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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또 백성들과 족속들과 언어들과 민족들 중에서 온 사람들이 그들의 죽은 몸들을 사흘 반 동안 구경하며 그 죽은 몸들을 무덤에 장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리라.
이들 두 증인의 사역 범위는 이스라엘이라는 지역에 묶인 국지적인 것이 아니라 범세계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구절이다. 전세계에서 온 국가와 백성들의 대표자들이 두 증인의 시체를 사흘 반 동안 쳐다보며 조롱한다는 내용이다. 이들의 시체를 여러 날 동안 전시하며 모욕하는 이유는 두 증인이 적그리스도를 따르는 전세계에 끼친 피해가 막심했기 때문이다. 3년 반 동안 비가 내리지 않고 물이 피로 변한 데다 언급되지 않은 기타 재앙들을 내림으로써 온 세상 사람들이 두 증인을 증오하며 그들의 죽음을 간절히 바랬었다.
성경에서 "죽은 몸들"이라는 표현은 드물게 사용되는데 사실 11장 8-9절을 제외하고 쓰인 사례가 없다. 단수인 "죽은 몸"은 이사야 26:19에 한 번 쓰이는데 그것이 계시록과 똑같은 용례라고 확신할 수는 없으나 적어도 거의 근접한 맥락에서 적용할 수 있다. 왜냐면 사 26:19의 "죽은 몸"은 구약 성도와 환란 성도의 부활에 관련된 표현이기 때문이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리니 그들이 나의 죽은 몸과 함께 일어나리이다. 흙에 거하는 너희는 깨어서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수풀의 이슬 같으니 땅이 죽은 자들을 던져 버릴 것임이니이다(사 26:19).
왜 이 표현이 중요한가, 사실 영어 킹제임스에서는 고려할 가치도 되지 않는 이슈인데 영어에서는 dead bodies가 흔히 등장하기 때문이다. 환란 성도와 관련한 맥락에서 유독 한글킹제임스에서는 보다 일반적 용어인 "시체" 대신 "죽은 몸들"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것은 두 증인의 죽음의 방식이 다른 환란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목과 몸이 분리되는 참수형이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즉, 두 증인은 참수형을 당했고 목과 몸통이 분리된 채로 길거리에 놓여진 상태로 사흘 반을 보낸다. 사람들이 그것을 지켜보는 이유는 일단은 모욕과 조롱의 의미가 있겠지만 또 하나는 정말 저들이 확실하게 죽은 것인지 주시, 관찰하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무슨 말인가, 두 증인을 죽이기까지의 과정에서 적그리스도측의 손실이 매우 컸고 그 과정이 어려웠기에, 또 그들이 하나님의 초자연적 보호 아래서 지켜졌던 선지자들이기에 혹시 이들이 다시 살아날까 봐서 공개리에 시체를 전시해 놓고 불시의 사태를 막고자 함이 있을 것이다.
이교도들은 성경과 성경적 기독교를 미신적이라고 비난하면서 정작 자기들이 더 미신적인 행태를 보일 때가 많다. 죽은 시체가 무덤에서 일어나서 돌아다니는 이야기, 즉 강시나 좀비, 드라큘라에 대한 전설은 사실 성경 사건에 기인한 것이다. 두 증인의 부활이 그것이다.
최근에 불치병 환자들을 대상으로 몸통과 목을 분리해서 식물인간 상태인 사람의 몸에 이식한다던지 하는 방식으로 몸을 교체해서 사용하는 의학적 기법이 연구되고 있다. 이 부문에 있어서 인류는 반세기 이상 전에 이뤄진 스탈린이 실행했던 실험체 동물의 몸과 목을 바꿔 다는 실험의 수준보다 많이 나아가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만화나 SF 영화 속에서와 달리 현실 세계에서는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 생물의 복잡 다단한 신경 다발을 다른 신체와 잇는다는 것이 불가능하고 난해한 영역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의학적으로 100% 진실인 이유 중 하나가 사복음서 가운데 전문 의사인 누가가 주님의 죽음의 과정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일시적인 기절이거나 가사 상태라는 일면의 추측을 불식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베테랑 군인들(사람이 가지각색으로 죽는 모습을 익히 경험해서 아는)과 의사를 불러 증인 삼으신 것이다. 주님의 경우는 "주의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요 19:36)는 예언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 처형의 방식으로 인류의 속죄를 이루셨으나 두 증인은 명백히 뼈가 상하는 방식의 죽음을 당한다.
그 죽은 몸들을 무덤에 장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리라 두 증인의 죽음의 양상이 예수 그리스도와 다른 점은 한 가지 더 있다. 예수께서는 죽으신 후 곧장 무덤으로 몸이 옮겨지셨으나 두 증인은 장례의 형식을 갖춰서 매장되지 못할 것이다. 두 증인의 죽음의 모습은 여타 환란 성도들의 죽음과 대동소이하며 또 그들의 사례가 수많은 환란 성도들의 죽음의 모습을 대변한다고 여겨진다.
그들이 사랑하며 섬기며, 좇아 행하며, 구하며, 경배해 온 해와 달과 하늘의 모든 군상 앞에 그 뼈들을 펼쳐 놓으리니 그 뼈들은 모아지거나 장사되지도 못할 것이며 지면 위에 똥같이 되리라(렘 8:2).
오늘날 사람들은 매장의 형태에 대해서 과거처럼 크게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수목장, 화장, 화장해서 바다나 강에 뿌리기, 미이라로 만들어서 유리관에 집어넣기(스탈린, 김일성처럼), 조장(독수리에게 뜯어먹게 두는 것: 네팔) 같은 다양한 방식을 수용한다. 한국 사람들도 과거 유교 전통이 강할 때처럼 꼭 매장을 고집하지 않고 매장은 여러가지 선택지 가운데 하나 정도로 여기게 되었다. 심지어 선진국의 돈 많은 사람들 가운데 죽으면 자기 시체를 화장해서 로켓에 실어 우주로 쏘아올려 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보면 일반적인 매장의 형태는 예수님처럼 굴을 파고 그 안에 시체를 넣는 방식이고 적어도 땅 속에 매장하게 되어 있지 시체를 야외에 방치하는 것은 가장 비참한 최후로 간주한다. 그렇기에 아마겟돈 전쟁의 결과 주님의 군대에 의해 참혹한 죽음을 당하는 그 자들도 시체가 야외에 방치된 채 독수리들과 여러 새들에게 시체가 뜯어먹히는 것이다.
그가 갈 때 사자가 길에서 그를 만나 죽이니, 그의 시체가 길에 버려졌고 나귀가 그 곁에 서 있었으며 사자도 그 시체 곁에 서 있더라(왕상 13:24).
북이스라엘에 올라가서 여로보암 왕에 대해 예언하되 거기서 어떤 음식도 물도 취하여 먹고 마시지 말라는 엄명을 어긴 그 선지자는 하나님께 친히 벌을 받아 사자의 공격에 죽음을 당했다. 그의 시체는 길에 방치된 채 한동안 행인들의 주목을 끌었다. 하나님께서 그 선지자의 시체를 길에 두신 이유는 사람들에게 반면교사의 교훈을 주시고자 함이었다.
