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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야고보서의 말씀 2,1-9>
1 나의 형제 여러분,
영광스러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2 가령 여러분의 모임에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누추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온다고 합시다.
3 여러분이 화려한 옷을 걸친 사람을 쳐다보고서는 “선생님은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저기 서 있으시오.” 하거나 “내 발판 밑에 앉으시오.”한다면,
4 여러분은 서로 차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악한 생각을 가진 심판자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5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6 그런데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겼습니다.
여러분을 억누르는 사람들이 바로 부자가 아닙니까?
여러분을 법정으로 끌고 가는 자들도 그들이 아닙니까?
7 여러분이 받드는 그 존귀한 이름을 모독하는 자들도 그들이 아닙니까?
8 여러분이 참으로 성경에 따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지고한 법을 이행하면, 그것은 잘하는 일입니다.
9 그러나 사람을 차별하면 죄를 짓는 것으로, 여러분은 율법에 따라 범법자로 선고를 받습니다.
✠ 복음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8,27-33>
그때에
2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그리고 길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28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29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0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31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2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3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신 다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고 다시 물으시자,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합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마르 8,29)
참 잘한 대답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대답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아는 것만으로는 신앙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예수님이 누구신지는 마귀도 압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안다고 해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관계 맺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누구신지 안다고 해도 신앙인이 되는 것은 아니라 그분과 관계를 맺고 따라나설 때라야 신앙인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받아들여야 할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직접 알려주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마르 8,31-32)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반드시'(Dei)라는 말과 ‘명백히’(parresia)라는 말을 사용하십니다.
곧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에 있어서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을 ‘명백히’(parresia) 가르쳐주십니다.
그것은 피해서도 안 되고 거부할 수도 없는, ‘반드시’ 걸어야 하고 ‘반드시’ 실행해야 하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세 가지로 제시하십니다.
첫째는 ‘많은 고난을 겪는 일’ 입니다.
곧 한두 번이 아니라 ‘많은 고난’을 겪는 일이요, 그것을 자신을 지키기 위해가 아니라 타인을 살리기 위해서 겪는 일입니다.
둘째는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는 일’ 입니다.
곧 배척당하는 것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죽임을 당하는 일’까지도 받아들여, 그것이 진정 사랑임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비록 타인으로 부터 당하는 수동태로 이루어지는 길이지만, 자유로이 흔연히 가는 길입니다.
셋째는 ‘다시 살아나야 하는 일’ 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이 되는, 곧 예수님의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야 하는 의탁과 믿음의 길입니다.
바로 이 세 가지 일이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실행해야 할 일이요, 또한 그분을 따르는 우리가 ‘반드시’ 걸어야 할 길입니다.
그런데 막상 예수님께서 이 길을 실행하고자 하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베드로는 왜 예수님이 그 길을 가는 것을 가로막았을까요?
그를 꾸짖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 그 이유가 드러납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마르 8,33)
그렇습니다.
그는 입으로는 그리스도를 고백하지만, 실제로는 하느님의 일보다 자신의 일을 앞세워 그리스도께서 행하시고자 가시고자 하는 길을 막아섰던 것입니다.
곧 자신의 신변 안전을 도모하였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베드로처럼 “맙소사 주님!”(마태 16,22) 하며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가로막아서기도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당혹스럽고 황당하더라도 지금 벌어지는 일을 통하여 그분께 나아갈 수 있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에게 닥친 고난을 통하여 그 속에서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마르 8,31)
주님!
배척을 받는 고통을 받을 줄 알게 하소서.
몰이해와 곡해, 오해를 받아 견딜 줄 알게 하소서.
사랑하는 이로부터도 배척받고 거부됨을 받아들일 줄 알게 하소서.
마침내는 죽임을 당하는 일까지도 받아들일 줄 알게 하소서.
