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은 일제강점기에 성장한 항구도시다. 군산은 쌀이 모이던 도시였고, 일제는 그 쌀을 모아 본국으로 실어내기 위해 항구를 키웠다. 군산항에는 장미동이 있다. 아름다운 장미(薔薇)동이 아니라 아릿한 장미(藏米)동이다. 일제와 쌀은 군산의 지울 수 없는 일화기억이 되었다. 군산은 일화기억을 의미기억으로 바꾸며 살고 있는 곳이다. ‘일화기억(逸話記憶)’이란 어떤 상황을 겪음으로써 가지게 되는 장기 기억이라 했다. 군산은 그 기억을 다시 해석하여 희망적인 의미기억(意味記憶)으로 새기며 오늘을 살고 있다. 군산이 오늘날 가지고 있는 기억들이란 무엇일까. 아리기도 할 그 기억들을 기꺼이 불러내어 보여주고 있는 군산으로 간다. 맨 먼저 이른 곳은 채만식문학관이다.채만식(蔡萬植)은 1902년6월17일 군산 임피면 읍내리에서 태어나 작가가 되어 일제강점기의 불안한 사회를 배경으로 지식인의 불우한 삶을 풍자한 소설과 희곡을 남기고 1950년6월11일 이리(현 익산)에서 사망하였으며, 대표작으로 「탁류」, 「태평천하」 등의 소설이 있다. 우리 현대문학사에서 이광수가 그러하듯이 채만식도 우리 문학사 그리고 군산의 자랑이자 상처다. 그 상처는 일제강점기라는 시대 상황이 남긴 것임은 물론이다. 채만식문학관은 채만식이 남긴 문학적 업적만이 아니라 일제 말 친일을 해야 했던 상황과 친일적인 작품도 지적해주며 판단은 보는 이의 몫으로 남겨놓고 있다. 최근 군산시에서 시도한 채만식 생가 복원이 일부 단체에서 ‘친일 작가’라며 반발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고 한다. 아직도 군산은 채만식에 대해 합의된 의미기억을 만들어내지 못한 것 같다. 언제쯤이면 채만식은 오롯한 의미기억으로 남을 수 있을까. 문학관 앞마당에는 뜬금없는 철길이 놓여 있다. 채만식에게도 뼈저렸던, 쌀을 실어내던 일제의 수탈 흔적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 한다. 바다와 시내가 한눈에 바라다 보이는 언덕 위 구암역사공원에 1919년3월5일 만세 운동을 주도한 옛 영명학교의 모습을 그대로 본떠 지은「군산3.1운동100주년기념관」이 있다. 한강 이남에서 최초로 전개된3.1운동인 군산 3.5만세운동의 유물과 유적, 독립운동가들의 행적을 보여주고 있다. 일제의 수탈이 어느 곳보다 가혹한 곳이었던 만큼 독립 만세 운동도 치열했던 것 같다. 오른손에 태극기를 들고 군중 앞으로 나아가는데 일본 경찰이 칼을 휘둘러 오른팔을 베어버리니 다시 왼손으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고 왼팔마저 베어버리니 온몸으로 뛰어가며 만세를 부르다가 끝내 순국하고 만 문용기(文鏞祺1878~1919)의 이야기를 전설처럼 들려주며 목숨보다 드높은 국권의 의미를 새겨주고 있었다. 구마모토 리헤이(熊本利平)와 이영춘(李永春 1903~1980)도 군산의 중요한 기억이다. 구마모토는 논 3,000정보에 소작인 3,000가구. 전 가족 2만 명을 거느린 군산 최고의 농장주였다. 이영춘은 1935년부터 농장 부설 자혜진료소 소장으로 일하며 소작인들의 진료를 담당했다. 평남 용강에서 태어난 이영춘은 초등학교 교사로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하여 대구 수성초등학교의 교사로 있다가 갑작스런 병으로 휴직하고 그길로 의학을 공부하여 1925년에 세브란스 의전에 입학 1929년 졸업 후 의료인의 길로 들었다고 한다. 이영춘 가옥은 구마모토가 한 해 두세 차례 농장을 둘러볼 때 쓰던 별장으로 일본식과 유럽식을 절충하여 지은 호화 건물이라고 한다. 1939년 우리나라 최초로 양호실과 양호교사 제도를 도입한 이영춘은 해방과 함께 이 별장을 사용하면서1948년에 한국농촌위생연구소를 설립하고 1951년에 군산간호대학을 설립하였다고 한다.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 농장주들에 의한 토지 수탈의 실상을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면서 해방 후 농촌보건위생의 선구자 이영춘 박사의 활동 근거지로서의 의료사적 가치를 지닌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이영춘 박사의 기념관으로 쓰고 있는데 수탈의 역사를 시혜의 역사로 바꾼 의미기억의 현장이라 하겠다. 세 곳을 둘러보는 사이에 점심때가 되어 월명동의 어느 두부 요릿집을 찾았는데, 그 일대는 군산시에서 일본식 건물들을 새로 지어 음식점이며 숙박시설로 분양하여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는 곳이라 한다. 아픈 역사의 흔적도 관광 자원이 될 수 있는 것인가. 그런 건축물 안에서 점심을 먹으며 군산시의 발상의 의미를 다시 새겨 본다. 동국사로 간다. 개항 후 일본 조동종(曹洞宗) 사찰인 금강사(錦江寺)로 건립되었으나, 해방 후 조계종 동국사로 바뀌어 선운사 말사가 되었다고 한다. 대웅전과 승려의 살림집인 요사채는 복도로 연결되어 있고 지붕 물매가 급경사를 이루는 등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일본식 사찰이다. 대웅전의 부처는 해방 후 금제 금산사에서 새로 모셔온 것이라 한다. 