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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냐...저번에 쓰다 말았던...대무신왕과 호동에 관한 야그를 매조지 하려고 합니다...
뭐 별게 아닙니다...누구나 사료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상하다고 느낄 문제이죠...
굳이 공부도 일천한 제가 이런 건에 관해서 언급하고자 하는 이유는...
말로만 고구려고구려 하지만 말고...조금 더 고구려에 관심을 가져달라는 것도 있고...
(실체도 모르면서 우리것이라고 하면 이상하니까...)
사실 사회에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도...조금만 주의깊게 보면 전혀 당연하지 않다는 것이며...
당연한 것을 당연하다고 말하기 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과 연구가 필요한 것인가...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도 있습니다...
우리야 초딩만 되도 지구가 태양 주변을 돈다는 것을 배워서...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만들기 위해서 몇사람이 목숨을 걸어야했습니다....
하여간 들어가봅니다....
뭐...호동왕자는 호동왕자와 낙랑공주라는...한국역사에 몇손가락에 꼽히는 로멘스의 주인공인만큼...
호동왕자하면 20대의 준수한 총각을 떠올리기 마련이고...
그를 죽인 아버지나 계모는 40~50대의 냉혹한 중년 정도로 그림이 나올 것입니다...
결론 부터 말씀드리자면 그렇지 않습니다...
고대사의 거의 유일하다시피한 사료인 삼국사기에 따르면...
琉璃王在位三十三年甲戌 立爲太子 時年十一歲 至是卽位
'유리왕이 재위 33년 갑술에 (무휼을)태자로 삼았는데 이때 (그의)나이가 11세였다. (유리왕이 재위 37년에 죽자) 이 때에 이르러 즉위하였다.'
즉 대무신왕은 11세에 태자책봉이 되고...15세에 왕위에 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근데 호동이 죽은 것은....
冬十一月 王子好童自殺
'(대무신왕 15년)겨울 11월에 왕자 호동은 자살하였다 '
즉 당시 대무신왕15년...왕의 나이 29~30세에 호동이 죽습니다....
호동의 나이를 밝힌 사료는 없지만...
(넷상에서 몇몇분들이 대무신왕 4년에 태어났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밝히시던데...
아무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뒤져도 그런 기사는 없습니다만..;; 삼국유사는 아예 호동야그가 없고
대무신왕 4년 조엔 부여를 정벌하고 북명사람 괴유와 적곡사람 마로를 얻는 기사가 전부입니다...)
이 대무신왕의 나이를 토대로 호동의 나이를 추정해보면...
역시 대무신왕이 언제 결혼을 했는지도 사료는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차비와 원비, 두명의 왕비를 두었다는 것만을 밝히고 있으며 그나마도 누구와 먼저 결혼했는지
그들이 몇살인지도 사료상으로는 밝혀낼 길이 없습니다..
하여간 대무신왕에 초점을 맞춰보면...대무신왕은 11세에 세자가 되었고...대체로 삼국사기가 전하는
고구려 왕실의 관례를 보면 평균 11~13세에 세자에 책봉이 되고...대개 결혼도 그때 합니다...
이런 관례도 있고 정치적인 위치로 봐도...태자가 된 대무신왕을 홀몸으로 내비두진 않았을 것입니다...
대강 결혼은 태자책봉을 전후하여 한 것으로 보입니다...또 '차비'라는 표현이 둘째부인을 뜻하는 데...
이것은 꼭 결혼을 늦게 한 부인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고 단순히 신분상의 문제로 원비, 차비를 나누기도 하는바...
호동이 차비의 소생이라하여 꼭 호동의 어머니가 원비보다 늦게 결혼한 여자라고 보기는 힘드니까 넘어가기로 하지요...
어쨌건 대무신왕은 그렇게 결혼을 하는데...현대 의학에 따르면...개인차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생식이 가능한 나이가...남자는 몽정기 이후..즉 13살전후.....
여자는 월경이후 한 9~12살 정도부터라고 보고 있습니다..
