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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야고보서의 말씀 1,12-18>
12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13 유혹을 받을 때에 “나는 하느님께 유혹을 받고 있다.” 하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의 유혹을 받으실 분도 아니시고, 또 아무도 유혹하지 않으십니다.
14 사람은 저마다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꼬임에 넘어가는 바람에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15 그리고 욕망은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다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16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착각하지 마십시오.
17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옵니다.
빛의 아버지에게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분께는 변화도 없고 변동에 따른 그림자도 없습니다.
18 하느님께서는 뜻을 정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시어, 우리가 당신의 피조물 가운데 이를테면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 복음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8,14-21>
그때에
14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밖에 없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하고 분부하셨다.
16 그러자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렸다.
17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18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19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 빵 조각을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열둘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0 “빵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에는, 빵 조각을 몇 바구니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일곱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달마누카 지방에서 바리사이들과 표징에 대한 논쟁이 있은 후에, 배를 타고 건너편 벳사이다로 건너가던 중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 밖에 없었다.
~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렸다.'
(마르 8,14-16)
제자들은 “빵이 없다”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러나 분명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마르 8,14)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한 개의 빵은 대체 어떤 빵일까?
사실 이 빵은 마르타에게 “실상 필요한 것은 한가지 뿐”(루카 10,42)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오직 필요한 하나인 빵’입니다.
그것은 더 이상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는, ‘전부인 하나인 빵’ 입니다.
비록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졌다하더라도 이 ‘하나’를 가지지 못하면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것이 되고 마는, 그러나 이 '한 개'만 가지게 되면 모든 것을 가지는 것이 되는 그런 ‘빵’입니다.
그렇습니다.
‘배’가 교회의 표상이라면, ‘빵’은 바로 예수님의 표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마르 8,15)
대체 바리사이와 헤로데의 누룩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누룩”은 그들의 삶의 방식을 일컫고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고, 남에게 보이기 위하여 행동하며, 잔치에 가면 윗자리에 앉으려 하고, 길에 나서면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이 스승이라 불러주기를 바라는 위선적인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요, 헤로데는 소유와 권력과 화려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바로 그러한 삶의 방식을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녀야 할 누룩은 무엇일까?
그것은 ‘말씀’이 아니고서야 무엇일까요?
비록 씨앗으로 뿌려지지만 육십 배, 백배의 열매를 맺을 그 ‘말씀의 누룩’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말씀이 우리의 모든 삶을 부풀리게 할 것입니다.
바로 이 ‘누룩인 말씀의 빵’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의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마르 8,17)
그리고 마지막 구절에서 거듭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마르 8,21)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깨닫다”(σινιετε)라는 단어는 ‘나란히 서다’, ‘함께(같이) 서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한 개의 빵”을 깨닫기 위해서는 항상 ‘말씀이신 우리 주님, 그리스도’ ‘곁에’ 그리스도와 ‘함께’ 서 있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 밖에 없었다.'
(마르 8,14)
주님!
실상 필요한 빵은 한 개면 충분합니다.
더 이상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는, 당신만이 오직 필요한 한 개의 빵입니다.
제게는 이미 당신이 있고, 당신만이 진정한 빵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져도 당신이 아니면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것일 뿐, 제게는 당신만이 전부입니다.
당신이 저의 주님이십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마음이 흔들릴 때>
어제 야고보서는 시련과 시험을 받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오늘은 유혹을 받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얘기하는데, 두 공통점은 그것들이 우리를 흔든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시련과 시험이 외부의 무엇이 나를 흔드는 것이라면, 유혹은 유혹자가 있긴 하지만 엄밀히 얘기하면 내부의 무엇, 곧 욕망이 있기에 유혹자가 나를 흔드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술을 싫어하면 술친구가 아무리 나를 유혹해도 유혹을 받지 않지요.
배가 이미 불러 식욕이 전혀 없으면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유혹이 되지 않고요.
