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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 최인각 신부 (수원가톨릭대학교 학생처장)
여섯 번을 결혼한 여인의 마음은 어떨까 생각해봅니다. 무슨 사연이 그리 많았기에…. 한 많은 인생을 살아온 인생 여정임에 틀림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등장하는 사마리아 여인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손에 물 안 묻히고 몸종을 거느리며 편하게 살지는 못해도, 한 남자 만나 그 품에서 쉬며 자녀들 낳아 기르고 오붓한 가정을 꾸미고 싶었던 여인이었을 텐데…. 어디서부터 잘못되어, 어느새 여섯 번째 남편을 맞아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인적이 뜸한 정오 시간을 이용하여 물을 길으러 가는 여인의 심정…. 누가 무어라 손가락질 하지 않는데도, 누군가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려고 주변을 살피며 우물가로 향하는 여인의 발걸음이 무겁게만 느껴집니다.
이 여인을 예수님은 우물가에서 만나십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라고 말을 건넵니다. 그 여인은 곧바로 물을 떠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처지는 예수님과 상종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주저거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나에게 마실 물을 청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이 여인은 예수님에게 "선생님은 두레박도 가지고 계시지 않는데 어떻게 주실 수 있습니까? 선생님은 이 우물을 마련해준 조상 야곱보다 훌륭하다는 말씀입니까?"라고 반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그 여인은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목마르지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이리 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이렇게 이어지는 예수님과 여인과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이 여인은 기쁨과 희망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이렇게 여인이 기쁨과 희망으로 바뀌게 되는 원인을 곰곰이 살펴보면,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불쌍한 자신의 처지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이러한 안목으로 우물가에서 이루어진 대화를 재구성하면,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여, '도움을 주는 여인'으로 승화시켜주십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그럴만한 위인이 못된다고 주저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당신이 누구인지 알고 인정하기만 하면, '물을 떠주는 여인'이 아니라, '물을 받아 마시는 여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이 여인은 또 주저하고 믿음이 부족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물도 깊고 두레박도 가지지 않고 어떻게 물을 줄 수 있습니까? 당신이 이 우물을 마련해주신 야곱보다 훌륭합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을 야단치는 것이 아니라, 권위있게 당신이 누구이며, 당신이 주는 물이 어떤 물인지를 알려주면서, 차츰 이 여인을 구약의 전통과 인간의 굴레에서 벗어나 예수님께 마음을 돌리는 '믿음의 여인'으로 승화시켜주십니다. 이로써, 불쌍한 처지에 있었던 여인이 예수님과 만나면서 새사람이 됩니다.
이렇게 새사람이 된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이리 함께 오너라." 그러자 이 여인은 주저하지 않고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더 이상 거짓이나 꾸밈이 없는 답을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맞는 말이다. 너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니, 너는 바른대로 말하였다."라고 칭찬해줍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막연한 희망 속에서 왠지 모르게 복잡하고 죄스럽게 살아왔던 사마리아 여인을 '올바른 여인', '믿음의 여인', '사랑을 받을 만한 여인', '도움을 주는 여인'으로 바꿔주십니다. 이렇게 변한 여인은 세상으로 가서, 자기가 만난 예수님을 전합니다. 그러자 그 고을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오늘 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불쌍하고 과거의 죄스러운 자신의 처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 그분의 이끄심에 의해 새사람이 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봅니다.
주님께서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솟는 생명수를 주시기 위해 우물가에 앉아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번 주에는 조그마한 감실에서 나를 기다리는 예수님을 만나러가는 성체조배 시간을 자주 가지려 합니다. 그 시간에 여러분을 기억하겠습니다.
[서울]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고준석 신부
어느날 한 맹인이 등불을 켜들고 밤길을 나섰습니다.
자신은 비록 불빛을 보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이라도 자신이 들고 있는 등불의 빛을 보고 자신과 부딪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등불을 들고 한참을 걸어가는데 어떤 사람이 그만 “탁!”하고 이 맹인과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맹인은 화를 버럭 내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보시오! 당신은 눈도 없소? 나는 맹인이라 앞을 못보지만 당신은 내가 들고 있는 이 등불도 보지 못하시오?” 그러자 맹인과 부딪친 사람은 어둠 속에서 손으로 맹인이 들고 있는 등불을 확인하고는 말했습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그런데 당신이 들고 있는 등불은 이미 꺼졌습니다.”
