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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뱀에 물리면 놋뱀을 보라 (민 21;4-9)
어느 연못에 두 마리의 붕어가 평화스럽게 살고 있었습니다. 붕어 한 마리가 불평을 하였습니다. 욕심장이였습니다.
“저 놈만 없으면 이 연못은 모두 내 것인데...”
그래서 어느 날 다른 붕어를 물어 뜯어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 붕어가 썩으면서 물이 악취를 났습니다. 오염되었습니다. 그 붕어도 같이 죽고 말았습니다. 불평은 남도 죽이고 결국은 자기도 죽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중에 하나가 불평입니다. 하나님께서 불평을 얼마나 싫어하시는 지 본문은 우리에게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생활하면서 아직 광야 환경에 적응하지 못 하고 있었습니다.만나만 먹기가 싫었습니다. 텐트에서 날마나 지내는 것이 지겨웠습니다. 물도 흡족하지 못 하였습니다. 어디를 보나 소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불평하였습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 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5)
하나님께서는 이런 원망과 불평을 불편하게 여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최고의 은혜를 베플고 게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 하고 불평하고 원망하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불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냈습니다. 불뱀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기 시작하였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죽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잘 보면 두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1. 불뱀이 우연이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불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게 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6)
2. 불뱀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물게 하셨습니다.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6)
우리는 솔로몬이 한 말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까닭없는 저주는 이르지 아니 하느니라”(잠 26;2)
하나님은 온 세상을 창조하셨기에 온 피조물들을 다 주관하시고 명령하실 수 있음을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섭리만 있습니다. 모든 일의 배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손길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역사속에는 구속사가 흐르고 있습니다. 판넨버그라는 신학자의 지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을 당하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점검하여 보아야 합니다.
가을 풍년과 흉년을 먼저 아는 동물이 있습니다.
멧돼지입니다. 멧돼지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도토리입니다. 멧돼지가 새끼를 많이 낳으면 도토리를 비롯한 모든 농작물들이 풍년들 징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멧돼지가 새끼를 적게 나면 흉년들 징조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속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뱀에 물려 죽으면서 모세에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7)
모세는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있었습니다.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8)
모세가 그렇게 하였습니다.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장대에 매달린 놋뱀을 보는 이들은 다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까짓 것을 본다고 무슨 병이 낫느냐고 믿지 않고 보지 않았던 이들은 다 죽었습니다. 놋뱀이 달린 장대는 바로 십자가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바울은 이 사건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놋뱀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 3;14)
예수님은 놋뱀을 해석하시면서 성경에서 가장 귀중한 진리 요한복음 3장 16절을 연결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장대에 달린 놋뱀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이 해석을 바울은 더 피부에 와 닿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놋뱀에 대한 바울의 해석
바울은 이렇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불뱀이 저주받은 것은 예수님이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저주받으신 것으로 바울은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불뱀을 보는 사람마다 고침받은 것은 예수 십자가를 보는 이마다 생명을 얻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불뱀에 물린 이들은 놋뱀을 보면 나을 수 있습니다. 불뱀에 물렸어도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놋뱀이 있기 때문입니다.
1. 실패의 불뱀에 물렸어도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실패하지 않고 성공의 길로 가는 이는 한 명도 없습니다. 바람을 맞지 않고 태평양을 건너는 배는 한 척도 없습니다. 아예 바람을 예상하고 가야 합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습니다. 오르막길없는 내리막길은 없습니다. 일없는 상없고 상없는 일없습니다.
인생길에는 골목골목마다 수많은 실패의 징검다리가 있습니다. 문제는 실패가 아니라 실패 처리능력입니다. 실패없이 성공한 사람보다 실패 후에 성공한 이가 더욱 돋보이는 법입니다. 실패는 어느 누구도 원하지 않지만 어느 누구도 실패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미국 국민이 한국 올림픽에서 가장 관심을 모았던 선수는 수영에서 5 관왕을 차지 하였던 맥 비디온 선수였습니다.
