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 42기 중 스무 번째로 서울 헌인릉의 헌릉(獻陵, 태종과 원경왕후)을 소개합니다.
순서는 제가 직접 다녀왔던 순서대로 합니다.
서울 헌릉과 인릉
헌릉(獻陵, 태종과 원경왕후)
위치 : 서울 서초구 헌인릉길 34
조성 연도 : 1420년(세종 2), 1422년(세종 4)
왕릉 형식 : 쌍릉
쌍릉(雙陵)
쌍릉은 왕과 왕비의 봉분을 하나의 곡장 안에 나란히 조성한 능으로, 우상좌하(右上左下, 오른쪽에 왕, 왼쪽에 왕비)의 원칙에 따라 조성하였다. 대표적으로 명종 강릉, 영조 원릉, 철종 예릉 등 9기의 능이 있다.
왕릉 옆에 세워진 석마(石馬)는 왕이나 왕비의 무덤을 지키고 장식하는 석물(石物) 가운데 하나다. 말의 모습을 돌로 조각해 능침 주변에 배치했으며, 왕이 사후에도 말을 타고 다니거나 신하와 함께 거동한다는 의미를 담은 것으로 해석된다.
조선왕릉에서는 보통 능침으로 올라가는 참도(參道) 양옆에 문인석·무인석과 함께 석마가 배치되거나, 석마가 문인석·무인석의 뒤쪽에 놓이는 형태를 볼 수 있다. 석마는 대체로 문인석과 무인석 한 쌍씩에 각각 한 필을 배치하는 경우가 많다.
석양(石羊)은 양을 돌로 조각한 것으로, 왕릉 봉분 주변에 보통 네 마리를 배치한다. 양은 온순하고 순한 동물로 여겨졌으며, 사악한 기운을 막고 능을 정화하는 역할을 상징한다. 또한 양이 땅을 향해 고개를 숙인 모습은 죽은 이를 공경하는 의미로도 설명된다.
석호(石虎)는 호랑이를 조각한 석물로, 석양과 함께 능침 주변에 배치한다. 호랑이는 예로부터 용맹하고 사나운 동물로 여겨졌기 때문에 능을 지키고 잡귀나 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수호신의 의미가 강하다. 보통 석양과 석호를 각각 네 마리씩 배치해 봉분을 중심으로 사방을 지키도록 했다.
▷ 헌릉(獻陵) 이야기
헌릉은 조선 3대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능이다. 헌릉은 하나의 곡장 안에 봉분을 나란히 배치한 쌍릉(雙陵)의 형식으로, 앞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왼쪽(서쪽)이 태종, 오른쪽(동쪽)이 원경왕후의 능이다. 1420년(세종 2) 원경왕후가 먼저 세상을 떠나 현재의 자리에 능을 조성하였다. 원경왕후의 능을 조성할 때 태종은 자신의 능자리를 미리 만들었다. 2년 후 1422년(세종 4) 태종이 세상을 떠나자 원경왕후의 능 서쪽에 능을 조성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능침 봉분은 모두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고, 병풍석에는 십이지신상과 영저(금강저) 및 영탁(금강령) 등을 새겼다. 봉분 주변으로는 문석인, 무석인, 석마, 정중석, 장명등, 석상(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하였다. 특히 문석인, 무석인, 석마, 석양, 석호 등은 다른 왕릉에 비해 두 배 더 배치되었는데, 이는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玄·正陵) 제도를 따른 것이다.
능침 아래의 신도비각에는 두 개의 신도비가 있는데, 태종이 세상을 떠난 후 세운 신도비와 1695년(숙종 21)에 원래 신도비가 훼손되어 다시 세운 신도비가 있다.
▷ 태종(太宗) 이야기
태종(재세 : 1367년 음력 5월 16일 ~ 1422년 음력 5월 10일, 재위 : 1400년 음력 11월 13일 ~ 1418년 음력 8월 8일)은 태조와 신의황후 한씨의 다섯째 아들로 1367년(고려 공민왕 16) 함흥 귀주동 사저에서 태어났다. 태종은 1383년(고려 우왕 9)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조선 역대 국왕 중 유일하게 과거에 급제한 왕이다.
1392년 아버지 태조를 도와 조선 건국에 큰 공을 세웠고, 조선 건국 후 정안군(靖安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신덕황후와 정도전 등과 대립하여 왕세자 책봉에서 제외되었고, 왕세자 자리는 신덕황후의 차남 방석(의안대군)이 오르게 되었다. 더불어 정도전이 재상 중심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왕자의 사병을 혁파하려 하자, 태종은 1398년(태조 7) 친형제들과 함께 사병을 동원하여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을 제거하고, 왕세자 방석과 그의 형 방번을 제거하였다.(제1차 왕자의 난, 무인정사) 이 사건으로 태조는 둘째 아들 영안군 방과(정종)를 왕세자로 책봉한 후 바로 왕위를 물려주었다. 2년 후 1400년(정종 2) 제1차 왕자의 난의 불공평한 논공행상으로 불만을 품고 있던 박포와 태종의 넷째 형 회안군 방간이 난을 일으켰고(제2차 왕자의 난, 박포의 난), 이 난을 수습한 태종을 왕세자로 책봉된 후 같은 해 11월 개경(개성)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태종은 왕위에 오른 후 창덕궁을 지었으며, 1405년(태종 5)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다시 옮겼다. 재위기간 동안 중앙제도와 지방제도를 정비하고, 사병을 폐지하여 군사권을 장악하였으며 전국의 인구를 파악하여 조세 징수와 군역 부과에 활용하는 호패법을 실시하였다. 정치적으로 육조직계제를 실시하고, 외척 세력을 견제하는 등 강력한 왕권강화를 이룩하여 조선 왕조의 기반을 닦는데 많은 치적을 남겼다.
