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 열반허신지
삼철련이 되는 오늘날까지 이 칠월 해제일을 기해서
돌아가신 부모님이나 할아버지 할머니 저 선망부모릎
위시해서 가족에 아들 딸 형제 자매 원근 친척들의
영혼을, -물론 그 가운데는 비명으로 돌아가신 분,
횡사해서 돌아가신분, 교통사고나 또는 물에 빠져죽고
목매달아 죽고 약먹고 자살하고 헌 온갖 비명횡사한
그런 영가들은 더 말할 것도 없고-
그러한 영가들을 천도하는 법요식을 해마다 연래
행사로서 거행해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왜 백중날이 좋으냐허며는,
석달 동안을 열심히 수행해서 몸도 청정하고 마음도
청정한 수행자들, 수행자修行者들에게 공양올린 공양공덕이 얼마나 장헌가를 알아야 하는것입니다.
사십이장경에 보며는,
악한 사람 백명에게 공양하는 것 보단 착한 사람 한 사람한테 공양하는 것이 낫고,
착한 사람 천명에게 공양하는 것 보단 오계지키는 사람에게 공양하는게 낫고,
오계를 지키는 사람 만명에게 공양하는 것 보단
수다원과를 증득한 사람에게 공양한 것이 낫고,
수다원과를 증득한 백만명에게 공양한 것 보단 사다함을증득한 한 성현한테 공양한 것이 낫고,
사다함 천만인에게 공양한 것 보단 아나함 한 사람에게 공양한 것이 낫고,
아나함 일억의 성현에게 공양한 것 보단 아라한과흘 증득한 한 분에게 공양한 것이 낫고,
일억의... 십억의 아라한에게 공양한 것 보단 한 분의
벽지불에게 공양한 것이 낫고,
백억의 백, 벽지불에게 공양한 것 보단 한 사람의,
삼세제불의 한 사람에게 공양한 것이 낫고,
천억의 삼세제불에 공양한 것 보단 한 무심도인 에게
공양한 것이 낫다.
<사십이장경에는
무념 무주 무수 무증한 사람에게 공양한 것이 낫다”
그런데, 무념이요 · 무주요 무수요 · 무증한 사람은
한마디로 말해서 무심도인 그말인데,
이 무심도인은 어떠헌 것이 무심도인이냐 ?‘
생각을 하되 생각없는 생각을 하고,
행을 하되 행이 없는 행을 하고, 닦되 닦음이 없이 닦고, 증하되 증헌바가 없이 증’허는 이것을 한마디로 말해서 무심도인이라 하는데,
이 무심이라 하는 것은
사실은 이론적으로 따져서 ‘이러헌 것이 무심도인이다’
이렇게 말허기가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면, 그래서 누가 무심도인인지 아닌지를 겉으로
보아서는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석달 동안을 열심히 수행한 수행자가운데에는
몸도 마음도 청정해서 무심한 경계에 들어간,
들어갈 공부를 했고 그 가운데에는 이미 무심한 경계에 들어간 스님이 몇 분인가는 있을 수가 있다 그말이여.
설사 오늘날 당장 완전히 진, 진무심경계에 들어가지
안했다 하더라도 그 목적지를 향向해서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그분도 준 무심도인이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름 해제 때 모이신 그 스님네 들에게
공양을 올리며는
무간지옥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비명횡사해서 거리
중천에서 갈 곳을 모르고 해매고 있는 우리의 선망부모와 가족들로 하여금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 허는 공덕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말이여.
무심도인
내가 무심도인이다’하먼 그게 무심도인이 아니여
내가 한 소식消息을 했다’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이믄
그것이 무심도인이 아니고,
나는 아라한과를 증득했다’헌 생각을 가지믄
이미 그것이 무심도인이 아닌거여.
어떻게허면 무심의 경지에 들어가느냐?
본참공안 ‘
이 뭣고?’ 화두가 되았건, ‘
판치생모화두가 되았건,
‘무자 화두가 되었건,
선지식으로부터 지정받은 그 본참공안을 하나를 가지고 일체처 일체시에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은산철벽에 탁! 부딪힌 것처럼,
나아갈라야 나아갈 데도 없고 물러설라야 물, 물, 물러설 수도 없고, 오직 꽉 맥힌 의단이 독로하도록 본참공안에
실참 실수 해 나감으로해서 공안을 타파해서
마침내는 무심도인이 되는 것이고
확철대오해서 참 나를 깨닫게 되는 것이여.
이것이 부처님께서 왕궁에 부귀를 버리시고 출가허셔서 설산에서 고행읖 하셔가지고 일생, 일대사를해결해서
팔만사천 법문을 설說하신 요점이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첫댓글 일체 중생 참 나를 깨달라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 나기를 발원합니다 _()_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