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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라제프카 주둔 독립군 부대
독립군 부대명 | 수라제프카에 주둔한 것으로 추정되는 독립군 주요 인물 (최소 1,470명 이상 ~ 2,000여명 주둔) |
사할린 의용대 (니항부대) | 박윤천(박일리야) 등 400여명 이상 추정 임호(林虎), 김완욱, 송병렬(혹은 손병렬), 김학, 김제문, 채국성, 이다물, 이와실리, 고창률, 고명수, 채세윤 기타 독립군 일부도 편입됨 |
의군부 군대 | 허재욱(이명 : 허영장, 허근, 허영진), 김재규, 김학, 이해룡(이범준), 강응렬, 김석종, 이춘섭, 남해룡, 안알렉산드라 |
이만 군대 | 김표도르, 김덕보(金德甫), 김연준(金鍊俊), 박공서(박개서), 김하경 |
독립단 군대 | 박그레고리(박그리고리), 최빠싸, 전응호 |
다반 부대 | 최니꼴라이, 이와실리, 박춘봉 |
간도국민회군 일부 | (안무를 제외한) 김희영, 정일무, 김광(金匡), 김규찬(金奎燦), 강석진 등 약 수십여명 이상 |
대한독립군 일부 | (홍범도를 제외한) 수백여명 |
군무도독부 군대 일부 | 000 부대 일부 (군무도독부는 총군부에서 다시 대한독립군단으로 통합됨) |
연해주 독립군 | 최성학(최파벨) |
(이르쿠츠크) 합동민족연대 | (자유시에서 수라제프카로 이동한) 안경억, 신춘식 |
소속 불명확, 북로군정서 등 추정 | 김동한(일제밀정 활동), 이병채, 이택(李澤), 이우석, 김성우, 전영항, 함빠샤, 한권길, 박니콜라이, 황륜 |
참고자료 :
1921. 5. 2. 경 박일리야의 보고서 (러시아정부 문서 РГВА,ф.221,оп.1,д.376,л.73.)에서 사할린부대 총원 2,000명이라고 보고함
참고자료 : 동아일보 1923년 6월 24일자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자료총서5 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 홍범도편』, 1995, 99쪽 김승빈저 ‘김승빈의 편지’
독립군이 순국한 수라제프카 마을의 오늘날 모습
공격부대
공격 부대명 | 수라제프카를 공격한 주요 인물 |
한인(고려인) 보병 자유대대 | 고려군정의회 총사령관 까란다리시비리 대대장 오하묵, 최고려, 김하석 등 500명 미만 ‘얼마우재’라고 불리우는 20세 내외의 고려인 부대가 주력 |
적군(赤軍) 29연대 | 29연대장 말라호프 등 약 1,000여명 ※1920. 6. 28. 일경 극동공화국 군총사령관 : 블류헤르, 2군단장 : 셰르쇼프, 4사단장 : 파데예프, 12여단(러시아측은 2여단이라고 일부 기록됨) |
장갑열차 부대 | (자유시 남동쪽의) 보츠카료프카 주둔 장갑열차 부대 (자유시 북서쪽의) 쉬마노프스크 주둔 장갑열차 부대 |
장갑차 | 2대 이상 경전차(혹은 장갑차)가 공격함 |
기병 부대 | 기병중대는 남쪽 바르다곤 방향에서 북쪽의 수라제프카 공격 |
군함(장갑함) 부대 | 블라가베셴스크, 제야시 일대를 운행하며 국경경비 등을 하던 군함인 『3호 장갑함』 등이 바르다곤 방향에서 상류 쪽 섬과 수라제프카 항구를 공격 |
(※대한혁명군측의 성토문에서는 기습 공격한 부대가 대략 1만여명이라고 하고, 러시아측 일부 자료는 8개연대 병력 정도라는 주장도 있다.)