물론 견물생심이란 말이 있고, 아담과 하와도 뱀이라는 유혹자가 과일을 보라고 하지 않았으면, 또 봤더라도 과일이 탐스럽지 않았다면 따먹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겠지만, 그럴지라도 욕구가 아예 없었으면
욕망이나 욕심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고 유혹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유혹을 받을 때 남 탓하지 말고 무엇보다도 하느님 탓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유혹을 받을 때에 '나는 하느님께 유혹을 받고 있다.' 하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무도 유혹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꼬임에 넘어가는 바람에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야고 1,13-14)
어쨋거나 우리 인간은 시련과 시험에 의해 믿음이 흔들리고, 욕망 때문에 유혹에 마음이 흔들리는 존재이고, 저도 지난 주에 말씀드렸듯이 미풍에도 흔들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어제도 아침에 일어나니 마음이 불안해지며 마음을 걷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비록 성체가 모셔져있지 않지만 기도방에 들어가 저의 흔들리는 마음을 주님께 그대로 열어보여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흔들리는 저를 붙잡아주신다는 느낌이 들고, 저도 주님을 꽉붙잡고 매달리게 되었고, 그래서 기도방을 나올 때는 주님과 제가 더 단단하게 하나된 느낌이 들었습니다.
사실 흔들리면 더 꽉 붙잡게 되지요.
나무에 올랐는데 밑에서 흔들면 떨어지지 않으려 오히려 더 꽉 붙잡잖아요?
시험과 시험이 나의 믿음을 흔들 때, 악마가 두려움과 불안을 이용하여 나의 마음을 흔들 때, 그때 우리는 베드로처럼 풍랑을 보다 물에 빠지지 말고 오히려 주님만 보고 주님을 더 꽉 붙잡아야 됨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는 오늘이 되어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말씀의 누룩을>
누룩은 부풀리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이스트나 베이킹 파우더와 같은 일종의 발효제입니다.
그래서 빵과 술을 만드는 원료로 사용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는 누룩과 비슷하다. 어떤 부인이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마태 13,33). 고 하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누룩에 비유하기도 하셨습니다.
누룩이 좋은 것에 들어가서 부풀리면 그만큼 좋은 것으로 부풀려질 것이고, 반대로 나쁜 것에 부풀려지면 나쁜 것이 그만큼 커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누룩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바리사이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고,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고, 잔치에 가면 맨 윗자리에 앉으려 하고 회당에서는 제일 높은 자리를 찾으며, 길에 나서면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이 스승이라 불러 주기를 바라는 사람들’(마태 23장 참조)이요,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율법 준수에만 구원이 있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노예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롭게 하고 자녀가 되도록 주어진 것입니다.
지나치게 엄격한 사람들은 선해 보이지만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자유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나치게 엄격함은 하느님의 선물이 아닙니다.
온순함이 선물입니다.
선함, 너그러움, 용서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헤로데는 구원을 소유와 지배, 권력의 화려함 속에서 찾았습니다.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렇다면 ‘바리사이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라’는 말은 그들의 완고한 마음, 사고방식, 행태에 물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4천 명이 넘는 많은 사람을 배부르게 먹게 해 주셨지만 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결코 빵의 기적을 베풀어주신 예수님의 참뜻을 알아들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필리피서 3장 7절에서 바오로 사도는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주님을 얻기 위하여 자신의 것을 모두 버린 바오로 사도가 부럽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나의 것을 버릴 수 있는 용기가 꼭 필요합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 안에 나도 모르게 자리하고 있는 바리사이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버려야 합니다.
바리사이, 헤로데의 누룩이란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삶의 자세, 잘못에 대해 벌주시고 나를 감시하시는 하느님으로 생각하는 시각, 재물에 대한 욕심, 부귀영화에 대한 동경, 기도는 하지 않으면서도 자동차에 십자가나 묵주를 매달고 있으면 하느님께서 보호해 주려니 생각하는 태도, 허영, 가식 등등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누룩은 버리고 하느님 말씀의 누룩을 부풀려야 하겠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가식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줄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말씀하시고 결국에는 빵의 기적에 관한 얘기를 상기시키시면서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르8,21) 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겠습니까?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느냐?” 아니면 “때가 되면 알리라.” 어떻게 받아들이든 능력의 예수님, 구원자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근심, 걱정에 싸여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마음과 마음이 통하기가 그렇게도 어려웠으니 우리와 주님 사이의 통교는 오죽하겠습니까?
주님과 깊은 만남에 이르는 길이 아직도 멀기만 합니다.
오늘 한 발 주님께로 다가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은 누구에게 먹고살 걱정을 없애시는가?>
오늘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라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5천 명과 4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하셨을 때 남은 빵의 양을 되새기시며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찾는 이는 빵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하게 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리스도를 찾는 이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께 빵을 달라고 청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은 영적인 ‘양식’, 곧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그래도 먹고 사는 게 중요하니 그것부터 해결되면 주님을 따르겠다고 말합니다.
