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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4월 14일자 극동공화국 군부 총사령관 블류헤르 등의 1921년 6월 자유시 사건 보고』를 대략 요약해 보면
출처 : РГАСПИ. Ф. 495. Oп. 135. Д. 61. Л. 7-10. Заверенная копия, машинопись.
및 러시아 국가 문서 열람사이트
http://docs.historyrussia.org/ru/nodes/48212#mode/inspect/page/1/zoom/4
(※ 극동공화국 총사령관 블류헤르, 군정의회 위원 파고진(Погодин)이 시베리아 혁명군사회의에 보내는 보고서에 따르면, 독립군들의 활동에 대한 극동공화국 군부의 생각이 잘 담겨 있다.)
(1) 사할린 의용대는 상해파 공산당의 자금지원을 받아 무장하였다.
(※상해파는 동양비서부장 슈먀츠키가 아닌 모스크바에 있던 레닌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사할린주 주도였던 니항(니콜라예프스크)에서 께르비로 이동하였고, 께르비에서 아무르주로 이동하는 동안에도 약탈을 심하게 하였다. 전체 주민을 공포에 빠트렸다.
(※과거 사할린주 니항의 파르티잔 부대(일명 트리피츤 부대)가 베즈드닌 등의 결정으로 아무르주 자유시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받았을 러시아 공산당 측의 식량 및 운송수단 지원 규모는 명확하지 않다.
중화민국 북경정부 소속 진계량(陳世栄, 陳季良)의 강방함대는 니항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따돌리고 아무르강을 통해 만주의 대도회 하르빈까지 무사히 대피하였다.
니항사건 기간중 중국인 2,000여명과 중국영사는 무사히 대피하였다고 한다. 중국계 반일 파르티잔은 러시아 내전중 대략 5만여명 정도로 알려졌다.
과거 트리피츤 부대가 자유시 일대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일부 주민의 환영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마을 대표가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이동 중인 빨치산 부대를 환영한 것으로 보여진다.
대체로 께르비에서 아무르주로의 이동과정에서 거쳐간 마을 주민들은 중립을 지킨 것으로 보여진다.
00000 이지택•김낙현•최호림은 너무 많은 거짓말을 해서 일일이 지적하기 힘든 점이 있다. 세계적으로 1920년 니항사건을 ‘민간인 학살극’으로 주장하는 사람은 남한에 많고, 일본에도 다수 있다.)
[니항사건의 용장 진계량(陳世栄, 陳季良, 1883 ~1945) 장군 . 니항사건의 주인공 트리피츤과 박일리야 등은 모두 사형당했으나, 일본군의 재공격에 2,000여명 중국 주민과 무사히 대피하여 하르빈에 도착하였고 지나사변에서도 일제와 싸웠다.]
사할린 의용대는 아무르주 마자나바의 여자들을 강간하고, 온순한 주민을 강탈하고 죽였다.
(※김승학은 공격군이 독립군을 ‘악마’로 간주하였다고 주장한다. 사할린 의용대는 강간 범죄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오늘날 무정부주의자란 의미가 강간범이나 강도와 동일한 용어는 아니다. 남한에서는 2000년대 초반 이전까지 니항사건은 독립군의 승리로 인식되었고 사할린부대가 무정부주의자라는 의견 자체가 없었다.)
(2) 고려혁명군정의회 위원인 오하묵•류동열과 사할린 의용대는 대립하였다.
(3) 까란다리시비리가 900여명 정도 데리고 와서 총사령관이 된 후에 화해가 되는 듯 하였으나, 또 다시 분열되었다.
사할린 의용대는 주민들에 대한 추악한 행태도 그치지 않았다.
(4) 일본은 극동공화국 내의 한국인 독립군부대를 의심스럽게 봤다.
일본의 안전을 위협하는 존재로 간주하였다. 러시아 영토내로 한국계 불법 입국자들은 일본•러시아간 우호 관계 형성을 방해한다고 한다.
(5) 1921. 6. 28. 사할린부대가 해체되었다. 그들이 아무르주에 체류하는 반년동안 모든 기관들에 그들의 불법을 비난하는 탄원서가 끊임없이 접수되었다.