이런 몇몇 사례를 통해 볼때 성경적으로 말해서 사람이 죽어서 매장되지 못하고 길거리에 시체가 굴러다니는 상황은 가장 최악의 상황이다. 두 증인은 하나님께서 환란기간 중 긴요하게 쓰신 최고의 사역자들이었음에도 그들의 최후는 참으로 비참하고 초라한 것이다.
여러분이 이 광경을 외부인의 시선으로 관찰한다면 무척 기묘한 느낌을 받을 게 분명하다. 일반적으로 생각되기로 UN이라던가 EU, NATO나 기타 국제 회의들, 다보스 포럼이니 OECD 국가 회합이니 그런 곳에서 세계 정치 지도자들이 만나서 주로 어떻게 사귀는가? 2-3백년 전 같으면 그들은 큰 댄스홀에 모여서 왈츠나 가장 무도회를 즐기면서 거기서 밀실 회합을 가졌을 것이다. 즉, 외교를 위해 필수적인 것이 문화라는 기름칠의 요소인데 그래서 영화, 뮤지컬, 오페라, 연극 같은 수단이 외교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카톨릭에는 카니발이 있고 힌두교에도 비슷한 사육제 개념의 축제들이 있다. 사육제, 카니발은 희생 제물(인간일 수도 있다)의 피와 고기를 나누어 먹는다는 일종의 식인적 개념이 들어가 있다. 카톨릭의 경우에는 그것이 미사라는 형태로 함축되어 실행되지만 아마존 밀림과 남태평양의 식인종들은 실제로 사람을 죽여서 그 살과 피를 나누어 먹고 마시기도 한다.
전세계에서 가장 교양있고 지식이 남보다 뛰어나고 소위 말해 외무 고시 패스하고 외국어 실력 좋다는 그 전세계 대표자들이 모여서 "두 선지자의 시체"를 관람하면서 축배를 들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 중에 사람 시체, 그것도 목 잘린 시체를 앞에 두고 샴페인 잔을 기분 좋게 기울일 비위와 배짱이 있는 사람이 있는가? 시체 검역소 직원이나 검시관이라 할지라도, 장례업자라 할지라도 참수된 사람의 머리와 몸을 쳐다보는 것은 기분좋은 일이 전혀 아니다. 그런데 저 사람들은 마치 추수감사절 만찬을 즐기듯이, 또는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는 것인 양 두 증인의 시신을 앞에 두고 "위하여"를 외치며 잔을 맞부딛치고 음식을 먹는 것이다.
현대 문명 속에 스며 있는 야만의 흔적, 지금도 세계 도처의 은밀한 어두운 곳들에서는 종교적 의식 차원에서건 변태적 취향을 위해서건 사람을 납치해서 그 인육을 먹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한국에서도 수년 전 수원에서 오원춘이라는 인육 살인마에 의한 충격적 인육 사건이 발생한 바 있지만 대환란 때의 전세계 대학 교육받은 지식인들의 평균적인 도덕 수준은 우위엔춘과 같을 것이다. 목 잘린 사람 시체를 보면서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파티를 즐기려면 도살자의 심장을 가져야 하니 말이다.
10 땅에 사는 자들은 그들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또 기뻐하며 서로 선물을 보내리니 이는 이 두 선지자가 땅에 사는 자들을 괴롭게 하였기 때문이라.
10절의 분위기는 연말의 크리스마스 시즌의 훈훈함을 상기시켜 준다. 몇 가지 요소가 그런 상상력을 자극하게 하는데 첫째, "기뻐하며"의 영어 표현이 "make merry", 즉 메리 크리스마스의 그 merry와 연관되기 때문이고 둘째, 사람들이 서로 선물을 주고 받는다고 하기 때문에 크리스마스 선물을 연상케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추론일 뿐, 정말 두 증인이 크리스마스 시즌이나 그 당일에 맞춰서 죽는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내가 이 사건의 시기를 추론하면서 개략적으로 얻은 결론은 두 증인의 죽음과 부활이 부활절(3-4월) 기간에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대환란 시대의 저 사람들이 진짜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여 현재 개신교 각 교파들과 카톨릭이 기념하듯이 부활절을 지키고 있다는 뜻은 아니고 시기가 그때로 겹친다는 얘기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이스터"에 대해 좀 알아보고 갈 필요가 있다. 이스터는 사람들이 부활절과 비슷하거나 똑같은 개념의 단어라고 오해를 하곤 하는 용어인데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이스터라는 것이 매우 이교적 배경을 가진 말이라는 점이다.
그 일이 유대인들을 기쁘게 한 것을 알고서 그가 베드로도 잡고자 하더라. (그 때는 무교절 기간이더라.) 그가 베드로를 잡아서 감옥에 가두고 네 명씩 네 조의 병사들을 붙여 교대로 지키게 하니 이스터가 지나면 그를 백성들 앞에 끌어낼 의도였더라(행 12:3-4).
킹제임스 성경에 쓰인 "이스터"(Easter)라는 절기는 개역성경이 오역한 것처럼 "유월절"이 아니다. 왜냐하면 유월절은 무교절 주간을 시작하는 날이며, 무교절은 유월절보다 뒤에 있기 때문에 "그 때는 무교절 기간이더라"와 "이스터가 지나면"이라는 부분을 대조해 볼 때 이스터는 시기적으로 유월절 뒤에 따라오는 모종의 절기일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지기 때문이다.
즉, 헤롯이 지키던 "이스터"는 이방인들이 지키던 우상 여신의 절기로서 하필 그 절기일이 유대인의 무교절 기간 중에 들어 있었다. 헤롯은 유대인의 유월절이나 무교절을 신경써서가 아니라 자기들 일족이 지키는 이교도 "이스터"를 고려해서 베드로를 그 축일 뒤에 처형하려고 했던 것이다.
카톨릭이 지키는 이스터, 물론 개신교의 부활절도 대동소이하지만 그 날을 대표하는 상징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아닌 <삶은 달걀>이다. 달걀을 까 먹으면서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그것과 모종의 상관이 있다고 억지 연관을 짓는데 사실 달걀은 이교 여신 아프로디테의 부활을 상징한다. 이스터 절기는 세미라미스 이래로 지켜지던 하늘의 여왕 기념일인 것이다.
자식들은 나무를 모으고 아비들은 불을 지피며 여인들은 가루 반죽을 하여 하늘의 여왕에게 과자를 만들며 다른 신들에게 술제물을 부어 그들이 나로 격노케 하였느니라(렘 7:18).
크리스마스에 특별한 케익을 만들어 먹는다는 전통을 형성한 기원은 신약 교회가 아닌 구약의 이교도 하늘 여신 숭배였다. 기원전 유대인들은 하늘의 여왕을 위해 과자를 만들어 나눠먹었는데 오늘날은 그것이 크리스마스 케익이다.
