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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근이 최근 영화 '실종'에서 사이코패스역과 함께 SBS '자명고' 출연 등 활발히 활동을 재개한 문성근은 18일 MBC '황금어장-무릎팍도사'에 출연하여, 정치 참여에 대한 자신의 입장과 함께 아버지 故 문익환 목사가 정치에 참여할 수 밖에 없었던 운명에 대해 털어놨다.
문익환(뒷줄 가운데)과 윤동주(뒷줄 오른쪽)
문성근은 故 문익환 목사와 윤동주 시인의 우정을 언급하며 "같은 동네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중학교를 함께 다녔다"며 "어린 시절 명동 소학교를 함께 다니며 어린이 잡지를 같이 만들자고 의기 투합했다. 윤동주 시인은 이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문성근은 일제 치하에서 군입대를 앞둔 세 사람의 이야기를 전하며 "문익환 목사는 일본을 위해서 죽을 수 없다는 생각에 학교 교장과 담판을 지었다. 2~3시간 토론 끝에 전학 증명서를 받아냈고 다른 신학 학교로 진학했다"고 말했다.
이어 "윤동주는 우선 입대해 일본군이 약해질 때 반란을 일으킬 생각을 했다"며 "결국 동료 배신으로 인해 밀고를 당했고 생체 실험을 당하다 죽음에 이르렀다"고 안타까워했다.
문익환, 윤동주와 절친했던 장준하에 대해선 "장준하 선생은 이미 불량 선인으로 일본에게 찍혀있었다"며 "이에 입대를 기피하면 집안에 피해가 돌아간다는 생각을 했고 입대 후 탈출, 광복군에 합류할 계획을 세웠다. 결국 장준하 선생의 계획대로 탈출에 성공, 임시정부에 합류했다"고 전했다.
또 "여기서 세 친구의 운명이 달라졌다. 신학자의 길을 가다보니 문익환은 사회 참여가 늦어졌고 장준하는 정치 참여가 빨라 일찌감치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나섰다"고 설명했다.
문성근은 "아버지가 윤동주, 장준하에 대한 마음의 부채가 있었다"며 "윤동주 장준하가 세상을 떠났으니 이젠 내 차례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던 듯 하다"고 회상했다.
이날 MC 강호동이 "과거 정치 참여에 대해 후회하지 않냐?"고 질문을 던지자 문성근은 "절대 후회없다"며 "상업적 배우로서 큰 피해가 있을거라는 점은 알았지만 결국 내 선택이었고 한 사람의 국민으로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라고 생각한다"라고 답했다.
한편, 올해는 문성근씨의 아버지 고 문익환 목사가 타계한지 15주년, 방북한지는 20주년을 맞는 해다. 민주화 운동과 함께 민족의 통일 운동에도 선구자적 역할을 했던 고 문익환 목사는 1994년 1월 통일맞이 사무실을 개소하고 ‘새로운 대중적인 통일운동체’ 결성을 위해 전력하던 중 18일 밤 8시 20분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늦봄이란 호로도 유명한 고 문익환 목사의 방북 20주년을 기념해선 특히 (사)통일맞이 늦봄문익환목사기념사업회(이사장 김상근 목사)는 늦봄이 당시 보여줬던 사유와 실천, 방북의 의미를 되새기고, 민간통일운동의 역사적 지위와 역할, 평화실현과 민족통일의 바른 전략 등을 심도깊게 논의하기 위해 이달말부터 다양한 기념행사를 치르기로 했다.
민주주의의 등불 장준하
1918년 8월 27일, 평안북도 삭주에서 기독교 목사인 장석인 선생과 김경문 여사의 4남 1녀 가운데 맏아들로 태어났다.
'준하'의 의미는 지혜와 재주가 물 흘러가듯 뛰어나라는 뜻이다.
