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란, 《장송의 프리렌》, 《위쳐 3》, 《오디세이》의 묘한 공통점
가끔 전혀 다른 장르인데도 이상하게 비슷한 느낌을 주는 작품들이 있습니다.
영화감독, 애니메이션, RPG 게임 서로 아무런 상관도 없어 보이는데 이들을 관통하는 굉장히 큰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스토리텔링이 정말 압도적이라는 것.
단순히 '스토리가 재미있다'는 이야기를 넘어서
인물 하나를 던져놓고 그 사람이 왜 그런 선택을 하는지,
현재 벌어지는 사건이 과거의 어떤 사건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처음에는 별 의미 없이 지나간 것처럼 보였던 대사와 장면이 나중에 어떤 의미로 돌아오는지.
이런 것들을 아주 촘촘하게 쌓아갑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작품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아니라
내가 그 세계 안에 들어가서 그 이야기를 직접 경험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메멘토, 배트맨3부작, 프레스티지, 인셉션, 인터스텔라, 덩케르크, 테넷, 오펜하이머, 오디세이
시간, 기억, 집착, 죄책감, 희생, 인간의 선택 같은 소재를 가지고 관객을 이야기 속으로 끌고 들어갑니다.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장면들이 영화가 진행될수록 하나씩 연결되고,
'아, 그래서 처음에 그 장면이 있었구나.'
하고 뒤늦게 퍼즐이 맞춰지는 순간을 만들어냅니다
배트맨 3부작을 보면
단순한 히어로와 악당의 대결이 아니라
브루스 웨인의 신념과 선택, 고담이라는 도시, 악당들의 철학까지 엮어서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로 만들어냅니다.
이번에 놀란의 오디세이를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호메로스의 오래된 서사시를 가져와서
단순한 영웅의 모험담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전쟁, 죄책감, 기억, 가족, 귀환, 인간의 선택 같은 것들을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로 엮어냈습니다.
특히 오디세우스가 왜 이런 길을 걷게 되었는지,
그가 저지른 선택들이 어떻게 계속해서 자신을 따라오는지,
그리고 결국 그가 무엇을 찾아 집으로 돌아가려 하는지를 계속 쌓아갑니다.
그래서 단순히
'괴물을 만나고 → 싸우고 → 다음 장소로 간다'
가 아니라, 그 모든 사건들이 결국 하나의 거대한 귀환이라는 이야기 안에서 연결됩니다.
프리렌도 비슷합니다.
처음에는 그냥 마왕을 쓰러뜨린 용사 파티의 뒷이야기처럼 보이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과거와 현재가 계속 연결됩니다.
이미 지나간 사건과 죽은 인물의 말 한마디가 훗날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고,
예전에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갔던 장면 하나가 나중에는 엄청난 감정을 만들어냅니다.
특히 프리렌이 잘하는 것이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이해되는 감정' 입니다.
프리렌에게는 짧은 시간이었던 것이 인간에게는 평생일 수 있고,
그래서 과거에는 몰랐던 감정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마음에 와닿게되죠.
위쳐3도 비슷합니다.
메인 스토리, 길을 가다가 우연히 만난 NPC 하나, 별생각 없이 시작한 서브 퀘스트 하나가
어느 순간 굉장히 묵직한 이야기로 변해버립니다.
그리고 선과 악을 단순하게 나누지 않습니다.
누구 하나를 도와주면 다른 누군가가 피해를 보고, 어떤 선택을 해도 완벽한 정답을 도출해 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게임을 끝낸 뒤에도
'내가 그때 그렇게 선택하는 게 맞았나?'
라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게임은 끝났는데 이야기는 끝나지 않은 느낌.
그게 위쳐 3가 가진 엄청난 힘입니다.
그런데 오늘 하고 싶은 말이 이제 나옵니다.
이렇게 스토리텔링과 모든 부분에서 정말 미친 수준인 작품들인데,
묘하게 공통적으로 아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전투씬.
물론 전투가 형편없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잘 만든 장면도 많습니다.
문제는 스토리의 수준에 비해 전투가 상대적으로 약하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놀란의 배트맨을 봅시다.
그렇게 캐릭터와 서사를 쌓아놓고 고담의 운명까지 걸린 마지막 전투를 만들어놓았는데,
막상 배트맨과 베인이 붙는 순간에는
'하...'
