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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야고보서의 시작 1,1-11>
1 하느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가 세상에 흩어져 사는 열두 지파에게 인사합니다.
2 나의 형제 여러분,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3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4 그 인내가 완전한 효력을 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면 모든 면에서 모자람 없이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5 여러분 가운데에 누구든지 지혜가 모자라면 하느님께 청하십시오.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너그럽게 베푸시고 나무라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 받을 것입니다.
6 그러나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7 그러한 사람은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8 그는 두 마음을 품은 사람으로 어떠한 길을 걷든 안정을 찾지 못합니다.
9 비천한 형제는 자기가 고귀해졌음을 자랑하고,
10 부자는 자기가 비천해졌음을 자랑하십시오.
부자는 풀꽃처럼 스러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11 해가 떠서 뜨겁게 내리쬐면, 풀은 마르고 꽃은 져서 그 아름다운 모습이 없어져 버립니다.
이와 같이 부자도 자기 일에만 골몰하다가 시들어 버릴 것입니다.
✠ 복음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8,11-13>
그때에
11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12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13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요나의 표징밖에는 아무런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오늘 복음은 ‘4천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에 이어 예수님께 대한 바리사이들의 시험을 전해줍니다.
복음사가는 이렇게 전해줍니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마르 8,11)
그들은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마치 모세 때에 광야에서 내린 ‘만나’(탈출 16장)나, 여호수아의 간구로 해와 달이 멈춰졌던 일(여호 1,12-14)과 같은 하늘에서 오는 초자연적인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저의는 이러한 표징과는 상관없이 예수님을 넘어뜨리는 데 그 초점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너뜨리기 위해서 시험합니다.
마치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하여 넘어뜨리기 위해 '유혹자가 그분께 다가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에게 빵이 되라 해보시오.”'(마태 4,3)라고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메시아인지를 스스로 증명해보이라는 지극히 도전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치 심문하듯이 예수님을 다그쳤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탄식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마르 8,12)
이에 대해서 마태오복음의 병행 구절에서는 표징을 분별하지 못하는 이유와 표징을 요구하는 이유도 밝혀줍니다.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징은 분별하지 못한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의 표징밖에는 아무런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마태 16,3-4)
그렇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메시아의 시대의 표징을 드러내셨지만, 바로 앞 장면의 ‘4천명을 먹이신 기적이야기’를 통해서도 드러내셨지만, 표징을 받아들이지 않음은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임을 말해줍니다.
어쩌면 도처에서 드러내시는 당신의 신성을 보고 또 보고 보면서도 여전히 무시하고 거부하고 있는 우리의 마음이 바로 그럴 것입니다.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한 부류는 세상에는 기적이 없다는 사람들이요, 또 한 부류는 세상의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다.
나는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마르 8,12)
주님!
당신의 진실은 오늘도 저의 믿음을 다그칩니다.
오늘 저희에게 불신으로 왜곡된 마음을 밝혀주소서.
가리고 눈 감은 마음을 뜨게 하소서.
도처에서 드러내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당신의 신성을 보고 또 보고 보면서도 무시하고 거부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시련의 의미를 아는 인내>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그 인내가 완전한 효력을 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면 모든 면에서 모자람 없이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오늘부터 야고보서가 봉독되는데 시작부터 믿음의 시련에 대해 얘기합니다.
당시 믿는 이들이 믿음 때문에 시련 중에 있거나 하느님을 믿는데도 시련이 있었기 때문일 텐데, 이 시련에 의미가 있으니 기쁘게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박해 시대처럼 믿는 것 때문에 박해를 받거나 하느님을 믿는데도 다른 사람에게처럼 고통이 닥치거나 하면, 우리는 왜 하느님을 믿어야 하나, 굳이 하느님을 믿을 필요가 뭐 있나? 이런 식으로 믿음에 대한 의구심이 들며 믿음이 시련을 당하게 되지요.
그런데 고통이나 시련은 이렇게 의구심이 들게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고통과 시련의 의미를 생각게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왜 내게 이런 시련이 닥쳤는지 묻게도 하는 거지요.