순명으로 아버지의 뜻에 따라 가야 하는 길이기에, 사랑으로 흔연히 배척받을 줄 알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공자께서는 “아침에 진리의 말씀을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한이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아침에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미사 봉헌을 하고 성체를 모시면 저녁에 죽어도 한이 없어야 하는데, 돌아보면 후회도 많고 말씀을 들은 사람인지, 미사를 봉헌하고 성체를 모신 사람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속좁게 살기도 합니다.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지 주님을 모신 감사함을 성당 문을 나서기가 무섭게 잊어버리곤 합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도 그것이 주님의 마음에 드는 일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나면 영락없이 주님의 마음을 상해드리고 맙니다.
“무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로마 8,5)
그리고 “육 안에 있는 자들은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로마 8,8)
그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육적인 욕망을 따르고 있으니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하고 싶은 일을 우선순위에’ 놓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해야 하는 일을 먼저’ 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앞세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는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8,29)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시며 ‘사람의 아들이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베드로는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 하는 꾸지람을 듣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이 달랐기 때문에 반박을 하였습니다.
사실 지금껏 스승을 믿고 따라왔는데 당신이 떠나시면 우리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하는 마음도 있고, 당신이 불행한 길을 가신다는데 어떻게 보고만 있겠습니까 하는 마음도 담겨 있습니다.
지금껏 걸어온 길이 성공적이라 생각하였는데 지금 계획이 바뀐다면 그것은 스승님에게도 자기들에게도 실패하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스승과 함께 영광을 누리고 싶은데 수모와 배척을 당한다니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베드로 뿐 아니라 제자들 모두가 스승의 깊은 뜻을 아직도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인간적인 것에 매이는 것, 진리의 길을 가로막는 것이 사탄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아버지 하느님의 계획인데, 그것을 반박하고 그 길을 가시고자 하는 예수님을 방해하였으니 베드로는 사탄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느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 일을 먼저 하려 한다면 우리도 역시 사탄이 되고 맙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현실적인 나의 잇속을 챙김으로써 얼마나 자주 사탄이 되고 마는지...
예수님을 따르려면 희생과 고통을 감당해야 합니다.
고통 없이 영광 없습니다.
이 시간 쉽고 편한 일, 쾌락을 즐기며 돈 되는 일을 쫓고, 소유와 지배, 명예에 맛들이고자 하는 마음, 내 생각이 다 인양 남에게 주입시키려는 사탄의 마음을 주님께서 다스려 주시기를 청합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신앙고백도 자격이 필요하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신앙을 조사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고 엘리야, 어떤 이들은 그냥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대답합니다.
확실히 성령을 통해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이르십니다.
제자들은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뭐하러 제자들을 뽑으신 것일까요?
예수님은 곧이어 당신이 많은 고난을 받고 유다 지도자들에게 배척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함을 선포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 말하지 말라고 한 거야!”란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저에게 “신부님, 사랑해요!”라고 말할 때 이 말은 진실일까요?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저도 어떤 분들에게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이제 저를 가르치려고 합니다.
자기 뜻대로 좌지우지하여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일의 도구로 사용하려고 합니다.
사랑한다고 할 수 있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는 사랑이 사랑이 아니게 됩니다.
영화 '똥파리'의 감독이자 배우인 양익준 씨가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에 나와 공황장애 13년 차의 괴로움을 상담받았습니다.
그는 초등학생에게까지 극존칭을 쓰며 사람들을 만날 때는 “저는 X 밥이에요”라고 자신을 소개할 만큼 사람들 앞에서 한없이 자신을 낮추는 사람입니다.
이것도 하나의 신앙고백입니다.
“저는 아주 작은 사람이고, 그래서 당신을 높여드립니다”라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에게 양익준 감독이 그렇게 자신을 낮추면 그 모습이 진실하게 보일까요?
양익준 감독은 그러면서도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너무 만만하게 보는 것에 대한 불만이 있습니다.
학생 때는 다른 사람과 싸우던 아이가 조용히 앉아있던 자신의 머리를 의자로 내려치는가 하면, 아무 잘못도 없는데 사람들이 다가와 자신에게 심한 욕설을 퍼부은 적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저런 상황으로 공황장애가 오고 7년간 약을 안 먹고 버티다가 이러다 죽을 것 같아 6년째 약을 먹고 있는 것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사람이 나무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지금 양익준 감독은 사람이 나무로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을 해칠 수 있는 사람, 그래서 살기 위해서는 내가 고개를 숙여야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에게 무시당하는 것은 싫은 사람입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입니다.
