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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준을 정하고 사격하여 생지옥의 참극을 만들었다.” “세 사람을 쏴 죽이고 그 송장 위에 서서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수라제프카 동구 앞 벌판에서 33구의 시체를 발견하였다.” “사격, 포격, 학살은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계속됐습니다. 절박한 상황을 보며 많은 파르티잔들이 견디지 못하고 제야강에 뛰어들어 익사했습니다.” “아침부터 석양까지 포격소리 요란하다.” “죽은 자의 시체가 거리에 누워 있고, 부상당한 사람들이 신음하며 주위에 숨어 있었습니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에 인접한 거리는 시체로 가득 차 있었다.” “참변의 소식을 듣고 얼마나 울었는지 며칠을 울었는지 모른다.” “참변의 소식이 전해지자 마음이 약한 사람 중에는 자살한 사람까지 있었다.” "무력으로 무장해제 시키는 것은 너무나 터무니 없는 일이었다. 12시간 동안 불필요한 대포 포격과 소총 사격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21년 러시아 영내의 한국 독립군 무장 해제는 내부 투쟁을 격화시켰다." |
조준 사격
홍범도 장군 등은 과거 1895년 을미년 단발령 때부터 의병 전투를 구경하기 시작하였으며, 20년 이상 의병•독립군 무장투쟁을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누가 의병 부대나 독립군 부대를 지휘할 것인가를 놓고 다투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었다.
아마 만나자 마자 시작하는 것이 군사작전 논의 그 다음이 먹고 자고 입는 문제였던 것이다.
"0공은 00의병장이고 나는 000지역 의병장인데.. 마땅히 000지역에 왔으니 내가 지휘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소?"
설혹 독립군 부대 위에 있던 러시아 볼셰비키 일부로부터 ‘강제로 무장해제시키라’는 명령을 받아도
당연히 조준 사격이 아닌 하늘로 쏘거나 빗겨 쏴서 탈출하게 할 것이라고 자신들의 경험으로 미리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주요 단체가 주장했던 자유시 사건 희생자 수 | |||
사할린부대 희생자 | 사할린 부대 총원 | 공격측 피해 | |
(1) 러시아 2군단 및 공격부대 측의 주장 | 폭도는 38명 전사, 80여명이 제야강에 익사 | 전사자 1명 | |
(2) 이르쿠츠크파측 문건인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73쪽 | 사망자 36명, 잡힌 자 864명, 불구중상자 15명, 박일리야와 탈출한 자 34명, 행방불명 59명 | 1,008명 | 군정의회 사망자1명, 제29연대 사망자 1명 |
(3) 간도지방 독립군단체 성토문 (구춘선 등 주장) | 사망 272명, 익사자 31명, 행방불명 250명, 포로 917명, (사망 추정 600여명) | 1,470명 | |
(4) 허재욱, 이병채 주장. 이동휘는 이보다 더 많이 사망했다고 주장 | 사망 400여명, 포로 500여명, 지휘관 70명 이르쿠츠크 교도소 수감 (허재욱과 이병채의 1921. 10. 25. 자 편지) | 1,800여명 ~ 2천여명 이상 | |
(5) 김홍일의 주장 | 사망자 7백에서 ~ 8백여명. 포로 1천여명 이상 | 자유시 일대 7천여명 집결 | |
(6) 러시아 스바보드니 향토사학자 | 사망자 6백여명, 포로 9백여명에서~ 1천여명 | 자유시 일대 독립군 6천여명~7천여명 집결 | |
(7) 일본군•조선총독부 주장 | 1천 5백여명 살상 혹은 탈출. 포로 1천 5백여명 | 약 2천여명에서 ~ 3천여명 | |
일찍이 없었던 참사였다.
오늘날의 셰르쇼바 거리. 1921년도 당시에는 최대 번화가 근처였다. 지금은 항구 기능 상실로 가장 낙후된 지역이다.
“죽은 자의 시체가 거리에 누워 있고, 부상당한 사람들이 신음하며 주위에 숨어 있었습니다.”
