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미년 3월 1일, 민족 대표 33인의 명의로 이 나라의 독립이 선언되고 ‘독립만세’의 고함소리는 3천리 강산에 메아리쳐 나갔다. 남자도 여자도 늙은이도 어린이도 모두 독립만세의 대열에 나섰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적의 총칼을 잡아 제끼며 다투어 앞장섰다.
경술국치의 불행이 있은 지 어언 10년간, 그 동안에도 애국 지도자들은 혹은 의병을 일으키고, 혹은 단체를 조직하고, 혹은 의협적(義俠的)인 활동으로 항일 구국 투쟁을 계속하였다. 애국 동포들은 그때그때 구국 운동에 협조하며 주권 회복의 그날이 오기를 고대하였다. 기회만 있으면 구국 대열에 나설 것을 마음속으로 다짐하였다.
제1차대전 중에 차례로 전해지는 약소민족들의 독립 선언·독립 투쟁의 소식은 동포들의 가슴을 설레이게 하였다. 뒤이어 전해지는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은 우리에게도 희망을 안겨 주었다. 국내외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서로 긴밀한 연락을 취해가며 파리에서 열리는 평화회의를 계기로 하는 독립운동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여기에 다시 고종황제의 붕어(崩御) 소식은 온 국민을 통곡하게 하였다.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에게 오래 동안 압제와 모욕을 당하며, 그러면서도 기회 있는 대로 애국지사들을 연락하여 주권 회복을 기도하던 한 많은 임금 고종황제였던 것이다. 세계의 평화적 건설을 의제로 하는 국제회의에 국민들과 함께 기대를 걸어보기도 하던 그 고종황제였다. 그러던 고종황제가 그것도 적측의 시해(弑害)로 하여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니 겨레의 통한과 비분은 다시 말할 것도 없이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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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겨레의 통한과 비분은 온통 3·1독립운동으로 집결되었다. 전쟁에서 평화에로, 폭력에서 자유에로 전환하는 세계적인 정치정세에 대하여 한 가닥의 희망을 안고 독립의 대열로 나섰다.
3월 1일 서울에서의 독립 선언 만세시위와 함께 평안남도의 평양·안주(安州)·진남포(鎭南浦)와 평안북도의 정주(定州)·선천(宣川), 함경남도의 원산(元山) 등 몇 도시에서는 같은 날 3월1일에 선언식과 만세시위가 있었다. 2일에는 황해도의 황주 및 겸이포(兼二浦), 평안남도의 중화(中和)·강서(江西), 함경남도의 함흥(咸興)에서도 일어났으며, 3일에는 다시 개성(開城)·수안(遂安)·봉산(鳳山)·의주 및 충청남도 예산(禮山)에서도 일대 시위가 있었다. 이리하여 만세 운동의 불길은 당시의 행정 구역으로 13도 12부(府) 232군(郡) 2도(島)에서 아니 일어난 곳이 없게 되었다.
또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은 헌병·경찰을 밤낮으로 동원하고, 군대까지 더 보내어 와서 무력·폭력을 마음대로 행사하며, 정의의 대열을 저지하고 애국 동포들을 검속·살상·곤욕하였다. 천인(天人)이 공노(共怒)할 야만적인 폭행을 제마음대로 행하였다. 수많은 애국 동포들이 침략자의 만행에 의하여 쓰러지고 감금되고 학대당하였다.
그러나 겨레의 의기와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한결같이 빼앗긴 나라를 찾고 주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뭉치고 앞장섰다. 아버지가 쓰러지면 아들이 앞으로 나서고 형이 붙잡히면 아우가 뒤를 따랐다. 적의 횡포가 심하면 때로는 한 걸음 물러서기도 하였지만 이것은 전진을 위한 후퇴였다. 겨레의 가슴 속에는 신성한 내 조국, 내 강산에서 원수의 일제 침략자를 몰아내고 반만년의 혁혁한 민족사를 다시 빛내보고야 말겠다는 독립정신으로 충만하였다. 운동의 방법은 경우에 따라 바꾸어지지만 목적은, 어느 때 어느 곳 누구에게 있어서나 동일한 것이었다. 겨레의 이러한 독립정신·독립투쟁은 목격하는 많은 외국인들을 감탄하게 하였다. 그 중에도 3·1운동 직후에 이 고장을 다녀간 외국인 기자 나다니엘 페퍼는 그가 본 한국의 독립 운동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현금 한국인은 남녀노유를 불문하고 일본에 대한 적개심(敵愾心)이 골수에 사무쳐 있다. 이러한 원한은 실로 합병 이래 10년 동안 점차 증가하였고 또 지난 3월 이래로 특히 격증하였다. 그러므로 한국인의 배일 사상의 근저(根柢)는 매우 공고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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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서 적어도 수세기(數世紀)를 지나지 않으면 이 사상이 제거되지 않을 것이다. 전번 일인들은 앞 일을 근심하여 회개하는 것같이 보이는데, 논리적으로 말하면 이것을 한국인의 승리라고 할지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민족적 사상이란 것은 천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금일의 한국인의 배일사상은 천성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어떠한 이론도 소용이 없다. 이것은 저들의 골수에 깊이 새겨지고 저들의 혈관에 스며 배인 것이니 여기에 대하여는 어떠한 개혁도 효능이 없다. 저들이 밤낮으로 원하는 것은 독립의 두 글자가 있을 뿐이다. 오직 ‘독립’ 뿐이다. 저들은 혹 일시 독립을 얻을 수는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독립을 얻기까지는 한국인은 결코 만족치 않을 것이다. 독립을 얻을 때까지는 최후의 1인이 남더라도 반드시 분투를 계속할 것이다……’1)
한편 3·1독립선언과 만세시위가 크게 진행됨과 함께 유교계(儒敎界) 인사들의 움직임도 활발해졌다. 당초 일제의 침략행위가 시작될 때부터 배일·항일운동에 앞장 섰던 영남(嶺南)·호서(湖西) 등지의 유생(儒生)들은 긴밀한 연락이 잘 되지 않은 관계로 독립을 선언하는 민족 대표단에 참가하지 못하였지만 충군(忠君) 애국을 근본 윤리로 삼는 이들이 이 시기에 잠잠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유생들 중에도 일본 인사들은 이미 1월(음 무오 12월)에 고종황제 붕어(崩御)의 소식이 전해질 때에도 고종황제의 폭붕(暴崩)의 원인이 저들이 말하는 뇌졸중(腦卒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침략자 일본 및 그 주구배(走狗輩)들이 음식에 독약을 넣어 시해(弑害)한 것이라고 하며, 국민대회의 명의로 격문(檄文)을 돌려서 선황제·선황후(명성황후)의 대수극원(大讎極怨)을 신설(伸雪)하자고 호소한 바 있었는데, 3·1운동이 일어나자 이들의 움직임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그중에도 일찌기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일어났던 충청남도 홍성(洪城)의 세칭 ‘홍주의병’에도 참모로 참가한 바 있던 보령(保寧) 출신의 유준근(柳濬根)과 백관형(白觀亨) 및 송주헌(宋柱憲)[전라남도 고흥군 출신] 등 10여 명은 3·1독립 선언과 시위가 있은 다음 날, 수창동(壽昌洞) 모 여관에 모여 성급하게도 융희(隆熙)황제의 복위로 인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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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제연맹 제1회 총회 준비위원회 조서 제30호 ≪조선문제≫중에 실린 논문 ‘한국운동의 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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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람(收攬)하여 독립을 성취하게 할 것을 결의하고 ‘강산도 전과 같고 궁실도 전과 같고 인민도 전과 같으니 다시 황제위에 좌정하여 1국을 호령하고 각국에 통보하십시오’ 하는 내용의 글을 지어가지고 3월 5일 유준근·송주헌·백관형 3사람이 청량리(淸凉里)로 나가 융희황제가 우제(虞祭)에 나가는 도중에서 글을 올리다가 적 경찰의 제지를 받아 크게 말썽이 일어나게 되었으며, 유생 어대선(魚大善)은 역시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많은 사람이 모인 기회를 이용하여 “지금 파리에서 민족자결주의가 제창되고 있으니 우리도 분발 노력하면 독립을 완수할 수 있다”는 의미의 연설을 하고 군중들과 함께 소리 높여 만세를 불러 적측을 당황하게 하였다.2)
이런 일들이 물론 독립을 성취하는 지름길은 될 수 없는 일이지만 온 겨레가 독립운동에 열중해 있는 시기에 있어서 일반에게 미친 영향은 적지 않은 일들이었다.
뒤를 이어 백관형은 다시 문성호(文成鎬)[양평군 유생]·조형균(趙衡均)·김극선(金極善)·문일평(文一平) 및 예수교 목사 김백원(金百源)·차상진(車相晋) 등과 함께, 3월 12일에 중국 요리점에서 회합하여, ‘조선 독립은 동포 2천만의 요구이다. 우리들은 손병희(孫秉熙)등 민족 대표의 후계자로서 독립을 요구한다’는 13도 대표 명의의 독립요구서를 지어, 그날로 1부를 총독부에 제출하고 1부는 문일평·백관형 등이 종로 보신각(普信閣) 앞으로 가지고 가 군중 앞에서 낭독하고 독립 운동의 분발을 촉구하기도 하였다.3)
한편 을미사변 이후 두 차례나 ‘홍주의병’을 지도한 바 있는 유학자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은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와 파리 평화회의 소식을 듣고, “구차스럽게 연명하여 온 지 10년 만에 이런 기회를 만났다”고 하면서 동지 유생 김덕진(金德鎭)·안병찬(安炳瓚)·김봉제(金鳳濟)·임한주(林翰周)·전양진(田穰鎭)·최중식(崔中式) 등과 함께 신의를 버리고 약속을 배반한 일본의 전후 죄상을 진술하고 온 국민이 독립을 열망하는 실정을 들어 연맹(聯盟)에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여, 문하생 황일성(黃佾性)·이영규(李永珪)·전용학(田溶學)을 서울로 보내서 임경호(林敬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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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형기(金炯璣) 등 202인 ‘예심 종결 결정서’ (경성지방법원 1919년 8월 30일자) 참조.
3) 동상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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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파리로 사절을 보내는 계획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와 때를 같이하여 영남의 유학자로 알려진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도 김창숙(金昌淑)·이중업(李中業).곽대연(郭大淵)·김정호(金丁鎬)·권상도(權相道)·장석영(張錫英) 등과 함께 역시 파리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할 것을 결의하고 곽종석이 지은 독립청원서에 서명하여 보내려고 하였다. 이들은 각자 비밀계획을 하는 중에 서로 만나 알게 되어 결국 의사·내용이 같은 것이기 때문에 유생들의 합동청원서로 보내게 되었는데, 영남·호서 유생들의 연명한 사람이 1백37명에 이르렀다. 이때 두 곳 유림 지도자들의 합의로 독립청원서는 곽종석이 지은 원문을 사용하게 되었는데 그 전문은 아래와 같다.4)
[독립청원서]
한국 유림 대표 곽종석·김복한 등은 삼가 글을 파리(巴里)평화회의 여러 대위(大位) 각하에게 드립니다.
대저 하늘과 땅 사이에 만물이 함께 자라나는 데 큰 광명이 비치고 큰 조화가 운행하는 것은 그 도를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쟁탈(爭奪)하는 말썽이 일어나면서부터 강자와 약자의 세력이 갈리고 병합하는 권도가 쓰여 지니 여기서 크고 작은 형세가 판이하게 되었으며 심지어는 인간의 생명을 독해(毒害)하면서 그 위력을 마음대로 행사하고 이웃나라를 도둑질하면서 그 소유를 자기 물건을 삼게도 되었읍니다. 아아! 천하에 어찌도 이런 일이 많은 것입니까. 이래서 하늘에서는 크게 인(仁)하고 무(武)한 이들을 금일에 내리시어 하늘과 땅의 마음을 받들어 화하게 하며, 큰 광명으로 쪼이고 큰 조화로 행하여 온 천하를 대동(大同) 세계로 돌아가게 하고, 1만 물건으로 각기 그 품성(稟性)을 성취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1만 나라는 같이 은혜를 받는 것이요 온누리가 한 수레바퀴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혹 말만 듣고 싶지 덕을 입지 못하며 원통함을 품고도 공공한 청문(聽聞)에 미치치 못하는 일이 있다면 여러
대위의 용심(用心)이 어찌 여기서만 다를 수 있을 것입니까. 거기에는 다른 어떤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피를 뿌리며 충정을 진술하고 머리를 들어 크게 부르짖는 것 역시 지극히 원통하고 당장 다급하여 제 스스로 그만둘 수 없는 심정에서 나오는 것이오니 여러 대위께서는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아아! 우리 한국은 원래 천하만국의 하나입니다. 3천리 국토의 2천만 인구로 유지 보전되기 4천여 년, 반도의 문명구역을 실추(失墜)하여 본 적이 없으니 만국으로서도 폐할 수 없는 일입니다.
불행하게도 근년에 와서 강한 이웃이 밖으로 제어하여 강제로 조약을 맺고 뒤 이어 국토를 뺏으며 황제를 폐하니 여기서 세계에 우리 한국이 없게 된 것입니다.
일본의 소위를 대략 들어본다면 병자년에 우리 대신과 강화(江華)에서 조약을 맺을 때나, 을미년에 청국대신과 더불어 마관(馬關)에서 조약을 맺을 때에 모두 우리 한국의 자주독립을 영원히 준수할 관건으로 삼았읍니다. 그리고 계묘년(광무7년 : 서기1903)년에 노국(露國)에 대하여 선전(宣戰)할 때에, 역시 열국에 대하여 통첩하기를 단연코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한다고 성명하였는데 이것은 만국이 모두 아는 바입니다.
이런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온갖 간사한 계교를 써가며 안으로는 협박하고 밖으로는 속이니 독립이 변하여 보호가 되고 보호가 변하여 합병이 되었읍니다. 한국 백성들이 진심으로 원한 것이라고 핑계하여 만국의 공의(公議)를 모면하려고 하니, 이것은 한국이 그들의 안중에 없을 뿐만 아니라 사실은 만국 역시 그들의 심중에 없는 것입니다. 만국의 제공은 정말 일본이 우리 한국에서의 소위에 대하여 공의에 손상됨이 없다고 할 수 있겠읍니까. 만국에 실신이 되지 않았다고 할 것이겠읍니까.
저희 나라 신민들로서도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분발한댔자 성공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읍니다. 그러나 밤낮없이 웅얼거리고 한숨지으면서도 이른 아침만 되면 우리 임금·우리 나라에 대해서 “하느님이시여! 우리를 돌보시사 좋은 시기가 빨리 돌아오게 하여 주십시오”하면서 수치스러운 것을 참고 간신전도(艱辛顚倒)하게 지내기 이제 10년이 되었읍니다. 여러 대위께서 평화회를 설치한다는 말을 들은 후로는 저희 나라 인민들도 모두 날뛰고 감격·흥분하면서 말하기를 “정말 만국의 평화를 위하여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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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라면 우리 한국도 만국의 하나인데 어찌 불평 불화가 있게 할 것인가.”고 하였읍니다. 그러다가 파란(波蘭) 등 여러 나라가 모두 독립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을 듣고는 또 다시 무리로 모여서 만세를 부르며 말하기를 “평화의 의논이 이미 정하여졌으니 그 나라는 어느 나라이고 우리는 어느 나라인가. 온 천하를 동일하게 보는 인(仁)이란 역시 이런 것이다. 하늘이 제대로 돌아올 때가 있다”고 하였읍니다.
여러 대위(大位)는 이제로부터 할 수 있는 일을 다하여야 하겠읍니다. 우리들은 이제부터 우리 나라를 가져야 하겠읍니다. 이렇게 된다면 우리는 당장 죽어서 구렁으로 굴러 들어가더라도 백골이 또한 썩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이 빠지도록 좋은 소식이 전해지기만을 기다렸읍니다.
