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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승지지(十勝之地)
▣ 십승지지(十勝之地)
원래 승지(勝地)란 경치가 좋은 곳, 또는 지형(地形)이 뛰어난 곳을 말하는데,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굶주림과 전쟁(戰爭)을 면할 수 있는 피난처(避難處)를 의미한다.
십승지지의 특징은 첫째로 사방이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곳으로 외부와의 차단, 좋은 세월을 기다리기엔 이보다 좋은 곳이 없다. 그러기에 통로는 단 한 곳이 된다. 통로라 해도 병뚜껑처럼 좁다. 이런 지형은 안에선 밖의 동정(動靜)을 알 수 있지만, 밖에선 마을이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다. 그저 가파른 능선만이 보일 뿐이다.
다음으로 물이 흘러야 한다. 자손 대대로 이어 살기엔 다소 미흡하지만 새로운 세상이 올 때까지 의식주는 해결돼야 한다. 그러자면 자연히 얼마간의 논밭이 필수적이다. 자급자족이 가능한 지역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전략적으로 무가치한 곳도 주요 조건이 된다. 그만큼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십승지지는 양기(陽基) 풍수이론, 즉 취락입지(聚落立地) 조건엔 대체로 어긋난다. 발전보다는 재앙을 피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요, 피난과 자손을 보존할 수 있는 땅이란 이야기다. 이러한 승지(勝地)를 점상(占相)하는 풍수(風水) 또는 감여(堪輿 : 하늘과 땅)의 술(術)을 말하는 사람을 지사(地師)·지관(地官) 또는 풍수가(風水家)라고 칭하여왔다.
신라 말의 도선(道詵)을 비롯하여 고려 말의 무학(無學), 조선 중기 남사고(南師古)·이지함(李之菡) 등이 도인(道人)으로서 유명하였다.
십승지지는 조선 후기 크게 유행했던 예언서인 정감록(鄭鑑錄)의 핵심 내용 중의 하나로, 여러 비결서(秘訣書)에 모두 60여 곳이 수록되어 있지만, 그중에 남사고(南師古)가 선정한 십승지지가 가장 유명하여 남사고산수십승보길지지(南師古山水十勝保吉之地)라고 칭한다.
◈ 십승지지(十勝之地)의 지명은 책(冊)마다 조금씩 달리하고 있으며 다음 지명은 빈도수(頻度數)가 잦은 것부터 10개소를 골랐다.
1. 풍기(豊基) 차암 금계촌(金鷄村)
현재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임실, 용천동)로 비정(比定)된다.
이곳은 소백산(1439m) 남록에 위치하는데 전하는 말에 의하면 말을 타고 가던 남사고가 소백산을 보고 즉시 말에서 내려 말하기를 이 산들은 활인산(活人山)이고 피난처(避難處)로 제일이라고 하였다 한다.
예로부터 태백산·소백산 밑에서는 인재(人才)가 많이 배출되는 복지(福地)라고 일컬어왔다. 특히, 금계촌은 북천(北川, 지금의 錦溪川)과 남천(南川)이 남류(南流)하여 서로 합친 부산대수(負山帶水)를 이룬 지역으로 풍수지리(風水地理)적으로 전형적인 명당(明堂)이라 할 수 있다. 금계리의 자연부락 중 하나인 부계밭(伏鷄田) 마을은 닭이 알을 품고 있는 지세(地勢)라고 하여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이라 구전(口傳)되고 있다.
차암은 비로사로 올라가는 도중의 우뚝 선 2개의 바위이다.
일각에서는 금계촌을 지금의 풍기읍 금계리와 욱금리, 삼가리를 아우르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2. 화산(花山, 安東)청양현의 화곡 내성(乃城)
현재는 봉화군 춘양면 석현리의 소령고기, 서벽리에 비정(比定)된다.
안동의 내성은 원래 안동대도호부의 속현으로서 부치(府治)에서 북쪽으로 90리 지점에 위치한다. 안동의 화곡은 봉화군 내성면 지역이나 봉화읍으로 개칭되었으며, 내성천은 봉화읍을 가로질러 흐른다.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에도 내성은 태백산 아래에 자리 잡아 춘성(春城), 소천(召川), 재산(才山)과 함께 피병·피세의 땅이라 하였다.
3. 보은(報恩) 속리산 산록의 증항(蒸項) 근처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과 경북 상주군 화북면 화남리 일대이다.
보은의 속리산 아래 증항 근처는 전란(戰亂)때 이곳에 몸을 숨기면 만인의 한 사람도 상하는 일이 없다(萬無一傷)고 한다. 그러나 대(代)를 물리어 몸을 보존할 곳은 되지 못한다고 부언(附言)하였다.