사찰 한 쪽에 오석에 한글과 일어로 커다랗게 새겨놓은 참사문(懺謝文) 비석이 눈길을 끈다. 1992년 조동종 종무총장 오다케 아키히코(大竹明彦) 명의로 된 이 참사문에는“우리는 과거 해외전도(海外傳道)의 역사 위에 저질러 온 중대한 죄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아시아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사죄(謝罪)를 행하고 참회(懺悔)하고 싶다.”고 하며 “특히 조선·한반도에서 일본은 황후 암살이라는 폭거(暴挙)를 저지르고, 조선을 속국화하여 결국 한일합방으로 한 국가와 민족을 말살(抹殺)하고, 우리 종문은 그 첨병이 되어 조선민족의 일본 동화를 도모하고 황민화 정책을 추진하는 담당자가 되었다.”고 참회하면서 “일본의 압정(壓政)에 시달렸던 아시아인들에게 깊이 사죄하며, 권력에 가담하여 가해자의 편에 서서 개교(開敎)에 임했던 조동종의 해외 전도의 잘못을 마음 깊이 사죄합니다.”고 끝맺고 있다. 이 글을 비석으로 세우자 조동종 측에서는 내부문서라는 이유로 철거를 요구했지만 동국사와의 교섭을 통해 존치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고 한다. 이 참회문처럼 일본은 참회를 하고 있을까.다시는 남의 나라 주권을 침탈하는 만행을 저지르지 아니할까. 군산시가 동국사며 이 참회문을 중요한 역사적 자료로 보존하고 있는 것도 상처진 역사를 의미기억으로 바꾸기 위한 일이라 할 수 있겠다. 군산의 또 하나 아린 기억을 찾아간다. 군산시 등록문화재 제183호로 지정된 신흥동에 있는 일본식 가옥으로 들었다. 1925년 무렵 군산에서 포목점과 소규모 농장을 운영하던 히로쓰 게이샤브로가 지은 일본식 2층 목조가옥이다. ‘ㄱ’자로 붙은 두 건물과 그 사이에 꾸며놓은 큼직한 석등이 있는 일본식 정원은 일본의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양식이 바로 수탈자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수탈자의 재산이 관광자원이 되어 방문객을 부르고 있다. 이 집의 주인은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자 일본으로 강제로 쫓겨 가게 되면서 집을 두고 가는 것을 무척 원통해 했다고 한다. 남의 땅을 빼앗아 산 것이 아니라 살 곳에 살았다고 여겨서일 것이다. 나중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이 집 주인을 비롯하여 군산에 살던 일인들은 군산을 ‘전쟁이 빼앗아간 고향’이라하며 집 앞에 보이는 월명산의 이름을 따서 ‘월명회’를 만들어 가끔 모여 군산 시절을 함께 그리워했다고 한다. 그들의 집에서 일했던 조선인 가정부를‘오마니상’이라고 부르며 보고 싶다는 소식을 전해 오기도 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살면서 학교를 모두 군산에서 다닌 그들이라 하니 군산을 고향이라 여길지도 모르지만, 그 ‘향수’가 우리들에게는 아픔인 것을 그들은 알까. 군산은 이 가옥도 군산의 역사를 상징하는 하나의 기억으로 새기고 있다. 최근에 문을 열어 ‘수탈의 기억 군산’이라는 주제로 ‘군산미계요람’을 비롯한 각종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는 「일제강점기군산역사관」, 해상 물류유통의 중심지였던 옛 군산의 모습과 일제의 강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치열한 삶을 살았던 군산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군산근대역사박물관」, 1908년에 준공된 사적 제545호 「호남관세박물관(옛 군산세관)」, 1922년 신축한 옛 조선은행 군산지점이었던 「근대건축관」에서도 모두 일제가 저지른 수탈의 역사를 숱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만큼 군산은 일제의 침탈 만행에 대하여 증언할 것이 많고 증거로 내놓을 거리도 많은 곳이라는 뜻일 것이다. 군산은 지금 그 증언과 증거거리를 군산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군산을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보여줄 거리’로 풀어내고 있다. 그 ‘보여줌’을 통하여 새 역사에 대한 의지를 기약하고 있다. 지난날의 아픈 일화기억들을 새 역사를 위한 의미기억으로 새겨내고 있는 것이다. 부두에서는 이따금씩 배들이 기적을 울리며 들고 난다. 무엇을 실어오고 무엇을 실어내는 배들일까. 아직도 생생한 모습으로 부두에 남아 있는 긴 철길들을 보며 귀로를 달려가려는 차에 오른다. 우리의 명줄인 쌀을 적국으로 실어내야 했던 처절한 역사를 간직한 철길이 달아오른 햇살을 받아 뜨거운 빛을 내고 있다. 그 빛살이 지배 야욕에 찬 제국주의자들의 침탈 걱정 없이, 위정자들의 무슨 이념에 휘둘릴 일도 없이, 진정으로 백성들이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군산의, 나아가서는 이 나라의 평화로운 역사를 이루는 열기가 되기를 빌며 손을 흔든다. 어제와 오늘 군산의 모습이 내일의 가치 있는 의미를 간직한 의미기억으로 새겨지기를 바라며 귀로를 달려 나간다.♣(2019.6.27.) |
첫댓글 너무 의미있고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군산에 대한 아픈 역사와 함께 자세히 알게 되었고...
한번 가 보고싶어졌습니다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글 많이 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