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傳說로 再生한 裵湖 이야기
作故 가수 중 최초로 팬클럽 결성…배호路 등장
裵湖(배호·1942~1971)의 노래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 흐느적거리면서도 아름답고, 低音(저음)으로 내려갈수록 더욱 강한 떨림으로 가슴을 파고드는 독특한 음색과 창법으로 한국 대중가요의 한 章을 마련했던 배호의 노래가 중년의 팬들에 의해 「추억의 앨범」 속에서 걸어나와 「오늘의 가수」로 再등장하고 있다. 이 매혹적인 가수가 세상을 떠난 지 31년.
「돌아가는 삼각지」,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누가 울어」 등 그의 노래는 대중가요의 명곡으로 꺼지지 않는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배호 노래의 이런 생명력에 만족하지 않고 그의 삶과 노래를 거리로 끌어내 호흡을 불어넣은 것은 배호기념사업회(회장 金秀英)다. 2000년 11월 배호기념사업회의 노력으로 삼각지 로터리 부근 한강로 1가 뒷길이 「배호로(路)」로 명명되었다. 삼각지 교차로 녹지에 배호 노래비가 제막되었는가 하면 잊혀졌던 배호 가요제가 다시 막을 올리고, 지난 날 전속으로 음반을 냈던 지구레코드가 카세트와 CD로 그의 全集을 제작했다.
대중가요 가수의 노래비가 서고 그들의 이름을 딴 가요제가 주로 태어난 고장을 중심으로 개최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목포의 이난영, 진주의 남인수, 울산의 고복수 등이 그들이다. 여기에 배호가 끼어들었다. 배호는 광복 전 중국에서 태어나 한때 부산에서 살았고, 서울에서 활동하다 요절한 가수다. 서울 용산구 한강로의 삼각지 로터리에 노래비가 선 것은 그의 대표작인 「돌아가는 삼각지」 때문이었다.
특히 배호의 노래가 거리의 실존인물로 再탄생한 것은 생전에 배호와 아무 관계도 없었던, 그저 배호의 노래가 좋아 함께 모였던 중년의 팬들(배호기념사업회)에 의해 추진되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이 모임을 이끌어 온 金秀英(김수영·54)씨는 삼각지 로터리에서 가까운 한강로 2가에서 서양화, 판화를 판매하는 작은 가게 「열린 화랑」을 운영하는 서양화가였다. 회원 200여 명,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에서부터 공무원, 교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이 모였으나 특징은 40代 이상의 중년이라는 점. 대부분 대중가요에 귀기울이기 시작하던 10代 초반 때부터 당시 인기 절정이던 배호의 노래에 익숙해져 있던 연령층의 사람들이다. 회원 중 비교적 젊은 층에 속하는 崔贊祥(41)씨가 배호 노래의 팬이 된 사연도 어릴 때 들은 배호 노래의 그 깊은 울림이 세월이 갈수록 커지기 때문이다.
『경북 칠곡군 산골 마을에서 살았는데 8~11세 전후에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배호 노래를 들으면서 다른 가수들의 노래보다 더 진하게 여운이 남아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노래 속에 젖게 되었습니다.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테이프를 사서 듣게 되었는데 배호의 노래는 들을수록 멋과 맛이 솟아나더군요. 가식 없이 감성을 솔직하고 깨끗하게 표현하는 노래, 低音은 끌어 올려 주고, 중간음은 보석처럼 아름답고, 高音으로 올라가면 다른 가수들보다 몇 음 더 올라가 클라이막스를 만들어 주면서 더할나위 없는 美聲을 잃지 않는 창법, 음미할수록 빠져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배호의 노랩니다』
外家는 음악 집안
배호를 잘 모르는 세대는 물론이고 그가 활동하던 시절에 함께 살아온 사람들도 이 가수가 중년쯤 된 나이에 타계한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노래의 목소리만 들어서는 젊은 청년의 목소리라기보다 중후한 중년의 목소리를 떠올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배호는 29세에 세상을 떠났다(정확한 나이는 33세, 즉 1938년생으로 33세에 세상을 떠났다는 설도 있다). 카바레에서 드럼을 치면서 노래도 부르던 시절까지 다 합하면 그의 「노래 인생」은 14년이나 되지만 실제로 가수로서 이름을 알린 후 본격적인 활동을 한 시기는 1966년부터 타계한 1971년까지다. 이 기간 내내 그는 병마와 싸우면서 초인적인 의지로 노래를 부르다가 쓰러져 갔다. 그의 목숨을 앗아간 병마는 만성 신장염.
