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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8월 29일 다이너스티컵 결승전 |
1990년 일본은 발전을 시도한다.
한일전 역사는 1990년에 들어 달라지게 된다. 일본은 1980년대부터 기존의 실업리그인 JSL을 발전시킨 JFL을 활성화시켰으며 많은 외국인들이 JFL에서 선수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하얀펠레'로 유명한 브라질의 지코도 가시마 앤틀러스 팀에서 뛰었으며 슈퍼스타 디에고 마라도나의 동생 우고 마라도나도 일본 JFL에서 뛰었다. 그리고 1991년 일본은 브라질인인 라모스를 귀화시킨다. 1991년 한일전에 출전할 예정이었던 라모스는 출장하지 않았지만 한국의 축구관계자들과 축구팬들은 일약 긴장했다. 브라질 출신으로 요미우리 사커클럽(현 베르디)을 일본 최강팀으로 만들어낸 그의 실력은 일본통인 축구인들에게 알려져 있었기에 그의 일본 대표팀 합류는 한국에게 현실적인 위협으로 다가왔다. 라모스가 한국대표팀과 첫 경기를 하는 것은 바로 1992년 8월 중국에서 열리는 다이너스티컵이었다. 1985년 한국과의 월드컵 지역예선 최종전에서 패퇴한 일본은 1990년 월드컵 도전도 실패했다. 북한에 패배하여 최종예선에 올라가보지도 못했다. 이에 일본 축구계에선 1968년 멕시코 올림픽 때와는 달리 대표팀 감독을 외국인에게 넘겼다. 1968년 멕시코 올림픽때의 크라머는 기술고문이었다. 그러나 네델란드 출신인 오프트 감독은 일본 대표팀의 전권을 잡았다. 일본축구 역사상 최초의 일이었다. 해외유학파인 미우라 가즈요시를 비롯해 여기에 플레이메이커로 라모스를 귀화시켜 전력을 강화했다. 1993년 개막을 목표로 프로축구팀 창설과 준비를 착착 진행시켰다. 그러한 준비의 결과가 1992년 다이너스티 컵의 대표팀이었다. 8월 22일 일본은 한국과의 개막전에서 득점없이 비겼다. 이 경기에서도 일본은 1980년대와는 다른 경기력을 보여주며 일부 부분에서는 한국을 압도해나갔다. 일본은 이후 중국에 2-0, 북한에 4-1로 압조덕인 승리를 거뒀고 한국은 북한과 비기고 중국에 2-0으로 승리 1승2무로 1차 리그를 마쳤다. 리그 1위와 2위가 최종 결승전을 치루는 대회 방식으로 29일 결승전을 맞이하게 되었다. 폭우속의 경기 29일 경기를 앞두고 북경 시내엔 폭우가 쏟아졌다. 경기를 연기하느냐를 놓고 많은 시간이 지났다. 한국 방송사의 중계방송도 계속 기다려야 했다. 예정된 경기개시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야 경기를 강행하기로 대회관계자들은 결정했다. 경기장은 물로 질퍽거렸다. 선수들은 쉽게 지켰고 경기가 잘 진행되지 않았다. 슬라이딩을 하면 물보라가 치는 것이 여러번 목격되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양팀 선수들의 플레이가 원활하지 않은 것은 뻔한 일이었다. 다행히 선취골은 한국의 몴이었다. 한양대학교 재학생으로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맹활약한 정재권이 그 주인공이었다. 빠른 발과 뛰어난 골감각으로 한양대의 주득점원으로 활약했고 92년 올림픽에서도 1골을 기록하며 한국축구의 차세대 스트라이커로 꼽히던 선수였다. 그러나 후반들어 한국의 움직임이 점점 둔해졌다. 질퍽한 경기장을 뛰어다녀야 하는 만큼 체력소모가 평소보다 더 컸던 것이다. 그 틈을 노린 라모스의 움직임이 점점 돋보이기 시작했다 가볍게 찔러주는 패스가 수차례 일본 선수들에게 연결되었고 기타자와, 미우라, 다카기 등의 선수들이 한국 문전을 계속해서 위협하기 시작했다. 후반 36분 일본의 동점골이 터졌다. 나카야마가 단독 드리블을 하며 페널티 에리어 안까지 치고 들어오며 슛한 공이 한국 골문안으로 들어갔다. 한국은 총공세로 들어갔지만 승부를 가리지 못한채 경기가 끝났다. 대회 규정상 승자를 가려야 했기에 연장전에 들어가야 했다. 11-10의 우세에도 승부차기로 연장전에 들어간지 얼마 되지 않아 일본 수비수 쓰나미가 고의적인 반칙으로 퇴장했다. 11-10의 우세를 잡은만큼 한국이 우세하리라 생각한 것도 잠시. 연장 전반 7분 일본의 장신 공격수 다카키에게 골을 허용했다. 지금처럼 골든골제였다면 여기서 승부는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엔 골든골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연장 전후반 30분을 다 끝내야 했다. TV방송에서 다카키의 골을 다시보여주고 있을 때 한국팀의 동점골이 터졌다. 킥오프된 공을 그대로 몰고들어간 김정혁(당시 대우 소속, 현 전남)이 동점골을 성공시켰다. 1분이 막 지난 무렵이었다. 대학시절 입은 부상으로 결국 프로에서는 뒤늦게 빛을 봤지만 당시 명지대를 혼자서 전국 대학강호로 유지시킨 능력의 소유자가 김정혁이었다. 양팀은 일진일퇴했지만 한국이 숫자상의 우위를 앞세워 계속 공격한 반면 일본은 수비뒤의 역습으로 나왔다. 연장 전반,후반 양팀은 더 이상의 득점이 없었다. 승부차기까지 가야했다. 한국은 여기서 2번키커 최강희와 3번키커 고정운이 실축을 했다. 일본의 승부차기 4-2승. 제2회 다이너스티컵은 일본의 우승으로 끝났다. 자신감의 1승 대등한 승부의 시대로 경기직후 오프트 일본 대표팀 감독은 "경기장 컨디션이 너무 좋지 않아서 짧은 패스가 먹혀들어가지 않은 불리한 상황에서도 이긴 것은 선수들의 정신력의 승리다"라고 회고했다. 또한 일본 언론들은 '자신감을 가져온 1승'으로 평가했다. 특히 한국은 대표팀과의 경기에서 1984년이후 최초로 1패를 기록했다. 일본의 전력보강은 성공했으며 자신감을 얻게 되었고, 반면 한국은 간판 공격수였던 최순호, 김주성의 은퇴 이후 중량감있는 공격진이 없다는 문제에 직면했다. 이후 한일전은 한국의 일방적인 우세가 아닌 팽팽한 접전의 시대로 돌입한다. 이후 양팀은 일진일퇴하며 팽팽한 호각승부를 유지해왔다. 이에 자극받은 아시아 각국은 프로리그를 창설하고 수준향상에 힘써오면서 아시아축구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경기는 폭우가 퍼붓는 가운데 펼쳐졌고 승부차기까지 간 악전고투이지만 이 경기 이후 한국과 일본뿐 아니라 전 아시아 축구의 실력향상으로 연결되었다는 점에서 한국과 일본의 축구역사에 기념비적인 경기라 할 수 있다. |
첫댓글 그러기엔 아직 스쿼드 차이가
글쎄요 오늘 나온 한국수비수들은 월드컵 주전 맴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선수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