의미없는 고통이나 덧없는 시련은 정말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하면 고통뿐인 덧없는 인생은 살 이유가 없고 살아낼 힘도 없기 때문에 반드시 의미가 있어야 하듯, 고통이나 시련도 의미가 있어야 견딜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오늘 야고보서는 시련의 의미가 우리에게 인내가 생겨나게 하고, 이 인내가 온전한 효력을 발휘하게 되면 완전한 사람이 되게 한다고 얘기합니다.
이것을 시련이 인내를 낳고, 인내가 완전한 사람을 낳는 것이라고 그 의미를 얘기해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분명한 것은 시련없이 인내나 인내력이 생기지 않습니다.
좋아하는 것이나 즐거움을 인내한다고 하지 않고, 인내라는 것이 본래 고통이나 시련을 견디는 것을 말함이니, 고통과 시련 없이는 인내나 인내력이 생길 수는 없는 거지요.
이것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지만 그러나 인내가 모든 면에서 모자람없이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한다는 것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미련곰탱이처럼 무조건 인내하면 정말 모자람없이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될까요?
그렇지 않고 야고보서도 그런 뜻에서 말한 것이 아니라 인내가 완전한 효력을 낼 경우 그렇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완전한 인내가 완전한 인간이 되게 한다는 뜻일 겁니다.
그렇다면 다시 완전한 인내가 무엇인지가 문제가 되겠는데, 완전한 인내란 인내의 의미를 완전히 알고 하는 인내이고, 하느님 사랑으로부터 그 의미를 찾은 인내를 말함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고통이나 시련이 하느님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그럴 때 우리는 겸손하게 인내하고,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인내하고, 하느님 사랑의 힘으로 인내할 것입니다.
- 작은형제회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영적인 눈을 뜨면 모든 것이 다 경이로움의 대상이요, 매 순간이 기적의 연속입니다>
옆에서 지켜보기에 너무나 안쓰러웠던 투병 생활을 마무리하고 하느님 품으로 돌아간 한 형제의 간절한 바람이 아직도 제 귓가에 남아있습니다.
그 간절한 바람이란 것이 제게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그분에게는 그렇게 간절했나 봅니다.
“칼칼한 육개장 한 사발에 공깃밥을 말아 훌훌 먹어 봤으면...
시원한 물 한 컵 벌컥벌컥 들이마셔 봤으면...
평소 그리 좋아했던 옥수수 한 자루 들고 파도소리 철렁이는 바닷가에서 낚싯대 한번 드리워 봤으면...”
따지고 보니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지극히 작고 평범한 일상의 일들이 어떤 분들에게는 엄청난 기적이요 표징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하루하루가 기적입니다.
주변을 곰곰이 살펴보면 일상의 모든 흐름들이 표징입니다.
하늘을 뚫어지게 바라볼 필요도 없습니다.
기를 쓰고 눈을 부릅뜨고 기적을 찾아 나설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회심하면, 우리가 제대로 영적인 눈을 뜨게 되면 주변의 모든 것이 다 경이로움의 대상이요, 매 순간이 기적의 연속입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변화되지 않고 회심하지 않는 바리사이들 앞에 예수님께서 깊이 탄식하십니다.
탄식은 어떤 때 나오는 것입니까?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 때, 정말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 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하는 느낌이 들 때, 자기도 모르게 깊은 한숨과 함께 탄식이 터져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탄식하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종착지가 바로 코앞인데, 구원이 바로 눈앞인데, 영원한 생명이 이렇게 자기들 가까이 있고 금방 손에 넣을 수 있는데, 그것을 외면하고 거부하고 발로 차버리는 바리사이들 앞에 너무나 안타까운 나머지 터져 나온 탄식이었습니다.
그간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보여준 기적이 얼마나 많았는데, 그간 예수님의 손으로 치유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빠져나간 악령들, 죽음에서 되살아난 사람들...
그 모든 하늘의 표징들을 자신들의 두 눈으로 확인했던 바리사이들이었건만,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는 메시아의 능력을 자신들의 눈으로 다시 한번 확인해보고 승복하여 예수님께 돌아서기 위해서가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그저 호기심에, 그저 장난삼아, 애초부터 신앙의 눈이 아니라 적개심과 불신으로 가득 찬 눈으로 예수님에게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바리사이들의 모습 앞에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비애감과 실망감은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극에 달한 바리사이들의 불신과 적대감, 꽉 막힘 앞에서 너무나 안타까웠던 예수님께서는 가슴 아프셨겠지만 그들에게서 기대와 희망을 접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남겨두고 떠나십니다.