한 노인 주민에 따르면
“시베리아 횡단 철도에 인접한 거리는 시체로 가득 차 있었다.”
수라제프카에 1921. 6. 28. 일 주둔했던 사할린 의용대와 간도계 독립군의 수가 자료마다 다른 이유는 다양하다.
이르쿠츠크파와 러시아 볼셰비키들은 그 수를 줄여서, 이목이 집중된 참사의 피해를 줄일 필요가 있었다.
니항사건 당시 활약한 '강형' 함. 일제 침략자에 맞서 약 2,000여명의 화교와 중국 영사를 대피시키고 무사히 하르빈까지 이동에 성공한다. 함장 진세영 장군은 문호훈장을 받고 해군 상장까지 진급하여 지나사변에서 용장으로 활약하였다.
자유시 참변의 현장. 수라제프카 마을
한국 독립군의 러시아 영내 진입시 무장해제 실시
그리고, 오늘날 공개된 러시아 볼셰비키들의 문서를 보면
1920년부터 1921년경까지 러시아 영내로 진입하는 '한국 독립군 부대를 재편성 혹은 보다 우수한 무기로 재무장 시킨다'는 등의 핑계를 대고 가장 먼저 한 것이 무장해제였다.
박일리야의 사할린 부대 등은 러시아 영내에서 조직된 부대였으므로 만주에서 온 독립군 부대처럼 다루기 쉽지 않았을 것이며, 오하묵 등이 1920년 초에 블라가베셴스크와 자유시 일대의 한국계 청년들을 중심으로 조직한 한인 보병자유대대와는 달리 동시베리아에서 일제와의 독립 투쟁을 주도한 부대였다.
몇몇 독립군들이 이과 관련한 진술을 남겼는데, 러시아 영내에 진입한 독립군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독립군들이 무장해제 되어 아무르주 자유시 일대에 모여 있었던 것이다.
아마 오늘날 공개된 러시아 측 기록과 이르쿠츠크파의 일방적인 주장을 담고 있는 문건들을 비무장 독립군이거나 이들을 따라와 독립군이 되기를 희망했던 민간인들을 독립군 수에서 제외한 것이다.
따라서 단순 피난민을 제외한 비무장 독립군들은 보급 등의 지원에서 가장 나중 순위로 밀려 있었다.
수라제프크 주둔 독립군 수를 둘러싼 논쟁
간도지방 독립군 단체와 상해파가 주장한 수라제프카 주둔 독립군의 수는 최소 1,500여명 이상이다.
독립군 부대에서 매일 인원을 파악했기에 수십명도 아닌 수백명의 차이가 난다는 것은 자유시 참변 전체에 대해 지금까지 잘못 알려진 점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르주에서 박해받았던 사람들의 책.. 자유시 일대에 거주하였던 중국인, 고려인 수백여명 이상의 명단이 있다.
아무르주 빨치산 활동 기록 도서
사할린 의용대를 무정부주의 반란군으로 매도하는 남한의 책자들
사할린 의용대를 ‘무정부주의 반란군’으로 매도하는 문서도 2000년대 초반부터 00의 몇몇 역사책에 나타난다.
러시아 내전기인 1918~1922년경의 동시베리아 역사를 다루는 미국, 중국, 러시아, 한국, 일본, 영국 등 역사학계에서 거의 인정되지 않았던 일본의 파쇼주의자나 몇몇 냉전시대 반공학자의 이론을 남한의 위키백과 등이 인용되게 된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일제 침략자의 주장과 거의 동일하다.
‘1920년 니항사건은 러시아 내전 평화를 위해 온 일본군과 러시아 민간인 4천여명에서 1만 3천여명 정도를 학살한 사건이다.
1920년 4월 일본군이 감행한 연해주 4월 참변은 일본군의 니항사건에 대한 보복적 성격이 있다.
자유시 참변의 원인은 니항사건을 일으킨 박일리야 등이 한국계 무정부주의자 등과 합세하여 자유시를 점령하고 볼셰비키를 먼저 공격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유시 참변 무렵 이르쿠츠크파에 속했던 이지택•김낙현•최호림의 주장을 사실이라고 하고 이르쿠츠크파와 관계가 있었던 00파 몇 명의 주장을 인용한다.