그런데 어름어름하는 중에 하늘이 또 돌보지 않으시사 하루밤 사이 갑자기 저희 인군이 세상을 떠나시니 온 나라가 흉흉(洶洶)하고 애통함이 천지에 사무치지만 원통함을 풀 길이 없읍니다. 여기서 국장(國葬)날에 각 종교·각 사회단체와 개인 남녀가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쳐서, 우리 인군의 영혼을 위로하게 되었으며 체포 결박되고 매질과 살륙이 교대로 앞을 막지만 맨손으로 앞을 다투어 나가 죽기에 이르러도 뉘우치지 않으니, 여기서도 원통하고 억울함이 오래도록 쌓이면 반드시 터지게 됨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여러 대위께서 그 기회를 열어 주고 그 용기를 고무한 데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럭저럭 시일이 오래 갔는데도 아직 학실히 정하여 처리함을 보지 못하게 되니 또다시 의심하기도 하고 괴이히 여기게도 됩니다. 저희 나라에서 스스로 진달(陳達)할 길이 없기 때문에 중간에서일보는 자들이 이리저리 형편 보아 거짓을 꾸밈으로 하여 여러 대위의 시청(視聽)을 현혹시킴을 탄식하오며 다시 변명이 없을 수 없게 되는 바입니다.
하늘이 만물을 내릴 때에는 반드시 그 물건으로서의 능력을 갖게 하는 것으로서 작은 물건으로 물고기·조개류나 곤충들이라도 모두 자유의 활동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 되고 나라가 나라 되는 데에도, 원래 사람은 사람대로 나라는 나라대로 그 사람 그 나라의 다스려 나갈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이 작기는 하지만 3천리 강토 2천만 인구가 4천 년을 지나오는 동안에 넉넉히 우리 한국의 일을 맡아 할 인재가 끊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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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은 것이니 애당초에 어찌 이웃 나라가 대신 다스려 줄 것을 기다릴 것이겠읍니까. 1천리마다 바람이 같지 않고 1백리마다 풍속이 같지 않다고 합니다. 저들은 우리 한국이 독립할 수 없다고 해서 제나라의 다스리는 방법으로 우리 한국의 풍속 위에 더하려고 합니다. 풍속은 갑자기 변할 수 없는 것이요 그들의 소위 정치라는 것은 분란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기에 알맞은 것인즉 이것이 시행될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저들은 또 공회(公會)에서 설명하여 말하기를 “한국 백성이 일본에 부속되기를 바라는 지 오래였다”고 합니다. 대저 한국 백성이 스스로 한국 백성이 된 것은 그 강역과 풍토가 벌써부터 정해졌을 뿐만이 아니라 천성이 이루어진 것도 그러합니다. 이러므로 일시적으로 힘에 굴하여 위협하는 권력을 받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 마음으로는 천만년이 지나더라도 한국 백성이 된다는 생각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본심이 있는 것을 어찌 속이겠읍니까. 마음을 끝내 속일 수 없는 것인데 만국에서 다 함께 폐지한 위협하는 권력을 사용하여 1만 입으로 한결같이 나오는 공통된 의논을 누르려 하니 이것은 일본에 있어서도 잘하는 일이 아닙니다.
종석 등은 산야(山野)에 묻혀 있는 폐물로서 미쳐 외방 사실을 자세히 듣지는 못하지만 그런대로 옛 나라의 신자로서 선군(先君)의 유풍(遺風)에 의거하여 유교(儒敎)의 문에 종사하고 있읍니다. 지금 세계가 새로워지는 날을 당하여 나라가 있고 없어짐이 이 한번에 있게 되었으니, 나라가 없이 사는 것은 나라가 있고 죽는 것만 못하겠으며 벽지에서 자연 시드는 것이 어찌 많은 사람이 공공연히 듣고 다 함께 구경하는 곳에 몸을 바쳐서 한번 울분한 마음을 들어 내놓고 거기서 진퇴(進退)를 기다리는 것과 같겠읍니까.
그러나 생각하면 육해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막아 금지하는 것이 엄하고 급 하게 달려가도 도달하지 못하고 급히 불러도 들릴 수 없겠읍니다. 아침 저녁 구차히 연장되는 목숨이 도중에 없어짐을 구제하지 못하게 된다면 이 세상의 이 회포를 길이 드러낼 수 없이 될까 두려워 합니다. 이렇게 된다면 여러 대위의 신성한 총명으론들 어찌 반드시 듣도 보도 못하고 깊이 숨겨져 있는 우리 한국의 정황·사실을 생각해서 아실 수 있을 것이겠읍니까. 여기서 감히 짤막한 서신 1부로 동정의 사연을 모두 10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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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한 사실을 갖추어 풍편을 따라 천애(天涯) 만리 밖에 드리오니 진실로 슬프고 가슴 답답 간절한 마음 무어라 해야 좋을지 모르겠읍니다.
바라건대 여러 대위(大位)께서 어여삐 여기고 살피사 더욱 공판(公判)의 의논을 널리 하시어 큰 빛의 광명이 치우침이 없고 큰 조화의 운행이 순조롭지 않음이 없게 된다면, 종석 등의 무국(無國)이 유국(有國)이 될 뿐만 아니라 도덕상으로도 세상에 이만 다행한 일이 될 것인즉 여러 대위의 할 일이정말 끝나게 될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못한다면 종석 등은 차라리 목을 늘여 죽을지언정 맹세코 일본의 노예는 되지 않겠읍니다. 2천만 생명만이 천지의 육성(育成)에 관계가 되지 않겠읍니까, 조양서창(調養叙暢)하는 화기(和氣)에 유감 될 일이 아니겠읍니까. 여러 대위께서는 도모하여 주시기 바라나이다.5)
세칭 ‘유림의 파리장서(長書)’로 불리워지는 이 문서는 경상·충청도 일대 유림대표 1백37명의 연서 날인으로 파리평화회의에 보내게 되었다. 또 이 문서는 인쇄되어 국내 각도 향교 등에도 배포되었으며 원본은 주모 인물의 한 사람인 성주(星主) 출신의 김창숙(金昌淑)이 비밀히 국내를 탈출, 4월 하순 경 상해에 가지고 가서 불란서 파리로 우송되었다.6)
이런 유생들의 독립 청원 활동과 때를 같이하여 대한제국 시대에 외무대신과 학부대신을 지낸 바 있는 문인 김윤식(金允植)과 이용직(李容稙)은 연명으로 또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에 글을 보내어서 ‘10년간의 쌓이고 쌓였던 원한이 함께 폭발하여 조국의 독립을 부르짖는 우리 민족에게 박해와 살륙을 감행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며, 아무리 폭력을 남용하더라도 사람마다 마음속에 간직한 독립 두 글자를 없이하지는 못 할 것인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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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지산선생연보(志山先生年譜)≫ 기미년 3월조, 국사편찬위원회 엮은 ≪한국독립운동사≫ 3권 자료편 2(원문은 한문, 필자 국역). 두 원본에는 약간 자귀상의 상이가 있으며 또 ≪지산선생연보≫에는 상반부중 ‘불행하게도 근년에 와서 강한 이웃이 밖으로 제어하여 강제로 조약을 맺고 불행하게도 근일에 와서 상천이 돌보지 않고 국위(國威)는 떨치지 못하는데 도둑 신하는 안에서 싸우고 강한 이웃은 밖에서 엿보며 그 무력을 믿고 사사로운 지혜를 부려서 인군을 위협하고 백성의 입을 봉하며 강제로 조약을 맺고’로 되어 있기도 한데 이것은 정식 제출하는 문서를 작성하기 전의 초고(草稿)를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닌가 보여진다.
6) 일제 비밀문서 1919년 5월21일자 ≪조선독립운동에 관한 상해정보≫(4), 국사편찬위원회 엮은 ≪한국독립운동사≫ 3권 제2편 제2장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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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먼저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고 이를 관계 각국에 통고하여야 한다.’는 글을 보내고 이를 또 국내 각지 및 일본의 각 신문에도 보내어 발표하게 하였다.
이들 저명한 인물들의 이러한 일은 또한 국내외 인심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그중에도 김윤식은 일부에서 친일계의 인물로 지목을 받아오기도 하였으며, 또 그는 고종황제 붕어 전에 귀족 대표 이완용(李完用), 종척(宗戚)대표 윤덕영(尹德榮) 등과 함께 유림 대표로 ‘한족(韓族)은 일본정치에 열복(悅服)하고 분립(分立)을 원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증명서를 작성하여 서명 날인한 다음 고종황제의 비준압보(批准押寶)를 강요하였다는 말까지 전포되었던 것인데,7)이제 그의 이름으로 된 이러한 문서가 내외에 알려지니 그것은 사회적으로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키게도 되었던 것이다.
한편 3·1독립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됨과 함께 독립운동 지사들간에는 독립운동의 지원 및 체계적인 운동의 전개를 위한 단체 조직도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그 중에도 전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은 귀족·관리·유림·종교계·상공인·청년·학생·부인 등 각계 각층을 망라하는 ‘조선민족대동단’을 조직하고, 전에 농상공부대신 등 정부 중직을 역임한 바도 있는 김가진(金嘉鎭)을 총재에 추대하며 국내외를 연결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 오현주(吳玄洲)·이정숙(李貞淑)·오현관(吳玄觀) 등은 ‘혈성단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각지에 지부를 설치하고 3·1독립운동으로 투옥된 인사와 그 가족들의 구호 활동을 전개하며, 최숙자(崔淑子)·백성현(白性玄)·김원경(金元慶)·김희열(金熙烈)·김희옥(金熙玉)·경하순(慶河順) 등은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할동하기도 하였다.8)그리고 이렇게 운동이 장기화하자 독립운동 단체의 조직이 진전을 보임과 때를 같이하여, 일부 지도자들 중에는 다시 국내외간의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대외적으로 민족을 대표하고, 대내적으로 독립운동의 지도체계를 세울 수 있는 임시정부의 수립을 계획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국제·국내 정세에 적응하는 최선의 독립운동 방향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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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김윤식(金允植) 지은 ≪속음청일기(續陰晴日記)≫ 권 17, 기미년 3월28·29일, 6월 7일조. 동서 부록 대일본장서(對日本長書) 참조.
8) 국사편찬위원회 엮은 ≪한국독립운동사≫ 3권 제2편 제2장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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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1차세계대전과 국제정세
서기 1914~18년간에 있은 제1차 세계대전은 전쟁으로 인한 많은 손해를 가져오고 또 세계의 정세를 크게 바꾸어 놓기도 하였다.
이 제1차 세계대전은 당초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부처가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Sarajevo)에서 한 세르비아 청년에 의하여 암살된 것이 도화선이 되어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두 나라 사이의 교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전쟁은 일시 불의의 사실로 인하여 일어난 우발적인 사실이 아니었다. 또한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두 나라의 전쟁에 국한될 성질의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즉 불란서혁명과 산업혁명 이후 유럽의 여러 나라는 기계의 발명과 민주주의의 발전으로 지향(指向)하였으며, 또 다른 대륙을 지배하는 데에도 성공하였다. 그러나 국제 관계에 있어서는 ‘강자(强者)는 약자를 지배한다.’는 이론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기
때문에 정의보다도 권력을 앞세워서 남을 공격하는 전쟁을 꿈꾸게 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서로 군비 확장을 경쟁하게 되었다. 또 서로간의 동맹(同盟)과 계략으로 국제상에서 자기 세력의 우위(優位)를 유지하려고 하기도 하였던 것이니, 여기서 유럽의 강대국 중에서도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 등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3국동맹이 생기고, 다른 한편으로는 영국·프랑스·러시아를 중심으로 3국 협상(協商)이 이루어 졌던 것이다.
따라서 1914년 7월에 일어난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전쟁은 곧 3국 동맹 대 3국 협상 관계 여러나라의 전쟁으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여기에 다시 미국·일본·루마니아·벨기에·그리이스·포르투갈·몬테네그로 및 터어키·불가리아 등 많은 나라들이 함께 휘말려 들게 되었다. 그 동안에는 또 상호 세력 확대를 위한 권모술수(權謀術數)도 횡행하여, 3국동맹 즉 동맹국의 1원이던 이탈리아가 프랑스와의 관계로 개전 이듬해에 대 오스트리아 선전포고틀 하여 3국협상 즉 연합국 편이 되는가 하면, 일찌기 러시아와 싸운바 있는 제국주의 일본은 영국을 통하여 연합국 측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가하게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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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전쟁이 확대되는 중에는 예상 밖의 변화틀 가져오게도 되었다. 또 개전과 함께 중립을 선언하였던 미국 역시 대 교전국의 평화 교섭 권고가 실패로 돌아가게 되자 1917년 초 대독(對獨) 국교 단절의 뒤를 이어 중남미의 여러 나라들과 연합국편에 들어 전쟁에 참가하게 되니, 전쟁은 이름 그대로 세계대전으로 화하게 되었으며, 1918년 11월에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전쟁을 포기하기까지 5년간에 전사자 1천3백만, 부상자 2천5백만의 인적 손해와 1천8백60억 불의 군사비, 2천7백억 불의 물적 피해를 가져오는 데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니 이야말로 유사 이래의 대전란 대참화이었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정의보다 권력을 앞세우고 약소 민족에 대한 원조보다 침략 병탄(倂呑)을 일삼던 제국주의에 의한 바 컸던 인류사상의 대참화였던 것이다.
때문에 전쟁이 진행되는 중인 1917년 8월에도 로마 교황(敎皇)으로부터 도덕을 기초로 하는 국제 협조의 수립 등 7개 항목의 조건을 전제로 하는 강화(講和)의 제의가 있기도 하였다. 요는 도의적 행동에 의하여 인류의 참화를 적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도의적인 제의가 무력에 의하여 이해가 좌우되는 전쟁을 중지시킬 수는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전쟁은 결국 1년 남짓 더 계속되고 더 많은 인명·물자의 손실을 가져오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1918년 초에 참전국 원수의 1인인 미국 대통령 윌슨에 의하여 제기된 14개조의 강화 조건, 즉 평화 원칙은 많은 참전국 관민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윌슨은 전시중인 1918년 1월 8일 비밀 외교의 폐지를 내용으로 하는 제1항에서부터, 대·소열국이 모두 정치적 독립·영토 보전을 상호적으로 보장하는 국제기구의 설립을 내용으로 하는 14항에 이르는 강화 조건을 미국 국회에 제출하는 교서를 발표하였으며, 그는 그 후에도 기회 있을 때마다 이를 제창 강조하였는데, 그 중 대·소 모든 국가의 독립을 보장하기 위한 국제기구의 설립 같은 내용은 특히 열강의 공동 관심사가 되었으며, 또 제12항 등에 보이는 민족 자결 문제는 유럽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곳 약소민족들에게도 비상한 흥미를 갖게 하였다. 즉 ‘민족자결주의’에 관한 윌슨의 당초의 안은 전쟁관계 지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및 터어키 영내 민족들의 자결·자립을 말한 것이었는데, 강대세력에 의하여 주권을 유린당한 당시 세계의 여러 약소민족들은 그 민족자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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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이 전쟁 지역 이외의 피침략 민족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으리라고 믿게 되었던 것이다. 대전의 종결과 함께 강화회의가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서 열릴 때, 월슨 대통령과 함께 미국 대표단의 1원으로 참석하였던 미 국무장관 랜싱이 강화회의에서의 발언권을 얻기 위하여 모여든 단체나 비공식 대표단들이 빈번히 ‘민족자결’이라는 말을 되뇌이는 것을 보고 아래와 같이 적은 것도 당시 실정의 일면을 말하여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자결권에 관한 대통령의 선언을 생각하면 할수록 이런 개념을 어떤 민족의 마음속에 몰아넣는 위험성을 확신하게 되있다. 이것은 틀림없이 강화회의에 불가능한 요구를 내건 기초가 될 것이며 여러 나라의 분규를 만들어 낸다.