영혼의 눈이 먼 그들이었기에, 바로 자기들 눈앞에 다가온 구원을 놓치는 일생일대의 과오를 저지르고 만 것입니다.
혹시라도 오늘 우리 내면에 그 옛날 바리사이들의 그 완고함과 옹졸함, 적대감과 불신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실망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떠나가고 계시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돌아볼 일입니다.
- 살레시오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표징을 요구하지 마라>
교포사목을 할 때입니다.
성당 앞뜰에 성모님상을 모시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 마음을 안 어떤 분이 “한국 어느 성당에 모셔진 성모님은 성모상에 머리를 갖다 대면 꼭 안수하는 모습인데 기적도 많이 일어난답니다. 그 성모님상을 모신 곳이 어딘지 알아보고 그런 성모님을 모셨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쁜 성모님을 모시면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고 은총도 그 만큼 더 크게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일반 판매용 성모상도 눈을 쌍꺼풀 해야 한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만 사람들은 신비한 현상에 민감합니다.
어디에 어떤 기적이 있다고 하면 그곳에 쫓아가고 그 혜택을 입고자 애를 씁니다.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 신비한 현상이나 기적을 통하여 드러내 주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을 찾기보다 눈에 보이는 현상에 더 많은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현실입니다.
물론 믿음이 약한 사람은 보고라도 믿어야죠.
그렇지만 자주 접하게 되면 둔감해지기 마련입니다.
은총을 주시는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주어진 은총의 열매에만 매달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을 베풀어 주셨음에도 종교지도자들의 불신은 계속되고 결국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없는 완고한 이들의 요구를 거절하셨습니다.
자기들의 욕구에 걸맞은 것만 요구하고 이미 보여 준 표징을 올바르게 보려 하지 않고 또다시 표징만을 바랐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는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일도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은 당신의 권능을 통해 아버지 하느님께로 인도하기 위한 방법일 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보여주기 위해서 오신 쇼맨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결코 보여주기 위한 기적, 기적을 위한 기적을 행하진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기적을 많이 보고 체험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기적의 삶을 사는 것이 소중합니다.
기적이 믿음을 가져오기보다 믿음이 기적을 낳습니다.
어떤 성모님 상을 모시든 그 앞에서 그분의 마음으로, 그분이 지니셨던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다면 기적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 살아있음이 기적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사랑을 베풀고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며 소외된 사람들의 상황을 바꾸어 주시고 영원한 삶을 살게 해 주어도 그것은 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그것이 살아있는 기적입니다.
그리고 어떤 특별한 기적을 베풀어 준 것은 그 기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적 사건 안에 담긴 의미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현상을 쫓아다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지금 나의 삶의 자리에서 기적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하늘의 기적이 아무리 많이 일어난다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무엇을 보여 달라고 조르지 말고 여러분이 기적을 만드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주님,
표징을 올바르게 볼 수 있는 눈과 깨닫는 마음을 주십시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표징>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라는 말과 '그분을 시험하려고' 라는 말은 '예수님에게 시비를 걸었다.' 라는 뜻입니다.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했다는 말은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어떤 특별한 기적을 보이라고 요구했다는 뜻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모세의 경우가 연상됩니다.
하느님께서 백성을 구하는 임무를 모세에게 주셨을 때, 모세는 자신 없는 모습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저를 믿지 않고 제 말을 듣지도 않으면서, ‘주님께서 당신에게 나타나셨을 리가 없소.’ 하면 어찌합니까?"
(탈출 4,1)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특별한 능력을 주시면서(탈출 4,2-7),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너를 믿지 않고 첫 번째 표징이 말하는 것을 듣지 않는다 하더라도, 두 번째 표징이 말하는 것은 믿을 것이다.
그들이 이 두 표징도 믿지 않고 너의 말을 듣지 않거든, 나일강에서 물을 퍼다가 마른 땅에 부어라.