그는 첫 시합 200미터 자유형에서 3위, 다음 100미터 진영에서 금메달을 놓지고 말았습니다. 신문들은 그의 실패를 대서특필하였습니다. 전문가들도 충격을 받아 나머지 경기에 기대를 걸지 않았습니다. 컨디션이 회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펜실바니아 대학의 심리학 교수 셀리그먼은 남은 경기에서 5관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이 예언은 적중하였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실패처리 능력 즉 실패하였을 때 그 실패에 영향을 받지 않는 맥 비디온임을 조사하여 놓았기 때문입니다. 실패하였어도 그 실패에 영향을 받지 말고 앞으로 전진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불뱀만 보지 말고 놋뱀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밤만 보지 말고 낮도 보아야 합니다. 사막만 보지 말고 오아시스도 보아야 합니다. 오늘만 보지 말고 내일도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 있는 믿음의 사람들을 보면 아픔이 있을 때 아픔만 보지 않고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을 보고 결코 실망하지 않았던 이들이었습니다.
욥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욥은 물질을 다 잃고 건강을 다 잃고 더구나 자녀들까지 다 잃은 상황에서도 결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불뱀에 물렸어도 놋뱀을 주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정확하게 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 23;8-10)
아픔과 실패가 종종 불청객처럼 찾아 온다 할 지라도 그 배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줄 아는 영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승리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하리라.”
“다시 하리라.”
이런 마음을 가지고 전진하는 이는 불뱀에 물렸어도 놋뱀을 볼 수 있습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실패에 맞서서 싸우는 5가지 방법>를 소개하였습니다.
1. 실패라는 단어 대신에 시행착오라는 말을 사용하라. 희망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쉽게 재기한다.
2.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버리라. 실패를 딛고 재도전할 기회는 반드시 온다
3. 자신을 실패자로 비하하지 말아라. 실패의 원인은 분석하고 반성하되 비하는 하지 말아라
4. 항상 실패를 맞을 준비를 하라. 인생에게는 깊은 수렁도 있고 넓은 초원도 있다
5. 실패가 예견되면 빨리 단념하라.
실패라는 불뱀에 물렸어도 장대에 높이 들려진 놋뱀을 보고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2. 병의 불뱀에 물렸어도
살아가다 보면 병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병에 걸리지 않고 세상을 사는 이는 단 한명도 없습니다. 병의 불뱀에 물려 고통을 당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문제에는 해답이 있습니다. 해결책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놋뱀을 보는 것입니다.
놋뱀이 불뱀에 물린 자의 병을 담당한 것처럼 십자가에 못박혀 달리신 예수님은 우리의 병도 짊어 지셨습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 8;17)
지난 주 목요일 나는 안양 갈멜산 기도원에서 밤 12시부터 1시 30분까지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 밤에도 1,000명 가량이 모였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목사님 한 q분이 달려 왔습니다. 그리고 땅에 엎드렸습니다.
“강목사님! 세배를 받으십시오.”
나는 놀랐습니다. 그런 분은 처음 대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말릴 틈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세배하는 이유를 말했습니다.
몇 년전 갈멜산에서 내가 집회를 인도할 때 전신마비가 되어 이 기도원에 올라 왔다는 것입니다. 의사는 곧 죽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왕 죽을 바에는 기도하다가 죽겠다고 다짐하고 올라 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설교할 때 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완전히 고침을 받았습니다. 너무나 고마워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죽산 동안성 교회를 받들고 있는 김종관 목사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불뱀에 물렸어도 놋뱀을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됩니다.
3. 가난의 불뱀에 물렸어도
예수님은 우리의 가난을 담당하러 오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8;9)
물질적 어려움이 있을 때 예수님이 오셔서 부요로 만드신 이야기가 성경에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고기 한 마리 잡지 못 할 때였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 오셔서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였습니다. 두 배 가득차게 물고기를 많이 잡았습니다. 가난을 부요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오병이어 기적도 같습니다.
