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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동호회 휴게실 스크랩 안동의 도산서원에서
하늘향 추천 0 조회 185 15.07.10 21:37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영동워크숍을 다녀온 오

목요일 방문팀의 약속이 장바로 인해 취소된 차에

돌연 방문한 분과 안동 도산서원에 가게 되었는데

 

영남학파의 퇴계이황과 남명조식!

 

수년전 합천에서 남명 조식선생의 충정과 의에 대해

잠시 접근할 기회가 있었는데, 퇴계이황에 대해 접근해 볼

좋은 기회라 여겨 기꺼이 동행하게 되어,

 

덕분에 안동지역을 두루 살펴볼 기회였지만

도산서원에 들려 도산서원과 퇴계종택을 둘러보고

오는 길에 원영교도 건너 보고,

 

선비와 고장 안동은 역시 퇴계이황의 정신적 학문적 기반 아래

눈으로 보기에도 곳곳마다 역사와 전통이 깊이 새겨져 있고

이어져 가고 있슴을 느끼고,

 

영남학파의 쌍벽을 이루는 동갑내기 대학자!

인을 중시했던 퇴계이황과

의를 실천을 중시했던 남명조식!

그들의 대조적인 삶이지만 두분의 인과 의의 멋진 조화를

배우고 닮고 싶은 깊은 고민에 또 다시 빠져 볼까 합니다.

 

 

 

도산서원은 건축물 구성면으로 볼 때 크게 도산서당과

이를 아우르는 도산서원으로 구분된다.

도산서당은 퇴계선생이 몸소 거처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고,

도산서원은 퇴계선생 사후 건립되어 추증된 사당과 서원이다.

 

 

도산서당은 1561년(명종 16)에 설립되었다. 퇴계선생이 낙향 후 학문연구와

후진 양성을 위해 지었으며 서원 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퇴계선생이

직접 설계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때 유생들의 기숙사 역할을 한 농운정사와 부전교당속시설인

하고직사(下庫直舍)도 함께 지어졌다.

 

도산서원은 퇴계선생 사후 6년 뒤인 1576년에 완공되었다.

1570년 퇴계 선생이 돌아가시자 1572년에 선생의 위패를

상덕사(보물 제211호)에 모실 것을 결정하였다.

 

 2년 뒤 지방 유림의 공의로 사당을 지어 위패를 봉안하였고,

전교당(보물 제210호)과 동 · 서재를 지어 서원으로 완성했다.

 

 

1575년(선조 8)에 한석봉이 쓴 “도산서원”의 편액을 하사 받음으로써

사액(賜額)서원으로서 영남유학의 총본산이 되었다.

1615년(광해군 7) 사림이 조목(趙穆)을 종향(從享)했다.

 

 

1792년(정조 16) 정조 임금이 치제(致祭)를 내리고 도산별과(陶山別科)를 시행하였다.

 

1796년(정조 20) 시사단 (試士壇)을 세우고, 1819년(순조 19) 장서고(藏書庫)인

동광명실(東光明室) 건립하였다. 1870년(고종 7)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서 제외되었으며,

1930년(경오년) 서광명실(西光明室) 증건(增建)하였고 1932년(임신년) 하고직사(下庫直舍)

이건하였다.

 

 

1969년 본 서원을 중심으로 임야 및 전답 19필 324.945㎡이 사적 170호로

지정되었고, 1970년부터 대통령령으로 보수 · 증축 사업을 진행하였으며

우리나라 유학사상의 정신적 고향으로 성역화 되었다.

 

1977년 도산서원관리사무소가 설치되고 관리운영조례를 제정 공포한 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1575년(선조 8)에 한석봉이 쓴 “도산서원”

 

 

 

 

 

문화해설사의 안내를 받는 단체방문 일행 이 보이는 도산서원 전경

 

 

 

이황<퇴계·退溪> vs 조식<남명·南冥>‘동갑내기 라이벌’영남학파 큰 획

 

 

 

 

***퇴계 이황***

 

개인의 수양과 절제 강조… 퇴계 학풍 이은 경상좌도는‘인<仁>’중시

관직서 물러나 고향 안동서 후진 양성… 제자들 남인으로 활약

 

 

 

 

***남명 조식 ***

 

수양·실천 중요시… 남명 계승한 경상우도는 절의로써‘ 의<義>’숭상

평생 재야의 비판자로 남아… 곽재우 등 길러내 북인의 뿌리 마련

 

 

 

 

16세기가 시작되는 1501년 조선에서는 두 명의 대학자가 탄생하였다.

