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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 제목: 사업과 직장을 위한 교양과 역사
■ 58번째 주 내용: 우리나라의 위대한 주요 역사서(歷史書)에 대하여 설명
■ 일자: 신축년(辛丑年) 단기 4354년 서기 2021.3.25.목요일.(음력 2.13.)
■ 장소=등재한 곳: 천지인(天地人)방 http://blog.naver.com/hhs0203 에 올려놓았음.
■ 강의자(講義者): 황효상(黃孝相) 호(號) 심조불산(心操彿山)
여러분께서 사업과 직장에 초석이 되고 밑바탕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저의 무료강의는 1마당에서 13마당으로 되어있습니다.
매주 목요일 무료강의를 올리겠습니다.
정정당당한 미래를 위해 우리 젊은 후손들에게 대홍익역사(大弘益歷史)배움터와 천지학당(天地學闛)터를 만들어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힘찬하루 보내세요.
제11마당 설명 중 58번째 무료강의 시작
◐ 우리나라의 위대한 주요 역사서(歷史書)에 대하여
■ 세계역사가 있다면 반드시 우리나라의 역사도 있다.
■ 자기나라의 역사를 연구하지 않는 자가 어찌 애국자이랴!
■ 역사를 아는 만큼 담판과 조약을 유리한 쪽으로 이끈다.
■ 진정한 지혜를 가질려면은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
■ 자기부모 자기나라 자기역사를 인정하지 않는 자는 충신이 아니며 효자가 아니라 반역자다.
■ 역사란? 단점을 극복하면 장점이 나온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학문이다.
▣ 우리나라의 위대한 주요 역사서(歷史書)에 대하여.
■ 배달유기(倍達留記)는 3대 가륵(嘉勒)단군 때 한웅시대=환웅시대(신시시대=배달시대)의 비장서(秘藏書: 고귀한 역사)이다.
■ 삼성기(三聖記)의 역사책은 신라 26대 진평왕 때 승려인 안함로(安含老)와 원동중(元董仲)이가 쓴 각각 상권 하권으로 구분하여 한인(桓因=桓仁)=환인과 한웅(桓雄)=환웅과 단군(檀君)과 북부여(北夫餘)의 시조 해모수(解慕漱)와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高朱蒙)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아주 고귀한 역사서이다.
■ 조대기(朝代記)는 대진국(大震國)=발해(渤海)의 비장서(秘藏書)이다. 즉 배달=한웅(환웅)나라의 뿌리의 역사와 단군의 역사로 귀중한 역사서이다.
■ 단기고사(檀奇古史)는 대진국(大震國)=진국(震國)=발해(渤海)시대에 대조영의 명으로 그의 동생 대야발(大野勃)이 만든 단군조선과 번한조선(番韓朝鮮)=기자조선(奇子朝鮮)의 비장서(秘藏書)이다.
■ 단군세기(檀君世紀)는 고려말 때 행촌(杏村) 이암(李嵒)의 47대까지 단군역사의 비장서(秘藏書)이다.
■ 북부여기(北夫餘紀)는 고려말 휴애거사(休崖居士) 범장(范樟)의 부여(夫餘) 6대의 역사와 한나라를 물리친 고두막한=동명단제=동명왕=동명성왕의 역사와 고구려 탄생에 대한 비장서(秘藏書)이다.
■ 진역유기(震域遺記)는 고려말 공민왕 때 이명(李茗)이 조대기[朝代記: 한웅(환웅)=배달과 단군조선의 역사를 근거로 한 대진국(발해)의 역사서]를 인용하여 한인=환인(桓因=桓仁) 한웅=환웅(桓雄) 단군(檀君)의 고귀한 역사서를 썼다.
■ 태백일사(太白逸史)는 조선 중종 때 한인(桓因=桓仁)=환인과 한웅(桓雄)=환웅역사에서부터 후삼국과 고려가지의 역사서를 조대기, 진역유기 등 총망라한 비장서(秘藏書)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삼대경전인 천부경(天符經) 삼일신고(三一神誥) 참전계경(叅佺戒經)을 기록하고 있다.
■ 규원사화(揆園史話)는 조선 19대 숙종 때 북애(北崖)=북애노인(北崖老人)이 진역유기(震域留記=震域遺記)를 인용하여 만주가 단군조선의 나라이며 한웅국(桓雄國)=환웅국의 역사에서 치우천왕이 중국의 황제헌원을 물리친 역사를 썼다. ≪ 즉 사마천 사기에서 황제헌원이 치우천왕을 죽였다는 잘못된 것을 밝혀놓았다. ≫
■ 발해고(渤海考)는 1784년(조선 22대 정조 8년)에 문화(文化) 유씨(柳氏) 유득공(柳得恭)이 대진국(大震國)=발해(渤海)가 진정한 후고구려(後高句麗)를 계승한 나라로 당시의 시대를 남북국시대(南北國時代)라고 처음으로 주장하여 주체의식이 확고한 사람으로 우리나라의 무대는 중국 만주의 광활한 대륙이다. 라고 주장한 고귀한 역사서이다.
3대 가륵(嘉勒)단군 때 만든 배달유기(倍達留記)는 우리나라의 배달(倍達) 즉 한웅(桓雄)=환웅역사에 대한 뿌리의 비장서(秘藏書)이며 세계역사와 고대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아주 고귀한 역사(歷史)이다.
즉 고귀하며 위대한 역사서이다. 그러나 지금은 전하지 않고 있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아 통탄할 일이다.
나라를 잃고 불태워 버리는 과정에서 우리의 위대한 역사서가 없어졌다.
그러나 역사는 불태워 버린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할수록 더 나타나는 것이다.
역사의 위대함은 수 천년 수 만년의 역사도 찾아낼 수 있다고 하였다.
아아 우리의 위대한 역사를 연구하고 찾아서 바로 세워야 하는 일이 남아있다.
곧 3대 가륵(嘉勒)단군께서 신축년(辛丑年)이며 재위 3년에 즉 BC 2180년에 배달유기 (倍達留記)를 편수하도록 하였다.
즉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가 BC 91년에 완성된 것으로부터 따져도 무려 2,089년이나 앞서서 만들었다.
그러므로 배달유기(倍達留記)는 우리나라의 근본의 역사로서 이것이 결국 조대기에서 진역유기로 그리고 규원사화로 이어오고 있다.
세계역사와 고대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아주 고귀한 역사서 라고 보는 바(所=事)입니다.
우리나라는 상기와 같이 배달유기(倍達留記)를 비롯하여 삼성기(三聖記) 조대기(朝代記) 단기고사(檀奇古史) 단군세기(檀君世紀) 북부여기(北夫餘紀) 진역유기(震域留記) 태백일사(太白逸史) 규원사화(揆園史話) 발해고(渤海考) 등의 위대한 역사서를 가지고 있다.
진정으로 내 나라를 사랑한다면 식민사관(植民史觀)=괴광사관(怪狂史觀)의 어두웠던 시절에 잘못들을 뛰어넘어야한다. 그리고 이러한 위대한 우리역사를 연구하여 세계역사와 비교하여 연구하여 가르쳐야 한다.
이집트 고왕국시대의 종말시대는 BC 2150년이며 이러한 시대에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면 제3대 가륵(嘉勒)단군시대이며 재위는 BC 2182년~ BC 2137년이며 재위기간은 45년간 하였다.
제3대 단군이신 가륵(嘉勒)단군께서 신시시대=배달시대인 즉 한웅(환웅)시대의 역사서인 배달유기(倍達留記)를 만들었다.
그리고 가륵단군께서는 한글의 근원인 정음삼십팔자(正音三十八字)를 만들어 이를 가림토(加臨土)라 하니 즉 가림토문자(加臨土文字)=가림다문자(加臨多文字)를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위대한 말씀이 있다. 아마 세계에서도 이보다 더 위대한 말은 없을 것이다. 즉 가륵조서(嘉勒詔書)를 말한다.
이 가륵조서는 3대 단군이신 가륵(嘉勒)단군시대에 말씀한 것이다.
가륵단군께서 재위 3년에 즉 BC 2180년에 천하에서 가장 으뜸가는 근본인 가륵조서(嘉勒詔書) 즉 가륵칙서(嘉勒敕書)를 만들었다.
가륵조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欲爲父者 斯父矣(욕위부자 사부의): 어버이가 되고자 하면은 어버이답게 하여야 하고
欲爲君者 斯君矣(욕위군자 사군의): 임금이 되고자 하면은 임금답게 하여야 하고
欲爲師者 斯師矣(욕위사자 사사의): 스승이 되고자 하면은 스승답게 하여야 하고
爲子爲臣爲徒者(위자위신위도자): 아들이 되고 제자가 되고 신하가 되고 일꾼이 되면은
亦斯子斯臣斯徒矣(역사자사신사도의): 이도 역시 아들답고 제자답고 신하답고 일꾼다워야 합니다. 라고 위대한 말씀을 하셨다.
▣ 조대기(朝代記)의 역사서에 대하여.
조대기는 한웅국=환웅국 즉 배달의 뿌리와 단군조선인 우리나라 옛 역사를 기록한 사서(史書)이며 발해 즉 진국(震國)=대진국(大震國)의 비장서(秘藏書)이다. 후고구려를 이어 나라를 세운 발해 즉 대진국(大震國)의 비장서이다.
조대기(朝代記)는 천보산(天寶山)의 태소암(太素庵)에 있던 대진국(발해)의 비장서(秘藏書)이다.
조대기(朝代記)는 대조영의 명으로 그의 동생 대야발(大野勃)이 저술한 단군조선의 역사를 근거로 한 대진국(발해)의 역사서이다.
즉 대진국=발해는 후고구려를 이어 우리역사인 한웅(환웅)역사와 단군조선의 자료를 많이 정리했던 것이다.
고려말 공민왕 때 이명(李茗)은 조대기를 인용하여 진역유기(震域留記=震域遺記)를 썼고 조선 19대 숙종 때 북애(北崖) 즉 북애노인(北崖老人)은 진역유기를 바탕으로 규원사화(揆園史話)를 썼다. 곧 한웅=환웅의 역사에서부터 단군조선 47대까지의 역사를 썼다.
▣ 진역유기(震域留記=震域遺記)의 역사서와 고시네에 대하여.
진역유기(震域留記)란 역사서는 이명(李茗)이 쓴 한인(桓因=桓仁)=환인역사와 한웅(桓雄)=환웅역사와 단군(檀君)의 고귀한 역사서(歷史書)이다.
이명은 고려 31대 공민왕 때 사람이며 호는 청평(淸平)이다.
이명(李茗)은 이암(李嵒)과 범장(范樟)과 함께 천보산(天寶山)의 태소암(太素庵)에 숨겨져 있던 진기(珍奇)한 고서(古書)를 보고
이명은 진역유기(震域留記=震域遺記)를 이암은 단군세기(檀君世紀)와 태백진훈(太白眞訓)을 범장은 북부여기(北夫餘紀)를 각각 쓰게 되었다.
이명(李茗)은 조대기(朝代記)를 인용하여 진역유기(震域留記=震域遺記)를 썼고
북애(北崖)는 진역유기를 인용하여 규원사화(揆園史話)를 썼다.
그러므로 조대기(朝代記)는 태소암에 있던 진국=대진국(발해)의 비장서(秘藏書: 배달국=한웅국=환웅국의 역사와 단군조선의 역사서)이다.
대진국(발해)은 후고구려를 이어 우리고대역사 자료를 많이 정리했던 것이다.
단기고사(檀奇古史)는 역시 대진국(발해)의 시조 대조영의 명으로 그의 아우 대야발(大野勃)이 지은 진국=대진국(발해)의 역사서이다.