우리 인간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이런 사람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나면서부터 눈이 먼 병자를 고쳐줍니다. 어떤 사람들은 반기고 기뻐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싫어합니다. 싫어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마땅히 지켜야할 안식일 계명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심지어는 눈먼 사람이 눈을 떴다는 사실마저 부정하려고 듭니다. 그러면서 아예 예수님과 눈멀었던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세웁求�. 마치 위의 이야기처럼 등불이 켜져 있는지 꺼져 있는지도 모르는 소경이 자신과 부딪친 사람에게 화를 내는 것과 같습니다.
이 세상에는 볼 수 있으면서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태생 소경이 분명 눈을 떴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안식일이라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한 행위를 했다라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안식일 계명을 지켰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반대로 볼 수 있는 조건을 갖추지 못했지만 진정으로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태생 소경은 비록 아무 것도 볼 수 없었지만 예수님이 빛이요 구원 그 자체임을 보았던 것입니다. 때문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죄인으로 취급받으며, 심지어는 회당에서 쫓겨났음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세상에는 여러 소경이 있을 수 있습니다. 육신의 눈이 어두운 사람만 소경이라고 말하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돈에 미친 사람은 돈만 보이고, 도박에 미친 사람은 화투장만 보일 것입니다. 또 여자에 미친 사람은 여자만 보이고, 권력에 미친 사람은 권력만 보일 것입니다. 그렇듯이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소경이 될 수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41).
[대구] 행복, 행운/이영재 신부
봄을 맞아 냉이를 캐려고 들판으로 나갔습니다. 그러다 클로버 군락을 만났습니다. 네잎클로버를 찾아 한참을 해매다 일어서서 뒤를 돌아봅니다. 아뿔싸! 세 잎 클로버를 죄다 짓밟아 놓았습니다.
네잎클로버의 꽃말은 ‘행운’입니다. 우리는 네잎클로버를 따기 위해 수많은 세 잎 클로버를 짓밟지는 않는지요? 그런데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바로 ‘행복’입니다. 우리는 일상의 수많은 행복 가운데서 특별한 행운만 찾고 있는 건 아닌지요!
성전의 경내에서 구걸하며 일상을 살아온 한 태생 소경인 젊은이가 있습니다. 그는 참 특이합니다. 그에게는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하혈하는 여인(마태9,20이하), 예리코의 두 소경(마태21,29이하), 세리 자캐오(루카19,1이하)와 같은 간절한 믿음도,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망도, 치유에 대한 희망도 없어 보입니다. 그냥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그를 보셨고, 그에 대해 제자들이 의문을 제기했고, 태생 소경이 세상 빛을 보게 되는 행운을 얻게 됩니다.
그는 태생 소경임에도 불구하고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경내에서 구걸을 할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다 자란 사람이니 그에게 물어 보십시오.”라고 대답하는 지혜롭고 사랑 가득한 부모님이 있어 행복했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남을 탓하지 않으며, 일상을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그를 통해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십니다.”(요한9,4)
주변을 한번 돌아봅시다. 아내와 남편, 사랑스런 아이들, 부모님과 일가친지들, 내가 소속된 본당 단체의 형제자매님들. 이들과의 사랑 가득한 일상 안에서 행복을 찾아봅시다. 이러한 우리들의 삶에 하느님께서는 덤으로 더 큰 축복과 행운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보는 사람과 못 보는 사람을 가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눈멀게 하려는 것이다.”(요한9,39)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3)
[마산] 아름답다고 말하라/최태준 신부
아름답다고 말하라..사람아 / 하느님께서 지으신 너
아름답다고 말하라 / 내 숨 쉬고 움직이는 한 순간
이 한순간을 둘러싼 이 산과 숲 / 이 바람 햇빛 사람들
사람들 사이에서 걷는 일/ 때로 힘에 겨워도 / 아름답다 말하라..이 고통마저
이연학(요나)신부님의 시 "아름답다고 말하라"의 일부입니다. 여기에 곡을 붙인 것도 있지요. 시에서의 주인공도 글쓴이도 심안과 영안을 지니신 분들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네 일상, 때로는 고통마저도 아름답다고 진정 말할 수 있다는 것은 태생소경의 육안뿐만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을 보고 믿을 수 있도록 영적인 눈도 뜨게 해주신 주님의 은총일 것입니다.