 퇴계 이황(李滉)과 남명 조식(曺植)이다.

두 학자는 성리학을 각자의 개성에 맞게 연 구하고,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필요한 경우 왕에게 정치와 학문의 요체를 설명하는가 하면,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초유사(招諭使) 김성일은 “퇴계와 남명 두 선생이

한 시대에 나란히 나서 도학(道學)을 처음으로 강명(講明)하면서 인심을 순화시키고

윤리와 기강을 바로잡는 것으로써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이에 선비들 가운데에는

두 선생의 교육에 감화되고 흥기하여 본받는 사람이 많았다”면서 영남지역 의병 봉기를 독려 하였다.

 

그만큼 이 지역에서 두 사람이 갖는 위상은 컸다.

조선시대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 이황과 조식의 학문과 현실관 속으로 들어가본다.

 

 

 

조선성리학을 이론적으로 발전시킨 이황

퇴계 이황(1501~1570)은 조선의 국시로 이념화된 성리학의 탐구에 전념하여

조선 성리학의 이론적 기틀을 확립하는 데 기여한 학자였다.

이황은 1501 년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현 경북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진사 식(埴)의 7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자는 경호(景浩), 본관은 진보(眞寶)다.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인 춘천 박씨의 가르침을 받고 자랐다.

이황은 숙부인 이우(李 · 1469~1517)에게 큰 영향을 받았는데,

12세 되던 해 이우로부터 《논어》를 배우기도 했다.

이후 《소학》 《심경》 《근사록》 등을 두루 탐독하였고,

책들을 통해 개인적인 성찰을 위한 ‘경(敬)’의 이념을 체득하였다.

 참된 선비가 되기 위하여 항상 삼가는 경건한 태도를 견지하였던 것이다.

 

이황의 일생은 태어나서 33세까지의 성장기, 34세부터 49세까지의 관직 진출기,

 50세부터 71세까지 은퇴 후 후진 양성기로 나눌 수 있다. 28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534년 34세에 대과(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副正字)로 벼슬을 시작하여

박사·전적·지평 등의 벼슬을 거쳐 1543년 종3품의 성균관 사성(司成)에 올랐다.

 

그러나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 동료 학자들이 크게 희생당하자

고향인 예안의 토계로 낙향하였다.

잘 알려진 퇴계라는 호는 낙향하여 살던 낙동강 상류의 토계(兎溪)를 퇴계(退溪)라

고친 것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초야에서 후진을 양성한 삶의 궤적을 대변하고 있다.

 

이황은 1549년(명종 4) 풍기군수로 재임하면서 주세붕이 건립한 백운동서원의

사액(賜額)을 요청하여 허락받고 이름을 소수서원으로 고쳤다.

왕이 내려주 는 현판을 받는 사액서원에는 국가로부터 토지·노비·서적이 내려졌다.

이황은 사림파의 학문 기반인 서원이 자리를 잡는 데도 큰 역할을 한 것이다.

풍기 군수를 그만둔 후에도 여러 차례 관직이 내려졌지만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저술과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명종대에 드러난 이황의 명성은 선조대에 더욱 알려졌다.

1568년 이황은 선조에게 제왕의 길을 여섯 항목으로 제시한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를 올리고,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저술하여

제왕학의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였다.

《성학십도》는 성리학의 요체를 열 가지로 정리하여 성리학 체계를 독자적으로

 재편성했다는 점과 중국에서 수입한 성리학이 조선에 본격적으로 토착화

되는 기반을 조성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이황은 성리학의 본질에 대해 깊이 있는 연구를 통하여

당시 학계의 주요 관심사이던 이기론에 대해서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으로 학문적 입장을 정리하였다.

 

이기이원론은 인(仁)·의(義)·예(禮)·지(智)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인 사단(四端)은

 ‘이(理)’가 발(發)하는 것이고, 희로애락 같은 칠정(七情)은 ‘기(氣)’가 발하는

것으로 보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에 바탕을 두었다.

이황은 깊이 있는 토론이라면 연배도 따지지 않았다.

26년 연하의 학자 기대승(奇大升·1527~1572)과 사단칠정론에 대한

해석을 두고 편지를 주고받으며 이론을 심화시켰다.

 

이황의 사상은 주자에 의해 체계화된 중국의 성리학을 완전히 소화하여

이를 보다 풍부하고 독자적으로 발전시켰다는 점과,

개인의 수양과 절제를 강조하여 학자들의 도덕성을 우선에 두는 학문으로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이황의 사상은 그의 연고지인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계승 발전되었으며,

 

조선은 물론 중국과 일본에까지도 알려졌다.

