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프게니 키신·윤디 리·헬렌 황…… 저마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신동들이다. 이제 우리도 이들 한가운데에 우뚝 설 자랑스런 신동 한 명을 갖게 되었다. 지난 2001년 12월 프랑스 롱-티보 국제음악콩쿨에서 16세의 나이로 당당히 우승한 임동혁. "음악성에 있어서는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진정한 예술가"(백건우)라는 찬사를 받은 그가 오는 9월 7일 독주회를 연다는 특보(?)를 접한 것은 초대형 태풍 "라마순"(태국어로 천둥의 신을 뜻한다)이 전국을 강타한 7월 초순의 어느 날이었다. 부리나케 인터뷰를 요청하고 늦을 새라 공연기획사와 음반사를 닥달하던 중 기사 마감을 하루 앞두고 드디어 그로부터 답장이 왔다. "안녕하세요?" 라는 짧은 인사말로 시작한 그와의 첫 대면. 연주회 준비로 바쁘다는 말로 시작하고 있었지만 흡족할 만큼 빼곡히 적은 답장을 보고 내심 빙긋이 웃음이 흘러 나왔다.
소공자에서 음악계 총아로 지금 임동혁은 러시아에 있다. 가족 모두 모스크바에 거주하는데 바로 그의 아버지 임홍택 이 국내 유수 건설사의 모스크바 지사장으로 있기 때문. 그의 형 임동민도 임동혁과 함께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수학하고 있다. 유학 생활이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퍽 간단하게 대답한다. "러시아 생활이 쉽지는 않지만 저는 비교적 편안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연습 조건도 최상이라고 생각하며 문화적 분위기도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질문이 틀린 것 같다. 연습에 바빠서인지 별로 할 말이 있는 것 같지 않다. 임동혁은 현지 친구들이 많은 것도 아니다. 바로 세계 각지의 페스티벌과 독주회,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그리고 많은 음악인들과 만나야 하기 때문. 시간을 쪼개 음악원에서 공부하는 것도 빠듯하기만 하고 내년 6월에는 콘서바토리 졸업 시험도 있단다. 임동혁에게 일년 365일은 너무 짧은 것 같다. 잠시 임동혁의 유년 시절 이야기를 들어보자. "아주 정상적인 평범한 어린아이였던 것으로 기억해요. 엄마 눈 속여가며 전자오락실 같은 곳에서 딴짓을 하다 들켜 몇 번 야단맞았던 적도 있고요. 그래도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 연습하느라, 노는 "절대시간"만큼은 다른 애들에 비해 적었을 거예요 quot; 임동혁이 피아노를 배우게 된 것은 그의 형 임동민의 공이 크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어렸을 때만 해도 형에게 경쟁심 같은 무언가(?)를 느꼈다고. "제가 피아노를 시작한 건 7살 초등학교 1학년 때였는데 형이 하는 것을 보고 따라서 하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형한테는 지기 싫어서였죠." 임동민은 최근 차이코프스키 콩쿨과 비오티 콩쿨에서 입상하였으며, 오래 전이지만 1996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 청소년 쇼팽 콩쿨에서는 동생 임동혁과 함께 1·2위를 석권함으로써 형제 피아니스트의 탄생을 알렸다. 이렇게 형제가 모두 주목받는 피아니스트로서 두각을 나타냈던 사례는 매우 보기 드문 일로, 이들의 앞으로의 행보에 귀추가 쏠리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형은 진지한 자세로 음악에 임합니다. 학구적이며 노력을 많이 하는 편이죠. 그 점이 사실 저하고는 너무도 다르지만요. 형은 너무 강박하게 생각하는 점이 있어서 그게 흠이 될 것만 같아 걱정스럽고 안쓰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아마 가장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될 거라고 생각해요."
2000년 부조니 콩쿨 파동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2000년에 있었던 부조니 국제 콩쿨 파동은 국내에서의 반응 이상으로 현지의 반응이 컸다. 1·2차 예선에서 각각 2위·1위로 통과한 임동혁이 상위 입상이 유력시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태리 심사위원장과 영국인 심사위원들이 다분히 의도적으로 불리한 판정을 했던 것. 그로 인해 임동혁은 결선에도 진출하지 못한 채 최종 5위에 그치고 만다. 더구나 결선에 진출한 3명의 참가자가 모두 "함량미달"이라고 판단하여 대회사상 처음으로 우승과 준우승자도 없는 공동 3위에 두 명을 선정한 것은 스스로 콩쿨의 파행을 자초한 이 사건으로 당시 현지 언론들에 의해 대서특필되어 그 여파가 국제적으로 확산된다. 특히 피아노의 여제(女帝) 마르타 아르헤리치까지 공개적으로 임동혁의 후원자임을 자청하고 나섬으로써 콩쿨의 정당성에 심각한 흠집이 생겼고, 결국 이듬해 심사위원들이 모두 교체되고 우리나라의 이미주 교수(베를린대학 음대)가 심사위원으로 위촉됨으로써 일단락지어진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세계 음악계에 임동혁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이때 콩쿨 상위 6명을 위한 수상자 음악회가 열렸을 때 마음이 흔들린 임동혁은 연주를 고사하고픈 충동에 시달렸다고 한다. 뜻하지 않게 어이없는 일로 손에 거의 들어온 우승 트로피를 놓친 심정이야 오죽하였을까. 그러나 가족과 지인들의 권유로 음악회에 참가하였고, 공연장을 메운 청중들로부터 우뢰와 같은 찬사를 받는다. 진정한 우승자를 위한 갈채였다. 같은 해 열린 일본의 하마마츠 국제 콩쿨은 임동혁에게 큰 위안이 되어 준다. 원래 고열과 독감으로 이 콩쿨을 포기하려고 하였으나 가족의 독려로 참가를 결정, 2위에 입상하며 그는 이듬해에 있을 영광의 날을 예감케 하는 성과를 거두어 음악계를 들뜨게 한다. 이때 그와 함께 동행했던 마르타 아르헤리치는 "아주 잘했다. 개성있는 연주를 하는 바람에 우승은 놓쳤지만 대가의 자질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고 평했다. 이 입상을 계기로 그의 앞에 햇빛이 비치기 시작한다. 모스크바로 돌아간 임동혁은 절치부심 다음해의 도약을 위한 준비에 돌입한다. 일 년이란 기간은 퍽 짧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임동혁에게는 그 이상의 시간은 무익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