첫아들을 얻은 장석인은 재미삼아 사주를 풀어보았는데 그 내용은 '아이는 평생 많은 고생을 할 운세. 재물 복도 없어 가난을 면치 못하겠고 그런데 늘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이름을 후세에까지 떨칠 운세.'라는 것이다.
그의 이름처럼 아무리 어두운 세상에 태어났더라도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어둠을 헤치고 나아가기를 바랐다.
장준하는 훗날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싸우고 남북으로 갈라진 나라를 통일시키기 위해 애쓴 독립운동가요, 언론인이요, 정치가가 되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학식이 깊고 의원이 없던 동네에서 의사 역할을 할 정도로 뛰어난 의술을 가지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허준의 <동의보감>을 많이 공부하셨다.
그런 할아버지와 함께 하면서 준하는 많은 것을 배웠다.
사람은 늘 책을 읽고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과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써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열심히 공부하여 시험의 합격으로 숭실중학교에 입학했다.
첫 여름 방학을 한 달 쯤 앞둔 어느 날, 학교 게시판에서 동아일보사의 '농촌 브 나로드 운동'에 참가할 학생모집을 보게 되었다.
'브 나로드'란 러시아 말인데, '민중 속으로 들어가자'라는 뜻이다.
농촌 브 나로드 운동이란 지식인들이 농촌으로 들어가 농민과 농촌을 위해 일하자는 운동이었다.
글을 모르는 농민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일손이 필요한 농민들에게는 일을 거들어 주고 또 농민들이 스스로 자기 권리를 찾도록 일깨우는 운동이었다.
그 당시 조선 사람 열 가운데 여덟은 농민이었는데 가난해서 무식했던 고로 일본인들에게는 유리했다.
그러므로 배우고 깨우치는 길이 독립을 위한 길이었다.
참가신청서를 낸 뒤로 일본순사의 감시가 시작되었다.
"사람은 왜 더 많이 배우려고 할까요?
높은 사람이 되어 잘 살려고 그럴까요? 남의 존경을 받고 싶어서일까요? 아닙니다. 현명하게 살기 위해서입니다. 깨치고 배워야만 자기도 발전하고, 또 사회와 나라도 발전시킬 수 있거든요."
준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면서 스스로에게도 놀랐다.
자기가 남들 앞에서 이렇게 말을 잘 할 줄은 생각조차 못했었다.
순사는 날마다 찾아와서 감시하고 조사해갔다.
훗날 장준하는 이 때를 생각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 순사 때문에 나는 처음으로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순사 때문에 일본이 우리 나라를 침략해서 우리 민족의 자유를 빼앗고 탄압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었다.
아버지의 전근으로 인해, 새학교로 가게 되었다.
거기서 준하의 마음을 사로잡은 분이 장이욱 교장 선생님이었다.
"나라 없는 백성이 나갈 길은 노예가 되는 길 밖에 없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지식을 쌓아도 나라를 위해 쓰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나라 잃고 2천 년 동안 세계 이곳 저곳을 떠돌면서 눈물과 한숨으로 살아가는 유대인을 보아라. 여러분이 할 일이 과연 무엇이겠는가?"
2학년 여름방학에도 '브 나로드 운동' 에 참여했다.
헐벗고 굶주리는 농민들을 보며 그들이 잘 살게 될 해방된 새 나라를 어서 빨리 이루어야 한다는 걸 느꼈다.
그러나 한글 강습회는 3한년 여름으로 끝이 났다.
일본이 조선 안에서는 어떤 강습회도 열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인들의 탄압은 갈수록 심해졌다.
일본은 조선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아시아 여러나라를 넘보며 침략전쟁을 벌였다.
전쟁을 위해서 조선의 피땀흘려 가꾼 식량과 전쟁에 필요한 것을 모조리 휩쓸어 갔다.
또한 남여를 가리지 않고 조선의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소학교 학생들에게조차 강제노동을 시켰다.
전쟁물자를 만드는 원료인 솔방울, 관솔, 송진등을 구했다.
