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베게트가 바라본 프루스트(평론)
자유로운 형식, 집중된 내용
『프루스트』의 내용은 철저히 소설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집중하고 있다. 베케트는 책 서문에서 프루스트의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면모나 시인, 에세이 작가, 번역가로서의 모습은 이 책에 없다고 선언한 후 글을 시작한다. 과연 글은 오직 작품만을 집중적으로 분석한다.
“베케트는 프루스트의 편지, 시, 에세이 등은 일체 언급하지 않고 오로지 소설에만 집중한다. 작품을 창조하는 예술가로서의 ‘나’는 대화하고, 편지 쓰고, 우정을 나누는 개인으로서의 ‘나’와 다르며, 그 예술가를 평가하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기준은 오로지 작품이어야 한다는 프루스트의 작가론이 드러나는 미완성 비평서인 『생트뵈브에 반박하여』가 1954년에야 출간되었음을 고려하면, 베케트의 이런 입장은 프루스트를 본능적으로 이해한 그의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준다.”
— 옮긴이, 「해설」, 79면
우선, 베케트는 작품의 순차적인 흐름을 따르는 대신 그 ‘내적 연대’를 따른다. 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지막 권 『되찾은 시간』 중 주인공 마르셀이 연회에서 작가로서의 소명을 재발견하는 대목을 글 서두에서 분석하면서 이 작품을 건축물에 비유한다. 당시 구조가 부재한다고 비판받던 이 소설이 실은 디딤돌 위에 다양한 요소들이 쌓여 건축물로 형성되었음을 간파한 것이다. 베케트의 분석대로, 오늘날 프루스트의 소설은 장인이 오랜 시간 여러 양식을 혼합해 정성껏 완성한 성당에 비교되기도 한다.
그러면서 베케트는 프루스트의 작품이 ‘시간’에 관한 것임을 감지한다. 공간은 시간 안에 종속되며, 주체와 객체 또한 시간 안에서 그 관계가 정해진다. 시간의 희생물이자 포로. 프루스트의 인물들은 욕망의 대상을 손에 넣지 못하거나, 혹은 손에 넣어도 완전히 만족하지 못하고, 따라서 불행하다. 정해져 있는 실패. 베케트의 비관주의가 이렇게 드러난다. 주체와 객체에 이어 기억과 습관 역시 시간 속에서 살아남으려 애쓰지만, 시간 속에서 기억과 습관은 생존할 수 없다. 역시, 이미 결정되어 있는 비극이다. 다른 한편 기억과 습관은 시간과 함께 삼두 괴물을 형성한다. 이를테면 권태에 의한 습관은 삶을 지배하지만, 삶을 유지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습관이 있기에 두려움과 고통을 잊을 수 있는 것이다.
“시간 안에서의 주체와 객체, 기억과 습관이라는 맞물림은 베케트의 글 전반에 깔려 있는 이중 구조를 대변한다. 시간은 죽이기도 하고 치유하기도 하는 텔레포스의 창처럼 이중성을 띤다. 베케트가 본 프루스트의 시간은 창조자이자 파괴자다
.” — 옮긴이, 「해설」, 83면
한편 베케트는 쇼펜하우어의 음악 이론을 프루스트가 어떻게 소설에 접목하는지를, 역시 ‘시간’의 연장선상에서 언급하며 글을 맺는다.
베케트의 『프루스트』는 당시 비난받았던 프루스트의 문체에 거의 처음으로 찬사를 보낸 글이다. 또한 프루스트의 소설을 (당시 연구자들이 대개 앙리 베르그송을 통해 바라본 것과 달리) 쇼펜하우어를 통해 읽어내며 작품 속 독일 낭만주의 철학의 특징들을 발견해냈는데, 이러한 해석은 40년 정도 앞선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베케트는 『프루스트』 이후, 적어도 자신이 무엇이 될 수 없는지를 발견하게 된다. 학술적인 논문과 연구서를 쓰기에 지나치게 자유로웠던 그는 결국 이 책이 출간된 후 교수가 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린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작가가 된다.
