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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67번째 무료강의 시작 ⇛ 단군조선 역사 1대~47대까지 단군님의 업적 중 제4탄 31대 등올단군 ~ 40대 달음단군님까지 업적에 대하여 설명
■ 전체 제목: 사업과 직장을 위한 교양과 역사
■ 67번째 주 내용: 단군조선 역사 1대~47대까지 단군님의 업적 중 제4탄 31대 등올(登屼)단군 ~ 40대 달음(達音)단군님까지 업적에 대하여 설명
■ 일자: 신축년(辛丑年) 단기 4354년 서기 2021.5.27.목요일.(음력 4.16.)
■ 장소=등재한 곳: 천지인(天地人)방 http://blog.naver.com/hhs0203 에 올려놓았음.
■ 강의자(講義者): 황효상(黃孝相) 호(號) 심조불산(心操彿山)
여러분께서 사업과 직장에 초석이 되고 밑바탕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저의 무료강의는 1마당에서 13마당으로 되어있습니다.
매주 목요일 무료강의를 올리겠습니다.
정정당당한 미래를 위해 우리 젊은 후손들에게 대홍익역사(大弘益歷史)배움터와 천지학당(天地學闛)터를 만들어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힘찬하루 보내세요.
제11마당 설명 중 67번째 무료강의 시작
◐ 단군조선 역사 1대~47대까지 단군님의 업적에 대하여(제4탄)
➜ 31대 등올(登屼)단군 시대에 업적 < BC 874년~BC 850년 >
■ 조자문(曹子文)의 건의로 입법과 사법과 행정기관을 각각 세워서 다스렸다는 역사가 있다.
- 재위 2년(BC 873년)에 조자문이 아뢰기를 정치와 법률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으나 행정관과 사법관은 각각 그 직책이 달라야 서로 권한을 빼앗지 않고 그렇게 해야 정치와 법률이 명백하여 공정하게 새행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께서 옳다 하시며 입법과 사법과 행정기관을 각각 세워 다스리니 정치와 법률이 공평하였다.
- 재위 20년(BC 855년)에 고삼도(高三道) 복승자(卜承子) 양화상(楊花相) 등 훌륭한 신하들이 임금을 보좌하였다.
➜ 32대 추밀(鄒密)단군 시대에 업적 및 역사 < BC 849년~BC 820년 >
■ 재위 13년( BC 837년) 3월에 일식(日蝕)이 있었다는 역사가 있다.
- 재위 12년(BC 838년)에 초(楚)나라 대부 이문기(李文起)가 조정에 들어와 며슬을 하였다.
- 재위 13년( BC 837년) 3월에 일식(日蝕)이 있었다.
- 재위 26년( BC 824년)에 손흥렬(孫興烈)이라는 대단한 권세가의 신하가 란(亂)을 일으키자 군사를 보내어 토벌하여 물리쳤다.
➜ 33대 감물(甘勿)단군 시대에 업적 < BC 819년~BC 796년. >
■ 삼성사(三聖祠)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낸 체와 용의 원리인 집일함삼(執一含三)과 회삼귀일(會三歸一) 등의 훌륭한 교훈의 역사가 있다.
≪ 세계역사에서 BC 800년에 이집트 역사에서 파피루스 종이를 생산하였다는 역사가 있다. ≫
戊子七年(무자칠년): 무자년이며 재위 7년에 즉 BC 813년에
寧古塔西門外甘勿山之下(영고탑서문외감물산지하): 영고탑(寧古塔) 서문 밖 감물산(甘勿山) 밑에
建三聖祠親祭(건삼성사친제): 삼성사(三聖祠) 즉 한인(환인)님, 한웅(환웅)님, 치우천왕을 모시는 사당을 세우고 친히 제사를 올리셨다.
大道術淵宏(대도술연굉): 큰 도술은 깊고 크고 넓어서
執一含三(집일함삼): 하나를 잡으면 셋을 포함하고 즉 하나가 삼이 되는 것을 용 이라 하고
會三歸一(회삼귀일): 셋을 합쳐서 하나로 돌아오네. 즉 삼이 하나 되는 것을 체라고 한다.
곧 중국에서 말하는 태극, 무극, 리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기이원론 리기일원론(理氣一元論)=이기일원론 등이다.
체와 용에서 나오는 리치=이치이다.
곧 체와 용은 한 고리에 있으며 떨어질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한역(桓易)=환역이다.
곧 한역(환역)은 하나라의 연산역(連山易)과 은나라의 귀장역(歸藏易)과 주나라의 주역(周易) 보다도 더 앞서는 우주론을 이야기하는 철학의 경전으로 한웅(환웅)천왕 때 복희씨(伏羲氏)가 만든 한역(桓易)=환역의 경전의 이야기이다. 33대 감물단군께서 이러한 체와 용의 원리를 설명하셨다.
□ 33대 감물단군 시대이며 BC 800년경에 트로이(터키)전쟁을 극으로 쓴 역사가 있다
세계역사는 이 당시인 즉 33대 감물단군 시대에 트로이 전쟁을 극으로 쓴 역사와 그리스와 트로이(터키)와의 전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
트로이(터키)전쟁은 BC 1300년경에 일어났다. 이 전쟁의 이야기를 쓰게 된 해는 BC 800년경에 시인으로 추정되는 그리스 문학의 대표작인 작품으로 호메로스의 장편 서사시 일리아드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극으로 꾸민 것으로 이 당시에 미케네 문명과 주변의 여러 도시국가 사회의 여러 모습을 말하고 있다고 봅니다. 또한 호메로스의 장편 서사시 오디세이(트로이 원정에 성공한 그리스의 영웅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를 편찬하였다.
즉 미케네 문명이 그리스의 지중해에 있는 크레타 섬을 중심으로 BC 3000년경에 에게해변 일대에 이미 번영한 청동기 문명이 있었다.
이 미케네 문명이 곧 그리스 조상의 나라이며 BC 1300년경에 트로이 전쟁으로 그리스가 승리 후 세월이 흘러 미케네문명이 사라진 후에 새로운 국가가 태어났는데 이것이 바로 그리스의 나라에 BC 800년경에 폴리스 라는 도시국가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스인은 BC 800년 후반부터 다시 해외로 많이 진출하여 지중해 흑해 연안지역에 식민지 활동을 펼쳐 곳곳에 도시국가를 세우게 되었다.
■ 트로이 전쟁(극으로 쓴 내용)
BC 1300년경에 스파르타 왕의 아름다운 왕비 헬레네가 트로이(터키의 북서쪽)나라(에게해 동쪽의 고대도시이며 터키 북서쪽의 고대도시)의 트로이 왕자 파리스의 유혹에 빠져 남편과 딸을 버리고 트로이로 건너간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스파르타 왕 메넬라오스는 이 모욕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의 형인 미케네왕국(그리스)에서 가장 강한 나라였던 미케네 왕국의 왕인 아가멤논을 찾아가서 저의 아내를 되찾도록 해 달라고 하였다. 이것이 트로이전쟁의 원인이었다.