그래서, 이스터라는 절기는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에 접목되어 부활절로 통용되고 있는데 내가 두 증인의 죽음을 이스터 시기와 연관짓는 이 해석은 더 많은 성경 근거가 있는 것인가, 한번 찾아 보겠다.
베드로가 죽기 전에 먼저 야고보가 칼로 죽임을 당했다(문맥상 목베임을 말한다).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는 두 증인과 비견되는 존재로 등장한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와서 말씀드리기를 “선생님, 우리가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를 위하여 해주시기를 바라나이다.”라고 하니(막 10:35).
야고보와 요한은 본인들이 의식하지 못한 채 "두 증인이 차지할 자리"를 자기들에게 주시라고 주님께 요청한 것이다.
그들이 말씀드리기를 “주님의 영광 가운데서 우리 중의 하나는 주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주소서.”라고 하더라(막 10:37).
주님께서는 10:39에서 그들의 요청을 완곡히 거절하시면서 주님의 양 옆 자리를 차지할 영예는 따로 받을 자들이 있음을 알려주셨다. 그 두 사람이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확인되는 장면은 변화산 사건의 모세와 엘리야가 출현할 때이다.
결국 요한과 야고보는 천년왕국에서 예수님의 좌의정, 우의정 자리에 올라가는 데 있어서는 허탕을 친 셈이지만 이 담화를 통해서 두 제자는 두 증인의 행적과 유사한 삶의 행보를 가게 된 것이다. 요한은 환란 시대에 와서 또 예언하게 된다는 유별난 말씀을 받았고(계 10:11) 야고보는 두 증인이 죽음 당하게 되는 그 시기에 환란시대 방식의 순교인 참수형을 당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가 요한을 죽이려 했으나 무리를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겼음이라. 그러나 헤롯의 생일이 되었을 때에, 헤로디아의 딸이 그들 앞에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한지라(마 14:5-6).
침례인 요한은 두 증인 타입의 선지자인데 심지어 요한은 엘리야와 비견되며 엘리야가 될 뻔 한 선지자였지 않은가? 요한의 죽음은 두 증인의 순교 형태와 똑같이 목베임 당하는 것이었다. 요한이 죽임당한 시기가 연중 어느 때인지 확실한 정보는 없지만 죽음의 형태, 그를 죽인 헤롯이 적그리스도의 예표라는 점, 헤로디아와 그 딸이 큰 바빌론(사탄의 신부 카톨릭 교회), 곧 창녀 교회를 예표한다는 점 때문에 우리는 이 사건을 예의 주시하면서 계 11장과 비교해야 한다.
결국 요한은 언제 죽임을 당했는가, 헤롯의 생일날이 그의 참수일이 되었다. 적그리스도의 원래 생일이 언제라고 말할 정보는 없지만 그가 7년의 중간에 암살 시도를 겪고 다시 부활(예수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날은 분명 "이스터"(달걀 까먹는 그 이스터)가 될 것이다.
자, 그래서 적그리스도는 7년의 중간, 3.5년에 죽었다 부활한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3년이 지나서 그는 세 번째 생일 직전에 두 증인을 잡아 처형한 것이다. 즉, 전세계의 장관과 대사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든 이유는 "겸사겸사"인 셈인데 적그리스도의 생파를 위해서 온 측면, 두 증인을 죽인 기념, 두 가지가 다 있다고 본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이스터"에 행해지지 않는 풍습인 "선물 교환"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이 이런 광경을 예습하는 차원에서 보고자 하면 북한의 현실을 보면 된다. 북한의 국경일은 상당수가 김일성, 김정일의 생일과 연관되어 있다. 그 죽은 독재자들의 생일날 주민들은 기름과 사탕, 밀가루 같은 특식을 배급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종의 국가에서 백성에게 제공하는 국경일 선물인 셈이다. 그들은 적그리스도의 예표적 인물들인 김일성, 김정일의 생일에 "선물 교환"을 하는 의식을 대환란보다 앞서 지금 행하고 있는 셈이다.
백성의 충성심을 고취시키는 데 그만한 프로파간다가 없기 때문에, 북한 주민들이 머리 속으로 김일성에 대해 어떤 쓴감정과 비아냥을 품고 있는 것과 별개로 그 생일날만 되면 주민들의 배꼽 시계는 오늘의 특식을 달라고 알람을 울려대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와 같은 "식량 통제를 통한 충성심 고취"는 많은 독재 국가들에서 행해져 왔고 비단 북한만의 고안물은 아니다. 베네수엘라의 챠베스, 마두로라는 악한 독재자들도 같은 식으로 백성들을 배꼽 세뇌시켰다. 적그리스도는 좀더 스케일을 확장시켜서 전세계인들에게 자신의 탄신(부활)의 날을 특식 주는 날로서, 또 사탕이나 과자 주는 날로서 자리매김 시킬 것이다.
이 두 선지자가 땅에 사는 자들을 괴롭게 하였기 때문이라 성경은 인류에게 가장 도움을 주는 책이 명백함에도 수많은 반대자들에게 "인류를 괴롭히는 책"으로 저주를 사고 있다. 인본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성경은 미워할 수 밖에 없는 책이며 앞으로 세상이 점점 낙원스럽게 바뀌어간다는 긍정적, 낙관적 미래관을 가진 역사가들에게 성경은 그들의 장밋빛 세계관에 찬물을 끼얹는 반인류적 책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세상이 점점 좋아지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더욱 악해지다가 소름끼치는 심판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임명받아 특별히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반사경(달과 같이)의 사역을 수행하는 자들이다.
이것이 정죄라. 즉 빛이 세상에 왔으나 사람들이 빛보다는 오히려 어두움을 더 사랑하니 이는 그들의 행위가 악하기 때문이라. 악을 행하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며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혹 자기의 행위가 책망받을까 함이라(요 3:19-20).
그리스도인들은 두 증인과 같으면서도 다른 점이 많이 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 거부감을 주는 빛의 메시지들을 전하는 입장에 있다. 세상이 원하는 "화합, 일치, 통일" 대신 그리스도인들은 죄악으로부터의 성별, 그리스도께 대한 회개를 전파한다. 두 증인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적그리스도가 제공하는 단일 세계 정부와 그 질서에 대해 쓴소리와 비판과 신랄한 비난을 퍼부을 것이다. 두 증인의 메시지는 CNN, 뉴욕타임즈, 주요 일간지, 인본적 사회주의적 생각을 가진 기자, 연예인들의 입장과 상반될 것이다.
메시지는 같지만 그것을 납득시키는 방식은 우리 그리스도인과 두 증인의 방식이 분명 다르다. 우리는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하거나 물을 피로 바꾸는 이적을 행하고 다니지 않는다. 물론 오순절파, 은사주의라 하는 집단은 사도들을 모방하여 어설픈 가짜 기적들을 행하지만 그것들은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거나 회개시키는 데에 턱없이 모자라다. 진짜 기적이 아닌 가짜의 한계가 그것이다. 두 증인에게 있는 능력을 우리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받은 적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크리스찬들이 능력이 결핍되었다 생각하고 주님께 불평할 이유가 있는가? 전혀 아니다.