그러나 우리의 귀중한 역사서가 전쟁으로 빼앗기고 불타버리고 지금은 전하지 않고 있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아 통탄할 일이다. 우리의 귀중한 역사서를 찾아야 한다. 곧 역사는 불태운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조대기의 역사는 결국 역사는 불태운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려 때 진역유기로 그리고 조선 때 규원사화로 당당하게 이어오고 있다.
▣ 진역유기(震域留記)의 위대한 역사서에서 고시네=고시례 라고 하는 풍습이 나왔다.
진역유기(震域留記)의 위대한 역사서에서 고시네=고시례(高矢禮)의 풍습이 나왔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말 때 이명(李茗)은 조대기(朝代記)를 인용하여 진역유기(震域留記)를 썼고 조선 중기 때 북애(北崖)는 진역유기를 인용하여 규원사화(揆園史話)를 썼다.
≪ 그러므로 조대기(朝代記)는 태소암에 있던 진국=대진국(발해)의 비장서(秘藏書: 배달국=한웅국=환웅국의 역사와 단군조선의 역사서)이다. 조대기와 진역유기는 3대 가륵단군 때 저술한 한웅국(桓雄國)=환웅국의 역사서인 배달유기(倍達留記)의 역사서의 내용을 말함이며 이것이 조선 19대 숙종 때 북애노인이 규원사화(揆園史話)를 쓰게 되어 우리의 위대한 상고사의 역사가 이어오고 있다고 말하고 있으며 그리고 이집트 역사에서 BC 2650년에 피라미드를 만든 것이 현존하므로 해서 이러한 시대에 우리나라 역사로는 한웅국(환웅국)의 총 18대 중 14대 치우천왕시대의 역사시대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는 것이다. 곧 단군역사 이전에 한웅국=환웅국=배달국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
중국의 역사로 황제헌원시대가 우리나라의 역사로는 한웅(환웅)시대=배달시대로 한웅국=환웅국 총 18대 중 14대 치우천왕(蚩尤天王)시대이다. ≪ 치우천왕시대 이때에 이집트 역사로는 BC 2650년에 세계불가사의 한 파라오(왕의 무덤)인 피라미드를 건설했다. 이러한 시대가 중국역사로는 사마천 사기(史記)에서 말하는 중국나라의 최초로 시작하는 황제헌원시대 이다. 곧 치우천왕이 먼저 나라를 다스리고 난 뒤 동시대인 중국의 황제헌원이 중국나라를 다스렸다. ≫
총 18대 한웅국(환웅국) 중에서 첫 한웅국(환웅국)시대에 우리나라의 고시네=고시례 라는 풍습이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다.
곧 고시네=고시례란 무슨 뜻이냐?
고사를 지낸 후 또는 산이나 들에서 음식을 먹기 전에 고시네(고시례)하는 풍습은 고시씨(高矢氏)에 대한 예의를 표하는 풍습의 어원이다
고시씨(高矢氏)라는 분은
한인(桓因=桓仁)=환인=한국(桓國)=환국을 이어받은 한웅국(桓雄國: 환웅국)을 개천(開天)할 때 즉 BC 3898년에 1대 한웅천왕=환웅천왕이신 초대 한웅(환웅)이신 거발한(居發桓)한웅=환웅=임금께서 나라를 시작할 때 농관(農官)을 지낸 분이다. ≪ 초대 한웅국(환웅국) 시대인 이때에 이집트 역사에서는 BC 3500년경에 이집트에서는 시간과 달력을 사용했다. 이러한 때는 한웅국=환웅국시대에는 복희씨가 활약하던 시대이며 중국역사로는 황제헌원 이전의 역사이다. 곧 중국은 나라의 시작이 없었던 시대이다. ≫
즉 고시씨는 우리 상고사 역사에 처음으로 농사를 관장하시던 분이다.
즉 한웅국(桓雄國)=환웅국=배달국(倍達國)의 5사(師)는 곡식, 생명, 질병, 형벌, 선악 중 주곡(主穀)을 담당하던 사람이다.
그리고 규원사화(揆園史話)의 구성은
■ 서문(序文)과
■ 조판기(肇判紀): 한웅국=환웅국=배달국의 역사와
■ 태시기(太始紀): 치우천황이 황제헌원을 물리친 이야기로 사마천의 사기가 잘못 기록된 것을 지적한 역사 → 사마천 사기가 이곳만은 잘못 기록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고귀한 역사인 태백일사(太白逸史)에서 치우천왕과 황제헌원간의 10년 동안에 73회를 싸웠으며 이에 헌원은 저항할 힘조차 없게 만들었으며 서쪽은 예탁(芮涿)의 땅을 지키고 동쪽은 회대(淮垈)의 땅을 취하여 성읍을 삼았다. 라고 기록을 하고 있다.
■ 단군기(檀君紀): 단군왕검 1대~47대까지의 역사.
■ 만설(漫說): 고대 우리민족의 활동 중심지는 요동을 중심으로 한 삼라만상의 이야기로부터 단군의 훌륭한 이야기의 역사로 되어있다.
이러한 내용들이 고려시대에 모두 이 진역유기를 인용하여 조선시대에 규원사화를 저술하였다.
곧 진역유기에서 초대 한웅국(환웅국)시대에 농관을 주관하신 분인 고시씨를 존경하는 의미에서 고시네 라는 풍습이 나왔다.
▣ 단기고사(檀奇古史)의 역사서에 대하여.
우리나라의 고귀한 역사서인 단기고사(檀奇古史) 서문 첫머리에서 저자 대야발(大野勃: 대조영의 동생)은 당나라장군 소정방(蘇定方)과 설인귀(薛仁貴)가 백제와 고구려 멸망당시 그 국서고(國書庫)를 부수고 단군의 조선사와 고구려사와 백제사를 전부 불태워버린 관계로 대조영(大祚榮)의 명을 받들어 다시 고대사(古代史)를 편집하고자 여러 의견과 많은 사기(史記)를 참고하여 그 윤곽을 잡았음을 밝히고 있다.
즉 의심되는 것은 빼고 있었던 일만을 기록하여 13년이 걸려 729년 천통(天統) 31년이며 곧 대진국(大震國)=진국(震國)=발해(渤海)는 대중상(만주 송화강에 살았으며 고구려에 신하였으며 그의 조상은 2대 단군인 부루단군의 자손임)으로부터 시조로 하여 대중상의 아들인 2대 고왕인 대조영이 대진국(大震國)=진국(震國)으로 국호를 고치고 대조영을 지나서 그의 아들이 3대 무왕이며 연호는 인안(仁安) 10년에 완성한 단군의 위대한 역사서가 바로 단기고사(檀奇古史)이다.
곧 13년 동안에 단군조선 47대의 역사와 번한조선=기자조선(奇子朝鮮)의 역사를 저술했다.
즉 이 단기고사(檀奇古史)란 단군의 47대까지 단군조선사와 기자조선(奇子朝鮮)=번한조선(番韓朝鮮)의 위대한 역사를 정리한 것이 바로 단기고사(檀奇古史)이다.
그 외 대진국=발해 때는 조대기(朝代記: 한웅=환웅의 역사와 단군의 역사를 말함) 등 많은 단군의 역사를 저술하였다.
▣ 단군세기(檀君世紀)의 위대한 역사서란?
고려 31대 공민왕 때 즉 고려말기시대에 살았던 호가 홍행촌(紅杏村) 즉 행촌(杏村) 이암(李嵒) 문정공(文貞公)이 편찬한 책으로 송화강(松花江) 아사달(阿斯達)에 도읍하여 단군조선(檀君朝鮮)이라는 나라 이름을 사용한 47대 단군님들의 위대한 역사 이야기를 2,096년동안의 실록을 기록한 위대하고 고귀한 역사서(歷史書)이다.
나라의 역사를 배우면 어찌 흥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어찌 역사의 사실의 글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이런 까닭에 기쁘게 단군님의 역사인 단군세기를 쓰기 시작하여 고려 31대 공민왕(恭愍王) 즉 효경대왕(孝敬大王) 또는 경효왕(敬孝王) 12년(1363년) 계묘년(癸卯年: 단기 3696년) 10월 3일에 강화도 해운당(海雲堂)에서 저술하였다.
1대 단군왕검(檀君王儉)으로부터 47대 고열가(高列加)단군까지 2,096년 동안 각 단군의 재위기간에 있었던 주요사건들을 편년체(編年體)로 기록한 단군조선사(檀君朝鮮史)이다.
이 단군세기의 기록은 실록 중에서 실록의 대역사서(大歷史書)의 기록이다.
일본은 야비하게 우리의 고귀한 단군조선의 역사서를 신화로 만들어 놓았다.
빠른 시일 내에 우리의 위대한 홍익인간정신의 얼로 바로 세워야 한다.
이 단군세기에는 단군의 역사에 있었던 아주 보배로운 교훈과 사료(史料)의 역사의 기록들이다. ≪ 이 단군세기는 사마천의 사기에서 기록 못하는 것을 이 단군세기에는 기록을 해놓은 아주 위대하며 고귀한 역사서이다. ≫
만주에 있는 송화강의 아사달(阿斯達)에 도읍하여 단군조선(檀君朝鮮)이라는 나라 이름을 사용한 47대 단군님들에 대한 실록의 이야기를 싣고 있다.
1대 단군왕검(檀君王儉)으로부터 47대 고열가(高列加)단군(단제=임금)까지 세계에서 가장 재위기간을 자랑하는 총 2,096년 동안 각 단군의 재위기간에 실록 즉 실지로 있었던 주요사건들을 편년체로 기록했다.
특히 이 단군세기의 역사서 속에는
하(夏)나라 멸망을 13대 흘달(屹達)단군 재위 17년이며 BC 1766년에 하(夏)나라 17대 마지막 걸왕(桀王)은 탕(湯)임금에게 멸망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은(殷)나라 멸망은 태백일사(太白逸史)의 역사서에서 은나라가 멸망한 해는 기묘년(己卯年)이며 마한조선(馬韓朝鮮)의 21대 아도(阿闍)왕 때 기묘년(己卯年)인 BC 1122년에 은나라가 멸망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곧 단군이 삼한(三韓: 진한. 번한. 마한)으로 다스렸으므로 단군조선은 진한조선(辰韓朝鮮)을 말하므로 이때는 25대 솔나(率那)단군이신 재위 29년이며 기묘년(己卯年)이며 BC 1122년에 은나라는 멸망하였다.
그리고 은나라의 기자(箕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25대 솔나(率那)단군 때 정해년(丁亥年)이며 재위 37년에 즉 BC 1114년에 은나라의 주(紂)임금이 멸한 후 주왕(紂王)의 친척 즉 주(紂)임금의 백부이며 그는 은나라를 멸망시킨 주(周)나라의 신하될 마음이 없어 동쪽으로 와서 살 때의 기자(箕子)=서여(胥餘)가 서화(西華)에 옮겨와서 살고 있을 때 인사 받는 일도 사절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 사마천의 사기 중 송미자세가에서 기록하기를 기자(箕子)를 단군조선에 봉했지만 단군조선에서는 신하로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
이러한 위대한 47대 단군의 역사서를 저술하였다.
그리고 단군조선의 마지막47대 단군을 해모수(解慕漱=解慕潄)가 북부여를 이어갔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귀중한 역사서를 국사책에는 언급하지를 못하고 있다.
삼국사기는 단군의 역사에 대하여 또 북부여의 역사에 대하여 언급을 못하고 있으며 삼국유사는 단군에 대하여 언급을 하였지만 너무나 빈약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단군세기(檀君世紀)에서는 사마천이 기록을 못하고 있는 것까지 기록을 하고 있다.
그리고 단군탄생은 신묘년(辛卯年)이며 BC 2370년 5월 2일 인시(寅時)에 밝달나무 밑에서 탄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 아아 우리나라 사람도 아닌데도 성대히 공휴일로 하고 있는 석가탄신일과 예수탄생일을 공휴일로 정해놓았다. 과연 이성을 가지고 있다면 즉 우리의 얼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의 위대한 나라를 건국하신 초대 단군왕검(檀君王儉)님을 국가에서 단군탄생일을 국경일로 만드는 날 진정 나라 라고 말할 수 있다. ≫
▣ 북부여기(北夫餘紀)의 역사서란?