배호기념사업회의 부회장인 정영교씨가 배호 30주기 추모사업의 하나로 만든 「배호 略傳(약전)」에 의하면 배호는 평안북도 철산 출신이다. 부친 배국인은 東京大 수의학과를 나온 지식인이고 모친 김금순은 신의주 보성여고를 나왔다. 두 사람은 식민지 탄압을 벗어나 중국, 연해주, 만주 등을 떠돌다가 중국 산동성 제남市에서 배호를 낳았다. 배호의 본명은 裵萬金, 아명은 裵信雄이었다. 배호는 가수로 데뷔하면서 붙인 예명이다.
광복 후 중국에서 귀국한 배호 일가는 서울 창신동에 살다가 1·4 후퇴 때 부산으로 피란 가서 살았고 9·28 수복 때 다시 돌아왔으나 1955년 부친 배국인이 간경화로 타계하자 이모가 운영하는 부산의 고아원 모자원에서 1년 간 살았다. 이 때부터 배호는 가난과의 싸움을 시작했고, 가난에 이어 닥쳐온 병마와의 힘든 싸움에서 결국 쓰러지게 된다.
배호는 중학교 때부터 음악적인 소질을 드러냈다. 家系(가계)로 볼 때 배호의 외가는 음악집안이라 할 만하다. 둘째 외삼촌 김광옥은 일본 무사시노 음대를 졸업하고 대만의 교향악단을 지휘했고, 셋째 외삼촌 김광수는 일본 명치대 문예과를 졸업하고 KBS의 초대악단장을 역임했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가 그의 곡이다.
넷째 외삼촌 김광빈은 MBC 초대 악단장으로 「배신자」, 「두메산골」 등이 그의 曲이다. 이 중 넷째 외삼촌 김광빈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읜 조카 배신웅(배호)에게 家長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치고 음악인으로서의 자질을 키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배호는 이들 외삼촌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았다.
왼손잡이 드럼 연주자
배호의 학력은 부산 삼성중학교 2학년 1학기 중퇴가 전부다. 이후 서울 중구 회현동의 외삼촌 김광빈의 집에서 살게 된 배호는 셋째 외삼촌 김광수가 직접 운영하며 라틴음악을 주로 연주하던 카바레 「무학성」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현장의 「음악세계」를 만나게 된다.
무학성 카바레 「김광수 악단」의 드럼 연주자로부터 드럼을 배우기 시작한 배호는 특유의 재능을 발휘하여 단숨에 드럼 연주자로 발돋움했다.
이어 야간업소와 美8군 무대에서 드럼을 치면서 모친과 여동생을 부양하며 어려운 살림을 꾸려나갔다.
이때의 생활을 배호는 스스로 회고하기를 『8년여 간 거의 점심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직업 가수들의 無名(무명) 시절이 대부분 艱難辛苦(간난신고)의 세월이지만 『배호의 가난과 고생에 비하면 다른 사람들의 고생은 고생도 아니었다』(崔贊祥씨)고 할 정도다.
10代 후반 배호는 美 8군 무대에서 솜씨를 인정받아 자리를 잡았다. 왼손잡이에다 핸섬한 인상이 그의 드럼 솜씨를 더욱 빛내주었다. 8군 무대에서 드러머로 위치를 굳힌 배호는 1962년 서울 시내의 유명 카바레, 나이트클럽 등 밤무대에 본격 진출했다. 을지로 5가 천지 카바레의 「김광빈 7인조 악단」의 드럼 연주자로 합류한 배호는 연주 중간에 노래도 부르기 시작했다. 1층 천지 카바레에서는 드럼 연주자로 활약하면서 2층에 있는 천지 나이트클럽에서는 「김인배 악단」의 드럼 연주자로, 리드 가수로, 그리고 쇼 진행자로 1인3역을 맡았다.
22세이던 1964년 그는 마침내 12인조 풀 악단인 「배호와 그 악단」을 만들어 리더로 활약했다. 이 해 외삼촌 김광빈은 조카를 가요계에 데뷔시키기 위해 「두메산골」을 작곡하여 부르게 했다. 이 노래가 배호의 데뷔곡인 셈이다. 그러나 배호는 본격적인 가수의 길보다는 드럼 연주자로, 악단의 리더로 더 열심이었다. 검은 안경을 쓰고 가끔 스틱을 공중으로 던졌다가 잡으면서 열광적으로 두드리는 그의 드럼 연주는 밤무대의 볼거리였다.
배호는 별도로 음악 수업을 받은 적이 없다. 드럼 연주자로, 악단의 리더로 활약하면서 음악에 대한 감각을 자연스럽게 익혔고, 그것이 무르익으면서 천부의 목소리를 통해 쏟아져 나온 것이 그의 노래였다.
