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비(鮮卑)의 근원(根源)을 따라가 보자!
○ 조선사(朝鮮史)를 공부(工夫), 연구(硏究)하는데, 대륙(大陸)의 원전(原典)을 빼 놓고는,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물론 연구(硏究)하시는 학자(學者)님들은 자신(自身)들이 전공(專攻)한 분야(分野)의 특색(特色)을 살려 다양한 방법(方法)으로 조선역사(朝鮮歷史)를 고증(考證)하려고 한다.
<샤머니즘의 원류(原流)를 따라, 천문(天文)의 현상(現想)을 따라서, 언어학적(言語學的)으로, 또는 유물유적(遺物遺跡)으로, 금석문(金石文)의 해석(解析) 등등>의 방법(方法)을 동원(動員)하여 자신(自身)만의 독특(獨特)한 주장(主張)을 논리적(論理的)으로 풀어나간다. 이것을 보는 독자(讀者)들은, 동의(同意)할 수 있는 부분(部分), 이해(理解)될 수 있는 부분(部分)등 나름대로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러한 많은 주장(主張)에 대한 고증(考證)은 무엇으로 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問題)에 봉착(逢着)되는데, 자신(自身)만의 주장(主張)이 옳다고 하면서 그 증거(證據)나 고증(考證)이 애매모호(曖昧模糊)하다면, 흥미(興味)거리로 전락(轉落)할 수 있다는 점을 유의(留意)해야 한다.
○ 특히 문헌적(文獻的)인 고증(考證)으로, 이것을 다시 유물유적(遺物遺跡)으로 증거(證據), 확인(確認)하는 방법(方法)은 가장 훌륭하다고 볼 수 있는데, 사실 어려운 일이다. 여기서 확실(確實)한 방법(方法)은 문헌적(文獻的)인 고증(考證)과 함께, 지형지리(地形地理), 방위(方位), 특이지형(特異地形), 토산물(土産物), 기후(氣候)등과 함께 고고학적(考古學的)인 고증(考證)까지 업데이트된다면 이것이야 말로 “금상첨화(錦上添花)”일 것이다.
○ 조심(操心)해야 할 것은, 한 가지 의견(意見)이나 주장(主張)에 대한 맹목적(盲目的) 추종(追從)이다. 그 주장(主張)과 반대(反對)되는 주장(主張) 또는 다른 이들의 주장(主張)을 함께 보면서, 객관적(客觀的)인 시각(視覺)을 가질 필요(必要)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둥지에서 벗어나기 힘들고, 힘들다는 이야기는 “진전(進展)이 없다.”는 말과 같다.
○ 대륙 사(大陸史) 또는 조선사(朝鮮史)에서, 특히 등장(登場)하는 것이 소위 “이분법(二分法)”이다. 예를 들자면 “봉천(奉天)”은 현 섬서 성(陝西省)에 있는데, “봉천(奉天)”이런 단어(單語)가 나오면, 길림성(吉林省)의 “봉천(奉天)”으로 해설(解說)해 버리고, “상(上)이나 제(帝), 황제(皇帝)”등이 나오면 무조건 중국(中國)의 황제(皇帝)로 해설(解說)해 버리며, 선비(鮮卑)하면, 동(東)선비(鮮卑)니 서(西)선비(鮮卑)로 나누려하며,
돌궐(突闕)도 서돌궐(西突闕)이니 동돌궐(東突厥)으로 나누려 한다. 또 호(胡)라 하면, 서호(西胡) 동호(東胡)로 나누고, 흉노(匈奴)는 남흉노(匈奴), 북 흉노(匈奴)등으로 나누는데, 원전(原典)을 자세(仔細)하게 보면, 왜 그렇게 나눴는지 알 수 없는 경우(境遇)가 허다(許多)하다. 남(南)흉노(匈奴)나, 북(北)흉노나 그 자(者)들이 그자(者)들이고, 돌궐(突闕)역시 서돌궐(西突闕)이나 동돌궐(東突厥)이나 무슨 차이(差異)가 있는가? 모두 그 자(者)들이 그 자(者)들인데 말이다.
