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다'와 '틀리다'를 구별할 수 있는 지혜
우리말에 '다르다'는 말과 '틀리다'는 말이 있다.
'다르다'는 '같다'의 반대말로서 영어로 표현하면 Different를 뜻한다.
'틀리다'는 '맞다'의 반대말로서 영어의 Wrong에 해당된다.
이 '다르다'와 '틀리다'를 구별할 수 있는 지혜가 오늘날 21C 상생의 시대를 열어 가는 중요한 화두(話頭)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린 아이가 예쁘면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이 아름다운 미덕(美德)이다. 그러나 외국에 나가서 이렇게 하면 성희롱 죄에 걸린다. 똑같이 머리를 쓰다듬는 행위지만 한편에선 미덕이고 다른 한편에선 성희롱 죄에 해당된다. 서로 문화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하얀 국화꽃은 주로 장례식장 같은 슬픈 일을 당한 사람에게 위로의 조화로 사용한다. 그런데 외국에서는 즐거운 일, 축하의 화환으로 사용한다. 이 또한 서로의 문화가 다르기 때문일 뿐 어느 한쪽이 '맞다' '틀리다' 할 것이 못된다.
우리나라에서는 명당(明堂)의 자리하면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 등 풍수지리에 따른다. 그런데 서양에서의 명당은 성당이나 교회 밑바닥을 가장 좋은 명당으로 여긴다. 서로의 의식의 차이가 다르다. 그 '다름'을 인정해 주지 않고 무조건 '내 방식대로' 만을 고집하고 내 방식은 '맞는 것'이요 다른 방식은 '틀리다' 라고 말해 버릴 때 갈등이 생기고, 오해가 생기고 그것이 번지면 국제분쟁에 까지 이르게 된다.
자연의 절후도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분명 다르다. 그런데 봄과 가을이 옳고 여름과 겨울은 옳지 않다(틀리다)고 말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흰색의 반대는 무슨 색인가?'라고 질문하면 한결같이 '검은색'이라고 답한다. 흰색의 반대는 붉은색도 될 수 있고, 주황색, 노란색, 초록색, 파란색, 남색, 보라색 등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도 굳이 검정만을 떠올리는 이유는 바로 우리의 의식 속에 이러한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의식구조, 내 편이 아니면 적(敵)이라는 '흑백논리'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러한 의식구조 하에서는 '나와 다른 것'은 바로 '틀린 것'이 되어 버린다.
정치인(政治人)들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남의 당의 이야기는 무조건 '틀리다'라고 몰아붙이기 때문에 정쟁은 끝이 없고 갈등은 더욱 증폭된다. 노사(勞使)간에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이야기는 무조건 '틀린 것'이 되고 노사분쟁은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지역(地域)간에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역갈등이 일어나고 남녀(男女)간에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차별이니 역차별이니 하는 말이 나온다. 기성세대(旣成世代)와 신세대(新世代)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해와 편견이 생기고 대화의 통로가 막히는 것이 아닐까? 선진국(先進國)과 후진국(後進國)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무역분쟁이 일어나고 경제전쟁이 일어난다.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급기야는 9.11 세계무역센터 테러가 일어나기까지 하였다.
사무엘 헌팅턴은 그의 저서「문명의 충돌」에서 기독문명의 '오만함'과 이슬람 문명의 '편협함'에서 오는 충돌을 예고한 바 있다. 공산주의의 몰락으로 자유민주주의 이념이 지구적 차원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므로 서구의 이념이 보편타당하다는 견해가 확산되면서 각 국가간의 갈등은 더욱 증폭되고 있다. 미국은 비서구인들이 민주주의, 시장경제, 제한된 정부, 인권, 개인주의, 법치주의 같은 서구의 가치에 동조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렇지 못한 것은 모두 '틀리다'라고 몰아붙이고 있다. 여기에 다른 문명권에서 그것은 '다른 것' 뿐이지 왜 '틀린 것'인가 라고 반발하는 것이다.
인류역사의 흐름을 보면 지난날 상극(相克)의 시대에는 '다른 것'은 곧 '틀린 것'으로 통하였다. 그래서 끝없이 싸우고 짓밟고 투쟁하였다. 내 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흑백논리가 통하였고 이런 가운데 획일주의, 권위주의, 형식주의, 군사문화, 싹쓸이 문화가 나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제 21C 지식정보화사회는 바로「상생(相生)의 시대」이다. 나도 살고 너도 사는 Win-Win의 시대이다. 만 명이 한 사람을 먹여 살리던 시대에서 이제는 한 사람이 만 명을 먹여 살리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이러한 상생의 시대에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에서 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그 '다름'에서 새로운 창조(創造)가 나오고 혁신(革新)이 나오며 자율(自律)이 생기는 것이다.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간에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인정하여야 세계질서가 생기고 평화가 생기는 것이다.
종교와 종교 간에도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데서 궁극적으로는 지고지선(至高至善)의 진리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가지고 있는 사고(思考)의 한계(限界)속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이러이러하니까 상대방도 이러이러하겠지 하는 내 위주의 사고(思考)가 참으로 많다.
