구되고 이용되는 살아 남은 이 고전적인 형은 어느 곳에서나(교향곡에서는 약간이지만) 정열과 생명력, 그리고 내면적인 시의 압력을 받고 작렬한다.
그래서 슈만은 각각 새로운 얼굴을 보이는 환상곡이나 변주곡에도, 곡집으로 모아지더라도, 또 모아지지 않더라도 특히 소곡(Stücke)에서 가장 즐겁게 돌아다닌다. 또 슈만은 조화는 가곡에 기초가 있기 때문에 연작가곡집(시인의 사랑)이라는 확신을 거기에 주게 되고 더욱이 가곡에서 그는 자신은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고 시인 한 사람 한 사람의 독특한 개성을 잃지 않게 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다. 그래서 유절가곡(有節歌曲)은 하나도 없고 생명처럼 움직이고 있는 그의 훌륭한 성악곡은 그를 독일 가곡의 두 극(極)의 하나로 만들었는데, 그것들은 뛰어난 시에 대한 이해력을 말해주고 있다. 그것은 슈만의 교양에 의한 성과이지만 그것이 승화되어 그의 펜 끝에서 스스로 회화적인 묘사, 영혼의 상태, 감각이나 감정을 비치는 만화경으로 변하는 음악적 비단이 되는 그의 감정의 결정이기도 하다.
슈만의 경우 형식, 즉 양식 그 자체(피아노곡이라든가 실내악이라든가)가 포함하는 변전은 이렇게 하여 설명되는 것이다. 전율, 탄식, 서정적인 영감의 고조 또는 갑작스런 의기 소침을 편력하고 번갈아 서사시적이 되거나 고백조가 되기도 하는데 음악은 항상 변하지 않고 말하기 어려운 것을 설명하고 감추어진 것과 무의식적인 것조차 나타내는 것이다. 슈만의 모든 작품은 마음을 동요시키는, 괴롭고 긴 고백인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호기심이 많은 경탄할 만한 〈시인 음악가인〉 슈만을 매우 인간적으로 만들었고, 우리와 매우 가까운 존재로 만든 것이다. 시, 문학, 그리고 철학에 열중했던 슈만은 자신이 살았던 세기의 여러 가지 힘을 음으로 바꾸려고 힘썼고 진정한 것이기를 갈망함으로써 시대적 모순과 자신의 성격 속에 있는 모순을 끝까지 추궁했다. 따라서 슈만은 위험한 상태 외에서는 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의 광기는 횔더린, 호프만, 하이네, 바켄로더, 노발리스 등 많은 동시대의 예술가들의 광기와 똑같이 끝없는 극도의 긴장, 일상적인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을 잡으려는 이중적 동경에서 온 것으로 생각된다. 슈만은 그것들을 위해서 죽게 되더라도 순수한 낭만주의 음악가라는 자신의 운명을 수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슈만은 다음과 같이 썼다. 나의 음악은 평범한 인부의 일이 아니다. 이 일은 추호도 그런 것들과는 상관이 없다. 나의 음악은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나의 마음에 희생을 강요했다. 슈만의 위대함은 그 무서운 도박을 수용한 데에서 유래한다.
글쓴이 : ♡지기( 행복한 어린이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