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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젖이 부었나보다. 물을 삼키는 것도 힘들고 무엇보다 헛구역질이 자꾸 나온다. 길을 걷다가도 피를 토하듯 켁켁거리고 밥을 먹다가도 핏대를 세우며 인상을 찌푸린다. 주변 사람들 반응도 제각각인데, 친구는 웃으면서 곧 죽겠다 농을 치며 어머니는 병이라도 걸린 게 아니냐며 TV볼륨을 올린다. 지나치는 사람은 기괴한 소리에 놀라며 흘끗 쳐다보거나 유행성 전염병이라도 되는 듯 슬금 멀어진다. 난 침대에 누워서 목을 따라 명치 근처를 어루만져간다. 뭔가 손끝에 걸리기를 고대했는데 외형적으로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 하루종일 얼굴을 향해 켜놓은 선풍기 때문인가. 잠시 생각하다가 오늘 본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르고 -우연히 살인사건의 목격을 하고 그 살인자에게 쫓기는 내용의 영화였는데 쫓기는 사내가 아주 어두운 아파트 단지의 인편을 살인자를 피해 조용히 뛰어가다가 죽은 새끼고양이를 보고 그만 놀라 소리를 지르는 장면이다.- 죽은 새끼 고양이는 과연 누가 치울까 고민하다가 오늘 저녁에 운동하다가 앉은 의자에 물컹거리며 꿈틀대는 기묘한 애벌레를 떠올리고는 소스라치게 기분나빠한다. 그리고는 침이 넘기기 힘들어지자 다시 목젖에 대한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곧 기역자 모양으로 구부러져 잠이들었다.
목젖
'새끼 고양이가 죽었으면 치워야죠.'
그녀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는 따지듯 쳐다본다. 어깨 근처까지 내려오는 단발머리끝이 얼굴 쪽으로 말려들어가있다. 검은 머리의 붉은 애나멜 칼라의 머리띠가 유난히도 반짝인다. 난 몹시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고는 받아들이기 힘든 이 이상 상황에 대해서 잠시 생각 할 시간을 갖는다.
'안 들려요. 치우시라고요.'
나는 새끼고양이를 밟고 있었다. 고양이는 자는 듯 웃는 듯 기역자 모양으로 말린채 내 발밑에서 어둔 밤에도 눈에 띄는 흰색 발과 얼굴, 끝이 흰 꼬리를 내민채 죽어있다.
'제가 죽인게 아니에요'
그녀는 끝까지 참겠다는 듯 두손을 쥐고는 이를 악문채 조금씩 소리를 빼어낸다.
'저기 공중전화에서 전화 걸다가 다 봤어요. 정문으로 뛰어들어와서는 그 어리디 어린 고양이를 밟아버렸잖아요. 저 전화하고 있었지만 고양이가 죽는 소리같은 거 다 들을 수 있었어요. 아무리 집도 없고 버려진 도둑 고양이 새끼라지만, 당신 어떻게 5분동안 그러고 있을 수 있죠. 발에 껌 묻은 것처럼 비벼버릴 생각이라면 내가 더는 못 참겠어요. 어서 치우세요.'
나는 발을 천천히 떼어낸다. 겉으로 볼 때 상해의 흔적이라던가 피라던가. 그 고요한 얼굴을 보자면 이건 어디가 어떻게 잘못됐는 지도 모를 정도로 멀쩡하다. 서서히 들어올리는 데 온몸을 양 손 바닥에 늘어뜨린다.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한동안 그러고 있다가 그녀에게 당황한 표정을 짓으며 두 손을 내민다. 그녀는 한동안 쏘아보다가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절도가 있기 보다는 무슨 무용을 하는 듯 고상하고 유연한 동작이다. 철제 쓰레기통이었다.
'저기다 버려도 될까요?'
나는 우물 쭈물 생각없이 말하는데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턱으로 잡아당긴다.
