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와 같이 되라 <어린이들을 사랑하신 예수님>
2024.5.25.토요일 성 베다 베네라빌리스 사제 학자(672/673-735) 기념일
야고5,13-20 마르10,13-16
오늘 복음의 소제목은 “어린이들을 사랑하시다”입니다. 그대로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누구보다 어린이들을 사랑하신 예수님이라 생각합니다. 어린이는 순수한 인간 원형을 상징합니다. 누구나의 마음 깊이에는 나이에 관계 없이 어린이가 살고 있습니다. 어제 저는 두분에게서 이런 어린이를 발견하고 기뻤습니다. 주고 받은 댓글의 일부,소개합니다.
“이 거룩한 요셉수도원에 와서
집을 짓는 일
미사드리는 은총
어린이같이 순수하신 수사님들 뵈면
매일이
기쁘고 행복합니다.”
저에겐 싯귀처럼 예쁜 마음이 반짝였고, 저는 장미꽃 사진과 함께 다음 댓글을 보냈습니다.
“자매님 글이 시같이 아름답습니다. 축하드리며 장미꽃 사진 선물합니다.”
순수한 마음은 나이에 관계없이 소녀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세월의 흐름에 살아있는 자연의 반응이 신비롭고 고맙습니다. 수도원 뜨락에 벌써 앵두가 빨갛게 익어가고 있고 몇 개 따먹던중 이 장면을 포착한 수사님이 사진에 담았고 <앵두와 노수도승> 이란 시도 적어 보내줬고 어린이같은 순수한 마음에 감동했습니다. 노수도승이란 말을 읽으며 노수도승답게 살아야 하겠다는 다짐도 새로이 했습니다.
“오늘은 한 개
내일은 두 개
모레는 세 개 먹어야지
앵두와 함께 익어가는 수도승의 삶”
빙그레 미소짓게 하는 어린이같은 마음이 반짝이는 시입니다. 하느님 눈에는 누구나 사랑스런 어린이입니다. 초등학교 6학년때 13세였던 아이들이 지금은 60세인데 이번에도 수도원을 찾아 “스승의 은혜” 노래를 불러줄 때의 모습은 그대로 아이들의 순수한 모습이었습니다. 올해 5월은 피정집 공사라 피정손님들을 받지 못했지만 예전 5월 소규모 인원의 피정때는 꼭 어린이날 노래, 동요를 불렀습니다. 노년에 속한 피정자들이 흥겹게 부를때는 그대로 어린이들같았습니다. 나이에 상관없이 동심의 회복을 위해 동요부르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날라라 새들아 푸른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벌판을
5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오늘 복음을 읽을 때마다 생각나는, 수도형제 모두가 흥겹게 부르는 연중 제3주간 화요일 저녁성무일도 세 번째 후렴과 시편 131장 후반부 내용입니다.
“어린이와 같이 되라. 그렇지 않고는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차라리 이 마음은 고스란히 가라앉아,
어미품에 안겨있는 어린이인 듯,
내 영혼은 젖떨어진 아기와 같나이다.
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까지 주님만 바라고 살아가라.”
오늘 복음은 한폭의 살아있는 그림같습니다. 등장하는 사람들의 특징도 잘 드러납니다.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청하는 사람들 역시 순수한 아이같은 어른들입니다. 쓰다듬어 주는 사랑의 텃치, 스킨쉽은 얼마나 중요한지요. 어렸을 때 어머니의 사랑의 스킨쉽이 결핍된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공허한 마음에 영혼의 몸살을 앓습니다. 저는 동생이 생기기전 6살까지 어머니 젖을 먹으며 컸습니다.
애정이 넘치고 치유하는 스킨쉽의 텃치는 아이들, 병자들은 물론 우리 모두가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안아주라 있는 가슴이요 악수도 하고 등을 두드려 격려도 머리를 쓰다듬어 주라고 있는 또 만세를 부르라 있는 두 손입니다. 두발에 두손의 직립인간에 주어진 축복의 두 손입니다.