북부여의 역사서는 고려 말의 공민왕 때 학자인 휴애거사(休崖居士) 범장(范樟)=범세동(范世東)이 지은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국사책에서는 고구려 건국연대는 BC 37년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상 고구려의 건국연대는 BC 58년이다. ≪ 삼국사기는 알에서 태어났다고 기록한 것은 너무나 황당무계(荒唐無稽)하여 고주몽의 고구려 건국한 BC 37년은 기준으로 삼을 수가 없다. 왜냐 이러한 전의 역사에서도 중국역사와 세계역사에서는 알에서 태어난 사람은 한사람도 없다. 즉 BC 86년에 사마천이 사망하였다. 곧 이러한 시대에 세계역사에서 알에서 태어났다고 기록한 역사는 없다. ≫
그리고 고주몽의 탄생은 졸본(卒本: 신의주 복쪽)이며 BC 79년 5월 5일이다.
이 북부여기는 47대까지의 단군조선을 이은 북부여의 182년간의 역사와 북부여를 이은 고구려(高句麗)의 전신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解慕潄)로부터 6대 고무서(高無胥)임금=단군 즉 단제(檀帝)까지의 182년간과 가섭원부여[迦葉原夫餘=동부여(東夫餘)]의 108년의 역사이다.
북부여기의 역사는 4대까지는 해모수의 후손이 이어갔으나 5대부터는 고두막한=동명단제=동명성왕=동명왕이 이어가고 6대는 그의 아들인 고무서(高無胥)가 이어갔으나 아들없이 별세하자 고주몽이 그의 유명(遺命)으로 대통을 이어가 고구려를 BC 58년 10월에 세우게 되었다.
이 북부여기를 저술한 범장(范樟)=범세동(范世東)은 생몰(生沒)은 미상이며 범장을 일명 범세동(范世東)이라 하며 고려 말기의 학자이다.
본관은 금성(錦城) 자(字)는 여명(汝明) 호는 복애(伏崖) 또는 휴애거사(休崖居士)이며 또는 통찬(通贊)이며 정몽주(鄭夢周)의 제자이다.
그는 공민왕 18년에 서기 1369년에 과거에 합격하였다.
그는 북부여기(北夫餘紀)와 동방연원록(東方緣源錄)을 지었다.
특히 이 북부여기(北夫餘紀)에서 진시황제(秦始皇帝)시대에 창해역사(滄海力士) 여홍성(黎洪星) 장량(張良)=장자방 박랑사(博浪沙) 진승(陳勝) 노관(盧綰: 한고조인 유방과 고향과 태어난 날자가 같다) 위만(衛滿) 기준(奇準=箕準: 번한조선의 마지막 임금) 등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 세계역사 무대에서 아주 귀중한 역사서이다.
▣ 태백일사(太白逸史)의 위대한 역사서란?
태백일사(太白逸史)란 역사서는 연산군(燕山君)과 중종 때의 학자인 일십당(一十堂) 이맥(李陌)선생님이 1520년(중종 15년)에 펴낸 것이다.
그 후 이 책을 조선말의 애국계몽운동가 이신 해학(海鶴) 이기(李沂)선생이 간직했던 책이다.
이 태백일사의 역사책은 표훈천사(表訓天詞: 신라 십성의 한사람인 표훈의 저서를 말함)와 조대기(朝代記: 대진국 즉 발해 때 만든 한웅=환웅=배달의 뿌리이며 단군조선의 뿌리인 우리나라 고대역사를 기록한 역사서를 말함)와 진역유기(震域留記: 고려말 공민왕 때 조대기를 보고 쓴 한웅=환웅=배달의 역사와 단군의 역사서를 말함)와 위서(魏書) 물길전(勿吉傳)과 진천문지[晋天文志: 창힐(蒼頡)과 고신(高辛)은 치우(蚩尤)씨의 후예 라고 나오는 역사서]와 고려팔관기(高麗八觀記)와 고려팔관잡기(高麗八觀雜記)와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자치통감(資治通鑑) 한서(漢書)와 송사(宋史) 등을 근간으로 하여만들었다.
곧 한인(桓因)=환인역사에서 한웅(桓雄)=환웅역사와 단군(檀君)역사와 북부여역사 이야기와 그 후 고구려와 후고구려역사와 이를 이은 대진국(大震國)=진국(震國)=발해(渤海)역사와 고려역사까지 만든 위대한 역사책이다.
▣ 징비록(懲毖錄) 역사서에 대하여.
징비록(懲毖錄)은 1599년(선조 32년) 2월인 58세에 고향인 경북 안동시 하회마을에 오셔서 저술을 시작하여 약 5년 여년에 걸쳐서 1604년(선조 37년) 7월인 63세에 저술을 마쳤다.
이 징비록(懲毖錄)은 1647년(16대 인조 25년)에 경상도 관찰사 조수익(趙壽益)이 처음 간행하였는데 일본에서도 이를 몰래 입수해 1695년(숙종 21년)교토의 야마토야[대화옥 (大和屋)]에서 간행했다.
이것은 적(賊)을 정탐한 것을 적에게 고한 것이라 하여 엄격히 금단(禁斷)을 하였다.
아아 임진전쟁(임진왜란)의 대역사서인 징비록을 연구를 않하고 411년이 지나서 이제 겨우 연속극으로 방영하고 있다.
아아 역사의 위대함이여 이 징비록(懲毖錄)을 연구하여 대안, 대책을 세웠다면 우리의 위대한 얼을 가진 홍익인간의 정신을 가진 내 나라는 짐승보다 못한 왜놈에게 나라를 매국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라도 역사를 나라의 밑바탕으로 가르치고 배운다면 화랑도(花郞道: 여랑도 포함)들은 힘차게 나라를 이끌고 갈 것이다.
▣ 발해고(渤海考)의 역사서에 대하여.
1784년(조선 22대 정조 8년)에 유득공(柳得恭)이 쓴 발해(渤海)에 관한 역사책이다.
발해고(渤海考)란 책은 조선 22대 정조 시대에 활약했던 서자출신이지만 이를 극복하고 정조의 배려로 규장각의 검서관(檢書官)으로 지냈던 유득공(柳得恭)이 저술한 북쪽에 후고구려를 이은 대진국(大震國)=진국(震國)=발해(渤海)의 역사서이다.
이 책은 특히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 당시의 시대를 남북국시대(南北國時代)를 처음으로 즉 남쪽에는 신라(新羅)가 북쪽에는 대진국(大震國)=진국(震國)=발해(渤海)]의 나라가 양립하고 있었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즉 신라가 한국사의 한반도를 통일한 것이 아니라 북쪽에 실존한 대진국=발해의 역사를 표출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잘못을 지적하는 아주 위대한 업적이며 남북국시대(南北國時代)이라고 단언한 우리나라의 소중한 사료(史料)이다.
문화(文化) 유씨(柳氏)인 유득공(柳得恭)은 대진국(발해)에 관한 역사책인 발해고(渤海考)란 책이 완성하기를 1784년(22대 정조 8년)에 저술을 마쳤다.
대진국=발해역사시대에서는 단군조선의 주요한 대역사서인 조대기(朝代記: 배달의 뿌리이며 단군조선의 뿌리인 우리나라 옛 역사를 기록한 사서)와 단기고사[檀奇古史: 단군조선과 기자조선(奇子朝鮮)=번한조선의 역사서)를 비롯하여 많은 역사서를 저술하였다.
이 책은 특히 과거 고려에서 체계적인 발해사(渤海史) 서술이 이루어지지 않은 데 대한 저자자신의 강렬한 비판 위에서 쓰여진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을 세가(世家) 전(傳) 지(志)라 하지 않고 고(考)라고 한 것은 사(史)를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겸손해 하고 있지만 이 책의 중요함은 실로 크고도 크다고 보는 것은 고려가 대진국=발해의 영토를 점령하고 있는 여진(女眞) 거란(契丹)에 대하여 영토적 권리주장을 내세우지 못하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발해고(渤海考)의 사학사적(史學事的)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고 보는 봐(見=思)입니다.
이는 뒤에 발해가 거란(契丹)인 즉 요(遼)나라에 멸망하고 그리고 요나라와 북송은 금나라에 멸망하고 고려가 개국한 한국의 역사가들에게 중국의 역사관을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우리의 역사의 무대는 북방 만주대륙이라는 확고한 역사인식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
발해는 후고구려를 세운 대조영의 아버지 대중상으로 고조로 하여 그 후 대조영이 국호를 개명하여 대진국=진국(발해)으로 총 16대 마지막 왕 애제(哀帝)는 즉 이름이 대인선(大諲譔)은 거란=요(遼)나라에 투항하고 즉 정월에 투항하고 7월에는 103개 성이 함락되어 서기 926년 7월에 발해(渤海)의 나라는 멸망하였다. ≪ 926년은 당나라가 멸망하고 난 후 오대십국(五代十國)시대로 북송이 서력 960년에 나타나기 전의 역사다. ≫
서기 926년은 고려 태조 왕건(王建) 재위 9년이며 7월이다.
그 후 서력 942년 10월에 즉 고려 왕건(王建) 재위 25년에 일어난 만부교사건(萬夫橋事件)이 일어났다.
■ 만부교사건(萬夫橋事件)이란?
서력 942년 10월에 즉 고려 왕건(王建) 태조 재위 25년에 거란(契丹)에서 즉 요(遼)나라에서 친선을 도모하기 위하여 사신 30명과 낙타 50필을 보냈는데
왕건은 발해를 멸한 거란=요나라의 사신을 섬으로 귀양 보내고 낙타는 만부교(萬夫橋) 아래에 매어놓아 굶어 죽게 한 사건이다.
만부교(萬夫橋)는 개경의 보정문(保定門) 안에 있는 다리로 이 일이 있은 뒤로는 탁타교(橐駝橋)라고 불렸다. 즉 낙타교 라고 하였다.
▣ 규원사화(揆園史話)의 역사서란?
조선 1676년(19대 숙종 2년)에 북애노인(北崖老人)이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민족사서 (民族史書)를 종합 재구성하여 저술한 한국 상고사 및 만설(漫說)을 담은 역사책이다.
조선조 19대 숙종 2년에 작성된 진본임을 확인하고 국립중앙도서관 귀중본으로 지정한 것이다.
이 규원사화의 역사책은
■ 서문(序文)
■ 조판기(肇判紀): 한웅국=환웅국=배달국의 역사.
■ 태시기(太始紀): 치우천황이 황제헌원을 물리친 이야기로 사마천의 사기가 잘못 기록된 것을 지적한 역사 → 사마천 사기가 이곳만은 잘못 기록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고귀한 역사인 태백일사(太白逸史)에서 치우천왕과 황제헌원간의 10년 동안에 73회를 싸웠으며 이에 헌원은 저항할 힘조차 없게 만들었으며 서쪽은 예탁(芮涿)의 땅을 지키고 동쪽은 회대(淮垈)의 땅을 취하여 성읍을 삼았다. 라고 기록을 하고 있다.
■ 단군기(檀君紀): 단군왕검 1대~47대까지의 역사.
■ 만설(漫說): 고대 우리민족의 활동 중심지는 요동을 중심으로 한 삼라만상의 이야기로부터 단군의 훌륭한 이야기의 역사로 되어있다.
호가 청평(淸平)이신 이명(李茗)은 조대기(朝代記)를 인용하여 진역유기(震域留記=震域遺記)를 썼고 북애노인은 진역유기를 바탕으로 규원사화(揆園史話)를 썼다.