공격 반대자들
공격을 반대한 부대들 | (자유시 시내에 주둔중) 사할린부대의 무장해제 및 공격을 반대한 주요 인물 |
합동민족연대 소속 고려인 보병대대 | •자유시에 머무르고 있던 이르쿠츠크에서 온 합동민족연대 소속 고려인 부대 약 600여명은 수라제프카의 사할린부대 공격을 반대하다가 지휘부가 다수 투옥됨 |
간도•연해주에서 온 독립군 부대 | ① 홍범도•안무 부대는 자유시에 머무르며 공격 병력 지원 안함 ② 총사령관 까란다리시비리와 최고려, 오하묵, 김하석 등은 수라제프카의 사할린 군대를 무장해제하고 공격하는 문제를 자유시에 집결한 3천명 이상의 독립군을 모두 집결시켜 여러 차례 토의하였으나, 오하묵•최고려•김하석•최호림의 (고려인)자유대대를 제외한 간도•연해주•이르쿠츠크 독립군들이 모두 적극 반대하였고 오히려 분란을 일으킨 자유대대의 최고려•오하묵•김하석을 제거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 다수였다. 결국 1921. 6. 28. 새벽부터 고려인 보병 자유대대, 러시아 적군(赤軍) 제29연대, 장갑열차부대•장갑차•군함(장갑함)•기병중대를 동원하여 기습공격의 형태로 공격이 일어났다. |
안경억, 신춘식, 엄준 등 |
이르쿠츠크파의 일방적 주장
6월 28일경
이르쿠츠크파가 자화자찬 문건인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에서 주장하기를
한밤중인 오전 1시경에 자유시 수비대, 제 29연대와 교섭하여 4개 중대를 우선 출동시켜 수라제프카에 파견하여 사할린 군대의 동정을 정탐케하고 그 뒤를 이어 특립부원을 파견한 후 오전 4시경에 이르러 수라제프카 방면에서 몇십발의 총성이 유하였음으로 즉시 까란다리시비리와 오홀라는 말을 채찍질하며 달리기를 재촉하여 수라제프카로 향하던 차 중로에서 특립부원을 봉착하여 총성의 연유를 문한 즉 즉 29연대로 파견된 군인이 사할린 군대 보초선에 임박하였다하여 사할린부대 보초병이 사격을 개시함으로 해 29연대는 불시에 사격을 받고 곧 퇴각하여 후산으로 피하였다고 한다.
고려혁명군정의회 총사령관 까란다리시비리
그때 형편은 제29연대에서 제 12여단을 경유하여 제2군단에 사할린 군대에 대한 무장해제의 이유를 보고하였는 바 그 회보도 기대하며 또는 이미 청구한 장갑차의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중
즉 오전 5시경으로부터 오후 4시까지 그동안 제 29연대장은 사할린 군대 본부에 가서 조정적 권고 다시 말하면 무장해제를 위력집행에 불지(不至)함을 권고하였으나 사할린 군대는 마침내 항거하려고 고집하다가 무장해제를 실행하려는 동정을 보고는
다시 요구하되 3시간의 여유를 줄 것 같으면 장교회를 열어 원만히 해결하겠노라 함으로 승인하였으나 약정한 시간을 경과하고도 여전히 응종치 아니하고
그다음 1시간 반의 여유를 요구함으로 역시 승낙하였으나 여전 무소식이였고,
그후는 1시간 또는 30분, 15분 등 3차의 시간여유를 요구대로 승낙하였으나 조정적 동정이 없음으로 급기 내용을 수탐하니 그동안 시간 연기는 다른 이유가 아니라 전투준비로 사방에 참호를 설치하고 각각 매복하였으며 혹은 착수중에 있는 현상이라
그래서 시간의 여유를 줄 여지도 없음으로 바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것이 세(勢) 부득이에 최후 위력까지 실시하였으나 무기사용에 될 수 있는 데까지는 사상이 없도록 주의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르쿠츠크파•공격 부대가 허위 주장하는 사할린 의용대의 저항
이에서 사할린 군대는 이어 응전하여 수시를 교전하다가 결국은 강약의 부적됨을 시각하고 혹은 백기를 거하여 항의(降意)를 시하며 혹은 궤산(潰散)하여 도거함으로 정전하고 포로에 착수하여 무장을 해제하니
사망자 36명,
포로된 자 864명,
병자로 불구한 자 15명,
박일리야가 전투중에 영솔하고 도망한 자 34명(수라제프카 박응팔의 증거)
그외 59명은 행방불명이고
무장해제를 집행하는 군대에는 군정의회군대에 사자 1명, 제29연대에 사자 1명일 뿐이였었다.
(※ 최고려는 나중에 자서전에서 사할린 의용대 측에서 약 100여명이 사망한 것으로 이야기하였다.
러시아측에서는 공격군 측의 사망자 1명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이르쿠츠크파의 이지택•김낙현•최호림 등은 이부분에서도 공격군의 사망자를 허위 주장하였기에 또 헛소리 한 것으로 간주하여 생략한다.)