『이건 노래도 아니다』
1960년대는 대중가요, 특히 트로트의 전성시대였다. 트로트의 여왕 이미자의 시대이기도 하다. 외삼촌 김광빈은 배호를 본격적인 가수로 키우기로 작심하고 앞서 말한 「두메산골」을 작곡하여 배호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이 악보를 본 배호는 『이렇게 촌스러운 노래를 어떻게 부르란 말이에요?』 하고 불만을 터뜨렸다. 美8군 무대에서부터 경쾌한 외국 노래에 길들어온 젊은 청년에게 트로트는 확실히 「촌스러운」 노래였다.
배호의 이 데뷔곡은 배호 특유의 절규하듯 하는 창법으로 인하여 당시 대중음악계를 놀라게 했다. 그 놀라움은 부정적인 것이었다. 『이런 노래를 대중가요라 할 수 없다』고 퇴짜를 맞았다. 따라서 「귀신이 우는 듯한」 그의 노래는 방송을 타지 못했다. 어쩌다 라디오에 출연하면 PD들은 『제발 감정을 빼고 좀 무난한 창법으로 불러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고 한다.
1965년 배호는 처음으로 레코드사와 전속계약을 맺었다. 미아리에 있던 「뉴스타 레코드사」였다. 여기서 그는 전우 작사, 나규호 작곡의 「누가 울어」와 「안개 속으로 가버린 사랑」을 취입했다. 그러나 이 두 곡은 레코드사의 부도로 빛을 보지 못했고 뒷날 「돌아가는 삼각지」로 그가 스타덤에 오른 뒤에야 관심을 끌게 된다.
1966년 2월, 밤업소의 공연을 마치고 친구들과 돼지고기를 먹은 후 식중독을 일으킨 배호는 그것이 빌미가 되어 급성 신장염을 앓게 된다. 온몸이 붓고 미열과 복통을 수반하는 병이었다. 밤무대에 서면서 자연히 따르게 마련인 무절제한 생활, 영양부족, 술과 담배, 그리고 무엇보다 그를 망가뜨린 과로 등이 원인이었다.
청량리 부근의 단칸방에서 어머니, 누이동생과 함께 가난하게 살고 있던 이 젊은 家長은 힘겨운 싸움을 벌여나갔다. 뒷날 인구에 회자된 「배호의 노래」들은 그 대부분이 가난과 병마에 시달리며 부른 한 젊은이의 절규였다.
1966년 3월. 신진 작곡가 배상태씨는 「돌아가는 삼각지」를 작곡하여 남진, 남일해, 금호동 등 당시 인기 있던 몇몇 가수들에게 취입을 부탁하였으나 『촌스럽다』, 『바쁘다』는 등의 이유로 거절당했다. 마침 레코드를 통하여 「두메산골」, 「누가 울어」를 들어보고 이 곡을 부른 무명가수의 폐부를 찌르는 목소리에 감탄한 그는 곡을 들고 배호를 찾아갔다.
배호는 단칸방에 이불을 쓰고 누워 있었다. 완전한 환자였다. 환자는 『힘이 없어서 노래를 부르지 못하겠다』고 했고, 환자의 모친은 『아픈 사람에게 웬 노래냐』고 항의했다. 배상태씨는 기운이 없어 끝까지 노래를 한꺼번에 부르지도 못하는 배호를 부추기면서 「돌아가는 삼각지」를 취입시켰다.
「돌아가는 삼각지」의 대폭발
1967년 2월에 발매된 이 노래는 별 반응이 없었다. 그해 6월 대구에서 전파를 타기 시작한 뒤 부산과 광주 등 지방 도시에서 타오르기 시작하더니 삽시간에 전국을 휩쓰는 폭풍을 일으켰다.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에 견줄 만한 인기였다. 그해 KBS의 가요 베스트에서 단일곡으로 연속 20週나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돌아가는 삼각지」가 폭발하자 배호는 누워 있을 수가 없게 됐다. 레코드 홍보 겸, 지방 극장들의 요청에 따라 지방을 돌며 공연에 참가하느라 누울 시간도 없었다.