빈들에서 5000명의 무리들이 굶고 있었습니다. 밤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를 가지고 축사하시고 나누어 주기 시작하였습니다.모두가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리고 부스러기를 모았습니다. 12광주리나 되었습니다. 가난을 부요로 바꾸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또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난하게 되신 것은 가난을 부요를 주시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가난의 불뱀에 물린 이들은 놋뱀을 보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성경은 축복의 말씀으로 그득차 있습니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십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복을 비는 것이 샤마니즘이요 미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는 것은 정정 당당한 것이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십일조를 통하여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주시는 분이십니다
주일성수를 통하여서도 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구제를 통하여서도 복을 주십니다. 구제하는 것은 하나님께 꾸이는 것이니 하나님이 갚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복을 주십니다.
성경을 복을 받는 통로는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가난의 불뱀에 물린 사람들은 부요를 주는 놋뱀을 보아야 합니다.
얼마 전에 뉴욕에서 세계 경제 포름(WEF) 32차 총회가 열렸습니다. 세계 경제, 재계 3000여명 대표가 모였습니다. 지구촌의 빈곤 문제였습니다.
지금 지구상에는 하루에 1불 1200 원 정도로 하루를 사는 사람이 3억 7천만명입니다. 2015년도에는 4억 2천만명이 될 것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는 최빈국으로 평균 하루 1000원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시아 평균은 1500원입니다. 미국 평균은 45,000원입니다.
빈민국이 라면을 먹는 수준이고 미국은 매일 소고기 스테이크를 먹는 수준입니다.
세계에서 제일 부자 빌게이츠가 얼마전 240억 불 그러니까 약 31조원을 아프리카에 기증하여 세계 최대 규모의 <자선 재단>을 만들었습니다. 1993년 빌게이츠 부인 멜린다 여사가 아프리카를 여행하였습니다. 흙길을 맨 발로 걷고 있는 여자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도대체 신발을 신은 여자들을 한 명도 볼 수가 없었다. 아프리카는 나를 완전히 변화시켰다.”
이 회의에서 결론을 이렇게 맺었습니다.
“살기 좋은 세계를 위하여 선진국들은 개발도상국에 있는 국가들에게 다양하고 전폭적인 지원을 해야 한다.”
지구상에 10%의 사람들이 90%의 돈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누어야 합니다.
시베리아 유대인들 보고를 받았습니다. 한 가족에 신발이 한 켤레 밖에 없어서 여름에는 맨 발로 나가고, 겨울에는 교대로 외출한다고 합니다. 지구상에 극빈자들이 많습니다.
1945년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우리 나라는 극빈국가였습니다. 지구상에서 면적으로 120번째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10대 무역국이 되었습니다. 5년 내에 6위가 될 전망입니다.
2008년도부터 삼성 전자는 세계 1위 회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온 세계를 복음화시키라고 이렇게 축복을 주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목적이 부요는 아니지만 반드시 부요로 이끌어 주십니다. 가난의 불뱀은 놋뱀으로 물리칠 수 있습니다.
4. 문제의 불뱀에 물렸어도
살아 있는 이들은 언제나 문제가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움직이는 자동차는 늘 고장날 수도 없고 사고 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해답이 없는 문제는 없습니다. 응답이 주어지지 않는 기도는 없습니다.
문제의 불뱀이 다가와도 해결의 놋뱀이 항상 우리 곁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비행 항공술의 선구자인 핸드리 페이지 이야기입니다.
그가 수많은 관중들 앞에서 비행기로 에어쑈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비행기 묘기입니다. 고난도 기술을 순간순간 보여줌으로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고 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바스락 소리가 신경을 건드렸습니다. 알고보니 생쥐 한 마리가 전선을 갉아 먹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전선이 끊기거나 합선이 되면 비행기는 공중 폭팔하지도 모를 긴박한 상황이었습니다. 자신의 명예는 물론 국가의 명예도 추락될 위기였습니다.세계적인 뉴스거리가 됩니다.그러나 그 보다 더 한 것은 생명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변에 대형참사가 일어날 지도 모릅니다. 그는 기도하였습니다. 응답이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자. 그리고 더 높이 날자.”