우리 말과 글을 쓰거나 가르치지 못하게 하고 신사참배를 하게 했다.
장이욱 선생님과 준하의 아버지 장석인도 그 학교에서 신사참배반대운동에 앞장섰다.
결국 장이욱 선생님은 서대문형무소에 갇히게 되었다.
준하는 "우리는 이제부터 거짓으로 가득 찬 침략자의 교육을 받지 맙시다."하며 교과서를 찢었다. 몇몇 친구들이 동조하며 찢었다.
준하와 몇 친구들이 모여서 다짐하는 시간을 가졌다.
"아직 우리는 침략자와 맞서 싸울 힘이 없어. 하지만 우리가 어른이 되면 독립 운동에 몸을 바치자."
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신학교에 진학하려 했으나 아버지의 신사참배반대로 학교에서 쫓겨나는 등 집안경제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뜻대로 되지 못했다.
꿈을 잠시 접고 준하는 농촌으로 가서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소학교 교사를 하게 되었다.
그 학교는 거의 창고같은 낡은 건물이었다.
준하는 새 건물을 짓자고 의견을 냈다.
동료교사들은 거의 부정적이었으나 장준하는 "우리가 뜻만 세우면 못 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음날부터 장준하는 학생들과 손에 괭이와 삽을 들고 학교 뒷동산으로 모여 땅을 파내고 돌을 들어냈다.
처음에 그들이 일하는 모습은 마치 개미들이 커다란 바위를 옮기려는 것처럼 보였다.
한 두 달이 흘러 한 학기가 지나자 뒷동산 언덕은 축구장만한 운동장으로 바뀌었다.
교회청년들이 돕기 시작했다. 학부모들도 나섰다. 마침내 새 건물이 완성되었다.
장준하는 일본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그 중간 과정으로 도쿄의 도요 대학 예과에 입학했다.
노동으로 돈을 벌며 어렵게 공부하여 2년 만에 일본신학교에 들어갔다.
일요일이면 조선인 교회에 나갔고 조선인 유학생이자 신학교 동료들인 박봉랑, 문익환, 문동환과 늘 함께 어울려 지냈다.
이 세사람은 나중에 유명한 목사가 되었고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애쓴 분들이었다.
장준하는 아버지의 설교를 들으며 두 손에 힘을 주었다.
"그래,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자. 악의 무리들이 내 육신은 죽여도 영혼을 결코 죽이지 못하리라."
일본은 조선 학생들을 전쟁터로 내몰았고 장준하도 학병에 끌려갈 날을 앞에 두고 있었다.
'총을 들고 왜놈과 싸우지는 못할망정 침략자의 앞잡이가 되어 죄 없는 다른 민족을 학살해야 하다니.'
1943년 11월 30일, 장준하는 사랑하는 여인 김희숙과 결혼을 했다.
학병에 가게 될 날이 다가왔고 떠나기 전에 그는 마을 사람앞에서 인사말을 했다.
"저는 이제부터 제가 해야 할 일을 찾아서 꼭 그 일을 마치고 돌아오겠습니다."
일본의 앞잡이들은 이 말을 일본왕에게 충성을 다하겠다는 것으로 받아들였으나 장준하의 속마음은 조국해방을 위해 자기가 할 일을 찾아보겠다는 뜻이었다.
평양 제 42부대
살을 에는 한겨울 추위속에 훈련은 지독하게 엄하고 그 뒤엔 더 힘겨운 노동이 있었다.
준하는 동상이 심했다.
일본인 의무관이 곪았으니 째야겠다고 했는데 준하의 동의를 얻어 마취제 없이 수술칼을 들이댔다.
고름이 아닌 피가 나오자 손가락을 돌아가면서 다섯차례나 칼질을 했는데도 준하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
왜놈 앞에서 아프다는 소리를 하기 싫었던 것이다.