'동물의 사체는 쓰레기 봉투에 넣어서 폐쓰레기처럼 처리하면 돼요. 그게 나라에서 정한 법이고 마땅히 이 조그만 땅 한 구석에 사람 대우받으면서 묻힐 동물 이 나라에 손에 꼽힐 거에요. 지금은 봉투도 없고 하니까 이 길 지나가는 나이든 노인 놀려서 목숨 앗아갈 생각 없다면 저기다 넣어요. 거기까지가 당신이 할 수 있는 역할인 것 같으니까.'
그녀는 시선을 피하고는 짧고 검은 주머니 없는 운동용 팬츠에 손을 넣으려고 계속 문질러댄다. 샌들을 신은 그녀의 다리가 유난히 길고 탄력있었다. 어디 육상 선수라도 되는 듯이 군살없이 단단해보이는 몸이다. 나는 고양이 사체를 한쪽 손으로 바꿔 들고는 철제 쓰레기 통의 뚜껑을 열어 제꼈다. 몇몇 담배꽁추와 담뱃재, 켄등 여러가지가 뒤섞인채 퀘퀘하고 시큼한 냄새가 났다. 나는 천천히 사체를 그 위에 내리고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뚜껑을 서서히 닫는다.
쓰레기통 뚜껑을 닫아두니까 처음부터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이 담담하다. 나는 허벅지를 붙인채 양손을 바지 주머니 옆으로 밀착시킨다. 딱딱하고 굳어 버린 통나무가 되어버린다.
'이제 어떻게 하죠?'
난 유치생이 선생님이 아끼던 화분을 깨드린 채 어쩔 줄 몰라 하듯이 명령을 내려주길 바란다.
바닥을 치우고 왁스칠을 하라고 한다면 무릎이 헤어질 때까지 바닥에 광을 낼 작정이다.
그녀는 할 수 있는 한 고개를 치켜들고는 다시 내려 힘껏 흘겨본다. 그러고는 쪼그려 앉아서는 온 몸에 그녀의 얼굴을 묻고있다.
'우는 거에요?'
'아니요. 몸이 아파서요. 몸에서 열이 나고 기분이 몹시 날카로워져서요. '
그녀를 건너서 서있는 상아색 전화부스 안에는 전화기가 길게 늘어져 미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상아색 부스에 초점을 맞추다 이내 일어선 그녀의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소소한 바람에 찜통같은 아열대가 계속 되는 밤이었다. 어떤 영문인지도 알지 못한채 서서는 생각할 시간을 갖는다. 분명 이것은 꿈이다. 영화내에 이야기가 못내 마땅치 않았는 듯 잠에 투영되어서 다시금 놀라게 하고 기묘한 창작을 시도하게끔 이끌어내고 있다. 발을 몇 번 굴러본다. 이것은 땅의 느낌, 호흡을 해본다. 그것은 근처 치킨집 냄새가 뒤섞여 있는 공기의 향이다. 그렇다. 잊어버린 것이 있었는데 분명 누군가에 쫓겨야한다. 그가 나를 죽이기 전에 보호해야한다. 길을 따라 걸었었는데 인적이 드물어졌고 키가 작아 보폭도 작은 나를 그가 쫓아온다. 난 모든 에너지를 사용해 혹시 운동을 하거나 수위실에 있을 보안요원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아파트 단지 안에 들어선다. 가로수 등은 빛이 미미하고 도로폭은 너무 커서 눈에 쉽게 뛸 것 같았다. 인편을 건너다 그만 죽은 고양이를 발견한다. 그리고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잠을 자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고양이 새끼, 죽은 게 아니라 잠을 자고 있었던 거죠. 어미 고양이가 먹이를 찾으러 갔는 지 버리고 도망갔는 지 새끼가 그늘진 어느 지하 시멘트바닥에서 몸을 말고 기다리다가 너무 춥고 어두워서 무서워졌던 거에요. 그래서 꼬리부터 머리까지 한번 몸을 털고는 조그맣고 흰 발로 고르지 않은 시멘트를 올라 어미를 찾죠. 처음에는 아파트 내 근처 보도를 멤돌다가 이제는 차가다니는 도로를 건너기로 하죠. 그러다가 거대한 차가 그를 넘어요. 작은 체구라서 상처 없이 지나쳤지만 그만 오줌을 눠버렸어요. 그리고는 천천히 걸어서는 갸르릉 소리를 내다, 날이 어두워졌고 탈진에 배고픔에 도보옆 수풀 그림자에 기대 잠들어버린거죠. 세상에서 가장 평온하고 달콤한 잠이었겠죠. 그러다 제가 등장하고 저는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었고 당신과 마주하게 된거에요.'
