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 42기 중 열 여섯 번째로 구리 동구릉 원릉(元陵, 영조와 정순왕후)을 소개합니다.
순서는 제가 직접 다녀왔던 순서대로 합니다.
구리 동구릉
원릉(元陵, 영조와 정순왕후)
위치 :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조성 연도 : 1776년(정조 즉위), 1805년(순조 5)
왕릉 형식 : 쌍릉
쌍릉(雙陵)
쌍릉은 왕과 왕비의 봉분을 하나의 곡장 안에 나란히 조성한 능으로, 우상좌하(右上左下, 오른쪽에 왕, 왼쪽에 왕비)의 원칙에 따라 조성하였다. 대표적으로 명종 강릉, 영조 원릉, 철종 예릉 등 9기의 능이 있다.
▷ 원릉(元陵) 이야기
원릉은 조선 21대 영조와 두 번째 왕비 정순왕후 김씨의 능이다. 원릉은 하나의 곡장 안에 봉분을 나란히 배치한 쌍릉(雙陵)의 형식으로, 앞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왼쪽(서쪽)이 영조, 오른쪽(동쪽)이 정순왕후의 능이다.
이곳은 원래 효종의 옛 영릉(寧陵) 자리였으나, 영릉 조성 직후부터 석물에 문제가 생겨 계속 보수를 하다가 1673년(현종 14) 여주로 옮기게 되면서 터만 남아 있었다. 이후 1776년(영조 52) 영조가 세상을 떠나자 옛 영릉 자리에 원릉이 조성되었다. 원래 영조는 1757년(영조 33)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의 홍릉을 조성하면서 자신의 능 자리를 미리 만들어 쌍릉으로 조성되기를 원하였지만, 영조가 세상을 떠나고 영조의 능자리로 대신들의 의견이 나누어지자, 정조는 지금의 자리를 영조의 능자리로 결정하였다. 이후 1805년(순조 5) 정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영조의 능 동쪽에 능을 조성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원릉은 영조 대에 편찬된 『국조상례보편』의 예를 따랐는데, 봉분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왕과 왕비의 능 앞에 각각 석상(혼유석) 1개씩 배치하였다. 영조의 원릉을 시작으로 중계와 하계 사이의 단을 없애고 문석인과 무석인을 한 단에 같이 배치하였다.
능침 아래의 비각에는 총 3기의 표석을 세웠는데, 가장 왼쪽의 표석(1비)은 1776년 영조가 세상을 떠나고 원릉을 조성할 때 세운 ‘영종대왕’ 표석, 가운데 표석(2비)는 고종 대에 영조로 추존하고 세운 ‘영조대왕’ 표석, 가장 오른쪽의 표석(3비)는 1805년(순조 5)에 세운 ‘정순왕후’ 표석이다.
▷ 영조(英祖) 이야기
영조(재세 : 1694년 음력 9월 13일 ~ 1776년 음력 3월 5일, 재위 : 1724년 음력 8월 30일 ~ 1776년 음력 3월 5일)는 숙종과 숙빈 최씨의 아들로 1694년(숙종 20) 창덕궁 보경당에서 태어났다. 1699년(숙종 25)에 연잉군(延礽君)에 봉해지고, 경종이 즉위한 후에 왕세제에 책봉되었다. 당시 왕세제 책봉을 주장한 노론과 반대한 소론 간의 정쟁이 극심했으며, 영조 자신도 이 소용돌이에 휘말려 경종을 시해하려는 시도에 가담했다는 모함을 받기도 하였다. 이런 치열한 경쟁과 우여곡절 끝에 1724년에 경종이 세상을 떠나자 창덕궁 인정문에서 왕위에 올랐다.
영조는 재위기간 동안 붕당의 대립 자체를 완화 및 해소하는 것을 큰 과제로 삼아 왕위에 오름과 동시에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균형 있는 인재 등용을 통하여 탕평 세력을 구축하였다. 영조는 탕평 정치로 조정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는 여러 가지 폐단을 고치는 개혁 조치를 단행했다. 특히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 되어온 군역을 감소한 균역법(均役法)을 시행하고, 노비 신공(身貢)을 혁파하였다. 또 청계천 건설과 여러 사치풍조를 금지하고, 법제도를 개편하여 『속오례의』를 간행하였고, 장례에 관한 일을 개편하여 『국조상례보편』 을 편찬하였다.