1920년 10월경에 자유시에 니항부대(사할린 의용대)가 도착했을 때부터 주로 식량, 주택, 무장을 책임졌던 것은 자유시의 오하묵이 지휘관으로 있었던 자유대대가 아니었다.
러시아 볼셰비키 중앙정부도 정세가 바뀔 때마다 자유시 일대에 모인 한국 독립군 활동 지침을 변경하였다.
약속과 다른 무장해제, 보급 부족은 독립군들을 이르쿠츠크가 아닌 만주 국경지역으로의 이동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000, 000, 000 등 일부 동양비서부에 협조한 사람도 있었지만, 자유시 참변 전후의 사정을 봤을 때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한 사람들은 거의다 만주•중국•연해주•조선 등지로 돌아갔다.
블라가베셴스크와 자유시 일대에서 농업에 종사하던 수천여명의 고려인 역시 중립을 지킨 것으로 보인다.
(조선일보 1923. 1. 4. 자 보도에 따르면 사만리 지역을 포함한 흑룡강 일대 동포는 약 5,487명 정도라고 한다.)
그리고 아무르주 공산당이 모두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를 지원한 것은 아니다.
자유시에서 블라가베셴스크로 이르는 주요 길목이 봉쇄되지 않았던 것이다.
자유시 참변이후 1922년경 일본군이 러시아 내전에서 철수하자 자유시나 아무르주로 귀환한 고려인이 다수 확인된다.
그리고 ‘독립군의 자유시 이동은 오하묵의 공이다’라는 주장은 한 때 이르쿠츠크파에 협조하였던 000•000 등이 주장한 것이었거나, 이지택•최호림•김낙현 등의 일부 허위 주장에 현혹되었던 일부 00파•00당 계열이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상해파의 자금 지원과 고려인 및 러시아계 주민들의 지원 등이 사할린 의용대의 생명줄이었음은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과 러시아 정부문서에서 ‘4개월에서 6개월간 식량 지원이 없었다’고 자백하는 데서 분명히 나타난다.
수라제프카 주둔 독립군 수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할린 의용대의 수는 비무장 독립군을 포함한 약 1,800여명 이상이고, 그들에게 주택 등을 지원해야 했던, 마자나바와 자유시 일대 주민들이 기록한 2,000여명에서 3,000여명이 가장 합리적인 수이다.
참고 진술
(1) 김승빈 진술 내용
김승빈
(※ 김승빈은 오늘날 공개되는 러시아 정부 측 문서에 비해 상당히 축소하였다.)
나는 자유시 사변에 직접 참가자는 아니나 목격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1921년 6월 21일(28일의 착각)이라고 기억되는데, 그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 ‘고려혁명군사의회의 군대와 사할린 의용대의 군대가 서로 대진하고 있는데 무장 충돌이 일어날 위험이 있다’는 말을 듣고 곧 전선으로 나갔습니다.
가서 보니 혁명군사의회군대는 자유시 동남향 언덕진 비탈을 따라 산개하였는데 좌익에 까란다리시비리 군대가 배치되었고 그에 이어서 조선인 부대들이 배치되어 산병선을 이루었고 사할린 의용대 부대들은 수랍쓰까(수라제프카) 서남방 동구로부터 혁명군의회 군대들의 산병선을 대치하여 산병선을 이루고 있는 것을 내 눈으로 친히 보았습니다. …
낮 12시가 거의 되어 또다시 전선으로 향하여 가는 길에 시가를 벗어나자마자 한 방의 총소리가 나더니 그에 이어 양측에서 사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좀 더 나가니 보초가 통행을 금지하기 때문에 전선에까지 가지 못하고 도로 돌아왔습니다. 총소리는 해질 무렵에 가서야 그쳤습니다. 그러니 전투가 8∼9시간 계속된 셈입니다.