물론 금강산도 식후경입니다.
그러나 금강산을 안내하는 사람이 굶기고 금강산을 구경시키겠습니까?
항상 순서가 바뀌어서 문제입니다.
밥에 대한 욕망은 탐욕을 자아내서 나를 더럽힙니다.
예수님은 그 욕망을 없애주시러 오신 분입니다.
물질적인 것은 갖는다고 욕망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더 배고프게 됩니다.
아이들은 내일 걱정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부모를 믿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밥걱정한다면 부모들은 서운할 것입니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세상에서 사는 법을 가르쳐주기 위해 밥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밥걱정하는 아이는 부모에게 그런 것을 배울 마음이 없습니다.
먼저 밥부터 달라고 합니다.
부모는 가르치려고 하는 것만 받아들이면 밥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합니다.
이런 일들이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서도 일어납니다.
식탐을 조절 못하는 아이는 훈육이 힘듭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에 ‘아이의 폭식을 제지 못하는 엄마’란 사연이 나왔습니다.
아이는 식탐을 절제하지 못하는데 엄마는 그 식탐을 제지하지 못합니다.
항상 웃는 표정으로 아이에게 모든 것을 허락합니다.
그 이유는 엄마가 엄마 없이 자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얼굴을 밝게 해야 했습니다.
자신을 키워주는 이들과 친구들마저 자신을 버리는 것이 두렵기에 항상 얼굴을 밝게 꾸미며 그들의 애정을 붙잡으려고 하였습니다.
엄마는 아이가 자신을 미워할까 봐 모든 것을 허락했던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는 아이에게 아무것도 가르칠 수 없습니다.
아이의 식탐을 먼저 없애주어야 무슨 가르침이라도 줄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식탐을 없애주어야 하는데 엄마는 이를 위해 미움받을 용기를 내야 합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 아이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세상에서 잘 살 수 있도록 키우는 것입니다.
아이의 배고픔은 엄마의 배고픔입니다.
식탐은 왜 오는 것일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사제이기에 모든 것을 ‘사랑의 부재에서 오는 헛헛함’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사랑으로 채워야 하는 것을 음식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tvN ‘엑소시스트’에 ‘식탐 폭발 어린아이가 된 우리 엄마’로 유튜브에 짧게 올라온 한 38세 어머니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물론 극단적인 예를 일반화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사랑의 부재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는 생각해 볼 수 있는 예일 것입니다.
그녀는 시도 때도 없이 두 살배기 아이처럼 응석을 부리고 먹는 것에 집착합니다.
그만 먹으라고 하는 제작진에게 주먹을 휘두르기까지 합니다.
그녀도 자신이 이렇게 된 이유를 압니다.
그 이유는 결혼한 첫날부터 아이 셋을 낳으면서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남편에게 구타를 당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도 분명 무슨 상처가 있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당연히 받아야 하는 사랑을 받지 못했을 때 오는 것은 헛헛함입니다.
그 이유는 사랑은 밥에 담겨오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부족하면 밥이 땅기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사랑을 찾지만 없습니다.
그래서 더 먹어보는 것입니다.
저는 식탐이 그래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아드님을 세상에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양식이신데 ‘영’(靈)이십니다.
하느님은 영이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우리 몸을 살게 하실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당신 말씀이신 성자를 육체와 결합하시어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육체를 입어 우리에게 오셨다는 말은 육체까지도 책임지시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는 방식은 항상 그렇습니다.
따라서 영적인 양식을 바라는 이들이 육체까지 걱정할 필요 없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밀떡과 포도주 안에 담겨 우리에게 오십니다.
절대 영으로만 오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육체가 먼저 만족하지 않으면 영적인 것은 배우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식탐에 찌든 아이처럼 육체적인 것만 걱정한다면 그 안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어떻게 깨우칠 수 있겠습니까?
위 예에서 아이는 엄마를 육체적으로만 배를 불려 줄 수 있는 대상으로 여깁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영적인 양식을 먹어 영혼을 건강하게 하려고 물질적인 것은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신 다음 수천 명을 먹이신 것입니다.
세상 걱정하는 사람에게 말씀은 스며들지 못합니다.
캘커타의 사랑의 선교회 모원에 사는 300여 명의 수련 수녀들이 음식이 없어 모두 굶게 생긴 일이 있었습니다.