두 증인에게 없는 것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불평보다 감사해야 한다.
우리가 행한 의로운 행위에 의하지 않고 그의 자비하심에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으니(딛 3:5).
우리에게는 "중생"(regeneration)이 있고 그것은 구약 성도(모세와 엘리야 같은)와 신약 크리스찬들을 구별짓는 가장 현저한 차이점이다. 모세가 아무리 위대한 선지자였다 할지라도 그에게는 거듭남이 없었고 엘리야가 국가적 배교에 맞서서 어떤 능력과 용기를 보여주었다 할지라도 그는 자연인의 성정을 갖고 그 일을 한 것이다.
이런 까닭에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라. 오히려 우리의 겉 사람이 썩어질지라도 우리의 속 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나니(고후 4:16).
속 사람이 행할 수 있는 능력은 표면적인 표적, 이적, 기적들과 다른 차원의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으로써 죄인들의 중생을 가져올 수 있다. 그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드는 현란한 기적과 표적과 심판을 동반하지 않고서도 단순하고 평범한 복음 증거로 사람들을 회심과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는 능력자가 바로 우리, 교회 시대 끝에 사는 설교자들과 복음 전도자들이다.
어쨌건 두 증인의 복음과 예언 메시지는 반사회적, 반공동체적, 반지구촌적, 반UN적, 반인류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밖에 없는데 그들이 세상과 대립하면서 일점의 타협 여지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적그리스도가 항복하건, 그들이 항복하든 마주 달리는 두 기관차처럼 파국을 향해 상황은 갈 수 밖에 없었다. 이 싸움에서 결국 적그리스도가 일시적 승리를 거두었고 두 증인은 여실히 패배를 증명하면서 시체가 전시되는 신세가 되었다.
11 사흘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온 그 생명의 영이 그들에게로 들어가니 그들이 자기 발로 서더라. 그러자 그들을 바라보던 자들에게 큰 두려움이 임하더라.
여기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그 생명의 영"은 단순히 말해서 성령인데 왜 이런 각별한 표현을 쓰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때에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바람에게 예언하라. 인자야, 예언하여 바람에게 말하라. 주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오 숨아, 네 바람으로부터 와서 이 살해된 자들 위에 숨을 넣어 주어 그들로 살아나게 하라.” 하시니라(겔 37:9).
최초의 인간 아담을 창조하실 때에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으심으로 흙이었던 인간이 살아있는 혼이 되게 하셨다(창 2:7).
성령께서 수행하시는 여러 사역 가운데 "생명의 영"으로서 하시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구약 성도나 신약 성도, 혹은 환란 성도를 부활시키실 때 그들의 몸을 성령의 능력으로 살려주는 사역이다. 창세기 2:7에서는 "생명의 호흡"이었던 것이 계시록에서는 "그 생명의 영"으로 살짝 바뀌었는데 여기서 "영"이 영어KJV에서는 첫글자가 Spirit, 대명사로 되어 있다. 고유명사 형태를 취한 이유는 이 영이 성령은 성령이되 두 증인을, 또는 그들을 포함한 수많은 대환란 성도들을 부활시키시는 그 특정 사역을 행하시는 성령을 지정해서 표현하는 것이다.
불법의 신비가 이미 활동하고 있나니 현재는 막는 자가 있어 막을 것이나 그가 그 길에서 옮겨질 때까지만 그리하리라(살후 2:7).
어떤 해석가들은 살후 2:7의 "막는 자"를 성령으로 간주하는데 그러면서 그들은 교회와 함께 성령께서 휴거된다는 이상한 해석을 한다. 그 결과 7년 환란 동안 이 지구상에는 그 어떤 성령의 역사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어거지스러운 결론으로 가게 되는데 나는 여러 측면에서 "막는 자"가 성령일 수 없음을 강조해 왔고 이번 계 11:11에서도 그 사실이 확인되는 것을 재강조한다.
7년 환란 때 성령의 역사가 전혀 없다면 두 증인을 부활시키는 영은 성령이 아닌 악령이 되는가? 성령의 역사가 분명 여기 나오고 다른 환란 성도들 역시 성령께서 생명의 영으로 역사하심으로 부활하지 않는가 말이다.
이 두 증인은 목베임당하여 쓰러져 있는 상태였는데 그들이 두 발로 선 것이다. 머리와 몸통이 먼저 붙은 다음에 일어선 것인지 머리 없는 몸통이 벌떡 일어나서 자기 머리를 두 손으로 들어다 목에 척 하고 붙인 것인지 그 앞뒤 정황은 알 수 없다. 전자의 경우보다는 후자가 상당히 공포스러운 광경일텐데 공포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광경이 전세계인의 눈 앞에서(위성 중계 하에) 벌어지는 이 사건을 성경이 짧은 한 구절로 묘사하고 있으니까 여러분은 별로 신경쓰지 않고 대충 넘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인류 역사에 전무후무하게 엄청난 사건이고 대단한 기적이다.
"큰 두려움이 임하더라"(great fear fell upon)는 간략한 언급을 통해 미루어 보기로 이 사람들은 공포 영화를 보고 두려움에 떨듯이 두 증인의 머리와 몸통이 합체되면서 시체였던 그들이 벌떡 일어나는 광경을 보면서 온통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이다. 이 현상을 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기적 중에서 으뜸인 기적인가, 그 사실과 관련하여서 설명해 보겠다.
성경에는 허다한 기적들이 나오고 넓게 보자면 창세기 1장의 창조, 재창조(6일 창조) 사역들 자체가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들이다. 이집트에 내려진 열 가지 재앙은 엄청난 기적이었고 홍해를 갈랐던 기적, 요단강이 끊기고 이스라엘이 건넌 기적, 여리코 성이 손대지 않고 무너진 기적, 그러한 기적들이 일견 우리 생각에는 누구 누구가 부활하는 그런 기적보다는 크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사람은 원래 자기 중심적인 존재(에고이스트)이기 때문에 자기 피부에 와 닿지 않는 외부 세계의 여러 기적들은 잠시 잠깐 놀라기는 할지언정 조금 지나면 흥미를 잃고 시들해진다. 별로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자기하고 직접 관련된 일, 이를테면 몸이 죽었다가 부활하는 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쇠하지 않고 계속 촉각을 세우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친히 인류의 최대 관심사이자 인간의 영원한 운명과 직결된 부활을 체현하심으로써 복음을 제시하신 것이다. 두 증인의 죽음과 부활 또한 같은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때까지 회개하지 않고 버티던 완악한 인류 앞에 하나님께서는 부인할 수 없는 놀라운 부활의 표적을 보여주심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무너뜨리실 것이다.