한 자매님이 암 진단을 받고 오랜 시간 치료 중에 있을 때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신부님, 세상이 얼마나 아름답게 보이던지요. 미운사람 한 명 없이 모두가 선하고 사랑스럽게 느껴지던걸요." 완치가 되고 몇 년이 지난 지금은 그 약발(?)이 떨어졌다며 부끄러운 미소를 지으시는 자매님. 아마도 자매님이 투병 중일 때 하느님께서 그녀의 심안을 열어주셨던 모양입니다.
사실 우리의 육안은 아름다운 것을 바라본다면서 끊임없이 추한 것을 찾아내고, 사랑스러운 것을 찾는다면서 끊임없이 보기 싫고 미운 사람을 만들어 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바라보고 누가 죄를 지었기에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는지 그 죄의 원인 찾기, 불행의 원인 찾기, 종교적 해석 논쟁에 집중합니다. 혹 어떤 제자는 이런 생각도 하였을 것입니다. 아, 거지구나 그것도 소경이야. 저렇게 하루 종일 앉아서 얼마나 벌까?(8절) 배후에 깡패 조직이 있는 건 아닐까?
바리사이들은 더욱 가관입니다. 눈이 멀었다가 눈을 뜨게 된 사람을 여전히 죄인으로 취급하는가 하면(34절) 사람 살려내기, 불행의 원인 없애기, 사랑하기에 온통 집중하고 계신 예수님을 인정하지 못하고 내쫓을 궁리만 하고 있습니다(22절).
우리도 마찬가지일 때가 많습니다. 비단 남에게 일어난 불행뿐 아니라 나 자신에게 일어난 불행을 보고도 이거 무슨 죄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것인가? 뭘 잘못했나? 자꾸만 자꾸만 죄의 원인을 찾으려 합니다. 샅샅이 살피다가 지치고 실망하고 좌절하고 왜 하필 나한테만 이런 큰 고통을 주시나 항변하다가 작인 믿음마저 잃어버리는 경우까지 있으니까요.
가족의 얼굴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파란 하늘과 어우러진 하얀 꽃잎이 가슴미어지게 아름다운 것인지 모르는 태생소경의 장애가 하느님의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임을(3절) 깨닫지 못하는 우리이기에, 인간관계의 어려움이나 경제적 난관, 사랑하는 이와의 사별 등 그 어떤 역경도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의 섭리임을 깨닫고 언제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도록, 우리의 심안과 영안을 뜨게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부산] 요한 9, 1-41/서공석 신부
오늘 복음은 태어나면서부터 시각 장애를 가진 사람이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누가 죄를 지어서 저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나게 되었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혹은 저 사람의 부모입니까?’ 유대교는 인간의 모든 불행은 본인이나 부모의 죄 때문에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답하십니다. ‘자기 죄 탓도 아니고 부모의 죄 탓도 아니다. 다만 저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그런 불행의 원인일 수 없다고 생각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그 소경을 고칩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일입니다. 불행의 원인을 찾지 않고, 그것을 퇴치하는 인간의 노력 안에 하느님이 살아 계시다는 가르침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시각 장애인을 고치는 과정을 소상하게 묘사합니다.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개어서 그것을 그의 눈에 바릅니다. 침은 그 시대 사람들이 잘 사용하던 치유의 수단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침을 사용하였다고 오늘 복음이 말하는 것은 치유하신다는 뜻입니다. 진흙이라는 단어가 이 이야기 안에 다섯 번이나 반복 사용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율법은 안식일에 진흙을 만지지 말라고 말합니다. 집 짓는 노동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진흙이라는 단어를 반복 사용하여 예수님이 안식일 계명을 범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주려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보아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판단입니다. 오늘의 복음은 바리사이파가 믿는 하느님과 예수님이 믿고 계신 하느님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바리사이파의 하느님은 사람들에게 율법을 주고, 그것을 글자 그대로 지킬 것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사람들을 고치고 살리신다고 믿고 계십니다. 안식일은 하느님을 생각하고, 그분의 일을 실천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이 장애인을 실로암 못으로 보내어 씻게 하십니다. 요한복음서는 실로암이라는 단어를 ‘파견된 자’를 의미한다고 그 어원(語原)을 무리하게 해석까지 하면서, 그것이 예수님을 상징하는 이름이라고 말합니다.