규원사화는 단군의 총재위기간을 1,205년간으로 기록하고 있다. ≪ 그러나 단군 47대까지의 이름은 단기고사나 단군세기와 같으나 총재위기간은 규원사화는 다르나 실록의 단군의 역사책을 규원사화보다 그 전에 저술한 단기고사나 단군세기의 역사책이 먼저 저술한 역사가 맞는 역사로 그 역사기간은 2,096년이 맞는 것이다. ≫
➜ 규원사화의 단군기(檀君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단군왕검=한검(桓儉)=환검으로부터 고열가(高列加)까지 47대 왕명과 재위기간이 총 1,205년간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치적이 나타나 있다. ≪ 총재위기간은 47대 2,096년이 맞는 역사다. ≫
고대의 임금은 반드시 먼저 하늘과 단군과 삼신을 섬기는 것을 도(道)로 삼았다고 한다.
고구려의 조천석(朝天石) 발해의 보본단(報本檀) 고려의 성제사(聖帝祠) 요(遼)의 삼신묘(三神廟) 금(金)의 개천홍성제묘(開天弘聖帝廟)는 모두 단군의 묘이며
근조선에 이르러서도 세종은 단군묘를 평양에 설치했고 세조 원년에는 위패를 조선시조(朝鮮始祖) 단군사당(檀君祠堂)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북애(北崖)는 사람들이 오직 단군만을 높일 줄 알고 그 이전에 신시씨(神市氏)가 즉 한웅씨(桓雄氏)=환웅씨가 개창한 것은 알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즉 한웅=환웅=신시=배달국이 나라를 열어 개천이 되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음을 개탄하고 있다. ≪ 곧 세계역사의 이집트역사에서 BC 2650년에 세계불가사의 한 피라미드를 건설했다. 이때가 바로 우리나라로는 단군역사 이전인 한웅국(桓雄國)=환웅국=배달국(倍達國)시대의 총 18대 중 14대 치우천왕(蚩尤天王)시대이며 중국역사로는 사마천 사기에서 황제헌원(黃帝軒轅)시대이다. 이러한 것으로 세계역사를 통하여 단군의 역사 이전에 한웅국=환웅국=배달국이 있었다는 것이 증명이 되는 것이다. ≫
➜ 단군왕검을 시조로 하여 단군조선사(檀君朝鮮史)의 총재위기간에 대하여
■ 신라시대에 저술한 고귀한 삼성기(三聖記)의 역사서에서는 단군왕검으로부터 1대로 시작하여 47대로 총재위기간은 2,096년간 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 단기고사(檀奇古史)와 단군세기(檀君世紀)나 규원사화(揆園史話)의 47대 역대단군 즉 단제(檀帝)=임금의 이름은 같다.
그리고 삼성기(三聖記)와 단기고사(檀奇古史)와 단군세기(檀君世紀)의 역사서인 단군조선사의 총재위기간은 2,096년간 이라고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 19대 숙종 때 북애노인(北崖老人)이 지은 규원사화(揆園史話)는 1676년(숙종 2년)에 쓴 우리의 상고사이다. 이는 단기고사보다 947년이 지난 후에 지었으며 또 단군세기 보다 313년이 지난 후에 지었다.
그런데 규원사화의 저자 북애노인은 과거에 낙방하여 관직에 근무를 못하여서 즉 자료가 미비하여 단군의 총재위기간을 1,205년간으로 기록하고 있다.
고로 우리나라의 귀중한 상고사인 단군(檀君)의 역사는 삼성기와 단기고사와 단군세기가 앞서 저술 하였으므로 이것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타당하므로 BC 2333년에 단군왕검(檀君王儉)을 시조로 하여 마지막 47대 고열가(高列加)단군 BC 238년까지로 총재위기간은 2,096년간이다.
이것이 고귀한 우리나라 단군조선 47대까지 총 2,096년간 동안의 총재위기간의 역사서이다.
삼국사기에는 단군왕검에 대하여 언급조차 없으며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단군왕검(檀君王儉)에 대한 이 말은 삼국유사 제1권 기이(紀異)편에서 나오는 글이다.
이곳 삼국유사 기이편에서 역대 단군님의 재위기간은 없고 단군왕검 한 분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이 기이편 속에서 단군왕검께서 1,500년동안 나라를 다스렸고 나이가 수일천구백팔세(壽一千九百八歲) 즉 나이가 1,908세 였다. 라고만 기록하고 있다.
곧 규원사화보다는 703세가 더 많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를 1145년에 지은 후 136년 지난 후 삼국유사를 1281년에 저술하고 난 6년 후에 저술한 제왕운기(1287년)에서는 단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제왕운기(帝王韻紀) 하권 전조선기(前朝鮮紀)에서 단군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석제의 손자 단군께서 향국일천이십팔(享國一千二十八) 즉 1,028년간을 다스리다가 아사달(阿斯達)에 들어가서 신선이 되었다. 아사달에 들어가서 신선이 되었다는 말은 곧 별세하였다는 말이다.
이 제왕운기는 규원사화보다 177년이나 적게 기록하고 있다.
결론으로 단군의 47대 총재위기간은 삼성기(三聖記) 단기고사(檀奇古史) 단군세기(檀君世紀)에서 기록하고 있는 2,096년간이 우리나라 단군조선의 총재위기간이 맞는 기록이다.
곧 이러한 주요한 역사서가 기록되어 내려오기를 조선시대까지 내려왔다.
그러나 이러한 주요한 역사를 연구를 않하고 즉 역사 속에 방책들을 연구하지 않아 결국 국가관과 역사관이 나라를 구하는데 진정한 지혜와 방책들을 주고 있는 이러한 위대한 역사를 국가에서 가르치지 않아 곧 구국의 큰 뜻을 가르치지 않아 개인의 사리사욕에 나라까지 매국하는 지경까지 나타나게 만들었다.
지금부터라도 역사를 연구하고 가르쳐 진정한 지혜를 찾아내어 화랑도(花郞道)와 여랑도(女娘道)들에게 가르치는 일이 남아있다.
각시대순으로 우리나라 주요(主要) 역사서(歷史書)에 대하여 아래에 올리옵니다.
우리가 현재까지 역사를 가르치기를 고려시대 삼대사서(三大史書)로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제왕운기(帝王韻紀)가 고려시대에 찬술한 삼대의 사서(史書)이다. 라고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역사를 찬술한 훌륭한 분이 많습니다. 아래에 올리옵니다.
▣ 우리나라 각 시대에 저술한 주요(主要) 역사서(歷史書)에 대하여
남북국시대(南北國時代)인 남쪽의 통일신라와 북쪽의 대진국=진국=발해와 그 이전에 지은 즉 백제와 신라의 주요한 사서(史書)는 다음과 같다.
➜ 백제시대의 서기(書記)
375년인 백제 13대 근초고왕(346년~375년) 재위 30년 때 박사 고흥(高興)이 편찬한 역사서(歷史書)이다.
아직기(阿直岐)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 일본왕이 아라타[황전별(荒田別)] 등을 보내어 학덕 높은 학자를 보내주기를 청하니 이에 왕인(王仁)이 추천되어 375년(백제 13대 근초고왕 30년)에 논어(論語) 10권과 천자문(千字文) 1권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가 일본왕의 태자 토도치랑자(菟道稚郞子)의 스승이 되었다.
그리고 왜왕의 요청에 의해 군신들에게 경사(經史)를 가르쳤다.
≪ 375년은 사마중달의 손자 사마염(司馬炎)이 서진(西晉)에 즉위한 후 동진(東晉) 9대 효무제(孝武帝) 재위 3년이다. 서진은 317년에 흉노와 선비족의 침입에 밀리어 남경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어 사마예(司馬睿)가 동진을 이어가게 됨. 420년에 11대 황제인 공황제(恭皇帝)는 동진(東晉=東晋)의 나라는 멸망하게 됨. 이후의 중국 역사는 남북조시대가 접어들어 100여년 동안 분열상태가 되어 581년에 양견(楊堅)이 수(隋)나라를 세움. ≫
근초고왕 때 국사(國史)가 편찬된 것은 신라의 24대 진흥왕(540년~576년) 때와 견주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백제의 서기(書記)는 신라의 진흥왕 6년인 545년에 거칠부(居柒夫)가 편찬한 국사(國史)보다 약 170년이나 앞서 기록한 역사서(歷史書)이다.
또한 일본서기(日本書紀: 720년에 편찬함) 보다도 약 345년이나 앞서 편찬한 역사책이다.
이 백제의 서기(書記)와 신라의 국사(國史) 책은 현재 전하지 않고 있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리고 삼국사기는 약 770년이 지난 후에 고려시대인 1145년(고려 17대 인종23년 71세) 12월에 김부식(金富軾)이 왕명에 의하여 50권을 편찬하였다.
그리고 삼국사기를 지은 후 136년이 지난 후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지었다.
이 백제의 서기(書記) 역사책은 중앙집권적 귀족국가 건설의 문화적 기념탑이라고 할 수 있다.
➜ 신라시대의 국사(國史)
신라 24대 진흥왕 6년에 즉 서기 545년에 편찬한 신라의 역사서(歷史書)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진흥왕 6년에 의하면 545년 가을 7월에 이찬(伊湌) 이사부(異斯夫)가 왕에게 아뢰기를 국사(國史)는 군신(君臣)의 선악을 기록하여 만대에 포폄(褒貶)을 보이고자 함이니 사기(史記)를 꾸며 두지 않으면 후대에 무엇을 보이겠습니까? 하고 건의하였다.
왕이 이를 좇아 대아찬(大阿湌)과 거칠부(居柒夫) 등에게 명하여 널리 문사를 모아 수찬하게 하였다.
정력적으로 진행된 산성축조에 대한 기사를 중심으로 한 역사서일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즉 국사의 편찬은 유례없는 영토확장과 체제정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만큼 중앙집권적 귀족국가 건설의 문화적 기념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신라의 역사서인 국사(國史)란 책이 현재 전하지 않아 그 내용은 알 수 없다.
진흥왕의 업적은 대외적으로 발전을 비약적으로 추진시킨 왕이다.
즉 대가야를 정복하고 신라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차지하였으며 즉 거칠부에게 국사(國史)를 편찬케 하였으며 황룡사(皇龍寺)를 완공하였으며 특히 화랑도(花郞徒)를 창설하여 큰 업적을 남기었다.
진흥왕순수비에 거칠부(居柒夫)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진흥왕 때 가장 영향력이 있는 장군으로 알 수 있다.
➜ 신라시대의 삼성기(三聖記)
신라 26대 진평왕 때 승려인 안함로(安含老)와 원동중(元董仲)이가 쓴 고대사의 역사서이다.
각각 상권 하권으로 구분하여 한인(桓因=桓仁)=환인 한웅(桓雄)=환웅 단군(檀君)에 대한 역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속에는 우리민족의 시발(始發)인 한국(桓國)=환국시대의 한인(桓因=桓仁)으로부터 7대(세) 한인(환인)까지의 3,301년의 역사와 특히 신시시대(神市時代)의 한웅(桓雄)=환웅으로부터 18대(세) 한웅(桓雄)=환웅까지의 1,565년의 역사를 압축한 것이다.
그리고 특히 북부여(北夫餘=北扶餘)에서 고구려의 시조인 고주몽(高朱蒙)에 대하여 상술하고 있어 우리정통 역사의 맥을 설명하고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 남북국시대 북쪽의 대진국=진국=발해시대의 단기고사(檀奇古史)
고구려를 이은 대진국(大震國)=진국(震國)=발해(渤海)의 시조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大野勃)이 지은 단군조선사(檀君朝鮮史)의 역사서(歷史書)이다.