이것은 애란인·인도인·이집트인·보어인 내의 민족주의자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줄 것인가. 불만, 혼란, 반란을 조성하지 않겠는가. 시리아·팔레스타인·모로코·트리폴리의 회교도(回敎徒)가 이것에 의존하지 않겠는가. 대통령이 사실상 언질을 준 시오니즘 운동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이 용어는 정작 화약을 안고 있다. 그것은 결코 실현될 수 없는 낙망을 안겨줄 것이다. 나는 이것이 수천 명의 인명을 희생할까 두렵다. 결국 그것은 이 원칙을 강행하려는 사람을 저지하기에는 시기가 너무 늦었을 때까지, 그 위험을 깨닫지 못한 이상주의자의 꿈이라 불리고 평판이 나빠질 것이다. 이 용어를 표현한 것이 큰 재앙이었다. 어떤 불행을 이것은 일으킬 것인가.’1)
랜싱의 말은 과연 적중하여 아일랜드 기타 여러 전쟁 지역 외의 제 민족들도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고, 또는 민족자결주의 제창자인 윌슨 대통령에게 독립청원서를 내며 제국주의 침략자들에 대한 항쟁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한국에서도 그러하였다. 평화회의에 대표가 파견되고 윌슨 대통령에게 독립 원조를 청원하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의 강압 행위, 고종황제 붕어 등 내부적 사정과 함께 일어난 3·1독립운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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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버트랜싱(Robert Lansing)의 일기, 프랑크 볼드윈 ≪윌슨·민족자결주의·3·1운동≫, 동아일보사 엮은 ≪3·1운동 50주년 기념 논문집≫에서 재인용. 그런데, 윌슨의 평화 원칙 14개조 제기보다 앞서 1917년 8월에 있은 로마 교황 베네딕트 15세(Benedict XV)가 제의하였던 강화조건 7개 항목 중에도 제5항에 ‘민족 자결주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면 ‘민족 자결주의’는 윌슨의 독창적인 것도 아니며 또 비현실적인 것만도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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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 수만의 희생자를 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적 투쟁은 랜싱이 말한 바와 같이 다만 재앙이요 불행인 것만은 아니었다. 우리 겨례는 이 3·1독립운동을 통하여 반만년 역사 민족의 독립 정신을 크게 내외에 선양하였으며, 또 독립운동의 목적 달성을 위한 임시정부의 조직으로까지 나아가는 데에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쟁중에도 그동안 강대국의 압제하에 시달리던 여러 나라들이 주위 정세의 추이를 보아가며 독립을 선언하게 되었다. 즉 1916년 11월의 폴란드의 독립 선언을 위시하여 뒤를 이어 핀란드·에스토니아·아일랜드 등의 독립선언이 있었고, 휴전 직전에는 체코슬로바키아·유고슬라비아 등의 독립선언을 보게 되었는데, 그 중에도 오랜 동안을 두고두고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 등 인접한 제국주의 국가의 강압 하에서 신음하던 체코슬로바키아의 지도자 마사리크(J.G.Masarryk)가 미국의 대통령 윌슨과 회견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의 필요를 역설하며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 조국의 독립을 선언한 일 같은 것은 국내외에 산재해 있는 체코슬로바키아 국민들에게 뿐만 아니라 세계의 많은 약소민족 인민들의 감격을 자아내고 분발을 촉구한 바 적지 않았다. 중국 상해에서 이러한 국제 정세의 추이를 주의깊게 살피던 여운형(呂運亨)·장덕수(張德秀) 등이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대표하여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독립 청원서를 보냈던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한편 이러한 군소 민족들의 독립 선언·독립 국가 건설과 함께 강대국가들에도 변모를 가져왔다. 즉 강대제국의 하나이던 러시아는 1917년 3월에 제정(帝政)이 무너지고 공화 정체의 정부가 성립되었다가, 11월에 다시 레닌(N.Lenin)·트로츠키(l.Trotski) 등의 제2차 혁명에 의하여 쏘비에트 정권이 수립되었으며, 종전을 전후해서는 다시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 등이 모두 민주 공화제로의 전환을 선포하게 되니, 식민지 정치로 약소국가를 합병하고 약소민족을 괴롭히던 제국주의 정치는 사양의 고개를 넘어가는 감이 없지 않았다.
그 중에도 러시아의혁명 정권 수립은 국제·국내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다. 즉 대전이 진행되는 중 도처에서 패전을 거듭하던 러시아는 자연 국력의 쇠퇴, 경제계의 악화, 국민 생활의 불안을 극도에 이르게 하였으며, 여기에 따라 수도 및 지방에서 노동자·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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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의 동맹파업이 일어나고, 전제군주이던 니콜라이 2세(A.D.Nikolai)는 퇴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이러한 정세는 다시 진전하여 11월에는 소위 볼셰비키의 11월 혁명으로 무산자의 공산 정권을 수립하게 되었는데, 러시아의 이러한 급전환은 당시 전국에 미친 바 영향도 컸지만 두고두고 세계의 자유 민주주의 정치 체제를 이간 분열하는 공산주의 체제의 기반을 닦아놓는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공산주의 체제의 성립이 제1차대전 전후 노령·만주 방면에서의 우리 독립운동에 미친 바 영향도 여러 가지로 적지 않았지만 특히 상해에서의 통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업무를 진행하는 도중에 일어났던 좌우익 간의 분규·충돌 역시 이 공산 러시아정부의 발전과 관계가 깊었던 사실이었음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이 제1차세계대전을 전후하여 변천되던 국제 정세 중에는 우리와 가장 역사 관계가 깊은 중국의 정치 정세의 변동도 우리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중국은 이미 한국에서 경술국치의 불행이 있은 다음 해, 즉 서기 1911년에 신해혁명으로 손문(孫文) 등에 의하여 남경에서 혁명 정부가 조직된 바 있었지만 원세개(袁世凱) 등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 군벌 세력이 끈질기게 여기에 맞서 혁명 진행을 방해하였으며, 전부터 자리잡은 영국·프랑스·러시아·일본·독일 등 열강의 침략 세력이 경쟁해 가며 기회를 노리니 동양의 노대국은 그 전도를 예측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따라서 유럽에서 세계대전이 일어나자마자 영국과 독일의 함대가 산동성(山東省) 교주만(膠州灣)에서 교전하는가 하면, 일본군은 독일에 대할 선전의 뒤를 이어 청도(靑島)를 점령하고 중국의 군벌 정부에 대하여 21개조의 요구 조건을 제출하며 강압적인 최후통첩까지 발하여 이듬해 즉 1915년 5월에는 조약에 조인을 보게 되니, 이것은 유럽의 대 전쟁으로 하여 열강이 아시아에 손을 쓸 겨를이 없는 기회를 이용한 일본의 간교한 침략 전술의 승리였던 것이다.
이때 일본에서 중국에 제출한 21개의 요구 조건이란 실로 방약무인(傍若無人)한 것으로서 남만주와 동부 몽고가 정치·경제·군사 면에서 일본에 예속되고, 산동반도에서일본의 경제·정치 세력의 우위가 인정되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한야평공사(漢冶萍公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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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 공동 경영, 복건(輻建) 연해에 대한 일본의 간섭, 각 분야에 걸친 일본인 고문의 빙용(聘用), 병원 등 토지의 구매권, 중·일 양국 합판의 경찰 군기창 설립 등, 마치도 1905년에 있은 한국의 을사조약을 방불케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원세개 정부는 어리석게도 일본의 요구 조건을 거의 그대로 승인하는 조약에 조인하게 되니, 여기서 여순(旅順)과 대련(大連)은 1997년까지 조차(祖借)가 연장되고, 남만주철도는 2001년까지, 안봉(安奉)철도는 2006년까지 일본의 장기 경영에 속하게 되었으며 이듬해에 일본은 다시 러시아와의 비밀 협정을 통하여 중국, 특히 남만주와 동부 몽교에 대한 특수 권익을 인정받게도 되었던 것이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던가. 신규식(申圭植) 등 중국에서 그 나라 혁명 동지들과 뜻을 같이하던 우리 지도자들로서도 통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으며, 뒷날 우리나라에서 3·1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될 무렵, 1919년 5월 4일 북경에서 중국 학생들이 ‘중국은 중국인의 중국이다!’ ‘21개조를 폐제(廢除)하자!’ ‘산동의 권리를 회수하자!’ ‘서사(誓死)코 청도를 탈회하자!’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구국 운동을 크게 벌였던 것도 너무 당연 한 일이었다. 한편 대전 기간 중 또는 뒤를 이어서도 계속되는 일본제국주의의 이러한 대륙 침략 행위는 같은 피해를 입은 한·중 두 나라 인민들의 공동의 분노를 자아내게 하였으며, 또 중국 인사들로는 자기들의 자신의 구국운동·혁명투쟁으로 여가가 없는 중에도 후일 우리 임시정부의 조국 광복 운동을 끈기 있게 지원하는 정신적 뒷받침이 되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제2절 해외의 독립운동과 조직
1. 만주 방면
한반도와 가장 가깝게 인접해 있는 곳이 만주요, 또 우리 겨레와 가장 인연이 깊은 곳이 만주이다. 즉 고조선시대 이래로 발해조(渤海朝)[서기 699∼926]까지 우리의 민족 국가가 관할 통치하던 곳이 이곳이며, 거기에는 또 그 후에도 많은 우리 겨레의 유민(遺民)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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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서 그대로 정착하여 오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고려조·근세조선조 이래도 만주 방면이 우리의 영역에서 제외된 것은 아니었다. 정부의 힘이 미치는 대로 민중들이 발길이 닿는 대로 압록강·두만강 서북쪽의 지방을 관할하고 개척하였으며, 또 민중들이 생활의 터전으로 삼기도 하였다. 그것은 옛날 지도 중에서나 ≪동국여지승람≫ 중에서 이 두 강 건너편의 지역이 많이 우리 군현(郡縣) 조(條)에 포함되어 있음으로도 알 수 있는 일이다.1)따라서 최근세에 이르기까지도 국경 문제에 대한 큰 관심이 없이 우리나라의 서북·동북 지방의 민중들이 수시로 이곳을 왕래하고 또 정주(定住)하였던 것 이다. 또한 침략자 일제(日帝)의 세력이 한반도를 휩쓸 무렵 여기에 항거하여 싸우던 많은 의병부대가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만주 지방으로 들어간 것이나, 국운(國運)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던 융희 4년 봄에 신민회(新民會)를 중심으로 한 민족 지도자들의 중대 회의에서 만주 방면에 해외독립운동 기지 및 무관학교의 설립을 결의하였던 것도 이러한 역사·지리적 관계에서 연유(緣由)되었던 일이다. 따라서 이 만주 방면에는 전부터도 국내에서의 흉년 기타 관계로 하여 많은 동포들이 들어가서 생활의 터전을 마련하고 정착하였지만, 융희 4년 8월에 치욕적인 합방조약으로 하여 국내에서 발붙일 여지가 없게 된 다음에는 항일 구국의 큰 뜻을 품은 동포·지사들이 물결 밀리 듯이 이 지역으로 넘어갔으며, 또 저들의 소위 동척(東拓)의 설치 등 계속되는 악랄한 방법에 의하여 농지를 빼앗긴 동포들이 계속 만주로 몰려 들어갔다. 저들 일제(日帝)에 의하여 작성된 통계에 의하더라도 융희4년 남·북만주에 재류하던 동포의 수는 5만2천여 명이었는데,2)한 해가 지난 1912년에는 일약23만8천여 명에 달하였다는 것이니 그간의 정황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이 지역에 이주하는 동포의 수효는 계속 증가하여, 1917년까지는 33만7천4백여 명에 이르렀는데, 여기서 1917년까지 6년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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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용국(金龍國), 백두산고(白頭山考) ≪백산학보(白山學報)≫ 제8호 중 ‘국경문제의 경위(經緯)’ 참조.
2) 일제시 소위 조선총독부 척식국(拓殖局)에서 1918년 12월에 작성한 비밀문서 ‘조선 외에서의 조선인 활동 상황 일반, (≪신동아≫ 1967년 2월호 수록) 중에는 남북 만주 재주 동포수가 1910년에 5만2천여 명임, 1911년이 5만7천여 명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같은 일제측의 문서인 회령(會寧) 및 간도 사정’ 등에는 경술 전인 1906년, 소위 통감부(統監府)의 간도파출소가 있을 당시에도 간도 일대에 재주 동포의 수가 10여만 명이었다고 하여 크게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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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연도말 재류민 통계를 보면 아래와 같다.
1912년말 238,403명
현명
호수
인구
합계
남
여
안동(安東)
296
994
663
1,657
관전(寬甸)
786
1,717
1,146
2,863
즙안(輯安)
5,600
17,118
11,145
28,533
회인(懷仁)
2,650
8,088
3,392
13,480
통화(通化)
2,055
6,165
4,110
10,275
임강(臨江)
2,330
7,012
4,667
11,679
봉천(奉天) 부근
45
196
91
287
본계(本溪)
38
124
69
193
장하(莊河)
93
287
185
472
봉황(鳳凰)
87
279
186
465
1914년말 271,388명
1915년말 282,070명
1916년말 328,298명
1917년말 337,461명3)
그러면 이들 만주 방면 재주 동포들의 현지 입주 상황은 어떠하였던가. 각 현(縣)별 숫자를 보면 아래와 같다.