무장 해제된 사할린부대를 까란다리시비리에게 인계하였다.
(6) 사할린부대가 또 아무르주에 와서 약탈을 할 수 있으니 이르쿠츠크 서쪽 지역으로 보내라고 주민들이 간청하였다.
(7) 까란다리시비리는 지나치게 열정적이며, 자신의 휘하 부하들에게 무기를 돌려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8) 아무르주 지역에서는 한인 빨치산들을 아무르주에서 추방시키기를 원한다.
(9) 사할린 의용대는 자유시 사건 전에 1921. 6. 29일 밤을 기해 북쪽 자유시의 물류창고를 습격한 후 남쪽의 연해주로 탈출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 당시 수라제프카 북쪽의 자유시와 제야시는 독립군의 탈출 방향이 아니었다. 오늘날 독립군들의 이동 목적지가 한국 국경지대나 만주였음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1921년경 무렵의 자유시, 하단이 수라제프카 마을이며, 수라제프카 구역에는 카레이스키 파셜록과 카레이스카야 슬라보드카 등 2개 이상의 조선인 마을이 있었다. 당시 니항과 블라가베셴스크에서 피난온 조선인들과 비무장 상태로 도착한 김홍일 등이 한 때 있었다고 한다.
(10) 2군단장 셰리쇼프는 사할린부대에게 자신의 명의로 까란다리시비리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고, 29연대를 위협을 줄 수 있는 곳에 배치하고, 장갑부대원들을 집결할 것, 불복하는 폭도들에게 대포로 공격할 것. 처음에는 유화전술을 쓰다가 이후 공격을 개시할 것을 명령하였다.
(11) 사할린 의용대는 무장해제를 거부하고, 오하묵, 박승만 등 4명을 추출하고 2군단장 휘하로 편입시켜 줄 것을 요구하였다.
(12) 1921. 6. 28. 사할린 의용대 1천여명이 먼저 자유시방향의 고려혁명군정의회편을 공격하기 위하여 이동하였다. 그리고 기습하여 전투가 벌어졌다. 29연대에 사할린 의용대를 무장해제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사할린 의용대를 공격하기 위해 12시경 2대의 장갑차가 접근했다.
13시경 2군단장 셰리쇼프 명의로 공격명령이 내려졌다. 사할린 의용대가 무장해제를 거부하고, 14시 30분경 먼저 사격을 가했기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사할린 의용대(폭도) 38명이 사망했다. 80명 가량이 제야강에서 익사했다.
(13) 반란군들은 항복하지 않고 완강히 저항하였다. 모든 탄약을 소모한 후에 항복하였다.
(14) 1921. 6. 28. 사할린부대가 다수 사살되고 800여명이 무장해제되어 노동부대로 조직되었다. 일부는 마자나바 지역으로 도주한 자도 있었다. 사할린부대는 께르비에서 아무르주로 오는 내내 폭력을 일삼고, 사람을 속이는 폭도들이었다.
그들은 상해파 공산당 당원이라고 사칭했다.
(15) 무장해제 이전에 모든 설득 수단이 사용되었고 양보하였으나, 반란군들은 폭력과 도적질에 익숙하였고 개인적으로 이기적인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1921년 10월 28일자 사할린부대의 복권요청』을 대략 살펴보면
김동한(일제의 밀정활동)과 김아파나시가 『아무르 사건에 대해 1』
트로츠키에게 보낸 편지.
1920년 10월 28일자
출처 : РГАСПИ. Ф. 495. Oп. 135. Д. 28. Л. 39-48. Подлинник, машинопись, подписи-автографы. (1)
http://docs.historyrussia.org/ru/nodes/48196
만주와 연해주 등지에서 용맹을 떨치던 한국 독립군은 아무르 지역에서 기대하였던 지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무고자들에 의해 ‘일본의 간첩’, ‘반혁명’ 등의 누명을 썼습니다.
독립군은 저항하지 않았으나 대포와 30정의 기관총 등에 의해 일방적으로 살해되었습니다.
수라제프카에 있던 2,000여명중 최소 400명 이상이 학살당했습니다.
......중략......