참고
임호의 보고
(출처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임호는 니항군대 조직 초로부터 자유시 무장해제 당시까지 장교로 근무하였음으로 니항군대의 전후역사는 상세함으로써 박일리야가 군대에 대한 지휘와 급기 군정의회에 대한 항거의 원인 또는 실지 악의적 사위에 대한 사실보고는 아래와 같다.
1920년 10월경에 니항군대가 께르비 촌으로서 자유시에 도착하여 박일리야는 동월 중순경에 치타(혹은 베르흐네우진스크)에 왕하였다가 동년 12월경에 자유시에 와서 니항 군인을 회집하고 치타에 왕하였던 보고가 있으되 자기가 치타에 갔을 때 동양부가 있는 바 당국자로는 박애, 계봉우, 장도정, 김진 제씨가 주권을 장하였고 베르흐네우진스크에는 김립 선생이 동아총국을 조직하여 지금 대활동을 시하며 또는 모스크바로서 박진순씨가 우리 한국 혁명대에 용할 작정으로 금 두바권을 상해정부에 운송하였다 하고 그나마 지금은 치타 동무에게로 금이 기하(幾何)바권으로 래한다더라 한 후 이어 말하기를 그러면 우리 군대도 치타 한인부를 경유하여 상해정부명령에 복종하여야 될 터이니 일반 군인들은 이와같이 알 것이며 나도 치타 한인부의 지도를 따라 진행할터이라 하니 그때 어떤 군인의 의문이 있는 바 그러면 대한국민의회라는 기관에 대하여는 우리가 여하한 기관으로 볼 것인가 한즉 이에 대한
박일리야 대답이 대한국민의회는 몇 명의 개인이 훼방놓는 것에 불과한 것이며 또는 몇 명의 개인이 없어지는 시일이면 그 기관은 스스로 소멸될 것이니 두려워 할만한 것 없으며 더욱히 그 기관의 조처는 치타 한인부에서 담당한 것이라 하였고 그후 사할린 군대가 마자나바에 주둔하였을 때 식료곤란으로 군대를 대부대로 대략 6차를 부근 로인촌락에 이둔시켰고 소부대로 23차를 이둔시켰음으로 전후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아 다님으로 인하여 다수 군인은 연대본부에 불평을 누차 제기하였다.
군인이 불평을 제기할 때마다 박일리야는 치타 한인부에 직통 전보로 번번히 왕복이 있는 바 한인부의 소위 회보는 일개 군대의 현상을 유지하라 혹은 반개월만 혹은 며칠만 이와 같이 연기하여 고려군정의회의 래당하는 시기까지 계속하였으며 한결같이 군대에 대한 선론은 우리 군대가 하바로프스크 지대를 나가고야 상해정부의 원조를 받아 제 공급상 원만을 득할 것이니 원동으로 나갈 준비가 뜻대로 되는 동안은 배고픔과 추위를 인내하라 하였으며 사할린 군대가 수라제프카로 이둔할 때 군인 및 장교 총수가 1008명이고 자기는 무기 위원장으로 근무하였다 함.
(※이상은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에서 인용함)
공격 개시전 상황
http://rgvarchive.ru (러시아정부 문서)
『Доклад представителей ряда областных корейских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их организаций в ИККИ о расправе с отрядом корейских партизан. [Октябрь] 1921 г.』, Доклад представителей ряда областных корейских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их организаций в ИККИ о расправе с отрядом корейских партизан. [Октябрь] 1921 г. // РГАСПИ. Ф. 495. Оп. 135. Д. 28. Л. 6 -9 об. Подлинник, машинопись, подписи-автографы. (러시아정부문서 열람 사이트 http://docs.historyrussia.org/ru/nodes/48197)
등등을 참고함
사할린 의용대의 대략적인 요구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사할린 의용대의 대략적인 요구조건 ① 사할린 의용대와 다툼이 있는 4명 제거된 이후에 복종하겠다. ② 2군단장 셰르쇼프에게만 복종하겠다. ③ 위의 2가지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절대 무장해제를 하지 않겠다. |
이에 대하여
2군단장 셰르쇼프가 4사단장 파데예프, 제29연대장 말라호프, 까란다리시비리 등에 내린 명령 ① 2군단장 셰르쇼프의 이름으로 폭도들과 대화를 시작할 것 ② 부대를 동원해 반군과 대치하면서 그들을 위협하고 장갑부대원들을 집결시킬 것 ③ 2번째 항이 실행되고, 그래도 반도들이 저항하면 그들에게 포사격을 가할 것 ④ 무슨 일이 있어도 반란을 완전히 진압할 것 ⑤ 장갑열차, 기병대, 장갑함, 장갑차 등 동원 |
이에 따라 수라제프카 지역을 포위한 부대는 여러 방향에서 공격을 감행하게 된다.