그러면 나일강에서 퍼 온 물이 마른땅에서 피가 될 것이다."
(탈출 4,8-9)
첫 번째 표징은 지팡이를 뱀으로 바꾸는 일이고, 두 번째 표징은 손에 나병이 걸리게 했다가 다시 낫게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에게 와서 시비를 건 바리사이들은 아마도 모세가 백성들 앞에서 표징을 일으킨 것과 같은 일을 해 보라고 요구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표징을 본다고 해서 항상 모든 사람이 믿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일으킨 표징들을 보고 그의 말을 믿었지만(탈출 4,30-31), 이집트인들과 파라오는 안 믿었습니다(탈출 7장-8장).
이집트 요술사들은 모세가 일으킨 표징들과 이집트에 내린 둘째 재앙까지는 요술로 흉내 냈는데, 셋째 재앙인 ‘모기 소동’ 때에는 흉내 내지 못하고 “이것은 하느님의 손가락이 하신 일입니다.” 라고 증언했습니다(탈출 8,15).
그래도 파라오는 그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표징을 통해서 더 깊은 믿음을(확신을) 갖게 되는데, 안 믿으려고 작정한 사람은 표징 자체를 부정합니다.
모세 자신은 믿고 있었고, 백성들을 믿게 만들기 위한 표징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안 믿으려고 작정한 상태에서 자신들이 안 믿는 것이 옳다는 것을 확인하려고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만일에 예수님께서 어떤 표징을 보여주신다고 해도 그것을 표징으로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고, 더 놀라운 다른 표징을 보이라고 요구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깊이 탄식하신 것은 안 믿으려고 작정한 그들의 악한 마음을 꿰뚫어보셨기 때문이고, 표징을 보여주기를 거절하신 것은 보여주어도 소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에게 와서 시비를 건 이야기 바로 앞에는 예수님께서 빵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그런 정도의 기적은 표징이라고 말할 수 없다.” 라고 주장했던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6장을 보면, ‘기적의 빵’을 먹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라고 말합니다(요한 6,30).
‘빵의 기적’은 표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탈출기에 나오는 ‘만나가 내리는 기적’(탈출 16장)과 같은 기적을 요구합니다(요한 6,31).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는 그런 유대인들을 이해하기가 어려운데, 사실 냉정하게 반성해 보면 우리 안에도 그런 모습이 있습니다.
물론 이미 신앙인이 된 사람들은 “표징을 보여주면 믿겠다.” 같은 말을 하지는 않겠지만, 뭔가 간절하게 원하는 것을 청하는 기도를 할 때 조건을 붙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의 기도를 들어주시면, 제가 ......을 하겠습니다.” 같은 식으로...
신앙인이라도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믿으려고 하지는 않고 표징만 요구하는 바리사이들의 태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창세기 28장에 나오는 야곱의 서원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저와 함께 계시면서 제가 가는 이 길에서 저를 지켜 주시고, 저에게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마련해 주시며, 제가 무사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해 주신다면, 주님께서는 저의 하느님이 되시고, 제가 기념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은 하느님의 집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께서 주시는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당신께 바치겠습니다."
(창세 28,20-22)
그런데 야곱이 그런 서원을 하기 전에 이미 하느님께서 먼저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나는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며 이사악의 하느님인 주님이다.
나는 네가 누워 있는 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겠다.
네 후손은 땅의 먼지처럼 많아지고, 너는 서쪽과 동쪽 또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 것이다.
땅의 모든 종족들이 너와 네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고,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오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않겠다."
(창세 28,13-15)
따라서 야곱은 거창하게 서원을 할 필요가 없었고, 그냥 “감사합니다.” 라고 한 마디만 해도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야곱의 서원은 아직 믿음이 초보 단계에 있었던 구약시대의 모습인데, 오늘날의 우리도 그런 식으로 기도할 때가 많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야곱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처럼 하느님(예수님)의 사랑과 자비는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않는 무조건적인 사랑과 자비입니다.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호소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요한 15,9)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당신의 사랑 안에서 사는 것, 그것뿐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예수님)께 무엇인가를 청하려면 조건 같은 것은 붙이지 말고 그냥 단순하게 청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우리가 청하는 그것이 당신 뜻에 합당한 것이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그것을 틀림없이 주시고, 당신 뜻에 합당하지 않으면 대단한 조건을 붙인다고 해도 주시지 않습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의 자녀다운 품위있는 삶 - 인내, 겸손, 지혜>
오늘은 제주도 성지 순례 여정의 첫날입니다.