김하석의 횡령, 최고려의 일제 침략군 협조, 오하묵은 1920년 초까지 백파군대에 있었고, 이르쿠츠크파가 독립군의 지휘권을 차지하기 위해 무장해제를 감행하였습니다.
총기 발사.
학살은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계속됐습니다.
절박한 상황을 보며 많은 파르티잔들이 견디지 못하고 제야강에 뛰어들어 익사했습니다.
......중략......
자신의 동료들에 의해. 공격이 가해졌습니다.
우리 편은 반격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부대에 들어온 '승리자'는 학살을 자행하였습니다.
항복한 사람들은 살해되었고, 배에 상처를 입은 사람 등이 40명이 넘었습니다.
우리는 중지를 요청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간청은 그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마치 일제나 백파군대와 싸우는 듯이 만주의 벌판에서 영웅적인 행동으로 사람들을 찔러 죽이고 베었습니다.
......중략......
항복한 사람도 공격하였다. 죽이는 데 지쳤을 때 포로로 잡았습니다.
(......중략......)
이르쿠츠크로 끌려온 포로는 500명 이상입니다. 이르쿠츠크 감옥에도 70여명의 간부가 수감되어 있습니다.
(1) 공정한 조사위원회 구성
(2) 70명의 지휘관의 즉시 석방과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할 것
(3) 마자나바•자유시 일대의 대한의용군의 전직 사령관 그리고리예프를 이르쿠츠크에서 모스크바로 송환할 것
......하략......
만주의 반일 열사들
마점산(馬占山) 장군
곽송령(郭松齡) 선생 부부
[러시아 내전에 참전한 중국계 반일 파르티잔. 당시 중화민국과 일본 미국은 같은 연합국이었다고 한다. 중화민국은 1919년경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것을 방치하였다. 그러나 만주의 친일파 장작림이 일제와 연합하는 바람에 독립군들이 러시아령으로 대피하게 된 것이다.]
니항사건에서 활약한 강형함(江亨 舰). 당시 함장은 진계량(陳世栄, 陳季良, 1883 ~1945) 장군이었다. 강형함은 만주사변에서도 일제와 싸웠다는 소리가 있다.
자유시 참변이후 1921년 11월 28일경 이동휘의 레닌 접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자료총서5 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 홍범도편』, 1995, 329쪽 ‘리인섭’의 글을 살펴보면 |
1921년 말 동양혁명자대회가 개최되는 시기였다.
이동휘, 박진순이 모스크바에 와서 국제당 여관에 묵게 되었는데, 이동휘는 백파 콜차크군의 문서를 압수해보니 이동휘가 제일 위험한 인물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어, 공산당의 신임을 더 받게 되었다.
사정이 이렇게 되니 이르쿠츠크 파에서 김하석을 자기들 파의 수령이라고 같은 국제당 여관의 다른 방에 묵게 하였다.
그런데, 여관에는 방문자를 등록하게 되어 있는데, 동양혁명자대회에 참여한 조선 정치객들이 다수 와 있던 시기였다.
누구든지 이동휘를 찾아와서 방문하나, 김하석은 방문하지 않자, 김하석으로는 안되어 홍범도를 국제당 여관에 묵게 하니 이동휘를 방문한 사람들이 홍범도도 방문하였다고 한다.
그후 이동휘와 홍범도가 레닌을 접견하고 자유시 사변에 대하여 진상을 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르쿠츠크파에 몰려 억울하게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사람들고 유배를 갔던 사람들이 무죄 해방되었다.
(※러시아측 기록에 따르면 1921. 11. 28. 레닌과 이동휘와의 접견이 이루어졌다. 홍범도는 1922. 1월경 접견하였다.)
한국 독립군 처형 사건에 관한 조사위원회 구성
출처 : 러시아 국가 사회 정치 역사 기록 보관소(РГАСПИ). Ф. 495. Оп. 135. Д. 29. Л. 14. Копия, машинопись.
문서. 71호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ЦК РКП(б)) 조직국 회의 의사록 111번에서
모스크바시. 1921년 12월 9일
한국 파르티잔 처형 사건에 관한 조사위원회 구성
......중략......