즉 그리스와 트로이(터키)의 전쟁이 일어나기는 BC 1300년경에 일어났으나 그 후 약 500년이 지나서 BC 800년경에 극으로 그리스의 문학작품으로 기록하였다. 이 극작으로 트로이 도시국가가 패하게 되었으며 그리스의 영웅 오디세우스가 계략을 세워 큰 목마를 이용하여 트로이 도시국가를 폐허로 만들었다. 라고 역사는 말하고 있다.
■ BC 800년경에 로마 탄생
그 후 역사가 흘러 트로이의 영웅 아이네아스의 13대 후손인 알바의 왕 프로카스가 두 아들을 두고 운명하자 둘째 아들인 아물리우스가 반란을 일으켜 맏아들인 누미토르의 왕위를 빼앗았다. 맏아들 누미토르의 아들은 죽이고 딸인 실비아는 어느 날 무녀가 된 딸인 실비아가 베스타의 신전에 바칠 물을 긷기 위해 군인의 수호신인 마르스의 숲에 가자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한 군인의 수호신인 마르스는 그녀를 겁탈했다. 이에 실비아는 처녀의 몸으로 쌍둥이 형제를 낳았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된 형의 왕위를 빼앗은 아물리우스는 쌍둥이 형제를 죽여버리라고 명령을 하였다. 그러나 명령을 받은 신하는 차마 쌍둥이 형제를 죽일 수가 없어서 광주리에 두 아이를 넣고 티베르 강가에 띄워 보냈다. 그러나 이 광주리는 어느 강가에 닿았는데 이때 물을 마시러 왔던 늑대가 배가 고파 우는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늑대의 젖을 먹인 뒤에 굴로 데리고 갔다. 이 쌍둥이 형제가 늑대의 젖을 먹고 자라는데 하루는 양치기가 늑대가 없는 틈을 타서 이 형제 아이를 굴에서 훔쳐다가 자기의 아들로 키우게 되었다.
바로 이아이가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와 레무스였다.
이 형제는 형인 로물루스와 동생인 레무스가 자기들의 도시를 세우기로 했는데 의견이 맞지를 않아 서로 싸우다가 동생인 레무스가 죽고 말았다. 이에 형인 로물루스가 카피톨리노 언덕 위에 도시를 BC 800년경에 세우고 이름을 로마 라고 부르게 되었다.
로마의 역사는 이탈리아의 티베르 강가를 중심으로 하여 시작하게 되었다.
이후의 로마 역사는 동서로 갈리게 되어 서로마가 476년에 멸망하자 봉건사회 즉 봉건제도와 기록교가 중심이 되어 지탱하다가 교황이 황제의 권한보다도 높을 때가 나타났으며 그 후 동로마는 1453년에 멸망하였다.
■ BC 800년에 이집트 역사에서 파피루스 종이를 생산하였다.
이집트에서 종이를 생산하던 BC 800년은 우리나라의 역사로 보면 제33대 감물(甘勿) 단군시대이다.
- 파피루스는 풀이다. 영어로 페이퍼(paper)의 어원이 바로 파피루스이다.
파피루스의 원료는 나일강의 델타 지대와 상류 습지대에서 자라는 사이프러스 파피루스 풀인데 보통 2m 정도의 높이나 큰 것은 4~5m에 이르는 갈대의 일종이다.
파피루스 풀은 고대 이집트인의 생활과 매우 밀착되어 있다. 파피루스의 줄기는 묶어서 배를 만들었고 껍질은 돛이 되었으며 혹은 땔감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고갱이로는 샌달이나 바구니 노끈 등을 만들었다.
- 파피루스 종이의 생산은 로마의 박물학자 플리니우스가 그의 박물지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집트인들은 파피루스의 줄기를 짧게 잘라 껍질을 벗긴 다음 고갱이를 세로로 얇게 깎았다. 그런 다음 나일강의 흙탕물에 담갔다가 대위에 올려놓고 천으로 덮은 채 나무망치로 두드리고 말려서 종이를 만들어내었다.
고갱이의 중심부에 있는 것이 가장 질이 좋은 종이로 그것들은 종교관련된 서적으로 이용되었고 갓껍질에 가까운 부분은 책의 표지나 상품의 포장지로 쓰였다.
- 파피루스를 쓰기 전에는 돌로 된 신전 벽이나 기둥에 상형문자(히에로글리프)를 새겼는데 파피루스 종이가 탄생하면서 상형문자를 간단하고 쓰기 쉽게 고친 신관문자(히에라틱)와 민중문자(데모틱)가 생겨났다.
- 파피루스 종이는 고대 이집트의 특산품이 되어 페니키아와 지중해 여러나라에 수출되었다.
- 파피루스 종이가 그리스에 전해진 것은 기원전 7세기경이었다. 곧 페니키아인(카르타고 섬의 페니키아인을 말함)들이 이집트에서 파피루스 종이를 수입해 그리스에 수출했던 것이다.
- 파피루스 종이가 로마에 전해진 것은 기원전 3세기경이었다.
- 역사는 중국에서 종이가 발명되고 그 제조방법이 8세기경 아랍세계에 전해지면서 파피루스 종이는 역사의 유물과 기념품이 되고 말았다.
◉ 채륜(蔡倫)이 종이를 발명하여 헌상한 것은 후한(後漢) 4대 화제(和帝) 말년이며 원흥(元興) 원년 서기 105년이다. 후한시대 중국에서 세계 문화사상 특기할 만한 대발명이 종이의 발명이다. 종이의 발명가는 환관인 채륜(蔡倫)이다.
➜ 34대 오루문(奧婁門)단군 시대에 업적 < BC 795년~BC 773년 >
■ 도리가(兜里歌)를 지어 불렀다는 등의 역사가 있다.
丙午元年(병오원년): 병오년이며 재위 원년에 즉 BC 795년에 재위 시작하였으며
是歲五穀豊熱(시세오곡풍열):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萬姓歡康作兜里之歌(만성환강작도리지가): 백성들 모두 기쁘고 편안하였으며 도리가(兜里歌)를 지어 부르니
其歌曰(기가왈):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天有朝暾明光照輝(천유조돈명광조휘): 하늘에는 아침 해 솟아 있어 맑고 밝은 빛 내려비추고
國有聖人德敎廣被(국유성인덕교광피): 나라에는 어진 성인이 있어 덕의 가르침이 널리 미치고
大邑國我倍達聖朝(대읍국아배달성조): 큰 나라 우리나라는 배달국의 성인나라이네.
多多人不見苛政熙(다다인불견가정희): 많은 사람마다 인심 씀이 나쁘지 아니하고 나라 다스림은 더욱 잘 하네.
皥歌之長太平(호가지장태평): 밝은 노래 소리가 끝없이 태평하리라.
◉ 도리가(兜里歌)는 34대 오루문단군시대에 부른 노래였으며
어아가(於阿歌)는 2대 부루(扶婁)단군시대에 부른 노래였다.