책 속에서
프루스트의 창조물은 이러한 지배적인 조건과 환경, 즉 시간의 희생자다. 하등한 유기체로서 단지 2차원만을 알고 있다가 갑자기 높이의 신비와 대면하게 된 희생자다. 희생자이자 죄수다. 시간과 날들로부터 도망칠 수가 없다. 내일로부터도, 어제로부터도. 어제로부터 도망칠 수 없는 까닭은 어제가 우리를 변형시켰거나, 어제가 우리에 의해 변형되었기 때문이다. 기분 또한 바뀌었기에 중요하지 않다. 어제는 그 단계를 넘은 기점이 아니라, 과거의 닳을 대로 닳은 길에 놓인 조약돌로, 그 무겁고 위협적인 존재는 돌이킬 수 없이 우리의 일부로 우리 속에 있다. 우리는 어제 때문에 지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저 달라졌을 뿐이다. 어제의 재앙을 경험하기 전의 우리가 더 이상 아니다. 어제는 재앙의 날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내용에 있어서 실제로 재앙이 일어났다는 말은 아니다. 대상의 선하거나 악한 기질은 어떤 현실성도 의미도 없다. 몸과 마음의 즉각적인 기쁨과 슬픔은 모두 불필요하다. 어제는 현실성과 의미를 갖는 유일한 세계, 즉 우리 잠재의식의 세계에 속하는 것으로, 그 세계는 균형이 깨졌다.
우리는 탄탈로스와도 같은 처지에 있다고 함이 정확한데, 차이점이 있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유혹에 빠지도록 내버려둔다. 또한 우리를 환상에서 깨어나게 하는 상동곡(常動曲)은 아마도 한층 다양하리라. 어제 열망하던 것들은 어제의 자아에게는 유효했지만, 오늘의 자아에게는 아니다. (본문 13–14면)
마르셀과 알베르틴의 비극적인 관계는 실패가 예고된 인간관계의 전형이다. 나는 지나치게 추상적이며 임의적인 프루스트의 비관론을 소설의 중심에 있는 이 재앙을 통해 밝히고자 한다. 각각의 종양에는 적절한 메스와 붕대가 있기 마련이다. 기억과 습관은 시간이라는 암이 가지고 있는 종양이다. 기억과 습관은 프루스트 소설의 가장 단순한 에피소드를 통제하는데, 그것들이 어떻게 활동하는지 분석하기에 앞서 작용 원리를 이해해야 한다. 기억과 습관은 한 건축가의 지식이자, 브라흐마에서 레오파르디에 이르는 모든 현자들의 지혜를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신전의 아치형 지붕을 지탱하는 기둥으로, 그 지혜는 욕망을 충족시키는 대신 없애버린다.
(본문 17면)
프루스트는 기억력이 나빴다. 그의 습관 또한 별로 효과적이지 못했다. 이는 그의 기억력이 별로 효과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기억력이 좋은 사람은 아무것도 기억해내지 못한다. 그는 아무것도 잊어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의 기억은 일관되고 판에 박힌 것으로, 빈틈없는 습관의 조건이자 기능이다. 또한 발견할 때 쓰는 도구가 아닌 참고할 때 필요한 도구가 된다. 이런 기억력을 가진 사람은 “나는 어제 일처럼 기억한다…”를 상습적으로 말하고 다니는데, 이 표현 자체가 그의 기억의 가치를 나타낸다. 그는 어제를 기억할 수가 없다. 내일을 기억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는 단지 어제라는 것이 저 아래 가장 습한 날로 기록된 8월의 공휴일과 함께 빨랫줄에 매달려 마르는 것을 그저 바라볼 수만 있다. 그의 기억은 빨랫줄이고 과거의 이미지는 세탁이 된 더러웠던 빨래 더미로, 과거의 이미지는 그가 기억해내려고 할 때 필요한 것이 생기면 즉각 달려오는 충실하고 헌신적인 하인과 같다.
(본문 24면)
첫댓글 이 글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보다 훨씬 더 어렵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내 머리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 글을 억지로 이해하려는 것보다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몇 페이지라도 읽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