의무관은 그를 지독하고 대단한 놈이라고 여겼다.
잘못된 수술로 더 큰 고생을 하면서도 그는 중국으로 가기 위해 쉬지 않고 훈련에 참가했다. 결국 중국부대로 선발되어 갔다.
어느 날 기회를 타서 몇 동료와 탈출했다.
도망가던 도중 중국군 유격대에 포위당했다.
다행히도 그들의 도움을 받아 어느 곳에 갔는데 그 곳에서 조선 사람 김준엽을 만났다.
그도 얼마전 일본군에서 혼자 탈출했던 것이다.
그들은 충칭에 있는 임시정부를 찾아가기로 다짐했다.
걸어서 못 가면 기어서라도.
충칭까지는 6천리 길,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왔다갔다 할 먼 거리였다.
하지만 장준하는 반드시 내 손으로 조국 땅에서 일본 침략자들을 몰아내고 말겠다는 굳은 의지로 타올랐다.
중간에, 장준하 일행은 한국 광복군 훈련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곳은 학병에서 탈출하거나 중국으로 건너 온 조선 청년들을 모아서 광복군을 길러 내는 곳이었다.
총도 없이 제대로 훈련 받지 못하는 그 환경 속에서 그는 서로 강의를 하고 잡지를 펴내는 등의 작업으로 유익하게 보냈다.
거기서 넉 달의 훈련기간이 끝나고 추위, 배고픔, 갖은 위험과 고난을 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김구선생이 나와서 맞아주었다.
그는 오랜 세월 어려움을 겪어 내며 용맹을 지켜 온 호랑이 같이 보였다.
근엄하나 인자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 날 밤 환영 잔치가 있었고,김구 주석의 환영 연설이후 장준하가 동지들을 대표해 답사를 했다.
"...우리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하라는 대로 할 각오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김구 주석이 울음을 터뜨렸고 그것을 시작으로, 방 안의 모든 사람들의 울음바다를 이루었다.
처음에는 그 곳 생활이 감격적이었으나 차차 답답해졌다.
뭔가 보람된 일을 찾다가, 잡지를 만들 생각을 했다.
글을 써서 청년의 불타는 마음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다.
그 일이 큰 기쁨을 주었으나 장준하는 무엇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나가서 싸우고 싶었다.
그래서 어느 날 임시정부 청사 앞에서 몽둥이를 들고 구호를 외쳤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게 해 달라고!!!
그때 이범석이 나타났다.
<이 범석>
그는 광복군을 지휘하는 장군이었다. 그와 함께 시안으로 가서 훈련받고 일본군과 싸우는 유격대가 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떠나는 날 김구주석이 작별인사를 했다.
김구 주석은 두루마기 안주머니에서 둥그런 회중시계를 꺼내며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이 시계를 잘 보시오. 지금부터 13년 전 오늘 이 시각, 나는 윤봉길 의사를 죽을 곳으로 떠나보냈소. 그 날 윤 의사는 나와 시계를 바꾸어 차고 떠났소. 이 시계를 보니 그 때가 생각나오. 여러분을 보내는 내 마음이 바로 그 때와 똑같소. 여러분의 눈동자가 그 날 윤봉길 의사의 눈동자처럼 빛나고 있구려."
광복군 대원들은 석 달 동안 훈련을 받고 조국 땅에 들어가 유격대원으로 싸울 예정이었다.
여러 훈련 중에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내려가 나뭇잎을 따오는 훈련, 어두운 밤 중에 비행기에서 뛰어내리는 훈련도 있었다.
훈련에 익숙해지자, 장준하는 또다시 잡지를 만들었다.
'제단'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목숨을 민족의 제단에 바친다는 뜻이었다.
처음 잡지를 펴내기 시작할때의 악조건과는 달리, 광복군이 마련해 준 사무실에서 좋은 종이를 써서 수백 권이나 찍어냈다.