주방 담당 수녀는 마더 데레사에게 사정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하면 마더 데레사가 몇몇 후원자들에게 전화해 도와달라고 할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더 데레사는 여러 사람을 만나는 중이었으며 그 어린 수녀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자매가 이번 주 주방 담당인가요?
그렇다면 경당에 들어가서 예수님께 먹을 것이 없다고 말씀드리세요.
그 문제는 해결됐군요.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지요.”
십 분 후 현관 초인종이 울렸고, 처음 보는 어떤 남자가 서류철을 들고 마더 데레사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수녀님을 보자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데레사 수녀님, 공립학교 교사들이 파업에 돌입했다는 소식이 지금 막 들어왔습니다.
수업이 취소되어서 7,000개의 점심 도시락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도시락을 처리할 수 있게 도와주시겠습니까?”
‘안나의 집’을 운영하며 매일 수백 개의 식사를 준비해야 하는 김하종 신부는 하루하루가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돈도 그렇지만 짜놓지도 않았는데 그때그때 적절하게 봉사자들이 와 주는 것이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은 일단 우리가 먹을 걱정이 해결되지 않으면 가르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당신 가르침과 함께 항상 먹을 것도 주십니다.
먹고살 것은 주님 뜻에 맡깁시다.
그리고 말씀을 배우고 하느님 나라에 사는 법을 익히기 위해서만 노력합시다.
그러면 먹을 것은 항상 그 말씀과 함께 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밥과 함께 옵니다.
그러니 밥을 먼저 찾지 맙시다.
사랑이 고픈 것입니다.
사랑을 찾으면 밥도 따라옵니다.
사람이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으로 사는데, 말씀은 빵에 담겨 옵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인사는 위에서 옵니다>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착각하지 마십시오.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옵니다.
빛의 아버지에게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16~17절)
베드로, 요한과 함께 예수님 사도단 가운데서도 핵심 제자단의 일원이었던 야고보 사도였습니다.
핵심 제자임으로 인한 자부심도 대단했을 것입니다.
스승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세속적인 기대도 컸을 것입니다.
야고보 어머니의 인사청탁 사건을 통해서 그런 야심을 잘 엿볼 수 있습니다.
젊은 시절 야고보 사도는 성격이 불같았습니다.
여차하면 분노를 폭발시켰고. 예수님과 제자단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사마리아 사람들의 모습에 분개한 그는 예수님의 의견을 묻습니다.
“주님, 저들이 저희뿐만 아니라 주님조차 받아들이지 않으니 참으로 견디기 힘듭니다.
하늘에서 불벼락을 내려 싹 한번 쓸어버리라고 할까요?”
젊은 시절, 예수님과 사도단의 돌격 대장 같이 과격했던 야고보 사도였지만, 세월을 거스를 수 없었습니다.
복음 선포 여정에서 산전수전 다 겪고, 별의별 상처를 다 감내했었고, 뾰쪽하게 모난 곳은 여지없이 깎여 내려간 야고보 사도의 고백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야고보 사도의 고백이 너무나 겸손하고 진솔합니다.
그 어떤 과정이나 위선을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그의 고백은 험난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이 터득한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난 초탈함을 보이고 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착각하지 마십시오.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옵니다. 빛의 아버지에게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16~17절)
세상적인 영예와 물 좋은 자리를 탐내고 추구하는 출세 제일주의자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단체가 결코 아님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누군가가, 그가 평신도 혹은 성직자요 수도자라 할지라도, 교회를 통해 자신의 개인적인 야심과 출세욕을 충족시키고자 애를 쓰다면, 그는 스승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가련한 존재로 추락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권력을 탐하고 추구하는 자는 스승 그리스도를 망신시키고 악용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종교가 한 개인의 야심을 실현시켜 주는 도구가 될 때, 주님께서 참으로 슬퍼하고 분노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욕심이 있다면 주님과 이웃을 섬기고 싶은 욕심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추구할 것입니까?
그리스도인에게 야망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과 이웃을 위해 헌신하고픈 야망이어야 합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오늘 복음을 기록된 순서대로 생각하면,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파 사람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가르치시는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은 듣지 않고, 누룩이라는 말에서 빵을 생각하고, 그래서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는 것만 걱정하다가 혼나는 이야기입니다.
