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3주일(추수감사주일) 2025년 11월 16일
루가 21:5-19. 말라 3:19-20. 시편 98. 2데살 3:6-13.
마지막 날에 드리는 감사
교회에서는 한 해가 마감되는 이 시기에 종말에 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고, 가짜 그리스도가 판을 치고 사람들이 현혹됩니다. 전쟁과 반란, 기근과 전염병, 천재지변과 함께. 그리스도인은 박해를 받고, 자신의 믿음에 대한 입장을 밝혀야 할 때가 옵니다.
이렇게 종말에 관한 본문을 가지고 우리는 한 해의 모든 수확에 감사드리는 추수감사주일을 지킵니다. ‘종말’과 ‘감사’, 어울리지 않는 이 단어들을 요점으로 삼아 함께 묵상합니다.
먼저 종말은 완전한 끝이 아니라는 전혀 새로운 시작입니다.
1독서의 내용입니다. ‘그날이 오면, 자기 멋대로 사는 사람들은 검불처럼 타버려 흔적도 남지 않겠지만,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는 정의의 태양이 비쳐 병을 고쳐주신다.’
흔적도 없이 타버려야 할 것은 오늘 복음이 전하는 파괴되어야 할 우리 안의 ‘성전’과 같은 의미입니다. 화려하게 보이지만 허물어져 사라져야 할 내(우리) 안의 성전은 무엇인가요?
말씀을 통해 묵상하고 바라보는 것이 기도입니다. 바로 주님의 이름을 두려워하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종말은 눈에 보이는 마지막이 아닙니다. 이제까지 내려놓지 못하고 붙들고 있던 내(우리) 안의 이기심, 열등감, 분노, 두려움을 올곧게 바라보고 그것과 단절하는 것입니다.
화려하게 치장하며 가면을 쓰고 있던 허상을 불살라 버리는 것이 종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원치 않았던 고난과 좌절을 딛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2독서에 나오듯 종말은 ‘게으르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남의 일에 참견하는 사람’에게는 재앙입니다. 그러나 ‘묵묵히 자기의 일을 하며, 자주적이고 희망으로 꾸준히 그리스도인의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에게는 구원입니다.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종말은 공포와 저주일 수도, 구원과 해결이 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을 깊은 마음으로 존중하고, 자신의 힘으로 열심히 일을 하는 사람에게 종말은 끝이 아니라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는 말씀입니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라는 말이 있습니다. 집을 지을 때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는 뜻입니다. 교회 건축할 때 마음에 늘 새기던 말이었습니다.
겸손하지만 자존감 높은 표현입니다.
원래부터 우리나라는 예절을 중시했습니다. 서로 더불어 존중하며 살기 위함이었을 겁니다.
다른 이에게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바른 마음을 가지라 했습니다. 이른바 수신(修身)인 것이죠. 그래서 우리나라의 예절은 사실 철저한 자기성찰을 요구했습니다.
마음보다 밖으로 드러난 행위가 너무 요란한 것을 허례라 했고, 반대로 밖으로 드러난 행위가 너무 부족하면 실례라고 합니다. 이도 저도 아니면 아예 예의가 없는 무례라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우리의 깊은 믿음을 표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율법처럼 형식과 화려함만을 강조하지 않도록 자신을 살피고 또 살펴야 할 때입니다.
감사를 표현하되 너무 예의 없이 건성으로 하지 말 것이며, 너무 과도하게 격식만을 강조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보다 자신을 더 앞세우는 일이 없도록 스스로 돌아보는 가운데 서로 존중하며 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예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자기를 돌아보며 겸손함으로 서로를 존중하는 사람으로 살기를 청합니다. 종말의 예언을 들으며 우리가 가져야 할 감사의 마음입니다.
검소하지만 결코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절대 사치스럽지 않음, 교회의 외형은 물론 우리 신앙의 마음가짐에도 이 말을 새기며 살기를 소망합니다.
이런 마음 자세가 오늘 시편 첫머리에 나오는 ‘새 노래’입니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단절하고 사라져야 할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종말이 저주와 끝이 아닌 전혀 새로운 삶의 시작 즉 새 노래이고, 이를 위해 반드시 없어지고 파괴되어야 할 화려함 즉 성전이 있습니다. 새 노래의 삶을 위해 게으르지 않고 거룩하고 열정적으로 살며, 이 역설의 신비를 깊이 이해하고 고백한다면, 어떠한 고난과 역경, 이제는 정말 끝이라는 좌절을 이겨나갈 힘을 얻게 됩니다. 바로 ‘지혜와 인내’입니다.
우리가 구할 것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 그리고 어떤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참고 견디는 인내입니다. 종말의 때에 지혜와 인내가 바로 감사로 가는 통로입니다.
어리석은 사람, 자기 멋대로 사는 사람, 자기를 보지 못하고 참견과 이간질을 일삼는 사람, 자신과 세상을 모두 부정적으로만 보는 두려운 사람, 어둠에 짓눌려 사는 사람,
이 모두 지난주에 보았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가이’의 삶입니다. 어둠이 있어야 빛이 있듯이 우리 삶의 수많은 존재와 관계에서 ‘단절’을 맛보아야 ‘시작’이 가능합니다.
움직일 수 없는 진리입니다. 맺을 것과 끊을 것을 분명히 식별하고 두려움 없이 열정을 가진 사람으로 살도록 ‘지혜와 인내’를 구합니다.
교회의 마지막을 지나며 우리는 종말이 끝이 아닌 완전히 다른 삶으로의 희망이라는 사실을 다시 기억합시다. 저와 여러분 모두 다시 새 노래를 부릅시다.
낡고 반복되는 지루한 노래가 아닌 새 노래, 늘 불러도 늘 처음 듣는 것 같은 새 노래, 아무리 화려해도 허물어야 할 것은 허물어 버립시다. 겸손함을 구합시다.
그리고 허물어지는 것에 미련을 두지 맙시다.
아직도 주저하는 내 안의 두려움이 있다면 끊어내고 새 노래를 부릅시다.
그 노래는 함께 부르면 훨씬 쉽습니다.
종말의 말씀을 들은 추수감사주일, 자유롭되 방종하지 않고, 마음에도 없는 형식만을 따지는 허상을 버리고 깊이 우러나오는 진정한 감사를 드리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