도솔가(兜率歌)는 서기 760년에 즉 신라 35대 경덕왕(景德王) 19년에 월명사(月明師)가 지은 향가에 도솔가(兜率歌)라는 것이 있는데 이해 4월에 해가 둘이 떠서 이 노래를 지어 불렀더니 이러한 이변이 없어졌다고 하였다.
곧 해가 둘이 떳다는 것은 현재의 왕에 도전할 세력의 출현을 예보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니면 무슨 우환을 예보하는 것이라고 보여진다.
□ 34대 오루문단군 때 주요인물은 다음과 같다.
■ 포사(褒姒)는 주(周)나라 12대 유왕(幽王: BC 781년~BC 771년)의 총비(寵妃)이다.
그녀는 도무지 웃지를 않아 왕이 거짓으로 봉화를 올려 제후를 모이게 한 것을 보고야 비로소 웃었다고 하는데 그 뒤에 진짜 난리가 나서 봉화를 올려도 제후가 모이지 않아 유왕은 견융(犬戎)의 군대에게 죽고 포사(褒姒)는 잡혔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는 포사의 죽음에 대하여 기록하지 않고 있다. 백성들의 이야기로는 자살한 것으로 되어있다. 포사의 죽음은 BC 771년으로 보는 것이다.
◉ 포사(褒姒)
포사는 출생미상~BC 771년이며 주나라 12대 유왕(幽王)이 총애하는 여자임.
주나라 12대 유왕(BC 781년~BC 771년) 때에 이르러 포(褒)나라 사람이 죄를 범했으며 이에 면죄 받으려고 아름다운 여자를 유왕에게 받쳐 올렸다. 그 여자가 바로 포사(褒姒)이다.
즉 포사(褒姒)란 활 장수 활과 화살통을 팔던 부부가 쫓겨 가다가 길에서 주워서 기른 여자가 바로 포사이다. 유왕은 미인 포사를 몹시 총애했다.
➜ 35대 사벌(沙伐)단군 시대에 업적 < BC 772년~BC 705년 >
■ 일본의 웅습(熊襲)을 평정한 것과 연나라 제나라와 싸워 승리한 등의 역사가 있다.
壬午五十年(임오오십년): 임오년이며 재위 50년에 즉 BC 723년에
帝遣將彦波弗哈(제견장언파불합): 단제께서 장군 언파불합(彦波弗哈)을 보내
平海上熊襲(평해상웅습): 바다의 나라 웅습(熊襲)을 평정하였다.
즉 일본 규우슈 지방에 있는 휴가[일향(日向)] 사쯔마[살마(薩摩)] 오오스미[대우(大隅)] 히고[비후(肥後)] 등지에 살던 민족의 지방을 평정하였다.
일본역사서는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가 있으나 일본에서 정사(正史)라고 하는 일본서기(日本書紀)를 다음과 같이 위작(僞作)하고 있다.
즉 역사서는 진실의 사건들을 기록하여 어떠한 경서(經書)보다도 가장 존중하여야 하나 일본서기는 최초 신무천황(神武天皇)을 일본건국 시조로 하고 있다. 그 역사의 시작을 이때부터 즉 단군조선의 35대 단군과 36대 단군 때부터 위작(僞作)을 시작하고 있다. 즉 단군 35대와 36대의 역사를 변조와 도용하여 아래에 일본의 정통역사 라고 말하고 있는 일본서기(日本書紀)가 왜곡보다 한술 더 떠서 위작(僞作) 위서(僞書)한 것에 대하여 36대 단군에서 글을 올리옵니다.
➜ 36대 매륵(買勒)단군 시대에 업적 < BC 704년~BC 647년 >
■ 바다의 도적을 토벌했으며 연나라 제나라를 물리쳤다. 등과 일본의 정통역사인 일본서기(日本書紀)를 이곳에서 변조하고 또 도용하고 있다. 하는 등의 역사가 있다.
甲寅三十八年(갑인삼십팔년): 갑인년이며 재위 38년에 즉 BC 667년에
遣陜野侯裵幋命(견협야후배반명): 협야후(陜野侯) 배반명(裵幋命)을 보내어
일본서기의 니기하야히노미꼬도를 배반명이라 하는데 이는 진국(辰國: 단군조선)과 부여(夫餘)의 조상에 해당된다.
往討海上(왕토해상): 바다의 도적을 토벌케 하였다.
十二月三島悉平(십이월삼도실평): 12월에는 일본의 삼도가 모두 평정되었다.
곧 일본의 정사(正史)라고 하는 일본서기(日本書紀)는 저술자, 편수책임자, 완성년도가 없는 괴상한 일본역사서인 이 일본의 정통역사서에서 제3권 신무천황편의 마지막 장에 보면 신유년(辛酉年) 춘정월(春正月) 경진삭(庚辰朔)에 천황이 강원궁(橿原宮)에서 즉위하였다. 이해를 천황의 원년(元年)으로 하였다. 즉 이때는 BC 660년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곧 제36대 매륵단제(買勒檀帝) 때인 곧 매륵(買勒)단군 45년 신유년(辛酉年) 때인 BC 660년 1월 1일부터 시작하며 초대 왕을 신무천황(神武天皇)으로 시작한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 간특(姦慝)하게 변조 위작(僞作)한 일본서기(日本書紀)의 시조 신무천황(神武天皇)에 대하여
일본이 고귀한 역사를 사실에 입각하여 정도로 만들어야 하는데 도리어 간특하게 위작(僞作)을 하고 있다. 이렇게 야비한 짓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신라시대의 안함로가 삼성기의 역사서를 저술하였기 때문에 가능하다.
즉 삼성기(三聖記)의 역사책은 신라 26대 진평왕(579년~632년) 때 승려인 안함로(安含老)와 원동중(元董仲)이가 쓴 한국(桓國)=환국의 맥과 한웅국(桓雄國)=환웅국=배달국(倍達國)의 맥과 단군(檀君)과 북부여(北夫餘)의 시조 해모수(解慕漱)와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高朱蒙)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아주 고귀한 역사서이다.
그리고 신라 진평왕(眞平王) 때 화랑도정신인 화랑오계(花郞五戒)=세속오계(世俗五戒)도 이때 원광법사(圓光法師)가 만들었다.
곧 신라 26대 진평왕 때 저술한 역사서와 고기(古記) 등을 근거로 일본 백성에게 좋은 역사책은 않만들고 도리어 간특하게 위작을 하게 되었다.
일본의 정통역사서라고 하는 일본서기(日本書紀)를 720년에 만들었다. 고로 연도를 확인하게 되면 위작한 연도가 확실하게 나타난다.