순서를 바꿔서, 빵이 없다고 제자들이 걱정하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파 사람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가르치신 이야기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누룩’은 ‘나쁜 영향력’을 상징합니다.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누룩’은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만 추구하는 ‘잘못된 신앙’을 뜻합니다.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축복을 물질적인 복으로만 생각했고(루카 16,14-15), ‘물질적으로 부유한 사람’을 하느님의 복을 많이 받은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생각은 '가난은 하느님의 저주이고,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의 벌을 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은 가난한 서민들을 멸시하고 업신여겼습니다.
헤로데 당파 사람들은 영혼 구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고, 현세의 부귀영화만 추구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들의 ‘잘못된 신앙’과 ‘나쁜 사고방식’에 물들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빵이 없다고 걱정한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걱정스러운 상황이니까 걱정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 ‘걱정스러운 상황’을 어떻게 대하느냐, 또 어떻게 해결하려고 하느냐?”는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주님께 도움을 청하지 않고 걱정만 하는 것은 ‘믿음 없는’ 모습입니다.
반대로, 모든 것을 주님께 떠넘기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까지 전부 다 주님께 떠넘기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불성실’과 ‘게으름’이고,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인데도 하겠다고 덤비는 것은 ‘교만’이고 ‘어리석음’입니다.
지금 이 이야기의 상황에서 제자들이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주님께 상황을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도움을 청하는 일입니다.
그 다음에 할 일은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는 것입니다.
빵이 없다고 자기들끼리만 걱정하고 수군거린 것은 ‘주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음을 나타냅니다.
제자들이 ‘빵의 기적’을 잊어버린 것은 아닙니다.
또 바로 앞에 계신 예수님을 잊어버린 것은 더욱더 아닙니다.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라는 말씀은 기적을 잊어버렸다고 꾸짖으시는 말씀이 아니라 ‘기적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몇 명이나 먹였느냐?” 라고 묻지 않으시고 “빵이 얼마나 남았느냐?” 라고 물으신 것은 ‘기적의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에 있는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고 남은 ‘열두 광주리의 빵’과 ‘일곱 바구니의 빵’은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따라서 여기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몸의 배부름만 바라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하여라.”입니다.
‘빵의 기적’ 후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요한 6,15).
아마도 제자들도 군중의 그런 분위기에 휩쓸렸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꾸짖으신 것은 제자들이 아직도 그때의 분위기와 들뜬 감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누룩’에 어느 정도 물든 상태에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정생활이든지 신앙생활이든지 교회 운영에 관한 일이든지 간에 여러 가지 걱정스러운 일들을 만나서 걱정하고, 고민하고, 염려하는 모습에 대해서 “그것은 예수님을 잊어버린 것이다.” 라고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우리가 걱정하고 염려하는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염려 자체가 불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하는 일들과 할 수 있는 일들은 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걱정과 염려와 고민이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예루살렘에 큰 기근이 들어서 사람들이 고통을 겪을 때, 사도들은 하늘만 쳐다본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모금 활동을 해서 예루살렘 사람들을 도왔습니다(2코린 8,1-5).
오늘날에도 ‘성전 신축’ 등을 하면서 고생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당연히 예수님께 ‘기도’하고 예수님의 도우심을 믿으면서도, 사람이 할 일을 하면서 많은 걱정들과 고통들을 감수하게 됩니다.
그 걱정들과 고통들은 곧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어가시지만, 그래도 ‘나의 십자가’는 내가 지고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어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전부다.”라는 말만 하고 그것으로 멈추면 안 됩니다.
‘성전 신축’ 등의 일을 하면서 고생하는 이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 함께하시니 걱정하지 마라.” 라는 말만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실질적으로 도와주는 일을 하는 것이 옳습니다.
도와주지는 않으면서 “예수님을 믿어라.” 라는 말만 하면 그 말은 ‘빈말’일 뿐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깨달음의 여정 - 천국은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강론쓰는 시간은 새벽 2시, 장소는 제주도 강정마을 평화센터 숙소 3층 구럼비 3번 방입니다.
참 오랜만에 수도원의 도반(道伴) 형제들과 단기간의 순례 여정에 감회가 새롭습니다.
이 또한 은총의 선물입니다.
주방장 형제의 “오랜만에 움직인거죠?” 물음에 “예, 불암산이 움직였습니다.” 화답했습니다.
수도원 배경의 불암산은 제 정주의 스승입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산같은 정주의 삶을 살다가 설레는 기쁨으로 떠남의 순례 여정에 오르니 새삼 죽음의 떠남이 연상되었습니다.