곧 사랑입니다.
영화 ‘똥파리’에는 그의 가정사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방 두 칸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를 포함하여 일곱 식구가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심하게 구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유일한 아들이지만 어머니를 보호하지 못하는 죄책감과 아버지에 대한 미움, 어머니의 무기력함에 대한 분노 등이 가슴 깊이 자리했던 것 같습니다.
양익준 감독은 아버지와 같은 폭군이 되기보다는 어머니와 같이 온순한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갈 것을 결심한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곧 세상입니다.
자녀가 아버지를 보는 모습이 곧 세상을 보는 모습입니다.
양 감독에게 세상은 언제든 자신에게 폭력을 가할 존재입니다.
자신은 어머니처럼 더 작아지고 불쌍해지면 세상이 자신을 불쌍히 여겨줄 것 같아서 그런 방법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더 작아지려는 이를 더 잔인하게 짓밟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나무처럼 만만하게 보아야 합니다.
양 감독이 우선하여서 해야 하는 일은 아버지에 관한 판단을 멈추는 일입니다.
부모를 판단하게 되면 세상 모든 사람을 판단하게 됩니다.
판단하게 된다는 말은 그 사람 위에 올라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고개를 숙인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런 것과 같습니다.
“신부님, 당신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그런데 조금만 잘못하면 난 언제든 당신을 심판하고 내쫓을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이미 하느님보다 높은 위치에 올라선 사람입니다.
그렇게 보이지 않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분명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라 고백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그리스도를 판단합니다.
하느님을 심판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아담도 죄를 지은 이유를 하느님께서 하와를 만들어주셨기 때문이라고 하느님 탓을 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부르더라도 그것은 올바른 신앙고백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고백하기 이전에 내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면 하느님 위에 서 있지는 않은지 살펴야 합니다.
양익준 감독은 자신의 분노를 '똥파리'라는 영화에 토해냈고, 그렇게 아버지가 그런 사회 환경에서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조금씩 초등학생에게도 극존칭으로 말하는 것을 그만두고 조금씩 세상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완벽한 부모가 있을 수 있을까요?
완벽한 부모는 없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 완전하게 사랑한 것입니다.
그러니 과거의 일은 과거의 일로 묻어두고 지금 내가 나아가야 할 바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 기억에 묶여있으면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고백은 다 헛것이 됩니다.
오은영 박사에게 이런 엄마가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 엄마는 아이였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아빠의 죽음을 “너 때문에 아빠가 돌아가셨다”라고 아이 탓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녀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 엄마였던 것입니다.
그런 엄마 밑에서 자라서인지 자신의 아이만 보면 그렇게 화가 난다는 것입니다.
자신도 엄마처럼 아이를 학대하게 될 것 같다는 것입니다.
오은영 박사는 아이들에게 체벌을 가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저도 이것에 동의합니다.
체벌은 아이에게 “너의 영역은 없어!”라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살은 나의 영역입니다.
그것이 부모일지라도 누군가가 내 영역에 침범하여 나를 아프게 할 수 있다면, 나는 마치 장난감이라도 된 것처럼 한 인격체로서의 자존감을 상실하고 내가 그런 장난감과 같은 존재이니 다른 이들도 장난감처럼 여겨 다리를 부러뜨려도 된다고 여기게 됩니다.
오은영 박사는 그 엄마에게 뼈를 깎는 아픔으로 체벌하고 싶은 마음을 이겨내라고 하였습니다.
9년 뒤에 그 엄마가 찾아왔다고 합니다.
9년 동안 아이에게 체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분노가 끓어오를 때가 많았지만 정말 뼈를 깎는 아픔으로 참아내었습니다.
그렇게 아이를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내 안에 사랑이 증가합니다.