_______________
3) 주(註) 2)의 문서 중 만주 재주 조선인 수(제1호). 그런데 1912년 이후의 숫자에 있어서도 만주 방면 재주 동포들의 통계는 약간씩의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같은 저들의 기록 중에서도 ‘간도사정(間島事情)’에는 1917년의 통계가 32만11명, 1918년의 것이 32만 9천3백91명으로 되어 있으며, 아래에 보이는 1913년 6월 현재의 만주 각 현 재주 조선인 수는 25만4천8백68명으로, 경술국치 후에 연도별 이주 통계표에는 1912년 9월부터 1918넌 6월까지의 만주 일대 이주 조선인 총수가 14만8천9백46명으로 적혀 있어, 전주자와 합하더라도 통계 숫자상 차이가 있음을 본다. 그러나 이러한 다소의 차이는 그 조사 시기 및 조사 대상지역 또는 그 동안에 환국한 동포들의 수효(일제측 집계에 의하면 1910년 9월부터 1918년 6월까지의 사이에 만주 방면에서 환국한 동포의 수가 3만3천5백50인이었다고 한다)와도 관계가 있었다고 볼 수 있는 만큼 대체로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인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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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경(興京)
480
1,038
464
1,502
해룡(海龍)
473
921
586
1,507
유하(柳河)
1,062
3,218
2,138
5,356
무송(憮松)
880
2,520
2,000
4,520
안도(安圖)
795
2,276
1,742
4,018
장백(長白)
3,850
7,948
6,132
14,080
화룡(和龍)
7,328
20,711
19,694
40,405
왕청(旺淸)
1,845
5,508
4,097
9,605
연길(延吉)
20,144
52,348
46,427
98,977
혼춘(琿春)
830
2,782
2,408
5,194
계
51,657
141,254
113,614
254,8684)
여기에 의하면 1913년 6월, 즉 경술국치 후 3년을 지난 이때, 우리 동포의 만주 지방 재주 호구는 5만1천6백57호에 약 25만5천 명에 달했던 것인데, 그중 제일 많이 거주하던 곳이 연길현의 2만여 호 약 10만 명이요, 그 다음이 화룡현의 7천3백여 호 4만여 명, 즙안현의 5천6백 호 근 3만 명, 장백현의 3천8백50호 1만4천 명의 순위 등으로 되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이른바 북간도·서간도 지방에 해당하는 그곳들이 역사·지리적으로 인연이 깊었기 때문에, 경술국치와 함께 또는 그 이전부터도 우리 동포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또 전체적으로 보아서 남자 수가 여자 수효보다 많은 것은 짐작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그중 호구가 많은 지방에는 남녀 인구의 차이가 심하지 않은 데에 비하여 호구가 적은 지방에는 남자편이 여자의 인구수에 비하여 월등하게 많은데, 이것은 많이 입주해 있는 지방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정착해 있거나 또는 가족과 함께 들어간 사람이 많은 데 비하여 수효가 적은 지방에는 대개 임시 또는 부득이한 사정으로 해서 독신으로 들어간 동포들이 많았던 사실을 설명해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면 여기서 다시 이렇게 만주 각지에 입주한 사람들 중에는 본국에서 어느 지방
_______________
4) 조선총독부 문서≪국경청국관계서류≫중 ‘대안 지나령(支那領) 이주 조선인 조사표’(19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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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도 입주지역 연도
경기
충북
충남
전북
전남
경북
경남
황해
평남
평북
강원
함남
함북
합계
1912년 12월
북간도 서간도 기 타 계
91 165 39 295
7 22 56 85
18 - - 18
- - 1 1
4 - 1 5
- 5,116 59 5,175
259 2,691 15 2,965
34 36 2 72
90 270 18 378
80 2,283 453 3,816
116 1,311 5 1,432
939 410 976 1,432
635 6,841 4,729 2,325
24,273 19,145 6,354 34,205
1913년
북간도 서간도 기 타 계
54 44 13 111
- 28 13 111
- 28 4 32
- 6 3 9
- - - -
132 3,125 32 3,289
35 1,604 28 1,667
204 151 13 360
444 310 29 486
80 2,187 230 2,497
1,297 266 543 2,106
376 745 - 1,021
4,877 690 1,192 6,759
2,202 9,312 2,083 18,597
1914년
북간도 서간도 기 타 계
8 21 38 67
284 - - 284
2 - - 2
- - - -
4 - - 4
51 254 28 333
3 11 20 34
2 67 1 70
16 40 27 83
1,193 463 143 1,799
69 181 18 263
575 267 793 1,685
4,519 634 1,188 6,341
6,443 1,938 2,252 10,631
1915년
북간도 서간도 기 타 계
2 7 29 38
- - - -
- - - -
- - - -
1 1 - 2
15 112 3 130
- 32 78 110
60 48 29 137
43 207 34 284
123 5,359 3 5,435
30 43 17 90
419 750 814 1,302
4,350 89 1,174 5,613
5,042 6,057 2,181 13,861
1916년
북간도 서간도 기 타 계
6 16 73 3
23 1 9 1
- - 10 -
2 - 5 -
- - 30 -
11 102 21 134
1 190 - 191
57 54 66 177
112 127 212 451
55 3,483 878 4,386
31 19 127 177
167 183 797 1,741
3,740 873 2,039 6,471
4,208 5,008 4,235 13,501
1917년
북간도 서간도 기 타
3 19 142
1 99 3
- - 24
- - 1
- - 35
11 19 120
- 524 236
65 54 97
200 152 322
163 2,532 3,797
37 7 51
429 912 819
6,760 947 1,552
7,718 4,795 6,178
사람들이 많이 들어가게 되었던 것인가도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통계상에서 나타난 각도별 출신의 입주자 수를 보면 대략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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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PageAnchor(98)
계
164
103
24
1
35
280
787
198
674
5,041
145
1,760
9,257
18,911
1918년 6월
북간도 서간도 기 타 계
59 51 83 193
13 36 4 53
- - 1 1
1 - 2 3
5 - 140 145
379 2,488 76 2,943
16 871 49 936
245 95 69 409
509 610 118 1,237
353 3,391 1,913 5,657
297 640 51 988
1,197 548 353 2,098
7,949 598 1,046 9,593
11,028 9,328 3,905 24,256
소계
963
558
64
10
211
12,284
6,690
1,431
3,593
28,131
4,116
12,457
78,441
148, 9495)
여기에 의하던 1912년 9월부터 3·1운동 전 해인 1918년 6월까지 5년 10개월간에 만주 방면으로 이주한 우리 동포는 약 15만 명에 이르는데, 그중 제일 많이 이주한 도가 함경북도로서 전 인원의 50%를 넘는 7만8천4백여 명에 달하고, 다음은 평안북도의 2만8천여 명인 것으로서 이것은 무엇보다도 지리적 조건과 생활환경 관계에 연유한바 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다음은 함경남도와 경상북도가 1만2천 수백 명씩으로 거의 비슷한 숫자를 보이고 있는데, 두 도가 모두 산간 지대임에는 동일한 바 있지만 국경 지대에서 거리가 먼 경상북도에서 이렇게 많은 이주 동포가 있었다는 것은, 그곳이 오랫동안 절의파(節義派) 유교인의 본고장이었던 데에 연유한바 컸던 것으로 보여 진다. 그것은 건양 원년 이후 유림들을 중심으로 하는 항일의병이 끈질기게 항전하였던 사실이나, 김동삼(金東三)·이상룡(李相龍) 등 이 지방 출신 독립운동자들이 일찍부터 만주 방면으로 나가 독립 운동에 동분서주하였던 사실로 미루어서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또 함남·북, 그중에도 함경북도에서는 매해 절대 다수의 동포가 북간도 방면으로 갔던 데에 반하여, 평안도 및 경상도 등의 이주 동포는 대다수가 서간도로 갔던 것은 지리적 조건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경기도만은 1912~3년 중에서는 서·북간도 지방 이주가 많았지만 1914년 이후로 서·북간도 지방보다도 기타 지방으로 이주가 많았는데, 영농생활보다도 상업 기타 방면으로 생황을 구하였던 데에서 연유된 사실은 아닌가 보여 진다. 또
_______________
5) 조선충독부 척식국 작성 비밀문서 ≪조선 외에서의 조선인 상황 일반≫중 ‘병합 이후 외국이주 조선인 누년 비교표’(제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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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도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함경북도의 이주 동포 중 전원 7만8천여 명의 44%에 해당하는 3만4천여 명이 1912년 9월~12월 4개월간에 이주했다는 것과, 그 후부터는 매해 감소 일로를 걸어서 1915년에는 5천6백 명에 이르고, 그 후부터 다시 매해 증가하여 1918년에는 1월~6월간의 이주민 수가 약 9천6백 명에 이르렀다는 것은 그 원인을 다시 한번 연구해 볼 문제가 아닌가 생각된다.
한편 이렇게 많은 동포들이 이주하는 만주 지방에는 일찍부터 동포들의 자치 생활 및 독립 운동을 위한 단체가 조직되기도 하였다. 일제의 침략 군대들과 항전하다가 강을 건넌 의병 부대들, 그 중에도 유인석(柳麟錫)은 즙안현(輯安縣)에서 보약사(保約社)를 조직하고, 백삼규(白三圭)·조병준(趙秉準)·전덕원(全德元)은 환인현(桓仁縣) 등지에서 농무계(農務契)·향약계(鄕約契)를, 홍범도(洪範圖)·차도선(車道善) 등은 장백현(長白縣) 등지에서 포수단(砲手團)을 조직하여 동포들의 정착·자치 생활과 함께 독립운동의 항구적인 기반을 닦기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 중에도 가장 뜻 깊은 단체 조직의 출발은 경술국치 이듬해 봄에 유하현(柳河縣)에서 있은 경학사(耕學社) 및 부민단(扶民團)의 조직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처음 경학사의 조직이나 뒤를 이은 부민단의 조직 운영이 모두 경술국치를 전후해서 국내 애국지사들의 비밀 조직이던 신민회(新民會)의 해외 독립 기지 설치 계획에 의하여 실시되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저들 침략자들의 극성이 이 나라의 운명을 최후의 구렁으로까지 밀어 넣게 될 무렵, 이 나라의 애국 정수분자 4백여 명으로 조직된 독립 운동 단체 신민회(新民會)의 간부진 및 일부 우국지사들 간에는 만주 방면의 이민 및 독립군 양성을 계획하여 왔으며, 그중 서울의 명문이요 일찌기 평안남도 관찰사·고등법원 판사 등의 요직을 지낸 바도 있는 이시영(李始榮) 같은 사람은 가산을 방매하고 이회영(李會榮)·이철영(李哲榮) 등 형제들과 일부 지사들과 함께 먼저 나가 유하현 삼원보(三源堡)에 정착하기까지 하였다.
또 비운의 경술국치가 있은 다음 서울에서는 국내에 남아있던 신민회의 간부진인 양기탁(梁基鐸)·이동녕(李東寧)·김구(金九)·안태국(安泰國)·주진수(朱鎭洙)·이승훈(李昇薰)·김도희(金道熙) 등이 긴급회의를 열고, 서울에는 일본의 총독부에 대립하는
- 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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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독부(都督府)를, 각도에는 총감(摠監)을 두어 국맥(國脈)을 유지하며 만주에 이민을 실현하고 무관 학교를 설치하되 자금을 15일 이내로 판비하기 위하여 아래와 같이 도별 책임자와 금액을 결정하기도 하였다.
도별
책임자 성명
금액
황해도 평안남도 평안북도 강원도 경기도
김구 안태국 이승훈 주진수 양기탁
15만원 15만원 15만원 10만원 20만원6)
이 모금 계획은 뒤이어 안명근(安明根) 및 신민회 간부진인 양기탁·김구·이승훈 등이 적측에 검속당함으로 하여 이루어지지 못하였지만, 이를 전후해서 육속·유하현으로 이주 정착한 이시영·이동녕·이상룡(李相龍)·김동삼(金東三)·윤기섭(尹琦燮)·김창환(金昌煥)·이광(李光)·주진수(朱鎭洙) 등은 1911년 봄에 이역 황야(荒野)의 신산(辛酸)한 곁방살이에서나마 일찌기 신민회에서 결의한 바 있는 독립 기지설치, 군관 양성의 사업으로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신흥(新興) 강습소를 설치하였다. 경학사는 이름 그대로 농사짓고 배워서 독립 국민의 자질을 갖추고 독립 운동의 터전을 마련하자는 의미요, 신흥강습소는 조국 광복의 핵심 인물인 청년 군관의 양성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따라서 경학사의 사장에는 이철영(李哲塋)이 추대되고 신흥강습소에 소장에는 이동녕이 추대되어 우선 초창기의 사업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여기에도 농사의 흉작, 자금의 결핍, 원주민들과의 알력 등 난관과 애로는 허다하였다.
_______________
6) 김구 자서전 ≪백범일지(白凡逸志)≫중 ‘민족에 내놓은 몸’ 조, 채근식(蔡根植) 지은 ≪무장독립운동비사≫ 및 일부 기록에는 신간회에서 해외 독립 기지 설정, 군관학교 설치 및 평남 북·황해·강원·경기 5도에서 75만원을 모금 결정한 것이 1909년 봄에 있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백범일지≫ 중에는 이 회의의 결의 내용에 대하여 분명히 ‘왜가 서울에 총독부를 두었으니 우리도 서울에 도독부를 두고…’라 하였으며 또 ‘대표들은 급히 맡은 지방으로 돌아가서… 15일 이내로 판비하기로 결정하였다’고 적은 다음에, 경술년 11월 초하루 아침에 서울을 떠나 사리원(沙里院)을 거쳐 안악군(安岳郡)으로 돌아가서 인근 고을의 동지들과 비밀히 연락을 하는 중 안명근(安明根)이 적측에 잡힘으로해서 자신도 연루자로 검속당하였음을 말하였다. 따라서 여기서는 직접 참가자의 수기(手記)인 ≪백범일지≫의 기록을 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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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본국으로부터의 이주 동포들의 수는 날로 증가돼 가고 동지들의 인고 노력이 보람을 거두어, 이듬해 가을에는 경학사를 해산하는 대신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하여 활동을 보다 광범위하게 전개하는 동시에, 소재지를 유하현 추가가(鄒家街)에서 90리 떨어진 통화현(通化縣)의 합니하(哈泥河)로 옮기고 신흥강습소도 함께 이전하여 제2의 새 기지를 정하였다. 따라서 여기서부터 발전은 거듭되어 1913년에 신흥강습소는 새 교사의 낙성식과 함께 신흥학교로 승격되었으며, 교장에 여준(呂準)이 선임되고 졸업생 조직의 신흥학우단도 이루어져서 처음 목적하였던 그대로 독립전선의 역군을 양성하는 군관 학교로서의 구실을 다하게 되었던 것이다.7)
한편 ‘부민단’은 초대 단장 허혁(許赫), 2대 단장 이상룡 등을 중심으로 하여 꾸준히 자치·교육 등 사업을 수행하여 나갔다. 그 중에도 부서 조직에 있어서는 중앙부에 서무·법무·검무(檢務)·학무·재무 등을 두었으며, 단장과 각 부서 주임 관할하에
지방(地方) : 1천 집, 즉 큰 부락에는 지방단 조직을 두되 그 우두머리로 천가장(千家長) 1 명을 둔다.
구(區) : 약 1백 집 정도의 부락에는 구단(區團)을 조직하되 구장 또는 백가장(百家長) 1명을 둔다.
_______________
7) 원의상(元義常 : 전 신흥무관학교 교관) ‘만주 독립군의 활동’(≪신동아≫1969년 6월호)참조. 단 학교 명칭에 대하여 원씨의 전기 회고적 서술에는 이때부터 신흥무관학교라 하고 초대 교장에 여준이 임명되었다 하여, 다른 기록들에 보이는 3.1운동 후 신흥무관학교라 하고 초대 교장에 이시영(李始榮)이었다는 내용과 다른데, 이것은 신흥강습소 또는 신흥학교가 모두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이기 때문에 다른 여러 기록에서도 혼동되고 있음을 볼 수 있는 일이다. 또 병신년, 즉 1916년 경부터 동교의 학도감·강습소장·교장 등을 역임한 바 있는 고광(古狂) 이세영(李世永)의 친필 수기 ≪고광연보≫에 의하면 아직 출국하기 전인 1914넌 조에는 조카 종옥(種玉)을 보내어 통화현 신흥학교에 들어가게 하였다 하고, 도만(渡滿)후인 1914년 조에는 봄에 통화현 합니하의 신흥강습소로 가서 학도를 교수하였다고 하였으며 이듬 해 6월조에는 또 신흥강습소 소장에 임명되고 겨울에는 중앙교육회 총회에서 강습소를 교회·학교로 하고 그대로 교장에 피임되었다 하였다. 그리고 고광이 그대로 교장으로 있던 무오년(1918) 5월 초에는 본교 창립 제7회 기념식을 거행하고 백두산 위에 해와 달이 2중으로 빛나는 모습을 형상하는 교기를 제조하였다고 하였는데, 역시 명칭을 신흥무관학교라고 하였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신흥강습 소나 신흥학교가 같은 신흥무관 학교의 전신이었던 만큼 신흥무관학교로 통칭되기도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 3.1운동 후에, 이시영을 교장으로 하는 신흥무관학교의 정식 명칭이 생기기 전까지는 신흥강습소 또는 신흥학교였으며 그 간에는 굴곡(屈曲)·기복(起伏)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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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牌) : 10 집 정도 되는 곳에는 패장, 혹은 10가장을 둔다.
따라서 부민단은 이러한 4단계의 조직을 통하여 통화·임강(臨江)·유하·해룡(海龍)·몽구(蒙口) 등 각 현에 산재해 있는 동포들을 결속하고 계몽하였다. 특히 일본인을 귀자(鬼子)로 호칭하고 이귀자와 교통 연락하는 자는 엄벌에 처했으며 모든 민사(民事) 관계의 일도 이를 심리 판결하여 처리하는 등 이주 동포들의 자치 기관의 임무를 수행하였던 일들도 특기할 만한 일이었다.8)
1919년 3월, 3·1독립운동이 국내외에서 크게 일어남과 함께 ‘부민단’은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대동 단합의 자치 단체로 유하현 삼원보(三源堡)에서 한족회(韓族會)가 조직되었는데, 이 한족회는 곧 부민단의 모체 위에서 이루어졌던 것으로서, 그 부서에 있어서도 중앙부서의 단장·주임을 총장(總長)·부장(部長)으로 천가장을 총관(總管)으로 명칭의 일부를 고치는 데에 그쳤던 것이다. 그리고 이 ‘한족회’의 재정 부담으로 임시군정부(軍政府)를 수립하였는데 이 군정부는 곧 뒷날 대한민국 임시정부 소속으로 대일 항전을 담당하게 되었던 서로군정서(西路軍姃署)의 전신이었다.
한편 경학사와 신흥강습소가 세워질 무렵인 1911년 북만주 방면에서는 서일(徐一) 등이 의병 및 청년 지사들을 모아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였다. ‘중광’의 명칭은 그들이 신앙하는 대종교(大倧敎)의 4대 경절의 하나인 ‘중광절’에서 의미를 취한 것으로서 오랜동안 묻혀 있던 대종교가 기유년(己酉年) 정월 15일의 포교로 거듭 빛나는 것처럼 잃어버린 이 나라, 이 겨레의 빛을 다시 빛내 보자는 것이었다.
단장인 서일은 단원들을 결속하여 민족정신 교육에 주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대종교의 포교와 명동(明東)학교의 교육 과정을 통하여 항일 구국 사상을 고취 앙양해서 이주 동포들을 독립 운동 진영으로 결속시켰다.
그리고 3·1독립운동의 전개와 함께 중광단의 토대 위에 군사적 적극 활동을 펴기 위한 정의단(正義團)을 조직하였다가, 그 해 8월에 다시 서일·나중소(羅仲昭)·김좌진(金佐鎭)
_______________
8) 채근식(蔡根植) 지은≪무장독립운동비사≫중 제3장 2 ‘부민단과 한족회’ 조 및 조선총독부 척식국 작성 ≪조선 외의 조선인 상황 일반≫중 ‘재외 조선인의 결사단체 및 배일사상 단체의 개황’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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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을 중심으로 하는 군정부(軍政府)를 조직하니, 이 군정부가 곧 뒷날에 서로군정서와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전신이며 또 유명한 청산리(靑山里) 승첩(勝捷)을 가져오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 외에도 3·1독립운동이 일어난 후 북만 지역에서는 안도현(安圖縣)에 이규(李圭)를 총재로 하는 ‘대한정의단 임시군정부’가, 연길현(延吉縣)에 이범윤(李範允)을 총재로 하는 의군부(義軍府)가 조직되었으며, 또 남만의 유하현에서는 의병장 박장호(朴長浩)를 총재로 하는 ‘대한독립단’이 조직되고, 압록강 대안인 안동현(安東縣)에서는 안병찬(安秉瓚)을 총재로 하는 ‘대한독립청년단’이 결성되어 국내의 3·1운동 계승으로 독립의 기필 성취를 다짐하고 독립 운동의 총본부가 될 수 있는 임시정부 수립의 기운을 조성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참고로 3·1운동 전 해까지 만주 방면에 있던 독립 운동 조직, 즉 저들이 배일적결사(排日的結社)라고 보던 단체들을 보면 대략 아래와 같다.