(개인차가 무지 심하다는군요...늦게 보는 사람은 14~16세로 보기도 하더군요)
같은 인간인 이상...과거 사람이라고 딱히 정력이 좋지 않은 이상...대무신왕도 13살 이전에는 아이를 만들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11~13이라는 평균 태자책봉 나이도...나름 이런 생식의 문제가 포함된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어쨌거나 무리해서 가정을 해서 재수좋게 대무신왕과 왕비 모두 생식 가능한 나이였고...
그게 또 운좋게 대무신왕이 딱 13세가 되던 해였다고 가정을 합시다...
어쨌건 호동이 대무신왕의 장자인 것은 확실하니...그아이가 또 호동이었다고 치고...
또 임신을 하는 기간이 있으니...대강 1년 잡아먹고...그렇게 되면 대무신왕의 나이 29세에 죽었으니...
죽을 당시 호동의 나이는 정말 무리해서 최대한 잡아야 봐야 15세입니다...즉 지금의 중학교 1학년이죠...
이 15세라는 나이는 더 어려지면 어려지지 더 많아지지는 않습니다..;;
특히 나중에 얘기할 것이지만...호동의 어머니는 차비로...갈사왕의 손녀딸입니다...
근데 이 갈사왕이라는 사람이...대무신왕 5년조에 나오는데...
夏四月 扶餘王帶素弟 至曷思水濱 立國稱王 是扶餘王金蛙季子 史失其名 初 帶素之見殺也 知國之將亡 與從者百餘人 至鴨 谷 見海頭王出獵 遂殺之 取其百姓 至此始都 是爲曷思王
秋七月 扶餘王從弟謂國人曰 “我先王身亡國滅 民無所依 王弟逃竄 都於曷思 吾亦不肖 無以興復” 乃與萬餘人來投 王封爲王 安置 那部 以其背有絡文 賜姓絡氏
'여름 4월에 부여왕 대소의 아우가 갈사수(曷思水) 가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왕을 칭하였다.
이 사람은 부여왕 금와의 막내 아들인데 역사책에는 그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
전에 대소가 죽임을 당하자 [그는]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고, 따르는 자 백여 명과 함께 압록곡에 이르렀다.
[그는] 해두국왕(海頭國王)이 사냥 나온 것을 보고 결국 그를 죽이고 그 백성들을 빼앗아 이곳에 와서 비로소 도읍하였는데.
이 사람이 갈사국왕(曷思國王)이 되었다.
가을 7월에 부여왕의 사촌 동생이 나라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우리 선왕이 죽고 나라가 망하여 백성들이 의지할 데 없는데 왕의 동생이 도망쳐 갈사에서 도읍하였다. 나도 역시 불초하여 다시 [나라를] 일으킬 수가 없다.”
마침내 만여 명과 함께 투항해 오니, 왕은 [그를] 왕으로 봉하여 연나부에 두고, 그의 등에 줄무늬가 있었으므로 낙(絡)씨 성을 주었다.'
라는 기사가 나옵니다...그럼 사실 이때 손녀딸을 바치는 것이 분위기상 좋아보이지만...
그렇게 되면 5년에 바친 딸이 결혼하자마자 바로 애를 낳았다고 쳐도
15년에 죽은 호동은 10대도 채 되기 전에 죽게되는데...-_-
뭐 이 갈사왕이 투항하기 전 부여의 왕자나 왕제(王弟)로 있던 시절에 무휼에게 딸을 보냈다고 그냥 치고
미리 가정한대로 15세...가정의 과정에 무리가 있던 점을 감안해서 12~14세라고 칩시다....
어쨌거나 어린 나이임에는 변함이 없죠...-_-
자...그럼 이 호동의 나이에서...많은 문제점이 발생합니다....
일단 삼국사기 호동에 대해서 다뤄진 기사는...대무신왕 15년조가 전부입니다...