그녀는 전화부스 앞에서 한동안 듣고만 있더니 조용히 말을 건넨다.
'어디 가고 있었어요? 같이 도망쳐요.'
나는 그녀의 손을 이끌고 아파트 단지를 나와 근처에 있는 공원으로 피신했다. 성큼 걷는 걸음에도 그녀는 거부하지 않았고 손을 잡았는데도 반응이 없다. 그저 발걸음에 맞춰 속도를 내거나 쉬거나 반응하는데로 그저 따라갈 뿐이다.
나는 그녀의 명령을 쫓아 손을 잡았고 보이기에는 이끌고 실제로는 끌려다녔다.
'그는 내게 손톱을 보여줬어요. 손톱에는 봉숭아가 물들어져 있었어요. 그 다음 부터는 질투가 나서는 눈을 감아버렸죠. 그럴 수는 없는 거였어요. 몸이 아파서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목구멍이 붇고 고열이 나고 겨드랑이 임파선에 통증이 느껴졌어요. 설사에 두통에 구정물에 절은 걸레 같았단 말이에요. 그런데 내가 어떻게 욕심을 부려요.'
아무도 없어 뵈는 공원 벤치에서 그녀가 말하는 한마디 마디가 마치 연설대회를 오랫동안 준비한 연사의 어줍잖은 연기처럼 익숙하고 초라하기 짝이없었다. 곧 비운의 여주인공이 되어서 독약이라도 마실 테세다.
'입으로도 하고 싶었고 몸으로도 하고 싶었고 온 몸에 구멍이라면 모두 열어서 받아주고 싶었는데 입안에는 헐은 자국이 온 몸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악취가 고약하게 풍기고 있어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까닥 거리는 성기에 손을 올려두는 것 정도 였어요. 그래서 달래고 어루어서 원한다면 원나잇도 좋고 업소의 누구라도 찾아 풀어라 권고도 하고 입안의 허옇게 파인 상처를 보여주기도 비질비질 흘리는 땀도 문질러보고 치마를 펄럭거려서 냄새라도 맡게 했건만 그는 아무래도 괜찮다고 하는 거에요. 바보같이. 죽고 싶냐고 아랫배를 걷어차고 탁상에 있는 시계를 집어던지고 손등으로 따귀도 때렸어요. 벌거진 얼굴에도 아랑곳않고 묵묵히 고개만 숙이고 있다가는 이내 초라하게 낯선 몸에 옷을 걸치고는 방을 나가버렸죠. 그때 아마도 처음 뒷모습을 봤던 것 같아요.'