단체명
소재지
설립년월
책임자
비고
중국연합전도회
연길현 국자가
1913. 8
회장 형두기(荊頭基)
부회장 이동휘
경독회(耕讀會)
왕청현 대감자(大坎子)
1914. 3
회장 황성룡(黃成龍)
백일단(百一團)
북간도
미상
이기태(李基笞)
종교 단체 표방 국권 회복 운동
KY친목회
화룡현 덕신사(德新社)
1916. 10
회장 노상렬(盧相烈)
창동(彰東) 학교 교우회 가장 배일 운동
동성한족생계회 (東省韓族生計會)
길림
1917. 12
발기인 정안립(鄭安立)
독립 자치 목적
동지회
혼춘현 대륙도구(大六道溝)
1918. 3
국회 회복 기도
식산회(殖産會)
연길현 와룡동(臥龍洞)
1910.-
주재자 장기영(張基永)
일명 군무부(軍務部)·결사대
일심보험회(一心保險會)
밀산현 봉밀산사(蜂密山子)
1915. 12
회장 팽덕후(彭德厚)(중국인)
한·중인 친목 협력보국
요동연합통신사
길림
1916. 2
사장 박공문(朴公文)
신한일보 연락 기관
의용군
혼춘
미상
군무장(軍務長) 황병길(黃丙吉)
국내 공격 기도
유신계(有紳契)
애혼성(愛琿城)
미상
주재자 명희조(明熙祚)
국권 회복 기도
- 104 -
writePageAnchor(104)
한민계
즙아현 구룡면(九龍面)
1913. 1
한민 자치 회의 후신
상합회(相合會)
장백현 장백가
1913. 1
회장 천상운(千祥雲)
친중 흥한 목적
신민회9)
임강현
미상
총재 김영구(金永久)
배일 흥한 기도
금란계(金蘭契)
무송현
1913. 1
계장 김성계(金星契)
계원 5백여 명
중앙교육회
통화현 합니하(哈泥河)
미상
회장 김극(金極)
의사회
환강현
미상
주재자 조동준(趙東準)
공동정리회(共同正理會)
유하현 삼원포
1914. 5
회장 왕삼득(王三得)
이주민 복리 증진 표방
서간도 한교 동지회
장백현
1915. 3
회장 김병릉(金丙凌)
복국당(復國堂)
통화현 통화
1914. 11
당수 이제선(李濟善)
당원 5백 명
부민단10)
유하현 삼원포
미상
단장 허혁(許爀)
복국당 지부
산동
1915. 8
지부장 왕삼득
흥국 동맹회
통화현 합니하
1914. 2
단장 이탁(李沰)
회원 863명
광제회(廣濟會)
환인현 환인
미상
회장 이홍주(李鴻周)
군무 총장 이석대(李碩大)
보생단(保生團)
임강현 홍토애(紅土溝)
1915. 12
단장 현학여(玄學汝)
친목회
임강현 모아산(帽兒山)
1916. 6
부회장 김태형(金泰衡)
단군 역사 계승 목적
농무계(農務契)
장백현 16도구
1914. 10
회장 강경원(姜景元)
대한광복군
무송현
미상
수령 성호(成浩)
한족생계회
통화현 합니하
1917. 11
회장 여준(呂準)
백산단(白山團)
무송현 백두산
1913.-
단장 이상규(李相珪)
단원 3백 명
한족생계회 분회
장백현
1918. 3
분회장 이청포(李淸浦)
수의계(守義契)
관전현 청산구(靑山淸)
1907.-
계장 이조응(李照應)
노·독 제휴 국권 회복 기도
한민인상회(韓民仁想會)
임강현 내
1917. 12
회장 강강법(康綱法)
의성(義成) 학교 중심
_______________
9) 이 신민회(新民會)의 명칭은 국내에 있었던 신민회와 동일하다. 이세영(李世永)의 ≪고광연보≫ 중 기미련 조를 보면, 이보다 앞서 영남인 이상룡(李相龍)은 자신계(自新契)를 조직하고, 평안도 사람 양기탁(梁起鐸)은 신민회(新民會)를 설치하여 서로 알력이 있었다고 하였는데 여기에 보이는 신민회가 ≪고광연보≫ 중의 양기탁이 설치하였던 신민회와 동일한 것이었던 지도 모르겠다.
10) 부민단의 설립은 여기는 미상으로 되어 있지만 위에서 보인 바와 같이 1912년 봄이었다.
- 1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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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상해(上海) 방면
중국의 관내 지방, 그 중에도 상해·남경 등지에서 우리 독립 운동 지사들이 활동하고 또 조직을 갖기 시작한 것은 만주 방면보다는 늦게 경술국치 전후부터의 일이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이 방면의 지리적 조건이, 같은 중국이면서도 우리나라와 육지로 인접해 있는 만주와는 달리 멀리 서남쪽으로 넓은 바다를 격해 있는 데에 그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경술국치를 전후해서는 상해·남경 및 북경·천진(天津) 등 중국 관내 방면에도 우리 동포들의 왕래가 자주 있게 되고, 그 중에도 상해는 당시 동양에서 둘도 없는 국제 자유 도시로서 중국의 각 지방은 물론 세계 여러 나라와도 교통 연락이 편리하여 우리 동포들의 자유 활동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해 방면에서 처음에 있은 우리의 독립을 위한 단체 조직으로는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와 동제사(同濟社)가 있었다. 두 단체는 모두 그 명칭이 의미하는 것처럼 겨레가 다같이 합심하여 독립 국가 건설에 노력하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대동보국회는 경술국치 전 융희 2년(서기 1908)에 사무실을 상해의 자격납로(喇格納路)에 설치하고 왕래 동포간의 연락은 물론 독립운동을 위한 인재 모집 및 활동을 집행하였는데, 그 중에도 융희 2년 3월에는 장홍지(張鴻志)·신구영(申龜永) 등이 금전을 모아 블라디보스톡에서 발행되는 ≪해조신문(海潮新聞)≫의 경제적 보조로 제공하기도 하였다. 또 서기 1914년에는 신규식(申圭植)·박은식(朴殷植)이 대동보국단(大同輔國團)을 영도해 가면서 독립 운동을 담당하기도 하였는데, 그때 단의 본부는 상해의 불란서 조계(租界) 내 명덕리(明德里)에 두었으며 시베리아·간도(間島) 및 국내 평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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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는 남만의 부민단과 함께 북만에서 활동하던 중광단(重光團)이 보이지 않는데, 그것은 서일(徐一)을 위시한 중광단의 중심 인물들이 대중교인이었고 또 이 시기에 와서는 중광단이라는 명칭보다도 대종교의 종교 활동을 내세우고 활동하였던 데에서 연유한 것이 아닌가 하고 보여 진다.
11) 조선총독부 척식국 작성 비밀문서 ≪조선 외에서의 조선인 상황 일반≫ 중 ‘만주 재주 조선인 배일 결사’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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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였다.1)
그리고 상해지방을 중심으로 많은 지식인·독립 운동자들을 모아 이루어졌다. 조직체로는 동제사(同濟社)가 있었는데 이 동제사는 예관(睨觀) 신규식에 의하여 창설되고 운영되던 조직으로서 임시정부가 수립되기 전 상해 방면에 있어서 독립 운동의 가장 중요한 거점(據點)이 되었다.
신규식은 원래 충청도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총명·영리하여 신동(神童)의 칭호를 듣기도 하였지만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또한 대단하였다. 한어(漢語)학교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을사조약’의 소식을 듣고는 의병을 일으켜서 대일 항전을 준비하다가 적에게 탐지당한 바 되어 여의하게 되지 않으니 비분한 마음을 참지 못하여 음독순절(飮毒殉節)하려 하던 중, 그도 여의하지 못하고 약독으로 하여 오른쪽 눈이 흘겨보기가 되었는데, 그의 호 예관이 여기에서 생겨진 것이다. 눈이 그래서만 아니라 겨레가 자유를 잃고 비인간적인 고통과 학대를 당하는 이 죄악의 세상은 원래가 흘겨보기에나 알맞다는 의미도 포함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다시 경술국치의 비운을 당하고 보니 그는 중국으로 나가, 손일선(孫逸仙)등이 일으킨 신해(辛亥) 혁명에 참가하여 중국의 혁명 지사들과 생사고락을 같이하며 그들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리고 상해·남경 등지에 왕래 거류하면서 차츰 모여드는 망명 동지들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였는데, 본국을 탈출하여 나오는 애국지사들이 많아짐에 따라 동제사의 조직도 점점 기반이 튼튼해지고 운동이 활발하게 되었다. 동제사는 그 ‘동제(同濟)’의 의미가 말하듯이, 동포들이 다같이 한 마음 한 뜻으로 같은 배를 타고 피안(彼岸)에 도달하자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표면적인 또는 현실적인 생활 개척의 방안도 필요하지만 우선 침략자 일제(日帝)의 세력을 몰아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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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지연(張志淵) ‘해외일기(海外日記)’≪신동아≫ 제92호·이상구(李相九) 엮은 일제비밀문서 ≪상해가정부의 조직과 활동≫(동상 제30호) 참조. 이 ≪대동보국회≫와 ≪대동보국단≫은 몇곳 자료 중에서 ‘회’와 ‘단’이 혼동되고 있는데 여기에 보이는 대동보국단 역시 대동보국회의 계속이 아닌가 보여 진다. 그리고 이 무렵 미주(美洲)에서 장경(張慶)이 안창호(安昌浩) 중심의 공립협회(共立協會)와 깃발을 달리하여 대동보국회(大同輔國會)를 조직하고 여러 곳에 지회(支會)를 두었으며, 1908년 3월에는 그 회원인 장인환(張仁煥)이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를 사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상해의 대동보국회(단)와 미주의 대동보국회가 어떤 관련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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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강산을 되차지하는 것이 급무였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동제사는 곧 독립 운동 단체요, 그것은 또 상해를 중심으로 한 중국 관내 지역에 있는 우리 동포들의 상부상조의 기관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른 아침 한 밤중에
묵도하고 천궁(天宮)에 절하옵니다.
대도(大道)는 사곡(私曲)이 없는 것이
지성이면 감통(感通)한다네.
세상 변천은 이제 몇번이나
쓰리고 아픈 일들
2중 3중 겹치누나.
말만으로 되는 일 없는 것이
실천해야만 성공한다네.
그리운 강산 어디로 찾아가나
풍랑에 같은 배를 탄 것이.
제제다사(濟濟多士)들 장하기도 하구나
성성한 백발에
기개 아직 웅대한 것을.
임 계신 곳 찾아가는데
이 동제사의 대표 인물인 신규식의 아래와 같은 시도 동제사의 이러한 취지 및 앞으로의 전망을 말하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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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사공이요 타수(舵手)라네.
일심으로 피안(彼岸)을 향해
어기여차 저어 가세나.
환영하고 축하하는 날
그 즐거움 무궁하오리.
때는 8월 중강(中江)상에서
예관(睨觀)은 국궁배례(鞠躬拜禮)하옵니다.2)
신규식과 함께 또 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홍명희(洪命熹)·조소앙(趙素昻)·문일평(文一平)·박찬익(朴贊翊)·조성환(曹成煥)·김규식(金奎植)·신건식(申建植) 등, 이야말로 제제다사가 동제사의 중견 간부로 활동하였으며, 사원의 수는 3백여 명에 이르고 구미(歐美) 등 해외 각지에는 분사(分社)를 두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신규식은 중국의 혁명 지사들인 송교인(宋敎仁)·진영사(陳英士)·호한민(胡漢民)·대계도(戴季陶)·서겸(徐謙)·장부천(張溥天)·양서감(楊庶堪)·여천민(呂天民)·당소천(唐小川)·황개민(黃介民)·양춘시(楊春時)·백열무(柏烈武)·장정강(張瀞江) 등 많은 당대 신예 인물들과 친근한 교제를 가지며, 서로 독립혁명운동을 협조함은 물론 한·중 양국의 지사 청년들로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환구(環球) 중국학생회 등 단체를 조직 또는 운영하여 공동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한·중 지사들의 친선 협조 관계는 뒤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성립된 다음에도 더욱 양국 간의 친선 협조를 돈독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3)또 상해에서는 신규식 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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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규식 지은 [아목루(兒目淚)≫
3) 민석린(閔石麟) 지은 ≪신규식선생약전≫·송상도(宋相燾) 지은 ≪기려수필(騎驪隨筆)≫ 중 신규식 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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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완구(趙琓九)·김백련(金白蓮)·백순(白純)·박찬익(朴贊翊)·정신(鄭信) 등의 주도로 국조 단군을 숭봉하는 대종교(大倧敎)의 교회가 설치되고, 경일(敬日 : 일요일)의 경배식(敬拜式)과 함께 3월 15일 어천절(御天節), 10월 3일 개천절 등 경절에는 원근의 거류 동포들이 참석하는 경하식(慶賀式)을 거행하여 겨레 고유의 전통 사상을 선양하였는데, 이러한 종교적 의식에 의한 행사가 동포들의 단합과 경각심을 촉구하는 데에 이자지한 바 컸던 것이다.4)그리고 이러한 경절 축하식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후에도 계속되었으며 그 중에도 개천절의 경축은 후에 시작된 3·1절 경축과 함께 8.15 해방 후 대한민국의 경절 의식으로 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한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조직되기 전 해인 1917년 6월 말 현재 상해를 중심으로 한 중국 동남부 지역에 거주하는 우리 동포들의 수효는 아래 표와 같이 전한다.
상해 지방 천진(天津) 지부(芝罘) 남경 산두(汕頭) 하문(厦門) 청도(菁島) 기타 지방 계
300명 154명 13명 8명 19명 5명 61명 4명 564명5)
한편 세계 대전의 종결을 전후하여서부터는 상해 방면을 중심한 중국 지역의 독립운동 조직 및 지도자들이 전개하는 국내외에 대한 활동도 점점 활기를 띠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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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민석린 지은 ≪신균식선생 약전≫ 참조.
5) 일본 외무성 조사·조선총독부 척식국(拓殖局) 작성 문서. 이 숫자는 당시 일본 외무성에서 주재 영사관을 통하여 조사한 것인데, 실제 당시에 있어서 대다수의 동포들이 저들과 관련없이 독립 운동 또는 생계를 위한 이동 활동을 하고 있었던 사실로 미루어 저들의 통계숫자는 그 일부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또 1918년 12월에 작성된 같은 총독부 척식국 ≪조선 외에서의 조선인 상황 일반≫에 의하면 1918년 현재 상해 일본 총영사관 관내 거주의 조선인 수는 7백 명으로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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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제사를 중심으로 한 지도자들은 이미 1917년 8월 서전(瑞典)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열리는 만국 사회당 대회에도 대표를 보내어 한국의 독립을 요망하였으며, 이듬해에는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원동(遠東) 약소민족 대회에도 대표를 참가시킨 바도 있지만,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을 포함한 14개 원칙이 제창됨과 함께, 상해 방면 독립 운동 지도자들은 이 민족 자결 원칙에 의한 새로운 독립 운동 전개 방안을 모색 추진하게 되었다. 그것은 곧 국내 동포들과도 긴밀한 연락을 취하여 국내외적으로 일제히 운동을 전개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해 11월에 2차대전의 종전 및 파리 강화회의의 소식이 전해짐과 함께 다시 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기로 하는 등 급속도의 진전을 보게 되었다.