또 그렇게 나에게 상처를 주었던 어머니를 용서할 힘을 얻게 됩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먼저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고, 그래서 누구도 심판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면, 그제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유다를 많이 판단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가 한 번 예수님을 배신한 그 밤에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심판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유다를 받아들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나 유다나 별반 다를 게 없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누구도 심판할 수 없는 수준으로 내려왔을 때 내가 그분을 그리스도로 고백할 자격이 생깁니다.
내가 누군가를 아직 용서하지 못하고 사람을 심판하는 버릇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하느님까지도 심판할 수 있는 사람임을 알고 그런 상태로 신앙고백을 하며 믿음이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됨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어떤 고난과 역경도 그 속에서 내딛는 미약한 한 걸음보다 강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 이 세상 살아가면서 그 누군가로부터 ‘사탄’이라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누군가가 아무리 큰 실수를 했고, 또 아무리 밉다 할지라도, 적어도 이런 표현까지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수제자 베드로 사도에게 정말 충격적이고 원색적인 표현 ‘사탄’이라는 말까지 써가면서 그의 그릇된 생각을 고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강경한 어조로 베드로 사도를 질타하는 원인이 어디에 있었을까요?
이어지는 예수님의 발언에 다 들어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일은 별로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베드로 사도는 아직도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구원은 십자가를 통해서 온다는 진리, 진정한 생명은 죽음을 통해서 온다는 진리를 그토록 강조하셨건만, 베드로 사도는 그 사실을 아직 깨닫지 못했습니다.
저 역시 가끔 제 안에 들어있는 사탄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때로 하느님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머릿속은 오직 인간적인 것들뿐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인정받고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기보다 인간들로부터의 인정을 더 추구합니다.
진지하고 영적인 사고방식보다는 오로지 세상적 잣대로만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마음속엔 오직 현세적 성공, 사람들의 박수갈채, 축척, 상승의 욕구로 가득 차 있어, 보다 본질적인 것들, 영원을 향한 갈망, 하느님을 향한 발돋움, 희생, 배려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습니다.
풀잎 위에 맺혀있는 아침 이슬같이 해가 뜨면 즉시 사라지고 마는 허상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베드로 사도가, 그리고 우리가 너무나 안타까웠던 예수님이었기에, 사탄이라는 강경한 표현까지 사용하며 회심을 촉구하신 것입니다.
오래전 ‘그래도 계속 가라’(Keep Going)는 멋진 제목의 책을 봤습니다.
“인생에 있어 기쁨의 순간은 찰나이다.
때로 기쁨이 오랜 장마 간간이 먹구름 사이를 뚫고 잠깐 내비치는 햇살처럼 미약하기만 하고, 대부분 슬픔과 고통의 연속인 것처럼 보이는 우리네 인생이지만, 그래도 계속 가라!”
베드로 사도는 ‘그래도 계속 가라’를 충실히 실천했습니다.
사실 베드로 사도가 보여준 모습, 예수님 보시기에 참으로 실망스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토록 오랜 시간, 귀에 못이 박히게 강조해왔지만, 오늘 보시다시피 베드로 사도는 전혀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엉뚱한 말을 해대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신은 힘과 권력을 바탕으로 살상과 정복을 일삼는 세상의 왕이 아니라 비폭력의 하느님, 고통의 메시아, 산 제물로 바쳐질 어린 양임을 그토록 강조해왔건만, 베드로 사도는 아직도 납득하지 못하고 허황된 꿈속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베드로 사도를 향한 예수님의 질책을 매섭기만 합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수제자 베드로의 위신이 공개적으로 찌그러지는 순간입니다.
속까지 환히 들여다보시며 정곡을 찌르는 예수님이 오늘따라 엄청 밉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참혹할 정도로 부끄럽습니다.
자존심이 구겨진 베드로 사도의 머릿속은 ‘이런 말까지 들어가며 계속 가야 하나?’하는 의구심으로 가득 찼겠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의 태도를 보십시오.
그래도 계속 갑니다.