인간의 여러 감정들 중에서 특히 "두려움"은 잘 사용되기만 한다면 구원과 거룩함에 이를 수 있는 유용한 도구라 할 수 있다. 두려움이 없는 것보다는 있는 편이 그 사람을 멸망에 이르지 않게 지켜주는 보호막이 된다. 여러분이 운전할 때 교통 질서를 지키려 하는 것은 사고와 죽음을 겁내기 때문인 것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인간이 급격한 파멸로 떨어지는 것을 막아주는 효용성의 기재인 것이다. 물론 창조주에 대한 두려움 자체만으로 절대 구원받을 수는 없으며 두려움을 통해 회개에 이르고 십자가의 은혜를 마음 속에 받아들임으로써 영원한 용서의 확신을 얻어야 구원에 이를 수 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두 증인의 갑작스러운 변화, 부활의 광경을 보고 소스라쳐 놀라고 공포에 질리는 것은 일단 바람직한 리액션인 것은 맞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사이에 걸렸던 기간은 사흘 낮과 사흘 밤이었고 두 증인의 그러한 간격은 사흘 낮밤에 더한 12시간이다.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이러한 차이가 어떤 의미인지는 성경 해석자들 가운데 결론이 없는 것 같다.
요나가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고래 뱃속에 있었듯이, 인자도 그처럼 사흘 낮과 사흘 밤을 땅의 심장 속에 있을 것이라(마 12:40).
예수님의 죽으심과 관련하여 강조되는 시간은 항상 문자적 72시간인데 즉, 주님은 수요일 오후 3-6시 사이에 죽으시고 6시에 매장되셨으며 72시간 후인 토요일 오후 6시를 다소 넘겨서 부활하셨다. 따라서 무덤 속의 72시간에 더한 수요일 오후의 2-3시간 여분이 남게 되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 해명하는 효력 있는 해석은 누구도 감히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혹자는 저 "땅의 심장"을 지옥에 국한시켜 생각하고 거기에 6시간을 첨가하면서 그 시간의 부분은 주님께서 아브라함의 품, 낙원에 구약 성도들과 함께 머물러 계신 기간으로 산정하고자 한다. 그런 해석도 있는데 나는 그런 계산이 타당한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다만, 두 증인 같은 경우 72시간이 아닌 딱 잘라 80시간을 채운 후에 부활하게 될 것이며 이 사람들은 매장되지 않고 죽은 채 그대로 방치되는 식이므로 그들의 목베임부터 부활까지의 시간이 에누리없이 사흘하고 반이 된다는 것은 감안하라.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다음 그 죽음이 로마 군사에 의해 확인되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렸으며 주의 시체가 저녁 6시를 앞두고 급히 매장되었고 그런 저런 추가적 시간이 무덤 속에 계신 그 72시간에 덧붙여지는 것이다. 어쨌건 어림잡아 주님도 사흘 반이라는 기간을 거친 후에 부활하신 게 맞을 수 있다는 얘기고, 두 증인도 예수님과 동일한 부활의 기준을 적용받는 게 될 수 있다.
12 그들이 하늘로부터 나는 큰 음성을 들었는데 그들에게 말하기를 “이리 올라오라.” 하므로 그들이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이 그들을 바라보더라.
이 일련의 과정이 전부 위성 생중계 되는 상황이며 이것은 전세계적인 복음 전파를 위해 하나님께서 적그리스도의 시스템을 역으로 이용하는 것임을 알기 바란다. 인터넷과 유투브는 복음 전파를 위해 탄생한 매체와 수단이 아니며 전세계적인 악의 확산을 위해서 보다 적극 활용되는 통로로 되어 있다. 물론 인터넷을 통해 복음도 만만치 않게 전해지기는 하지만 사탄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더 빈번히 사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사람들을 실족시키는 인터넷이란 도구를 통해서 거대한 부흥이 일어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허락하심 하에서 가능할 것이다. 오늘날 라오디케아 시대의 끝을 살아가고 있는 성경대로 믿는 크리스찬들, 특별히 복음과 진리 전파의 사역에 관심을 가진 전도자들의 입장에서 인터넷은 거대 자본의 힘이 지배하는 영역이요, 우리가 복음 전파를 위해 극히 일부를 할당받아 쓰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성경대로 믿는 교회와 성도들은 자본력이 미약한 편이기 때문에 대기업처럼 유투브, 인터넷에 광고를 펑펑 때릴 수 없고 우리의 조회수를 높이기 위해 다양한 상술을 동원할 수 없다. 혼들을 이겨오는 일과 무관한, 진리 전파와 무관한 "문화, 연예, 사회, 정치" 컨텐츠에는 수십 만의 조회수가 잘도 찍히지만 성경대로 믿는 진리 전파에는 참으로 사람들의 관심이 박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나는 이 본문을 통해 보듯이 하나님께서 결국 한 번은 사탄의 인터넷을 통해 복음을 라이브로 전세계로 전파시키실 것임을 믿고 있다. 우리 시대에 그런 것은 아니고 대환란 끝무렵에 그렇게 될 것이다.
"큰 음성", "이리 올라오라", 이것은 어렵지 않게 휴거의 싸인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휴거에 동반되는 아주 특징적인 현상들이 나타나기 때문에, 또 이 음성과 함께 두 증인이 휴거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언제, 어떤 시대의 성도들을 휴거시키시건 모든 휴거에는 "이리 올라오라"는 메시지가 동반된다는 점을 놓칠 수 없는 것이다.
이 일 후에 내가 쳐다보니, 보라, 하늘에 한 문이 열려 있는데 내가 들은 첫 음성은 나팔 소리 같았으며,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이리 올라오라. 내가 이후에 마땅히 일어나야 할 일들을 네게 보여 주리라.” 하더라(계 4:1).
신약 교회의 환란전휴거에 대해 사람들이 "비밀 휴거"라 잘못 부르는 그것에 대해 해야 할 말이 있다. 교회의 휴거가 비밀 휴거 맞는가? 그들이 말하는 바 비밀 휴거라는 용어는 매우 비성경적인 표현이 아닐 수 없는데 오히려 교회의 휴거는 공개 휴거라는 점이 계 4:1을 보더라도 맞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한 가지 신비를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오히려 우리가 모두 변화될 것이니(고전 15:51).
사도 바울이 교회의 휴거를 언급하면서 그것을 "신비"(mystery)라 정의하고 있다. "신비"와 "비밀"(secret)의 기본적인 차이점은 신비는 "공개적", 비밀은 "비공개적"이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숨죽이고 가만히 내려오셔서 그리스도인들의 귓전에만 "얘들아, 올라와라"고 속삭이신 다음 그들을 슬쩍 데려가신다면 그것은 비공개적 사건이며 비밀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런 식의 휴거가 아닌 나팔 소리와 음성과 여러 현상들을 동반하는 공개적 사건으로 언급하고 있다. 신자가 개역 성경을 가지고 휴거의 교리를 세운 경우 저 고전 15:51을 신비가 아닌 "비밀"로 오역 변개해 놓은 것 때문에 항상 걸림돌에 걸리는 것이다. 그 사람은 잘못된 성구를 근거로 "비밀 휴거" 운운하게 되는 것이며 그것은 성경적 교리가 아닌 거짓 교리인 것이다.