따라서 동제사의 대표 신규식(申圭植)은 시간을 자체하지 않고 앞장서서 대내외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세계사적인 새 전기(轉機)의 대세에 예민한 청년 지사들의 움직임도 활발해지게 되었다. 신규식은 우선 김규식(金奎植) 등을 파리 강화회의에 대표로 파견하는 일 및 국내 동포들이 여기에 호응하여 전 국민 운동을 일으켜서 일본 통치에 반대하고 독립을 요구하는 굳은 결의를 표시하여야 하겠다는 내용의 비밀 서신을 청년들을 시켜 필사(筆寫)하고, 방효성(方孝成)·곽경(郭儆) 등을 국내로 보내어 전달하게 하였으며, 또 우리 대표단의 국제적 활동에 대하여는 전부터 인연이 있는 중국의 혁명 정부 관계자들로부터 협조 지원의 승낙을 얻기도 하였던 것이다. 또 여운형(呂運亨)·조동호(趙東祜)·장덕수(張德秀) 등은 그해 12월 상해에 온 윌슨 대통령의 특사 크레인의 민족 자결 원칙에 의한 약소민족의 해방이 가능하다는 연설을 듣고, 윌슨 미국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진정서를 작성하여 크레인 등에게 전달을 의뢰하기도 하니, 여기서 강화회의를 앞둔 독립 운동 계획은 공전의 활발한 전개를 보게 되었으며, 1918년 1월 중순에는 새로운 독립 운동 조직으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탄생을 보게도 되었던 것이다.6)
이 신한청년당은 신한청년단으로 불리어지기도 하였는데 대개 강화회의에 대표 파견을 앞두고 조직되었던 것으로서 그 구성 인원은 아래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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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신규식(申圭植) 지은 ≪한국혼(韓國魂)≫ 및 김홍일(金弘壹) ≪나의 증언≫(≪한국일보≫ 연재 제8회) 및 여운홍(呂運亨) 지은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제3부 및 서병호(徐丙浩) 증언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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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장[혹은 당수] : 서병호(徐丙浩)
이사 : 여운형(呂運亨)·김구(琻九)·이광수(李光洙)·안정근(安定根)·조동호(趙東祜)·한원창(韓元昌)·한진교(韓鎭敎)·선우혁(鮮于爀)·김순애(金順愛)7)
그리고 이 신한청년당의 당인 수는 150여 명에 이르렀는데 당내에는 재무부(財務部)·교제부(交際部)·토론부(討論部)·체육부(體育部)·출판부(出版部)·서무부(庶務部) 등의 각 부서를 두고 당원이 일심동력하여 독립 운동의 선봉 부대로서의 활발한 운동올 전개 하였다.
한편, 또 종래 신규식이 주도하던 동제사(同濟社)는 이를 혁명당(革命黨)이라 하고 사원들을 당원으로 부르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대개 신규식을 중심으로 한 그들 동제사의 동지들이 당시 중국의 혁명 운동 동지들과 친근한 데에서 얻어진 칭호가 아니었던가고도 보여 진다. 당시 이 혁명당의 구성은 이 사장이 신정(申程), 즉 신규식이요 이사는 신석우(申錫雨)·여운형·선우혁·서병호·조동호·조소앙(趙嘯(素)昻)이었다.8)이상의 명단에 의하면 신한청년당은 동제사와 깊은 관련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으며 또 동제사, 즉 혁명당에는 이사장 신정을 위시한 일부의 노성물사들도 있었던 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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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애국동지원호회 엮은 ≪한국독립운동사≫ 제3편 제5장, 김승학(金乘學) 지은 ≪한국독립운동사≫ 제3편 제4장 및 김정명(金正明) 엮은 ≪조선독립운동≫ II 제1장 45 ‘손의장(孫議張) 국내 유지에게 보내는 글’(일제문서 고경(高驚) 제3497호 참조).
8) 김정명 엮은≪조선독립운동≫ II 제3장 47·소밀(騷密) 제966호 ≪재외 조선인의 독립운동개황≫(1919년 4월 현재). 또 상해 주재 일본영사관 경찰부 문서인 ≪조선민족운동연감≫ 중에는 4월 6일 조에 ‘통일당(統一黨)에서 당헌(黨憲) 및 지부 규칙 등을 발표하였는데 그중 당강(黨綱)·당헌 등의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고도 하였다.
① 국민의 마음과 힘을 통일하여 조국을 통일하고 신시대·신사상에 기초하는 신국가를 건설할 것.
② 인본(人本)주의를 창명(創明)하여 구천지(舊天地)·구사회를 신천지·신사회로 개조하고 조선적(朝鮮的) 신문화를 세계에 건설할 것.
③ 전 인류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 강권(强權)을 배제하고 세계의 대동(大同)을 실현할 것.
④ 사업 및 교육의 신시설을 도모하여 인류 공동생활의 행복을 증진할 것.
당헌초록(抄錄)
제2조 본 당은 세계 개조의 벽두에 인본주의적 실문화를 세계에 건설하여 인류의 이상적 신생활을 실현함을 종지(宗旨)로 한다.
제4조·본 당의 위치는 조선 경성에 둔다. 단 임시로 상해에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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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하여 이 신한청년당에는 청년 또는 일선행동의 인사가 참가하였다는 점에서 신한청년당은 동제사를 기반으로 하는 일선 일꾼의 집결체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어떻든 신한청년당은 그 조직과 함께 김규식(金奎植)을 파리 강화회의 한국 대표로 파견하여 대외적으로 민족 대표 기관의 임무를 실행하였으며, 동시에 국내 및 노령·일본 등 각지 동포 사회에도 세계 대세에 따르는 독립운동을 펴게 하기 위하여 당의 중요인물들을 파견하였다.
즉 김규식의 상해 출발 직후인 2월 초에는 서병호·선우혁을 국내로, 장덕수를 일본, 여운형을 노령으로 파견하여 국내외 전체 동포 사회에서 독립운동의 일제 분발을 촉구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 선우혁은 평안도 방면에서 3·1운동 계획에 앞서 양전백(梁甸伯)·이승훈(李昇熏)·길선주(吉善宙) 및 강찬규(姜澯奎)·안세환(安世桓)·변인서(邊麟瑞)·이덕환(李德煥)·김동원(金東元)·도인권(都寅權)·김성탁(金聖鐸)·윤원삼(尹愿三)·윤성운(尹聖運) 등을 면접하여 독립운동 전개 및 자금 각출 등에 대한 의견을 말하여 합의를 보고 거사 계획을 추진하도록 하였으며, 서병호·여운형 역시 예정한바 임무를 마치고 모두 3월 중에 상해로 귀환하였는데 장덕수만은 일본을 거쳐 국내에 들렸다가 저들에게 검속당하였다. 또 이에 앞서 동경에서 있었던 2·8독립선언도 상해와의 연락이 있었다는 점 및 아직도 국내 또는 동경에 있던 김구·여운형이 신한청년당 이사 명단에 올라 있은 것 등으로 보면, 상해의 신한청년당 또는 동제사와 이들과의 사이에는 진작부터 비밀 연락이 있었던 것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9)
뿐만 아니라 3월 하순 경부터 이들 신한청년당의 간부진인 서병호·여운형·선우혁·이광수 및 김철(金徹)·현순(玄楯)·최창식·여운홍(呂運亨) 등은 상해에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각국에 향하여 독립 선언을 하면서 임시정부 조직 업무에도 착수하였던 것이니, 이들 상해 방면의 독립 운동 조직 및 그 지도 인물들의 활동이 국내외 독립 운동에 큰 영향을 미치고, 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도 주동적인 활동을 하였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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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김용국(김용국)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성립과 초기 활동’(동아일보사 엮은 ≪3.1운동 50주년기념 논문집≫·이상구(李相九) 엮은 ≪일제고등경찰문서≫ ‘상해 가정부의 조직과 활동’·여운홍 ≪몽양 여운형≫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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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은 독립 운동 사상의 특기할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3. 노령(露領) 방면
노령, 그 중에도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우리나라와 인접하여 있는 연해주(沿海州) 및 흑룡주(黑龍州) 일대는 일찌기 근세조선조 말기부터 우리 동포들의 이주 정착지(定着地)가 되어 왔다. 즉 청국과 러시아 간의 서기 1856년의 애혼조약(愛琿條約), 1860년의 북경조약(北京條約)으로 하여 아무르(Amur) 지방과 우수리(Ussuri : 鳥蘇里)등 지방이 러시아 영지로 공인되면서부터 우리 동포들은 강을 건너 이 지방에 들어가서 농지를 개척하고 건설 사업에 종사하게 되었는데, 그 최초 이주의 동기는 국내에서의 흉년과 여기 따르는 민중들의 생활난 타개를 위한 이동에 있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따라서 멀지 않은 거리에 광막(曠漠)한 미개척지를 둔 함경북도 지방의 민중들은 고종(高宗) 즉위 전년인 서기 1863년에 13호의 농민이 연해주의 포세트 지방으로 들어가서 경작을 시작하게 된 것을 위시하여, 이 지역에 이주하는 동포들의 수효가 매해 증가되었는데 그 중 포세트 지방의 예만을 보드라도 이주 동포의 호수는,
1864년 60호
1868년 165호
1869년 766호
와 같이 해를 거듭할수록 증가하였던 것이다. 또한 국내에서 자주 있는 흉작은 산간지대인 삼수(三水)·갑산(甲山) 두 지방 세궁민들의 월경(越境) 입주의 기회를 더욱 조장하였던 것으로서, 강을 건너는 동포들은 계속해서 쌍성(雙城)·연추(烟秋)·흑하구(黑河溝)·해삼위(海蔘威 : 블라디보스톡) 등지로 들어갔는데 그 중에도 1874년에 개척하기 시작한 해삼위에 있는 우리 동포들의 이주 집단 부락인 신한촌(新韓村)은 1년 미만에 양옥이 즐비하고 교회당·학교까지도 세워지는 성황을 이루었으며, 안병국(安炳國)·김동삼(金東三) 등은 흑정자(黑頂子)의 나선촌(羅鮮村)을 개척하고, 김석우(金錫雨)·김정련(金正蓮) 등은 남석동(南石洞)을 건설하는 등 연해주 일대의 많은 동포부락을 건설하게 되었다. 따라서 1882년에는 연해주 일대의 총인구 9천2백78명 중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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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의 수가 1만1백37명에 달하였으며, 뒤이어서도
1892년16,564명
1902년32,410명
1908년45,397명
과 같이 증가 일로를 계속하였던 것이다.1)
이러한 노령의 이주 동포들은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처음에는 대개 국내에서의 흉년과 빈궁으로 하여 생활의 터전을 찾아 이주하게 되었다. 따라서 대부분이 신개척지 및 농촌·공사장 등을 찾아 자리 잡게 되었으며 농업 및 건설 공사장에서 일하게 되었던 만큼 초기에 있어서는 고심참담한 생활을 겪게도 되었다.
그러나 어디가서나 근면하고 인내력이 강한 우리 동포들은 가는 곳마다 각고정려(刻苦精勵)하여 차츰 생활의 근거를 마련하였다. 또 오랜 역사 민족으로서의 우월감을 갖는 동포들은 비록 적수공권(赤手空券)으로 이역 땅을 헤매일 망정 민족적인 긍지(矜持)와 전통을 유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가는 곳마다 거주하는 가옥을 우리나라 고유의 제도 양식 그대로 세우며, 의복 의식의 생활 풍속 등을 고유의 전통 그대로 유지하고, 또 상호 단합 부조로 자립 자치의 생활 태세를 갖추었다. 그리고 당시 제정(帝政) 러시아 정부에서 그리스 구교(舊敎)를 권장하며 우리 이주 동포들에 대해서도 구교에 귀의(歸依)하는 사람에게는 러시아 국적(國籍)을 가지고, 또 농지의 소유권도 인정하는 등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였지만 이주 동포들은 목전의 이익을 위하여 우리 고유의 신앙·풍속·전통을 버리려고 하지 않아서 러시아인 및 러시아를 왕래하는 외국인들의 감탄을 자아내게까지 하였다.2)
그리고 1905년의 ‘을사조약’을 전후해서 전국의 정세가 나날이 기울어질 무렵에는 비분강개의 지사들이 구국(救國)의 큰 뜻을 품고 침략자 일제(日帝)의 세력이 밀려드는 본국을 벗어나 많이 노령 방면으로 들어갔다. 만주 방면으로 나갔던 의사들이 발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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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승제(高乘濟) ≪연해주 이민의 사회사적 분석≫(백산학보 제11호) 중 ‘3, 한국 이민 개시의 기점(起點)’ 및 애국동지원호회 엮은 ≪한국독립운동사≫ 중 제3편 해외운동과 노령의 운동 참조.
2) 고승제 동상 중 ‘4. 한국 이민의 사회적 지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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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석(柳麟錫)
이범윤(李範允)
이상설(李相卨)
이동휘(李東輝)
조완구(趙玩九)
안정근(安定根)
문창범(文昌範)
이진룡(李鎭龍)
이위종(李瑋鍾)
이종호(李鍾浩)
유동열(柳東說)
안창호(安昌浩)
조성환(曺成煥)
최재형(崔在亨)
이동녕(李東寧)
신채호(申采浩)
김동삼(金東三)
홍범도(洪範圖)
장지연(張志淵)
박은식(朴殷植)
원세훈(元世勳)
이갑(李甲)
엄주필(嚴柱弼)3)
이렇게 많은 우국지사 항일투사들이 모임과 함께, 그 동안 자리 잡은 이주 동포들의 생활 터전을 토대로 하는 독립운동이 폭넓고 뿌리 깊게 펼쳐질 수 있고 또 여기에 따라서는 동포들의 단결·발전, 조국의 광복·중흥을 목적으로 하는 조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 중에도 경술국치 전해에 유인석(柳麟錫)·이상설(李相卨) 등이 블라디보스톡에서 국내 항전에서 밀려나간 의병의 세력을 총집결하여 13도 의병연합사령부를 결성하고 본토에 대한 진공 수복 작전을 계획하던 것은 유명한 역사적 사실이지만, 이 밖에도 지방과 시기에 따라서 많은 단체들이 조직되고 또 독립 쟁취를 위하는 사업을 펴기도 하였다.
그 중에도 헤이그 밀사가 있었던 1907년에는 수청(水淸)에서 대한청년교육회가 발족 되었는데, 처음 동포 청년들의 교육 계몽을 목적으로 출발하였던 이 단체는 그 후 헤이그밀사의 1인인 이준 열사의 충렬을 사모하여 조직된 공진회(共進會)와 합해서 대한청년교육연합회로 발전하고 청년들을 독립 운동으로 이끄는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9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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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엮은 ≪독립운동사≫ 제3권 3.1운동사(하) P.77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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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경술국치의 비보(悲報)에 접한 우국지사 유인석(柳麟錫)·이상설(李相卨)·김학만(金鶴萬) 등은 블라디보스톡의 신한촌에서 다시 성명회(聲鳴會)를 조직하고 병합(倂合)을 반대하는 선언문을 내외에 발표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12월에는 블라디보스톡에서 다시 실업 장려·노동 알선· 교육 보급을 표면의 목적으로 하는 권업회(勸業會)가 이상설·이종호(李鐘浩) 등에 의하여 조직되었다. 이 권업회는 그 명칭이 말하는 바와 같이 동포들의 생업 권장을 겸하여 발족하였던 독립 운동 단체로서 러시아 극동총독의 공식인가까지 얻어 조직되었으며, 신한촌에 총회사무소를 두고 니콜리스크·하발로프스크 등 8개 지방에 분회사무소를 설치하여 장기적인 기반을 닦아 놓기도 하였다. 그리고 회장 김도여(金道汝), 총무 김입(金立)을 중심으로 교육 선전 등 사업을 활발히 전개하였는데, 신한촌에 한민학교(韓民學校)가 신축된 것이나 신채호(申采浩)·김하구(金河球) 등이 주관하는 기관지 ≪권업신보(勸業新報)≫가 발간되어 항일투쟁의 필진(筆陳)을 펴던 것도 이 시기의 일이었다. 그리고 1914년에는 제1차세계대전이 일어나서 러시아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들어가는 등 변전하는 국제 정세에 따라 이상설(李相卨)·이동녕(李東寧)·이동휘(李東輝)·이종호(李鐘浩)·정재관(鄭在寬) 등을 중심으로 대한광복군 정부가 조직되어 러시아 정부와의 대일연합작전을 계획하며 군사의 모집·훈련, 사관학교의 설립 등 눈부신 활약을 하였으며, 이범윤(李範允)을 중심으로 하는 해삼대동회(海蔘大東會) 역시 결사대의 조직·훈련 등 무력 결전을 준비하였다. 또 이 시기를 전후해서는 국조 단군(檀君)을 받들고 겨레의 민족정신을 선양하며 조국의 광복을 기도하던 대종교(大倧敎)의 포교 활동이 블라더보스톡·니콜리스크 등지에서 활발하게 전개되며 그 중심 인물인 백순(白純)은 의병장 이범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노지(露支) 국경 방면에서 의병부대를 조직, 활동하기도 하였다.4)
그리고 이 무렵에 있었던 조직체로는 공공회(共公會)·대한민공제회(大韓民共濟會)·대한인기독교청년회·노인회·청년동지회·철혈단(鐵血團)·한인회 등 군소단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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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독립신문≫ 1920, ,30일자 및 일제(日帝)의 조선총독부 척식국(拓殖局) 작성 비밀문서 ≪조선 외에서의 조선인 상황 일반≫ ‘노령의 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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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다하였는데,5)1917년에 전로한족중앙회(全露韓族中央會)가 성립됨과 함께 대부분의 조직은 한족회에 포함되었던 것으로서 한족회의 발전은 러시아 방면 재류 동포들의 자치 및 독립 운동 조직의 획기적 사실이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1917년에는 러시아에서 공산혁명이 일어나고 정치 정세가 변해짐에 따라 재류 동포들의 언론 결사에 있어서도 자유를 얻게 되었으며, 여기에 따라 그해 6월부터는 각 지방 대표자들이 니콜리스크에 모여 재러시아 동포들의 통일적인 조직과 새로운 운동방침을 토의하게 되고 아래와 같은 3개항의 결의안을 채택, 실천에 옮기게 되었다.