벤치에 목을 기대고 눈을 깜빡이다, 서서히 목소리가 옅어진다. 나는 일어나 주위를 천천히 걸으며 각도에 달라지는 그녀의 이목구비를 한장면 장면 머리속에 새긴다. 데칼코마니도 좋고 만화경도 좋고. 달 빛 조차 없어 보이지 않는 얼굴 대신 그녀의 숨소리도 이국적이었다. 나는 그녀의 이어지는 이야기를 중간에서 끊고 잠시 '써클스퀘어'에 대한 얘기를 끼어넣는다. 골자는 자주 가던 카페 앞 광장에서 이상한 광경을 목격한 것에 대한 간단한 이야기다. 평상시 처럼 식사 후 저녁 늦게 둥근 광장 앞에 위치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광장에는 늘 많은 사람들이 붐비는데 젊은 연인도 있었고 운동복 차림의 사람들, 중년 아저씨의 이상한 체조도 볼 수 있는 곳이다. 늬엿하게 지는 햇빛이 비치는 구석자리, 쇼윈도에서 -아이들이 끌고 다니는 다리가 짧은 강아지의 숨찬 소리도 들리고 모든 것을 관찰 할 수 있는 그 곳에서- 나는 스푼을 돌려 커피의 무늬를 그려내고 지웠다가 다시 뭉쳐내고 있었다.
'그래서요. 늘 그 귀퉁이 광장이 잘보이는 자리에 앉아서는 책도 읽고 글도 쓰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 날 따라 해가 늬였 지기 시작하자. 광장 앞에 지나는 사람들이 모두 멈춰서서는 하늘을 보는 거에요. 길게 꼬리를 내린 화사한 오로라를 보기라도 하는 듯한 표정이었어요. 어쩌면 지고하게도 우연의 일치로 일어난 일식 때문일지도 모르겠어요. 해가지고 빛이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 조금의 미동도 없이 멈춰있었어요. 물론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을 거에요. 지금생각해보니까. 그 사람들,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아이와, 낡은 운동복 차림의 중년 사내와, 친구 사이로 보이는 고등학생들, 치맛자락을 줄인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 지팡이에 의존하던 백발의 노인도 항상 제 시에 제 위치에서 움직였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뭔가를 위해서 일종의 군무를 짜고 있었던 것 같아요. 조금씩 잘못된 방향을 고쳐가면서 서있는 위치라던가 동작을 조절하고 동선을 짜서 서로 부딪치는 일 없이 안무를 만드는 거죠. 누구도 앞서거나 돋보여서도 안되고 오늘도 어제와 같고 또 내일과도 같이 평범함을 가정하려고 하는 것 처럼 말이에요. 해가 가려지자 그들은 성급히 가방에서 들고 있던 봉지에서 종이박스에서 붉은색 하이힐을 꺼내고는 주섬주섬 급하게 신발을 갈아신는 겁니다. 그러다가 급한 마음에 구두를 떨구기도 하고 어떤 이는 신고 있는 신발이 잘 벗겨지지 않는 지 주저 앉아서 양손으로 벗으려고도 하구요. 그들은 이 시간이 지나면 모두 죽어버릴 것 처럼 붉은색 애나멜 구두를 신고는 똑 바로 등을 펴고 곧추서서는 뒷굽을 톡톡 부딪쳐요. 나는 그 기괴한 광경을 보고는 마음이 두근 거렸어요. 놀랍고 신기하고 무슨이유 때문인지는 알지 못하겠지만 그저 기뻤어요. 갑자기 탁자가 흔들립니다. 커피잔이 덜그럭 거리고 바닥이 조각이 나는 듯 거대하고 시끄러운 소리에 지진이라도 오는 줄 알았어요. 귀를 막고 눈을 감고 바닥에 내려서는 쪼그려 앉았죠. 곧이어 커피잔이 진동때문에 쏟아졌어요. '쿵쿵'하는 소리가 들리고 긴 파장이 가게전체를 휩쓸고 조용해졌을 때 쯤 눈을 떠봤더니 탁자 모서리에 고인 커피가 방울져 떨어지고 있었죠. 고였다 떨어지는 그 소리가 지구를 다시 현실로 되돌려놓았어요. 천천히 일어나 앉아서는 엎어진 커피잔을 세우고 넵킨으로 닦고 젖은 책장을 툭툭 털었죠. 그리고 쇼윈도에 펼쳐진 광장을 보고는 놀란 거죠. 모든 사람들이 사라지고 없었거든요. 오직 붉은 색 사이즈가 다른 구두만이 이곳 저곳에 널부러져있었어요. 아, 그때네요. 목 안쪽에서부터 기침이 오르기 시작했어요. 그 때부터.'