夏四月 王子好童 遊於沃沮 樂浪王崔理出行 因見之 問曰 “觀君顔色 非常人 豈非北國神王之子乎” 遂同歸以女妻之 後好童還國 潛遣人告崔氏女曰 “若能入而國武庫 割破鼓角 則我以禮迎 不然則否” 先是 樂浪有鼓角 若有敵兵則自鳴 故令破之 於是 崔女將利刀 潛入庫中 割鼓面·角口 以報好童 好童勸王襲樂浪 崔理以鼓角不鳴 不備 我兵掩至城下 然後知鼓角皆破 遂殺女子 出降 或云 欲滅樂浪 遂請婚 娶其女 爲子妻 後使歸本國 壞其兵物
冬十一月 王子好童自殺 好童 王之次妃曷思王孫女所生也 顔容美麗 王甚愛之 故名好童 元妃恐奪 嫡爲太子 乃讒於王曰 “好童不以禮待妾 殆欲亂乎” 王曰 “若以他兒憎疾乎” 妃知王不信 恐禍將及 乃涕泣而告曰 “請大王密候 若無此事 妾自伏罪” 於是 大王不能不疑 將罪之 或謂好童曰 “子何不自釋乎” 答曰 “我若釋之 是顯母之惡 貽王之憂 可謂孝乎” 乃伏劍而死
여름 4월에 왕자 호동(好童)이 옥저(沃沮)로 놀러 갔을 때 낙랑왕(樂浪王) 최리(崔理)가 나왔다가 그를 보고서 묻기를 “그대의 안색을 보니 비상한 사람이구나. 어찌 북국 신왕(神王)의 아들이 아니겠는냐?” 하고는 마침내 함께 돌아와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후에 호동은 귀국하여 몰래 사람을 보내 최씨 딸에게 말하였다. “만약 너의 나라의 무기고에 들어가 북과 뿔피리를 찢고 부수면 내가 예로써 맞이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거절할 것이다.”
이에 앞서 낙랑에는 북과 뿔피리가 있어서 적의 군사가 침입하면 저절로 울었으므로 명령을 내려 격파하였다.
이리하여 최씨 딸이 날 선 칼을 가지고 몰래 창고에 들어가 북의 [가죽]면과 뿔피리의 주둥이를 찢고 [부순 후] 호동에게 알렸다.
호동은 왕에게 권하여 낙랑을 치게 하였다. 최리는 북과 뿔피리가 울리지 않았으므로 대비하지 않다가, 우리 군사가 갑자기 성 밑에 다다른 연후에 북과 뿔피리가 모두 부서진 것을 알고 마침내 딸을 죽이고는 나와서 항복하였다.
혹은 다른기록에 따르면 '낙랑을 멸하려고 혼인을 청해서 그 딸을 데려다 며느리로 삼은 후에, 본국으로 돌아가서 무기를 부수게 하였다.' 라고도 한다
겨울 11월에 왕자 호동은 자살하였다. 호동은 왕의 차비(둘째 부인)인 갈사왕의 손녀가 낳은 사람이다. 얼굴 모습이 아름다워 왕이 심히 사랑하여 호동이라고 이름지었다.
원비(첫째 왕비)는 [그가] 태자의 적통을 이을까 염려하여 왕에게 “호동이 저를 예로써 대접하지 않고 아마 저에게 음행을 하려는 것 같습니다.”고 참언하였다.
왕은 “당신은 남의 아이라고 해서 미워하는 것이오?”라고 하였다.
왕비는 왕이 믿지 않는 것을 알고, 화가 장차 자신에게 미칠까 염려하여 울면서 “청컨대 대왕께서는 몰래 살펴주십시요. 만약 이런 일이 없다면 첩이 스스로 죄를 받겠습니다.”고 고하였다.
이리하여 왕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어 [호동에게] 죄주려 하였다. 어떤 사람이 호동에게 “당신은 왜 스스로 변명하지 않느냐?” 하고 물었다.
[호동은] 대답하였다. “내가 만약 변명을 하면 이것은 어머니의 악함을 드러내어 왕께 근심을 끼치는 것이니, [이것을] 어떻게 효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는 칼에 엎어져 죽었다.'
이기사가 삼국사기에서 다뤄진 호동의 모든 것이며...사실 '낙랑공주'라는 단어는 나오지도 않으며...
그 둘의 뜨거운 로맨스나...호동이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고 죄책감을 느껴 죽었다느니...는 전부 후대의 각색임을 알 수 있습니다...
(초딩인 호동이 웬 로멘스?-_-)
결국 호동이 죽은 직접적인 이유는 왕비와의 추문입니다....
그리고 그 추문은 왕비가 먼저 나서서 '적극' 왕에게 참소하고 있는데...