① 귀화(歸化) 한인은 1개 독립 민족으로서 자치회를 조직할 것.
② 한족대표회를 조직할 것.
③ 니콜리스크에서는 ≪청구신보(靑邱新報)≫를, 블라디보스톡에서는 ≪한인신보(韓人新報)≫를 발행할 것.
뒤를 이어 그해 12월에는 귀화·비귀화 한국인을 총망라하는 전로한족중앙총회(全露韓族中央總會)가 결성되고 문창범(文昌範)이 회장에 선임되었으며, 중앙총회는 각지에 분회를 설치하고 중앙총회 안에 다시 지방연합회 상설위원회를 설치하여 중앙·지방간의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사업을 크게 전개하였다. 그 중에도 ≪청구신보≫ (뒤의 한족공보)의 발간, 사범 중학교의 설립, 출판사의 경영 등으로 대내외적인 선전·교육·계몽 사업을 크게 펼쳤던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6)
그리고 제1차대전 종전기에는 러시아의 공산주의 혁명,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 등 우리 이주 동포들의 주위에도 복잡한 정치 정세가 다가왔는데, 한족회의 간부들은 어려운 국면을 당하여서도 당황하지 않고 정세를 정확히 분석 주지시키면서 동포들의 자중과 단결로 난국을 타개해 나가는 데에 만전을 기하게 한 점은 그 공과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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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동상 ≪조선 외에서의 조선인 상황 일반≫ 중 ‘노령 재주 조선인 배일적결사’ 조 참조. 거기에 의하면 노령 방면에는 이 밖에도 선우계(先憂契)·일심계(一心契) 또는 육의형제(六義兄弟)·21의형제 등등, 애국 구국운동을 목적으로 조직된 군소 동맹조직이 많았던 것을 볼 수도 있다.
6) 박형표(朴亨杓) ‘3.1운동 당시 노령의 한교(韓僑)’(동아일보사 엮은 ≪3.1운동 50주년 기념 논문집≫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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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 무렵에는 따로 노병회(勞兵會)·대한인노동회 같은 실력 양성을 위주하는 조직도 있었고, 최재형(催在亨) 등 일부 지사들 간에는 러시아정부군과도 긴밀한 연락을 갖는 군대 조직으로 조선국민대대의 편성계획이 진행되기도 하였는데,7)이러한 조직들은 전에 있었던 의병부대 및 창의회(彰義會) 등의 조직과도 일맥상통하는 바 있었지만, 그것은 또 뒤에 일어났던 노령 방면에서의 무력 항일 운동의 준비 과정이 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한편 노령 방면 동포들의 단체 활동 중에는 또 미주 계통의 국민회 조직이 있었던 것을 들지 않을 수 없다. 미주 계통의 단체 조직으로는 이미 경술국치 전인 1908년에도 미주에서 설립된 공립협회(共立協會)에서 파견된 김성무(金成武)·이강(李剛) 등의 주선으로 시베리아의 수청(水淸)과 치타 및 블라디보스톡에 공립협회 지회가 설립된 바 있었지만, 1909년 2얼에 공립협회가 국민회로 발전되고 이듬해에 국민회가 다시 대한인국민회로 확대된 뒤를 이어서는 국민회의 시베리아 지방 총회와 만주리(滿洲里)지방 총회가, 결성되어 미주 방면의 북미·하와이지방 총회와 함께 대외 재류 동포의 4대 지방 총회를 형성하기도 하였으며, 지방 총회 아래에는 다시 각 지방 분회가 소속되어 재주 동포들을 결속해서 실업 진흥과 독립 운동에 매진하게 하였다. 특히 이 국민회를 통한 기관지 ≪신한민보≫의 배포는 노령 및 만주 지역의 동포들을 통일적인 독립 운동에로 이끄는 데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또 그 조직 활동 과정에 있어서는 주재 일본영사관 및 러시아 관헌들의 간섭과 박해를 당하기도 하였지만, 실무자들은 그때그때 적당한 방법으로 이를 극복해 나가면서 조직적인 운동을 계속했는데, 3·1운동 직전까지의 조직 활동 상황을 보면 대략 아래와 같았다.
명칭
소재지
설립년월
회장 부회장
만주리아 지방총회
하르빈
1910. 4
김성백(金星伯)·정대호(鄭大鎬)
하르빈 지방회
하르빈
1909. 8
상동
석두하자(石頭河子)지방회
석두하자
1910. 8
오사언(吳仕彦)·이병학(李炳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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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조선총독부 척식국 비밀문서 ≪조선 외에서의 조선인 상황 일반≫ 중 ‘노령의 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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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도하자(橫道河子)지방회
횡도하자
1910. 9
피성준(皮成俊)·이입근(李笠根)
목림(穆林) 지방회
목림
1910. 9
한성렬(韓成烈)·강인섭(姜仁燮)
시베리아 지방 총회
치타
1912. 3
박집초(朴執初)·태용서(太龍瑞)
해랍원(海拉原) 지방회
해랍원
1910.11
장운서(張雲瑞)·김장길(金長吉)
삼성(三姓) 지방회
삼성
1611. 1
박운삼(朴運三)·김원준(金元俊)
니콜리스크 지방회
니콜리스크
장성일(張星逸)
추풍(秋豊) 지방회
추풍
안민학(安敏學)
연추(煙秋) 지방회
연추
최재형(崔在亨)·이종호(李鍾浩)
4. 미주 방면
고종 19년(서기 1882) 3월에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이 맺어지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미국과의 왕래 거주 및 토지 가옥의 매매·건축 등이 공적으로 인정됨에 따라 동양의 은둔국(隱遁國)으로 알려진 우리 국민들도 저 멀리 태평양 건너 미국 땅에의 왕래 거주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실지에 있어서 우리 동포들이 미주 방면에 건너가서 활동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이보다 20년이 지난 광무 7년, 즉 서기 1903년부터의 일이다.
이즈음 우리 동포가 많이 미주 방면으로 건너가게 된 것은 전전해에 있은 이른바 ‘신축년 대흉년’으로 하여 이재민이 많아지고, 또 날로 심해가는 일제 침략 세력하에서 해외로의 진출을 희망하는 청년들이 있게 되었는데 여기에 마침 하와이에서 미국 공사 알렌을 통하여 우리 정부에 해외 이민에 대한 교섭이 있었던 때문이었다.
따라서 정부에서도 미국과의 친교 관계 및 국민의 해외 발전을 생각하여 광무 6년 8월에는 새로 수민원(綏民院)이라는 해외 이민 관계의 새 부서를 설치하여 민영환(閔泳煥)을 총재, 서병호(徐炳浩)를 사무국장으로 임명하고 이 방면의 업무를 적극 추진 한 결과 그해 12월에는 처음 1백여 명을 실은 이민선이 인천항(仁川港)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에 이 제1차 이민선의 인원을 포함한 1천 1백여 명의 우리 동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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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동상 중 ‘남·북만주·노령 재주 조선인 배일적 결사(結社)표’. 이것은 1918년 5월 조사분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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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에 도착한 것을 위시하여 광무 8년 7월까지의 사이에는 모두 7천2백여 명의 동포가 바다 건너 멀고 먼 이국 땅 하와이로 가서, 주로 사탕 농장 일에 종사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우리 동포의 미주 방면 이주의 절정기(絶頂期)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1)또 뒤를 이어 1905년에 1천여 명의 동포가 멕시코로 옮겨가서 농장에서 일하게 되었으며, 미 본주의 로스앤젤리스·샌프란시스코우 지방에도 하와이 방면에서 진출하는 사람들 및 본국에서 유학 상업 차로 건너가는 사람들이 늘어나니, 미주 방면에 있어서의 우리 동포들의 존재와 활동은 점차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일부 지식층들 간에는 멀리 이역 땅에 있으면서도 기울어져가는 조국의 앞날을 염려하며 그 구제의 방법을 강구하게 되니, 여기서 동포들 간의 친목 단결과 독립운동을 위한 조직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이 중에서도 처음 조직된 정치 단체로는 광무 7년(서기 1903) 8월에 하와이의 호놀룰루에서 조직된 신민회(新民會)를 들 수 있는데, 이 단체는 그 곳의 예수교 감리교도인 홍승하·윤병구(尹炳求)·박윤섭(朴允燮)·문홍섭·임치성·임형주·김정극·안정수·이교담 등의 발기에 의하여 조직되었던 단체로서, 홍승하가 회장에 추대되어 일제의 침략 행위에 대항하고 동족 간의 단결·민지(民智)의 계발(啓發)·국정 쇄신을 부르짖으며 행동을 전개하였다. 따라서 이듬해에 일부 미국인 협잡배들이 하와이 일대에 있는 우리 이민 동포들을 상대로 당치도 않은 이민 경비를 받으려는 데 대하여 전면적으로 반대 투쟁을 전개, 이주 동포들의 권익 옹호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또 그 단체명의 신민(新民)이나 강령 중에 보이는 국정쇄신(國政刷新)이라는 문귀가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전복하려는 반역 행위라고 하여 일부의 반박을 받게도 되고, 1905년 9월에는 외부협판 윤치호(尹致昊)가 멕시코 이주 동포들의 실정조사 및 신민회의 내용 조사를 겸하여 호놀룰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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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원용(金元容) 지은 ≪재미한인 50년사≫ 제1장 중 화와이 이민조 참조. 3.1운동 전해인 1918년 12월에 소위 조선총독부 척식국(拓殖局)에서 작성한 기밀문서≪조선 외에서의 조선인 활동 일반≫에 의히면, 이때 미주 방면의 우리 동포 수는 재 호놀룰루 총영사관 (일본) 관내의 4천7백34명을 위시하여 전 미주지역에 총 6천4백 명으로 되어 있어 이 숫자보다도 적은데, 이것은 광무 9년의 소위 을사조약으로 하여 우리 동포의 해외 이주조차 자유롭게 할 수 없는 데에도 관계가 있었겠지만, 한편 우리 동포들이 저들 침략자들의 인구 조사에 응하지 않고 대한인국민회 등 우리 자치 단체의 관할하에 있었기 때문에 저들의 통계라는 것을 사실과 다른 줄잡은 추상적 통계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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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가기까지 하였던 것은 과도기에 있을 수도 있는 현상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2)
신민회의 뒤를 이어서는 하와이 오아후 섬의 에와 농장에서 정원명·김성권·윤병구·이만춘·김규섭·강영소 등의 발기로 에와 친목회가 조직되었는데, 정원명을 회장으로 하오 항일 운동과 동족상애(同族相愛)를 목적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중에도 그해 7월에 미국 포츠머스에서 러시아·일본 간의 강화회의가 있을 때에 에와 친목회에서는 로스앤젤리스의 공립협회와 연합하여 윤변구(尹炳救)를 한국 대표로 파견하는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3)
한편 하와이에서 신민회와 에와 친목회의 조직 활동을 전후하여 샌프란시스코우에서는 박성겸·이대위·김성무·박영순·장경·김찬일·김병모·전동삼·박승지 등 청년을 중심으로 조직된 한인친목회가 활동하고, 로스앤젤리스에서는 안창호를 중심으로한 공립협회(共立協會)가 조직되었는데 본국에서 외교권이 일본에 강탈당하던 광무 9년(서기 1905)에 샌프란시스코우에서 안창호를 회장으로 하는 대한인공립협회가 설립됨과 함께 전기 친목회와 공림협회는 모두 대한인공립협회에 포섭되었으며, 사업의 목적은 종전의 상부상조(相扶相助) 외에 조국광복(祖國光復)이 더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한인공립협회에서는 그해 11월부터 회관을 세우고 기관지 공립신보를 발행하며 오오클랜드·레들랜드·라크스프링스 등지에 지회를 설치하고, 뒤이어서는 다시 이강·김성무 등을 원동(遠東)으로 파견하여 시베리아와 북만주에 원동 지회·만주 지회를 설치하게도 하니 이 공립협회는 재외 동포를 대표하는 한 조직으로 알려지게도 되었던 것이다.4)
그리고 공립협회의 발전과 때를 같이 하여서는 또 하나의 재미 애국단체로 대동보국회(大東保國會)가 탄생하였다. 대동보국회는 처음 샌프란시스코우에서 조직되었던 한인친목회 발기인의 한 사람인 장경(張慶)이 1905년에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대한인공립협회 조직과 의견을 달리하여 김우제 등과 대동교육회(大東敎育會)를 조직한 데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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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동상 제3장 재미한인단체 중 신민회 조 참조. 이 신민회(新民會)의 명칭은 을사조약 후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安昌浩) 및 국내의 많은 지사들의 구국 운동을 위한 비밀 결사 신민회와 동일한 명칭이다. 그러나 실제 양자간에 어떠한 관계가 있었던 사실은 발견되지 않는다.
3) ≪안도산전서(安島山全書)≫ 상편 제3장 ‘미주 시절(美州時節)’ 참조. 4)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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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하였는데 1907년 3월에는 샌프란시스코우에서 동지 백일규(白一圭)·장인환(張仁換)·이병호·문양목 등 25명과 함께 대동보국회를 조직하였다. 같은 애국·구국 운동이면서도 황실을 중심으로 충성심을 다하여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따라서 대동보국회에서는 공립협회의 ≪공립신보≫에 대등하는 ≪대동공보≫를 발행하고 또 5개소의 지방 지회도 조직하는 등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으며, 이듬해인 융희 2년(서기 1908년) 3월에 장인환이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한국 침략 행위를 찬양하는 미국인 스븐스을 사살하여 한국인의 의기를 크게 해외에 알려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스티븐스의 사살로 해서 종래 소원한 사이에 있던 공립협회와 보국회외의 사이가 가까워지게 되었다는 것은 역시 주의할 만한 일이 되기도 하는 일이다. 즉 당초 스티븐스 사살에 나섰던 사람은 전명운(田明雲)과 장인환 두 사람이었는데, 장인환이 보국회원이었던 것과 같이 전명운은 공린회원이었으니 그 사살을 계획한 데에 있어서도 두 회원들의 의사가 동일하였지만, 장인환·전명운이 미국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될 때에는 공립협회와 보국회가 합동으로 후원회를 조직하고 백일규를 회장으로 하여 많은 후원 회비를 모아 국내외적으로 구제 활동을 폈던 사실은 길이 잊혀질 수 없는 일이었다.5)
한편 본국에서 을사조약의 소식이 전해지는 등 민족의 불운이 거듭됨에 따라 이역 땅에 멀리 나가 있는 동포들의 비분도 한층 더해지게 되었으며 교회 또는 거주지를 중심으로 하는 단합 집회도 자주 있고 단체 조직도 활발해지게 되었다. 여기서 1906년·1907년도 중 하와이 방면에서 조직 단체들만을 대강 보더라도 아래와 같다.
단체명
조직년월
소재지
회장
와이파우공동회 혈성단(血誠團) 자강회(自强會) 공진회(共進會) 노소동맹회
1906. 3 1906. 5 1906. 6 1906. 12 1907. 2
오아후 올라 3마일 농장 가와이 호놀룰루 하비 농장
안원규 공덕화 송건 민찬호 편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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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동상 및 서광운(徐光云) 집필 ≪미주의 한인 70년≫(≪한국일보≫ 연재) 제13회분 참조.
