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mini 문학비평 85 – 한기홍 시 벗겨 보기 ~ ‘푸른 이끼 낀 술잔’]
[隨筆詩]
푸른 이끼 낀 술잔
- 퇴락한 옛집, 거미줄 껴안고 들어서서 -
우연히 힐끔, 흘러간 과거의 한 조각이었을 고동색 비늘 끄트머리가 높다란 시렁 위… 쥐의 길에서 보였다. 이 오래된 옛집 대청마루는 천정이 너무 높다. 어디 의자라도 가져와 저 고동색 비늘, 즉 한 삼십 년 전에는 서로 몸 달아 사랑했던 술 종재기를 꺼내 볼까나. 아니지, 저 푸른 이끼 낀 사기잔은 내일쯤 만져봐야겠다. 그럼 푸른 과거를 오늘에 보았고, 만지는 건 미래가 되겠지.
고가古家 밖에는 내일쯤 당도할 태풍이 보낸 선발대, 그악스런 폭우가 어머니의 땅을 두드리고 있다. 단단하고 살가운 물 뼈들이 금세 미래까지도 먹을 것 같다. 이 울컥 덤벼든 빗방울들은 까마득한 시절, 홀로 뽕밭에 기어들어가 붉은 입술에 탁탁 털던 푸른 술잔이다. 촬촬 돌아가는 손때 묻은 영사기에 좔좔 오줌을 갈기듯 빗소리가 그악하나니. 이럴 땐 권련을 살라야한다. 비의 장막 틈새로 파르스름한 담배연기를 디밀어 보는 유희는, 해본 자 만이 흠씬 젖을 수 있다. 시끄럽지만 눅눅한 정밀이 부서지는 시공에 까다로운 지식 한 웅큼 마냥 연기를 불어넣으면, 그 생경한 어지럼증에 빗줄기들은 무뇌아처럼 밑받침 없는 발음을 토해내기 시작한다.
푸른 이끼 낀 술잔과 태풍을 감춘 빗줄기, 파르스름한 권련 연기가 옛집과 나를 어루만지면…. 음 흠, 낡은 자개장을 부여잡고 울면서 아교를 덧칠할 때 토해냈던 매캐한 향수鄕愁 따위가 목울대를 출렁인다. 돌아보면 야윈 육신에 얼마나 많은 덧칠로 삶의 수액을 갈아 치웠는가. 물 맞은 먼지는 항상 엉겨 붙었었지. 풍상 먹은 판자때기는 서까래를 고이지도 못하리. 고동색 이끼가 빙긋 웃고 있는 저 술 종재기. 켜켜이 옛 것들이 혼숙하는 시렁 위에 서너 점 소슬바람이 일렁인다.
유령처럼 몽글 몽글 피어오르는 옛 사람들, 껄껄대며 박장대소 하는 그들의 오래된 엄지와 검지에 빛나는 파란 늑살의 술잔. 풍년초 탁탁 털어 곰방대에 쑤셔 넣는 주름투성이 인자한 손, 할아버지의 너털웃음 까지도 시렁 위에서 늠실댄다. 그 옛 나라는 함지박 웃음들이 질펀히 떠다니며 온갖 소리들의 몸뚱아리를 배배꼬는 정겨움 속이리니. 동구 밖 아슴한 석양빛을 훠이훠이 휘저으며 그러쥐었던 오래된 술잔. 할아버지가 할아버지한테 전해 받은 푸른 이끼 낀 술잔.
고단한 풍진이여, 강물 되어 흐른 세월이지만 이 속가지들에서 매운 세한도歲寒圖는 없다. 낡은 시렁을 지나 서까래 귀龜퉁이에서 기어 나오고 싶어 훌쩍이는 술 종재기가 전설을 항변한다. 한 삼십 년 전엔 너무나 익숙해서 질질 흘렸던 세월의 술이라고. 그러나 나는 탄식하며 송구스런 이유를 바친다. 너는 항용 앞으로 나설 과거이면서 오래된 내일이며, 고담枯淡스런 향기를 저민 미래다. 그대 푸른 이끼 낀 술잔.
(2005 . 9 . 13)
*家門에서 기어코 보존하지 못한 온화한 동산 밑의 고향집, 지금은 아스팔트 도로와 슬라브 집들이 들어서 있다. 가끔씩 옛집의 방들과 마당을 거니는 꿈을 꾼다.