○ 동호(東胡)는 조선(朝鮮)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조선(朝鮮)이면 조선(朝鮮)이지, 무슨 동호(東胡)냐?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사가(史家)들의 붓장난으로 만들어진 어처구니없는 일이며, 아마도 대륙 사(大陸史)를 새롭게 교정(校訂), 편찬(編纂), 재발행(發行)할 당시에 첨가(添加)된 것일 게다.
○ 선비(鮮卑)에 대한 것은 전회(前回)에 설명한 것이나, 『이들의 시원(始原)은 결코 극동(極東)지방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상기(想起)하고자 다시 보충(補充)한 것이다. 『대륙(大陸)과 열도(列島), 반도(半島)의 사학자(史學者)들』은 모두 한 목소리로 극동(極東)지방의 흑룡강(黑龍江)이북(以北)지방으로 몰아넣고 있으나, 『원전(原典)엔 결코 이런 기록(記錄)은 없다』는 점이다.
『싸우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이 있듯이, 대륙(大陸)이나 열도(列島)의 학자(學者)들이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반도(半島) 학자(學者)들”의 태도(態度)는 도무지 이해(理解)할 수 없다는 점이다.
=====================================================================================
○ 후한서(後漢書) / 선비(鮮卑)
〔鮮卑者,亦東胡之支也,別依鮮卑山,故因號焉.其言語習俗與烏桓同.唯婚姻先髡頭,以季春月大會於饒樂水上(1),飲燕畢,然後配合.又禽獸異於中國者,野馬,原羊,角端牛,以角為弓,俗謂之角端弓者(2). 又 有 貂, 豽, 鼲 子, 皮 毛 柔 蝡(3), 故 天 下 以 為 名 裘. : 선비(鮮卑)는, 또 동호(東胡)의 지파(支派)인데, 나누어져 선비산(鮮卑山)에 의지하였기 때문에, 이로 인해 별호(別號)가 되었다. 그 언어(言語)와 습속【習俗 : 풍속】은 오환(烏桓)과 똑같다. 혼인(婚姻)은 먼저 곤두(髡頭)를 하고, 봄 끝 날 달밤에 요락 수(饒樂水) 위에서 성대한 회합을 하고, 주연을 마치고, 그러한 뒤(然後)에 아내와 합친다. 또 금수(禽獸)는 중국(中國)의 것과 다른데, 야생의 말(野馬), 원양(原羊), 뿔 소(角端牛)가 있는데, 이 뿔(角)은 활로 쓰이는데, 소위 “각단 궁(角端弓)”이다. 또 담비(貂). 삵【놜 : 豽 / 원숭이 일종】. 누런 쥐【혼 : 鼲】가 있는데, 가죽 털은 유연【柔軟=유윤(柔蝡)】하여, 고로 천하(天下)의 명구【名裘 : 이름난 갓옷】이다.〕
주(注) 1 / 水 在 今 營 州 北. : 물【요락 수(饒樂水)】은 지금 영주(營州) 북쪽에 있다.
주(注) 2 / 郭璞注爾雅曰:原羊似吳羊而大角,出西方.前書音義曰:角端似牛,角可為弓. : 곽박(郭璞)이 주(注)한 이아(爾雅)에서 이르기를 : 원양(原羊)은 오양(吳羊)과 닮았는데 큰 뿔이 있다. 서방(西方)에서 난다. 전서(前書)의 음의(音義 : 음과 뜻)에서 이르기를 : 각단(角端)은 소와 닮았는데, 뿔은 활을 만드는데 좋다.
주(注) 3 / 豽音女滑反.鼲音胡昆反.貂,鼲並鼠屬.豽,猴屬也. : 놜(豽)의 음(音)은 녀(女). 골(滑)의 반(反)이며, 혼(鼲)의 음(音)은 호(胡)와 곤(昆)의 반(半)이다. 초【貂 : 담비】는, 혼【鼲 : 누런 쥐】과 나란히 서【鼠 : 쥐】에 속한다. 놜(豽)은, 후【猴 : 원숭이】에 속한다.