이 장애인이 치유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은 매우 요란합니다. 바리사이들은 그의 부모까지 불러서 심문합니다. 부모는 겁에 질려 제대로 말하지도 못합니다. 오늘 복음은 ‘유대인들은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기만 하면 회당에서 추방하기로 이미 합의하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장면은 초기교회 신앙인들이 유대인 회당에서 쫓겨난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이었던 초기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유대교 회당에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구약성서가 말한 메시아라고 주장했다가 회당에서 추방당합니다. 시각 장애인이 치유되자, 당시의 실세인 바리사이파가 그에게 거는 시비와 억지, 불려온 그의 부모가 심문당하면서 보이는 두려움, 그리고 치유된 사람이 예수를 예언자라고 말했다가 추방당하는 것 등은 모두 초기교회가 유대교에서 분리되는 과정에 실제로 겪었던 사실들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이 안식일 계명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온 사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복음서는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부언합니다. 좋은 일은 하느님으로부터 온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교 기득권자들은 예수를 죄인이라고 단정합니다. 시각 장애에서 치유된 오늘의 주인공은 항의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모세의 제자’라고 주장합니다. 유대교의 기득권자들은 자기들의 생각을 모세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강요하였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어떤 권한을 가졌다고 생각하면, 자기의 생각을 남에게 강요합니다. 그리고 그 강요를 정당화하기 위해 모세, 예수님 혹은 하느님을 팝니다. 신앙 공동체에 어떤 기득권을 가졌다는 사람들이 오늘도 쉽게 하는 일입니다. 사람은 예나 오늘이나 자기의 기득권 혹은 우월함을 드러내기 위해 위인(偉人) 혹은 하느님을 팔아서 횡포하고 허세를 부립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장애인이었던 사람에게 말합니다. ‘너는 죄를 뒤집어쓰고 태어난 주제에 우리를 훈계하려 드느냐?’ 그 시대 유대인들이 장애를 가진 자들을 보는 시선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장애를 가진 이들을 고쳐주면서 그들을 돕는 것이 하느님의 일이라고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은 인간 신분의 높고 낮음, 장애의 유무(有無) 등으로 인간을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복음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가고”(마태 7,21),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이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7,24)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마르 3,4)도 말합니다. 사람을 단죄하고, 실망시키고, 고통과 슬픔을 주는 일은 우리 안에 자리 잡은 어둠, 곧 죄가 하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의 장애인은 예수님이 시력을 회복해 주자 예수님을 예언자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많은 사람들은 그분을 예언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시각 장애에서 치유된 오늘의 주인공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단정하는 것에 항의합니다. ‘그 분은 제 눈을 뜨게 해 주셨기에...하느님으로부터 온 분입니다.’ 그 말 때문에 그는 결국 회당에서 쫓겨납니다.
이 사람은 후에 예수님을 다시 만납니다. 그리고 ‘주님,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면서 ‘예수님 앞에 꿇어 절합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알아보고, 그분을 믿는다고 고백하며 무릎 꿇은 그리스도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유대교와 결별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알아보고 고백하였습니다. 요한복음서는 이런 신앙인들을 위해 “나를 본 사람은 이미 아버지를 본 것”(14,9)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눈멀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결론짓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새로운 시력을 얻어서 하느님을 보고 경배하는 그리스도 신앙인이라는 말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단죄하고 불행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자기 주변을 새롭게 보는 사람입니다. 이웃의 불행을 보면서 그것을 퇴치하기 위해 자기가 할 일이 있다는 사실까지를 보는 사람입니다. 주변의 불행들을 퇴치하고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권위로써 스스로를 무장하고, 다른 사람을 단죄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고치고 살리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면서 십자가를 집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할 일은 사람을 불행에서 구하고 살리는 일입니다. 우리의 그런 노력들 안에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십니다. ◆
[의정부]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습니다.”(1코린 4,10)/김재근 신부
하느님 감사합니다!