‘아,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지상 천국의 삶을 살아야 설레는 기쁨으로 하느님의 나라,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같은 설레는 기쁨의 선종을 맞이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영감처럼 순간 스쳐 지나갔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지상 천국의 기쁨을 사는 것이 최상, 최고의 죽음 준비임을 깨닫습니다.
오랜만에 불암산을 떠나니 황당한 일에 잠시 시끄러웠습니다.
떠나기 전날 으레 있으려니 했던 지갑속에 주민등록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참 난감했습니다.
여권으로 대체 가능한가 찾아보니 이미 시효가 만료된 지 2년이 지났습니다.
주민등록증도 필요없어 거의 잊고 지내다 보니 종적 묘연한 사유를 도저히 알 수가 없어 혹시나 몇분 지인들에게 전화를 해도 답이 못되어 공동체 형제들에게 공론화하고 저녁도 거른 채 또 주민등록증을 찾았습니다.
“찾았습니다! 주민등록증! 책상 서랍 벽에 붙어 있었습니다!”
잊었던 은전을 찾은 여자처럼 환호하며 천우신조(天佑神助)의 은총에 감사하여 즉시 분실을 알렸던 분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 전에 원장수사는 텔레그램으로 찍어 놨던 주민등록증 사본을 보냈고 이어 끝기도 끝난 후에는 출력한 주민증 사본을 들고 왔고 저는 자상한 배려의 형제애에 감동했습니다.
잠시의 소동을 통해 공동체 형제들과 지인의 관심과 애정을 확인한 은총의 시간이었습니다.
공항에서는 마스크를 벗고 일일이 주민증과 얼굴을 대조했습니다.
“세속에
살아도
마음은 높고 푸른
하늘이다”
제주도 비행중 신비로운 흰구름에 푸른 하늘을 보며 순간 떠오른 시입니다.
공항에 도착하니 수도원 피정을 2차례 해줬던 김근수 요셉 신학자님이 반가이 기다렸다 시종일관 제 여행짐을 운반해 주었습니다.
오후 일정 가이드는 태풍서귀의 저자인 강홍림 사도 형제가 기꺼이 함께 해 줬습니다.
“제주도 면적은 갈릴리의 90%입니다.”
제주도를 버림받았던 이방의 갈릴리에 빗댄 듯 했고, 갈릴리의 예수님처럼 제주도의 예수님을 추종하는 제자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세속에 살아도 치열한 구도자와 수행자가 되어 예언자적 사명감에 성서에 관한 많은 주석을 출간하고 있는 참 경이로운 평신도 신학자입니다.
저는 주저없이 형제님을 제주도의 수호성인이라 격찬했습니다.
삶에는 이면사(裏面史)가, ‘비하인드 스토리(behind story)’가 있는 법입니다.
이면사를 알고 보면 더욱 연민의 깊은 마음과 눈으로 바라보며 모두를 수용하게 됩니다.
제주도(濟州島)의 '제주'라는 뜻은 '건너에 있는 별볼일 없는 땅'이라는 것이며, 보물섬으로 알았던 제주도가 옛날에는 중죄인들의 유배지 섬으로 하나의 거대한 감옥과 같았고, 제주목의 관아를 방문했을 때는 제주 목사는 그대로 오늘날의 교도소 소장과도 같아 죄수들을 관장하는 것이 주업무였다는 가이드 형제의 설명이었습니다.
이어 신축교난에 이어 4.3 사건 등 그야말로 수난으로 점철된 땅이요 죄수들의 후손들도 많아 한 많은 사연들로 인해 주민들 안에 잠재해 있는 피해의식, 저항의식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공부해야 할 제주도의 역사요 이면사임을 절감했습니다.
이어 제주항에 들려 노래비 앞에서 '떠나가는 배'라는 가곡의 이면사도 들었고 시간되면 이 가곡을 배우겠다 생각했습니다.
민속박물관은 월요일 휴무로 관람은 좌절되었고 이어 이시돌 센타를 방문하여 제주도의 은인이자 수호성인이라 할 수 있는 아일랜드의 골룸반 외방선교회 출신의 임피제 신부(1928-2018)의 헌신적 노력과 헌신에 감격했습니다.
4년전 선종했다는 이 성인사제같은 분의 평전이 꼭 출간되었으면 좋겠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부님의 고백도 한 눈에 들어왔고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가난한 이 땅에 첫 발을 딛으며 제 마음에 떠오른 예수님 말씀이 있었습니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한글옆에는 영어가 병기되어 있었습니다.