여기에 베드로 사도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삶이 우리를 위해 준비한 것은 행복과 기쁨만이 아닙니다.
때로 온 우주가 우리에게 호의적인 것 같은 순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풀잎 끝에 잠시 맺혀있는 아침이슬과도 같습니다.
눈 깜박할 사이에 우리들의 시야에서 사라집니다.
어떤 고난과 역경도 그 속에서 내딛는 미약한 한 걸음보다 강할 수 없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생각한 것은 예수님이 ‘보통 사람’은 아니고 예언자 같긴 한데 메시아는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음을 나타냅니다.
그래도 그것은 예수님을 ‘좋은 쪽’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가리켜서 ‘사기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마태 27,63).
예수님을 ‘사기꾼’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사람들을 속이는 일’로 생각합니다(마태 27,64).
오늘날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신앙인들을 ‘사기꾼에게 속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들’로만 생각합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라는 베드로 사도의 말은 “저희는 스승님을 메시아(구세주)이신 분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라는 신앙고백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혼자서 대답했지만, 베드로 사도만의 신앙고백이 아니라 사도들 모두의 신앙고백입니다.
이 고백은 나중에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신앙고백으로 발전하고(요한 20,28),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사도 4,12)라는 ‘증언’으로 이어집니다.
사도들이 그렇게 고백하고 증언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직접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일’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요한 5,36).
‘예수님의 일’이라는 말에는 예수님의 ‘말씀’과 ‘생활’도 포함됩니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마다 다르게 당신의 일을 보여주신 것이 아닌데, 똑같은 일을 보고서도 왜 사도들은 ‘메시아’로 믿고, 다른 사람들은 ‘예언자’ 라고만 생각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사기꾼’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런 차이는 왜 생겼을까?
이 질문의 답은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마태 13,15)입니다.
‘시메온’과 ‘한나’처럼 평생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금방 ‘메시아’를 알아보고(루카 2,25-38),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못 알아보고, 사기꾼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일’이 ‘사람들을 속이는 일’로만 보였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라는 예수님의 질문을 오늘날의 우리에게 적용해서, “너희는 왜 나를 믿느냐?
너희는 왜 성당에 다니느냐?”로 바꿔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대답은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받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가 되어야 합니다.
질문이 “너희가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라면, “구원과 영원한 생명입니다.”가 되어야 합니다.
입으로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만 바라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주님께서 주시지 않을 것을 바라고 있으니 불쌍한 사람이고, 헛된 믿음과 헛된 희망으로 인생을 허비하고 있으니 불쌍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을 “너는 누구냐? 너는 어떤 사람이냐? 너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로 바꿔서 생각해 볼 필요도 있습니다.
이 질문에 자기의 이름이나 직업을 말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신앙인은, “저는 그리스도교 신앙인입니다. 저는 신앙인으로서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만을 희망하고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라고 ‘곧바로’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지시하신 것은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는 ‘메시아’는 이스라엘에 정치적인 독립을 가져다 줄 ‘이스라엘만의’ 메시아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예고 말씀’은 당신이 어떤 메시아인지를 밝혀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바쳐서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신 분이고, 죽으셨지만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을 완전히 정복하신 분이고, 또 당신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주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으로써 죽음을 물리치신 분이고, ‘십자가의 무력함’으로 구원을 이루신 메시아” 같은 말은 ‘신학적인 말장난’입니다.
정확한 표현은 “예수님은 당신의 부활로 인류 구원을 이루신 메시아”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십자가의 고통을 숭배하는 종교가 아니라 부활을 희망하고 믿는 종교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 끝나버린 예수님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사도 2,36).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말린 것은 십자가 수난의 의미를 아직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고, 마르타처럼 ‘부활’을 ‘마지막 날의 부활’로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요한 11,24).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가로막는 것은 ‘사탄의 일’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일’이라는 말은 ‘인류 구원사업’을 뜻하고, ‘사람의 일’이라는 말은 지금 당장 몸이 편안한 길만 찾는 태도를 뜻합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버림과 비움의 여정 -공평과 겸손>
어제 오전에는 강정 마을에서 오전 11시 거리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미사 전 숙소를 방문한 수도원 주방 봉사를 하다 잠시 제주도에 머물고 있는 아가다 자매를 비롯한 한분 자매에게 고백성사를 드렸습니다.