------------------------------------------------------------------------------------
● 반도사학(半島史學)과 식민사학(植民史學)은, 『“선비산(鮮卑山)” 이 “대 흥 안 령”【大 興安嶺 : 현 흑룡강 성(黑龍江省)을 흐르는 흑룡강(黑龍江)지대(地帶)】에 있었으며, 이곳에서 “선비(鮮卑)”가 시원(始原)한다』고 설명(說明)하면서, 이곳에 또 『북위(北魏)의 탁발(拓跋)씨의 선대(先代)가 살았다는 “석실(石室)”이 있었으며, 그 유적(遺跡)까지 발견(發見), 보존(保存)하고 있다.』고 하면서, 현 대륙(大陸)측과 똑같은 역사해설(歷史解說)을 하고 있다.
이러한 반도사학(半島史學)과 식민사학(植民史學)의 설명(說明)은, 『대 흥 안 령(大興安嶺)이나 반도(半島)는, 낙타(駱駝)가 자생(自生)하여, 백성(百姓)들이나 병사(兵士)들이 낙타(駱駝)를 타고 다니며, 또한 이곳은 사막지대(沙漠地帶)였다.』는 말과 같고,
『이곳이 서방(西方)이다』라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조선(朝鮮)이 있었던 『“동방(東方)의 땅”은 그 동쪽지대인 “태평양(太平洋) 한 가운데 추운 바다 속에 있었다.”』는 것이 된다. 이 얼마나 황 당(荒唐)한 논리(論理)인가!
➊ 역사서(歷史書)에서 설명(說明)하기를, 흉노(匈奴)와의 전쟁(戰爭)으로 피폐(疲弊)해지자, 이를 감당(堪當)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자, 종족(種族)들을 보존(保存)하기 위해, 동(東)쪽에 있었던 “선비산(鮮卑山)”속으로 이주(移住)하여, 흉노(匈奴)공격(攻擊)을 피해, 종족(種族)들을 보존(保存)하니, 후대(後代)에 이들을 『선비산(鮮卑山)의 이름을 취해 “선비”라고 호칭했다.』는 말이며,
➋ 이들은 유목종족(遊牧種族)이었으니, 야생의 말과 원양(原羊) 및 뿔 소등을 기르며, 살았다는 이야기다. 문제(問題)는 이들이 기르던 “원양(原羊)”이란 “양(羊)”이 어느 지방에서 사는 것이냐? 바로 『서방(西方)에서 나는 양(羊)이다.』라는 설명이다. 『서방(西方)』이 어딘가? 이곳은 최소한(最小限)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지방을 벗어날 수 없다. 이곳이 바로 “서토(西土)”이니 말이다. 『서방(西方) 땅에서 나던 “원양(原羊)”이라는 양이 갑자기 진화(進化)에 진화(進化)를 거듭하여, 일만(一萬)리도 넘는 최 극동(極東)지방의 그 추운 곳 흑룡강 성(黑龍江省)지방까지 왔다?』누구 마음대로 “진화(進化)에 진화(進化)를 거듭했을까? 이것은 생물학적(生物學的)으로 보아도 타당성(妥當性)이 전혀 없는 일이다.
중요(重要)한 것은 당시(當時)이며, “서방(西方) 땅에서 나는 양(羊)”이란 이야기다. 선비(鮮卑)가 동(東)쪽 지방이 아닌 서(西)쪽 지방에서 시원(始原)한다는 증거(證據)다. 후대(後代)에 이들은 모두 “고구려(高句驪)가 접수(接收)해버렸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기록(記錄)은 사라지는 것이다.”
➌ 또 중요한 것은 “선비(鮮卑)”가 있었던 그곳의 “금수【禽獸 : 날짐승 및 길짐승 곧 모든 짐승】는 중국(中國)의 것과 다르다(異)”는 것이다. 『흑룡강 성(黑龍江省)지방의 “금수(禽獸)”가 중원(中原)지방의 것과 다른가?』 이것은 인종(人種)과도 관계(關係)되는 일이다. 이보다 더한 명백(明白)한 증거(證據)가 또 필요할까!!!!!!!!!!!