이렇게 수도형제와 함께 여행길에 오르기는 수도원 입회 후 40년만에 처음입니다.
감개무량합니다.
흡사 산티아고 순례 여정의 연장처럼 느껴집니다.
미사준비 등 만반의 준비에 수도형제와 함께 하니 미니 이동 수도원이 된 듯합니다.
원래는 휴가중 여행이지만 여행의 성격을 격상시켜 '제주도 성지 순례 여정'이라 명명했습니다.
잘 들여다 보면 전국 곳곳에 순교 성지들이 산재해 있어 전 국토가 성지처럼 생각되었고 제주도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제주도 순례 여정중 방문할 곳을 일별하던 중 저절로 나온 찬탄을 잊지 못합니다.
“아, 제주도는 보물섬이구나!”
정말 없는 것이 없다할 정도로 골고루 갖춘 아름다운 섬임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두 차례의 피정 지도에 이어 제 생애 세 번째 방문이지만 늘 새로운 느낌이 드는 보물섬, 제주도입니다.
바로 제주도 보물섬처럼 가톨릭 교회의 참 자랑스런 보물이 성인들입니다.
참 다양한 아름다운 품위의 보물같은 성인들이요 끊임없이 우리 삶의 좌표가, 희망의 표징, 회개의 표징, 구원의 표징이 되는 참 좋은 보물같은 성인들입니다.
오늘은 9세기 그리스의 테살로니카 출신의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테디오 주교 두 형제 기념일입니다.
성 메테디오는 성 치릴로보다 12세 위의 형이며, 동생 성 치릴로가 42세까지 사신 반면, 형 성 메테디오는 70세까지 사셨습니다.
두 형제 성인들 모두 간단히 요약할 수 없는 주님 사랑에 참으로 복잡 다단한, 치열하고 가열찬 백절불굴의 삶에 빛나는 업적은 그대로 살아 있는 순교적 삶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입니다.
‘슬라브의 사도들’로 불리는 두 형제 성인들은 모라비아, 보헤미아, 불가리아를 복음화했고,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슬라브의 사도들’이라는 회칙을 통해 성 베네딕도와 함께 두 형제 성인을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습니다.
이어 교황은 이분들이 이룬 복음의 성공적 토착화와 더불어 동서방 간의 교회일치를 위한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두 형제 성인들의 한결같은 파란만장한 시련과 인내의 삶의 역사를 대하면서 오늘 제1독서 야고보서 다음 말씀이 연상되었습니다.
“형제 여러분,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그 인내가 완전한 효력을 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면 모든 면에서 모자람 없이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새삼 오늘 기념하는 두 형제 성인뿐 아니라 모든 성인들이 이런 시련과 인내의 대가들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이런 시련과 믿음의 인내를 통해 완전하고 온전한 성인의 삶이요, 주님의 자녀다운 품위의 삶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대로 우리의 정주 영성이 목표하는 바, ‘시련-기쁨-믿음-인내’ 입니다.
사실 정주 영성에 항구한 베네딕도회 수도승들은 이런 면에서 모두 성인들입니다.
인내와 더불어 겸손과 지혜를 겸비한 성인들입니다.
인간 무지에 대한 답도 겸손과 지혜뿐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의 무지에 눈먼 바리사이들과 겸손과 지혜를 겸비한 예수님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정말 주님을 닮은 성인들은 한결같이 인내의 사람이자 참으로 자기를 알았던 겸손하고 지혜로운 분들이었습니다.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는 바리사이들의 무지에 주님은 깊이 탄식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새삼 시공을 초월한 무지한 이 세대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눈만 열리면 하늘의 표징들로 가득한 세상인데, 예수님 자신이 빛나는 하늘의 표징인데, 또 이 거룩한 미사보다 더 좋은 하늘의 표징도 없는데, 새삼 무슨 표징이 필요하겠는지요!