단기고사(檀奇古史) 서문 첫머리에서 저자 대야발(大野勃: 대조영의 동생)은 당나라 장군 소정방(蘇定方)과 설인귀(薛仁貴)가 백제와 고구려 멸망당시 그 국서고(國書庫)를 부수고 고구려사와 백제사를 전부 불태워버린 관계로 다시 고대사(古代史)를 편집하고자 여러 의견과 많은 사기(史記)를 참고하여 그 윤곽을 잡았음을 밝히고 있다.
즉 의심되는 것은 빼고 있었던 일만을 기록하여 13년이 걸려 729년 천통(天統) 31년에 완성한 단군조선사(檀郡朝鮮史)이다.
➜ 고려시대의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사기(三國史記)는 김부식(金富軾)이 왕의 명에 의하여 1140년(고려 17대 인종 18년)에 시작하여 5년 후 1145년 12월(고려 17대 인종 23년 71세)에 삼국사기 50권을 지어 올렸다.
즉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지은 136년 후에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지었으며 그리고 142년 후에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지었다.
초간본은 현존하지 않고 있으며 2차 판각은 13세기 후기로 추정되며 성암본(誠庵本: 단행본으로 편철된 필사본)으로 알려진 이 삼국사기는 잔존본(殘存本)이기는 하나 현존하는 삼국사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일본 궁내청(宮內廳)에 소장되어 있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위대한 역사책은 그 후 3차판각으로 1394년(태조 3년)에 있었으며 그리고 4차판각은 1512년(중종 7년)에 있었다.
삼국사기의 완질본으로 된 역사책은 현재 서울에 있는 이병익(李炳翼)과 옥산서원(玉山書院)에 소장되어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가 조선시대 마지막으로 간행된 것은 현종실록 자로 간행한 것으로 내사기(內賜記)에 의하면 1760년(영조 36년)경으로 추정되며 소련과학원 동방연구소 레닌그라드지부 도서관에 소장되어있다.
당시의 조정에서는 거란(契丹) 격퇴 이후의 국가적 자신과 여진(女眞)의 위협에 따르는 강렬한 국가의식이 고조되었음을 주목할 수 있다.
따라서 소실된 국사(國史)의 재 편찬은 단순한 유교정치이념의 구현만이 아니라 민족의식의 차원에서 요구되었다.
그러므로 삼국사기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이제는 뿌리째 뽑아버리고 우리의 훌륭한 역사의식을 즉 삼국사기에서 말하고 있는 올바른 목적과 방향을 알아야 하며 올바른 우리의 혼을 즉 우리의 훌륭한 얼을 가르쳐야한다. ≪ 이 삼국사기는 건국임금을 알에서 태어났다는 것만 빼고는 훌륭한 문화업적을 남겼다. ≫
➜ 고려시대의 단군세기(檀君世紀)
고려시대 1297년(25대 충렬왕 23년) ~ 1364년(31대 공민왕 13년)에 고려 말엽의 문신으로 살았던 홍행촌(紅杏村) 즉 행촌(杏村) 이암(李嵒) 문정공이 편찬한 47대까지의 단군님의 위대한 역사서이다.
아사달(阿斯達)에 도읍하여 조선(朝鮮)이라는 나라 이름을 사용한 단군(檀君)님들의 47대까지의 실록의 역사 이야기를 싣고 있다.
1대 단군왕검(檀君王儉)으로부터 47대 단군 고열가(高列加)까지 2096년 동안 각 단군(檀君)의 재위 기간에 있었던 주요 사건들을 편년체(編年體)로 실록을 기록했다.
◉ 이암(李嵒)의 저서(著書)
■ 단군세기(檀君世紀): 단군조선의 1대~47대까지의 단군의 실록의 역사이다.
■ 태백진훈(太白眞訓): 태백진훈의 책은 우주관(宇宙觀) 인생관(人生觀) 국가관(國家觀)이 들어있는 심법(心法)의 책이다. 즉 심학(心學)의 책이며 한국(桓國)=환국 한웅국(桓雄國)=환웅국 단국(檀國: 단군조선=단군삼한) 북부여(北夫餘) 고구려(高句麗) 삼국(三國) 대진국(大震國)=발해(渤海) 고려(高麗)의 사서(史書)를 통하여 전하는 올바른 도학과 심법의 책이며 역사책이다. 이 책이 바로 태백진훈의 역사책이다.
■ 농상집요(農桑集要): 나라의 살림살이의 실무가 있다.
➜ 고려시대의 삼국유사(三國遺事)
일연(一然): 1206년(고려 21대 희종 2년) ~ 1289년(25대 충렬왕 15년)이며 고려 후기의 고승이다. 보각국존(普覺國尊) 이라고 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지었다. 주로 자(字)로 일연(一然)으로 알려져 있다.
≪ 1206년은 일연이 태어난 때이며 이때는 징기즈칸 즉 성길사한(成吉思汗)이며 테무진이며 즉 철목민(鐵木眞)은 몽고고원 중심을 통일하여 대몽고국(大蒙古國)을 세웠다. ≫
삼국유사는 삼국의 역사 전반에 관한 사서(史書)로 편찬된 것은 아니다. 또한 삼국의 불교사 전반을 포괄하지도 못하였다. 저자 자신의 관심을 끈 자료들을 선택적으로 수집 분류한 자유로운 형식의 역사서(歷史書)이다.
그러나 이 책이 말하고 있는 것은 저자의 각고의 노력과 강한 역사(歷史)의식이 쓰며 있다고 평가되고 있다.
삼국유사는 석남본(石南本)과 송은본(松隱本)이 현존하고 있다.
송은본(松隱本)은 보물 제419호로 지정 되어있다.
성은 김씨(金氏) 처음 법명은 견명(見明)이다. 경산(慶山) 출생이다. 김언정(金彦鼎)의 아들이다.
처음 자(字)는 회연(晦然) 그 뒤 자를 일연(一然)으로 함. 자호(自號)는 목암(睦庵)이다.
몽고 침략으로 짓밟히고 빼앗기고 그 처참한 광경을 겪었으며 고려인들은 온갖 수모를 견디면서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고려팔만대장경을 1251년(23대 고종 38년)에 완성하였다.
이때에 국사(國師)로 추대하였으나 그 명칭이 중국식이라 거절하고 국존(國尊)으로 받들어 모시고 고려팔만대장경 회향식(回向式)을 거행할 때 일연국존을 최고의 자리에 모시었다.
충렬왕(忠烈王) 즉위 후에는 청도 운문사(雲門寺)에 머무르면서 선풍을 크게 일으켰으며 이때부터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삼국유사(三國遺事)는 1227년에서 1281년 사이에 집필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1281년(25대 충렬왕 7년)경에 편찬하였다.
이 삼국유사의 구성은
■ 왕력(王歷: 삼국 가락국 후고구려 후백제 등의 간략한 연표)
■ 기이(紀異: 고조선으로부터 후삼국까지의 단편적인 역사를 57개 항목으로 서술)
■ 흥법(興法: 삼국의 불교수용과 그 융성에 관한 6항목)
■ 탑상(塔像: 탑과 불상에 관한 사실 31개항목)
■ 의해(義解: 원광서학조를 비롯한 신라의 고승들에 대한 전기 14항목)
■ 신주(神呪: 신라의 밀교적 신이승들에 대한 3항목)
■ 감통(感通: 신앙의 영이감응에 관한 10항목)
■ 피은(避隱: 조탈고일한 인물의 행적 10항목)
■ 효선(孝善: 부모에 대한 효도와 불교적인 선행에 대한 미담 5항목) 등 9편으로 구성되어있다.
이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집필하기 위하여 사료(史料)를 수집한 것은 청년시절부터였고 그 원고의 집필은 대게 70대 후반으로부터 84세로 죽기까지 주로 만년에 이루어 집필한 것이다.
1310년(고려 26대 충선왕 2년)에 제자 무극(無極)이 삼국유사를 간행하였는데 이때 그가 첨가한 기록이 두 곳에 있다. 무극기(無極記) 라고 표현한 것이 그것이다.
1940년 이후에 석남본과 송은본을 모사한 필사본이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책은 허황하여 믿기 어렵다고 부정적인 평가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초기 이후의 많은 역사책에 인용 되었고 영향을 주었다.
삼국유사는 시간이 흐를수록 한국고대의 역사, 지리, 문학, 종교, 언어, 민속사상, 미술, 고고학 등 모든 부분의 열쇠를 제공하는 총체적 문화유산으로 인식되고 있다.
즉 삼국사기에서 미처 담아내지 못한 내용들을 후세에 전달하여 민족성을 고취시키고자 했던 일연(一然)의 깊은 뜻을 되새기게끔 하고 있다.
➜ 고려시대의 제왕운기(帝王韻紀)
제왕운기는 1287년(25대 충렬왕 13년) 문인 이승휴(李承休)가 당시 원나라의 정치적 문화적 지배체제를 극복하고자 저술한 역사 서사시(書史詩)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와 함께 고려시대에 찬술한 삼대사서(三大史書)의 하나로서 상하 2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권에서는 반고(盤古)로부터 금(金)나라까지 중국의 역사를 칠언시로 읊었으며 하권에서는 한국사를 2부로 나누어서 지었다.
제1부에서는 동국군왕개국연대(東國君王開國年代)라 하여 전조선 후조선 위만조선 한사군, 삼한, 신라, 고구려, 백제, 후고구려, 후백제, 발해의 사적(史籍)을 칠언시 1460언으로 읊었다.
제2부에서는 본조군왕세계연대(本朝君王世系年代)라 하여 고려 태조로부터 충렬왕 때까지의 사실을 오언시 700언으로 읊었다.
특히 하권에 실려 있는 단군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의 기록과 함께 가장 오래된 것이다.
하권 지리기(地理紀)에는 요동(遼東)에 별천지가 있으니 중국 왕조와는 아주 구분되며 삼면은 바다이고 북은 대륙에이어진 중방 천리 땅이 조선(단군조선)이다. 천하의 명승이고 평화로운 고장 예의바른 집으로서 중국인이 문화국이라고 일컫는 나라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 고려 25대 충렬왕(忠烈王)시대의 주요 세계역사 상황
■ 원나라가 중국대륙 전역을 차지하여 지배함.
■ 1275년에 마르코 폴로가 원에 이르러 상도(上都)인 개평부(開平府)에서 세조에게 알현(謁見)함.
■ 남송의 문천상(文天祥)이 병(兵)을 일으켰으나 원병(元兵)에 잡혀 결국 남송 멸망함.
■ 문천상의 300자 60구로 된 오언고시(五言古詩) 정기가(正氣歌)지음. 그 후 피살됨.
■ 원나라와 고려연합군이 일본을 제2차원정 시도함. 일기(壹岐)와 대마도(對馬島)를 침. 그러나 실패함.
■ 일본 원각사(圓覺寺)를 창건함.
■ 안향(安珦)이 연경(燕京)에서 주자서(朱子書)를 베껴옴.
■ 1291년(충렬왕 17년)에 십자군전쟁 끝남.
■ 마르코폴로 이탈리아로 돌아오고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 출판함.
➜ 고려시대의 조대기(朝代記)
조대기(朝代記)는 대조영의 명으로 그의 동생 대야발(大野勃)이 저술한 단군조선의 역사를 근거로 한 대진국(발해)의 역사서이다.
고려 31대 공민왕 때 이명(李茗)이라는 학자 호는 청평(淸平)이며 이 조대기(朝代記)책을 인용하여 진역유기(震域留記)를 썼다.
이 조대기는 고구려를 이어 나라를 세운 발해(渤海) 즉 대진국의 비장서(秘藏書)이다.
조대기는 한웅국=환웅국 즉 배달의 뿌리와 단군조선인 우리나라 옛 역사를 기록한 사서(史書)이며 발해 즉 진국(震國)=대진국(大震國)의 비장서(秘藏書)이다. 후고구려를 이어 나라를 세운 발해 즉 대진국(大震國)의 비장서이다.
