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를 가기 전에 이번에 가야 할 헤르만 헤세의 집에 얽힌 이야기를 몇 년 전에 썼는데, 그 글을 읽다가 올립니다
사람의 한평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 있기도 하고, 가장 중요한 일과 직면 할 때가 있다. 헤르만 헤세가 그런 시간을 맞았던 때가 1930년대 초였다. 사랑하는 여인인 니논 돌빈과 헤세가 취리히를 방문했다. 그의 친구인 한스 보드머 내외가 초청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니논 돌빈은 누구인가. 열네 살의 니논이 헤세의 소설 <페터 카멘친트>를 읽고 헤세에게 편지를 쓰며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때 헤세의 나이 31세였다. 열여덟 살의 나이 차가 있었지만 그렇게 시작되었던 인연이 우여곡절 끝에 훗날 사랑의 결실을 맺은 것이다. 보드머 부부는 헤세가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마다 여러 번에 걸쳐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사람이다. 보드머 부부는 ‘원형原形의 집“이라는 이름의 아름답고 오래된 집에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함께 모여 앉아 포도주를 마시면서 담소를 나누던 중 헤세의 병에 대하여, 이야기했고, ’자신이 직접 가꿀 수 있는 정원이 아름다우면서도 안락한 자신의 집.‘ 을 가지고 싶을 때도 있다고 니논이 말했다. 그말을 들은 한스 보드머가 소리쳤다.” “당신 들 집 한 채가 있어야 겠구먼!” 헤세는 그 말이 농담인 줄 알았지만 보드머는 진지하게 꺼낸 말이었다. 그는 부자였고, 취리히에 있는 제지 공장 이사였으며, 귀중한 베토벤의 소장품들을 갖춘 박물관의 소유주였다. 헤세에게 그만한 정도의 선물은 할 수 있는 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헤세는 오랜 소망이 이루어지려는 찰나 머뭇거렸다. 상대적으로 독립된 생활, 그 자유로운 삶을 집을 증여받으면서 포기 당하는 것이 아닌가? 집주인이 되면 해야만 하는 일들로 부담스럽지 않을 것인가, 하는 생각이었다. 그때 보드머가 절충안을 제시했다. 집의 소유주는 보드머가 되고, 헤세와 니논은 그들의 원하는 기간 동안 평생 그 집에서 살 수 있다. 그리고 헤세의 죽음과 더불어 소유권은 보드머에게 다시 귀속된다는 내용이었다. 집을 어디에 지을 것인가, 집의 모양은 어떻게 지을 것인가는 니논에게 맡겨졌다. 헤세는 집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다. 집터는 몬타놀랴 외곽에 위치했고, 1만 1천 평방미터에 달하는 방풍이 잘 되는 곳이었다. 남쪽으로 급경사를 이루고 있는 그 부지에서 포를레치 방향에 시선을 돌리면 루가노 호수를 바라볼 수 있는 경관이 빼어난 곳이었다. 집은 전적으로 헤세의 욕구에 맞춘 것으로 그 건물은 서로 다른 출입문이 있고 건물과 건물을 연결 시켜주는 문만 있는 두 채의 집으로 이루어졌다. 작은 채는 헤세가 전혀 방해받지 않고 생활하고 일할 수 있는 헤세의 영토였고, 또 하나는 니논의 방, 그리고 손님의 방과 일하는 사람들의 방, 그 밖에 살림을 위한 방이었다. 그렇게 헤세에게 집과 함께 모든 것을 제공해주었던 한스 보드머는 헤세보다 일찍 1950년대 말 일찍 세상을 떠났고, 그가 살고 있는 곳에 사람들이 계속 집을 지었다. 그래서 헤세는 ‘아름다운 정적과 품위’만을 보존하기 위해 비탈진 초원의 숲의 일부분을 추가로 매입하는 것을 엠마 보드머와 상의하고 엠미 보드머를 “언덕의 안주인”이라고 불렀다, 여든여덟 번 번 째 생일을 지내고 난 8월 8일 모차르트의 소나타 제 7번 C장조 쾨헬번호 399번을 듣고 나서 잠자리에 들었고, 뇌졸중으로 아주 편안하게 이 세상을 떠났다. 1962년 8월 11일 장례식이 거행되었으며 니논 헤세는 4년이 지난 1966년 9월 22일 헤세가 있는 세상으로 길을 떠났다.