그(참변) 이튿날 사할린 의용대에서 탈퇴하여 자유시에 와 있던 홍범도 군대와 하사양성소 두 부대에서 군인 80여 명을 동원하여 전장(참변현장) 소제를 하였습니다. 즉 전사자들의 시체를 거두어 매장하였습니다. …
그 후에 관도 갖추지 못하고 장례식도 없이 길게 파놓은 웅덩이에 시체를 차례로 눕히고 그 위에 백목을 덮고 묻었습니다. … 사할린 의용대의 군인 수효가 2천여 명에 달했는데 그 중에서 33인이 전사하고 제야강을 건너다가 배가 엎어져서 물에 빠져죽은 사람들이 약간 있었다고 하며 포로로 붙잡힌 사람이 800여 명이 되었고 그 밖에는 사처로 달아났습니다.
(김승빈 진술 끝)
(출처 : ≪韓國獨立運動史資料集, 洪範圖篇≫, 韓國精神文化硏究院 編, 1995, 99∼100쪽).
(2) 리인섭 의 『회상기(아령과 중령에서 진행되던 조선민족해방운동)』 에 나오는 의군부 김재규 수기
원동공화국에 도착
상해파 리인섭
(김재규의 수기)
1921년 봄철이었다.
당시 소비에트 지대인 원동에는 완충국이라고 말하는 원동공화국이 있었다. 그 공화국은 북은 경계선이 몽골로 흘러 내려서 후마이갈 홍수로 들어가는 강 세젠가가 소련과 원동공화국 간 국경선이고, 동으로는 이만시와 쓰빠쓰까 도시 어간으로 흐르는 도비허강을 국경으로 하고 연해주를 점령하고 있는 흰파(백위파) 멜꿀노브가 왜놈군대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때 원동공화국 지대에는 인민혁명군이 각 도시를 파수하고 있었다. 우리가 우수리강을 건너서 원동공화국 국경을 당도하자, 원동공화국 인민혁명군에서는 많은 군대를 국경선에 정비하고 심지어 기관총까지 우리를 대치하여서 배치하고 있다가
우리가 당도하자 “무장해제를 하라고 이것이 국제상으로 사용하는 보통규례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경험이 없는 우리는 참말 놀랬으며, 천신만고하면서 가지고 그곳까지 온 무기를 내놓기는 참말 자기 생명을 내놓는 것과 같은 참경과 비애를 금할 수 없었다.
허영장 설명 낡은 군기대신에 새 군기 운반에 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원동공화국은 우리를 동정하는 국가이고 공동적 원수인 일본 군벌을 대항하는 데는 동일한 전초에 서 있는 우리 독립군에 전우라는 것을 잘 이해하고 별말 없이 무기를 벗어 놓았다.
그 후 우리는 그들이 인도하는 대로 철도선에 당도하여서 기차에 앉아서 하바로프스크 도시에 당도하였고 그곳에서 떠나서 흑룡주로 가게 되었다.
어디인지 알 수 없이 가는 기차는 당시 ‘보치가레와’라고 하는 Благовещенск(블라가베셴스크)는 갈니원 가는 교차점에 당도하였다. 그곳에 또 떠나서 자유시라는 곳을 채 가지 아니하고 있는 수라제프카(수람쓰크, 수라부스크)라고 하는 지방에 당도하였다.
그곳에는 이미 일본 침략군과 흰파(백위파)를 대항하여서 악전고투하고 전공을 많이 세운 이만 조선인 빨치산부대, 다반-청룡 조선인 빨치산 부대 또는 Сахалин(사할린) 조선 빨치산 부대들이 원동공화국 인민혁명군대에 편입되어 있었다.
우리들도 그곳에서 군복과 신발을 타서 입고, 낡은 무기대신에 새 무기를 공급받아서 기관포 4문까지 가진 훌륭한 정규병이 되었는데 나는 당시 기관포 부대 지도자였다.
그리고 매일 핫 둘 하고 체조와 조련을 하였고, 규율 있는 정규병이 되었다.