증항은 보은읍에서 상주, 함창 방면으로 뻗은 가로(街路)를 약 40리쯤 지나면 충북과 경북의 도계(道界)가 되는 시루봉(甑峯) 아래의 안부(鞍部)를 말한다. 증항이라는 지명은 이 증봉에서 유래된 듯하며 증항에서 서쪽 관기리(官基里) 사이는 군(郡)내에서 가장 기름진 평지가 전개된다.
택리지에서도 사람 살기에 가장 적당한 가거지(可居地)로 들고 있다.
주민들은 농사 외에 대추로도 수익을 많이 올린다.
4. 남원 운봉(雲峰)두류산 아래 동점촌(銅店村) 주변
운봉 두류산(頭流山, 지리산) 아래 동점촌은 현재 산청과 함양의 경계에 있지만, 전(前)에는 남원, 하동, 함양, 진주 등 10여개 시·군으로 둘러싸였고, 어떤 때는 운봉현 전체가 지리산 속에 포함되었다. 그래서 운봉 두류산이라 한 것 같다. 그만큼 지리산의 범위는 광대하다. 그런데 이 산에서 현재 동점촌이라는 곳을 찾을 수가 없다.
택리지에는 지리산(智異山) 북쪽의 함양 땅에 영원동(靈源洞), 군자동(君子洞), 유점촌(鍮店村)을 들어 남사고의 복지라 지적하였고, 대동지지에는 벽암(碧巖), 추동(楸洞), 유점촌을 남사고의 복지라고 하였다.
이들 승지(勝地)는 지리산 북쪽 임천(臨川) 유역에 위치하였다. 두 문헌에서 다 같이 공통적으로 든 곳은 유점촌(鍮店村)이지 남사고가 말하였다는 동점촌(銅店村)은 아니다. 혹, 유(鍮)와 동(銅)의 글자가 비슷하여 혼용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지만 정감록(鄭鑑錄)에는 운봉의 향촌(香村)이라고 되어 있다.
5. 예천(醴泉) 금당동(金堂洞) 북쪽
금당동 북쪽은 지금의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 금당실(金塘室)로 비정(比定)된다. 동쪽에 옥녀봉(玉女峰), 서쪽에 멀리 국사봉(國士峰), 남쪽에 백마산(白馬山), 북쪽에 매봉으로 둘러싸인 분지이다. 다만 동남쪽에 병암성에서 한천(漢川)의 침식으로 골짜기가 되어 이곳의 관문(關門)이 된다. 이런 점을 생각하여 남사고는 병과(兵戈)가 미치지 않아 오래 살 곳이 된다고 한 것 같다.
수려한 오미봉(五美峰)은 다섯 가지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는 봉우리라는 뜻인데 아미반월(蛾眉半月, 미인의 눈썹같은 반달), 유전모연(柳田暮煙, 버드나무 사이로 깔리는 물안개), 선동귀운(仙洞歸雲, 신선마을에 걸린 구름), 용사효종(龍寺曉鐘, 용문사에서 울려오는 새벽 종소리), 죽림청풍(竹林淸風, 대나무 숲을 가르는 시원한 바람 소리)이 그것이다.
오미봉(五美峰)이 연꽃을 닮았으며 마을의 형국이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 마을 이름을 못을 뜻하는 금당(金塘)이라 지었다 한다.
오미봉(五美峰)에 바위 하나가 있는데 금당실마을 앞 멀리 금곡천 건너 죽림리 뒷산이 맹호출림형(猛虎出林形)의 형국(形局)이라 범이 나타나면 개가 울어 마을을 지키고자 하는 뜻에서 명구(鳴狗)바위로 지칭하였다. 염승(厭勝, 주술을 써서 사람을 누르는 일. 또는 그런 주술)의 흉상진압 지명 비보(地名裨補)인 것이다. 일각에서는 용문면 죽림리, 혹은 용궁면일대라고 하며 이곳도 뛰어난 승지이다.
6. 공주(公州, 유구면, 사곡면)유구천(維鳩川)과 마곡천(麻谷川) 사이
공주의 유마지방(維麻地方)은 지금의 공주시 유구면을 흐르는 유구천과 사곡면을 흐르는 마곡천과의 사이 100리를 말하며, 이 지역은 살육(殺戮)을 면할 수 있는 피난처라고 한다. 이 지역은 차령산맥이 서남으로 뻗고 그 남부와 거의 병행하여 그 지맥의 광덕산(廣德山), 금계산(金鷄山) 등이 연이어 뻗어 그사이가 좁고도 긴 유구천 계곡이 된다.