무지에 눈먼 바리사이들과 같은 이들의 회개가 절실한 오늘의 현실입니다.
참으로 ‘마음의 병’중 하나가 하느님을 모르는 무지에 기인한 완고한 마음임을 깨닫습니다.
복음의 마지막 대목에서 예수님의 지혜로운 분별력과 단호한 처신이 인상적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
아니다 싶으면 집착하지 않고 시간과 정력을 낭비함이 없이 지체없이 결단하여 홀연히, 홀가분하게 떠나는 예수님의 모습이 참 지혜롭고 멋집니다.
참으로 주님은 빛나는 분별력의 모범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청할 바 이런 분별력의 지혜라는 선물이요, 야고보 사도는 항구히 지혜의 은총을 청하라 하십니다.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지혜뿐임을 깨닫습니다.
“누구든지 지혜가 모자라면 하느님께 청하십시오.
그러면 받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너그럽게 베푸시고 나무라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의 참 적절한 유익한 조언입니다.
한결같은 인내의 믿음으로 지혜를 청하라는 사도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인내의 믿음과 겸손과 분별력의 지혜를 선사하시어 우리 모두 주님의 자녀다운 품위있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당신의 자비가 저에게 이르게 하소서.
그러면 제가 살리이다.
당신의 가르침이 저의 즐거움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119,77)
아멘.
- 성 베네딕토회 성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말씀의 키워드는 '표징'(sign)입니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마르 8,11)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치유와 구마, 빵을 많게 하신 기적들로 하느님 나라의 표징을 넘치게 보여주셨건만 그들에겐 아직 부족한가 봅니다.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마르 8,12)
예수님께서 많이 안타까워하십니다.
완고하게 닫힌 그들 마음은 과연 무엇으로 열릴까요?
고통 속에 신음하며 살다가 빛을 만난 이들과 함께 경축하고 기뻐하기에도 모자라건만, 자기들이 원하는 표징이 아닌 다음에야 결코 믿을 수 없다고 버티니 도무지 그들을 수긍하게 만들 재간이 없습니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마르 8,12)
불신을 선택한 이들에게 선고가 내려집니다.
믿지 않는 이들은 자기들 눈앞에서 죽은 이가 되살아난다 해도 꿈쩍도 안할 겁니다.
어떠한 표징도 그들에게는 표징이 아닐 것이니까요.
"그들을 버려두신 채"
(마르 8,13)
약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한없이 따뜻하고 자애로우신 예수님께서 좀 낯선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사람들을 뒤에 버려두고 떠나신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과연 어떤 표징을 원한 걸까요?
아니, 우리는 삶에서 어떤 표징을 바랄까요?
그들처럼 우리도 현세적 견지에서 복잡한 일의 해결이나 풍요한 재물, 안위나 평안, 안정과 명예 등의 표징으로 주님과 내 믿음을 거래하고 싶어하지는 않는지요?
우리가 바리사이들처럼 입맛에 맞는 표징만을 주님께 요구한다면 결국 주님의 부재밖에 남는 것이 없을 겁니다.
햇살만 가득 내리쬐는 꽃길에서는 주님이 보이지 않을 테니까요.
그러니 어쩌면 오히려 진짜 표징은 '고통'이 아닐까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표징과 일치하는 유일한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복음 환호송)
그래서 복음 환호송의 이 말씀이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서는, 자기를 버리지 않고서는, 죽음에 이르는 사랑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 갈 수 없다고 들립니다.
제1독서는 시련과 구원의 상관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다시 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야고 1,2-3)
세상은 고통과 시련을 악으로 치부해 회피하거나 외면하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께 나아가는 값진 도구로 받아들입니다.
고통과 시련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일치함으로써 그분과 함께 부활하리라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고 희망이니까요.
"고통을 겪어도 저는 마땅하옵니다."
(화답송)
시편 저자의 이 표현은 "나는 그래도 싸다"는 식의 자포자기나 자기비하가 아닙니다.
또 고통에 대해서 "왜 하필 내게?"라는 부질없는 물음도 아니지요.