이 밖에도 뉴우요오크에서는 1907년 7월에 황용성·서필순 등의 발기로 공제회(共濟會)[회장 안정수]가 조직되고, 시애틀에서는 같은 해 11월에 이정실·김익제 등의 발기로 동맹신흥회[회장 이정실]가 조직되었는데 이들 단체는 그 어느 것이나 동족간의 상호 부조와 항일 구국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6)
그러나 분산 잡다한 군소 단체로는 큰 힘을 낼 수 없고 또 대외적인 위신을 세울 필요도 있는 현실을 깨닫게 된 이들 단체의 지도자들은 다시 군소 단체의 통합 운동을 펴게 되었다. 즉 그 제1차적인 통합 단계로는 1907년 9월 하와이에서 교회를 중심으로 한 24개 단체의 대표가 호놀룰루에 모여서 합동에 대한 토의를 하고 한인합성협회(韓人合成協會)를 조직한 것이다. 이 합성협회는 임정수(林正洙)를 회장으로 하며 호놀룰루에 중앙회관을 두고 ≪한인합성신보(韓人合成新報)≫를 발행하는 등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목적은 조국의 국권 회복과 동포의 안녕 보장·교육 장려이고 민족주의를 주장하였는데 연액 2달러 25센트의 회비를 내는 회원이 1천여 명에 이르렀다.7)
그리고 1908년 10월부터는 다시 하와이 한인합성협회와 미주 본토의 대한인공립협회가 함께 우리 국권의 쇠퇴를 가져온 원인이 당파와 알력(軋轢)에 있었던 사실을 지적하고 조국을 위하는 길은 동포가 다같이 합심 협력하는 데에 있음을 주창하면서, 하와이와 본토에 있는 단체의 합동 통일을 위하여 하와이에서 민찬호(閔燦鎬)·이내수(李來洙) 등 7명과 샌프란시스코우에서 최정익(崔正益)·이대위(李大爲) 등 6명의 대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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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김원용 지은 ≪재미한인 50년사≫ 제3장 참조.
7) 동상(同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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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차례에 걸친 진지한 토의를 하여, 이듬 해 2월 1일에는 역사적인 재미 한인 단체의 통합을 보게 되니 여기서 새로 출발한 통합 단체가 곧 국민회(國民會)였던 것이다.
그리고 하와이 국민총회장에는 정원명(鄭元明), 미주 본토 국민총회장에는 정재관(鄭在寬)이 선출되어 교육과 실업을 진흥하여 자유 평등을 제창하며 동포의 영예를 증진하여 조국의 독립을 회복함을 목적으로 하는 사업을 전개하였다. 또 뒤를 이어서는 4월에 멕시코 지방 총회를 설치하고, 5월에는 정재관(鄭在寬)·이강(李堈)·이상설(李相卨)·김성무·전명운 등을 만주·노령 방면의 특파원으로 하여 지방회를 조직하게 하였으며, 이듬 해 5월에는 다시 대동보국회까지 합하여 명칭도 대한인국민회로 고쳐서 명실 공히 대동단합의 실을 거두었다.8)
그리고 본국으로부터 경술국치의 비보가 전해짐과 함께 각 지방 대표자 참석의 공동대회를 열고, 한일 합병을 부인하며 민족의 독립을 선언하는 7개조의 결의안을 발표하고 각 지방회를 독려하여 한일 합병을 이유로 주미 일본영사관의 한국인 인구 조사 등 모든 간섭 행위를 일체 배제하였다.
그리고 1912년에는 다시 북미·하와이·시베리아·만주 등 각 지방총회의 대표자 회의를 소집하여 샌프란시스코우에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설치하고 재외 한국인의 권익을 대변하는 최고 기관으로 활동하게 되었는데, 이때 박용만(朴容萬)의 기초로 중앙총회 설치의 의의를 내외에 천명한 선포문을 보면 아래와 같다.
[중앙총회 결성 선포문]
오늘 우리는 나라를 잃었고, 우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여 줄 정부가 없으며 법률도 없으니 동포 제군은 장차 어찌하려는고. 제군이여! 왜적의 정부와 법률에 복종하려는가. 이는 양심이 허락되지 않아서 못할 것이니 우리가 스스로 다스리고 다스림을 받을 기관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시대의 정치는 자치 제도가 정치의 주안이요 어느 백성이나 자치 능력이 없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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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동상(同上) 및 서광운 집필 ≪미주의 한인 70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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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반(羈絆)을 받게 되나니, 나라가 없어지는 것도 그 백성의 자치력이 완전하지 못한 연고이며 잃었던 나라를 회복하는 것도 그 백성의 자치력이 완전하여야 되는 것인즉 우리는 우리 사회에 자치제도를 실시하여 우리의 자치력을 배양(培養)할 것이다.
우리가 목도(目睹)하는 미국의 정치를 보라. 동(洞)과 군(郡)과 도(道)에 각기 자치가 있어서 그 직분을 이행하며 동시에 중앙에 국가 자치가 있으니 이것이 민주 독립 국가의 제도이다. 우리는 나라가 없으니 아직 국가 자치는 의론할 여지가 없거니와, 우리의 단체를 무형 정부로 인정하고 자치 제도를 실시하여 일반 동포가 단체 안에서 자치 제도의 실습을 받으면 장래 국가 건설에 공헌이 될 것이다. 지금 국내와 국외를 막론하고 대한정신으로 대한민족의 복리를 도모하며, 국권 회복을 지상 목적으로 세우고 그것을 위하여 살며 그것을 위하여 죽으며 그것을 위하여 일하는 단체가 어디 있는가. 오직 해외의 대한인국민회가 있을 뿐이요, 그 외에 아무리 보아도 정신과 기초가 확립된 단체를 찾아 볼 수 없는 것이 현상이다.
어제까지 정신과 단결력을 손상하며 분립(分立)하려는 망동(妄動)과 파란이 없지 않았으니, 오늘부터는 큰 것을 위하여 적은 것을 희생하며 과거의 폐단을 쓸어버리고 마음을 한 곳으로 기울여서 대한인국민회로 하여금 해외 한인의 자치 기관이 되게 하여야 살 길을 찾을 것이다.
대한인국민회가 중앙 총회를 세우고 해외 한인을 대표하여 일할 계제에 임하였으니 형질상(形質上) 대한제국은 이미 망하였으나, 정신상 민주주의 국가는 바야흐로 발흥되며 그 희망이 가장 깊은 이때에 일반 동포는 중앙 총회에 대하여 일심 후원이 있기를 믿는 바이다.
① 대한인국민회 중앙 총회를 해외 한인의 최고 기관으로 인정하고 자치 제도를 실시할 것.
② 각지에 있는 해외 동포는 대한인국민회의 지도를 받을 의무가 있으며, 대한인국민회는 일반 동포에게 의무 이행을 장려할 칙임을 가질 것.
③ 금후에는 대한인국민회의 입회금이나 회비가 없을 것이고, 해외 동포는 어느 곳에 있든지 그 지방 경제 형편에 의하여 지정되는 의무금을 대한인국민회로 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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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11월 20일
대한인국민회
북미 지방총회 대표 : 이대위·박용만·김홍균
하와이 지방총회 대표 : 윤병구·박상하·정원명
시베리아 지방총회 대표(통신) : 김병종·유주규·홍신언
만주리아 지방총회 대표(대리) : 안창호·강소영·홍언9)
여기에 의하면 대한인국민회는 다만 재미 한국인의 자치 기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국가·정부를 상실한 우리 겨레의 당시의 형편에 있어서 정신적인 민주주의 정부요 재외 한국인의 최고 기관으로 자처하였던 것을 알 수 있는 일이다.
또 선언으로만이 아니라 실제에 있어서도 정부를 대신하는 최고의 대표 기관으로 나서서 활동하기도 하였던 것이니, 중앙 총회가 결성된 이듬해인 1913년에는 미국 국무성과의 교섭으로 출입국 기타 한국인에 관한 모든 일은 국민회와의 교섭으로 해결하는 원칙을 세우게 된 것이나, 자치 규정을 제정 시행하고 뒤 이어서는 신용 경찰권을 얻어 각 구역마다 국민회 경찰부장을 두어 경찰 행정을 담당하였던 일 같은 것도 그 좋은 사례일 것이다.
또 이 무렵에는 건전한 인격 수련이 구국 운동의 길임을 주장하던 안창호(安昌浩) 등에 의하여 수련·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흥사단(興士團)이 샌프란시스코우에서 조직되기도 하였으며, 조국의 독립은 군사 행동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음을 주장하던 박용만(朴容萬) 등의 주선으로 오아후 등지에 대 조선국민군단 등 군사 훈련 단체 또는 군사 학교 등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서기 1910년경부터는 세계 대전이 종결되고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를 포함한 평화윈칙(平和原則)이 발표되는 등, 세계 대세가 바뀌어짐에 따라 미주 방면 우리 동포 단체들의 움직임도 다시 한층 활발해지게 되었다. 재미 동포들의 대표 기관인 국민회 중앙총회는 재미 한국인의 전체 대표 회의를 열고 독립운동에 대한 방침을 토의 결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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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김원용 지은 ≪재미한인 50년사≫ 제3장 국민회 중앙총회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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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었으며, 여기에 의하여 파리에서 열리는 평화회의에 파견할 대표단으로 이승만(李承晩)·정한경(鄭翰景)·민찬호(閔瓚鎬)를 선출하기도 하고, 또 이듬해 1월 워싱턴에서 열린 약소국동맹회의(弱小國同盟會義)에는 민찬호가 대표로 참가하였다.
그리고 1919년 3월 9일에 본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난 소식을 받은 국민회 중앙총회에서는 3월 15일에 다시 미주·하와이·멕시코 재류 동포의 전체 대표 회의를 열게 되었으며, 대회의 결의에 의하여 재미 동포들의 조국 독립을 위한 결의와 운동 방법을 다짐하는 포고문과 결의안이 발표되었다. 특히 이때 중앙총회에서 내외에 발표한 포고문은 ‘국내 동포들의 궐기에 호응하고 계승하여 만난을 무릅쓰고라도 독립 쟁취에 매진하겠다’는 결의를 천명(闡明)한 것으로서 매우 뜻 깊은 문헌이 되기도 하는 것으로 지금 읽어도 우리들의 감명을 새롭게 하는 바 크다.
[중앙총회 포고문]
오랫동안 우리 민족이 마음 아픈 비애에 싸여 있다가 이제 비로소 큰일을 일으켰으니 이는 대한독립선언이다.
이 소식을 받고 기쁨과 슬픔이 아울러 나와 피가 끓으니, 실로 마음을 진정하기 어려우며 국내의 2천5백만 겨레와 함께 일어나는 이 때에 느낌이 간절하여 정신이 막막하니 이는 성공의 길이 간난(艱難)함을 염려하는 까닭이다.
우리 민족이 적수공권이었지만 끓는 피와 붉은 주먹으로 다만 인도 정의와 민족자결 이라는 무기를 들고 용맹하게 일어나서, 수만 번 싸우고 수만의 죽음이 쌓인 지 10일 만에야 그 소리가 우리의 귀를 울렸으니 그 동안 잔학무도한 탄압의 참상이 어떠할까. 양심의 눈을 뜨면 능히 볼 수 있는 것이다.
과거를 회상하라! 우리가 낮이면 노동에 흐르는 땀으로 몸을 적시다가 밤이 되면 전전불매(輾轉不寐)하던 것이 무슨 근심이었는가. 오직 나라 잃은 민족으로 인권 무시를 당하여 느끼던 서름이었다.
우리의 소망이 조국 광복이요 부르던 것이 인권 자유가 아니었던가. 그 정신의 결정으로 오늘에 거룩한 3월 1일이 생겼으며 이것이 우리 민족의 정신 부활이요, 자손만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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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를 세움이다.
우리의 국권이 침탈(侵奪)되던 때에 독립을 잃지 않으려고 얼마나 싸웠으며 독립을 잃은 후에 독립을 찾으려고 오늘까지 얼마나 싸우고 있었는가. 국내에서 생명을 희생 한 애국지사가 수백만에 이르렀고 국외에서 생명을 희생한 의사들이 우리 기억에 분명 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것은 부분적 활동이었다. 이번의 독립 선언은 거국일치하여 왜적을 대항하는 혈전(血戰)이므로 앞에서 왜적에게 죽으면 뒤에 섰던 자 계속하여 방방곡곡에 만세성과 왜적의 총소리가 3천리 강산을 흔들었다.
우리의 독립 선언이 이만큼 장쾌하다. 그 뒤를 이어서일할 자 누구인가. 만일 국내에서 독립 운동이 왜적의 총칼에 진압되면 어찌할 것인가. 이에 대하여 우리의 각오가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독립 선언은 독립을 하겠다는 의사의 발표요, 그 뒤를 받들어서 할 일은 이로부터 독립을 찾을 때까지 허다하게 많다. 그런데 세계 역사로 보아서 한 때에 일어난 열정(熱情)만으로 성공한 일이 별로 없고 어느 국가나 값없이 얻은 독립이 없으며 더우기 우리의 사정은 반드시 악전고투(惡戰苦鬪)하고 무한한 피를 흘려야 성공이 있을 것이다.
독립 선언하기 전에는 우리가 국내 동포의 기밀 공작과 연락이 없었던 까닭에 주저하던 때도 없지 않았으나, 오늘은 전체 민족이 일어나서 생명을 바치는 때니 아무 것도 주저할 것 없이 대한 민족 된 자 일제히 일어나서 가진 바 생명·재산·기능 모든 것을 바치고 용맹하게 나아가기를 맹세하자.
용감한 자는 큰 일에 임하여 대담하고, 신중하므로 일을 치르는 것이니 우리는 허영을 징계하고 진실한 행동으로 독립 운동의 응원을 끝까지 할 것이며 죽음으로써 성공하기를 기약하고 우선하기 3항을 실천하자.
① 우리는 피 흘린 후에 목적이 관철될 것을 각오하고, 마음으로 굳세게 맹서할 것이며, 우리의 운동이 단결과 행동 일치를 요구하나니 동포간에 서로 비밀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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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재미 한인은 처지와 환경의 구애로 이행할 책임이 국한되어 있는데 다행히 미국은 공화국으로 인권자 자유를 가장 힘있게 창도(唱導)하고 있는 터이니, 미국의 언론 기관과 종교 기관을 통하여 우리의 억울한 사정을 선전함으로 국제 공론(公論)을 일으키는 데 노력할 것이다.
③ 재미 한인은 다른 곳 동포에게 비교하여 경제적 여유가 있은즉 내외 각지 독립운동의 경제적 책임을 부담할 것이다.10)
그리고 전체 대표 회의의 결의안은 전문(全文) 12항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에도 주의 할 만한 것은 제6항에,
‘원동(遠東)에 대표를 파송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봉사(奉仕)하게 하고, 미주와 하와이 각 지방에 특파원을 파송하여 민중 여론을 수습하며 의사를 연락하여 행동 일치를 도모함.’
이라고 한 사실이다. 즉 이 회의가 열리던 3월 15일에는 아직 어느 지역에서도 임시정부가 수립되지 않았는데 여기서는 그것도 뒤늦게야 본국내의 3·1운동 소식을 들은지 1주일 이내에 벌써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봉사할 것을 결의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재미 동포들이 그동안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중에 임시정부 조직의 필요성을 통절히 느껴오던 데에서 연유(緣由)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국민회에서는 우선 이 결의안 제6항을 실천에 옮기는 단계로 안창호(安昌浩)를 재미 한인 대표로 선출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봉사하도록 상해(上海) 방면을 향하여 떠나게 하였으며, 안창호가 정인과(鄭仁果)·황진남(黃鎭南)과 함께 4월 5일에 미주를 떠나 상해로 오는 도중에는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됨과 함께 안창호를 내무총장에 선정하기도 하였던 것이니,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재미 한국인 사회와의 사이에는 이야말로 서로 말하지 않아도 통하고 약속하지 않아도 일치하는 바가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뒤를 이어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성립된 직후인 4월 14일부터 있은 필라델피아시에서의 재미 한국인 연합대회에서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지 후원하는 결의를 한 것이나, 그 후 계속해서 재미 동포들의 막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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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동상 제5장 ‘정치적 활동’중 ‘독립운동 응원’조 및 ≪안도산전서≫ 제9장중 3.1운동 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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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운동 자금이 대한민국임시정부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던 일들 역시 재미 동포 사회의 독립 운동을 위한 연원(淵源) 깊은 조직 활동에서 유래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