헤세는 그 집에서 살았으며 그 집을 찾았던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히틀러가 광란의 전쟁을 벌이던 그 시기에는 독일을 떠난 예술가들이 그곳에서 많이 와서 체류했다. 그중에 한 사람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토마스 만이었다. <마의 산>, <선택된 인간> 등 불멸의 저작을 많이 남긴 그는 헤세보다 두 살이 더 많았는데, 인생의 황혼기 많은 시간을 두 사람이 같이 보냈다. “우리들은 토마스 만과 함께라면 정말 신나게 웃을 수 있었다. 그는 사람들이 전하는 그 어떤 이야기에도 즐겁고 유쾌하게 반응했다. 그것이 그를 10년 정도는 젊게 만들어주었다.” 헤세가 전한 토마스 만과의 이야기다.
그가 쓴 책의 제목처럼 ‘황야의 이리’인 헤세가 안정을 찾고 열정적으로 글을 쓰며 살 수 있는 곳을 제공해준 사람이 그의 친구인 보드머였다. 15세기 이탈리아의 메디츠 가문이 피렌체의 천재적 예술가들인 단테나,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다빈치, 라파엘로, 보카치오 등을 후원하여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던 것처럼, 헤세는 그 친구를 만나 마음껏 자신만이 쓸 수 있는 글을 써서 노벨상을 받을 수 있었고, 오늘날 헤세의 문학이 세상을 풍요롭게 해주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고대 그리스이 식민지인 소아시아의 이오니아 지방의 도시인 밀레토스에서 BC 624~545년까지 살았던 철학자인 탈레스가 어떤 돈이 많은 부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대는 후하게 베풀고, 나는 서슴없이 받지만 비굴하게 아첨하지도 않고, 품위를 잃어 천해지지도 않고, 불평불만을 떠벌리지도 않는다네.”
참으로 바람직한 관계이고, 참으로 중요한 말이다. 주고 받는 관계가 이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관계가 보드머와 헤세의 관계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현실은 어떤가?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에게 병조판사와 공조판서를 역임했던 신현申絢과 실학자 최한기崔漢綺등이 수많은 자료와 재정을 지원해 주어서 길이길이 이어갈 지도를 만들었다. 그런 유구하고 아름다운 전통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의 시대는 “돈에는 더 많은 돈 이외는 친구가 없다.“는 러시아 속담처럼 더 많은 돈을 벌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시대다. 돈과 권력이 최상의 기쁨이고 즐거움이며 행복이라고 여기며 그 돈과 권력을 자손 대대로 물려주기 위해 강남과 서울에 집과 건물을 사는 것이 지상의 목표가 된 것이다. 잠시 살다가 간다. 갈 때 ‘지상의 방한 간,’ 단돈 오만 원은커녕 십원 짜리 하나 못 가지고 가는 것이 우주의 이치다. 그런데 헛되고 헛된 꿈을 꾸는 것이 인간들이 너무도 많다. 이런 불가항력不可抗力의 시대에 재력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 꿈과 창조력이 풍부한 예술가들이나 창의적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어서 세상을 이롭게 만들기를 꿈꾸는 것은 무용한 일일까? 그런 기대가 가끔은 헛된 것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나는 그런 꿈을 꾼다. 그것은 여러 가지 제약 때문에 이 세상에서 그 꿈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 예술가들과 재력들의 만남이 인류발전에 더 크게 이바지할 수 있으리라는 신념과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계산하지 않는 우정, 아름답지 않은가?
천재작가인 헤세의 친구, 보드머, 그가 진정한 우정을 가지고 친구인 헤세에게 집을 지어주고 후원하지 않았더라면 조금 돈이 많은 사람으로 끝날 수 있었다. 하지만 또 다른 이름으로 남아 후세의 사람들에게 많은 교훈과 시사점을 던져주지 않는가? 저마다 자신만의 자산이 있다. 그 자산을 어떻게 사용하고 살다가 가느냐 그것이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