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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면의 탈출
이르쿠츠크파의 제거 대상은 상해파와 상해임시정부와 관련된 사할린 의용대였으나, 공격에 나선 볼셰비키 군대와 오하묵의 한인보병 자유대대원들은 그런 것을 따지지 않았다. 수라제프카에 머물던 독립군들의 다수는 흔히 있던 지휘권 다툼으로 생각하고, 조준사격을 하리라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자유시에 머무르던 독립군들중 탈출과정에 대한 증언을 남긴 사람은 수십여명 이상이다. 그래서 이르쿠츠크파 동조자 몇 명이 “자유시 참변은 별 것 아니었다”고 주장하여도 오늘날 한국에서는 “동족상쟁의 비극”으로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러시아에서는 수백여명 이상 사망에 천여명 이상의 포로 등을 사실로 인정한다. 1921년 6월경 자유시와 제야강 하류의 블라가베셴스크, 블라가베셴스크와 만주 지방을 연결하는 도로와 수로는 봉쇄되지 않았다고 한다. 러시아 간섭전쟁 기간중에는 강과 들로 표시되는 국경을 오늘날처럼 봉쇄할 능력도 없었다. |
『대한혁명군측의 성토문』 “조준을 정하고 사격하여 생지옥의 참극을 만들었다.”
『동아일보 1923. 1. 16. 자 3면 보도』 “(자유시 참변 무렵 러시아령의) 허근 일파 500여명은 무장 해제하라는 교섭을 거부하여 사상 150여명이 발생하고, 허근 이하 100여명은 과격파에게 잡혀가고, 기타 대부대는 총기를 버리고 블라가베셴스크 부근에서 퇴각하였다.”
(※일부 잘못된 내용과 표현은 오늘날의 표현방법으로 수정하였습니다.)
『조선일보 1923. 7. 5. 자 3면 보도』 “(자유시 참변 이후 러시아령) 흑룡주 사만리(Благословенное) 지방 거주 한인 김광일씨는 자유시와 이르쿠츠크에서 해산한 독립군중 도보 혹은 선편으로 풍찬노숙하며 막심한 고초를 당하면서 사만리를 통과하여 북간도와 연해주로 돌아간 자 수백인에 달한 바 김광일씨가 동지동족의 곤궁함을 개탄하여 군인을 십여일 혹 달씩 자택에 체류하게 하며 그들에게 의복과 여비를 지급하였는데 그의 부인도 또한 같은 성의로 동족을 구조함이 원근의 칭찬이 자자하다”
고 보도하였다.
《문서 67호. 김동한과 김아파나시(김성우 추정)가 트로츠키에게 보낸 편지》
『아무르 사건'에 대해 1』
1921년 10월 28일
출처 : 러시아 정부 전자도서관 문서 열람사이트 http://docs.historyrussia.org/ru/nodes/48196?query=%D0%9E+%D0%A5%D0%B0+%D0%9C%D1%83%D0%BA#mode/inspect/page/4/zoom/4
총기 발사.
학살은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계속됐습니다.
절박한 상황을 보며 많은 파르티잔들이 견디지 못하고 제야강에 뛰어들어 익사했습니다.
......중략......
자신의 동료들에 의해. 공격이 가해졌습니다.
우리 편은 반격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부대에 들어온 '승리자'는 학살을 자행하였습니다.
항복한 사람들은 살해되었고, 배에 상처를 입은 사람 등이 40명이 넘었습니다.
우리는 중지를 요청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간청은 그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마치 일제나 백파군대와 싸우는 듯이 만주의 벌판에서 영웅적인 행동으로 사람들을 찔러 죽이고 베었습니다.
......중략......
죽이는 데 지쳤을 때 그들은 포로로 잡았습니다.
(......중략......)
김규면과 동료들
(※ 『노병 김규면(金規勉, 혹은 김백추) 비망록(備忘錄)』을 대략 살펴보면)
김규면(金圭冕, 이명 : 김백추, Ким Бяк-чу, 1881~1969)
......중략......
자유시에는 “국민의회”에서 조선독립군이라고 이름하여 모집하고 흐르마뜨 장군 부하에 있던 고려인 장교들 오하묵 등이 영솔하고 있던 것이 고려인 부대 근 3백 명이 있었다.
그러니 이르크츠크에서 온 마병 6백 명과 자유시 “국민의회”군대 오하묵이 영솔하고 있는 것 합하여서는 “군정의회” 근위대이었다.