"두 손을 활짝 들고 양손가락을 서로 사이사이에 끼워보십시오." 나는 강의할 때마다 교육생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확인해본다. 나 자신은 오른손 엄지손가락이 위로 올라간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모두다 나와 같이 오른손 엄지손가락이 위로 올라가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실제로는 거의 반반(半半)이다. 왼손 엄지가 위로 올라가는 경우도 50%나 된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다. '내가 이러하니 남도 이러하겠지'라는 발상의 한계를 벗어나 그 '다르다'는 것을 인정할 때 우리는 개혁도, 변화도, 구습타파도, 혁신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좋은 교훈이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말에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이 있다.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 보는 것이다. 영어에 'Understand'라는 말이 있다. 상대방을 이해하려면 상대방 아래에(Under) 서보라(Stand)라는 뜻이다. 이 모두가 '다름'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이해가 시작된다는 뜻일 것이다.
우리가 서로 이 '다름'을 인정하게 되면 오해나 편견도 줄게 되고 갈등도 줄어들고 미움도 원망도 훨씬 줄어든다. 상대방을 이해하는 마음, 아량도 넓어지고 용서하는 마음도 저절로 생기게 된다.
'맞다-틀리다'는 어찌 보면 대자연(大自然)의 법칙에 따라 신이 하실 일이라 생각하면 훨씬 수양하기가 수월해진다. 성훈에 「내 착함도 자연이 알아주고, 내 원한도 자연이 풀어주며 만사이치는 사필귀정이니라」 하셨다. 우리는 맞다, 틀리다, 시시비비(是是非非)를 따지기 이전에 서로의 '다르다'는 것을 먼저 인정하는 수양자세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되어진다.
나와 부모님의 '다름'을 아는데서 참된 효(孝)가 나오고, 나와 자식의 '다름'을 아는데서 참된 사랑이 나오고, 나와 아내(또는 남편)의 '다름'을 이해하는 데서 참된 부화부순(夫和婦順)이 나온다. 나와 사해형제(四海兄弟)의 '다름'을 아는데서 진정한 화이부동(和而不同), 화목동락(和睦同樂)의 세계로 가는 것이 아닐까?
*이와 관련있는 글이 있어 첨부합니다.
[아름다운 기도]
/송길원 교수
나와 아내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나는 오른손잡이인데, 아내는 왼손잡이다.
그래서 습관에 따라 국 그릇을 왼쪽에다 잘 갖다 놓는다.
별거 아닐 것 같은 그 차이가 신경을 건드린다.
거기다 나는 종달새 형이다.
새벽시간에 일어나 설친다.
늦잠을 자면 무조건 게으르다고 여긴다.
그런데 내 아내는 올빼미 형이다.
밤새 부엉부엉 하다가 새벽녘에야 잠이 든다.
도대체 맞는 구석이 없다.
나는 물 한 컵을 마셔도 마신 컵은 즉시 씻어둔다.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고 언제 해도 할 일이며 제가 다시 손을 댈지 모를 일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내 아내는 그게 안된다.
찬장에서 꺼내 쓸 그릇이 없을 때까지 꺼내 쓰다가 한꺼번에 씻고 몸살이 난다.
나는 미리 준비하는 스타일(style)이다.
그런 나와 달리, 아내는 떠나야 할 시간에 화장한다고 정신이 없다.
다가가서 보면 참으로 가관(可觀)이다.
화장품 뚜껑이라는 뚜껑은 다 열어 놓고 있다.
나는 그게 안 참아진다.
나도 모르게 버럭 화를 낸다.
"아니, 이렇게 두고 외출했다 집에 돌아오면 향(香) 다 날아가고 뭐 땜에 비싼 돈주고 화장품을 사.
차라리 맹물을 찍어 바르지. 확 부어버려, 맹물 부어줄까."
거기다 나는 약속 시간에 늦은 적이 거의 없다.
나중에는 견디다 못해 성경책까지 들이 밀었다.
"여보, 예수님이 부활만 하시면 됐지, 뭐 때문에 그 바쁜 와중에 새 마포와 수건을 개켜 놓고 나오셨겠어?
당신같이 정리정돈 못하는 사람에게 정리정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하고 싶으셨던 거야.
그게 부활의 첫 메세지야.
당신 부활 믿어~ 부활 믿냐고?''
이렇게 아내를 다그치고 몰아세울 때
하늘의 음성을 들었다.
"야, 이 자식아! 잘하는 네가 해라.
이놈아 안 되니까 붙여 놓은 것 아니냐?"
첫댓글 그렇군요! 제가 잘 못하니까 잘하는 배필을 붙여 주셨네요!
새 마포는 "세마포" 아닙니까? 선배님!
잘 지적해 주셨네요. 새로운 것을 배우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세마포(細麻布)가 맞네요.
제가 교인이 아니라 성경의 말씀을 잘못 이해했어요.
원문에도 '세마포'로 되어 있었으나 세마포의 뜻을 퍼뜩 이해하지 못하였고, 바쁜 와중에도 예수님이 마포와 수건을 빨아 새 것으로 하여.......로 이해하여 임의로고쳤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