정구·유성룡·김성일·장현광 등은 그의 대표적인 제자들로서,

이들은 퇴계학파를 형성하여 스승의 학문과 이념을 정치에 반영시켜나갔다.

퇴계학파는 조선후기 정계에서는 주로 남인으로 활약하였다.

 

 

 

敬과 義의 선비정신 실천한 조식

 

“전하의 나랏일이 이미 잘못되어서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했고

하늘의 뜻이 가버렸으며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

 비유하면 큰 나무가 백 년 동안 벌레가 속을 먹어 진액이 이미 말라 버렸는데

 회오리바람과 사나운 비가 어느 때에 닥쳐올지 까마득하게 알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 지경에 이른 지가 오래됩니다. (중약) 자전(문정왕후)께서는 생각이 깊으시기는

하나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다만 선왕의 외로운

 후계자(孤嗣·고사)이실 뿐이니, 천 가지, 백 가지의 천재와 억만 갈래의 인심을

무엇으로 감당하며 무엇으로 수습하시겠습니까?” (1555년, 《남명집》, <을묘사직소>)

 

 

위 글은 조식(1501~1572)이 1555년 단성현감에 제수되고 나서 올린 사직 상소문으로,

 당시 위기의식을 날선 문장으로 과감하게 지적하여 조정에 큰 파문 을 일으켰다.

 

특히 실질적인 권력자 문정왕후를 과부로, 명종을 고사로 표현한 부분은 대비의

수렴청정과 이에 파생되는 외척정치의 문제점을 직선적으로 비판한 것이었다.

말 한마디로 목숨을 날릴 수 있는 절대군주 앞에서 처사(處士)에 불과하던

조식은 당당하게 정치현실을 비판한 선비였던 것이다.

 

조식은 1501년 외가인 경상도 삼가현 토동(현 경남합천군 삼가면 외토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건중(健仲),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남명(南冥)’이라는 호는《장자》의 <소요유(逍遙遊)> 편에서 인용한 것으로

조식이 성리학 이외에 노장 사상에도 큰 관심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어린 시절 부친의 임지를 따라 서울 장의동 근처에서 살았으며,

30세에서 48세까지 처가인 경남 김해, 48세에서 61세까지 경남 합천에서 생활한 후

만년에는 지리산 천왕봉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산천재를 짓고 후학을 가르쳤다.

김해, 합천, 진주로 이어지는 경상우도 지역은 조식 학문의 산실이었다.

 

 

 

조식은 무엇보다 학문에서 수양과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는데,

경(敬)과 의(義)를 요체로 삼았다.

‘경’을 통한 수양을 바탕으로 외부의 모순에 대해 과감하게 실천하는 개념인

 ‘의’를 신념화한 것이다.

 

 경의 상징으로는 성성자(惺惺子·항상 깨어 있음)라는 방울을,

의의 상징으로는 칼을 찼는데, 칼에는 ‘내명자경 외단자의(內明者敬 外斷者義·안으로

자신을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으로 결단하는 것은 의다)’라고새겨 놓았다.

 

방울과 칼을 찬 선비. 학자의 모습은 언뜻 연상되기 힘든 캐릭터이지만,

조식은 이러한 모습을 실천해나갔다. 조정에 잘못이 있을 때마다 상소문을 통해

과감하게 현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여 후학에게는 강경한 대왜관을 심어주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정인홍·곽재우·김면·조종도 등 그의 문하에서 최대의 의병장이

배출된 것은 스승의 실천 중시 사상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준 것이다.

조식이 스스로에게 엄격했음은 ‘욕천(浴川)’이라는 시에 압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래도 티끌 먼지가 오장에 남았거든, 바로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보내리라”는

시구를 통하여 실천을 중시한 조식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영남학파, 낙동강 경계로 ‘좌퇴계 우남명’ 형성

 

 

조식과 이황은 1501년 같은 해에 태어나 당시에는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으로 인식되었다.

이황의 근거지 안동과 예안은 경상좌도의 중심지였고, 조식의 근거지

합천과 김해, 진주는 경상우도의 중심지였다.

낙동강을 경계로 ‘좌퇴계 우남명’으로 나뉜 것이다.

 

이황은 온화하고 포근한 청량산을 닮았고 조식은 우뚝 솟은 기상의 지리산을 닮아갔다.