소위, 아무르 사건은 한국 파르티잔들의 기억에 매우 불쾌한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아무르 사건은 여전히 두 파 사이의 말다툼을 가열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서로 대립하고 있는 2개의 한국 공산주의 단체간 다툼에 있어서
한국 파르티잔 문제들은 더 재치 있게 해결했어야 했습니다.
무력으로 무장해제 시키는 것은 너무나 터무니 없는 일이었다.
12시간 동안 불필요한 대포 포격과 소총 사격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포위된 파르티잔에 대한 포격, 불신되고 바람직하지 못한 분위기를 완화하기 위해 직접적인 범인 조사가 필요합니다.
유혈 사태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고 그렇게 되는 방식으로 행해져야 합니다.
러시아령으로 이동해온 유명한 한국 군인들, 불행히도 동양비서부의 슈먀츠키 동지가 대표하는 코민테른의 역할은 적절하지 않았습니다.
객관성이 필요했으나, 기본적인 분파적 다툼을 해결하는 것조차 실패했다.
아무르 사건은 파르티잔에 대한 용납할 수 없는 보복 방법이었다.
따라서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자료에 국한되지 않고 이 사건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를 지시한다.
......중략.......
(※필자의 의견 : 1921년 자유시 참변에 대한 코민테른(국제 공산당) 총비서와 동양비서부가 아닌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자유시 참변 조사 결정이 내려진다. 당시에는 소련이라는 국가가 세워지기 전이었고 코민테른은 러시아 공산당 중앙의 지시를 받았던 모양이다.
처형사건 조사는 이동휘 선생과 레닌과의 만남 등의 결과였으며, 이르쿠츠크파와 슈먀츠키 등의 은폐에도 불구하고 형식적이나마 조사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1921년 12월 29일자 이동휘와 홍도가 코민테른에 요청한 사항』를 대략 요약해 보면
이동휘와 홍도가 조선 공산주의 운동의 상황에 대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ИККИ) 간부 사파라프에게 보내는 편지.
1921년 12월 29일.
출처 : 러시아 국가 사회 및 정치 역사 기록 보관소(РГАСПИ). Ф. 495. Оп. 135. Д. 46. Л. 14-17. Подлинник, машинопись, подписи-автографы, рус. яз.
세계 무산혁명을 홍보하던 코민테른의 잡지
(1) 박애, 장도정, 계봉우, 김진의 석방을 요청함, 이르쿠츠크파에 의해 출당된 사람들의 복권
(2) 자유시 사건과 관련된 최창식, 최고려, 채알레산드르(채동순), 채그리고리(채성룡)의 이르쿠츠크파 공산당 및 원동민족대표 제외 요청
(3) 슈먀츠키는 중립을 지키기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동양비서부는 이르쿠츠크파를 지지하고 있다.
(4) 고려혁명군의 고위 간부는 전부 이르쿠츠크 파와 대한국민의회 지지자들이 차지하고 있다.
(5) 일본 제국주의와의 투쟁에서 한인 무장부대를 통합할 필요가 있고, 최고려와 채동순을 제외시키지 않으면 또 분열이 생길 수 있다.
(6) 현재 수감중인 10여명을 석방해 달라. 자유시 사건 직후 수감된 사람을 석방해 달라.
(7) 박애와 장도정이 군사 문제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며, 이병채, 허재욱이 중앙에 보고한 아무르 사건의 경과는 사실과 다르다. 공정하게 양측의 입장을 조사해 달라.
첫댓글 니항사건의 트리피츤과 박일리야등은 모두 사형당했으나 니항사건의 용장 진계량은 일본군의 재공격에 2000여명 중국 주민과 하르빈에 도착하였고 지나사변에서도 일제와 싸웠군요
진계량 장군은 중국에서 항일 영웅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니항에서 함포사격으로 기습공격에 나선 일본군을 전멸시키신 분 중 한분이십니다.
트리피츤은 그해 1920년 기습공격으로 처형되었으며
박일리야 장군은 1937년경 스탈린의 대숙청 당시 사형되셨고 1950년대 복권되셨어요...
사할린 부대 출신 중에는 뛰어난 독립군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