그때 자유시라는 곳에는 소위 자유대대라는 조선 군대가 있었는데 그 군대는 당시 아령(러시아령)국민의회에 지배를 받던 군대이고 한번도 흰파(백위파)나 일본을 반대하여서 전쟁한 일은 없는데 이미 그곳에 있던 여러 조선 군대들과는 적대 관계를 가지고 있으면서 서로 만나면 “베루지를 턴다”고 하면서 척하면 치고 욕하고 하면서 서로 적군을 대치하듯 하고 지내었다.
자유시 봉변(자유시사변)과 최후 사정.
우리 간도에서 들어온 부대들은 별로 그들 두 곳 조선인 군대와 서로 쟁투하는데 참여치 아니하였다.
하루는 내가 나선이강에 나가서 물고기를 낚느라고 밤새도록 있다가 거의 날이 밝아서야 병영으로 돌아왔다. 동지들은 어디에 가서 있다가 지금에야 오는 가고 놀랬고, 빨리 아침을 먹으라고 전쟁이 남즉하다고 한다.
(※ 일부 독립군의 진술에서는 자유시 참변은 밥먹다가 일어난 일이었다고 한다.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아마 공격부대인 볼셰비키 군대나 학살당한 사할린 의용대 측에서도 무슨 일이 생길 듯 하니, 그날만은 식량을 배급해 배불리 먹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밥 잘먹던 날 일어난 사건이라는 진술이 나온 듯하다.)
그러나 나는 아니 믿었다. “제 사람들끼리 무슨 전쟁이 날 수 있겠는고” 나는 생각하였다.
빨리 기관포를 제자리에 배치하고 준비하라는 명령이 내리었다.
나는 빨리 기관포를 검열하면서 기관포 열쇠들을 뽑아서 협낭에 간수하고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다.
헛말이 정말로 (전쟁)인지 충돌인지 시작되었다.
자유시 놈들이 우리 편을 포위하였다. 그리고 우리를 향하여 사격을 하였다. 그러나 우리 기관총은 헤를 잃고서 벙어리가 되었다. 나와 우리 기관총 부대는 포로 되었다.
당시 저쪽 총지도자 까란다리시비리는 나더러 묻기를 어찌하여 기관총으로 사격을 아니하였는가고 물었다. 나는 말없이 협낭에 있던 기관포 열쇠 4개를 내여 놓았다.
그는 잠잠히 무슨 생각을 하더니 우리를 포로병으로 인정치 말고 석방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때 참혹한 형상을 언제든지 잊지 못할 것은 우리가 간도서 온 군인들이 총을 거꾸로 집고 가만히 있는데 소위 자유군대라는 조선 놈들이 가만있는 우리 동지들을 총창으로 찔러 죽이던 것이다.
그때 우리 군대 19세인 강응렬(평양 5 형제)이는 나는 차마 붉은 군인이나 내 동족을 죽일 수도 그들에게 죽기도 애원하니 자살한다고 하고 자총하여 죽었다.
그리고 그 통에 죽은 동지들 선춘하(간도 나루받등)•강○○(간도 함막골인)•방봉만(간도 들메동사람)•홍범도(군인) 기타이다. 그때 우리 군대에 있던 동지 ; 김석종(퉁포늘人)•이춘섭(노투거人)•남해룡(나재거우人)•안알렉산드라 등이다.
그때 나선이강에 여러 사람이 빠져 죽었다.
그 참상을 당한 후에 우리는 자유시(어른)들에게 사로 잡혀서 Иркутск(이르쿠츠크)로 들어가서 다시는 일본 놈들과 싸우지도 못하고 말았다.
192년에 나는 원동에 다시 나와서 처음에는 치타서 만주로 가는 지대에서 러시아 군대에서 복무하다가 엄성무가 일탐인데 공산당으로 위장하고 치타로 오다가 체포하는 것을 관경하고 그 후 ст.Ин(인 역)에 와서 Волочаевск(볼로차엡스크) 해방 전에 참여하고 그해 가을에 연해주를 해방할 시에는 Спаск(스파스크)를 점령하는 전투에 참가하고 있다가 병이 나서 그 후 제대 되었다.
(김재규 진술 끝)
(3) 김홍일의 회고록 『대륙의 분노』에 나오는 주워들은 이야기들
......중략......