ㄷ자형 지형에서 열린 곳은 곧 금강(錦江)이 되니, 전술상 이런 계곡으로 들어가면 안전하다고 생각한 듯하다. 6·25 당시 많은 피난민들이 이 계곡으로 모여들어 한때 대성황을 이루었다.
7. 영월(寧越)정동(正東)상류
상동면 연하리(뒷산이 응봉산이며 연하계곡이 있음)로 비정되며 상동면이 읍으로 승격되면서 연하리는 영월읍에 편입되었다. 연하리는 마을이 연꽃의 꽃잎 같다 하여 연하리라 불리며 자연부락으로는 허보령골, 숯가마, 두평, 남중골, 꽃밭머리, 연못골, 산제당골, 반송, 타련, 복덕원, 바람말, 계사동, 오산 등이 있다. 영월읍의 동편은 한강 상류가 남북으로 흐른다. 그런데 한강 동부의 만경대산(萬景垈山) 줄기가 동서로 뻗어 한강의 지류로서 북쪽의 함백천(咸白川)과 남쪽의 옥동천(玉洞川)의 분수령이 된다. 남사고는 옥동천을 피난처라고 한 듯하다. 특히, 한강과 옥동천이 합치는 곳은 임원십육지에서도 대야평(大野坪)이라 하였으며 경작지가 넓게 발달하여 있고, 수목이 울창하여 주민들이 양봉(養蜂)을 한다. 그러나 수염없는 자가 먼저 들어가면 그러하지 아니하다.
※ 최창조씨는 영월군 하동면(와석리 싸리골米洞)으로 추정한다.
8. 무주(茂朱)무풍(茂豊) 북쪽의 덕유산(德裕山), 方洞
무풍면(茂豊面) 일대로 비정(比定)된다.
무주의 무풍 북동쪽에는 덕유산이 있는데 무풍은 무주부(茂朱府)의 별호도 되지만 지금은 행정상 무주군 무풍면이 되었다. 남사고가 말한 무풍 북쪽 덕유산은 현재 위치가 불분명하다. 지금의 덕유산은 훨씬 남쪽 장수군·거창군의 경계에 위치하므로 연구(硏究)가 필요하다.
무주읍지(茂朱邑誌)에도 덕유산은 남쪽 50리 지점에 있다고 하여 사실과 차이가 많다.
택리지에는 북쪽에 설천(雪川), 무풍이 있다고 하였는데 무풍은 남사고가 복지(福地)라고 한 곳이다.
9. 부안(扶安, 부안군)의 호암(壺岩)아래
부안 변산의 호암은 원문을 그대로 해석하면 호암아래 변산(邊山)의 동쪽을 장신(藏身)의 최기(最奇)라 한 것인데 애매한 점이 많다.
호암의 호자(壺字)가 병 호자이니 혹 여기에서 기인하여 변산이 되었는지도 모르나, 그 호암의 소재지가 불분명하다. 그리고 변산의 동쪽(산내면)이라는 말도 애매하다. 따라서 통설에 의하여 변산반도를 총칭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여러 문헌에 의하면 변산반도는 수목이 울창하고 인적이 없어 호랑이가 사람을 피하지 않고, 고려·조선의 궁실에서 소용되는 재목을 이곳에서 공급하였다고 한다. 남사고는 이곳을 몸을 감추는 데 가장 묘한 곳이라 하고, 제주도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이곳도 장신처(藏身處)로서 불가하다고 부언하였다.
※ 부안의 호암은 고창군 아산면 호암(壺岩)이라고 하면서 부안에는 호암이라는 지명 자체가 없고 호암이라고 하는 지명은 일명 병바위(병호壺, 바위암巖)로 불리며 반암(호암)마을을 지켜주고 있는 인천강 옆 거대 괴암을 가리킨다고 말했다. 아울러 육당 최남선의 심춘순례에 선운산과 고창 아산 반암마을의 존좌바위, 소반바위, 병바위(호암)를 소개하면서 이곳을 산여수(山與水)가 두르고 흘러 십승지지라고 기록된 자료를 근거로 제시했다
10. 가야산(伽倻山, 경남 합천군) 동북쪽 만수동(萬壽洞)
합천군 가야면 숭산면 일대로 비정된다.
가야산 남쪽에 그 주위가 200리요 그 안에 만수동이 있으니 가히 만 명이 살아갈 수 있는 길지(吉地)라 하였다.
북쪽의 매화산을 주산으로 비계산, 구곡산 등으로 둘러싸인 분지인데 동쪽에 덕곡재가 유일한 통로이다. 이 분지 내를 통 털어 만수동이라고 하는데 이곳에는 두 곳의 명당이 있는 데, 하나는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 또 하나는 비학하전형(飛鶴下田形)이라고 한다(합천군 기록).