『서방(西方) 땅에 살고 있는 “금수(禽獸)”는 “중원(中原)”지방의 것과 다를 수밖에 없다.』 토질(土質), 특이지형(特異地形), 기후(氣候), 지세(地勢)등과 밀접(密接)한 관계(關係)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수입(輸入)해 오고, 또 개량(改良)하여 이곳저곳에 살 수 있도록 개량종(改良種)을 만들어 내지만, 수천(數千)년 전(前)의 사건(事件)이란 것을 생각하자. 선비족(鮮卑族) 설명(說明)에서 나오는 “서방(西方)”이란, 바로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지방을 말하는 것이며,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중조(中朝)”란 주장(主張) 역시 이 범위를 벗어 날 수 없다.
➍ 더하여 선비(鮮卑)종족(種族)이었던 “북위(北魏)”의 탁발(拓跋)씨 선대(先代) 석실(石室)에 대한 것은, “북사(北史) / 오 낙 후 국(烏洛侯國)”편에 기록(記錄)되어 있는데, 『오 낙 후 국(烏洛侯國)”은 북해【北海 : 러시아의 우랄산맥의 북쪽 바다를 말한다.】가까이에 있었던 나라이다.』
북사(北史) 열전(列傳) 원문(原文) / 〔太 武 真 君 四 年 來 朝 , 稱 其 國 西 北 有 魏 先 帝 舊 墟 石 室 , 南 北 九 十 步 , 東 西 四 十 步 , 高 七 十 尺 , 室 有 神 靈 , 人 多 祈 請 。 太 武 遣 中 書 侍 郎 李 敞 告 祭 焉 , 刊 祝 文 於 石 室 之 壁 而 還 。: 태무(太武) 진군(眞君) 4년에 조정에 왔다. 그 나라 서북(西北)에 위(魏) 선제(宣帝)의 옛 터 석실(石室)이 있어, 남북(南北)이 90 보, 동서(東西)가 40보요, 높이가 70 척인데, 내부에 신령(神靈)이 깃들어 있어,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일이 될 수 있도록 빈다. 태무(太武)가 “중서시랑 이 창”을 보내어 신에게 고하여 제사를 지내고, 축문(祝文)을 석실(石室)의 벽(壁)에 새기고 돌아왔다.〕고 기록(記錄)하였다.
대륙 사(大陸史) 원전(原典)에서는 명명백백(明明白白)하게, 북해(北海) 가까이에 있는 “오 낙 후 국(烏洛侯國)”이란 나라의 서북(西北)쪽 땅에, 위(魏)를 건국한 선비족(鮮卑族) 조상의 “석실(石室)”이 있었다고 하였는데,
근대(近代)의 『대륙(大陸)사학자(史學者)나, 열도(列島)사학자(史學者), 반도(半島)사학자(史學者)들』은 짜고 치는 “고 스톱”처럼, 본래(本來)의 땅으로부터, 일만(一萬)리도 더 떨어져 있는 흑룡강 성(黑龍江省)지방으로 몰아넣고는 그곳에 “짝퉁 석실(石室)까지 만들어 놓고는 유적(遺跡)”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설명(說明)판까지 있다고 전한다.
대륙(大陸)이나 열도(列島) 사학자(史學者)들이야 자신(自身)들의 나라를 위해서 조작(造作)한다고 치자. 그러나 반도(半島)의 사학자(史學者)들은 무엇이냐? 는 것이다. 또 이들은 누구를 위해서 존재(存在)하고 있는 것이냐? 하는 거다.
