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읍성(淸道 邑城)과 향교(鄕校)
2023. 4. 9.
청도 향교(淸道 鄕校)
향교는 유학을 가르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나라에서 지은 지방 교육기관이다. 향교에서는 과거 시험을 위해 시나 문장을 짓는 법과 유교의 경전 및 역사를 가르쳤다. 또한 중국과 우리나라의 이름난 학자의 유패를 모시고 제사를 올렸다. 청도 행교의 건립 연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조선 선조 원년(1568)에 군수 이의경이 고평리에 세웠다고 전한다. 그 후 여러 차례 자리를 옮겨 지었다가. 영조 10년(1734) 군수 정흠선이 현재의 자리인 교촌리에 지었다. 건물의 구성은 대성전, 동, 서무, 내산문 등 제사를 지내는 공간과. 명륜당, 동, 서재 사락루 등 학문을 가르치는 공간이 구분이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전학후묘로 건물을 재치하는 다른 지역의 향교와는 달리 제사 공간과 학문 공간을 좌우로 배치하는 좌묘우학의 구성을 보여 준다.
청도 석빙고(淸道 石氷庫)
보물 제323호
청도 석빙고는 겨울에 인근의 하천에서 가져온 얼음을 봄. 여름까지 사용 할 수 있게 보관하던 창고로 조선 숙종 39년(1713)에 만들어졌다. 석빙고는 동서로 긴 직사각형 구조로 되어 있으며, 서쪽에 문이 있다. 지면에서 1.9m 깊이에 얼음을 고관하는 빙실(氷室)이 있는데, 길이14.85m, 너비 4.76m이며, 높이는 가장 높은 곳이 4.22m이다. 계단을 이용해 석빙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원래 석빙ㄱ의 천장을 덮었던 봉분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아 밖에서도 석빙고 안이 들여다보인다. 천장을 지지했던 아치형 구조물, 바닥, 벽면은 아직까지 남아 있다, 바닥은 동쪽으로 6도 정도 기울어졌으며, 바닥 가운데 배수로를 만들어 물이 석빙고 밖 개울로 빠지도록 했다. 석빙고 입구에는 비석이 있다. 이 비석에는 박상고(朴尙古: 1654~1718) 등이 석빙고를 만들었다는 내용과 숙종 39년(1713) 2월 11일에 공사를 시작해 5월 5일에 마치고 5월 6일에 석빙고를 세웠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또한 삭빙고를 짓는데 5,451명이 하루씩 동원되었으며, 정철 1,438근과 회 384석을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청도 석빙고는 현재 남아 있는 전국의 석빙고 6기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으며, 조성 연대와 책임자, 조성 물자 등을 정확하게 알 수 있어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청도 읍성(淸道 邑城)
경상북도 기념물 제 103호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일원
읍성은 지방관아가 소재한 고을의 방어를 목적으로 축성된 성곽이다. 청도읍성이 처음 축성된 시기는 명확히 알 수 없어나, 고려시대부터 있었다고 전해지며, 현재의 규모는 조선시대 선조 년간에 이루어진 것이다. 선조 때 왜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동래에서 서울로 향하는 주요 도로변에 성을 수축하였는데 청도군수 이은휘(李殷輝)가 선조 23년(1590) 시작하여 2년 후 완공하였다. 둘레가 1,570보(약 1.88㎞), 높이 5자 5촌(약 1,8n 정도)이며 동문, 서문, 북문이 있었다. 임진왜란과 여러번의 화재로 소실되기도 하였지만 수 차례 개축하여 음성을 유지하여 왔고, 고종 7년(1870) 남문을 건립히야 4문을 찾추게 되었다. 일제감점기를 거치면서 도시화로 도로개설로 문루는 철거되고 성벽 일부는 훼손되었으나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5년 경상북도 기념물 103로로 지정되었다. 청도읍성은 성의 기저부가 전역에 걸쳐 남아 있고, 각종 지리지와 고지도에 자세한 기록이 있어 발굴조사와 고문헌 고증을 거쳐 북문(공복루)을 중심으로 성벽과 봉성 등 성곽을 복원해 나가고 있다.
청도 동헌(淸道 東軒)
동헌은 조선 시대 고을 수령잉 행정 실무를 보던 건물로 수령이 지내는 관사의 동쪽에 있어 동헌이라 불렀다. 상량문(上樑文: 집을 새로 짓거나 고친 내력, 까닭, 공역한 날짜 및 시간 등을 적은 글)에 따르면 청도 동헌 건물은 조선 영조 13년(1737)에 지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동헌만 화양 초등학교 운동장에 남아 교실로 사용하다가 1955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 지었다. 이후 2000년대에 사진, 구술 등 고증 자료를 통해 앞면 7칸, 옆면 2칸, 뒤에 1칸이 달린 T자형 건물로 복원하였다. 대부분의 동헌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지 않다는 점에서 청도동헌은 조선시대 관아 건축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