임시 정부는 물론 멀리 미국의 교포에게도 보냈다.
<제단>은 민족 의식을 심어주는 잡지로 여러 사람들의 사랑과 환영을 받았다.
어느덧 장준하는 잡지 만드는 일에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훈련이 끝나갈 무렵, 장준하는 이번 작전에서 빠지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범석 장군에게 자기의 굳은 마음을 전하기 위해 일기장, 자기 손으로 만든 잡지, 유서를 넣어 고향집주소를 써서 묶어놓고
나머지 물건들은 다 태웠다.
이범석 장군은 장준하 같은 인재를 잃고 싶지 않아서 위험한 작전이기에 뺐던 것이었다. 조국이 독립하면 새 나라를 건설하는데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장준하의 끈질긴 설득 끝에, 장군은 허락했다.
맨 오른쪽이 장준하, 왼쪽에서 두번째가 김준엽.
1945년 8월 20일. 일본군이 항복한 후 닷새 뒤에 중국인 전우들과 함께 찍은 사진. 군복 입고 총을 든 사람들이 광복군.
대원들은 총과 장비를 손질하며 작전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데 꿈에도 생각지 못한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일본 왕이 연합군에 항복했다. 조선이 해방되었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꼴이람. 일본을 우리 손으로 쳐부수려고 했는데... 원통하다.' 그의 가슴 속에는 기쁨과 실망이 오고갔다.
또한 조국이 해방되었건만 30여 년 동안 독립을 위해 싸운 임시 정부는 조국으로 돌아갈 길이 막막했다.
미국과 협상을 해야했다. 뜻대로 잘 되지 않고 두달이 흘렀다.
그때 상하이로 조선 청년 수천 명이 모여들었다.
학병으로 끌려왔다가 일본이 항복하자 부대를 나온 청년들이었다.
모두들 조국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독립운동가나 광복군 행세를 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자들은 동포들을 살상히면서 갖은 거드름을 다 피우던 인물들이었다.
박정희라는 자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일본군 중위였으며 일본 이름은 다카키 마사오였다.
다카키 마사오는 해방이 되자 이름을 박정희로 되돌리고 마치 광복군이라도 되는 양 행세했다.
다카키 마사오는 조선 사람이었지만, 일본 침략자들에게 혈서를 쓰고 충성을 바친 자였다.
그래서 일본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할 때 일본 육군 대신이 주는 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일본군 중위가 되어 중국군과 우리 독립군을 상대로 싸웠다.
장준하는 그런 나쁜 자들을 혼내 주리라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그들 무리와 마주치게 되었다.
"당신들은 부끄럽지도 않소? 당신들은 왜놈들에게 충성하고, 독립군을 잡아죽이는 일에 앞장서지 않았소? 그런데 해방이 되자마자 이토록 달라 질 수 있단 말이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과거를 반성하고 진실한 사람이 됩시다. 그러면 아무도 당신이 저지른 지난 잘못을 욕하지 않을 겁니다."
그들은 모두 고개를 숙였다.
장준하는 자기가 혼쭐을 낸 사람들 중 하나였던 박정희가 훗날 대통령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자기가 죽음을 무릎쓰고 박정희의 독재와 싸우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해방된지 석 달이 지나서야 겨우 미군 비행기를 얻어 타고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는 광복군 장교이자 김구 선생의 비서가 되었다.
비행기가 멈추고 김구선생은 내리자마자 땅에 엎드려 얼굴을 비볐다.
일행은 묵념을 올리며 나라를 위해 싸우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애국자들을 생각했다.
묵념을 마치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어디에도 민족 지도자들을 환영 나온 사람들은 없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싸운 독립 투사들을 환영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니.
우리 동포들은 김구 선생이 오시는 줄도 모르고 있구나.'
일행이 간 곳은 서울 서대문 근처에 있는 경교장이었다.
그 곳이 앞으로 김구 선생이 살게 될 집이었다.