"신비"는 공개적 사건임에도 이해, 분석, 납득하기 어려운 말 그대로 난해한 현상을 말한다. 즉, 여러분이 세계 몇대 불가사의를 이야기하고 기자의 피라미드 같은 것이 참 이해 난망한 건축물이라고 할때 그것이 신비다. 기자의 피라미드는 누구나 볼 수 있는 공개된 건축물이지 절대 숨겨진 비밀이 아니다. 볼 수 있음에도 우리는 "옛날 사람들이 대체 어떻게 저런 것을 지었지?"라고 의아해 한다. 그래서 불가사의라고 부르는 것인데 그 불가사의라는 용어의 뜻은 신비와 거의 유사하다 할 수 있다.
그래서, 환란전이든 환란후든 모든 휴거는 기본적으로 공개 휴거인 것이며 여러분이 에녹의 경우를 예외로 제시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대세를 뒤집지는 못한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없어졌더라. 이는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셨음이라(창 5:24).
에녹의 휴거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없어졌더라"라고 처리되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휴거가 온전한 비밀이었던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이 있다가 없어진 것, 즉 실종이라는 사건은 실제로 발생하는 사건이지 비밀이 아니다. 에녹 당시의 사람들이 에녹의 실종에 대해 그리 관심을 갖지 않았거나 무관심했을 것이라고 여러분은 피상적으로 단정내리기 쉽지만 그게 그랬으리라는 법이 없다. 엘리야의 경우를 보더라도 그의 불말 불병거 휴거가 "목격된 사실"이었음에도 차마 믿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행방을 추적하고 다녔지 않은가 말이다.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누군가의 휴거에 대해 관심을 갖게 마련이다. 그래서 모름지기 휴거가 발생한다는 것은 무조건 세상의 이목을 끌게 되어 있고, <비밀 휴거>는 그 말 자체에 어폐가 있다.
그럼에도 현상의 디테일 면에서 볼때 우리 크리스찬들의 환란전휴거와 두 증인(과 기타 환란 성도들)의 7년 환란 후반기 휴거는 비슷하면서 다른 것들이 있다. 그 중 지금 언급하고자 하는 것이 "이리 올라오라"에 대해 사람들이 알아들을 것인가, 혹은 천둥 소리로 오인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마지막 나팔 소리에 눈깜짝하는 순간에 그러하리라. 나팔 소리가 나면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하는 몸으로 일으켜지며 우리도 변화되리라(고전 15:52).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음성과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하늘로부터 친히 내려오시리니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살전 4:16).
"마지막 나팔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는 사실상 "이리 올라오라"와 같은 메시지인데 이것이 휴거를 일으키는 단초가 되는 결정적인 메시지이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굳이 하나님의 "음성"이라 표현하지 않고 나팔 소리라고 했는데 이것은 현상적인 면에서 객관적으로 서술해서 나팔 소리로 언급한 것이다. 크리스찬들에게는 그 나팔 소리가 단순히 나팔이라는 악기의 소리가 아닌 주님의 "이리 올라오라"라는 음성으로 들릴 것이고 일반인들에게는 그저 "뿌우우"하는 양각 나팔 소리 정도로 들릴 것이다.
그래서, 크리스찬들과 이 세상 사람들에게 마지막 나팔 소리는 이중적으로 들릴 것이 거의 확실하고 이에 대해 참고할 수 있는 성구가 있다.
그때 곁에 서서 그 음성을 들은 무리가 말하기를 “천둥 소리였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천사가 그에게 말한 것이라.”고도 하더라(요 12:29).
요 12:29에서 결국 주님의 제자가 아닌 유대인들은 하나도 정답을 찍지 못했다. "천둥 소리였다"고 말한 자들은 매우 육신적인 자들로서 영적인 것을 전혀 모르는 자들이었다면 "천사가 그에게 말한 것이라"고 한 자들은 그래도 조금 감각이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의 음성인지 몰랐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제3자들인 것이다.
12절의 "이리 올라오라"는 메시지가 주어지는 대상은 휴거받는 당사자들인 두 증인과, 또 여기에 생략되어 있지만 환란 성도들일 것이다. 그들에게 그 음성이 들려지고 음성에 반응하여 그 성도들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 광경을 지켜보는 자들은 단순히 천둥 소리로 들을 가능성이 높다.
그들이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이 그들을 바라보더라 이 광경은 예수님의 올리브산 승천과 비슷하고 거의 닮았다. 물론 올리브 산 승천의 경우는 갈릴리 사람들인 제자들이 지켜보았고 주의 원수들이 본 것은 아니다. 그 차이점을 제하고 나머지 모든 면이 흡사하다.
주께서는 올리브 산 승천과 같은 모습으로 언제고 다시 오실 것임을 확증하셨다.
말하기를 “너희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너희는 하늘을 쳐다보고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하늘로 들려 올라가신 바로 이 예수는 너희가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하더라(행 1:11).
행 1:11의 이 내용을 슼 14:4과 연관짓는 해석이 많이 있는데 구별해야 할 차이점이 있다.
그의 발이 그 날에 예루살렘 앞 동편에 있는 올리브 산 위에 서시리니, 올리브 산은 그 중간이 동쪽과 서쪽으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생길 것이며, 산의 절반은 북쪽으로, 산의 절반은 남쪽으로 옮겨지리라(슼 14:4).
그러나 디테일한 면에서 슼 14장과 행 1장을 비교해 볼때 차이점이 있다. 슼 14장에서는 주님이 구름을 타고 곧장 올리브 산 위에 내려오시는 게 아니라 계 19장과 같이 흰 말을 타고 이 지상에서 아마겟돈 전쟁을 진행하시다가 막바지에 올리브 산 위에 안착하시는 장면이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행 1:11은 슼 14:4과 관주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행 1:11은 마 24:31과 연결 관주가 되는 장면이며 그것은 두 증인과 환란후휴거에 관련된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후에 하늘에 있는 인자의 표적이 나타나리니, 땅의 모든 지파들이 통곡할 것이며, 또 그들은 인자가 권세와 큰 영광으로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리라(마 24:30).
그러자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그의 낫을 땅에 대어 땅에서 곡식을 거두시더라(계 14:16).
휴거와 관련되어 나타나는 구름은 여러분이 자연 현상의 하나로서 목격하는 여러 형태의 구름이 아니다. 물론 살전 4:17의 "구름 속으로"를 일반적 의미의 구름이 떠 다니는 정도의 상공으로 해석하여 주님께서 구름이 있는 고도까지 친히 내려오셔서 성도들을 부르신다는 의미로 응용 해석하기도 한다. 나는 그것이 가능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서 살아남아 있는 우리도 공중에서 주와 만나기 위하여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려 올라가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영원히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7).
그러나 마 24:30, 계 14:16 등에 등장하는 구름을 그런 식으로만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따르는데 거기서는 구름이 하나님의 영광(쉐키나)를 의미한다고 보여진다. 쉐키나가 등장하는 대목은 주의 보좌와 그룹들이 이동형 포메이션으로 지상에 내려올 때인데 에스겔서를 참고하면 이렇다.