일본 그들의 역사가 수 만년을 가졌다고 기록하고 있다고 한 올바른 역사라면 삼성기를 저술한 안함로의 시대 이전에 만들어야 인정을 하나 즉 신라 26대 진평왕 이전에 만들어야 일본 정통역사라고 말할 수 있으나 일본의 정통역사 라고 만들어 놓은 것을 보면 역사서에는 반드시 기록하여야 하는 서문, 저자, 편수책임자, 열전, 완성한 일자 등등등이 없다. 이러한 것을 볼 때 일본은 신라 26대 진평왕 시대의 아주 귀중한 삼성기 등의 역사서를 참고문헌으로 하여 위작한 것이 확실 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사실은 백제의 역사서인 서기(書記)는 일본서기(日本書紀)보다도 훨씬 이전에 저술하였다. 백제의 역사서인 서기는 신라의 역사서인 국사(國史)보다도 먼저 저술하였다. 즉 신라의 국사(國史)는 신라 24대 진흥왕 6년에 즉 서기 545년에 편찬한 신라의 역사서(歷史書)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진흥왕 6년에 의하면 545년 가을 7월에 이찬(伊湌) 이사부(異斯夫)가 왕에게 아뢰기를 국사(國史)는 군신(君臣)의 선악을 기록하여 만대에 포폄(褒貶: 선악)을 보이고자 함이니 사기(史記)를 꾸며두지 않으면 후대에 무엇을 보이겠습니까? 하고 건의하여 만들었다.
즉 백제의 역사서인 서기(書記)는 375년인 백제 13대 근초고왕(346년~375년) 재위 30년 때 박사 고흥(高興)이 편찬한 역사서(歷史書)이다.
백제의 역사서인 서기(書記)는 일본의 정통역사인 일본서기(日本書紀)보다도 무려 345년 이전에 저술하였다. 그리고 신라의 국사(國史)보다도 170년 전에 만들었다.
이러한 것을 볼 때 우리나라에는 고귀한 역사서가 있었다는 것이 증명이 되고 있다.
아래에 일본의 정통역사 라고 말하고 있는 일본서기(日本書紀)가 왜곡보다 한술 더 떠서 위작 (僞作) 위서(僞書)한 것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다.
□ 일본의 정사라고 하는 일본서기(日本書紀)는 위작이며 잡류소설보다 못하다
일본의 정사라고 하는 일본서기(日本書紀)는 잡류소설보다 못하다. 왜냐하면 어느 나라나 주요한 역사서에는 반드시 서문(序文)이 있다. 그리고 누가 편찬했다는 편찬자 그리고 편찬책임자, 편찬한기간, 완성한연도, 주요인물에 대한 열전 그리고 마지막에는 발문(跋文)을 쓰고 있다. 곧 역사의 가장 큰 핵심이 되는 편찬책임자와 완성한연도와 날자를 쓰고 있다.
그런데 일본서기는 이러한 편수자와 완성연도 등의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이상한 것은 일본이 이 당시에 일본의 고유 문자가 없었는데 과연 나라의 직제가 성립하였는지 어떻게 천황 이라는 직제를 사용하였는지도 이상하다.
좌우간에 동양 문화권에 있으면서 편수자, 완성한 년도 등 이러한 것들이 없다는 것은 한마디로 괴상스러운 역사서이다.
또 일본서기의 내용을 보면 신무천황의 시조에서~9대까지의 왕들의 본기 내용에는 세자 책봉이나 왕의 즉위 왕의 사망한 것들만 기록이 되어있지 그 기간 안에 일어났던 주요인물이나 주요한 역사적인 사건들의 기재가 전혀 없다.
그리고 왕의 명칭도 전혀 일본식이 아니며 주로 중국의 시호(諡號)를 도용하고 있다.
이러한 것을 정통역사서로 볼 수 있는지 매우 의아스럽다. 곧 편수자가 없다는 것은 스스로 위작(僞作)을 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여기 일본건국 초대 왕으로부터 열거해보면
1대 신무(神武) 2대 수정(綏靖) 3대 안녕(安寧) 4대 의덕(懿德) 5대 효소(孝昭) 6대 효안(孝安) 7대 효령(孝靈) 8대 효원(孝元) 9대 개화(開化) 10대 숭신(崇神)이다.
이러한 것들을 볼 때 일본의 최초의 역사서인 일본서기는 위서 중에서도 위서이며 이는 나아가 잡류소설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일본서기의 주 핵심인 편수자와 완성연도 등 이러한 것이 없다. 고로 이 일본서기를 일본나라의 정통역사서 라고 할 수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곧 편수책임자가 없다는 것은 스스로 위작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국가적 양심이라도 가지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이라도 자국의 백성을 희롱(戱弄)하지 말기를 바라며 세계의 역사가를 우롱(愚弄)하지 말기를 바란다.
이러한 내용을 볼 때 많은 지식인(知識人)과 학자들은 일본서기를 위서라고 말하고 있다. 즉 일본사람들은 자기 조상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일본의 지성을 가진 역사가들도 위서(僞書)라고 하며 세계의 사학가(史學家)들은 일본서기(日本書紀)를 위서(僞書) 중에서도 위서(僞書)라고 말하고 있다.
곧 왜곡하고 위작한 역사는 썩은 물과 같다. 라고 본다.
◉ 일본에서 처음으로 만들었다는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일본건국 시조인 신무천황(神武天皇)은 즉 신무왕은 부친(父親)이 언파렴무로자초즙불합존(彦波瀲武鸕鷀草葺不合尊)이며 4째 아들이다. 라고 기록되어있다.
즉 일본의 천황의 계보가 우리의 고귀한 4개의 역사서를 하나로 묶은 한단고기(桓檀古記)=환단고기의 역사서 중 단군세기(檀君世紀) 35대 단군 때에 언파불합(彦波弗哈)의 장군의 이름이 나오는 것은 이채롭다 하겠다. 즉 일본시조인 신무왕(신무천황)의 아버지 이름인 언파렴무초자초즙불합존 이라는 긴 이름을 만들었으며 이 이름은 바로 35대 단군이신 사벌(沙伐)단군 때 장군의 이름이 바로 언파불합(彦波弗哈)이며 이의 이름을 변조 위작하여 만들었다. 즉 일본서기는 우리나라의 역사서를 변조 위작하고 있다. 왜냐 일본서기의 간지를 이때 처음으로 기록하여 놓았는데 단군세기에 나오는 간지와 똑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 내용은 우리나라의 고귀한 4개의 역사서를 하나로 모은 한단고기(환단고기)의 역사서 중 단군세기에 제36대 매륵(買勒)단군 때 갑인년(甲寅年)이며 재위 38년에 즉 BC 667년에 협야후(陜野侯) 배반명(裵幋命)을 보내어 바다의 도적을 토벌케 하였다. 즉 일본 삼도를 토벌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 일본서기(日本書紀) 권 제1에서 신대상(神代上)편에 기록한 것을 보면
일본의 신화(神化)를 기록하기를 최초의 신(神)을 국상입존(國常立尊)이라고 하였다.
그 다음을 국협추존(國狹槌尊) 그 다음을 풍짐정존(豊斟渟尊)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삼신(三神)으로 만들어 놓았다.
일본의 첫째 신인 국상입존의 아래대를 7대로 만들었다. 그 후 대팔주국(大八洲國)을 낳았다.