그래서 마자나바(마사노프)에 있는 고려독립군부대와 니항에서 온 군대를 억지로 유인하여 자유시로 불러내다가 강제로 장갑차 속사포로 포위하고 무장해제하는데 대항 없는 군대를 포격하여 사상자 수백 명을 내면서 토벌하였다.
그리고 장교들 90여 명과 하사, 상등병, 정치수들, 참모일꾼들 합하여 3, 4백 명은 차에 실어서 포로병으로 이르크츠크 감옥에 가져다가 구금하고,
기타 군인부대 1천여 명은 우수문 삼림 나게리에 수금하였고, 기타 도망한 군인들은 아물주 각 농촌에 흩어졌다.
이 반혁명적 “군정의회”는 마자나바(마사노프) 있던 고려인 부대를 자유시에서 토벌청산하고 자기들 근위대를 데리고 이르쿠츠크로 도로 들어갔고, 자유시 잡판은 텅텅 비어 있었다.
(※필자의 의견 : 자유시 참변이후에도 수백여명 ~ 수천여명의 고려인이 자유시에 거주하다가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다.)
그때에 김규면·한운룡(혹은 한운용) 등 13인은 블라가베셴스크시에서 마자나바(마사노프) 우리 독립군 부대들을 빨치산 활동지대로 이동하려고 모든 내복, 신발, 의복, 수건, 세수기구, 물통, 붕대, 약품 등을 준비하느라고 분주한 시기에 청천벽력의 봉변을 당하였다.
아무르주의 주도였던 블라가베셴스크. 아무르강을 건너 중국령 흑하시(애혼성, 혹은 아이훈성)와 마주보고 있었다.
자유시 토벌사건(자유시 참변) 몇날 전에 밤중에 김규면 등 13인은 무장 부대에 붙잡히어 블라가베셴스크 정거장 길로 나섰다.
시가 수비병의 신호로 수이대 군대들이 길을 막고 질문하니 『자유시 고려군정의회』 명령이라고 하면서 원동 정부나 흑하 당국에 문의 없이 하는 일이었다.
그래 수비대와 정치부에서 김규면 등 13인과 모든 행리를 다 취급하여 정치부 보호실에 안치하였다.
그 후 날마다 세 번이나 자유시에서 오하묵, 까란다리시비리, 소위 “군정의회”에 감시한다는 국제당 중앙부 대표(동양비서부)들이 와서 김규면 등을 “군정의회”에 넘겨달라고 강경한 교섭이 두세 번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블라가베셴스크 당국에서는 국제당 명령이나 중앙정부 명령을 가지고 오면 김규면이를 내어주마고, 그 외에는 다 거절한다고 하니 분을 토하며 돌아갔다고 한다.
김규면 등은 모스크바로 가서 호소하려고 치따까지 갔다가 그때는 대련 꼼페덴츠 시기이다. 잘 아는 동무 블류헤르(Блюхер)이는 대련으로 간 때이다.
다른 동무에게 문의한 즉 이르쿠츠크 정거장을 무사히 넘을 방법이 없으니 보장할 수 없다고 하면서 지금 이곳에서 부시니츠 전문으로 상해당 측 사람을 수색하여 이르쿠츠크로 압송하는 것이니 치타정부에서는 고려인 반혁명자들을 옹호한다고 국제당에와 중앙정부에 호소하는 모양이라고 한다.
(※김규면 비망록은 손으로 작성되었고 수정도 수차례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김규면은 할 수 없이 블라가베셴스크로 도로 내려와서 보호실에 같이 있던 동무들 중에 11인을 위임장과 호소문을 주어서 흑룡주(아무르주) 각 농촌에 도망하여 있는 독립군인(자유시 토벌 시)들을 심방하여 데리고 다반지방으로 이만지방으로 모여오라고 운동경비를 몇백 원씩 주어서 파송하였다.
김규면의 말은 보조금은 1만원은 이용을 주어서 이만에 군비단군대 수응에 보태어 쓰게 하고, 3만원은 블라가베셴스크 당부에 맡기고 소용할 때마다 김규면의 명의로 청구하여 소용한 것이다.