장준하도 경교장에서 김구 선생을 돕게 되었다.
우리 나라는 아직도 완전히 독립한 게 아니었다.
일본이 쫓겨난 대신 우리 땅에는 미군과 소련군이 들어왔다.
그들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우리 국민의 정부로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김구선생도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주석이라고 보지 않았던 것이다.
조국에 돌아와 국민들에게 보내는 인사말을 2분의 시간안에 하도록 겨우 허락받았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주석이 국민들에게 할 말도 다 못하다니, 나라의 독립을 우리 손으로 이루지 못한 대가가 정말 크구나.
나라는 남북으로 갈라지고, 민족을 배신한 자들은 아직도 버젖이 살아 있으니...
김구선생은 연설문을 장준하에게 부탁했다.
'친애하는 동포 여러분!
27년간이나 꿈에도 잊지 못하고 있던 조국 강산에 발을 들여놓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나와 동지 일동은 한갖 평민의 자격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앞으로는 여러분과 같이 우리의 독립 완성을 위하여 전력하겠습니다.
앞으로 전국 동포가 하나가 되어 우리의 국가 독립의 시간을 최소한도로 단축시킵시다.'
"잘 썼구먼, 잘 썼어!"
김구 선생은 만족스러워하며 곧장 방송국으로 떠났다.
부인 김희숙과 장준하, 장모님인 노선삼여사(남편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홀로 세 딸을 키움)
한편 부인 김희숙은 마지막 편지를 보고서, 그가 탈출에 성공했으리라 믿었다.
'나는 독립 투사의 아내로서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꿋꿋하게 견뎌야 해.' 김희숙과 식구들은 꿋꿋하게 살아 나갔다.
해방 후에도 얼마간 소식을 못 전하다가 몇 달 후에 두 사람은 만나게 되었다.
식구들은 모두 서울로 이사해서 살게 되었으나 기쁨도 오래 가지 못했다.
그 때 우리나라는 통일은 커녕 두 나라로 갈라질 운명이었다.
김구 선생을 비롯한 지도자들은 통일을 위해 위험을 무릎쓰고 남북을 오가며 애썼지만, 결국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했다.
마침내 남쪽에는 미국의 도움을 받아 대한민국이 세워지고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었다.
북쪽에서도 김일성이 주석이 되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생겼다.
1949년 6월 26일,
김구선생은 안두희라는 청년이 쏜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안두희는 나라를 자기들 욕심대로 이용해 먹으려는 민족 반역자들의 하수인이었다.
그들은 남북으로 갈라진 나라를 통일하고 민족을 배신한 사람들을 벌하자는 김구선생이 두려웠던 것이다.
김구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장준하는 통곡하며 다짐했다.
'나는 죽는 날까지 김구선생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과 통일정신을 잊지 않겠다. 다시는 못난 조상이 되지 않겠다는 내 결심을 지켜 나가겠다.'
1950년 6월 25일, 남북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이 터지자 인민군이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그 사이 남북의 수많은 군인들이 죽었고 죄 없는 국민들은 집을 잃고 사방으로 피난을 떠나야 했다.
장준하는 전쟁 속에서 병을 앓는 딸아이를 저세상으로 떠나보내야 했다.
할아버지, 어머니도, 동생도... 죽거나 소식이 끊겼다.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식구들이 헤어지고 집을 잃었다.
고아가 되고 불구가 되고 굶주림에 지쳐 쓰러지는 사람들로 바다를 이루었다.
'나는 나라 잃은 슬름도 이겨내며 살아왔다.
언젠가는 일본 침략자들을 몰아내고 말겠다는 굳센 정신으로 살아왔건만 그 정신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피난지 부산에서 장준하는 자기가 할 일을 생각했다.
그 때 장준하를 아끼던 사람이 새 일자리를 맡겨왔다.
그는 문교부 장관 백낙준 박사였다.