조대기(朝代記)는 천보산(天寶山)의 태소암(太素庵)에 있던 대진국(발해)의 비장서(秘藏書)이다.
즉 대진국=발해는 후고구려를 이어 우리역사인 한웅(환웅)역사와 단군조선의 자료를 많이 정리했던 것이다.
고려말 공민왕 때 이명(李茗)은 조대기를 인용하여 진역유기(震域留記=震域遺記)를 썼고 조선 19대 숙종 때 북애(北崖) 즉 북애노인(北崖老人)은 진역유기를 바탕으로 규원사화(揆園史話)를 썼다. 곧 한웅=환웅의 역사에서부터 단군조선 47대까지의 역사를 썼다.
조선 세조 때 수서목(修書目)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 사서(史書)는 적어도 조선조까지는 줄곧 보존되어 온 것으로 여겨진다.
➜ 고려시대의 북부여기(北夫餘紀)
고려말의 학자인 휴애거사(休崖居士) 범장(范樟)이 찬한 역사서이다.
고려 31대 공민왕 18년에 서기1369년에 과거에 합격하였다.
삼국사기의 국사책에서는 고구려 건국 연대는 BC 37년으로 되어 있으나 실상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高朱蒙)이 BC 79년 5월 5일에 졸본(卒本: 신의주 북쪽)에서 태어나서 BC 58년 10월에 고구려를 건국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북부여기는 바로 고구려의 전신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시조 해모수(解慕潄)로부터 6대 고무서(高無胥) 단제(檀帝)=임금까지의 182년과 가섭원부여 108년의 역사이다.
≪ 세계역사에서 북부여시대의 역사는 아주 중요하며 이 북부여기의 역사서는 다음과 같다.
북부여기(北夫餘紀)의 역사서는 고려 말의 공민왕 때 학자인 휴애거사(休崖居士) 범장(范樟)=범세동(范世東)이 지은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국사책에서는 황당무계(荒唐無稽)하게 알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기준으로 삼을 수가 없다. 곧 고구려 건국연대는 BC 37년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상 고구려의 건국연대는 BC 58년 10월이다.
그리고 고주몽의 탄생은 졸본(卒本: 신의주 북쪽이며 곧 압록강 북쪽)이며 BC 79년 5월 5일이다.
이 북부여기는 47대까지의 단군조선을 이은 북부여의 6대까지 182년간의 역사와 북부여를 이은 고구려(高句麗)의 전신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解慕潄)로부터 6대 고무서(高無胥)임금=단군 즉 단제(檀帝)까지의 182년간과 가섭원부여[迦葉原夫餘=동부여(東夫餘)]의 108년의 역사이다.
북부여기의 역사는 4대까지는 해모수의 후손이 이어갔으나 5대에는 잠시 4대 고우루 동생인 해부루가 BC 87년~BC 86년까지 잠시이어 갔으나 전한 7대 한나라군사가 BC 109년에 침략하여 역사는 그 전에 연나라사람인 위만은 떠돌이였는데 번한조선에 살곳을 구걸하자 이에 번한조선의 마지막왕인 기준이 허락하였는데 BC 194년에 번한조선의 허약한 틈을 보고 찬탈하여 위만은 번한조선의 나라를 위만조선 이라고 하였다.
그 후 위만의 손자 우거왕을 BC 108년에 멸망시키자 이에 BC 108년에 한나라군사를 물리치고 그 후 고두막한=동명단제=동명성왕=동명왕이 BC 87년에 북부여 5대로 이어갔다. 그 후 고두막한=동명단제=동명성왕=동명왕(東明王)이 별세하자 그의 아들인 고무서(高無胥)가 북부여 마지막 6대로 이어갔으나 아들없이 BC 58년 10월에 별세하자 고주몽이 그의 유명(遺命)으로 대통을 이어가 고구려를 BC 58년 10월에 세우게 되었다. 이 북부여기를 저술한 휴애거사(休崖居士) 범장(范樟)=범세동(范世東)은 생몰(生沒)은 미상이며 범장을 일명 범세동(范世東)이라 하며 고려 말기의 학자이다.
본관은 금성(錦城)이며 자(字)는 여명(汝明) 호는 복애(伏崖) 또는 휴애거사(休崖居士)이며 또는 통찬(通贊)이며 정몽주(鄭夢周)의 제자이다.
그는 공민왕 18년에 서기 1369년에 과거에 합격하였다.
그는 북부여기(北夫餘紀)와 동방연원록(東方緣源錄)을 지었다.
특히 이 북부여기(北夫餘紀)에서 진시황제(秦始皇帝)시대에 창해역사(滄海力士) 여홍성(黎洪星) 장량(張良)=장자방 박랑사(博浪沙) 진승(陳勝) 노관(盧綰: 한고조인 유방과 고향과 태어난 날자가 같다) 위만(衛滿) 기준(奇準=箕準: 번한조선의 마지막 임금) 등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으며 북부여의 마지막을 이어서 고구려를 세운 고주몽의 역사를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는 고귀한 역사서이며 세계역사 무대에서 아주 귀중한 역사서이다. ≫
➜ 고려시대의 진역유기(震域留記=震域遺記)
고려 공민왕 때 이명(李茗)이 쓴 사서(史書)이다.
이명은 고려 31대 공민왕 때 사람이며 호는 청평(淸平)이다.
이명은 이암(李嵒) 범장(范樟)과 함께 천보산(天寶山)의 태소암(太素庵)에 숨겨져 있던 진기(珍奇)한 고서(古書)를 보고 이명은 진역유기(震域留記=震域遺記)를 이암은 단군세기(檀君世紀)와 태백진훈(太白眞訓)을 범장은 북부여기(北夫餘紀)를 각각 쓰게 되었다.
고려말 공민왕 때 이명(李茗)은 조대기를 인용하여 진역유기(震域留記=震域遺記)를 썼고 조선 19대 숙종 때 북애(北崖) 즉 북애노인(北崖老人)은 진역유기를 바탕으로 규원사화(揆園史話)를 썼다. 곧 한웅=환웅의 역사에서부터 단군조선 47대까지의 역사를 썼다.
➜ 고려시대의 칠대실록(七代實錄)
고려 8대 현종이 황주량(黃周亮)에 명하여 고려 초기 실록을 편찬한 것으로 고려 태조에서부터 7대 목종까지의 실록의 역사서이다.
역사는 말하기를
고려실록(高麗實錄)은 고려시대에 일어났던 고려왕들의 사적을 편년체로 기록한 사서(史書)이다. 그러나 애석하게 임진전쟁(임진왜란) 때 춘추관이 불타면서 소실되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고려실록(高麗實錄)의 역사서가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역사서는 사실은 고려시대에 한웅(환웅)역사와 단군의 역사에서부터 북부여의 역사서와 고구려 역사서와 그 외 고려까지의 역사서를 더 많이 저술했다. 그리고 이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위대한 역사가 이어오고 조선시대에도 역사를 편찬하게 되었다.
아래에 계속하여 조선시대에 지은 주요한 사서(史書)를 올리옵니다.
➜ 조선시대의 고려사전문(高麗史全文)
1442년(조선 4대 세종 24년)에 신개(申槩)와 권제(權踶) 등에 의하여 찬진(撰進)된 편년체의 고려시대사(高麗時代史)이다.
1449년(세종 31년)에 김종서(金宗瑞)를 지춘추관사로 삼아 다시 고려사(高麗史)로 개찬(改撰)하게 되었다.
➜ 조선시대의 고려사(高麗史)
고려 말의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고려국사(高麗國史) 편찬으로부터 시작하여 57년 만에 조선 5대 문종 1년인 1451년에 고려의 역사인 고려사(高麗史)가 마무리되었다.
고려의 국사(國史)는 완성을 보지 못하고 이제현이 고려 태조로부터 고려 15대 숙종까지의 본기(本紀)만을 편찬하였을 뿐이다.
지금은 임진전쟁(임진왜란)으로 불타 전하지 않지만 다만 각 왕의 본기 말미에 써붙였던 사찬(史贊)이 재난고(益齋亂藁)와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등에 전하고 있다.
■ 기전체(紀傳體): 역사적 인물에 대한 개인의 전기(傳記)를 기록한 역사 기술 방법.
■ 편년체(編年體): 역사적 사실을 연도별(年度別)로 기록한 역사 기술 방법.
고려시대의 역사서인 고려사는 조선 4대 세종 31년 1449년에 편찬하기 시작하여 2년 후인 5대 문종 1년인 1451년에 완성된 총 139권의 고려시대(高麗時代) 역사서(歷史書)이다.
고려시대의 역사, 문화 등의 내용을 기전체(紀傳體)로 정리한 책으로 고려시대 역사연구의 기본 자료이다.
고려 말기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안축(安軸) 이인복(李仁復) 등이 편찬하고자 시도한 고려국사(高麗國史)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고려의 국사(國史)는 완성을 보지 못하고 이제현이 고려 태조로부터 고려 15대 숙종까지의 본기(本紀)만을 편찬하였을 뿐이다.
지금은 전하지 않지만 다만 각 왕의 본기 말미에 써붙였던 사찬(史贊)이 익재난고(益齋亂藁)와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등에 전하고 있다.
조선을 건국하자 태조는 원년인 1392년 10월에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 정총(鄭摠) 등에게 고려사 편찬을 명하여 이에 태조 4년 정월에 정도전, 정총에 의하여 편년체(編年體)로 서술된 37권 고려사(高麗史)가 편찬되었다.
이 위대한 고려사 역사책은 임진전쟁(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지고 현재 전하지 않으나 태조실록에 정도전이 쓴 진고려국사전(進高麗國史箋)과 정총이 쓴 고려국사서(高麗國史序)가 동문선(東文選: 9대 성종 때 우리나라 역대 시문선집)에 전하여 그 편찬체재와 편찬시의 기본원칙 등을 살필 수 있다.
고려사는 제4차 개찬작업으로 세종 20년에서 24년 사이에 신개(申槩)와 권제(權踶)에 의해 고려사전문이 완성되어 세종대왕에게 바쳐올렸다.
그런데 세종 28년 10월에 임금은 고려사전문의 고려 말기 기사에서 태조의 선대인 도조(度祖) 환조(桓祖)로부터 태조에 이르는 기록에 빠진 내용이 많음을 발견하고 31년 정월에 우찬성 김종서, 정인지, 이선제 등에게 개찬(改撰)을 명하여 편년체에서 새로이 기전체가 채택되어 1451년(문종 1년) 8월에 세가(世家) 46권 지(志) 39권 연표 2권 열전(列傳) 50권 목록 2권 총 139권의 고려사(高麗史)가 편찬되어 임금에게 받쳤다.
이로써 전왕조사(前王朝史)를 정리하려는 노력은 고려국사(高麗國史) 편찬으로부터 시작하여 57년 만에 고려사(高麗史)가 마무리되었다.
➜ 조선시대의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1452년(문종 2년) 2월에 김종서(金宗瑞) 등에 의하여 편찬된 고려시대의 역사를 편년체로 정리한 사서(史書)를 말한다.
고려사(高麗史)와 더불어 고려시대를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역사서(歷史書)이다.
1392년(조선 태조 1년)에 편찬되기 시작하여 1395년에 완성된 편년체 역사서인 고려국사(高麗國史)는 이후 5번이나 개찬되는 과정에서 기전체의 고려사로 편찬이 완료되어 1451년 8월에 문종에게 받쳤다.
이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는 고려사(高麗史)에서는 사론을 써넣지 않았지만 이 책은 후대의 군주로 하여금 정치에 참조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편찬되었기 때문에 교훈적 성격이 반영되었다. 즉 이제현(李齊賢)의 사론과 정도전(鄭道傳) 정총(鄭摠) 등이 고려국사에 써넣었던 사론을 실었다.
이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역사책은 편찬이 완료된 다음해인 1453년(단종 1년) 4월에 갑인자(甲寅字)로 출판되었다.