평화센터 사무실 직원 박미도 유수티나 자매는 강론을 출력해 주면서, 20년 전 수도원 피정 중 면담성사 시 보속으로 말씀 처방전을 받았고 어제 제 강론도 읽었다 전해주어 참 반가웠습니다.
강정마을 거리 미사는 약 20명 정도 참석했고, 무수한 자동차들이 지나는 대로변에 자리잡은 생각보다 참 초라하고 가난한 자리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로서 5389일째 미사 후 즉시 순례 여정에 올랐고 강 사도요한 가이드 형제의 안내에 따라 주로 바닷가 도로를 따라 명소에 들렸습니다.
늘 불암산만 바라보다 어제는 참 많이도 바라본 제주도 서귀포 근처의 바다였고 사진에 담았습니다.
문득 산숭해심(山崇海深),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라는 말마디의 추사 김정희의 글씨가 생각났습니다.
더불어 '인자요산 지자요수(仁者樂山 智者樂水)', 인자한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는 말도 생각났습니다.
그러니 제 평생 스승은 수도원 배경의 불암산과 제주도 보물섬을 에워싸고 있는 깊고 넓은 바다임을 마음 깊이 새겼습니다.
정말 주님처럼 인자와 지혜를 겸했으면 소원이겠고, 비움의 여정에 항구할 때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이어 해안가를 따라 SGI연수원 절벽 길 산책에 지금은 폐가가 된 옛 이승만 대통령 별장과 허니문 하우스에 들렸고 거문여 해안을 산책했습니다.
어제 따라 거센 해풍이었지만 땅에 깊이 뿌리내린 억척스런 생활력의 해송(海松)들이 제주도 사람들을 닮았겠다 싶어 새삼스런 감동이었습니다.
“성산포에서는 설교를 바다가 하고
목사는 바다를 듣는다
기도보다 더 잔잔한 바다
꽃보다 더 섬세한 바다
성산포에서는
사람보다 바다가 더 잘 산다”
지금은 94세(1929년생) 이생진 시인의 시비가 무수한 시비들 첫째에 자리하고 있었고 예전 즐겨 되뇌던 고백시도 생각났습니다.
“끊임없이
비워지고 낮아져
모두를 ‘받아’들여
마침내
‘바다’가 되었다”
비움의 여정을 통해 자주 바다가 되고 싶다는 마음에 써놨던 좌우명시 한연도 생각났습니다.
강과 바다를 동시에 살고 싶은 염원을 담은 시요, 새삼 바다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강임을 깨닫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하느님 바다 향해 흐르는 강이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는 좁은 폭으로 또 넓은 폭으로
때로는 완만하게 또 격류로 흐르기도 하면서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흐르는 ‘하느님 사랑의 강’이 되어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찬미받으소서.”
웅덩이에 고인물같은 안주의 삶이 아니라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내적여정의 정주(定住)의 삶이 되기를 소망하며 쓴 자작 좌우명시 중 한연입니다.
참으로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삶의 여정이 그대로 비움의 여정입니다.
매사 모든 어려움에 좌초함이나 좌절함이 없이 겸손과 비움의 계기로 삼아 끊임없이 주님을 향해 전진하는 삶이야 말로 진짜 영성생활입니다.
이어 베케 정원을 방문했고 여러 사진도 찍었습니다.
‘베케’는 ‘돌무더기’의 제주도 사투리 용어라 합니다.
가이드 형제의 고등학교 동창 친구가 운영하는 정원인데, 예전에는 귤밭이었고 친구의 어머니가 귤밭으로 개간하면서 캐어 쌓아놓은 돌무더기를 친구가 운치있는 동산으로 조성했다 합니다.