그는 비행기 기수를 더 높였습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더 이상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알고보니 비행기가 높이 오르자 생쥐가 산소부족으로 질식하여 죽어버리고 만 것이었습니다. 문제가 있을수록 높이 올라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 더욱 가까이 가야 합니다.
문제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를 문제로 보는 것이 정말 문제입니다. 문제의 불뱀이 다가 와도 우리는 해결의 놋뱀이 곁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이들에게 승리는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불뱀에 물린 이들은 놋뱀을 보아야 합니다.
1. 실패의 불뱀에 물렸어도
2. 병의 불뱀에 물렸어도
3. 가난의 불뱀에 물렸어도
4. 문제의 불뱀에 물렸어도
우리는 어떤 담도 넘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해결책이 있습니다.
세계 분단국가가 셋이었습니다. 예멘, 독일 그리고 한국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두 나라는 통일되었습니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분단국가가 우리 나라입니다.
나는 독일이 분단되었을 때도 가보았고, 통일되고도 가보았습니다. 1961년 8월에 동독과 서독을 분단하는 담을 쌓았습니다. 길이 164km, 높이 3m였습니다. 위에는 전기 철조망을 쳤습니다. 그 후 통일될 때까지 이 담을 넘으려다가 잡혀서 감옥살이한 사람은 4천명, 죽은 사람은 200명이었습니다. 그래서 담밑은 이들의 묘지였습니다.
그런데 이 담을 무너뜨린 것은 기도의 힘이었습니다.
1982년부터 동독의 성 니콜라이 교회에서 퓨에라 목사님을 중심으로 평화를 원하는 기도회를 시작하였습니다. 매주 월요일에 모여서 기도를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50명이 모였습니다. 점점 늘어났습니다. 담이 무너지고 통일시켜 달라는 기도가 불이 붙었습니다. 이 기도회가 10만명이 모이기 시작하였습니다. 10만명이 일주일에 한번씩 모여서 기도한다는 것은 기적이었습니다. 온 나라에 불이 붙었습니다.
드디어 담이 무너지고 통일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됩니다.
불뱀에 물린 사람은 놋뱀을 보면 됩니다.
영국 트렌취 목사님의 신앙 고백이 은혜로웠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가는 평탄한 길에 조그만 구렁텅이만 있어도 벌써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람을 원망한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가 가는 험하고 캄캄한 길에 조그만 빛만 비취어도 하나님이 주시는 자비로운 빛이라고 여기면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화려한 궁중에 살면서도 생이란 왜 이리 괴로우며 기쁜 일은 하나도 없느냐고 얼굴을 찡그리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고, 쓰러져 가는 오막살이에 살면서도 우리를 지켜 주시는 하늘 아버지의 한없는 은혜와 사랑을 진심으로 감사하는 사람이 있다.”
원망하고 불평하지 말라.
본문: 민 21: 5- 9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미국의 어느 목사님은 『불평록』이라는 특이한 노트 한 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인들이 다른 교인을 비방하거나 그에 대해 불평하려고 찾아 왔을 때, 목사님은 그 불평록을 꺼내고는 『이 불평록에 적어놓을 테니 나중에 사인이나 해주십시오. 여기에 적힌 것은 모두 시정되도록 관계자들에게 이야기하겠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불평하려고 찾아왔던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당황한 채 돌아갔습니다. 사소한 일에도 불평을 터뜨리면서 막상 그 불평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 목사님은 40년이 넘도록 불평록을 가지고 있었지만 한 줄의 이야기도 그 노트에는 기록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죽기까지도 불평을 하지 않으시고 말없이 순종하심으로 행하셨습니다. 주님의 그 희생과 순종하심을 기억하며 우리도 생활 가운데서 일어나는 불평과 비방을 몰아내야 합니다. 불평을 말하기 이전에 대안을 생각할 수 있고, 주님의 순종과 인내하심을 생각하며 따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약5:9)
사람의 몸에는 수많은 기관들이 있습니다. 어느 날 손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렇게 억울할 수가 없었습니다. 위장은 매일 먹고 놀기만 하는데 자기는 먹지도 못하면서 온갖 잡일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에 불만스러웠습니다. 급기야 손은 투덜대기 시작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한 몸에 붙어 사는데 누구는 매일 일만하고, 누구는 편안하게 먹고 놀기만 하니 이거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입이 말했습니다.