서품을 받으며 가슴 벅차오르는 감격에 하루 하루를 행복하고 기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저를 위해 아낌없는 사랑을 베풀어주신 모든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신학교 양성과정을 통해서 어떻게 사제로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을 하면서 서품성구를 정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저의 서품 성구속에서 사도 바오로께서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신다고 느꼈습니다. 자신을 드러내고, 욕심을 채우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현세적 욕심에 빠지지 않고 어리석게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사회적 명예를 중요시 하고, 윤택한 삶을 추구합니다. 남들보다 더 높은 지위와 더 강한 권력을 얻으려 온 힘을 쏟아 붓습니다. 그렇다보니 다른 이를 밟고 밀어내야 하는 현실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와 반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리석게’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기준에서 볼 때 ‘어리석게’ 사는 것, 바보처럼 살아가는 것이 하느님이 원하는 삶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익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이웃 안에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찾고 사랑하며, 이를 위해 나에게 손해가 되더라도 기쁘게 희생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십자가의 수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좋은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라서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남을 위해 살아가고, 세상 기준에서 미련한 사람, 모자란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인간적 가치 기준을 벗어나 하느님의 기준을 따라 살아가며 ‘그리스도 안에서 현명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삶을 살 때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참 평화와 참 행복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리석게 살아가며, 이를 위해 겪게 되는 손해와 아픔을 겸허히 받아드리는 삶, ‘바보처럼’ 살아 그리스도 안에서 슬기롭게 되어 하느님을 따르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인천] 시선/최인비 신부
각종 선거를 비롯하여 공직자들에 대한 청문회가 있을 때마다 사회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실망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자녀들을 좋은 학군에 보내려고 주민등록법을 의례 어깁니다. 좋은 학군이라는 것은 좋은 대학, 좋은 직장이고 곧 잘 살아보겠다는 것이지요. 이처럼 잘 살기 위해 윤리와 원칙이 지도층에 의해 무시되는 것이 한국사회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지도층이 되는 데에 이런 윤리적인 문제는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인정하고 살아갑니다. 어쩌면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상황만 된다면 당장에라도 할지 모릅니다. 지금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가치는 물질입니다.
이런 시선 안에서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소말리아 해적 사건입니다. 우리나라의 배와 선원을 납치했다는 이유로 분개했지만, 소말리아라는 나라는 평균수명 49세, 국민소득 600$의 아주 가난한 나라입니다. 내전으로 아이들은 영양실조에 걸려있고 살아난 아이들은 담배를 피우고 총을 듭니다. 힘 있는 나라들은 혼란스러운 나라의 사정을 이용하여 소말리아 바다에 폐기물을 버리고 오염된 바다로 생계를 잃은 어민들은 해적이 됩니다. 우리는 소말리아 해적을 욕하지만 어찌 보면 그들은 먹고 살려고 해적질을 한 것입니다. 쉽게 돈을 벌려고 그리고 잘 살려고 해적질을 한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그들의 해적질을 인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왜 우리가 추구하는 물질적인 가치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이 추구한 물질적인 가치에 분노할까요? 제가 보기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둘 다 비윤리적인 것은 마찬가지인데 말입니다. 그리고 더 마음이 아픈 것은 소말리아 해적에 대한 분노를 가지면서도 그들의 참담한 상황은 모른다는 것입니다. 아니 관심이 없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우리 곁에 계시다면 소말리아의 해적을 통해 해적질에 분노하기보다 그 나라의 굶고 있는 아이들, 전쟁에 내 몰린 아이들을 바라보라고 하실지 모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치유하십니다. 보고 못 보고의 차이는 삶을 빛과 어둠으로 가를 만큼 엄청납니다. 그러므로 보게 되었다는 것은 새로 태어난 것과 다름없는 엄청난 사건입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인간을 흙으로 지어내시듯(창세 2,7) 그 태생 소경은 진흙을 사용한 예수님의 손길을 통해 새로 태어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요한복음의 말씀처럼(3,5) 이제 소경은 빛이신 예수님께 불림을 받아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고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이 소경과 같아야 합니다. 우리가 매일의 삶을 그냥 세상 사람으로 살았다면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야 합니다. 세상이 가르쳐 준 시선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대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병자와 약자, 가난한 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시선을 배워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아직도 눈먼 사람입니다.
[부산] 우리도 눈먼 자라는 말은 아니겠지요?/정필종 신부
여기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삶이 얼마나 고단할지는 두 눈이 온전한 사람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제가 가는 양로원에 그런 할머니가 한 분 계십니다. 올 겨울 유난히 눈이 많이 왔던 날이 있었습니다. 부산 인근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찾아가야’ 볼 수 있는 눈이 아침에 일어나니 온통 하얗게 쌓여 있었습니다. 양로원의 원장이 기쁜 나머지 할머니께 그 소식을 전했습니다. “윤옥 할머니! 밖에 눈이 ‘하얗게’ 쌓였어요!” 할머니가 “그래, 아이고 좋아라!” 그 후에 어떤 가슴 아픈 일이 생길지도 모른 채 서로 손을 잡고 좋아라 했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할머니가 묻습니다. “원장, 그런데 ‘하얀색’이 어떤 색깔인고?” 그러자 원장이 여러 가지 예를 들어 ‘하얀색’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그러다 원장은 울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해도 할머니는 ‘하얀색’이 어떤 색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하얀색’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참 가슴이 먹먹해 지는 이야기입니다.