두 사람은 기질과 학풍, 현실관 등에서 분명한 차이를 드러내 생존하던 시절부터

종종 비교의 대상이 되었다.

 

선조대에 윤승훈은 퇴계의 학풍을 이은 상도(上道·경상좌도)는 인(仁)을 숭상하고,

남명의 학풍을 계승한 하도(下道·경상우도)는 절의로써 의(義)를 숭상한다고 하였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익(李瀷)도 이황과 조식을 영남학파의 양대산맥으로 규정하면서

“상도(上道)는 인(仁)을 숭상하고 하도(下道)는 의(義)를 주로 하며

 퇴계의 학문이 바다처럼 넓다면 남명의 기질은 태산처럼 높다”고 두 사람의 기질을 대비했다.

 

이황은 온건하고 합리적인 기질의 소유자로 성리학을 이론적으로 심화 발전시켜갔다면,

조식은 직선적인 발언으로 현실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두 사람은 현실인식에도 차이점을 보였다.

 

이황은 은거의 삶을 지향하면서도 학자가 출사하여 경륜을 펴는 것 또한

의미 있는 것으로 여겼다. 조식은 자신의 시대를 모순이 절정에 이른 ‘구급(救急)’

시기로 파악하고 끝까지 재야의 비판자, 곧 처사(處士)로 남았다.

 

왜적에 대한 입장에서도 둘의 눈은 달랐다. 이황이 강온양면책을 견지한 데 비해

조식은 강력한 토벌책을 주장했다. 조식은 제자들에게

“왜적이 설치면 목을 확 뽑아버려야 한다”는 강경한 표현을 쓰는가 하면,

외손녀 사위 곽재우에게는 직접 병법을 가르쳤다.

 

이황의 성리학이 일본에 큰 영향을 주고 조식의 문하에서

곽재우·정인홍·김면·조종도 등 최대의 의병장이 배출되었던 것도 우연이 아닌 셈이다.

조식의 제자들은 붕당정치 때는 정인홍을 중심으로 북인의 대열에 섰다.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는 이황의 저술 11종 45책이 일본판으로 간행되었으며,

일본 근세유학의 창시자인 후지와라 이래 일본 유학사상의 주류인 기몬학파 및

구마모토학파 모두가 이황의 학문을 계승하였다. 성리학의 발상지인 중국에서보다

조선에서 더욱 성리학이 이론적으로 체계화된 데에는 이황의 역할이 컸다.

이황을 일컬어 ‘동방의 주자’라 칭하는 것도 이러한 까닭에서다.

 

 

서릿발 같은 비판과 직언을 쏟아낸 조식과 성리학을 깊이 있고 체계적으로 완성하여

조선 중기 학문과 사상의 기틀을 잡아나간 학자 이황. 두 학자가 510여년 전 같은 해에

출생한 것은 조선시대 지성사에서 커다란 행운이었다.

 

이들은 서로 다른 학풍과 현실관을 가지고 있었지만 조선 중기 사상사의 큰 획을 그으면서

 선비의 길과 학자의 길이 무엇인지 몸으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들의 학문을 이은 후학들은 영남 학파의 중추세력으로 성장하면서

영남 지역이 학문의 전당으로 자리 잡게 하였다. 조선 후기 붕당정치기

퇴계학파는 남인, 남명학파는 북인이 되면서 정치적으로는 주로 야당의 지위에 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서 근대에 이르는 시기까지 영남지역은 학문적 자존심을 굳건히 유지하면서

 지성의 꽃을 피워나갔다.

 조식과 이황이 다져놓은 학문과 지성의 뿌리가 어느 지역보다 튼튼했기 때문이다.

 

 

▲신병주=건국대 사학과 교수. 외교통상부 외규장각도서 자

문포럼 위원. KBS TV 프로그램 <역사추리> <TV조선왕조실

록> <역사스페셜> <불멸의 이순신>의 자문을 맡았으며, 현재

<역사저널, 그날>의 패널로 참여하고 있다. 저서로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조선왕실 기록문화의 꽃, 의궤》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조선을 움직인 사건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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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삭제된 댓글 입니다.

  • 작성자 15.07.14 09:18

    동인님 감사합니다.
    영주의 소수서원과 선비마을은 다녀왔는데
    아직 병산서원은 가보지 못했습니다.
    안동은 업무상 몇번은 다녀왔는데,
    해마다 계획적으로 역사기행을 해야겠네요~~

  • 15.07.16 08:48

    잘보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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