그 후 제사지내는 신(神) 중에서 왼쪽 눈을 씻어서 낳은 신이 천조대신(天照大神) 이라고 하였으며 오른쪽 눈을 씻어서 낳은 신을 월독존(月讀尊) 이라고 하였으며 다시 코를 씻어서 낳은 신을 소전명존(素戔鳴尊) 이라고 기록하여 놓았다.
천조대신(天照大神)에게는 고천원(高天原)을 다스리게 하고
월독존(月讀尊)은 푸른 바다의 조수를 다스리게 하고
소전명존(素戔鳴尊)에게는 천하를 다스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서기 권 제2에서 신대하(神代下)편에서 기록하기를
천조대신(天照大神)의 황손(皇孫)을 위원중국(葦原中國)의 임금으로 하려고 하였다. 라고 기록 하고 있다. 그 후 후손으로 협야존(狹野尊) 이라는 신황(神皇)이 나온다.
이를 다른 이름으로 신일본반여언존(神日本磐余彦尊) 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협야(狹野) 라는 것은 어렸을 때의 이름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역사가 흘러 1,792,470 여 세(世)가 지나서 신무천황(神武天皇) 이라고 처음으로 제일세(第一世)가 시작된다고 일본서기 권 제3에서 신무천황편이 기록하고 있다.
정말로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이야기를 기록하여 놓았다. 어떻게 역사가 1백 80만년 이 아니라 1백 80만 여 세 라는 세월이 흐른 뒤에 신무천황이라는 임금이 나오게 되었는지 그렇타면 그 긴 세월 속에 왜 일본서기의 역사서에 편수자가 없고 편수책임자가 없으며 완성연도가 없으며 열전이나 서문이나 마지막에 발문 등이 없으며 또한 간지가 즉 천간지지가 언제부터 시작하였다는 것인지를 기록하여야 하나 이러한 것이 없이 1백 80만 여 세(世)가 흐른 뒤에 신무천황을 일본의 건국 시조로 하고 있으니 한마디로 미친개도 웃을 일이다.
일본서기에 신무천황은 바로 언파렴무로자초즙불합존(彦波瀲武鸕鷀草葺不合尊)의 4번째 아들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왕이 바로 협야(狹野)이며 바로 신일본반여언존(神日本磐余彦尊)이다. 이 왕이 바로 신무천황(神武天皇) 이라는 초대 천황이라는 것이다.
좌우간에 일본의 신화의 이야기는 도대체 무슨 말인지 하도 복잡하고 괴상하여 일본 백성도 이러한 일본의 신화를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한다.
이 일본서기의 제3편인 신무천황편에 처음으로 간지(干支)가 기록이 나오고 있다. 이 당시에는 즉 신무천황 이라고 한 그 당시의 간지는 갑인년(甲寅年) 이라고 나오는 데 이상한 것은 중국도 그 당시에 즉 갑인년은 단군조선사인 단군세기(檀君世紀) 만이 기록하기를 즉 36대 매륵(買勒)단군 재위 38년이며 BC 667이다. 이 당시는 중국의 춘추시대이며 주(周)나라의 시대이다. 이때에 중국의 역사서인 BC 91년에 완성한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도 간지를 사용하지 못하였으며 그저 주나라 몇대 왕 이라고 기록하는 시대이다.
즉 중국에는 간지(干支)와 연도를 표시를 못하고 있었던 시대인데 일본은 1백 80만 여세가 흐른 후의 이상한 역사가 흐른 나라 라고 하였으며 그리고 일본은 논어와 천자문을 백제의 왕인(王仁)이 일본에 건너가기 전의 역사인데 어떻게 천간지지인 간지(干支)를 이때에 처음으로 기록하고 있으니 그 전의 일본서기에는 간지(干支)가 한 문자도 기록이 않나오던 것이 이때에 처음으로 쓰고 있으니 이상하고 괴상스러우며 또한 일본서기가 일본의 정사(正史) 라고 하는데 더 괴상한 것은 편수자, 편수책임자, 서문, 완성일자 등이 없으니 괴상스럽고 기괴한 역사서를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일본서기는 위서 중에서 위서이며 이 일본서기를 일본의 사학자들도 믿지를 안 하고 있다는 사실이며 세계역사가들은 이 일본서기를 위서 중에서 위서 라고 하는 것이다.
좌우간에 일본서기에서 처음으로 신무천왕이라는 자는 36대 매륵단군의 역사를 도용하여 만들었다는 것이다.
➜ 37대 마물(麻勿)단군 시대에 업적 < BC 646년~BC 591년 >
■ 37대 마물(麻勿)단군 때 주(周)나라 공주를 비(妃)로 삼았다. 등의 역사가 있다.
단군세기(檀君世紀)에는 기록이 없으나 단기고사(檀奇古史)에 기록한 것을 올리옵니다.
마물단군 재위 4년에 토목을 크게 일으켜 궁궐을 중건하였다.
재위 5년에 방공전(方孔錢)을 부어 만들었다.
8년에 모문후(毛文候) 유례(有禮)가 반란을 일으켜 군사를 보내어 토벌하였다.
10년에 주(周)나라 공주를 비(妃)로 삼았다.
13년에 진(秦)사람 석무득(昔無得)이 천리마(千里馬)를 가지고 와서 임금께 받쳤다.
15년에 열성제(列聖帝)의 송덕비를 동문밖에 세웠다.
18년에 이선량(李善良)을 승상(丞相)으로 삼았다.
50년에 장백산(長白山)에 양선자(養仙子)라는 숨어사는 사람이 있었는데 나이 160살에 이르렀어도 피부가 어린아이와 같았다.
□ 37대 마물(麻勿)단군 때 세계역사에서 주요인물은 다음과 같다
■ 관중(管仲): 출생미상~BC 645년이며 춘추시대 제(齊)나라 재상이다.
이름이 중(仲)이며 자(字)는 이오(夷吾)이다. 이름으로 더 알려져있다.
부국강병책을 추진하여 제(齊)나라의 시조인 강태공의 후손 환공(桓公)이 첫 번째 패권(覇權)을 쥐게 하는데 보좌를 했다.
■ 포숙아(鮑叔牙): 출생과 사망은 미상이며 춘추시대 제(齊)나라의 정치가이다.
관중(管仲)을 추천하여 환공(桓公)의 정치를 도와 첫 번째 패권을 쥐게 하였으며 관포지교(管鮑之交)의 유명한 고사성어를 만들었음. ≪ BC 651년에 관포지교의 고사성어가 나오는 시대는 공자가 태어나기 100년 전의 역사의 이야기다. ≫
■ 문공(文公): BC 636년에 진(晋)나라의 중이(重耳)가 19년 만에 귀국하여 문공(文公)이 됨.