그러한 결정이 막 실천 단계로 접어들게 되자 적군은 한층 더 삼엄한 경계를 펴고 독립군 부대의 동정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그 때 자유대대는 마침 그러한 소련측의 결정을 기다리고나 있었다는 듯이 솔선하여 무장을 해제하고 소련측의 명령에 적극 협조하고 나섰다.
자유대대의 그 비위 상하는 꼴을 본 사할린 부대원들은 끝내 분통을 터뜨려 총격전의 충돌을 유발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니 그렇잖아도 늘 사할린 부대를 눈의 가시처럼 여겨 온 자유대대가 가만히 있을 턱이 없었다.
그들은 이제야말로 때가 왔다는 듯이 곧장 소련 적위군과 연합하여 사정없이 독립군 부대에 총부리를 돌려댔다.
그러니 승패는 너무나도 뻔했다.
그 때 제일 전면에 나서서 그들과 대항했던 사할린 부대는 대부분의 부대원들이 살상되는 참변을 면할 길이 없었고, 극히 일부 병력만이 도주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제2선에서 싸운 독립군 부대도 상당수가 부상하고 체포되었으며 나머지 병력은 기약도 없이 연해주와 만주 등지를 바라보며 피눈물을 머금고 적군의 올가미를 피하여 달아났다.
(김홍일 진술 하략)
(4) 김낙현(김학현) 진술 요약
김낙현(김학현)이 1967년에 쓴 회상기를 보면, 인민혁명군의 지도자 (2군단장) 셰르쇼프(Серышево)가 고려인 부대 총사령관인 까란다리시비리에게 단호한 응급조치를 취하라고 엄명을 내렸다고 한다.
※ 김낙현(김학현)은 자신의 수기에서 사할린 의용대가 먼저 싸우기로 결정하고 수라제프카 마을을 점령하고 자유시를 향해 공격을 감행해 마지못해 사할린 의용대를 공격했다고 썼으나, 이것은 거짓말이다.
(※ 공격을 감행한 2군단과 극동공화국 군부의 주장도 이르쿠츠크파와 유사하게 "사할린 의용대가 기습공격하여 반격하였다"라고 주장한다.)
(김낙현 진술 요약 끝)
2군단장 셰르쇼프.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오늘날 자유시에 있다. 바로 그 거리에서 독립군이 죽은 것이다.
자유대대장 오하묵
사살명령을 내린 공격측 일부의 주장은 허위가 많음
대체로 000,000 등 학살자 측의 주장은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적군(赤軍)2군단, 오홀라가 주장한 내용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
이르쿠츠크파의 일부가 사살명령과 무장해제 명령을 내리게 한 점에 있어서는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의 기록이 서로를 비방하면서 정반대로 다르고,
자유시 사건과 관련한 연구에 있어서는 이르쿠츠크파의 기록인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과 근래 일부만 공개된 러시아 정부 문서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 자료들은 사할린 의용대를 일방적으로 매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악의적으로 조작된 거짓말이 너무 많다.
(※ 최근 러시아 역사 자료, 고려인 도서 등에서는 일방적인 허위주장과 조작된 자료를 사실로 인정하지는 않는다)
첫댓글 사할린 의용대를 무정부주의 반란군으로 매도하는 남한의 책자들의 주장이 일제 침략자의 주장과 거의 동일하군요
예, 최근 2000년대 초반부터 그런 내용이 있습니다
과거에도 사할린의용대와 만주독립군들을 '무정부주의 반란군'으로 매도하는 자들이 있었지만..
그냥.. 자유시 참변을 뒤집어 씌우기 위한 조작극으로 인식하였는데...
최근 2000년대에는 남한에서 사실이라고 적는 인터넷 자료가 있습니다.
사할린 부대 측에서는 최호림은 연해주 일대에서 입으로만 모략하고 나불대는 자. 최고려는 독립군을 몰살시키고 마약장사를 하다가 교도소로 간 자... 등등
상호 비방이 있었고,
어느 일방의 주장을 인용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