이어 뒤편에는 창고터에는 여러 자연스런 조화물들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새삼 정원 주인의 부모에 대한 효심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폐허(廢墟)의 미학(美學)’을 최대한 활용한 주인의 순수한 마음과 미적 안목에 감동했습니다.
젊은 남녀들이 끊임없이 줄을 잇고 있는 참 매력적이 정원이었습니다.
쇠소까 관광 후 저녁식사 전에는 연락이 된 김순샘 율리아 자매의 방문이 참 반갑고 기뻤습니다.
1년전 수도원에 피정왔었던 분으로 제 강론을 읽고 방문을 알게 되었으며 소정의 선물금도 전달받았습니다.
새벽마다 성서 필사 후 제 강론을 읽고 하루를 시작하고 출근길에 오른다는 참 아름답고 사랑스런 주님의 자녀입니다.
세상 곳곳에서 아름다운 주님의 자녀들이 각자 삶의 제자리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해 살고 있다는 사실이 큰 위로와 격려의 구원이 됩니다.
평화센터에 아침 일찍 출근한 생면부지 자매님의 “요셉피나라 합니다.” 라는 경쾌한 인사의 감동도 잊지 못합니다. 보편적 이름의 세례명이 순간 서로의 벽을 허물고 하느님 안에서 누구나 한 식구임을 깨닫게 한 은혜로운 체험이었습니다.
참 재미있게도 강론 주제가 여정이란 단어 안에서 하나로 모아집니다.
엊그제는 깨달음의 여정에 이어 어제는 개안의 여정, 그리고 오늘은 버림과 비움의 여정입니다.
참으로 진짜 영적 여정은 날로 자신을 비워가는 비움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비움을 통해 비움의 주님을 만나 비움과 겸손의 주님을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무지의 어리석은 사람만이 채우려 시도합니다.
채울수록 부족을 느낄 뿐 영적 갈증과 허기는 계속될 뿐입니다.
사람 차별 역시 무지의 산물입니다.
몰라서 차별이지 알면 알수록 공평무사한 마음이 됩니다.
이 또한 비움의 여정에 충실할 때의 열매입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영광스러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들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깁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지고(至高)한 법을 이행하면, 그것은 잘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차별하면 죄를 짓는 것으로, 여러분은 율법에 따라 범법자가 됩니다.”
무시, 멸시와 더불어 차별, 편애가 정말 마음 아프게 하는 죄입니다.
비상한 사랑이 아니라 무시와 차별이 없는 평범한 사랑이 제일입니다.
참으로 자기를 비워가면서 자신의 가난과 부족을 알 때 저절로 공평무사한 차별없는 주님의 연민의 사랑을 닮아갑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의 수제자 베드로의 민낯이 드러나는 장면도 충격이나 우리는 귀한 진리를 배웁니다.
베드로처럼 제자와 사탄의 양면 가능성을 지닌 우리들입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멋지게 주님을 고백했던 베드로가 그리스도에 대한 무지의 몰이해로 주님의 심한 질책을 받습니다.
졸지에 주님의 길을 막는 걸림돌, 사탄이 되어 버립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그대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무지에 대한 유일한 답은 회개뿐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만 추구할 때 누구나의 가능성이 사탄입니다.
빛에 그림자가 따르듯 늘 사탄의 그림자를, 유혹을 깨어 경계해야 합니다.
이런 주님의 충격요법적 극약 처방에 베드로는 깊이 배우고 깨달았을 것이며 자신을 비워 더욱 겸손해졌을 것입니다.
참으로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됐을 것이며 수난과 죽음, 부활의 파스카 주님께 대한 이해도 한없이 날로 깊어졌을 것입니다.
참으로 베드로의 비움의 여정, 배움의 여정, 겸손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었을 전화위복의 체험이었음이 분명합니다.
무지하여 어리석을 때 차별이요, 무지하여 모를 때 교만입니다.
참으로 끊임없는 회개와 비움을 통해 자기를 알고 주님을 알아 주님을 닮아갈 때 비로소 공평무사, 대자대비의 사랑이자 지혜요 겸손한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이 또한 평생과제입니다.