망명생활 때 자기를 도운 호언(狐偃) 조쇠(趙衰) 전힐(顚頡) 위주(魏犨) 등에게 상을 내렸다. 그러나 중이를 더 많이 도운 개자추(介子推)에게는 상을 내리지 않았다. 개자추가 산에 숨자 불을 질러 찾고자 했으나 불에 타 죽었다. 이리하여 한식(寒食)의 유래가 생기게 됨.
■ 진문공(晋文公): BC 632년에 진(晋)나라 문공이 패자가 됨.
■ BC 626년에 진(秦)나라 목공(穆公)이 정(鄭)나라를 치려다 진(晋)나라 군사에게 패함.
■ 장왕(莊王): BC 613년~BC 591년까지 재위함. 초(楚)의 군주 오패의 한 사람임.
주(周)의 사자에게 주실에 전해 내려오는 솥의 경중을 물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함.
➜ 38대 다물(多勿)단군 시대에 업적 < BC 590년~BC 546년 >
■ 38대 다물(多勿)단군 때 표상술(表相述)의 진언(眞言)의 명언의 역사가 있다.
단군세기(檀君世紀)에는 기록이 없으나 단기고사(檀奇古史)에 기록한 것을 올리옵니다.
재위 첫 해에 맏아들 두홀(豆忽)을 태자로 삼았다.
재위 3년에 기자조선(奇子朝鮮: 번한조선) 사절이 입조하였다.
8년에 위(魏: 춘추시대 나라)나라 박사 진덕기(陳德基)가 입경하였다.
10년에 정(鄭: 춘추시대 나라)나라 사람 신도회(申屠懷)가 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와서 살았다.
15년에 흰 학이 궁궐안의 소나무에 와서 설더니 음악소리를 듣고 내려와 춤을 추었다.
18년에 문인 표상술(表相述)을 오성판윤(五城判尹)으로 삼았다.
20년에 조(趙: 춘추시대 나라)나라 사람 염관(廉官)이 가족을 거느리고 입국하였다.
26년에 송(宋: 춘추시대 나라)나라 사람 황노술(黃老述)의 딸이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입국하여 태자궁(太子宮) 안에서 함께 살았다.
30년에 문해광(文海廣)의 필법(筆法)이 매우 뛰어나서 대부열(大夫烈)에 올랐다.
32년에 오추정(吳秋亭)이 그림을 잘 그리므로 문원상서(文院上書)로 삼았다.
33년에 오성판윤(五城判尹) 표상술(表相述)이 진언(眞言) 하기를
새의 둥지를 뒤집어 놓으면 알이 떨어져 성할 리 없고
나라가 망한 속에서는 평안한 백성이 있을 수 없습니다.
타는 집과 물이 새는 배에서 근심을 같이 하지 않을 사람이 없고
음식이 떨어져 여러 날 굶주리면 병이 나지 않을 몸이 없으니
국가는 천하의 대기(大器)입니다.
만일 한번 기울면 사람의 힘으로 갑자기 바로 세우기는 어렵습니다.
그러기에 훌륭한 제왕이 기울기 전에 힘쓰는 것은 앞으로 기울어질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폐하께서는 밝게 살피시기 바랍니다. 임금께서 이 말을 따라 국정을 밝히 살피셨다.
표상술(表相述)의 시(詩)에
孤燈滄海夜(고등창해야): 외로운 등불은 밤바다를 밝히고
秋雨讀兵書(추우독병서): 가을비 내리는데 병서만 읽네
洗劒掛石壁(세검괘석벽): 칼을 씻어 석벽에 거니
雷聲動天地(뇌성동천지): 우뢰소리 천지를 진동하도다.
35년에 진(晋: 춘추시대 나라)나라 사람 김일선(金日善)이 천문지리학(天文地理學)을 가지고 조정에 참여하였다.
40년에 초(楚: 춘추시대 나라)나라에서 망명한 번석문(樊釋文)이 황금(黃金) 40근을 가지고 입국하였다.
45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 두홀(豆忽)이 보위에 오르니 제39대 단군(단제)=임금이시다.
□ 오(吳)나라 합려(闔廬)는 어떻게 왕이 되었나?
오(吳)왕 합려와 월(越)왕 구천과의 시대에 전쟁의 역사가 일어났다.
곧 오왕 합려(闔廬)와 월왕 구천(句踐)이 싸우기 그전의 역사에서 오왕 합려가 왕이 된 사연의 역사는 다음과 같다.
역사는 초(楚)나라 평왕(平王)이 죽기 전에 평왕의 태자 건(建)에게 진(秦)나라 공주를 채택하여 건에게 혼인을 시키기로 하였는데 사신으로 갔던 신하의 말에 넘어가 즉 미인을 태자에게 줄 것이 아니라 직접 차지하십시오. 라는 말에 넘어가 이에 진(秦)나라 공주가 절세미인이라 평왕이 가로채어 그 공주와 평왕과 사이에 낳은 아들이 진(軫)이며 그 후 평왕이 죽고 그 뒤를 이어 진(軫)인 그가 초나라 소왕(昭王)이 되었다.
양자강 주변에 있었던 오왕 요(僚)는 초(楚)나라의 평왕이 죽자 국상을 틈타 두 공자 개여와 촉용으로 하여금 초나라를 기습 공격하도록 하였으나 초나라는 즉각 응전해와 오히려 오나라 군대의 퇴로를 차단당하고 말았다.
이때 오나라의 국내가 텅 비다시피 되자 공자 광(光)은 전제장군을 시켜 오왕 요를 찔러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이가 바로 오왕 합려(闔廬)이다. ≪ 이러한 오왕 합려시대에 오자서와 손자(손무)와 공자와 월왕 구천(句踐)이 활동하던 시대이다. 공자는 BC 551년에 태어났다. 이러한 시대는 우리나라의 역사로는 제38대 다물(多勿)단군(임금)시대이며 재위는 BC 590년~BC 510년 입니다. 곧 38대 다물단군 재위 40년인 BC 551년에 공자가 태어났다. 이러한 오자서 손무(손자병법의 저자) 등의 인물들에 대한 역사를 사마천이 사기(史記)에 기록 해놓았으므로 해서 위대한 단군의 역사도 있었다는 것이 증명이 되는 것이다. ≫
□ 38대 다물(多勿)단군 때 세계역사에서 주요인물은 다음과 같다
■ 석가모니: BC 563년경~BC 484년경 인도에 석가(釋迦) 탄생. 80세에 입멸(入滅)함.
■ 공자(孔子): BC 551년~BC 479년이다.
주공(周公)이 죽은 지 5백년 후에 공자는 주령왕 21년 BC 551년에 노나라 창평읍에서 태어났다. 공자는 노나라 애공(哀公) 16년(BC 479년) 4월 기축일(己丑日) 73세로 운명(殞命) 함. 공자는 옛 것을 닦아서 버려진 것을 다시 일으켜 서경(書經)과 예기(禮記)를 서술하고 시경(詩經)을 산집(刪輯)하고 악경(樂經)을 바로잡고 역경(易經)에 설명을 붙이고 춘추(春秋)를 저술함. 예기(禮記) 제26편인 경해편(經解篇)에 육경(六經)설명 중 역경(易經)에 대해서도 설명 하셨다.