뭐...위서로 취급당하고 있는 '화랑세기'를 굳이 들지 않더라도...유교학자인 김부식이
남녀상열지사를 빼고빼서 지었다는 '삼국사기'만으로도 삼국시대가 유교사회인 조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이 개방되고 자유로웠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을정도로 성에 자유로운 삼국시대라는 시대상을 감안하더라도...
10살을 갓넘은 아이를 두고 왕비와의 추문이 가능하기는 한가...라는 의문이 발생합니다...
아니...그것보다 그러한 추문을 진짜로 믿을정도로 대무신왕이라는 왕이멍청한가? 라는 것이 핵심이지요...
대무신왕이라는 으리으리한 묘호에서 볼 수 있듯이 대무신왕은 고구려의 숙적정도로 생각되던
부여와의 일전을 승리하고 대소의 목을 베었으며 동부여를 멸하고 부여를 멀리 쫓아버린 왕입니다...
그외에도 짜잘한 속국을 다 먹어치우고 낙랑마저 점령한 군주이지요...
그정도의 군주가 삼국사기에서도 '사랑하는' 이라고 표현한 아들을 단순히 왕비의 참소에 죽인다....
여기서 한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습니다...
왕비의 참소는 아마 왕조차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그것은 단지 구실이고
(왕비와의 추문에 대한 진상은...뭐 원비의 나이도 알 수 없으니 확신하지는 못해도...
초딩이 아버지의 여자를 가지겠다고 달려들었다는 것인데..이게 과연 가능한지;;
과거엔 애들이 과도히 조숙하거나 사춘기가 빨리오지 않는 담에야..;;)
원비의 세력이건 왕의 세력이건 낙랑정벌로 인해 거대세력으로 대두한 호동의 세력을 밟을 필요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사실 호동의 나이를 따지자면 낙랑공주와 결혼자체가 불가능하지 않느냐...라고 할 수도 있지만 앞서 말했듯이
결혼은 11세, 13세에도 합니다...다만 애를 못낳을 뿐이지...하물며 정략결혼이야...한자리 수 나이라도 못하겠습니까?
어쨌거나 정략결혼을 했던 안했던 호동, 또는 호동으로 대표되는 세력이 낙랑정벌에 큰 공을 세운것은
사실로 보입니다...어느정도 세력이 강성해지고 확장될 수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근데 앞서 언급했듯이 호동은 원비의 소생이 아닙니다...
당시는 유교사회가 아니고 심지어 장자상속조차 확정되지 못한 사회였던바...
적서 차별이야 희박했지만 어쨌건 힘을 쓰는 원비의 소생이 아닌 것은 확실하고
호동의 어머니인 차비는 이후에도 이전에도 위의 기사 이상으로 기록된바가 전혀 없습니다...
즉 정치적으로 전혀 도움이 안되거나 영향력이 없었다고 봐도 되겠죠...출신도 자신이 멸망시킨 부여의..
그것도 왕도 아니고...막내 왕자의 손녀딸-_- 그것도 그 막내왕자도 나중엔 투항하는...
계보상으로 보면 떨거지급..-ㅂ-;;; 영향력이 없는 것이 당연할지도..;;(짐이나 안되면 다행)
하여간에 원비입장에서는 기사에도 전하듯이 공도 있으며 왕도 총애하는 호동이 태자가 될까바 걱정했고...
이에 호동의 세력을 축출하고자 저런 모함을 벌인 것이지요...
이에 왕도 처음엔 당연히 말도 안된다고 하지만...결국 왕비의 뜻을 받아들이는데...
물론 어느정도로 원비가 들들 볶으며 바가지를 긁었는지는 모르지만...
원비출신이 아닌 호동이 낙랑점령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왕권과 원비세력에 도전적인 세력으로 부상하면서
왕권의 유지차원에서 호동은 희생시킨것은 아닐까라는 가설을 세울 수 있습니다...
즉, 호동이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으로 성장하여 왕권이 불안정했던 왕의 정치 공장에 의해 죽음을 받은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호동의 대답도 의미심장한데...유교학자인 김부식이 효를 강조하기는 하였지만...
사실 당시의 효사상이 어땠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고...(뭐...삼국유사에 많은 효자 효녀가 나오긴 합니다만...)