우보천리요 천리길도 한걸음부터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우리 모두 영원한 초보자의 정신으로, 초발심의 자세로 비움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토회 성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사람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이 많지만 오늘은 손에 대해서 생각을 해 봅니다.
사람의 손은 마법을 부리는 것처럼 참 다양한 기능이 있습니다.
손으로 물건을 만들 수 있습니다.
감동을 주는 예술품 대부분은 작가의 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손으로 하는 서명은 소유를 결정짓기도 합니다.
독립을 선언하기도 합니다.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기도 합니다.
본인은 물론 이웃을 도울 수 있습니다.
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합니다.
사제가 미사 중에 축성하는 손은 제병과 빵을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될 수 있도록 합니다.
그런가하면 사람의 손은 비극을 잉태하기도 합니다.
잘못한 서명은 위험을 초래합니다.
많은 사람의 운명을 바꾸기도 합니다.
도박하는 손은 가산을 탕진하게도 합니다.
훔치는 손은 감옥에 가게도 합니다.
손은 사람을 죽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범한 두 손으로 불붙는 지옥으로 가기보다는 한 손을 잘라내고 천국으로 가는 것이 좋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소중한 선물인 손을 나는 어떻게 사용하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를 질문하셨습니다.
하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다면 ‘제자들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엘리야라고 하기도 하고, 죽었던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기도 하고, 예언자 중에 한 명이라고 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한 모습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먹고, 함께 다녔던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야기합니다.
"주님은 살아계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로부터 특별히 선택받아 기름부음 받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를 칭찬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가야할 길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그 길은 고난과 역경의 길이었습니다.
그 길은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반대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생각한 그리스도의 길은 성공과 영광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책망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면 예수님께로부터 부름 받은 사도인 베드로일지라도 사탄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하느님의 일만 생각한다면 이방인일지라도, 세리일지라도, 과부일지라도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자세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이, 고아, 과부를 차별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한 사람보다는 아픈 사람을 위해서 오셨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지금 내가 처한 상황, 직분,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헌신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이 넘치고,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으시어, 그 모든 곤경에서 구원해 주셨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텔레비전을 보면 많은 광고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광고에 출연하는 사람은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유명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저 사람이 광고하는 것이라면 믿을만하다’라고 생각하고, 그 유명인을 닮고 싶은 생각에 광고 상품을 산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제품과 유명인의 연관성은 거의 없습니다.
회사의 입장에서도 누가 광고를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광고에 출연한 유명인이 나쁜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면, 손해배상을 청구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세상 끝까지 기쁜 소식을 전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 무대의 출연진은 누구입니까?
바로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모두입니다.
내 삶 자체가 중요합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나의 모습이 부정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삶이라면 사람들은 주님을 절대로 따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을 멀리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라면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등 공신이 됩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야 세상에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 8,27)라면서 세상 사람들의 자기 이해를 물으십니다.
우선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통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헤로데 임금이 죽인 세례자요 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구약성경의 기름을 바르고 메시아를 세운 엘리야로, 또 마카베오서에 나오는 유다의 꿈에서 황금검을 주었던 예레미야로, 그 밖의 위대한 예언자 중의 한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최대의 평가이기에 제자들도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과 그동안 함께 했던 제자들의 이해도를 묻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 8,29)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환호 속에 나타나는 메시아가 아니라 사람들이 눈치를 채지 못하는 가운데 오직 믿음 있는 자만이 알아볼 수 있는 메시아를 제자들이 알아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성령의 영감을 받아 이렇게 대답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수난과 죽음 예고에 붙들고 반박하지요.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이라는 말까지 듣게 됩니다.
사탄은 광야에서 40일 동안 유혹을 받으실 때, 그 유혹자를 사탄이라고 하셨지요.
즉 사탄은 하느님의 일을 방해하며 유혹하는 자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방해하고 유혹하는 사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 뜻을 따르며, 주님을 제대로 알리는 주님의 참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주님을 어떻게 알리고 있습니까?
나의 삶은 주님 보시기에 만족스러운 삶일까요?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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