『맞아요. 나만 하더라도 매일 3끼씩 음식을 씹느라고 온갖 고생을 다하고 있는데, 눈은 하는 일 없이 아름다운 경치나 감상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기관들은 이날부터 모든 일을 멈추고, 쉬기로 결의를 하였습니다. 코는 숨쉬기를 멈추었고, 심장은 박동을 중단하였습니다. 그러자 몸은 점점 힘이 빠지고 정신은 혼미해져서 죽기 직전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자 손은 서둘러 말했습니다.
『여러분! 제가 잘못했으니 제발 각자의 일을 다시 시작합시다.』
그래서 모든 기관들은 다시 일을 시작하였고, 몸은 원기를 되찾아 활기찬 생활을 다시 할 수 있었습니다. 이 사회도 한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사람 각자가 해내는 일에 의해서 조화를 이루며 발전해 가는 것입니다.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4: 9- 11)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의 소식을 접하고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의심하거나 심지어 하나님의 다스림을 부정하는 말을 듣곤 합니다. 공격적이며 조롱 섞인 소리를 주변 사람들에게 들으며 우리 스스로도 혼란스러움을 벗어버리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다윗도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온갖 부정과 부패 그리고 불의한 자들의 삶에서 나타나는 못마땅한 일 때문에 잠잠히 있기가 무척이나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하십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그릇 행하는 것을 바라보며 분과 노를 다스리지 못하므로 스스로 악행을 저지르지 말라며 권고하십니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시37: 7-9)
세상의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다 헤아릴 수 없는 한계를 인정하고 잠잠히 기다리는 믿음의 자세를 갖출 것을 말씀하십니다. 의로운 자는 믿음으로 사는 것임을 성경을 통해 일러 주신 바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다리는 것이 실족하지 않는 길입니다. 우리의 기다림의 근거는 악을 행하는 자들은 반드시 끊어질 것이며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실질적인 승리자는 하나님의 바라보며 잠잠히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감사함으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수금으로 하나님께 찬양할지어다』(시147:7)
멕시코 어떤 마을에 온천과 냉천이 함께 솟아나는 신기한 곳이 있었습니다. 한쪽에서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온천이 솟고 그 옆에서는 얼음같이 차가운 냉천이 솟아올라 동네 여인들은 빨랫감을 가지고와 온천에서는 빨래를 삶고 냉천에서는 헹구어 집으로 가져가곤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관광객이 안내하던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여기 사람들은 찬물과 더운물을 마음대로 쓸 수 있어서 참 좋겠습니다. 이 마을 사람들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많겠죠』 그러자 안내원은 『천만에요. 이 마을 사람들은 불평이 더 많습니다. 더운물과 찬물이 나오는 것은 좋은데 빨래 비누까지 나오지 않는다고 불평이 많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더운물과 찬물이 솟아나는 샘물처럼 사람의 마음 역시 감사와 불평이 솟아나게 마련입니다. 중요한 것은 감사하면 감사하는 일이 많아지고 불평하면 불평할 일이 점점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돌아와 감사했던 사마리아 한사람처럼 감사하는 마음, 감사하는 삶으로 우리의 삶을 바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4:4)
파월 콜린은 뉴욕 빈민가 출신의 흑인이었지만, 1991년 걸프 전쟁의 영웅이며 다국적군 총사령관으로, 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 대통령 후보로 거론될 정도로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에 있었던 일입니다. 17세 되던 해 여름방학에 음료수 제조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첫째 날, 백인 학생에게는 기계 앞에서 콜라를 담는 일이, 흑인인 그에게는 걸레질이 맡겨졌습니다. 그래도 그는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훗날 그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그때 나는 최고의 청소부가 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열심히 걸레질을 했습니다.』
방학이 끝나자 감독관이 파월에게 말했습니다. 『자네, 일을 잘 하는군.』파월이 대답했습니다. 『오히려 제게 충분한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해 방학 때 아르바이트를 하러간 파월은 콜라를 채우는 기계 앞에 앉을 수 있었고, 그 다음 해에는 부감독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뉴욕 빈민가 출신의 한 흑인 소년이 오늘날의 빛나는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불평하지 않고 감사하며 최선을 다한 삶의 태도에 있었습니다. 지금 당신의 태도는 어떠합니까? 불평하지 말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나며』(빌2:14-15)