김규면·한운룡 등은 “국민의회”와 슈먀즈키의 반혁명 행동을 통분히 생각하면서 빨치산운동을 더 강화하려고 만반으로 준비하면서,
블라기베셴스크 당국에 약속하고, 아무르강 배를 타고 하바로프스크에 와서 뽀에찌세프(Поетьсеь) 동무를 면회하고 모든 사정형편을 토의한 결과, 이제부터 고려인 빨치산부대 활동을 원동혁명 국민군과 보조를 같이 하여 다시 말하면, 연합 합동으로 행동하기로 결정하고 김규면은 브리아물주 “군정의회” 전권위원으로 겸 고려 빨치산 군사회 위원장의 이름을 가지고 원동 브리아물주 “군정의회”의 지도에 따라 고려 빨치산 군대를 지도하게 하였다.
다시 말하면,
고려 빨치산 부대들은 원동국민 혁명군과 유일전선으로 연합 동작하기로 결정하고 김규면, 한운룡(혹은 한운용) 등은 리만에 나가서 빨치산 부대 대표회의를 소집하고 자유시 참변보고와 시국문제를 토론한 후 연해주, 브리아물주 고려인 빨치산 운동을 통일적으로 일치 동작하되 원동국민 혁명군의 진퇴동작을 따라서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되 영웅성과 희생성을 발휘하여 소비에트 원동의 침략군을 숙청하고 조선의 침략군을 구축할 때까지 건강분투하기로 빨치산 대표회 대표 일동은 한 사람도 투항 말고 최후 일인까지라도 포로는 되지 말고 악전고투라도 사양치 말자고 일치 서약하고 국제가로 레닌주의만세를 부르면서 회의를 마치었다. 대표회의 명예 회장은 뽀에찌세프(Поетьсев) 동무를 추천하였고 대표회의 참석한 원동국민혁명군 동무는 리만수비대 사령관 헤리손체리프(Нельсончельв)이었다.
(......하략......)
(※김규면, 『誠齋略傳에 관한 回想記』, (1963.6.20.)을 대략 살펴보면)
......중략......
1921년 5월경에 마사노프스크에 있는 독립군 부대를 나선의 금광지대로 이동하려고 준비하는 중이었다.
암물쓰크 옵꼼과 제2군단 참모부의 동의를 가지고, 김규면은 한인사회당 군사부 위원으로 마자나바(마사노프) 군대 사령부원들, 경리부원들을 데리고서, 이동할 군인들의 보선, 수건, 내의, 약품 등 소용물을 준비하려고 또는 이동 부대를 강배로 수송하기 위하여 아물주 당국에 협의하려고 블라가베셴스크에 임시로 있었다.
(※김규면 등이 이 무렵 상당량의 자금을 가지고 블라가베셴스크에 있었던 것은 이르쿠츠크파도 인정한다.)
그때 암물쓰크 옵꼼 서기는 그사꼬프이고, 오불나꼼 회장은 뜨릴노프, 오께비스나차니크는 두루츠꼬프이었다.
어느날 밤중에 무장대 수십 명이 달려들어서 김규면 기타 13인을 체포하여 울니채로 끌고 나가서 정거장 길로 향하는데 파수병을 만났다.
한참 힐거하더니 정거장을 채 당도하기 전에 수비대 당번 장교가 군인 부대를 데리고 와서 둘러싸고 검사하는 동시에 오케비토에서 도왔다.
서류(독구면트)를 검사한 결과 원동정부 허가도 지방당국 문의도 없이 하는 행동이었다.
불법행동을 책망하여 쫓아 보내고 김규면 등 13인은 정치부 울안 보호실에 유숙하게 하였다. 소위 이르쿠츠크에서 파견한 까란다리시비리, 오하묵, 최고려, 김하석 등 군정의회에서 자유시 나와서 첫 행동이 그것이었다.
군대를 토벌하기 전에 그 군대의 정치지도 후견자들을 체포하려는 불법행동이었다.
그 이튿날 블라가베셴스크 로서아(러시아)신문 "ВОЛНС□" 에 대서특서로 김규면이는 일본의 육군대학을 필하고, 일로전쟁(러일전쟁) 시에 고급장교로 공훈이 많고 19년 3·1폭동 후부터는 일본 군사정탐부 고등계 장교로서 평복하고 조선, 만주, 원동으로 비밀히 왕래하는데 붙들지 못하다가, 요행으로 체포되어 블라가베셴스크 오께비토에 구금되었으니 불구에 총살될 것이라고, 기재하였다.