➜ 39대 두홀(豆忽)단군 시대에 업적 < BC 545년~BC 510년 >
■ 39대 두홀(豆忽)단군 때 진충로(秦忠老)의 진언(眞言)의 명언 등의 역사가 있다.
여기서도 단군세기(檀君世紀)에는 기록이 없으나 단기고사(檀奇古史)에 기록한 것을 올리옵니다.
단군조선 39대 두홀단군 재위 첫 해에 맏아들 달음(達音)을 태자로 삼았다.
연(燕)나라 사절이 입조하였다.
2년에 초(楚)나라 사절이 입조하였다.
4년에 슬후(膝候)의 아들 섭이(攝珥)가 입조하였다.
10년에 송(宋)나라 사람 정상충(鄭尙忠)이 자기 나라 사람 50명을 거느리고 입국하였다.
11년에 크게 가뭄이 들었다.
13년에 위(魏)나라 제(齊)나라 사절이 왔다.
15년에 진(晋)나라와 조(趙)나라 사절이 왔다.
21년 8월에 일식(日蝕)이 있었다.
30년에 진충로(秦忠老)가 진언(眞言) 하기를
천하를 다스리는 도(道)는 풍속을 바르게 하며
어진 인재를 얻는 것에 있는 것이니
가장 시급한 일은 각종 학교를 설립하여 영재들을 공부하게 하여
각 부분에 적합한 인재를 양성하여 그 중에서 뽑아 쓰면
나라를 다스려 천하가 태형(太亨)하게 될 날을 기다리시옵소서 하니
임금께서 그렇다 하시고 각종 학교를 많이 세워 백성을 교육하였다.
외국 사람도 와서 유학하는 자가 많았다.
36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 달음(達音)이 보위에 오르니 제40대 단군(단제)이시다.
□ 39대 두홀단군 때 주요인물은 다음과 같다.
■ 자로(子路): BC 543년~BC 480년 본명(本名)은 중유(仲由)이며 자(字)가 자로(子路)이다.
소박하고 용기가 있어 가르침을 실천으로 옮김. 중유(仲由)는 노(魯)나라 사람이며 공자보다 9세 아래이다. 그러나 그는 성격이 거칠고 용맹하였으며 자존심이 강하였다.
자로는 한때는 공자를 업신여기며 폭행하려고도 하였으나 그때마다 공자는 예로서 대하며 차츰 바른 길고 이끌어 주었으며 나중에는 감화를 받은 나머지 공자의 제자가 되고 싶다고 하였다.
■ 안회(顔回)=안연(顔淵)=안자(顔子): BC 521년~BC 490년이며 자(字)는 자연(子淵)이다.
안자(顔子)는 안회를 높혀 이르는 말이다. 안회(顔回)는 노(魯)나라 사람이다. 공자보다 30세 아래이다. 그는 어질며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노한 감정을 옮기지 않했다. 그러나 자주 끼니가 떨어지는 형편이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도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와 너뿐이구나 했다.
안회는 29세에 머리털이 모두 다 희어졌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 자공(子貢): BC 520년~BC 456년이며 공자의 무덤에서 6년이나 시묘(侍墓)함.
단목사(端木賜)는 자(字)가 자공(子貢)이며 위(衛)나라 사람이다. 공자보다 31세 아래이다. 그는 변설에 뛰어났다. 그러나 공자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돈벌이에만 힘을 기우렸다. 그래도 그의 판단은 비교적 정확하였다.
■ 합려(闔閭): BC 515년~BC 496년까지 재위함. 춘추시대(春秋時代) 오(吳)나라의 임금.
합려는 손무(손자)와 오자서(伍子胥)를 등용하여 나라를 크게 융성하였으나 월(越)나라를 치다가 월나라왕 구천(句踐)의 직솔 장수 영고부(靈姑浮)에게 그만 손에 큰 부상으로 죽고 말았다. 그의 아들 부차(夫差)가 자리에 오름.
■ 손무(孫武): 손자병법(孫子兵法)의 저자이며 춘추시대(BC 770년~ BC 403년) 사람임.
병법(兵法)에서 병성(兵聖) 이라고 할 수 있다. 손자는 곧 손무(孫武)라 하며 제(齊)나라 사람으로 병법으로써 오왕(吳王) 합려(闔閭)를 만나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 오자서(伍子胥): 출생미상~BC 484년 춘추시대 초(楚)나라 사람. 아버지인 사(奢)와 형인 상(商)이 초나라 평왕(平王)에게 피살되었기 때문에 오(吳)나라에 가서 오나라를 도와 초나라를 쳐서 원수를 갚았다. 그러나 오자서는 오왕 부차에게 월왕 구천(句踐)을 죽이라고 하였으나 오나라의 재상에게 월나라에서 뇌물 작전에 월나라 구천(句踐)과 범려(范蠡)를 살려주게 되어 오자서(伍子胥)의 말을 않듣고 결국에는 오나라가 월왕 구천에게 멸망함.
➜ 40대 달음(達音)단군 시대에 업적 < BC 509년~BC 492년 >
■ 도덕경(道德經)과 치국요람(治國要覽)의 책을 저술하였다는 역사가 있다.
≪ 사마천의 사기(史記) 130권 중 본기가 12권이며 본기 4번째가 주본기(周本紀)인 이곳에서 기록하기를 BC 256년에 서주가 멸망하고 BC 249년에는 동주의 왕조도 멸망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곧 노자의 도덕경에 대한 이야기는 사마천의 사기(史記) 130권 중에서 열전(列傳)이 70권이며 이중에서 제3권 째인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에서 나오는 이야기다. 노자(老子)는 주나라가 망해가는 것을 보고 주나라를 떠날 때 지었다는 도덕경보다 무려 244년 전에 우리나라 40대 달음단군시대에 도덕경을 먼저 지었다는 역사다. 비록 도덕경의 책 내용은 서로 다르겠지만 좌우간에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도덕경을 중국의 역사보다 먼저 지었다는 것이다. ≫
■ 공자의 무덤에서 6년 시묘를 한 자공(子貢)과 부차(夫差)와 구천(句踐)의 역사의 인물 등의 역사가 있다.
- 재위 3년(BC 507년)에 윤복지(尹卜地)가 도덕경(道德經)을 저술하여 임금께 받쳤다.
- 재위 10년(BC 500년)에 진개(秦開)가 치국요람(治國要覽)을 저술하여 임금께 받쳤다.
□ 자공(子貢)과 부차(夫差)와 구천(句踐)에 대하여
단군조선 40대 달음(達音)단군 시대에 공자(孔子)의 제자이며 공자의 무덤에서 6년 시묘를 한 자공(子貢)과 오왕 부차(夫差)와 월왕 구천(句踐)의 역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자공(子貢)은 BC 520년~BC 456년이며 공자의 무덤에서 6년이나 시묘(侍墓)하였다.