"이번에 정부에서 국민사상연구원이라는 기관을 만들었네. 마침 책임자가 필요한데, 자네가 와서 일하게나. 그 곳에서는 실의에 빠져 있는 국민 정신을 바로세우는 일을 하게 된다네. 잡지도 만들 생각이야."
장준하는 문교부 서기관이 되어 국민사상연구원의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사상>이라는 잡지를 만드는 일을 맡았다.
그런데 그 잡지는 잘 팔리지 않았다.
그 이유를 생각 끝에 그는 깨달았다.
'맞아! <사상>은 정부에서 만들어 낸 잡지라 인기가 없는 거야. 국민들은 정부가 잘못한 일이 있을 때 용기 있게 비판하는 언론을 바라는 거야. 아무리 어렵더라도 정부의 도움 없이 잡지를 만들어야 해.'
이렇게 결심한 장준하는 국민사상연구원을 미련 없이 그만 두었다.
그 대신 새로운 잡지를 만들 준비를 해 나갔다.
그는 먼저, 이희승이라는 훌륭한 국어학자에게 글을 부탁했다.
"허어, 세상에 처음 본 사람이 무조건 원고만 써 달라니, 당신이 아무리 뜻이 있다지만 빈손으로 무슨 잡지를 만들겠다는 게요?"
"선생님, 저는 언론이란 정신으로 하는 것이지 돈으로 하는 게 아니라고 믿고 있습니다. 원고료는 나중에 꼭 드리겠습니다. 이번에 내는 잡지에 선생님들 글이 꼭 필요합니다."
"당신 뜻이 가상해서 원고를 써 주겠으니 부디 잡지나 낼 수 있길 바라오."
새 잡지를 시작한 장준하에게는 돈이 없었다.
겨우 굶지 않을 지경이었으니 사무실이 있을 리도 없었다.
그래서 찻집에서 차 한 잔을 시켜 놓고 하루 종일 일했다.
아내도 일할 도구를 담은 무거운 가방을 들고 다니며 도왔다.
인쇄비는 외상으로 했지만 동판 값은 그렇게 안되어서 아내 김희숙은 겨울 외투와 다른 옷가지를 팔아서 돈을 마련했다.
두 사람이 힘을 합쳐 노력한 끝에 마침내 잡지가 인쇄되었다.
1953년 4월, <사상계>는 이렇게 세상에 태어났다.
언론은 돈이 아니라 정신으로 만든다는 장준하의 생각이 이긴 순간이었다.
또한 언론인 장준하가 태어난 순간이기도 했다.
두 사람이 손수레를 끌고 밀며 큰 책방을 다니며 꽂아 둔 책들. <사상계>창간호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백낙준 박사의 권유로 20년전 동아일보에 실렸던 글로서 정인보 선생이 쓴 <양명학연론>이라는 글을 실으려고 했다.
서울의 국립도서관을 찾아가 신문의 글을 여관생활을 해가며 일주일만에 옮겨적었다.
이처럼 <사상계>를 만드는 일은 장준하 혼자서 하기에는 몹시 벅찼다.
<사상계>가 널리 읽힐수록 할 일은 점점 더 많아졌다.
3년 동안 온 나라를 피로 물들였던 전쟁이 끝이 나자, 장준하는 서울로 돌아가게 되었다.
유엔군과 인민군은 휴전을 했고 나라는 다시 남과 북으로 갈라졌다.
'다시 두 나라로 갈라지려고 그렇게나 많은 피를 흘렸단 말인가!'
서울로 온 뒤 <사상계>는 더욱 발전했다.
독자가 점점 불어나고 직원들도 하나 둘 늘어났다.
장준하는 달마다 앞머리에 글을 써서 싣고 '권두언'이라 이름 붙였다.
<사상계>의 얼굴이나 다름없는 권두언에서 민족과 나라의 앞날을 밝히는 잡지가 될 것을 맹세했다.