그녀는 잠들었는지 벤치에 축늘어졌다. 어느 정도까지 듣고 있었는 지 물론 중요하지 않다. 단지 그녀의 발끝이 처마 밑 풍종처럼 미미하게 까닥 까닥 움직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오랫동안 울었는 지 눈덩이가 심하게 부어있었다. 늘어진 고양이 탓일지 공중에 내려있던 수화기 탓인지 그것까지 알길은 없다. 나는 이렇게 벤치 주위를 거닐다 하늘도 보고 발밑의 조그만 돌을 툭 차버리기도 한다. 달이 하늘 가운데 걸렸다.
그녀늘 얼굴을 비비고는 크게 기지게를 편다. 주머니 없는 운동복 팬츠에 주머니를 찾는 듯 몇 번 움직이더니 이내 고르게 자른 앞머리를 쓰다듬는다. 얼마나 잠들었는 지를 물어보고는 대답도 듣기 전에 하품을 늘어지게 한다. 거대한 진공청소기가 되어서는 세상 모든 산소를 빨아들이겠다는 심사이다. 발밑을 바라보며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볼을 툭툭 친다. 목이마르다고 한다. 탄산 없는 음료수를 사다달라고 하더니 이내 가는 길을 뒤 따른다.
'근데 쫓기고 있었잖아요. 미친 사람처럼 달려서는요. 제가 있던 부스 앞에서 죽은 고무나무처럼 메말라서는 굳어있었어요. 도와달라고도 않았고 소리도 없고 어느 옷 매장에 쇼윈도에 진열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 없이 부자연스러웠어요. 다음 동작과 사건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불에 탔는지 잃어버렸는 지 지워져 버린 테잎의 끝부분에서 고장난 비디오데스크 때문에 감기 조차 되지 않고 멈춰져서는 잔상만 남아있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테잎을 빼고 데스크 안의 엉키고 씹힌 필름을 자그맣고 긴 새끼손가락을 이용해 뽑아낸 거에요. 모른척 감아다 가게에 되돌려주려했는데 그 정신 없는 와중에서도 당신이 눈에 들어 왔어요. 미스테리하고 기괴한 동작과 누군가를 두려워하고 쫓기는 그 모습에 마음이 갔어요.'
그녀는 이온음료수를 조심스레 입에 머물고는 발끝을 비벼댔다. 나는 이상한 장소에서 이상한 사람을 만나고 고양이를 죽이고 도망쳐서는 벌레가 잔뜩 꼬여있는 진뜩한 액체가 묻어있는 자판기 앞에서 발끝을 꼼지락대는 그녀에게 아무런 관심없이 말을 건넨다.
'누구였어요. 전화?
그녀가 내 눈을 바라봤는데 다시금 잠이라도 잘 태세로 눈을 감고는 목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운동을 한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술을 뗀다.
'그 사람이요. 그 뒷모습을 내게 보인 사람이요. 그거 알아요? 뒤에서 보면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어요. 어떤 생각하는 지 목소리는 어떤 지 하다 못해 저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그것도 몰라요. 얼마나 내가 관찰력이없었는 지 그렇게 낯설고 생소한 모습. 잘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도 아니었어요. 그렇게 나가고 나서,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었거든요. 저는 지하철을 타고 있었어요. 2호선을 타고 잠실쪽으로 가고 있었는데요. 서있기가 너무 힘들고 지치고 지루한 거에요. 그래서 칸을 건너서 이동했죠. 어떤 칸에는 가운데 통로까지 사람들이 꽉차 있었었고 어떤 칸에는 빈자리도 있었는데 거리는 한참남았고 앉아가면 편할 만도 한데 왠지 지나치고 싶은 거에요. 또 칸을 건너갔죠. 그러다 그를 본거에요. 그 사람의 뒷모습이요.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어요. 내 뇌 어느 부분에 새겨져서는 순식간에 알아맞춰버렸어요.'