그저 힘을 빼고 "그게 무엇이어도 당신이 주신다면 저는 괜찮습니다" 하는 수용적 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 겸손은 고통이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주님께 이르는 통로라고 자각하는 데서 나옵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 모두는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지울 수 없는 표징을 매일 마주합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러니 고통이 우리를 비켜가지 않고 자꾸만 찔러대고 건드린다면 오히려 기뻐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진짜 표징을 직면하는 제 길을 가고 있다는 뜻이니까요.
실상 고통과 시련을 통해 우리 믿음에 인내가 싹트고 자라서 구원에 이르는 다리가 엮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 구미에 맞는 곳에서 표징 찾기를 멈추고 진짜 표징을 향해 돌아서야 합니다.
그곳에는 주님이 반드시 계십니다!
오늘 내 앞에 놓인 십자가를 깊이 바라보며 주님을 만나시길 축원합니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병원에 계신 형제님을 위해서 병자성사를 다녀왔습니다.
형제님을 만나기 위해서 3번의 문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병원 입구에서 백신카드를 보여주고, 열을 측정했습니다.
병원에 들어가서는 신분증을 보여주고, 방문카드를 받았습니다.
병실에 들어가서는 장갑을 끼고, 마스크를 2장 쓰고, 보안경까지 썼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병실에 누워있는 형제님을 만났습니다.
형제님을 만나기 위해서 3번의 문을 통과하는 것은, 장갑과 마스크 그리고 보안경까지 쓰는 것은 저를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면역력이 약한 형제님을 위한 보호조치였습니다.
형제님이 건강을 회복해서 밝은 모습으로 만날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도 죄와 악에 물들어서 하느님과 멀어지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병원에 누워있던 형제님이 저의 기도를 받았던 것처럼 우리도 온전한 마음과 정성으로 주님의 자비와 사랑을 청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신앙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사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40일간 단식하셨을 때입니다.
사탄은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십시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높은데서 뛰어내려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바라는 사탄의 요구를 거절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하느님을 시험해서는 안 된다."
백인대장은 예수님께 아무런 표징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보시고 백인대장의 종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딸을 고쳐 주셨습니다.
하혈하던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표징이라는 조건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온전한 믿음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신앙인이 가야 할 길을 이야기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그 인내가 완전한 효력을 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면 모든 면에서 모자람 없이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죽음에 자유롭지 못한 우리입니다.
사실 역사를 보면 죽음을 이겨내기 위한 노력을 사람들이 얼마나 기울였는지를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진시황제의 불로초만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오만가지 방법을 사용해서 죽음에서 벗어나려고 했습니다.
젊은 피의 수혈, 영약, 칼로리 섭취 제한, 채식, 마법의 혈청, 불가리아 요구르트, DHA 등등….
이런 노력이 실제로 평균 수명을 높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이의 수명이 늘어난 것은 아닙니다.
뜻밖의 이른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도 정말 많습니다.
19세기 실증주의 철학자 오귀스트 콩트는 오래 살기 위해 엄격한 생활 수칙을 정하고 이를 철저하게 따랐습니다.
담배, 커피, 술 등을 포함해서 자극적인 음식을 삼갔고 식사량을 제한했습니다.
조금이라도 건강에 지장을 주는 것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콩트는 몇 세까지 살았을까요?
이토록 애를 쓰고서도 59세에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는 죽음 안에서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죽음을 지배하고 계신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인정하며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삶이 필요합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이 표징의 요구 전에 예수님께서는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사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빵의 기적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은 예수님의 모든 기적을 단순히 사기꾼이 보여주는 요술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보고서도 믿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님에 대해 믿기 싫어하는 불신과 악의를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면 예수님의 말씀만으로도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을 구원하는 표징을 외면하는 이 세대에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보여봤자 그들의 악한 마음만 더 커질 뿐 이로운 것이 없었겠지요.
그래서 그 자리를 떠나셨던 것입니다.
죽음을 지배하는 전지전능하신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믿음이 주님의 말씀 안에서 놀라운 표징을 발견하게 할 것입니다.
오늘 독서의 야고보 사도의 말씀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그리하여 모든 면에서 모자람 없이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야고 1,3.4)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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