➜ 조선시대의 태백일사(太白逸史)
연산군(燕山君)과 중종 때의 학자인 일십당(一十堂) 이맥(李陌)이 펴낸 것으로 해학(海鶴) 이기(李沂)선생이 간직했던 책이다.
이 책은 한국(桓國)=환국 한웅시대=환웅시대=배달시대=신시시대(神市時代)로부터 삼한(三韓)=단군조선(檀君朝鮮) 고구려(高句麗) 대진국(大震國)=진국(震國)=발해(渤海) 고려(高麗)에 이르는 위대하고 고귀한 역사의 주요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편에 한역(桓易)=환역과 한민족(桓民族=韓民族)=환민족 삼대경전(三大經典)인 천부경(天符經) 삼일신고(三一神誥) 참전계경(叅佺戒經=參佺戒經)을 실어 우리 민족의 정통적 종교(宗敎)와 철학(哲學) 및 문자(文字)를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시 된다.
한역(桓易)=환역을 만들었다는 것과 한문(漢文)이 우리의 글이라는 것이 더욱 자랑스러우며 매우 중요시 되는 역사서(歷史書)이다. 곧 우리나라의 한문(桓文)=환문(桓文)이 중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 다시 말하여 중국문헌에서는 자기나라에서 한문(漢文)을 만들었다는 문헌이 없고 우리나라 동이족의 글이라고 중국의 고위자는 말하고 있다. ≫
➜ 조선시대의 규원사화(揆園史話)
조선 19대 1676년(숙종 2년)에 북애노인(北崖老人)이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민족사서(民族史書)를 종합 재구성하여 저술한 한국(桓國)=환국, 한웅국(桓雄國)=환웅국 상고사와 단군조선의 역사 및 만설(漫說)을 담은 고귀한 역사책이다.
조선조 숙종 2년에 작성된 진본임을 확인하고 국립중앙도서관 귀중본으로 지정한 것이다.
이 책은 서문(序文) 조판기(肇判紀) 태시기(太始紀) 단군기(檀君紀) 만설(漫說)로 되어있다.
호가 청평(淸平)이신 이명(李茗)은 조대기(朝代記)를 인용하여 진역유기(震域留記=震域遺記)를 썼고 북애(北厓) 노인은 진역유기를 바탕으로 규원사화(揆園史話)를 썼다.
➜ 조선시대의 발해고(渤海考)
유득공(柳得恭: 1749년 조선 21대 영조 25년~1807년 23대 순조 7년) 9월 1일 운명하였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다.
1784년(조선 정조 8년)에 유득공(柳得恭)이 쓴 발해(渤海)=대진국(大震國)=진국(震國)에 관한 역사 책이다.
발해고(渤海考)란 책은 조선 22대 정조 시대에 활약했던 서자 출신이지만 이를 극복하고 정조의 배려로 규장각의 검서관(檢書官)으로 지냈던 유득공(柳得恭)의 역사서이다.
본관은 문화(文化) 자(字)는 혜보(惠甫) 혜풍(惠風) 호는 영재(泠齋) 영암(泠庵) 고운당(古芸堂)이며
영조 때 진사시에 합격하고 시문에 뛰어난 재질이 인정되어 1779년(정조 3년)에 규장각검서(奎章閣檢書)로 들어가 활약이 켰다. 말년에는 풍천부사를 지냈다.
발해 역사를 북쪽의 역사와 남쪽에는 신라 라고 하여야한다는 남북국시대론(南北國時代論)을 처음으로 주장한 중요한 발해의 역사서외에 여러 책을 지었다.
이 책은 특히 과거 고려에서 체계적인 발해사(渤海史) 서술이 이루어지지 않은 데 대한 저자 자신의 강렬한 비판 위에서 쓰여진 것이다.
사군지(四郡志)에서 유득공(柳得恭)이 말하기를 정묘호란(丁卯胡亂)=정묘전쟁과 병자호란(丙子胡亂)=병자전쟁에서 받은 민족적 치욕과 우리 민족의 역사 활동의 무대이었던 북방지역을 상실한 데에 대하여 우리나라 상고사의 역사에 대한 재인식을 통하여 자국사를 새롭게 이해하고 북방도 역시 우리 역사의 주 무대이었음을 강조하여 우리 민족의 발전방향을 제시하였다. 곧 북쪽에는 발해=대진국이 나라를 다스렸고 남쪽에는 신라가 다스렸다고 하는 남북국시대의 역사 라고 말하였다.
➜ 조선시대의 태백일사(太白逸史)
연산군(燕山君)과 중종 때의 학자인 일십당(一十堂) 이맥(李陌)이 펴낸 것으로 해학(海鶴) 이기(李沂)선생이 간직했던 책이다.
이 책은 한국(桓國)=환국 한웅시대=환웅시대=배달시대=신시시대(神市時代)로부터 삼한(三韓)=단군조선(檀君朝鮮) 고구려(高句麗) 대진국(大震國)=진국(震國)=발해(渤海) 고려(高麗)에 이르는 위대하고 고귀한 역사의 주요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편에 한역(桓易)=환역과 한민족(桓民族=韓民族)=환민족 삼대경전(三大經典)인 천부경(天符經) 삼일신고(三一神誥) 참전계경(叅佺戒經=參佺戒經)을 실어 우리 민족의 정통적 종교(宗敎)와 철학(哲學) 및 문자(文字)를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시 된다.
한역(桓易)=환역을 만들었다는 것과 한문(漢文)이 우리의 글이라는 것이 더욱 자랑스러우며 매우 중요시 되는 역사서(歷史書)이다. 곧 우리나라의 한문(桓文)=환문(桓文)이 중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 다시 말하여 중국문헌에서는 자기나라에서 한문(漢文)을 만들었다는 문헌이 없고 우리나라 동이족의 글이라고 중국의 고위자는 말하고 있다. ≫
➜ 조선시대의 규원사화(揆園史話)
조선 19대 1676년(숙종 2년)에 북애노인(北崖老人)이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민족사서(民族史書)를 종합 재구성하여 저술한 한국(桓國)=환국, 한웅국(桓雄國)=환웅국 상고사와 단군조선의 역사 및 만설(漫說)을 담은 고귀한 역사책이다.
조선조 숙종 2년에 작성된 진본임을 확인하고 국립중앙도서관 귀중본으로 지정한 것이다.
이 책은 서문(序文) 조판기(肇判紀) 태시기(太始紀) 단군기(檀君紀) 만설(漫說)로 되어있다.
호가 청평(淸平)이신 이명(李茗)은 조대기(朝代記)를 인용하여 진역유기(震域留記=震域遺記)를 썼고 북애(北厓) 노인은 진역유기를 바탕으로 규원사화(揆園史話)를 썼다.
➜ 조선시대의 발해고(渤海考)
유득공(柳得恭: 1749년 조선 21대 영조 25년~1807년 23대 순조 7년) 9월 1일 운명하였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다.
1784년(조선 정조 8년)에 유득공(柳得恭)이 쓴 발해(渤海)=대진국(大震國)=진국(震國)에 관한 역사 책이다.
발해고(渤海考)란 책은 조선 22대 정조 시대에 활약했던 서자 출신이지만 이를 극복하고 정조의 배려로 규장각의 검서관(檢書官)으로 지냈던 유득공(柳得恭)의 역사서이다.
본관은 문화(文化) 자(字)는 혜보(惠甫) 혜풍(惠風) 호는 영재(泠齋) 영암(泠庵) 고운당(古芸堂)이며
영조 때 진사시에 합격하고 시문에 뛰어난 재질이 인정되어 1779년(정조 3년)에 규장각검서(奎章閣檢書)로 들어가 활약이 켰다. 말년에는 풍천부사를 지냈다.
발해 역사를 북쪽의 역사와 남쪽에는 신라 라고 하여야한다는 남북국시대론(南北國時代論)을 처음으로 주장한 중요한 발해의 역사서외에 여러 책을 지었다.
이 책은 특히 과거 고려에서 체계적인 발해사(渤海史) 서술이 이루어지지 않은 데 대한 저자 자신의 강렬한 비판 위에서 쓰여진 것이다.
사군지(四郡志)에서 유득공(柳得恭)이 말하기를 정묘호란(丁卯胡亂)=정묘전쟁과 병자호란(丙子胡亂)=병자전쟁에서 받은 민족적 치욕과 우리 민족의 역사 활동의 무대이었던 북방지역을 상실한 데에 대하여 우리나라 상고사의 역사에 대한 재인식을 통하여 자국사를 새롭게 이해하고 북방도 역시 우리 역사의 주 무대이었음을 강조하여 우리 민족의 발전방향을 제시하였다. 곧 북쪽에는 발해=대진국이 나라를 다스렸고 남쪽에는 신라가 다스렸다고 하는 남북국시대의 역사 라고 말하였다.
➜ 조선역대사략(朝鮮歷代史略)과 조선역사(朝鮮歷史)
1895년(고종 32년) 겨울에 학부에서 편찬 간행한 국사교과서이다.
표제에 대조선개국오백사년맹동(大朝鮮開國五百四年孟冬) 이라고 그 간행시기를 나타내고 있다.
단군기(檀君紀) 기자기(箕子紀) 삼한(三韓: 마한 진한 변한) 위만조선(衛滿朝鮮) 등이 실려 있다.
➜ 일제괴광기시대=일제강점기시대의 한단고기(桓檀古記)=환단고기
우리나라의 위대한 역사책을 모은 한단고기(桓檀古記)=환단고기의 역사책은 이 땅이 식민지시대로 접어든 후인 1911에 운초(雲樵) 계연수(桂延壽)라는 분에 의해서 편찬(篇撰)되었다.
계연수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20년에 피살 되었는데 이때 제자 이유립(李裕岦)에게 다음 경신년(庚申年)인 1980년에 이 책을 세상에 공개하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 역사책은 삼성기(三聖記) 단군세기(檀君世紀) 북부여기(北夫餘紀) 그리고 태백일사(太白逸史)의 4종 사서(史書)를 하나로 묶은 나라를 찾기 위한 위대한 역사서(歷史書)이다.
곧 한국의 혼, 한국의 얼, 한국의 숨결 ,한국의 유산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고귀하고 위대한 신라시대의 삼성기(三聖記)와 고려시대의 단군세기(檀君世紀)와 북부여기(北夫餘紀)와 조선시대의 태백일사(太白逸史)의 역사서인 이 4개를 하나로 묶어서 한단고기(桓檀古記)=환단고기를 나라를 매국당한 후 1911년에 운초(雲樵) 계연수(桂延壽)선생님께서 나라를 찾기 위해 편찬하였다.
➜ 일제괴광기(日帝怪狂期)시대=일제강점기=임시정부의 조선역사강화(朝鮮歷史講話)
1930년(임시정부 12년)에 최남선(崔南善)이 쓴 학국사 개설서 단행본으로 저술하였다.
1930년 1월 12일부터 3월 15일까지 동아일보사의 요청으로 연재되었다.
➜ 일제괴광기(日帝怪狂期)시대=일제강점기=임시정부의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신채호(申采浩)가 우리나라 상고시대(上古時代)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단군시대로부터 백제의 멸망과 그 부흥운동까지 서술하고 있다.
1931년(임시정부 13년)에 처음 조선일보 학예란에 연재되었고 1948년 종로서원에서 단행본으로 발행되었다.
➜ 일제괴광기(日帝怪狂期)시대=일제강점기=임시정부의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
신채호(申采浩)가 1910년대 후반에 저술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우리나라 상고사에 관한 역사책이다.
1931년(임시정부 13년)에 당시 조선일보 사장인 안재홍(安在鴻)의 주선에 의하여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다.
➜ 일제괴광기(日帝怪狂期)시대=일제강점기시대=임시정부의 조선사(朝鮮史)
일제괴광기=일제강점기 때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에서 편찬한 왜곡된 우리나라 역사서(歷史書)이다.