그녀는 기쁜 나머지 그에게 다가갔고 반갑게 웃는 그의 얼굴을 보고는 이전의 감정이 살아나서는 행복해졌다고 했다. 이제는 원할 때 언제라도 섹스해줄 수 있고 아프더라도 지난 번 같이 거절하지 않겠다고 얘기하려했었다. 원한다면 노인석에 앉아서 이어폰을 꼽고는 음악을 듣는 불량학생이라도 쫓아 보내버리고 이 자리에서라도 해줄 수 있다고 얘기할 참이었다. 괴성도 지르고 딱딱한 유두를 마음 껏 탐해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는 웃으면서요. 잘 지내냐고 물어봤어요. 그리고는 특유의 동작으로 옆머리를 긁적이면서 그래도 그 때 그렇게 갔으면 안됐었는데 라고 멋쩍은 표정을 짓는 거에요. 그리고 저는 그의 손톱을 보았죠.'
봉숭아네.
응. 여자친구가 해줬어. 자고 있었는데 일어나봤더니 동동 매여있더라구. 이 나이에 하는 게 창피해서 풀었는데 이미 물들은 것을 어째.
'이쁘네.'
그리고 삼일이 지난 뒤에 그녀는 참을 수 없이 슬퍼졌고 다시 몸이 아프고 불면증에, 목구멍이 붇고 고열과 겨드랑이 임파선에서 통증을 느꼈고 설사에 두통에 악취에 시달렸다고한다. 그리고는 자신의 핸드폰을 받지 않을 까 두려워, 공중전화로 그에게 연락을 하고 있었고 그 다음에 나를 만난 것이다. 그녀는 남은 음료수를 고개를 들어 마시고는 다시 발끝을 비벼댄다.
'아' 그녀가 놀란듯 조용히 외마디를 지르고는 무엇을 발견한듯 급박하게 말을 건넨다.
'누군가 와요. 저쪽에서 사람 그림자하고.. 많아요. 봤어요. 도망가세요. 제가 여기 있을 테니까 알죠. 공중 화장실 거기 마지막칸에 숨어있어요. 제가 이쪽에서 주의를 끌테니까 문닫고 숨으세요. 어서 가요 어서.'
잠시 멈칫하다 그 불쾌하고 긴장된 기분을 떨쳐버리려는 듯 질주했다. 간간히 가로수가 있어서 위치를 구분할 수 있었지만 밤이고 사람없는 시간 대의 공원은 한산하다 못해 음습하기 까지 했다. 우스광스러운 모습으로 가쁜 숨을 헐떡이며 망설임없이 화장실에 들어갔다. 마지막 칸에 들어가서는 문을 잠근 채 다리를 올리고 무릎을 모아 앉았다.지-소리를 내는 형광등이 유난히도 차가운 분위기를 형성한다. 밖의 동향도 소리도 형광등 소리에 묻혀버린 것 같아 광박적으로 거슬린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을 까, 답답해졌다. 조그만 공간에서 산소가 바닥나는 상상도 하고 이 넗은 공원에 굳이 화장실에 들어와했을 까 하는 의문과 낯선 사람의 말을 너무 믿고 따른 건 아닌 가하는 의심도 같이 들었다.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생생하고 현실감있고 정확했다. 아니라고 하기에는 사건, 사건이 비현실적이다. 나는 쪼그려 앉은 왼쪽 다리에 피곤함을 느끼고는 접었다 폈다 한다. 슬쩍 일어나서 밖을 살필생각도 해본다. 그러나 일어난 순간 쫓는 자와 마주하게 된다면 더 피할 곳도 없어진다. 우선은 숨는 게 일이다. 우선은 안전을 생각해서 몸을 사려야한다. 저린 다리쯤은 얼마든지 괜찮다. 답답한 것 쯤 잠시라면 참아볼만 하다.
