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따라 생각나는 것, 부산탑과 두보의 시 한수
서면로타리에 섰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이곳이 낯설었다. 마천루 인공벽으로 황령산과 백양산의 모습이 사라져 버렸고, 가슴속엔 아직도 하얀 모습의 부산탑이 자리를 잡고있기 때문이다.
서면로타리 부산탑은 1963년 1월 부산직할시 승격기념으로 그해 12월에 제막식을 가졌고, 1981년 9월 지하철 1호선 공사착공으로 인하여 철거되었다고 한다.
어릴적 보았던 그 로타리와 탑은 넓고 웅장했었고, 회사를 다니며 어쩌다 자전거를 타고 그곳을 돌아 지날때면 자동차에 부딧칠세라 정말 아슬아슬한 스릴을 느꼈었다.
젊은시절 우리들의 주무대는 비록 뒷골목이었지만 남포동과 서면로타리였다. 나는 집이 동래쪽이라 밤이면 서면로타리 주변을 친구들과 맴돌았다.
부산탑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바로 동명목재 회장이셨던 강석진씨다. 부산의 대표적기업, 세계최대의 목재기업, 그 동명목재의 소멸과정은 가슴아팠다.
군사정권과의 불화로 회사정리 약속이 있었고, 그과정에 나는 실무자로서 부분 관여되었다. 상급자를 따라 서울 출장을 갔고,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국보위, 00사, 00수사대 등 정부기관을 다니며 의견을 구하고, 회장님의 가족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이전 회장님 거처를 한두번 방문한적이 있기에 기업과 부산에 대한 애정, 회사정리와 관련한 부당함과 애통해 하시는 말씀이 안타까웠다.
부산탑의 건립에 관한 말씀도 있었다. 높이가 23m인 탑을 당시 부산에서는 만들수가 없어 인천에서 부분적으로 만들어 선박으로 운반 서면로타리에다 세웠다고 하셨다.
그때 회장님이 상공회의소장으로 계셨고, 아마도 그 탑의 건립과 예산을 모두 주관하신걸로 이해되었다.
아무튼 국제상사와 더불어 부산의 대표적 기업들이 군사정권의 눈밖에 나서 사라지고, 그 많은 근로자들이 일자리를 잃게된 것이 가슴아팠다.
부산탑이 철거된후 나는 부산을 떠나 살았고, 가끔씩 지나치는 서면로타리가 낯설어 보이는 것이다.
부산탑, 그것은 부산의 상징이었고, 동명목재와 국제상사는 부산 사람들의 삶의 원천이었다.
세월이 흘러가니 형제들의 소식도 무디어 간다. 타국으로 떠난 형제는 영영 남남이 되어 가는 듯하고, 국내에 살아본들 흩어져 사니 마음이 멀어진다.
정점을 찍은 우리네 살림살이는 내리막길로 접어들었고, 위정자들은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듯 자신들의 부귀영화와 패권잡기에 여념이 없다.
주머니 휴대폰에 안내문자가 왔다. '폭염주의', 기후마져 인간이 저지른 행태에 책임을 물으려는 듯 불순하다.
불교용어로 흔히 쓰여지는 업보(業報)의 의미인 원인과 결과...반성과 개선이 뒤따라야 할 것인데, 인간은 도무지 그럴 것 같지 않아 걱정스럽다.
인과응보(因果應報), 자업자득(自業自得), 자승자박(自繩自縛), 사필귀정(事必歸正)도 비슷한 의미이다.
어젯밤 멀리 있는 형제의 소식이 전해왔고, 오늘은 부산에 사는 두 여동생을 만나 점심을 같이 하기로 한 날이다.
유행가 가사처럼 헤어지면 그립고, 만나면 시들한 것이 인생일까? 나에게 해끼칠이 아니면 자주 만남은 좋을 것이다.
하여간 그 만남의 장소가 서면로타리 부근이었으니 부산탑이 생각나 그 역사와 연관 사연을 적어 보았다.
중국의 시성 두보, 학문의 깊이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가난속에 살며 가족을 그리워했던 그의 시를 덧붙인다. 34도 낮기온은 그늘을 찾아 걸어도 덥다.
月夜憶舍弟(월야억사제)/두보(杜甫)
戍鼓斷人行(수고단인행) 수루(戍樓)의 북 소리에 인적은 끊어지고
邊秋一雁聲(변추일안성) 변방 가을 외로운 기러기 소리
露從今夜白(노종금야백) 이슬은 오늘밤부터 하얘지고
月是故鄉明(월시고향명) 달은 고향에서 보던 밝은 달이라
有弟皆分散(유제개분산) 아우 있어도 다 나뉘어 흩어지고
無家問死生(무가문사생) 생사를 물을 집조차 없구나
寄書長不達(기서장불달) 편지를 부쳐도 늘 닿지 못했는데
況乃未休兵(황내미휴병) 하물며 병란(兵亂)이 아직 그치지 않고 있음에랴
* 먹구름낀 경제에 흩어사는 백성들은 삶에 전쟁 대하듯 맞서는데, 황룡도 찬 장수들은 패거리만 챙기는듯 허리춤의 장도는 녹슬어 무용지물이 되어 가는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