단목사(端木賜)는 자(字)가 자공(子貢)이며 위(衛)나라 사람이다.
공자보다 31세 아래이다. 그는 변설에 뛰어났다.
그러나 공자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돈벌이에만 힘을 기우렸다. 그래도 그의 판단은 비교적 정확하였다.
■ 자공(子貢)과 부차(夫差)와 구천(句踐)에 대하여
사마천 사기 중 열전의 7번째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에서 공자의 제자들에 대하여 육예(六藝)에 통달한 77명에 대하여 뛰어난 재능과 덕행과 정치와 문학과 변설에 뛰어난 제자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것과 그리고 공자가 존경하는 인물로는 주(周)나라 노자(老子) 위(衛)나라 거백옥(蘧伯玉) 제(齊)나라 안평중(晏平仲) 초(楚)나라 노래자(老萊子)와 맹공작(孟公綽) 정(鄭)나라 자산(子産)과 그리고 장문중(臧文仲) 유하혜(柳下惠) 동제백화(銅鞮伯華) 자연(子然)을 칭찬한 이야기이다.
변설에 뛰어난 자공(子貢)에 대하여 중니제자열전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자공은 공자(BC 551년~BC 497년) 생존 시에 10년 동안 각 나라를 다니며 유세를 하여 오나라 합려는 BC 515년(공자가 태어난 후 36년)에 오왕으로 즉위하고 그의 아들이 뒤를 BC 496년(공자가 BC 497년에 운명하고 한해 뒤임)에 오나라를 이은 부차(夫差)는 제나라와 전쟁으로 제나라 군사를 대파하고 장군과 군사를 포로로 잡았으나 오왕 부차는 오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진(晋)나라를 공격하여 진나라 군사의 복병에 걸려 오히려 대패하고 말았다. 이때에 월왕 구천은 이 소식을 듣고 곧바로 강수(江水)를 건너 오나라를 습격해 들어가 오나라 도성을 비롯하여 도성을 점령하였다. 이에 오왕 부차(夫差)는 BC 473년에 자결하고 오나라 재상 백비(白砒)를 죽이고 월왕 구천(句踐)은 오나라를 물리치고 3년 뒤에 패자(覇者)가 되었다.
이와 같이 자공은 각 나라를 유세를 하므로 해서 노(魯)나라를 구하고 제(齊)나라를 뒤흔들었으며 오(吳)나라가 패하고 진(晋)나라가 강대하게 만들었으며 월(越)나라를 패자로 만들었다.
즉 자공(子貢)은 각 나라에 유세함으로써 각국의 형세가 뒤바뀌어 커다란 변화가 생기게 만들었다.
자공은 공자의 시묘살이를 6년이나 한 사람이며 또한 그는 변설에 뛰어난 인물로 사마천의 사기 열전에서 기록하고 있다.
□ 40대 달음단군 때 주요인물은 다음과 같다.
■ 자하(子夏): BC 507년~BC 420년이며 본명(本名)은 복상(卜商)이다. 박학(博學)한 분임. 공자보다 44세 아래이다. 문학에 뛰어남. 자(字)는 자하(子夏)이다.
■ 자유(子游): BC 506년~BC 445년이며 공문십철(孔門十哲)중 한분. 본명은 언언(言偃)이다. 문학에 능통함. 자는 자유(子游)이다.
■ 증자(曾子): BC 506년~BC 436년이며 효성(孝誠)과 덕행(德行)이 높은 분이며 본명은 삼(參)이다. 증삼(曾參)은 자(字)가 자여(子輿)이며 노(魯)나라 사람이며 공자보다 46세 아래이다. 그는 효도에 능통하였으며 공자는 그에게 효경(孝經)을 짓도록 하였다.
■ 자장(子張): BC 503년~생몰 미상이며 성은 전손(顓孫) 이름은 사(師) 자(字)는 자장(子張)이다. 즉 전손사(顓孫師)는 춘추말기 진(陳)나라 양성(陽城)사람이다. 공자보다 48세 아래 이다.
■ 사어(史魚): BC 497년 시대의 사람이며 위(衛)나라 대부이다.
이름은 타(佗)이며 자(字)는 사어(史魚) 사추(史鰍)이다.
위령공(衛靈公) 시기에 사직신(社稷神)의 제사를 책임지고 있었다.
논어 위령공편에서는 위나라의 위령공이 공자에게 군사의 진을 치는 방법을 묻자 공자는 제례에 대하여는 들은바 있지만 군법에는 모른다하고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 구천(句踐): BC 496년~BC 465년 재위 춘추시대 말기의 월(越)나라 임금.
오왕(吳王) 합려(闔閭)가 월나라를 치다가 손을 크게 다쳐 사망하고 그의 아들 부차(夫差)에게 패하여 월나라 구천은 와신상담(臥薪嘗膽)하기를 20년 동안 내실을 튼튼히 하여 마침내 부차(夫差)를 멸하여 월나라의 도성(都城) 회계(會稽)에서 치욕을 씻고 패자가 됨.
■ 범려(范蠡): 출몰미상 월왕(越王) 구천(句踐)의 충신이며 뒤에 제(齊)나라를 거쳐 도(陶)에 머물러 거만의 부를 쌓음. 자(字)는 소백(少伯)이며 오나라 부차(夫差)에게 절세의 미인 서시(西施)를 바쳐 오나라를 멸망시킨 공신임. 오나라를 멸하고 난 후 월나라 재상 범려(范蠡)는 월왕 구천이 오나라를 멸한 다음에 월나라를 떠나 제(齊)나라로 갔다. 왜냐 월왕 구천은 그 사람됨이 목이 길고 입이 까마귀 부리처럼 나왔음으로 가히 환난(患難)은 함께 할 수는 있어도 안락(安樂)은 함께 할 수는 없다. 하고 떠났다.
■ 부차(夫差): BC 495년~BC 473년까지 재위함. 오(吳)나라의 합려(闔閭)의 아들임.
월왕(越王) 구천(句踐)을 무찌르고 패자가 되었지만 월왕의 충신 범려(范蠡)의 미인계로 후에 서시(西施)의 미색에 빠졌으며 부차는 오자서(伍子胥)의 말인 월왕 구천을 죽여야 된다고 하였으나 이 말을 않듣고 도리어 월왕을 살려주게 되어 월왕 구천에게 도리어 패하고 자살하여 오나라는 멸망했음. [67번째 무료강의 종(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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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를 연구하지 않고 왜곡이나 조작하면 그 백성 그 나라는 혼란과 재앙들이 일어난다. ♬
신축년(辛丑年) 단기(檀紀) 4354년 서기(西紀) 2021년 5월 27일 목요일.
홍익방건축(弘益房建築) 특허사업 대표이며 천지인방연구소(天地人龐硏究所) 소장
황효상(黃孝相) 호(號) 심조불산(心操彿山) 용사(庸史)
➜ 제블로그: 천지인(天地人)방 http://blog.naver.com/hhs0203 에 역사실과 자료실과 홍보실을 운영하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