1418년(태종 18)에는 장남 양녕대군을 왕세자에서 폐위한 후, 셋째 아들 충녕대군(세종)을 왕세자로 삼았으며, 2개월 뒤에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준 후 태상왕이 되었다. 1422년(세종 4) 연화방 신궁(수강궁, 현 창경궁)에서 56세로 세상을 떠났다.
▷ 원경왕후(元敬王后) 이야기
원경왕후 민씨(재세 : 1365년 음력 7월 11일 ~ 1420년 음력 7월 10일)는 본관이 여흥인 여흥부원군 민제와 삼한국대부인 송씨의 딸로 1365년(고려 공민왕 14) 송경 철동 사저에서 태어났다. 1382년(고려 우왕 8) 태종과 혼인하였고, 조선 개국 후 정녕옹주(靖寧翁主)에 봉해졌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에서 태종이 정도전 등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승리할 수 있었던 데에는 원경왕후의 도움이 컸다. 난이 일어나기 열흘 전, 정도전 일파는 왕자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을 혁파하였다. 이때 사병을 거느린 왕자들은 병사뿐만 아니라 지니고 있던 무기를 모두 내놓았어야 했다. 그러나 원경왕후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얼마간의 사병과 무기를 친정집에 숨겨두었다. 1398년 음력 8월 26일, 당시 태조의 병환이 깊어 왕자들은 근정전 문밖 서쪽 행랑에 모여 숙직하고 있었다. 원경왕후는 집사를 보내 자신이 갑자기 복통이 심하다는 핑계를 들어 태종을 불러내었다. 그 후 태종은 집에 와서 갑옷을 입고 난을 준비하였고, 원경왕후는 친동생인 민무구, 민무질 형제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한편, 숨겨둔 사병과 무기를 풀어 태종에게 내주었다. 결과적으로 난은 성공하였고, 태종은 왕위 계승을 위한 권력을 얻게 되었다.
이후 1400년(정종 2) 태종이 왕위에 오르자 원경왕후는 왕비(정비)가 되었다. 그러나 태종은 권력의 분산과 왕권 강화를 위하여 외척세력을 견제하여 원경왕후의 남동생인 민무구, 민무질 형제와 민무휼, 민무회 형제를 모두 제거하면서 원경왕후와 불화가 극심해졌다. 1418년(태종 18) 태종이 태상왕으로 물러나고 세종이 왕위에 오르자 후덕왕대비가 되었으며, 1420년(세종 2) 수강궁(현 창경궁) 별전에서 56세로 세상을 떠났다.
* 서울 태종 헌릉 신도비(서울 太宗 獻陵 神道碑)
신도비는 왕과 왕비 등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비신(碑身, 몸통)과 귀부(龜趺, 거북이 받침), 이수(螭首, 용을 새긴 머릿돌)를 갖추고 있다. 헌릉 신도비는 1422년(세종 4) 태종이 세상을 떠나고 헌릉을 조성한 2년 뒤(1424년)에 세운 것으로 앞면의 비문은 변계량이 짓고, 성개의 글씨로 썼으며, 전액(篆額, 전서체로 쓴 머리글)은 권홍의 글씨이다. 뒷면의 비문은 윤회가 지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글자가 마모되고 비석이 훼손되자 1695년(숙종 21) 신도비를 다시 제작하여 원래 신도비 오른쪽에 세웠다. 헌릉 신도비는 태조 건원릉 신도비와 같이 조선 초기에 제작된 신도비로, 역사 연구 활용의 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첫댓글 잘 봤습니다. 16님.
16세예요 ㅋㅋ
@베라루빈 반대로 가셔야죠. 어르신. 61. 어서 새배드리고 싶네요.
@《해인재인강인》아빠
ㅋㅋㅋ
이제 정상적으로 카운트가 되고 있으니,
내일이면 71세?
눈 밭에 풍경이 참 좋네요. 루빈16세님
눈 오는 날 가서 찍었어요 ^^
살아생전 원수같던 부부를 같이 모셔둔 건 후손들의 계략인 듯 ㅋㅋ
@베라루빈 뭐임 ㅎㅎㅎ 눈 밭이니 눈오는 날 찍었겠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