⛄ Gemini씨의 비평
한기홍 시인의 수필시 〈푸른 이끼 낀 술잔〉은 퇴락한 고가(古家)라는 공간적 배경을 통해, 시간의 격류 속에 사라진 유년의 기억과 가족사, 그리고 존재의 뿌리를 되짚어보는 깊은 감성의 작품입니다.
이 작품이 지닌 시적 성취와 매력을 몇 가지 핵심 비평 포인트로 나누어 정리해 드립니다.
1. 시·공간의 재구성 : Past - Present - Future의 융합
이 시의 가장 독창적인 지점은 ‘시간을 감각하는 방식’에 있습니다. 시인은 단순히 과거를 추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간을 물질화하여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대상처럼 다룹니다.
⚫시간의 삼점측량 : "푸른 과거를 오늘에 보았고, 만지는 건 미래가 되겠지"라는 구절처럼, 시인은 시렁 위에 올려진 술잔을 매개로 과거, 현재, 미래를 한 화면에 겹쳐 놓습니다.
⚫시간의 역설 : 작품 후반부에서 술잔을 향해 *"너는 항용 앞으로 나설 과거이면서 오래된 내일이며, 고담스런 향기를 저민 미래다"*라고 칭합니다. 이는 지나간 과거가 죽은 시간이 아니라, 다가올 삶(미래)에도 지속적으로 구원과 위로의 영향력을 미치는 '생동하는 유산'임을 역설합니다.
2. 감각적 상징 : '푸른 이끼'와 '술 종재기’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상징물들의 미학적 대립과 조화가 돋보입니다.
푸른 이끼 낀 술잔 (술 종재기)
⚫시간의 퇴적물 : '이끼'는 세월의 흐름과 방치를 의미하지만, 동시의 '푸른' 색채는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유년의 온기와 생명력을 상징합니다.
⚫유대감과 전승 :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이 술잔은 단순한 개인의 추억을 넘어 가문과 공동체의 정서적 젖줄이자 문화적 전설입니다.
폭우와 권련(담배) 연기
⚫외부의 거친 현실 vs 내부의 아늑한 정밀 : 집 밖에서 "어머니의 땅을 두드리는" 폭우는 거친 현실과 세월의 풍상을 의미합니다. 이에 맞서 시인이 피워 올리는 "파르스름한 권련 연기"는 몽상과 회상의 매개체이자, 거친 현실을 연기 속으로 완충시키는 시적 유희의 도구가 됩니다.
3. 원초적 생명력과 서정적 입체감
산문시가 자칫 빠지기 쉬운 느슨함을 극복하기 위해 시인은 날것의 토속적 언어와 생생한 시각·청각적 비유를 배치했습니다.
"촬촬 돌아가는 손때 묻은 영사기에 좔좔 오줌을 갈기듯 빗소리가 그악하나니“
비의 소리를 시각적·청각적으로 대담하고 거칠게 묘사함으로써, 거친 세월의 몰아침을 극적으로 형상화합니다.
박장대소하는 옛 사람들, 곰방대에 풍년초를 털어 넣는 할아버지의 손 등 한국적 고향의 정서(함지박 웃음)가 살아있는 묘사는 독자로 하여금 아득한 유년의 풍경 속으로 몰입하게 만드는 강한 환원력을 지닙니다.
4. 자아 성찰과 결언 : 매운 세한도(歲寒圖)는 없다
시인은 삶의 고단함("야윈 육신에 얼마나 많은 덧칠로 삶의 수액을 갈아 치웠는가")을 인지하면서도, 결코 자조나 절망으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세한도(歲寒圖)의 부정 : 오랫동안 쌓여온 이 유년의 기억과 보존된 정서의 '속가지'들이 있기에, 자신의 삶에는 추위와 고통만 가득한 "매운 세한도는 없다"고 단언합니다.
시인이 덧붙인 마지막 후기("가문에서 기어코 보존하지 못한…")는 이 시가 지닌 안타까움과 그리움의 정조를 더욱 묵직하게 만듭니다. 사라져버린 물리적 공간(옛집)을 시인은 언어라는 사당(祠堂)을 통해 영원히 보존해낸 셈입니다.
💡 총 평
한기홍 시인의 〈푸른 이끼 낀 술잔〉은 ‘소멸되어 가는 옛것에 대한 서정적 복원’을 이뤄낸 뛰어난 수필시입니다. 거칠면서도 지극히 섬세한 언어적 결, 과거와 미래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시적 통찰, 그리고 토속적인 따스함이 어우러져 읽는 이로 하여금 각자의 가슴속에 묻어둔 '푸른 이끼 낀 술잔'을 돌아보게 만드는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