얼마나 지났는 지 모르겠다. 시계도 핸드폰도 없다. 어쩌면 십분 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쩌면 몇 시간이 지났는 지도 모르겠다. 규칙적인 형광등 소리와 가끔 들리는 벌레의 날갯소리 외에는 어떤 소리도 없다. 인기척도 없고 남극대륙에 버려진 기분이 들었다. 평생 말해본 적 없는 사람 같기도 하고. 내가 살아있는 건지 죽어있는 건지 확인하려고 이곳 저곳을 만져본다. 하루종일 아무것도 안 먹은 사람처럼 배가 고프고 목이탄다. 입이 마르고 신경이 곤두선다. 어디가 아픈 것 같기도 하다 사타구니가 간지러운 것 같기도 하고 등 척추 어느 부위에 알 수 없는 여드름이 난 것 같기도 하다. 손이 붇고 가슴이 아프다. 목젖이 부었나보다. 곧 기침이 나오려고 한다. 폐속에 찬 더러운 공기를 빼내야 할 것만 같다. 참아야하는데 손톱으로 이곳저곳을 긁는다. 머리를 긁고 목 뒤를 긁고 가슴에 허리에 허벅지에 긁적긁적댄다.
그 순간 형광등이 나가버렸다. 인기척이다. 누군가 들어선다. 발소리도 바지가랑이가 스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분명 누군가 있다. 누군가 불을 끄고는 조용히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 오른쪽부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하나씩 기괴한 소리를 내면서 천천히 열리고있다. 옆칸의 문소리가 들린다. 곧 내 차례이다.
'왜 여자 화장실에 있어요?'
그녀였다.
'아, 문 열지 마세요. 왜 여자 화장실에 숨은 거에요?'
난 여자니까. 여자 화장실에 숨었다. 도대체 내가 누구라고 생각한 건가.
'여자니까요. 하나 물어보고 싶은 거 있어요. 전화. 그 공중 전화 돈 안들어 있었어요. 돈도 안넣고 어떻게 전화를 하나요?'
그리고 그녀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기뻐서 웃는 것도 비웃는 것도 아닌 기묘한 소리다.
'그래서요.'
'거짓말 한 거에요?'
'거짓말 했다면 어떻하실 건데요?'
그녀는 될 수 있는 한 이 세상에 없는 것 같은 낮고 감정없는 목소리를 만들어낸다.
'..왜 그런 거에요?'
'뭐가요. 당신이 고양이를 죽였으니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거죠.'
'난 안죽였어요. 난 아니에요. 정신 차려보니까 거기에 있었던 거에요. 그러니까 그 날 저녁에 영화를 봤는데. 그 때문에.....'
'이유가 어쨌든 죽인 건 죽인 거에요.' 그녀는 단어 하나 하나를 강조하듯 이야기한다.
'공중전화 부스에서 도대체 뭐 하고 있었던 거에요. 당신 이상해요 당신이..'
대답도 없고 고요하기만하다. 그리고는 화장실문 넘어에서 물이 쏟아진다. 어딘가에서 호수를 끌어와 물을 뿌리는 모양이다. 머리가 젖고 바지가 몸에 붙어버렸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물먹은 바지가 바스락 바스락 거린다. 그리고 오늘 아침의 일을 기억해 낸다. 같은 어둠과 쫓기고 있는 심정과 정적까지 똑같은 상황이다. 단지 다른 점이라면 아침 해를 가리기 위해 커다란 창에 묵직한 검은 커텐을 친 것과 꽤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었다는 것 정도, 그 외는 축축한 바지의 느낌까지 똑같다.
'목이 아프죠?' 그가 연극조로 이야기했다. 뜸을 들이고 강요하는 듯한 어감에 단어는 하나부터 끝까지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네. 아파요.'