우리가 사는 삶의 자리가 어디든지 불평거리는 있기 마련입니다. 가정이든 교회이든 직장이든 불의와 불법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믿음의 식구들은 다른 이들을 탓하거나 흉볼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악행하는 일이 없도록 처신하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잠19:3)
미국 미주리 주에서 목회하는 윌 보웬 목사는 『인간이 겪는 모든 불행의 뿌리에는 불평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불평을 없앨 수 있다면 인간관계가 좋아질 뿐만 아니라 마음의 평안을 누리고 건강하게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불평하는 습관은 하루아침에 고쳐지지 않습니다. 그가 시무하는 한 작은 교회에서 시작된 『불평 없는 세상 만들기』 운동은 지금 세계 80개국 600만 명 이상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불평제로 운동』으로도 불리는 이 운동은 보라색 고무 밴드를 손목에 끼고 21일 동안 불평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지불식간에 불평하면 밴드를 다른 쪽 손목으로 옮기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이 과정을 거치면 불평하고 있는 자신을 인식하기가 수월하여 불평을 억제하거나 긍정적인 방법으로 표현하거나 침묵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마지막에는 의식하지 않고도 불평하지 않는 단계에 도달합니다. 올해는 불평(complain) 대신 칭찬(compliment)을, 불만 대신 감사하는 운동을 일으킵시다. 새로운 습관이 새로운 인생을 만듭니다.
찬송가 429장, <통> 489장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를 함께 부르겠습니다.
1.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약한 마음 낙심하게 될 때에
내려주신 주의 복을 세어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2. 세상 근심 걱정 너를 누르고 십자가를 등에 지고 나갈 때
주가 네게 주신 복을 세어라 두렴 없이 항상 찬송하리라
3. 세상권세 너의 앞길 막을 때 주만 믿고 낙심하지 말아라
천사들이 너를 보호하리니 염려 없이 앞만 보고 나가라
[후렴]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구약성경 가운데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 민수기입니다. 민수기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을 기록한 것인데 여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불평과 원망으로 얼룩져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목이 마르다고, 길이 나쁘다고, 고기가 먹고 싶다고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민수기 11장에 보면 다베라에서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줘서 먹게 할꼬?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4∼5절)이라 하며 불평과 원망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민 14:27)
그런데 문제는 불평과 원망의 속성은 점점 심해진다는 점입니다. 즉 불평은 또 다른 불평을 낳고 원망은 또 다른 원망을 낳습니다. 마침내 불평은 습관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불평의 내용을 살펴보면 문제가 커서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좁기 때문에 불평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불평은 비교에서 비롯됩니다. 비신자들의 형통은 비교하는 데서 오기도 하고 별로 믿음이 없는 다른 신자들이 잘사는 것을 보면서 불평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모든 것을 판단하는 재판장이 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세계적으로 이 불만 바이러스가 독감보다 더 강하게 역사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보면 불만 바이러스는 쉬지 않고 역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자기의 입장에서 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그 불평과 원망이 감사로 변합니다. 저도 지금까지 내가 원한 것을 거의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불평하고 원망했으나 지난 뒤 생각해보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이뤘고 더 많이 받은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따라서 불평과 원망은 근시안적인 시각에서 보고 하나님의 주권을 믿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불평과 원망의 병을 치유하려면 먼저 하나님의 주권을 전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다음은 내가 원하는 것을 감사의 조건을 삼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내게 가장 좋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팔복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이 베푸시는 축복의 기준은 우리와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낡고 좁은 자신의 집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청년은 마을에서 가장 존경받는 식자인 노인에게 찾아가 자신의 고충과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이 말을 들은 노인은 청년에게 수탉 한 마리를 사서 집안에 풀어놓으라고 충고했습니다. 