누구보다도 탁월한 감각의 소유자였던 헬렌 켈러는 어느 날 자신의 친구에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눈멀고 귀먹고 말할 수조차 없는 자신이 느낄 수 있는 것 보다 훨씬 덜 느끼는 것 같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멀쩡한 눈을 가지고 있다는 자신감에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건성으로 대하기 쉽습니다. 보고도 보지 못합니다. 아니 보고 싶은 것만 봅니다. 헬렌 켈러의 유逑� 소원은 ‘죽기 전에 꼭 사흘 동안만 눈을 뜨고 세상을 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눈을 뜨는 첫 순간 꼭 찾아가 보고 싶은 사람이 자신의 스승이었던 에미 설리반이라고 말합니다. 그를 통해 비로소 자신이 누구와도 다르지 않은 인격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소경이 눈을 뜹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묻습니다.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 그는 자신의 ‘뜬’ 눈으로 예수님을 보고서 대답합니다. “주님,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몇몇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되묻습니다. “우리도 눈먼 자라는 말은 아니겠지요?”
교형 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눈을 뜨셨습니까?
[춘천] 눈뜬 장님이란?/임헌규 신부
예수님께서는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하고 그에게 이르셨다(요한 9, 6-7).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놀라워하고 감탄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눈멀었던 그 사람은 눈을 뜨면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알고 믿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눈이 멀쩡했던 바리사이에게는 예수님이 오히려 안식일 날 율법을 거스른 죄인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전해 주시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사람은 두 가지 눈으로 세상을 보며 살아갑니다. 하나는 ‘육체의 눈’이고 하나는 ‘마음의 눈’ 입니다. 어떤 눈으로 살아가야 할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마음의 눈이 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눈뜬 소경이 참으로 많습니다. 재물에 눈먼 사람, 술에 눈먼 사람, 도박에 눈먼 사람, 미움과 증오에 눈먼 사람, 이런 사람들을 우리는 눈뜬 장님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육체의 눈만으로 살아가기에 턱없이 부족합니다.
세상의 많은 문제들을 제대로 보고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바로 ‘마음의 눈’ 입니다. 그러나 영혼이 맑지 않으면 마음의 눈으로 본다고 할지라도 밝게 보일리가 없습니다. 자신의 마음 안에 편견과 시기, 질투와 증오, 불만과 욕심과 미움, 이런 것들이 박혀 있으면 마음의 눈도 자기 안에 가지고 있는 생각대로 세상을 보게 될 뿐입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에서처럼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바리사이와 같은 이들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 엄청난 기적 앞에서도 감동은커녕 악한 마음을 품고 눈을 뜨게 된 경위를 따져 묻는 데에만 열을 올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감사해야 할 분을 오히려 죄인으로 몰아붙입니다. 이것이 바로 육체의 눈은 떠 있지만 마음의 눈이 소경이 되어버린 사람이 저지르는 딱한 행태입니다. 눈뜬 장님이란 바로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의 바른 믿음은 마음의 눈으로, 하느님과 그 분의 말씀을 생명의 빛으로 보느냐 보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마음의 눈을 뜨고 산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람과 세상의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순 시기는 우리에게 마음의 눈, 영적인 눈이 뜨이는 더없이 감사한 은총의 시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 믿음의 눈을 뜨도록 도와 주십시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야곱의 우물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우리 눈을 뜨게 해주신 주님에 대한 참된 앎에 도달하도록 우리 마음을 밝히시어 이끌어주십시오.