=====================================================================================
※ 대륙 사(大陸史) / 통전(通典) 선비(鮮卑) : 〔 鮮 卑, 亦 東 胡 之 支 也 , 別 依 鮮 卑 山 , 因 號 焉 。 今 在 柳 城 郡 界 。 其 言 語 習 俗 與 烏 桓 同 , 唯 婚 姻 先 髡 頭, 以 季 春 月 大 會 饒 樂 水 上 , 今 在 柳 城 郡 界 。 然 後 配 合 。 其 獸 異 於 中 國 者 , 有 野 馬 、 原 羊 、角 端 牛 , 以 角 為 弓 , 代 謂 角 端 弓 者 也 。 郭 璞 注 爾 雅 曰 :「原 羊 似 吳 羊 而 角 大 , 出 西 方 」 前 漢 書 音 義 曰 : 「 角 端 似 牛 , 角 可 為 弓 」 又 貂 、 豽 、 鼲 子 , 皮 毛 柔 軟 , 豽 音 女 滑 反 。 鼲 音 胡 昆 反 。 貂 鼲 並 鼠 屬 , 豽 蜼 屬 。 故 天 下 以 為 名 裘 。: 〔선비(鮮卑)는 또 동호(東胡)의 한 가지이다. 동호(東胡) 중에서 나누어 “선비산(鮮卑 山)”에 의지하며 살았던 관계로 이로 인해 “선비(鮮卑)”라 부르게 되었다. 【유성군 계(柳 城 郡 界)에 있다.】그 나라는 언어, 습관, 풍습 등은 오환(烏桓)과 같다. (중략). 그 나라의 짐승(獸)은 중국의 것과 다른데(異), 야마(野馬:야생마). 원양(原 羊). 각 단 우(角 端 牛)가 있다. 이 뿔(角)이 활(弓)이며, 대신에 각단우의 뿔로 사용도 된다. 【곽박(郭璞)의 주한 이아(爾雅)에서 이르기를, 원양(原 羊)은 오양(吳 羊)과 같은데, 뿔이 크며, 서방(西方)에서 나온다. 전한서(前漢書) 음의(音義)에서 이르기를, 각단(角端)과 소(牛)가 같다. 뿔(角)로 활(宮)이 가능하다. 】또 담비(貂). 놜(豽 : 원숭이 일종). 다람쥐(鼲:혼)새끼 등의 가죽과 털은 유연하여 예부터 천하(天下)의 명 갓옷(가죽 옷)이다. 【貂 鼲(초혼)은 나란히 쥐(鼠)에 속하는데, 놜(豽:원숭이 일종)은 원숭이(蜼 : 원숭이 유)에 속한다.】〕고 하였으며,
-------------------------------------------------------------------------------------
※ 조선사(朝鮮史)에서는 『해동역사 / 본문(海東繹史 / 本文)』
겸양(嗛 羊) : 〔성주(成 周)의 회합에서 고이(高 夷)가 겸양【嗛羊 : 양(羊)은 양(羊)인데, 뿔이 네 개 달린 특이(特異)한 종류(種類)의 “양(羊)”을 말한다. 또한 뿔이 여섯 개 달린 “양(羊)”도 있었다고 한다. 】을 바쳤는데, 겸양(嗛羊)이란 것은 양(羊)이면서 네 개의 뿔이 있는 것이다. 《급 총주서(汲冢周書) 왕 회해(王 會 解)》
공조(孔晁)의 주(注)에, “고이(高 夷)는 동북(東北)쪽의 오랑캐로 고구려(高句麗)이다.” 하였다. 왕응린(王應麟)이 말하기를, “술이기(述 異 記)에 이르기를, ‘주나라 성왕【成王 : B. C 1115년】 때 동이(東夷)가 뿔이 여섯 개 달린 양(羊)을 바쳤는데, 이 역시 겸양(嗛羊)의 종류이다.’ 하였다.” 〕
● 이러한 “양(羊)”들이 자라는 곳은 “동이(東夷)”가 살고 있는 곳이며, 특히 “고이(高夷)”들이 “겸양(嗛羊)”을 바쳤다고 하였으니, “고이(高夷)”들이 있었던 곳에 “겸양(嗛羊)”이 있었다고 보아지며, “고이(高夷)”는 “고구려(高句驪)”라고 설명하고 있다. 《급총주서(汲冢周書) 왕 회 해(王 會 解)》에서는 『성주(成周)의 회합(會合)에서 “고이”【高夷 : 고구려(高句驪)의 다른 이름】가 “겸양(嗛羊)”을 바쳤다.』고 하였으니, 고구려(高句驪)의 실제 건국(建國) 년대(年代)는 기원전【紀元前 : B. C】1,115년 그 이전(以前)이 되어야 한다.