수라제프카 구역에 대한 포위망 ① 기병 중대는 수라제프카 아래쪽의 바르다곤 방향에서 북쪽인 수라제프카 지역 공격 ② 보츠카료프카에서 출발한 장갑열차는 남쪽 철교에서 북쪽의 수라제프카 공격 ③ 쉬마노프스크에서 출발한 장갑열차는 북쪽 자유시에서 남쪽의 수라제프카 공격 ④ 장갑함은 남쪽 철교부근에서 제야강을 따라 북쪽의 수라제프카 항구 쪽으로 공격 ⑤ 500명의 까란다리시비리 부대(자유대대)는 자유시에서 남쪽인 수라제프카 마을 북쪽의 도축장 부근으로 공격 (이 공격방향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⑥ 고려인마을 방향(서쪽)에서 동쪽인 수라제프카 지역 공격은 29연대 병력 약 1,000여명이 공격 (이 공격방향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
기습 공격 관련 참고 자료
러시아 정부의 문서들인 (РГВА,ф.170,оп.1,д.122,лл.14-15) (РГВА,ф.170,оп.1,д.122,лл.17.) (ГАСПИ,ф.495, оп.135, д.61, лл.7-10 극동공화국 총사령관 블류헤르, 군정의회 위원 포고딘이 시베리아 군정혁명의회에 보내는 보고서) 1922. 4. 14. 자 볼셰비키 군대 문서 83호, Дальневосточной республики в Реввоенсовет Сибири 작성, 제목: 『ДОКЛАД по ДЕЛУ О РАЗОРУЖЕНИИ КОРЕЙСКИХ ПАРТИЗАНСКИХ ОТРЯДОВ В АМУРСКОЙ ОБЛАСТИ』 В ИЮНЕ 1921 года 김동한, 김아파니시가 1921. 10. 28. 자로 트로츠키에게 보낸 편지. Док. № 67 제목 : 『Письмо Ким Дон Хана и Кима Афанасия Л.Д. Троцкомуоб «амурском инциденте»1』 독립신문 1922. 5. 27. 일자 등을 참고한 공격 순서 |
1921. 6. 28. 의 극동공화국 군사령관 : 블류헤르(Блюхер, Василий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극동공화국(원동공화국) 군사령관 재직 : 1921. 6. 26.일경부터 1922. 7. 14. 일경까지 |
극동공화국 수상 크라스나쇼코프 (상해파 지지)
2군단장 셰르쇼프
극동공화국 군부 총사령관 블류헤르
1921년경 자유시 참변 무렵의 자유시 지도
수라제프카 지역 공격 순서
① 까란다리시비리와 자유대대 측에서는 사할린부대의 전투력을 두려워하여 1921. 6. 27. 밤부터 무력을 사용한 기습공격의 방법으로 사할린 의용대의 무장해제를 시도한다.
1921. 6. 28. 오전 1시경에 자유시 수비대와 제29연대에서 4개 중대를 우선 출동시켜 수라제프카 지역의 사할린 의용대를 정탐케 하였고, 그 뒤에 특립부원을 수라제프카로 파견함.
오전 4시경 기병 60여명이 수라제프카에 접근하여 사격 출동이 발생하였다 (독립신문 1922. 5. 27. 자)
오전 5시경부터 제29연대장이 사할린 군대 본부를 방문하여 무장해제를 요구함(『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72쪽), 장갑차 등의 도착을 기다림
까란다리시비리 측에서 사할린 의용대의 무장해제를 요구하는 사절을 파견함(김승빈 주장)
1921. 6. 28. 사할린 의용대 1천여명이 먼저 고려혁명군정의회를 공격하기 위해 북쪽인 자유시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조작함. (극동공화국 군사령관 블류헤르 등 주장)
1920년대 장갑차
1920년대 장갑열차
② 12시경 사할린 의용대를 무장 해제시키기 위해 2대의 장갑차가 수라제프카로 접근
14시경 러시아군 29연대 등 공격 개시 (15시경 공격했다는 기록도 있다.)
