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 42기 중 스물 두 번째로 서울 정릉(貞陵, 태조비 신덕황후)을 소개합니다.
순서는 제가 직접 다녀왔던 순서대로 합니다.
정릉(貞陵, 태조비 신덕황후)
위치 : 서울 성북구 아리랑로 19길 116
조성 연도 : 1396년(태조 5), 1409년(태종 9), 1669년(현종 10)
왕릉 형식 : 단릉
단릉(單陵)
단릉은 왕과 왕비의 봉분을 단독으로 조성한 능이다. 대표적으로 태조 건원릉, 단종 장릉, 중종 정릉 등 15기의 능이 있다.
▷ 정릉(貞陵) 이야기
정릉은 조선 1대 태조의 두 번째 왕비 신덕황후 강씨의 능이다. 1396년(태조 5) 신덕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태조는 취현방(현 서울 중구 영국대사관 근처)에 정릉을 조성하고, 자신이 묻힐 자리까지 함께 만들었다. 그러나 태종이 왕위에 오른 후 정릉의 능역 100보 근처까지 집을 짓는 것을 허락하였다. 1408년(태종 8) 태조가 세상을 떠난 후 다음 해(1409년) 정릉이 도성 안에 있는 것이 예에 어긋난다 하여 사을한 산기슭인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그리고 옛 정릉의 목재는 태평관(太平館)을 짓는데 사용하였고, 병풍석과 난간석은 홍수로 무너진 청계천 광통교 복구에 사용하였다. 일반묘나 다름없었던 정릉은 260여 년이 지난 1669년(현종 10)에 왕릉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정릉의 능침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고, 봉분 주변에는 문석인, 석마, 장명등, 석상(혼유석), 망주석이 있고 석양과 석호는 1쌍씩 배치하였다. 능침 석물 중 장명등과 석상(혼유석)을 받치는 고석(鼓石)만 옛 정릉의 석물이고 나머지는 현종 대에 다시 만든 석물이다. 장명등은 고려 공민왕릉의 양식을 따른 것으로 조선왕릉 중 가장 오래된 석물이다. 능침 아래에 있는 비각에는 1개의 표석이 있는데 조선시대에 세운 ‘조선국 신덕왕후 정릉’의 표석을 대한제국 때 신덕왕후를 황후로 추존하면서 ‘대한 신덕고황후 정릉’으로 바꾸었다. 향로와 어로는 지형에 맞게 조성하여 한 번 꺾여있다.
▷ 신덕황후(神德皇后) 이야기
신덕황후 강씨(재세 : ?년 ~ 1396년 음력 8월 13일)는 본관이 곡산인 상산부원군 강윤성과 진산부부인 강씨의 딸로 태어났다. 신덕황후는 태조의 경처(京妻, 고향에 본처를 두고 서울에서 결혼한 부인)가 되어 2남(무안대군 방번, 의안대군 방석) 1녀(경순공주)를 낳았다. 신덕황후의 집안은 고려의 권문세가로서 태조가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세력을 키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면서 태조의 향처(鄕妻) 한씨(신의황후)가 이미 조선 건국 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신덕황후가 조선의 첫 왕비(현비)가 되었고, 자신의 둘째 아들을 왕세자로 책봉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키웠다. 그러나 이 일은 후에 왕자의 난의 원인이 되었다. 1396년(태조 5) 이득분의 사저에서 세상을 떠나자, 태조는 시호(諡號)를 신덕왕후(神德王后)라 하고 정릉을 조성한 후 정릉 옆에 흥천사를 세워 명복을 빌었다.
그러나 태종은 왕위에 오른 후 정릉을 현재의 자리로 옮겼고, 1410년(태종 10) 태조와 신의왕후(황후)의 신주만 종묘에 모시고, 신덕왕후는 태조의 왕비로 인정하지 않아 종묘에 신주를 모시지 않았다. 이후 선조 대에부터 신덕왕후의 예우를 높이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가, 1669년(현종 10)에 신덕왕후의 신주를 종묘에 모시고, 정릉을 새로 조성하였다.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 고종의 직계 5대 조상 추존으로 신덕고황후(神德高皇后)로 추존되었다.
첫댓글 루빈18세 ;;;; 더 분발하시오!!
이제 30회 다 와갑니다 ^^
@베라루빈 김칫국!!!!!!!!!!!!
@supervisor
떡 주실거죠?
@베라루빈 아침부터 떡 먹으면 혈당 스파이크 와서 건강을 위태롭게 할 수 있으니 절대 줄수 없수다!!!!
@supervisor 떡하나 주면 김칫국부터 마실거지~
도성안에 있는게 왜 예에 어긋나는 거입니까. 어째서죠?
1. 조선 왕릉은 대체로 한양 도성에서 10리(약 4㎞) 밖, 100리(약 40㎞) 안에 조성하는 기준을 따랐다고 합니다.
2. 왕릉은 왕의 시신을 묻는 장소인 동시에 왕조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공간이었다. 그래서 산으로 둘러싸이고 물이 흐르는 지형 등 풍수지리상 좋은 터를 찾았다고 합니다.
3. 왕릉은 봉분 하나만 조성하는 시설이 아니었다. 봉분 주변의 산림과 제례 시설, 재실 등을 갖추어야 했으며, 능역의 나무를 보호하고 함부로 벌목하지 못하도록 관리했다.
조선시대에 왕릉을 도성 안에 조성하지 않은 이유는 단순히 땅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유교적 예법과 풍수지리, 도성의 공간 질서, 왕릉의 관리 방식이 함께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국가 유산청에서 설명하네요
@베라루빈 원래 도성 밖에 자리를 잡아야 하는 룰이 있었던건가 보네요.. 왕은 그냥 쪼대로 하고 살았을것 같은데.. ㅋ
@《해인재인강인》아빠
중국에서도 황릉은 도성 밖에다 조성했다고 하네요. 뭐던지 중국 따라 하는 따라쟁이 조선 아닙니까? ㅋㅋ
태조 이성계의 경처 신덕황후는 현처에서 태어난 방우, 방과, 방의, 방간, 이방원, 방연에게 큰 걸림돌이였습니다. 신덕황후는 당연히 본인이
낳은 자식 방번, 방석을 세자로 올리고 싶었고 이를 곱게 지켜볼 현처의 자식들이 아니였죠. 신덕황후가 죽고나서 왕자의 난이 일어나고 태조
이성계 까지 승하하고 나서 뒤를 물려 받은 태종 이방원이 그동안 참았던 뒷끝을 보여줍니다. 태조를 신덕황후 옆이 아닌 건원릉으로 따로 모시고
기존의 신덕황후 묘 자리를 도성에서 가장 멀다고 생각한 정릉동으로 강제 이장 시킵니다. 릉이 도성안에 있는게 예의에 어긋난다는 말은 단순한
명분일 뿐 마지막까지 사이가 좋지 못했던 태종 이방원의 복수(?) 정도로 보시면 되겠네요.
@supervisor 역시나 복수 치정 암투..이런쪽에 해박하신듯..
@《해인재인강인》아빠 복수는 복수를 낳기 때문에..복수 주니어
@supervisor
@《해인재인강인》아빠 어 이분도 주니어 네 ㅎㅎㅎ
@supervis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