아마도 호동또한 변명해봤자 이미 대세는 결정되었구나...
라는 생각에 변명조차 없이 자살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즉, 호동의 죽음또한 단순한 원비의 모함이라기보다...그런 허술한 모함을 받아들임으로
실질적으로 호동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왕의 고단수의 정치공작이 아니었을까...
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뭐...대무신왕이야...
태자가 되기 전인 10살때 부여군대를 '기책'으로 아작낼 정도로 전술가였으니...
물론 이 호동과 대무신왕에 대한 역학구조는 사료의 빈약함으로 추측에 불과하기는 하지만...
정황근거상...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며...
일단 '꽃다운 나이'운운하며 선남선녀의 로멘스의 주인공으로 삼기에는 호동이 너무 어렸으며...
그로인해 당시 정국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고...기존에 당연히 생각하던 나이나 인간관계에 대해
사실 그렇지 않더라...라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느정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구차하군....=ㅁ=;;;;; 하여간 고구려나 백제에 관하여 삼국사기를 다시한번 읽어보세요...
일방적인 통념과는 전혀 다른 나라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담번엔 대부분 사람들이 많이들 혼동하시는 근대와 전근대...그로인한 책봉조공관계에 대한 오해...
또 덕분에 비굴하고 무력한 국가정도로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있는 조선에 관해 글을 올려보겠습니다....
사실 조선은 여러가지 의미로 일본보다도 '멀고도 가까운 나라'입니다...
같은 한국인의 나라라고 현재 대한민국과 비슷할 것이라는 것은 정말 오산입니다...
이게 한국인의 나라인가...라고 생각될 정도로 쌩판 다른 세계가 조선입니다...(이건 삼국과 고려도 마찬가지)
하여간 책봉조공관계에 관해서 언급하다보면 자연히 중화사상도 건드릴 것이고...에효...
큰주제를 겁없이 건드는 것은 아닌지...겁부터 나는..ㅡㅡ
여담으로 현재 학교수업에서 발표수업의 일환으로
조선은 임란전 정말 대비가 안되어 있었는가?
소제목: 이이의 10만 양병설에 관하여....
라는 것의 자료를 모으고 있는데...혹시 이에 관한 좋은 사료나 선학의 연구를 알고 계시는 분 추천좀 부탁드립니다
감사^^
첫댓글 글쎄요.........역시나 디코나, 윤민혁님 홈피, 혹은 안병도님홈피가서 살피시는것이 좋지 않을까요? 그럭저럭말입니다.....= =;;;;뭐 아니면 김경진님홈피도 나름은.....= =;;;;ㄷㄷㄷ
"이게 다 마으령 신녀탓이다. 대소가 대무신왕에게 목을 베일동안 마으령 신녀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
근데 주몽이는 대소에게 별 타격도 입히지 못하는것 같네요
글쎄요;;;초딩들이 로맨스가 없다고 보는건;;;;;; 어느나라나 왕권은 초기에 참으로 빈약합니다. 그래서 초기에 왕권을 확립한 왕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짐승... 수준? 자기 형제 아들이 경쟁자가 되니;;;; 허허허허허;;; 방원씨도 그러했고 고려 광종(-狂宗?)께서도 진짜 정말로 피의 숙청을 단행했으니;;; 하여간 어느나라든 초기에는 무서울정도로 피바람 붑니다. (명나라는 특히나 심각했을지도;;; 주원장부터 시작해서 쪼기 북경에 나라 수도 옮긴 영락제까지 .... 정말정말 피가 마를날이 없었던 나라같은데;;;)
저도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를 읽고 있습니다만 솔직히 삼국사기만으로 정확한 연대를 책정한다는 것은 좀... = =;; 연도와 씽크로가 안되는 지명이 툭하면 나오던데...
글고 이이의 10만대군 양병설... 재밌겠군요. 저는 개인적으로 사림의 전성기인 16세기(즉 부국강병 자체를 부정하는) 에 이이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수나 있었을지, 그리고 받아들이더라도 얼마나 먹혀들어갔을지 의문입니다만... 뭐 반론의 여지도 많죠
전 cciba님의 글이 참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제 자소서를 읽는 면접관들도 같은 생각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ㅋㅋ 저도 이젠 자고 싶어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