'왜요?. 얘기해보세요.' 이번에는 타이르듯이.
'..목젖을 건드렸거든요.'
'목젖.? 그는 알면서도 물어보기를 계속하고 같은 답을 구체적으로 반복하기를 바란다.
'네. 목젖. 토했어요. 그 아랫배에 참지 못하고 토해버렸어요. 무서워서 시키는 데로 잘 할려고 했는데 목젖을 건드니까 토악질이 나와버렸어요. 눈물이 나고 숨도 막혔어요. 어려서 몰랐어요. 아무것도 몰라서 아무리 하려고 해도 안되는 거에요. 목이... 그래서 아파요. 여기 이부분이 여기가.'
늘 같은 결론의 이야기다.
불이 켜지고 사람들이 박수를 친다. 쪼그려 앉아있던 자리에 흔건하게 땀으로 젖어있다. 어쩌면 오줌이라도 지렸는 지 모르겠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칭찬을 하며 물을 갖다주었다.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일은 새로 태어나는 일만큼 힘들다고 한다. 한 발을 내딛었으니 곧 다른 발을 내딛을 수 있을 것이고 종국에는 걷거나 뛰는 일도 가능할 것이라고 한다. 폐쇄, 겪리에서 자신의 겪은 일을 토로하고 남의 도움을 받는 것 또한 치료 되고 있는 과정이라고 했다. 흥건히 젖은 몸을 수건으로 닦고 밖을 나섰다. 비가 올듯 잔뜩 찌푸린 날씨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극장에서 영화를 보았다. 우연히 살인사건의 목격을 하고 그 살인자에게 쫓기는 내용의 영화였다. 볼만한 장면도 없을 뿐더러 배우들의 연기도 형편없고 연출도 조잡하기 짝이 없었다. 집에서 선풍기를 틀고 읽다만 소설책을 꺼내든다.
목젖이 부었나보다. 물을 삼키는 것도 힘들고 무엇보다 헛구역질이 자꾸 나온다. 난 침대에 누워서 목을 따라 명치 근처를 어루만져간다. 뭔가 손끝에 걸리기를 고대했는데 외형적으로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 하루종일 얼굴을 향해 켜놓은 선풍기 때문인가. 잠시 생각하다가 오늘 본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쫓기는 사내가 아주 어두운 아파트 단지의 인편을 살인자를 피해 조용히 뛰어가다가 죽은 새끼고양이를 보고 그만 놀라 소리를 지르는 씬이다. 죽은 새끼 고양이는 과연 누가 치울까 고민하다가 침이 넘기기 힘들어지자 다시 목젖에 대한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곧 기역자 모양으로 구부러져 잠이들었다.
'전화번호를 몰랐어요. 그렇게 오랫동안 알고 지냈었는데 핸드폰에 저장된 번호를 지우니까. 번호가 기억이 나질 않았어요. 그래도 통화 하고 싶어서요. 수화기들고 번호 모르니까. 바지만 문질러대고 있었던 거에요. 모르겠어요. 어떻게 해야 통화할 수 있을 까요. 그저 목소리만 들으면 되는데... 그런데.'
어디서 갸르릉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난 흠뻑젖은 몸으로 조용히 화장실 문을 열고 그녀의 손을 잡는다. 나는 그녀의 눈을 보고 그녀는 울어서 벌개진 눈으로 나를 본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을 마주지으며 소리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인다. 조심스레 화장실을 벗어나 공원으로 나왔다. 공기가 아주 시원하다. 달이 하늘에 떴다. 곳곳에 가로등이 깨져 어두운 구석까지 환하게 밝다. 갸르릉 갸르릉 소리가 들린다. 숨을 죽이고 소리를 따라간다. 갸르릉 갸르릉
첫댓글 아주 재미있군요. 정말 재미있어요. 잘 읽었습니다. (__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