하지만 가야산의 만수동은 비정(比定)하기가 대단히 곤란하다. 가야산에는 만수동이라는 곳이 없다. 그런데 보통 만수동이라 하면 지리산 중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과 경상남도 함양군의 군계에 있는 곳을 말한다. 택리지에서도 구전(舊傳) 만수동·청학동(靑鶴洞)을 들고, 만수동은 지금의 구품대(九品臺)이고, 청학동은 지금의 매계리(梅溪里)라 하였는데, 이것으로 보아 가야산 만수동이라 함은 지리산의 만수동이 아닌가 추정해보기도 한다.(?)
십승지지들은 대부분 오지(奧地)에 위치하므로 임진왜란이나 6·25전쟁 때에도 피해를 거의 받지 않은 곳이 많았다. 따라서 조선 후기의 사회적 혼란기나 일제 강점기 및 6·25 이후에도 정감록(鄭鑑錄)을 신봉하는 많은 사람들이 전국에서 모여들어 이른바 정감록촌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이들 촌락들은 오늘날 대부분 개방되어 그 특성이 없어졌지만, 풍기의 금계촌의 경우 1970년대까지도 외부와 단절된 독립된 공동생활체를 운영하였고 독특한 촌락경관과 생활양식을 견지하였다. 이곳은 6·25때 월남한 사람들이나 전쟁을 피하여 찾아든 피난민들이 자기 출신 지역의 산업을 옮겨와 이식산업(移植産業)을 영위하였다.
※ 영남의 명승지 : 성해응(成海應, 英組 때 사람)의 저서 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에 한국백경(韓國百景)을 말하였는데, 그중 영남(嶺南)에서는 가야산(伽倻山), 청량산(안동), 도산(陶山), 소백산, 사불산(四佛山, 상주), 옥산(玉山, 경주), 빙산(氷山, 의성), 태백산, 금산(錦山, 남해), 내연산(內延山, 청하)의 10경을 들었다.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살 만한 곳(可居地) 또는 복지·피난처 등을 찾아왔다. 그중에도 피난처가 되며, 기근(飢饉)과 병화(兵火)를 아울러 면할 수 있다는 남격암산수 십승보길지지(南格庵山水十勝保吉之地)가 가장 유명하다. 그 열 곳 가운데 이 지방에서는 안동 풍기(豊基)의 금계촌(金鷄村), 봉화의 춘양면(春陽面), 예천(醴泉)의 금당동북(金堂洞北), 성주(星州)의 가야산 만수동(萬壽洞)의 4곳을 들었다.
18세기에 이르러 실학자(實學者)들에 의해서도 살 만한 곳이 거론되었다. 영조(英祖) 때 이중환(李重煥, 1690∼1756)은 그의 저서 택리지에서 가거지로서 대구 금동(琴洞), 성주 가천(伽川), 선산 감천(甘川), 화령 추풍령(秋風嶺)을, 전쟁을 피할 곳으로 안동의 4촌(奈城·春陽·召川·才山)을, 복지로서 문경의 병천(甁川)·무풍(舞豊), 청도의 운문산(雲門山), 울산의 원적산(圓寂山, 지금의 천성산), 가야산 동북의 만수동, 지리산, 청화산(靑華山)을, 일시적 가거지로서 청하(淸河)의 내근산(內近山, 내연산), 청송의 주방산(周房山, 주왕산) 등을 들었다. 그리고 동래(東萊)의 영강(瀯江) 이남 13읍은 바다와 접하고 일본에 가까워 살 곳이 못 되는 곳(不可居地)이라 하였다.
서유구(徐有榘, 1764∼1845)의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 상택편(相宅篇)에는 이 지방에서 다음과 같은 24개소의 가거지를 설명하였는데 즉, 안동의 귀래정(歸來亭), 삼구정(三龜亭), 하회(河回), 임하(臨河), 나성(奈城), 춘양촌, 수동(壽洞), 경주의 옥산(玉山), 양좌동(良佐洞), 청송읍촌(靑松邑村), 죽계(竹溪), 문경의 병천(甁川), 진주의 화개동(花開洞), 악양동(岳陽洞), 대구의 금호(琴湖), 밀양읍촌(密陽邑村), 선산의 해평촌(海平村), 감천(甘川), 성주의 가천(伽川), 금산의 봉계(鳳溪), 함창(咸昌)의 이안부곡(利安部曲), 가정구기(稼亭舊基), 안음(安陰)의 월성촌(月城村), 상주의 우담(雩潭) 등이다.
[출처] 십승지지(十勝之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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