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산천을 주유했던 황진이가 잠시 머물렀던 나주
조선시대의 여자들은 조선의 산천을 마음대로 답사했을까? 아니다. 기녀나 일부분의 여자들을 제외하고는 그가 사는 곳 조차 마음대로 다닐 수 없는 것이 여자들의 운명이었다. 그러나 자기의 운명을 박차고 이 나라 산천을 주유했던 사람이 있었고 그가 바로 개성 사람인
황진이었다.
"眞娘(황진이)은 개성 장님의 딸이다. 성품이 얽매이지 않아서 남자 같았다. 거문고를 잘 탔고 노래를 잘했다. 일찍이 산수山水를 유람하면서 풍악楓嶽(금강산)에서 태백산과 지리산을 지나 금성(나주)에 오니, 고을 원이 절도사와 함께 잔치를 벌이는데, 풍악과 기생이 좌석에 가득하였다. 황진이는 헤어진 옷에다 때 묻은 얼굴로 바로 그 좌석에 끼어 앉아 태연스레 이를 잡으며 노래하고 거문고를 타되 조금도 부끄러운 기색이 없으니 여러 기생들이 기가 죽었다.
평생에 화담의 사람됨을 사모하였다. 반드시 거문고와 술을 가지고 화담의 농막에 가서 노래하고 거문고를 타면서 즐긴 다음에 떠나갔다. 매양 말하기를, '지족선사知足禪師가 30년을 수양했으나 내가 그의 지조를 꺾었다. 오직 화담선생은 여러 해를 가깝게 지냈지만 끝내 관계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성인이다.'
하였다. 죽을 무렵에 집사람에게 말하기를 “ 출상出喪 할 때에 제발 곡하지 말고 풍악을 잡혀서 인도하라."고 하였다. 지금 노래하는 자도 그가 지은 노래를 능히 부르니 또한 이상한 사람이었다."
허균이 지은 <성옹지소록性翁識小錄> 하 권에 실린 글이다.
황진이의 자취가 남아 있는 나주는 영산강의 중류와 삼남대로의 길목에서 발달한 도시로 전라도의 역사에서 중요한 도시 중의 한 곳이다.
그 나주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행사가 나주 정미소에서 있었다. 조촐하지만 의미 있는 행사였다.
전주와 나주에서 따온 ‘전라도’라는 이름도 그렇지만 오랜 역사 속에서 수많은 역사문화 자산이 많은 지역이 나주라는 도시다.
반남 고분군, 복암리 고분군을 통해서 보는 삼국시대의 유물과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과 후백제의 창업주인 견훤, 개혁사상가인 삼봉 정도전의 유배지. 조선의 천재시인인 김시습이 머문 곳이 나주였고, 기축옥사의 최대 피해자인 이발, 백호 임제의 고향이자 다산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의 이야기가 서려 있는 곳이다.
그리고 조선의 빼어난 시인 황진이의 발길이 머문 곳이 나주였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당시에는 나주목사 민종열과 동학농민군들이 첨예하게 맞섰으며, 일제시대에는 나주 학생운동이 일어났던 곳이다.
그때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뒤라서 영산포 홍어와 나주 곰탕이 도시의 얼굴로 알려진 나주는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고 있다. 전라도에서 전주 다음으로 컸던 고을 나주의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 것인가, 많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