1968년에서 1969년까지의 2년 간 배호는 가수로서, 그리고 인생에 있어서도 절정을 맞았다. 수입도 넉넉했다. 아세아레코드에 전속되어 「누가 울어」 등을 연속 히트시켰다. 금테안경에 실크 해트로 한껏 멋을 부린 그의 모습은 여성 팬들의 우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돌아가는 삼각지」에 이어 나온 「안개 낀 장충단 공원」도 더 큰 인기를 몰았다. 「돌아가는 삼각지」가 20만 장, 「안개 낀 장충단 공원」이 50만 장 팔렸다. 배호의 전체 음반 판매량은 1968년 말까지 총 500만 장으로 추산될 정도였다.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누구를 찾아왔나/낙엽송 고목을 말없이 쓸어안고 울고만 있을까/지난 날 이 자리에 새긴 그 이름 뚜렷이 남은 이 글씨/다시 한번 어루만지며 떠나가는 장충단 공원/비탈길 산길을 따라 거닐던 산기슭에/수많은 사연에 가슴을 움켜쥐고 울고만 있을까/가버린 그 사람에 남긴 발자취/낙엽만 쌓여 있는데/외로움을 달래가면서 떠나가는 장충단 공원(안개 낀 장충단 공원·인성 작사·배상태 작곡)>
1969년 그는 다시 지구레코드사로 전속을 옮겼다.
약혼 뒤 요절
1969년 말 MBC 10대가수상, TBC의 방송가요대상 등을 수상하는 등 노래 쪽에서는 여전히 인기가 치솟고 있었으나 병세는 그의 삶을 나락으로 밀어내리고 있었다. 이듬해인 1970년에는 대구 아가씨와 약혼을 했다. 이 약혼녀는 그의 병수발을 하는 등 지성을 다하였으나 결국 결혼을 하지는 못하고 말았다.
1971년 10월20일 배호는 MBC 심야 음악프로 「별이 빛나는 밤에」에 출연하고 돌아오는 길에 비를 맞고 몸살이 생기면서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다. 의료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의식이 오락가락하던 배호는 배상태씨의 손을 잡고 『좀더 살고 싶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11월7일 집에서 최후를 보내기 위해 퇴원하여 미아리의 집으로 돌아오던 도중 앰뷸런스 안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배호는 생전에 230여 곡의 노래를 불렀다. 그 중 많은 곡들이 「가요의 古典」으로 남아 애창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노래를 듣는 것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들은 부르기를 좋아하기도 한다. 模唱(모창)도 많아 한동안은 「가짜 배호」의 음반과 테이프가 나돈 적도 있었다. 모창이 많은 것은 그만큼 특색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 특색 때문일까. 그는 死後에 평가가 자꾸 올라가는 이상한 현상을 보이고 있다. 그의 타계 후 10년 만인 1981년 MBC의 가요 60년사 특집 여론조사에서 배호는 가수 기여도에서 1위, 좋아하는 가수 1위로 꼽혔다.
1990년 MBC 라디오의 특집 여론조사에서는 좋은 목소리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고, 1998년 조선일보의 음악 전문가 여론조사에서 건국 이후 가수 50인 중 6위로 꼽혔다. 이어 1999년 月刊朝鮮의 같은 조사에서는 7위, 그리고 MBC의 서울시 거주 미혼 남녀 상대 여론조사에서도 타계 가수 중 1위를 차지했다.
그는 놀랍게도 악보를 읽을 줄 모르는 가수였다. 일생의 콤비였던 배상태씨는 『배호는 악보를 보고 즉석에서 노래를 잘 부르지는 못했다. 멜로디를 연주해 주면 잘 듣고 있다가 자기 것으로 소화해 냈다』고 했고, 작곡가 백영호씨도 『다른 가수들은 악보를 주면 소리 내어 불러보는데 배호는 묵묵히 들여다 보고만 있어 처음에는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했다. 그러나 악보를 읽을 줄 모르면서도 노래를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 내는 능력에 있어서는 어느 누구도 따르지 못할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死後 30년이 지난 지금도 배호는 살아 있다. 배호 30주기를 맞아 넉 장의 CD를 내놓은 지구레코드사의 부사장 林載雨(49)씨는 가수 死後에 음반을 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찾는 이가 적더라도 이런 음반은 낼 가치가 있다. 그 자체가 대중음악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역사의 연결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작고한 가수들의 작품을 새로 정리하여 발표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우리는 30년 전에 작고한 한 가수에게 많은 빚을 지고 살고 있는 셈이다.●
필자; 李 淸 자유기고가
< Digital Chosun 에서 퍼온 글임>
2002년 03월 목차 보기
동영상 http://www.youtube.com/watch?v=-9jISj0mC6U&feature=player_detailpage
% 청복산우회에도 배호를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많은 회원이 있고 적지않은 수준급 후계자(?)가 활약중이라 글자그대로 '불멸의 배호'가 영속하리라 믿음.
첫댓글 배호 팬으로서 이 기사파일을 십년간 보관해오다 이번에 처음 자유게시판에 올려 청복회원들과 나누어보니 감회가 깊다. 역시 조회수도 많은 걸 보니 모두 관심이 많아 기쁘다. 배호가 타계한 지가 벌써 40년이 되었네. 그는 갔어도 그의 주옥같은 노래는 영원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