남쪽에서 장갑열차 도착, 사할린 의용대에게 10분 정도의 항복할 시간을 줌,
사할린 의용대는 무장해제 명령 등에 대처하도록 3시간 정도의 부대 전체 회의 시간을 요구함
장갑열차 출현에 박그레고리가 무기를 버리겠다는 의사를 표명
③ 14시 20분경 까란다리시비리 부대 500명이 북쪽에서 도축장 방향으로 공격 시작
14시 30분쯤 사할린 의용대(폭도) 먼저 사격하여 곧 반격이 시작되었다고 주장
폭도들은 탄환이 모두 떨어질 때까지 대항하다가 항복했다고 조작함
④ 수라제프카 기차역 부근에는 29연대 1,000여명의 병력이 동쪽으로 공격
전 지역에서 기관총과 대포로 공격
⑤ 3호 장갑함이 제야강 하류방향에서 북쪽 수라제프카 항구 쪽을 공격
기병중대는 (철교부근) 바르다곤에서 북쪽의 수라제프카로 올라오는 도로상에서부터 공격
1920년대의 아무르강 경비함
⑥ 15시경 자유시에서 남쪽으로 공격하던 까란다리시비리 부대의 공격이 지연됨
15시 30분경 수라제프카 주택지역으로 공격부대 진입
아직도 수라제프카 구역에는 1921년도 건물이 남아 있다.
⑦ 장갑차가 수라제프카 기차역 접근
(쉬마노프스크에서 장갑열차가 이때 쯤 도착하여 북쪽에서 남쪽 수라제프카 지역을
공격했다는 소리도 있다)
⑧ 사할린 의용대가 수라제프카 주택지역으로 대피
(18시경 공격 부대가 수라제프카 (주택)지역 도달했다는 기록도 있다)
⑨ 16시경부터 수라제프카 주택지역의 사할린 의용대 항복 시작
일부는 제방쪽으로 탈출, 박일리야는 공격부대의 지휘부에 사격중지 요청
17시 15분경 사할린부대 제4중대 항복후 무장 해제됨
제야강 제방과 섬 부근. 철교 너머가 바르다곤 마을이다.
⑩ 사할린부대는 3방향으로 탈출(제야강섬, 남쪽 바르다곤 방향, 부대본부는 묘지방향)
20시 10분경 (자유시에서 남쪽으로) 쉬마노프스크에서 제2장갑열차 도착
20시 17분경 수라제프카와 제방사이의 나루터(수라제프카 항구)까지 공격부대 도달
묘지 부근으로 탈출한 사할린 부대 본부와 약 300여명 항복
바르다곤 방향으로는 약 2개 중대병력이 도주하였다고 함
⑪ 22시경 제야강 섬에 있던 독립군에게 기관총과 대포 사격
23시경 섬에 있던 독립군 약 300여명 항복, 포로들은 까란다리시비리 부대에 인계
⑫ 포로들은 밤에 3곳에 분산 배치(29연대 본부, 제2여단 본부, 장갑차 부근)
⑬ 남쪽으로 탈출한 독립군 일부가 기병중대의 공격으로 다수 제야강에 수장됨
⑭ 6월 29일 까란다리시비리 부대가 포로 등의 이동을 계획
⑮ 6월 29일 까란다리시비리 부대가 수라제프카 마을에서 수색 및 폭력 행사
까란다리시비리가 사할린 의용대에게서 압수한 무기를 러시아군이 몰수하자 항의함
⑯ 러시아군 29연대의 한 개 중대가 까란다리시비리 부대의 행패를 저지함
첫댓글 공격부대 중에 한인 고려인 보병부대가 있군요 공격반대자들 중에 고려인 부대가 있고 간도, 연해주에서 온 독립군 부대가 있군요
예. 맞습니다. 참사가 일어나자 자유시에 모인 대부분의 독립군이 동요하여, 부대가 와해되기 시작한 것으로 나옵니다.
만주, 연해주로 대부분 돌아가고, 심지어 이르쿠츠크로 갔던 사람들도 나중에 귀환하거나.. .
러시아령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제 생각에는 만주로 돌오온 안무장군 같은 분은 진정한 독립운동가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