복음의 사랑은 이처럼 구체적이요 실제적입니다.
최후심판의 잣대는 바로 이런 작은이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에 달렸다는 것이며 이 또한 우리의 무디어진 마음을 두드리는 회개의 촉구 말씀입니다.
이어 제주 맥주 공장에 들려 소량의 독특한 색깔과 향기의 네 종류의 맥주도 시음했고 저녁 식사 후 평화 센터에 오후 8시 귀가함으로 오후 한나절의 순례 여정을 알뜰히 끝냈습니다.
우리의 순례 여정은 그대로 회개의 여정이자 더 구체적으로 깨달음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참으로 늘 강조하는 바 순례 여정을 하루로, 일년사계로 압축했을 때의 시점(時點)입니다.
제 경우는 하루로 하면 오후 4시, 일년사계로 하면 초겨울입니다.
이런 자각이 늘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깨어 오늘 지금 여기서 환상을 떨쳐 버리고 본질적 깊이의 단순투명한 삶을 살게 합니다.
인간을 눈멀게 하는 마음의 고질병이 늘 강조하는 바, 무지의 병입니다.
참으로 무지에 눈 먼 인간, 바로 인간에 대한 부정적 정의입니다.
바로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은 부단한 회개의 여정, 깨달음의 여정뿐임을 깨닫습니다.
깨달음의 은총, 깨달음의 빛입니다.
깨달음을 통해 깨끗한 마음에 깨어 있는 정신이요, 늘 새롭고 자유로운 삶입니다.
오늘 복음도 제자들의 무지를 일깨우는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의 죽비같은 반복되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새삼 청해야 할 바, 회개의 은총, 깨달음의 은총임을 절감합니다.
“에파타!”. 참으로 열려야 하는 마음의 눈이요, 마음의 귀임을,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깨달음의 빛이요 깨달음을 통한 마음의 순수와 자유임을 깨닫습니다.
깨달음이 천상은총임을 야고보 사도가 통쾌하게 밝힙니다.
시련을 견디어 내는 것도, 시험을 통과하게 하는 것도 은총의 깨달음이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문제를 해결함이 아니라 문제를 해소시키는 깨달음입니다.
몰라서 오해와 착각이지 깨달음을 통해 삶의 실상을 알면 저절로 문제는 해소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를 통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깨달음의 말씀입니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착각하지 마십시오.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옵니다.
빛의 아버지에게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분께는 변화도 없고 변동에 따른 그림자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뜻을 정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시어, 우리가 당신의 피조물 가운데 이를테면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참으로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제 강론도 빛의 아버지께서 내려오는 천상선물 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순례 여정중의 우리 모두를 ‘진리의 말씀’으로 새롭게 낳으시고 ‘생명의 화관’을 앞당겨 씌워 주시어 오늘도 ‘지상에서 천국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이 강론을 요약합니다.
“주님, 당신이 깨우쳐 주시는 사람은 행복하옵니다.”
(시편 94,12ㄱㄴ)
아멘.
- 성 베네딕토회 성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8년간 보좌신부 생활을 마치고 드디어 본당신부가 되었을 때입니다.
23년 전인 1999년 10월 1일입니다.
비가 내리는 아침, 승용차에 짐을 실고 제가 살아야 할 본당으로 떠났습니다.
당시는 의정부교구가 분할되지 않을 때였습니다.
저의 첫 본당 주임신부 부임지는 경기도 파주의 작은 성당이었습니다.
본당신부가 되면서 보좌신부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성당 마당의 잡초도 보이고, 성당 마당을 둘러싼 담벼락의 균열도 보이고, 칠이 벗겨진 성모상도 보이고, 비가 오면 누수가 있는 성당 한 모퉁이도 보였습니다.
무엇보다 수요와 공급의 원칙이 지켜지는 본당의 재정 상황이 보였습니다.
‘주일헌금, 감사헌금, 교무금, 미사예물’은 본당 재정에서 수입에 해당합니다.
성당을 운영하기에는 부족하게 보였습니다.
하지만 3년 생활하면서 한 번도 재정문제로 어려움을 겪은 적은 없었습니다.
예전에 근처에서 군대생활을 했다는 분이 후원금을 주기도 했습니다.
성당 누수 때문에 걱정했을 때는 지역 본당에서 큰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여름 가뭄에는 교구 사회복지 단체에서 양수기를 보내 주기도 했습니다.