노인의 방법을 듣고 청년은 시키는 대로 했지만 사방에 날리는 닭 깃털과 흩어져 있는 닭모이와 똥 때문에 집안은 전보다 더 좁고 더러워지고 냄새까지 났습니다. 다시 청년이 노인을 찾아가자 이번엔 염소 한 마리를 수탉과 함께 집안에서 키우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자 이젠 염소가 닭을 쫓아다니며 집은 더 엉망이 돼버렸습니다. 노인은 이제 암소까지 키우라고 해서 그렇게 했지만 청년의 집은 온통 아수라장이 돼버렸고 그 집안에서는 자기조차 어려운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잠조차 자지 못한 청년이 다시 노인에게 오자 노인은 집안의 동물들을 이제는 다 밖으로 끄집어내라고 시켰습니다. 노인이 시킨 대로 하자 청년의 집안은 깨끗해졌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그렇게 좁게만 느껴졌던 그 집이 한없이 넓게 느껴지는 것이 아닙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까지 하나님은 수많은 기적을 통해 이스라엘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그들을 인도하심을 확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셨고 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으며 반석을 쪼개어 물을 내셨고 그들의 죄악을 부단히 용서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범죄하였고 하나님을 배반하였습니다(시78:17). 광야에서 우상숭배하고, 음행하고 원망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습니다.(고전10: 5-11)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전 10:10)
『원망』이란 단어가 모세오경에만 무려 21번이나 기록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원망과 불평은 사실 절대적 빈곤이나 궁핍에서라기보다는 상대적 비교에 의한 박탈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나로 하여금 주어진 것에 감사하도록 더 나쁜 조건을 주시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것의 고마움을 경험케 하기 위함입니다. 건강을 잃어버린 사람이 더욱 건강의 소중함을 알게 되듯이 말입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듯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 적극적인 만족과 목표에 대한 대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내 삶에 원망이 움트지 않기를 기도합시다. 미리 감사합시다. 하박국 선지자처럼 우리도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합시다.(살전5:16- 18)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7, 18)
감사와 찬송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면 원망과 불평은 사탄 마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탄은 성도들로 하여금 그 입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주의 종에게 불평하게 만듭니다. 사탄은 온갖 방법을 다 써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게 만들려고 했습니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를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하면서 소 떼, 양 떼 모두 다 도적맞고 불타 죽고, 자녀 10남매가 대풍에 집이 무너지면서 다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래도 그 입으로 원망의 말이나 불평의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욥기 1장 21절에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기1: 22)고 했습니다. 마귀는 욥의 입에서 원망과 불평의 말이 나오게 하려고 온갖 고통과 불행을 갖다 주었지만 실패하고 도망갔습니다. 온몸에 악창이 나고 구더기가 버글버글해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지만 결코 그 입술로 범죄치 않았습니다. 결국 전보다 갑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불평이 자꾸 나올 때는 내가 기도가 부족하고 은혜가 떨어져서 마귀가 나를 시험하는구나 하고 빨리 회개하고 정상을 되찾아야 합니다.
* 기도: 의로우신 아버지 하나님,모든 상황을 감사하며 받아들이게 하소서. 원망과 불평과 불만을 내기 전에 주님의 순종을 먼저 기억하게 하소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을 다짐하며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바른 길을 가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크신 뜻을 깨닫지 못하고 어리석게도 원망했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앞으로는 하나님 앞에 무조건 순종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