예수님 제자들의 반응이 완고하기가 아주 권위적입니다. 아이들을 데려온 사람들을 꾸짖는 제자들은 바로 우리의 권위주의적인 모습일수 있습니다. 섬기는 일이 아닌 통제와 조종에 그 권위를 사용합니다. 순간 예수님의 개입이 기민합니다. 오늘 우리의 경각심을, 우리의 동심을 일깨우는 평생 교훈으로 삼아야 할 복음입니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고 나서 어린이들을 끌어 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시는 예수님은 얼마나 멋진 어른인지요. 매주 수요일 삼종기도후 강론전 베드로 광장에 어린이들을 자신의 차에 태우고 행렬하는 도중 아이들을 받아 쓰다듬으며 축복하시는 교황님의 모습도 참 아름답고 감동적이었습니다. 어린아이와 큰아이 교황님처럼 보였습니다.
어린이다운 특징은 무엇입니까? 개방적인 열린 마음, 순수한 의탁, 편견없는 정신, 단순성이요 예수님은 물론 성인들이나 우리 주위에서도 우리는 이런 천진무구한 어른들을 간혹 만나기도 합니다. 칼릴 지브란의 “아이들에 대하여” 라는 잠언도 우리의 무지를 깨우칩니다.
“그대의 아이는 그대의 아이가 아니다
아이들이란 스스로를 그리워하는 큰생명의 아들딸이니
그들은 그대를 거쳐서 왔을뿐 그대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또 그들이 그대와 함께 있을지라도 그대의 소유가 아닌 것을
그대는 아이들에게 사랑을 줄 수 있으나
그대의 생각까지 주려고 하지는 말라
아이들에게는 아이들의 생각이 있으므로
그대는 아이들에게 육신의 집은 줄 수 있으나
영혼의 집까지 주려고 하지 말라
아이들의 영혼은 내일의 집에 살고 있으므로
그대는 결코 찾아갈 수 없는
꿈속에서조차 갈 수 없는 내일의 집에
그대가 아이들과 같이 되려고 애쓰는 것은 좋으나
아이들을 그대와 같이 만들려고 하지는 말라
큰생명은 뒤로 물러가지 않으며, 결코 어제에 머무는 법이 없으므로”
오늘 우리 성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7-8세기에 걸쳐 살았던 영국 출신의 베네딕도회 수도승인 성 베다 학자의 기념미사를 봉헌합니다. 성인은 7세때 수도원에 보내져서 원장의 극진한 사랑을 받고 지도를 받으며 19세에 부제품, 30세에 사제품을 받았고 평생 어린이다운 순수성을 잃지 않고 베네딕도회 본연의 수도승생활에 충실했던 분입니다.
성 베다는 당대 가장 박학한 사람으로 존경받았고, 몇 차례의 짧은 여행을 제외하고는 일생동안 늘 수도원에서 기도하고 노동하며 단순하게 살고자 노력한 수도승이었으며, 학문적 업적으로 유럽 전역에 널리 알려진 분이었습니다. 지혜와 학문을 높이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존자(Venerable)”란 칭호를 받은 성인은 뛰어난 학자이면서 지극히 겸손했으며, “영국 역사의 아버지”라고도 불립니다.
1899년 교황 레오 13세가 교회학자로 선언하였고, 성 보니파시우는 성 베다를 일컬어 “성령의 빛이자 교회의 빛”, “우리 스승이신 베다 존자”라 불렀으며, 시성 단테의 신곡 천국편에 등장하는 유일한 영국인이기도 합니다. 성인의 마지막 임종시 유언도 감동적입니다.
“나는 오래 살았고 자비로우신 심판관께서는 내 일생을 당신 섭리로써 지켜주셨습니다. 이제 떠날 시간이 다가왔으니 내 육신이 모두 사라져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갈망합니다. 내 영혼은 내 임금이신 그리스도를 갈망합니다. 손으로 내 머리를 받쳐주시오. 내 아버지께 기도할 수 있도록, 내가 즐겨 기도했던 성당을 향해 기대어 앉고 싶습니다.”
성인은 방바닥에 누워 영광송을 외우기 시작했고, “성령께”하고 말하는 순간 숨을 거두었다 합니다. 오늘 제1독서의 야고보 사도 역시 동심의 성인이라 생각됩니다. 오늘은 야고보서 마지막으로 사도가 강조하는바 기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찬양 노래를 부르십시오.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의 병이 낫게 될 것입니다. 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냅니다.”
역시 기도가 답입니다. 기도밖에 길이 없습니다. 기도가 어린이같은 순수한 마음을 지니게 하고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를 살게 합니다. 우리가 평생 날마다 바치는 공동전례기도 은총이 어린이와같은 삶에 얼마나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지 깨닫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닮아 동심을 회복해 아름답고 순수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 이수철 신부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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