내가 보았더니, 보라, 북쪽에서 회오리바람과 큰 구름과 불덩어리가 나오는데 그 주위에 광채가 있으며 그 가운데 불 한가운데서 나온 것은 황갈색 같더라(겔 1:4).
"큰 구름"이 주의 이동식 보좌에 관련되어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 볼때 주의 재림시에도 쉐키나의 구름이 동반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7년 환란 전 공중 재림시 휴거되지 않는 나머지 인류는 구름은 보겠지만 구름 위에 찬란한 주의 보좌와 그룹들의 영광은 보지 못할 것이다. 7년 환란 후반부 공중 재림시 휴거되지 않는 지상의 남은 인류는 구름 뿐 아니라 그 위 이동식 보좌에 앉으신 주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환란후휴거시 휴거되는 성도들은 각기 구름을 타고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주의 구름 속으로 끌려올라간 후 그 구름과 함께 승천하게 될 터이고 그 전반적 과정을 남반구와 북반구의 전체 인류가 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전세계 언론이 예루살렘 상공에서 펼쳐지는 휴거 광경을 라이브로 중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두 증인과 환란성도들이 대기권 가운데서 들려올라가는 것까지만 보는 게 아니라 그 이상의 범위까지 목도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면 그때 초자연적으로 하늘의 시온이 드러나면서 그곳까지 가는 휴거의 과정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생생히 보여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시 48:2-5을 참조하라. 이로 인해 땅의 왕들과 고관들까지 주의 얼굴과 천상의 위엄을 직접 본 데 따른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계 6:12-17의 상황과 같이 떨면서 산들과 바위들에게 "우리 위에 떨어지라"고 간청하게 된다.
13 또 같은 시간에 큰 지진이 일어나서 도성의 십분의 일이 무너지니 그 지진으로 죽은 사람들이 칠천 명이었더라. 남은 자들은 무서워하며 하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더라.
14 둘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셋째 화가 속히 오리라.
이 지진이 어느 정도 큰 지진이며 단지 예루살렘과 그 인근에 국한된 성격인지 대륙과 대륙 사이에까지 전파되는 초거대 지진인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예루살렘 도성의 십분의 일만 무너질 정도라면 그 지진의 파괴력이 아주 큰 것은 아닌 듯 보이고, 그렇다면 왜 great earthquake(엄청난 지진)라 했는지 조금 의아하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전지구적으로 거대 지진을 일으키셨는데 그 와중에 예루살렘에 대해서는 1/10의 피해만 주도록 심판의 정도를 경감시키신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또, 이 1/10이라는 비율이 십일조라는 개념과 맞물려서 아주 중요한 단서인데 대환란이라는 기간이 이방인의 때, 곧 이방인의 숫자 10이 작동하는 구간이라는 것도 고려한다면 상징성이 매우 크다.
그러나 그 안에 아직도 십분의 일이 있을 것이요 그것이 돌아와서 먹힐 것이니 잎이 떨어져 줄기가 남아 있는 보리수나무와 상수리나무처럼, 거룩한 씨도 그 줄기가 되리라.” 하셨더라(사 6:13).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귀환 유대인 자손들 가운데 1/10의 숫자가 "돌아와서 먹힐 것"이다. 누구에게 무엇이 먹힌다는 것인가 하면 유대인들이 그 흉포한 적그리스도의 백성, 군대에게 문자 그대로 인육으로서 잡아 먹힌다, 인신 제사로 바쳐진다, 그러한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그 비율이 1/10인 것은 대환란이 열 뿔과 열 발가락의 시대, 곧 이방인의 때이기 때문이다. 그런 차원에서 예루살렘은 1/10의 피해를 입는 것이 타당한 부분이 있다.
또, 칠천 명이라는 사망자의 숫자가 암시하는 바가 무엇인지 의견이 분분할 수 있는 부분이다. 우선 연결된다고 추정할 수 있는 본문은 바알의 형상에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이 아닌가 싶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의 형상에 무릎을 꿇지 아니한 칠천 명을 남겨 두었노라.” 하셨느니라(롬 11:4).
1/10은 하나님께 바쳐지는 거룩한 십일조의 숫자이고 칠천 명은 하나님께 성별된 거룩한 자들의 숫자이니 이 둘이 조합된다면 결국 "성별된 자의 추수"라는 답이 나온다. 숫자의 의미를 고려치 않고 단순히 13절을 읽을 때에는 악인과 불경한 자들이 지진 심판으로 죽었다, 그렇게 해석도 할 수 있겠다. 어느 쪽이 더 자연스러운 해석인지 고심할 부분이 있는데 관련하여 좀더 참고할 구절을 제시하자면 이렇다.
의인이 멸망하여도 마음에 두는 사람이 없고, 자비로운 사람들이 잡혀가도 의인이 다가올 재앙으로부터 옮겨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도다(사 57:1).
혹자는 사 57:1을 교회의 휴거에 맞춰서 해석하기도 하는데, 그래서 "옮겨진"을 휴거라고 읽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이 내용 전반은 "의인이 멸망하는 것"을 다루는 것이고 결국 자비로운 사람들이 잡혀간다는 것도 휴거가 아니라 포로되어 가거나 죽임당하는 부정적인 내용이다. 그리고 다가올 재앙은 액면 그대로 인류 최대의 재앙적 사건인 아마겟돈 전쟁일 가능성이 농후하고 따라서, 그 전에 휴거될 사람들은 되고, 또 휴거에 대해서 미흡한 조건이라 할지라도 어떤 사람들은 위 13절에서처럼 그 지진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그들을 죽게 하심으로 아마겟돈 전쟁에 처하지 않게 빼내 가시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런데 남은 자들은 죽은 칠천 명으로 인해 두려워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 남은 예루살렘 거민들의 회개는 슼 12장에 잘 언급되어 있다.
또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의 거민들 위에 은혜와 간구의 영을 부어 주리라. 그러면 그들은 그들이 찔렀던 나를 쳐다볼 것이며, 그들이 그를 위하여 애통하리니, 마치 어떤 사람이 자기 외아들을 위하여 애통함같이 할 것이요, 그들이 그를 위하여 비통에 잠기리니 마치 어떤 사람이 자기 첫아들을 위하여 비통에 잠기듯 하리라(슼 12:10).
"그들이 찔렀던 나를 쳐다볼 것이며", 예루살렘의 남은 유대인들은 공중에 구름을 타고 오신 인자 같으신 주님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들의 메시야라는 확신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목베임 당한 유대인 환란 성도들이 두 증인들과 함께 휴거되는 것을 볼 것이며, 또한 휴거되지 못했으나 의롭게 살려 했던 칠천 명의 사람들이 죽는 모습을 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회개하는 것이다.
먼저 죽임당하는 칠천 명이 만일 악인이었다면 과연 슼 12장의 상황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의문시된다. 그래서 나는 그 죽은 사람들이 악인은 아니라고 판단하는데 잠정적으로 그리 보고 있다. 혹시 틀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은 잠정적 결론이다.