※ 고구려(高句驪)의 실제(實際) 건국(建國)년대(年代)는 기원전(紀元前) 1,115년 이전(以前)이 되어야 하는데, 미뤄보면 주(周) 무왕【武王 : 기원전(紀元前) 1,134년】의 나라가 곧 고구려(高句驪)라는 말이 된다. 고이(高夷)는 곧 고구려(高句驪)의 한 종족(種族)이다.
=====================================================================================
○ 조선사(朝鮮史)를 공부(工夫)하고 연구(硏究)한다고 하면서, 조선(朝鮮)의 후예(後裔)들을 짓밟는 식의 파렴치(破廉恥)한 주장(主張)이나 의견(意見)을 개진(開陳)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비논리적(非論理的)인 주장(主張)은 비록 그것이 한 개인(個人)의 것이라 하더라도, 조선(朝鮮)에 깊은 애정(愛情)을 갖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허탈(虛脫)하게 만들고, 반도사학(半島史學)을 주장(主張)하는 무리들에게, 회심(會心)의 미소를 짓게 한다는 사실(事實)을 알자.
반도(半島) 땅!
이곳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이며, 우리들의 후손(後孫)들이 영구(永久)하게 살아가야 할 땅이며, 터전이다. 반도(半島)의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로 보면, 현 대륙(大陸)땅과 근접(近接)해 있기 때문에, 유입(流入)이 가장 쉽고, 편리(便利)하며, 어느 때고, 마음만 먹으면 오고 갈 수 있는 곳이다. 수백(數百), 수천(數千)년 전(前)의 사회상(社會相)을 생각지 못하고, 역사(歷史)공부(工夫)를 한다는 것은 차라리 공부(工夫)를 하지 않는 것보다 더 못한 일이다. 왜냐 구...........망령(亡靈)된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수천(數千)년, 수백(數百)년 전에, 수천(數千)리나 수백(數百)리 바다 길을 항해(航海)한다는 것은, 일가(一家)나 부족(部族)등은 몰살(沒殺)을 각오(覺悟)하는 일이며, 또 “배”를 몰고 갈, 여러 가지 기술(技術)이 절대적(絶對的)으로 필요(必要)한 것이다.
반도(半島) 땅!
이곳에 살고 있는 7천5백만 국민(國民) 대부분(大部分)은, “조선(朝鮮)의 후인(後人)들”이라고 믿고 살며, 자신(自身)들의 선대(先代) 조상(祖上)님들을 모시며, 정신적(精神的) 지주(支柱)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 도대체 반도(半島)가 옛 “왜(倭)”라는 말이나, 이상한 종족(種族)이라는 말은 어디에서 나온 것이냐?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지방은 지금도 문맹(文盲)율이 높으며, 삶 역시 가장 원시적(原始的)인 생활방식(生活方式)을 갖고 살아가고 있으며, 이들은 현 신강 성(新疆省)일부와 그 동(東)쪽의 국민(國民)들과는 전혀 다른 인종(人種)들이 사는 곳이다.
수많은 번국(蕃國)과 속국(屬國), 제후국(諸侯國)등지에서, <중조(中朝)에서 공부(工夫)한 자>, <정벌(征伐)에 공을 세운 자>, 또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한 자>, <특출(特出)한 장인(匠人)들>, <포교(布敎)자>, <번국(蕃國). 속국(屬國). 제후(諸侯)등이 볼모로 보낸 그의 자식(子息)들>등등 많은 “이국(異國)인”들이 기내(畿內 : 중국)에서 살았을 것이다.
대륙(大陸)도, 반도(半島)도, 열도(列島)도,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도, 19세기나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문맹(文盲)율”은 거기가 거기일 정도(程度)로 높았다는 사실이다. 봉건왕조(封建王朝)는 일반 백성(百姓)들이 학문(學文)을 아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것은 바로 역성(易姓)혁명(革命)이나, 반란(叛亂), 민중혁명(民衆革命)등이 발생(發生)할 수 있는 소지(素地)가 그만큼 높아지기 때문이다. 증거(證據), 고증(考證), 근거(根據)등이 전혀 없는, 개인적(個人的) 의견(意見) 정도를, 사실(事實)인 냥 하는 것은 옳은 태도(態度)라 할 수 없다.
2013년 06월 26일 <글쓴이 : 문무(文武)>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