신문광고 이튿날엔 문창범 소위 국민의회그룹은 긴급회의로 김규면에게 대한 성토문을 만들어서, 신문에 기재된 사설을 꼭 그대로 반복하였고, 첨부하기를 김규면을 시급히 포살하지 않게 되면 국민의회에 내어 달라고, 그러면 우리는 그 정탐관계 연루자를 많이 알아낼 수 있고,
고려사람 군중 앞에서 성토하면서 포살하겠다고 우리 집행부에서는 이렇게 결정하고 외무부장 김기룡을 파송한다고 하였다.
김기룡은 이런 결정서를 가지고 정치부 나차니크에게 와서 질문하니 나차니크는 한마디로 당신들에게는 치외법권의 권리는 없다고 거절하며 쫓아보내었다.
그 이튿날은 자유시에서 오하묵이 와서 정치부 나차니크에게 엄중히 교섭하기를 김규면을 우리 군정에 넘겨달라고 한다.
나차니크는 대답하기를 우리는 그런 불법행동을 허락지 않는다고 한마디 말로 거절하였다.
그 이튿날은 자유시에서 까란다리시비리, 오하묵이와 기타 부관들을 데리고 또 국제당 대표란 사람도 데리고 장갑차를 타고 위세등등하게 와서 나차니크에게 질문하기를
"당신은 어찌하여서 우리 군정의회의 행동처분을 반대하여 김규면을 보호하고 내어주지 않는가고 한다."
나차니크는 대답하기를 아무 명령허가도 없이 지방기관에 문의도 없이 밤중에 달려들어 도적놈 붙잡듯이 김규면을 아무 문답 없이 강제로 끌고 가는 것을 우리는 불법행동으로 인정하며 지금 당신이 말하는 것도 비법적 행동을 반복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까란다리시비리는 엄숙한 태도로, 질문하기를 우리는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 중앙명령을 실행하는 것이고, 나는 고려군정의회 총사령관으로, 오하묵은 부사령관으로 말하는 것이니 어찌하여 불법적이며 비법적인가?
아시아 무산혁명을 인도하기 위해 설립되었던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의 수장 슈먀츠키. 이르쿠츠크파를 지지하였으며 자유시 참변이후에도 아시아 민족에 대한 공산주의 교육기관에서 일한적 있다.
또 동양비서부 슈먀츠키 앞으로 온 국제당 대표도 같이 왔다고, 김규면이를 당장 인계하여 달라고 하니 나차니크 말이 김규면은 고려 혁명군사회의 위원장이고, 고려공산당 대표로 꽁그레스 선언에 서명한 국제당 청년이고, 중앙정부와 비밀관계 있는 사람이다.
지위계급과 사업관계로 보아서 당신들보다 고급적 우월한 혁명자이다.
직접 중앙정부 명령이나, 국제당 명령 밖에 다른 명령은 김규면에게 소용되지 않는다고, 김규면의 활동을 방해치 못한다고 엄중히 거절하였다.
장갑차에 왔던 장군들은 더 말 못하고 묵묵히 돌아가고 말았다.
정치부 나차니크는 김규면 등 13인 기숙실에 늘 다니면서 김기룡, 오하묵 등 왔던 이야기를 하고 또 갈란다라시 빌리 왔던 이야기도 전말을 자세히 말하여 준다.
그리고 하루는 와서 장시간 이야기로 어찌하여 고려 사람들은 독립국가도 아직은 없는데 권리탐욕 전쟁이었는가고?
시끄럽다고 한다.
김규면 등은 영화(활동사진)식으로 이야기를 1890년대 말엽의 로서아(러시아)대사 빠울토프, 위버가 연해주 고려사람 수백 명을 서울에 실어다가 고관대직을 시켜놓고, 조선정국을 좌우하려다가 실패당한 사실을 역력히 말하였다.
그때 나차니크는 처음듣는 이야기라고 웃으면서 슈먀츠키는 빠울노프의 정책을 복습하는 구려라고 한다.
그때 김규면은 웃습니다.
이르쿠츠크 고려당 중앙과 또 자유시 군정의회와 문창범 그룹 국민의회는 다 연해주 입적자 고려인 종족이옵니다.
일반 조선사람들과는 국가적 이해관계가 다른 사람들이 옵니다.