지진으로 죽지 않고 남은 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보면 참으로 이들이 회개하고 있다는 점을 그대로 확인할 수 있다. 7년 환란의 아마도 후반부 중에서도 한참 후반부에 전파되는 것으로 보이는 "영원한 복음"의 내용 골자가 바로 창조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계 14:7).
이 남은 자들은 영원한 복음의 내용을 정확히 충족시키는 행위를 하고 있으며 그들의 행위는 하나님의 자비를 얻기에 합당하다. 반면 환란후휴거라는 결정적 시그널을 확인한 후에도 대부분의 인류들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거절하고 여전히 자신의 악을 따른다.
그리하여 큰 열기로 사람들을 태우니 그들이 이러한 재앙에 권세를 가진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더라. 그들이 회개하지 아니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니라(계 16:9).
여러분이 계 16:9과 본문 13절의 "영광을 돌리는" 부분을 신중히 비교해 본다면 누가 구원을 받고 누가 거부될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13절만을 놓고 피상적으로 생각할 때에는 저 사람들이 회개하고 있는 건지 아닌지 애매하게 보일 수 있으나 슼 12장, 계 16:9 등 종합적으로 비교할 적에는 회개하는 게 100% 맞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대목에서 여러분은 혹시 마 25장의 열 처녀 비유가 떠오르면서 부름받지 못하고 남겨진 다섯 처녀의 운명이 궁금해지지 않는가? 시간과 지면상 마 25장의 열 처녀 비유와 달란트 비유에 대해 길게 다룰 수는 없지만 간략히 말하자면 거기서 등장하는 처녀들이라던지 달란트 받은 종들은 슼 12장에서와 같이 "환란후휴거 이후에야 회개하는 사람들" 부류가 아니다. 그 처녀들과 종들은 이미 7년 환란의 중반부나 그보다 좀 앞서부터 성도로서 믿기 시작한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환란후휴거를 받았어야만 되는 사람들이고 혹시 놓친다면 마 25장의 결론이 그렇게 내려져 있다시피 그들은 구원 자체를 상실하고 지옥으로 간다. 차이점이 분명해지는가? 환란 성도의 자격으로 7년의 후반까지 살아남아 있다가 휴거를 어떤 사유로든 놓친다면 그 자들은 히브리서의 경고대로 구원을 놓치고 지옥에 가 버리는 것이다. 그 휴거 탈락자 환란 성도들은 환란후휴거 사건 뒤에 회개하는 유대인 남은 자들의 무리에 포함될 수 없다.
한 번 깨우침을 받고 하늘의 선물을 맛보며, 성령의 동참자가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오는 세상의 능력을 맛본 자들이 만약 떨어져 나간다면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시킬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공개적으로 조롱함이라(히 6:4-6).
7년 환란 때 회개의 조건은 그것이 단회적으로만 인정되고 "만약 떨어져 나가"는 경우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교회 시대인 지금 이런 교리를 성도들에게 적용할 경우 누구는 떨어져 나가고 누구는 구원이 유지되는지 알 수 없어서 대혼란이 빚어질 것이며 결국 구원의 보장 교리가 혼탁한 교회에서는 은사주의와 칼빈주의가 판치게 될 수 밖에 없다. 칼빈주의는 구원의 보장을 성경적으로 믿게 하는 교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함받은 자를 애초에 정해놓았으므로 그것은 고정 불변이요 교인들은 거기에 대해 신경 끄고 교회 생활이나 닥치고 열심히 하면 된다는 일종의 숙명론이다. 그것이 극단적 형태로 발전하면 결국 개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것 자체가 인간의 행위일 뿐이므로 죽을 때까지 구원의 확신도 갖지 말라는 마귀적 이론으로 가게 된다. 은사주의는 칼빈주의에 빠진 불쌍한 교인들이 그들의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누그러뜨리고 자신이 택자일 가능성을 높여주려고 선택하는 마약 같은 존재인데 은사주의에서 말하는 바 "불 받아라 불 불" 같은 어떤 이상한 체험들을 통해 구원의 확신 없는 제도 교인들은 "내가 이런 식으로 영적 체험들을 하는 것을 보면 선택받은 자이겠지"라는 가짜 위안을 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칼빈주의나 은사주의 같은 마약, 가짜 위안거리로 본질인 구원 문제를 의탁하라고 한 적이 없다. 구원은 구원받은 사람 자신의 양심에서 100% 가부간에 검증, 판단이 나는 것이다. 구원받은 사람의 양심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보혈, 그 분의 피의 대속의 완전함, 죄들의 제거됨, 영원한 보장에 대해 모두 아멘으로 시인할 수 있다. 시인하려고 하는데 마음 속에서 계속 제동이 걸린다면 그는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적이 아직까지 없는 것이다. 자신이 구원받은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사실 판단은 매우 단순한 문제이며 절대 은사주의자들이 가르치듯이 유체이탈 같은 영적 체험들을 통해 느낌으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14절에서 말하는 "둘째 화"는 13절의 큰 지진을 말하는 것 같은데 "셋째 화"가 무엇인지는 특정되어 있지 않아 알기 어렵다. 일단 나는 후3년 반이라는 기간이 삼등분으로 구분되어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둘째, 셋째 화"에 대한 해석을 시도해 볼까 한다.
그때 그 여인이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았는데, 이는 그녀가 광야에 있는 자기 처소로 날아가서 그곳에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부양받으려 함이더라(계 12:14).
한 때(1년)가 첫째 화에 해당된다면 그것은 주로 나팔 재앙들을 의미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때(2년)가 둘째 화에 해당한다면 그것들은 호리병 재앙과 관계가 깊을 것이며 셋째 화는 그렇다면 나머지 반 때(6개월)와 관련된 일, 곧 지상 재림과 아마겟돈 전쟁에 수반된 여러 재앙들을 가리킬 수 있겠다. 그 이상 세부적인 분류는 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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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첫째"화"는 다섯째 나팔 입니다.
즉, 무저갱의 천사...
황충이 나온것이 화가 아니고 아바돈,아볼루온이 이 땅에 나온것이 1번째 "화 "입니다.
그 이유는 성도가 죽임당하기 시작하기에 그렇습니다.
두증인은 두사람이 아니고 두 무리, 즉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종들과 이방인교회의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이를 성경은 14만4천이라 칭하기도 합니다.
계시록은 어렵지 않습니다.
매우 심플합니다^^
두번째 "화"는 여섯번째 나팔로 전쟁으로 많은 사람이 죽기 사작하기에 화이며,
세번째 "화"는 일곱번째 나팔로 일곱대접이 거의 동시에 쏟아지는 하나님의 진노이기에 "화"이지요.
"화"의 개념정리만 잘하셔도 계시록 타임라인의 중심을 잡을수가 있지요^^
다른 어떤 재앙도 이렇게 많은사럄이 죽어나가는 재앙이 없기에 "화"입니다.
πασχα
흠정역은 이를 이스터로 번역했나 봅니다?
아 킹이 자랑하는 TR1550도 τ? π?σχα 라고 기록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