세밀한 독서 (Lectio)
오늘 복음은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던 사람과 예수님의 만남을 전해 줍니다. 제자들은 이 사람이 처한 상황이 죄의 결과라는 것만 생각하지만, 하느님의 아들은 인간의 질병과 한계상황 앞에서 인간의 구원자인 당신이 해야 할 ‘하느님의 일’ 을 떠올립니다. 소경이 지나가는 순간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일을 드러낼’ 기회입니다. 오직 “세상의 빛”이신 분 (8, 12), 하느님이 보내신 하느님의 아들만이 어둠 안에 있는 사람한테 빛을 줄 수 있습니다. 수난의 시간이 다가오기 전에 예수님은 지금 이 일을 해야 합니다. 이 ‘하느님의 일’ 은 제자들이 할 수 없고 오직 예수님 혼자만 할 수 있습니다. 그 일은 당신 정체를 계시하는 것과 관련되고 이를 통해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파견한 사람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침을 사용해 곧바로 소경을 치유합니다. (마르 8, 23 참조) 이런 행위는 고대에 잘 알려진 치유 방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창세 2, 6 이하에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신 것과 똑같은 행위를 하십니다. 치유는 창조 행위입니다. ‘시력’ 이라는 선물은 세상을 창조하는 계시의 빛과 마찬가지입니다. 실로암으로 가서 씻은 소경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게 되고,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 증언하는 임무를 맡습니다. 체험해 본 사람만이 그 사람이 자신한테 무엇을 해주었는지, 그 사람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증언할 수 있습니다. 체험 없는 지식에서 나온 바리사이들의 판단 앞에서 배움 없는 소경이 끈질기게 증언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자신의 인생을 바꾼 이 체험 덕분입니다. “나의 눈을 뜨게 해주신 분은 ‘예수님이라는 분’ (11절), ‘예언자’ (17절),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 (33절 참조) 입니다. 나는 그분에 대한 신앙의 빛으로 내 인생과 세상을 새롭게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결국 마지막까지 믿기를 거부하고 이 소경을 밖으로 쫓아버립니다. (34절) 예수님이 세상을 비추는 빛임을 알지 못하게 하는 배타적인 종교 준수야말로 진정한 ‘눈 멂’ 입니다. 결국 그들의 태도는 예수님한테서 “눈먼 자요 죄인” (41절)이라는 심판을 받습니다.
끝까지 ‘하느님의 일’ 을 하려는 예수님의 일관된 자세는 바리사이들이 쫓아낸 소경을 만나 대화하는 장면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그분은 먼저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 ?” 라고 질문합니다. (35절) ‘사람의 아들’ 이라는 칭호는 예수님이 수난당하기 전 마지막 밤에 제자들 앞에서 하신 장엄한 선포를 연상시킵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13, 31) ‘사람의 아들’ 에 대한 신앙고백은 인간이 되신 예수님의 삶 안에서 신적인 영광이 드러난다는 요한신학이라는 문맥에서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소경은 곧바로 예수님 앞에서 스승을 따르는 제자의 자세를 취합니다. “선생님, 그분이 누구이십니까 ? 제가 그분을 믿을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십시오.” (9, 36) 이 사람은 아직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이 그의 시력을 되찾게 해주신 것 자체가 바로 당신의 정체를 알린다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
(37절) 예수님이 삼인칭을 사용해 거리감을 두고 하시는 말씀은 사마리아 여인한테 하신 것처럼 장엄하게 당신을 계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 4, 26 참조) 이 계시로 예수님과 소경의 대화는 신앙고백에 머물지 않고, 예수님에 대한 경배로 이어집니다. (38절; 4, 20 – 24 참조) ‘어둠’ 에서 ‘빛’ 으로 건너간 이 사람은 깊은 체험을 했기에 사회적 소외나 개인적 모욕과 박해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자신의 길을 충실하게 갈 것입니다. 신앙의 빛으로 세상을 다르게 보고, 인간의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제1독서 참조) 시편 23편은 예수님이 치유하신 소경이 부르는 찬미가입니다.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 (시편 23, 4ㄱ)
묵상 (Meditatio)
초대교회에서 세례는 ‘조명’ 이라고 불렸습니다. 오늘 제2독서 (에페 5, 8 – 14)에서 바오로는 세례를 통해 빛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칩니다. 세례 받은 사람은 “빛의 자녀”(8절) 입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생명의 빛’ 의 인도에 내맡기고 선행과 의로움과 진리로 열매를 맺으며 항상 모든 일에서 자신의 유익을 찾기보다는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길을 찾을 것입니다.
기도 (Oratio)
정녕 당신께는 생명의 샘이 있고 당신 빛으로 저희는 빛을 봅니다. (시편 36, 10)
임숙희(로마 그레고리안대학교 성서영성 신학박사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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