그러나 붕당정치의 폐단으로 즉위 초에 경종 독살설에 휘말려 옥사가 일어났고, 1762년(영조 38)에는 왕세자(사도세자, 추존 장조)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과도한 경계심으로 왕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어 죽이는 등 붕당정치의 혼란을 완전히 잠재우지 못하였다. 1776년(영조 52) 경희궁 집경당에서 83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조선 역대 국왕 중 가장 오래 재위(52여년)하였고, 가장 오래 살았다. 세상을 떠난 후 묘호(廟號, 종묘에 붙여지는 이름)를 영종(英宗)이라 하였다가 1890년(고종 27) 영조로 추존하였다.
▷ 정순왕후(貞純王后) 이야기
정순왕후 김씨(재세 : 1745년 음력 11월 10일 ~ 1805년 음력 1월 12일)는 본관이 경주인 오흥부원군 김한구와 원풍부부인 원씨의 딸로 1745년(영조 21) 여주 사저에서 태어났다. 1757년(영조 33) 영조의 첫 번째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2년 뒤 15세의 나이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15세의 어린 나이에 왕비가 된 정순왕후의 대담하고 당찬 성격을 나타내는 일화는 왕비 간택 때에서부터 전해진다. 간택 시 영조가 왕비 후보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다른 사람들은 산이 깊다, 물이 깊다고 대답했지만, 정순왕후는 인심이 가장 깊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고개가 무엇이냐는 물음에는 보릿고개라는 인상적인 답을 하였다고 전한다. 왕비로 간택된 후에는 상궁이 옷의 치수를 재기 위하여 잠시 돌아서 달라고 하자 단호한 어조로 “네가 돌아서면 되지 않느냐.”고 꾸짖었다고 한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왕비의 품위를 잃지 않은 일화이다.
정순왕후는 영조가 세상을 떠나고 1776년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대비가 되었으며, 1800년에 정조가 세상을 떠나고 11세의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의 자격으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다. 수렴청정 기간 동안 정조 시대의 정책을 일부 계승하였고, 무리하게 행해졌던 정책들을 다시 정리하였다. 이후 1804년(순조 4)에 수렴청정을 거두었고, 다음 해인 1805년(순조 5)에 창덕궁 경복전에서 61세로 세상을 떠났다.
첫댓글 사진은 직접 찍은거에요? 와....
맨 마지막 사진만 제가 찍은거구요 ㅋㅋㅋ 나머지는 국가유산청 자료입니다
또 멈추셨군요.. 그냥 준게에 계셔야 할듯. ㅋ
아, 그런데 왜 그런지 이유는 알겠습니다.
다음카페가 방문일수 체크하는게 새벽 2시~4시라고 하는데,
제가 어제는 아빠님 말씀대로 쿠키삭제했더니 하루가 늘어났는데요...
원인을 대충 알겠더군요.
구글 크롬 설정에서 카페창을 자동으로 켜지도록 설정을 해놨더니, 컴퓨터를 끄더라도 로그아웃이 안된 모양이더군요.
그래서 로그아웃하고 로그인을 다시해도 일수가 늘어나지 않는 이유가 바로 다음카페의 방문일수 체크시간이 새벽2시~4시라서 낮에는 로그아웃 후에 로그인을 해도 카운팅이 안되더군요.
아빠님 말씀대로 다 지우고 쿠키삭제하고 그러면 되긴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선 크롬 설정부터 바꿔놨구요, 내일 제대로 카운트가 되는지 봐야겠습니다.
내일도 안된다면 준게귀신으로 남아야죠 ㅜㅜ
@베라루빈 그냥 준게 귀신....
@supervisor 준게 ㅂㅅ 될 듯요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