그저 아이들하고 재미있게 놀고, 농사짓는 곳에 방문하고, 군인들 미사 오면 간식 장만해주고, 도시 성당하고 농산물 직거래하고 3년을 살았는데 아무 걱정 없었습니다.
오히려 혈압이 있었는데 3년 시간이 지나면서 혈압도 좋아졌습니다.
2019년 8월 21일 가톨릭평화신문미주지사를 맡아서 뉴욕으로 왔습니다.
전임 신부님이 열심히 홍보를 해서 재정도 안정적이었습니다.
기분 좋게 살림살이도 장만하고, 직원들 복지활동도 하고, 힘차게 신문사의 닻을 올렸습니다.
2020년에 많은 행사를 기획하였습니다.
54명의 순례자와 함께 그리스 터키 성지순례를 가기로 했습니다.
LA와 밴쿠버에 신문 홍보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버지니아에도 사순특강을 하기로 했습니다.
2월부터 5월까지 대략 잡아도 10곳을 방문하여 신문도 홍보하고, 강의도 하는 일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잘 아는 것처럼 코로나19는 미국에도 도착하였고, 신문사에서 기획했던 모든 일정이 취소되었습니다.
도시는 움직임이 멈추었습니다.
생필품 이외에 가게에서는 음식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성당의 미사도 멈추었습니다.
넉넉하게 느껴졌던 재정도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걱정한들 해결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다행히 미국 정부에서는 개인들에게 재난지원금을 지급하였습니다.
신문사에도 재난지원금이 지급되었습니다.
한숨을 돌리니 이웃이 보였습니다.
함께 힘들어하던 신부님들이 보였습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있듯이, 신부님들과 캠핑도 가고, 자전거도 타고, 등산도 하면서 친교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오미크론 때문에 겨우 재개되었던 신문의 홍보가 다시 중단되었지만 이제는 큰 걱정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이끌어 주심을 믿습니다.
오늘 제자들도 저와 비슷한 심정이었습니다.
빵이 없다고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 빵 조각을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제자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열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빵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에는, 빵 조각을 몇 바구니나 가득 거두었느냐?”
제자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일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때문에 걱정하지 말하고 하십니다.
먼저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을 수 있다면, 먼저 나눌 수 있다면, 하느님께서는 넘치도록 채워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꼬임에 넘어가는 바람에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욕망은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다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옵니다.
빛의 아버지에게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욕심을 버린다면,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면 온갖 좋은 선물과 은사는 하느님께서 주십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달력에 일정이 빽빽하게 적혀 있는 사람과 아무런 일정이 없는 사람 중에 누가 더 행복할까요?
일의 많고 적음으로는 행복도를 측정할 수 없습니다.
그보다 지금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느냐에 따라 행복이 결정됩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전에 저의 일정표는 늘 가득했습니다.
저의 일정을 우연히 본 사람들은 “이렇게 바빠서 어떻게 살 수 있어요?”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바쁘면 좋은 거잖아요. 그만큼 저의 쓸모가 있다는 것이니까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제 일정은 빈칸만 있습니다.
일정이 몇 개 되지 않아서 굳이 일정표를 확인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이렇게 말합니다.
“계속 바빴으니 이제 조금 쉬라고 그러나 봐요. 이 시간 동안 책도 많이 읽고, 글도 많이 쓰면서 바쁜 시간을 미리 준비해야지요.”
바쁘거나 한가하거나 상관없이 모두 다 행복할 수 있습니다.
돈이 많고 높은 지위에 올라야 무조건 행복할까요?
아닙니다.
그 순간을 누릴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지 못한 걱정거리가 생겼습니다.
남자들끼리의 여행이라 아무도 식사를 준비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마르 8,15)라고 분부하십니다.
제자들은 이 말을 바리사이와 사두가이에게 가서 빵을 구걸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알아들었습니다.
빵이 없다는 걱정이 잘못된 이해를 가져왔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뜻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들은 표징을 요구하며 불신앙을 표시하고, 헤로데 임금의 부도덕함을 눈감아주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이 밖에도 많은 그들의 위선을 조심하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먹을 것을 준비하지 못함을 꾸짖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사실 빵의 기적을 직접 본 제자들이 아닙니까?
따라서 예수님만 있으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걱정해야 할 것은 주님 뜻에 따라 살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뜻을 찾고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어떤 상황이 찾아와도 걱정 없이 지금 이 순간을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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