이 조선사(朝鮮史)는 순수한 학문적 목적에서 편수된 것이 아니라 일제의 식민지 당국의 정치적 의도에서 편수한 점에 문제가 많이 있다.
즉 한민족사(桓民族史=韓民族史)=환민족사 왜곡의 원천의 작업을 진행시키게 되었다.
편찬의도가 식민사학의 기본자료로 삼기 위한 것이며 이 책을 간행한 이후 관변원사료의 일반열함을 봉쇄함으로써 한민족사 연구에 큰 해독을 끼쳤으며 우리 사학자들의 민족사연구를 크게 제약하는 부정적 구실을 한 역사서였다.
총목록 1권 총색인 1권 본문 35책 2만 4111쪽 이다.
≪ 1925년(임시정부 7년)에 편찬실무를 담당할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를 출범시키고 10월부터 이런 목적에서 조선사편찬에 착수하게 하여 16년의 작업 끝에 1938년(임시정부 20년)에 조선사 전질을 간행한 것이다. ≫
➜ 일제괴광기(日帝怪狂期)시대=일제강점기시대=임시정부의 조선유기략(朝鮮留記略)
1929년(임시정부 11년)에 권덕규(權悳奎)가 저술한 민족주의 사학계열의 역사서 이다.
한웅(桓雄)=환웅의 배달시대=신시시대 이후부터 1910년 국권강탈까지의 한국사(韓國史=桓國史)를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체계화한 통사적 개설서이다.
➜ 일제괴광기(日帝怪狂期)시대=일제강점기시대=임시정부의 조선세가보(朝鮮世家譜)
1939년(임시정부 21년)에 서계수(徐繼洙)가 지은 우리나라 역대왕조 각 왕실의 세가에 관한 책이다.
➜ 일제괴광기(日帝怪狂期)시대=일제강점기시대=임시정부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조선 태조로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72년 간의 역사를 연월일 순서에 따라 편년체(編年體)로 기록한 위대한 역사서(歷史書)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일시에 편찬된 것이 아니라 대대로 편찬한 것이 축적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일제괴광기=일제강점기에는 이조실록(李朝實錄) 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조선(朝鮮) 이라는 국호를 무시하고 붙인 명칭으로 역사왜곡을 한 것이다.
▣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역사를 찾은 광복절(光復節) 이후 주요한 사서(史書)
➜ 광복절이후시대의 조선상고사감(朝鮮上古史鑑)
안재홍(安在鴻: 고종 28년~1965년 정치가 사학자)이 우리나라 고대사의 여러 주제들에 관하여 쓴 논문들을 묶은 책.
➜ 광복절이후시대의 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
정인보(鄭寅普)는 1892년(조선 26대왕 고종 29년) ~ 1950년 공산군에 의해 납북됨.
조선 말기의 한학자 교육자 조선사연구의 역사학자(歷史學者)이다.
단군(檀君)으로부터 삼국시대에 이르는 우리나라 고대사를 특정한 주제를 설정하여 통사형식(通史形式)으로 쓴 역사책.
1935년(임시정부 17년) 1월 1일부터 1936년 8월 29일까지 동아일보가 정간(停刊)될 때까지 5천년간 조선의 얼 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던 것이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일제의 포악한 민족말살정책으로 금지한 국학의 부흥과 교육에 진력하여 민족사를 모르는 국민에게 바른 국사를 알리고자 하여 그 이듬해 9월에 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를 간행하였다.
➜ 대한민국시대의 조선상식(朝鮮常識)
1948년 최남선(崔南善)이 펴낸 한국의 역사 전통문화에 대하여 상식으로 알아야 할 문제에 관한 책이다.
➜ 대한민국시대의 조선야사집(朝鮮野史集)
1949년 인왕거사(仁旺居士)가 편집한 설화집이다.
➜ 대한민국시대의 국사백과사전(國史百科事典)
역사는 끊임없이 변모하고 발전한다. 그 발전의 원동력은 언제나 인간의 슬기와 행위에 있으므로 역사는 결국 인간의 과거 결산서인 동시에 미래의 지침서라 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의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는 시련의 가시밭길이었으나 이제 나라를 되찾은지 30년 민족중흥과 조국근대화 라는 역사적 사명을 앞에 두고 매진일로 하게 되었으나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의 과거를 바르게 인식하고 비판 검토하여 보다 나은 미래의 영광과 번영을 이룩해야 할 역사적 시점에 놓인 것이다.
이에 우리의 것을 다시 찾으려는 노력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때이다.
따라서 이제야 국사는 학자들의 독점물이 아니라 모든 국민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여기에 국사의 올바른 인식과 함께 국사의 대중화가 요청되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인 요청에 따라 고교 대학생의 학습에는 물론 일반인의 교양을 위해 언제나 필요한 사항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는 국사백과사전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바 있어 이에 계획과 준비에 5년이라는 세월이 걸려 이제야 비로소 국사백과사전 이라는 국사 사전을 감히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책임감수로는 유홍렬(柳洪烈) 박사님께서 감수에 끝까지 해주신데 대하여 깊은 감사를 드리오며 아울러 본 국사사전의 편집과 교정에 수고하신 동아문화사(東亞文化社) 편집위원회에 깊은 감사를 드리옵니다.
민족은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요. 오랜 역사에 의하여 형성된 것이다.
역사를 떠나서 민족을 생각할 수는 없다.
일제시대에는 일본인 사학자(史學者)들 손에 의해서 편파된 곡필(曲筆) 등이 심했으나 8.15 광복 이후로는 우리 사학도(史學徒)들의 새로운 민족사관(民族史觀)의 정립을 위해서 그 시정과 고증에 끈질긴 역점에 전력을 쏟아 민족의 성쇠를 엮은 국사백과사전을 1975년도에 발간하게 되었다.
➜ 박정희시대에 공포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韓國民族文化大百科事典)
1980년 착수하여 12년간 걸림. 총27권으로 편찬 완결 됨. 현재 보유편 1권 있음.
박정희대통령당시 1979년 9월 25일 대통령령(제9628호)으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찬사업추진위원회 규정이 공포됨.
편찬위원회 33명과 학문분야별 편집위원회 210명을 구성하여 편찬업무 착수함.
연인원은 7,000명 정도의 각계 전문분야 학자들이 참여함.
국가적 차원에서 편찬되었으며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는 민족문화의 유산과 업적을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韓國民族文化大百科事典) 전 27권을
1991년 말에 발간한 이후 그 동안의 사회 변화와 새로운 연구 성과 등을 반영하여 보유편 1권을 내놓게 됨.
즉 1991년도에 초간을 발간함. 총27권으로 편찬함. 1995년도에 보유편 1권 편찬함.
2005년도에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명칭 변경함.
초대원장으로 이선근 박사님이며 2011년도는 제15대 원장으로는 정정길 박사 취임함.
자국의 문화와 역사를 이처럼 체계적으로 정리한 대역사(大役事)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그 유례가 없는 일로서 한국문화에 관심을 가진 국내외 유관기관과 학자들로부터 비상한 관심과 호평을 받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한마디로 대한민국의 역사를 총망라 했으며 나아가 태평양을 중심으로 한 구심점이 될 것이며 이는 한국문화가 세계문화의 구심점 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나아가 동양역사뿐만 아니라 세계역사의 중심적 역할을 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바입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우리나라의 위대한 역사책을 모은 한단고기(桓檀古記)=환단고기의 역사책을 즉 그 역사책은 삼성기(三聖記) 단군세기(檀君世紀) 북부여기(北夫餘紀) 그리고 태백일사(太白逸史)의 4종 사서(史書)를 하나로 묶은 위대한 역사서(歷史書)이다. 또한 이 속에는 세계경전의 진수(眞修=珍羞)가 되는 즉 우주본질과 생명본체의 근본 원리를 밝힌 경전들 외에 동이족의 위대한 인물들이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는 상고사의 역사가 들어있다. 이러한 것을 편찬한다면 아마 세계역사의 이정표 역할을 할 것으로 확신하는 바입니다.
곧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박정희대통령 서거하기 한달 전에 발족을 하여 전두환대통령 때 거의 마무리를 하여 노태우대통령 때 27권이 완성하였다. 그 후 김영삼대통령 때 보유편 1권이 완성되어 현재는 28권이 있다.
➜ 김영삼시대의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지은이 박영규 경남 산청에서 태어남 부산 동인고를 졸업 후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와 철학을 전공함.
조선왕조 오백년 그 흥망성쇠의 역사를 낱낱이 읽는다.
조선의 역사는 결코 과거가 아닌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삶속에 이어지고 있는 현재의 역사이다.
조선왕조의 흐름과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해야 오늘과 미래를 읽을 수 있다.
1996년도에 지음.
➜ 김영삼시대의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지은이 박영규 경남 산청에서 태어남 부산 동인고를 졸업 후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와 철학을 전공함.
도서출판 해오름 기획실장. 해동불교신문사 편집부장 등을 거침.
분열된 민족을 하나로 통합하고 격렬한 세계사의 폭풍을 헤쳐나간 고려 그 강인했던 역사를 한권으로 복원하였다.
고려의 역사는 삼국과 조선을 이어주는 단순한 징검다리 역사가 아니다.
고려사는 고려의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격동의 오백년을 역동적으로 헤쳐나간 그 강인함의 원류를 이해하는 것만이 오늘의 우리를 올바로 서게 하는 디딤돌이다.
1996년도에 지음.
➜ 김대중시대의 한권으로 읽는 삼국왕조실록
지은이 임병주 광주에서 태어남. 동국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함.
그 후 한글문화연구회 출판국장을 거쳤다.
신화와 영웅 찬란한 문화가 살아 숨쉬는 우리민족의 뿌리를 엮었다.
웅대한 기상으로 대륙을 내달린 고구려와 풍부한 문화감각으로 해양을 경영한 백제와 강건한 토착성으로 통일을 일궈낸 신라의 위대한 업적들과 그 치열했던 천년의 대장정을 한눈에 꿰뚫어 보는 역사서를 1998년에 엮었다. [58번째 무료강의 종(終)]
⇛ 제 강의는 무료강의로 혹 성공하시면 사회에 환원만 해주시면 됩니다.
각 대학교나 평생교육원이나 직장단체에서 제 강의 제목인 <사업과 직장을 위한 교양과 역사>에 대하여 필수 교양과목으로 강의를 원하시면 협의 후 강의 여부를 결정하겠습니다.
■ <사업과 직장을 위한 교양과 역사> 전자책 2020.4.29. 발간함.
구매 가능한곳 ⇢ 유페이퍼. 예스24 = yes24. 리디북스. 알라딘. 원스토어 외.
■ 층간소음 평생해소 할 수 있는 홍익방건축(弘益房建築) 특허를 받음.
각 방마다 홍익방을 만들고 특히 홍익방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체력단련실과 또 공간을 잘 활용한다면 층간소음을 평생 해소는 물론 더 나아가 고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고 봅니다. 곧 세계에서 제일 멋진 주택(아파트)건축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봅니다. 서민을 위하고 또한 고급아파트 등을 짓고자 같이 사업하실분 연락주세요.
■ 전세와 월세 등을 영구히 안정시키는 즉 주택대란을 영구히 안정시키는 비법 및 묘책을 알고자 하시는 분은 열락주세요. 협의 후 결정하겠습니다.
♬ 역사야말로 그 나라의 지침서이며 최고의 방책이며 최고의 고전이다. ♬
신축년(辛丑年) 단기(檀紀) 4354년 서기(西紀) 2021년 3월 25일 목요일.
홍익방건축(弘益房建築) 특허사업 대표이며 천지인방연구소(天地人龐硏究所) 소장
황효상(黃孝相) 호(號) 심조불산(心操彿山) 용사(庸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