싶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앞에서 그렇게 잘 만들어놓고
왜 마지막 싸움은 이렇게 아쉬운가 싶은 느낌.
https://www.youtube.com/watch?v=VqKkbpcuFbI&t=106s
이번 《오디세이》에서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대한 세계관과 서사, 엄청난 스케일과 비주얼을 보여주고 인물들의 운명까지 계속 쌓아놓고는,
막상 액션과 전투에 들어가면
'이 정도로 엄청난 이야기를 만들어놓은 사람이 왜 전투에서는 조금 평범해지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물론 오디세이의 액션을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특히 후반부 액션은 놀란의 뛰어난 액션 장면으로 평가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그래도
서사가 주는 압도적인 몰입감에 비하면 전투 자체의 쾌감은 한 단계 아래라는 느낌입니다.
위쳐 3도 마찬가지입니다.
퀘스트, 캐릭터, 세계관, 선택의 무게는 정말 역대급인데
전투 시스템만 떼어놓고 보면
그 서사의 수준만큼 압도적이지는 않습니다.
심지어 요즘 액션이 압도적인 게임들이 너무 많이 나와버렸습니다 ㅜㅜ
프리렌
캐릭터와 감정선, 세계관, 서사를 다루는 능력에 비하면
순수하게 '싸우는 장면'에서 오는 쾌감은 상대적으로 약합니다.
그나마 다행인게 귀칼처럼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사람을 갈아 넣고 있는거 같습니다 ㅋㅋㅋ
결국 이 셋은
전투를 잘 만드는 것보다
'왜 싸우는가'를 만드는 데 훨씬 뛰어난 작품입니다.
(사람을 싸우게 만드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 사람들이 왜 싸우는지를 납득하게 만드는 이야기)
누가 더 강한지를 보여주는 것보다,
왜 이 사람이 싸우게 되었는지,
왜 이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 싸움이 끝난 뒤 무엇이 달라지는지,
그걸 만들어내는 능력이 압도적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전투씬이 약점처럼 느껴집니다.(라고 하기엔 빈약하긴 합니다 ㅠㅠ)
스토리텔링의 수준이 너무 높아서.
보통 작품이라면 80점짜리 전투도 충분히 훌륭한데
앞에서 스토리 100점, 캐릭터 100점, 세계관 100점을 계속 보여주다 보니
전투에서 80점이 나오면 유독 크게 보이는게 되는 것은 아닐까...
앞에서 너무 잘했으니까.
결국 이들이 가진 가장 큰 공통점은
전투가 끝난 뒤에도
'왜 저 사람은 그런 선택을 했을까?'
'내가 그 상황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저때의 행동이 결국 어떤 결과를 만들었을까?'
이런 생각이 계속 남게 됩니다.
어쩌면 진짜 뛰어난 스토리텔링이라는 건
작품을 보는 동안 사람을 붙잡아두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끝난 뒤에도 머릿속에서 그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게 만드는 것이 아닐지...
크리스토퍼 놀란, 프리렌, 위쳐 3
저는 이들에게서 묘하게 동질의 무언가가 느껴집니다.
p.s 제발 전투씬만 조금 더 잘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첫댓글 다른 작품은 안봤지만. 위처3은 전투만 재밌었어도 엄청난 작품이 되었을거 같네요. 전투액션 정말...ㅡㅜㅜ
진짜 초반에 폴짝 폴짝 점프하면서 치고 빠지기만 할때는... 그래서 전 표식 위쳐 위주로 했었습니다 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 정말 그렇네요.
그죠? ㅋㅋㅋ
얼마만에 양질의 글인지 ㅎㅎ 너무 잘 읽었고 공감도 많이 갑니다. 감사합니다.
이거 제가 쓰고 ai에 물어보고 다시 다듬고 ai에 물어보고 ㅋㅋㅋ
스토리텔링 부분에서 음~ 하다가 전투씬에서 맞다마자!!! 했습니다. 프리렌ㅋㅋ
마력의 밀도를 높여서 졸트라크 뿅! 윽
프리렌은 전투씬만 나루토 작가가 그려주면 좋겠어요. ㅋㅋ
그럼 거의 원피스 드래곤볼 급 올라갈거 같아요 ㅋㅋㅋ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저는 프리렌과 놀란 모두 주인공의 서사를 촘촘히 쌓아서 관객들을 몰입하게 만드는 동시에 그 주인공 서사의 흐름에 휩쓸리거나 영향은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에도 집중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의도치 않은 인물들의 선택에 주인공 또한 영향을 받죠.
맞아요 진짜 서사가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