그제는 차르에서, 어제는 콜차크에서 오늘은 볼셰비키에서 아첨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1921. 6. 28. 자유시 참변 발생
1921년 6월 어느 날이다.
김규면 등 13인이 정치부 보호 기숙실에 있은지 한 주일이 되자마자, 자유시사변(자유시 참변)이 발생되었다.
자유시 참변의 현장인 수라제프카 마을
《정치부장 드루츄코프는 시간적으로 사변에 대한 소식을 알려준다.
장갑차 포위공격으로 현장에서 사상자들, 수람쓰고 강에서, 마병추격에, 사상자 아침부터 석양까지 포격소리 요란하다고 한다.
원동공화국 안에 큰 사변을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일본군에서는 원동정부에 또 큰 질문 조건을 (고려독립군 양성한다고) 가졌다고 말한다.》
(※ 필자의 의견 : 오늘날 러시아에서 공개된 공식 기록은 1921. 6. 28. 자유시 참변 당일, 장갑차•장갑열차•군함•대포•기마병 등이 동원되어 하루종일 포격소리가 요란했고 시체가 가득 찼다고 하는데, 남한의 몇몇은 오직 총소리 몇 번 들리고 끝났다는 식으로 국가지원을 받아 공식도서를 쓰니, 상호 의견이 대립되는 사건은 양쪽의 의견을 꼭 들어봐야만 한다.)
김규면의 말이 물론 일본 측에서는 형식상 질문은 있겠지만, 내용으로는 환영할 것이라고, 우리는 문제를 피하기 위하여 처벽한 지대로 이동하기를 준비하는데, 또는 무장해제 하려면, 포격말고, 순한 말로 이유를 설명하여,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백주에 들어내 놓고서, 넓은 광장 철도 역장, 도시 앞에서, 장갑 철차 대포로써, 원거리 진동하도록 소문나게 하는 일은, 오하묵 자유시 군대 문창범의 독립군대로서, 조선독립군을 토벌하는 짓을 광고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김규면 13인 : 한운룡, 김춘호, 한빠샤 등 십여 명은 리만 빨치산 전선으로 파송하고, 김규면은 서기, 통역원들을 데리고 원동국민군 30연대 병영 장교 기숙실에 유숙하면서, 이르쿠츠크의 사변을, 자유시사변을, 모든 사변들을 자세히 기록하여서, 중앙정부와 국제당에 보고서와 고려 공산당 대표 이동휘에게 전달하여 달라는 서류를 작성하여 가지고, 치타에 가서, 원동정부(공화국) 직통서류 특별우편에 모스크바로 부송하고 부리아물주로 돌아왔다.
《삼십 연대 병영 본부는 불타고 대신 쓰고에 있었다.
30연대 장교들 삼, 사 명은 흑룡강변 방어선에 수비대장으로 있는 사람들은 신문에 기재된 김규면 소식을 보고서, 혹 다른 사람인가 의심하면서도 찾아왔다.
(이미 아는 빨치산 장교들이다.)
그때 정치부 보호실에 있을 것 없이 우리 연대 본부장교 기숙실에 넓직한 방에 들어가서 숙식하자고 하기에, 옮겨와서 편의하게 있으면서 일했다.
고한 이것다 '한인사회당', '고려공산당' 직접 관계되는 사실들이기에 기록함. 》
고려공산당 대표단 이동휘 등은 상해로부터 배타고 수에즈 운하로 구라파(유럽)를 경유하여 모스크바에 도착하였다.
코민테른(국제당)에 도착하니 벌써 몇 주일 전에 이르쿠츠크에서 고려당을 조직하고 대표로 한명세, 남만춘이 왔다고 한다.
(......하략......)
제 1차 세계대전 무렵 러시아에서 일하던 수십여만명의 중국인 노동자들
러시아 간섭전쟁 기간중 활약한 중국계 반일 파르티잔들
(※오탈자 다수 있습니다.)
첫댓글 김규면 기타 13인을 체포한 행위가 원동정부 허가도 지방당국 문의도 없이 하는 행동이었군요
예.
원동정부(극동공화국) 정부나 지방당국의 허가가 없었습니다. 물론 모스크바 레닌의 허가도 없었구요. 심지어 자유시에 있던 간도지방 독립군들의 허가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차별 사격과 포격을 감행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르쿠츠크파와...몇몇 동조자는 대체로 "자유시 참변은 별 것 아니었다" 고 주장하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