그가 쓴 권두언은 독자들에게 널리 읽히고 사랑받았다.
어느덧 <사상계>는 나라안에서 손꼽히는 잡지가 되었다.
여러학자들도 좋은 글을 써서 도와주었다.
그 가운데 함석헌이라는 신학자가 있었다.
그는 일제시대때부터 학생들을 가르치고 기독교 신학을 연구해 온 학자였다.
장준하는 중학생 때부터 함석헌 선생 얘기를 듣고 깊이 존경하고 있었다.
그래서 선생을 찾아가 글을 부탁했고 그 글은 독자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 중에서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글이 가장 유명하다.
이 글에서 함석헌 선생은 온 국민이 통일을 이루는데 앞장서자고 외쳤다.
그리고 국민의 자유를 억누르는 이승만 대통령과 못된 정치인들을 비판했다.
썪은 정치인들에게 나라를 위해 일하라고 꾸짖었다.
장준하도 권두언에서 함석헌 선생과 같은 의견을 말했다.
그 글을 실은 <사상계>가 나오고 며칠 뒤, 험상궂은 사내들이 사무실로 들이닥쳐 남아있는 <사상계>을 모조리 빼앗고 장준하를 낯선 곳으로 끌고 갔다.
그 곳에는 함석헌 선생도 잡혀 와 있었다.
예순 살이 넘은 함석헌 선생을 두들겨패기까지 했다.
장준하와 함석헌이 경찰에 붙들려 갔다는 소식이 퍼지자 많은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사상계>를 사 주었다.
경찰들이 책방을 돌아다니며 빼앗으려했으나, 숨기고 몰래 팔았다.
그래서 그 달에 나온 <사상계>는 한 권도 남김없이 팔려 나가는 기록을 세웠다.
이승만 정권은 국민들의 눈이 두려워 결국 함석헌 선생과 장준하를 풀어 주었다.
국민들의 생활은 날이 갈수록 어려워졌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돈은커녕 끼니를 이을 양식조차 없어 한 가족이 자살해 버린 일까지 있었다.
그런 어려운 시절에도, 대통령인 이승만은 자기 욕심만 채웠다.
1958년 12월 24일, 이승만 정권은 자기들 마음대로 법을 만들려고 했다.
여러 국회의원들이 반대하자 경찰을 보내 국회의원들을 지하실에 가두고 마구 두들겨팼다.
그러고는 자기 편 국회의원들끼리 법을 만들어 버렸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이승만은 하늘이 두렵지도 않단 말인가!
그런 깡패들 앞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장준하는 <사상계>의 권두언을 쓰려고 골몰하다가 그만 펜을 던져 버렸다.
겨우 제목만 썼을 뿐이다. - '무엇을 말하랴! 국민의 권리를 짓밟는 횡포를 보고.' - 그 달의 <사상계>는 제목만 있고 아무런 글도 없는 권두언이 실렸다.
하지만 이 제목만 보고도 독자들은 장준하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언젠가는 국민들이 독재자 이승만을 벌하고 말 것이다.'
장준하는 이를 악물고 언론인의 용기와 국민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다.
정말 오래 지나지 않아 그의 믿음이 옳다는 게 밝혀졌다.
1960년 3월, 이승만 정권은 대통령 선거에서도 부정을 저질렀다.
그러자 이번에는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이승만 정권을 몰아 내는 싸움에 나섰다.
많은 학생들과 시민들이 독재자의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죽었다.
하지만 국민들은 끝내 독재자를 몰아 내는 싸움에서 이겼다.
1960년 4월 26일, 이승만은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 미국으로 도망쳤다.
국민들이 힘을 합쳐 독재자를 몰아내고 민주주의를 지킨 이 운동이 '4.19 혁명'이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독재 정권이 무너진 뒤 국민들은 자유로운 선거로 새 정부를 세웠다.
1960년대의 어느 날, 종로 2가에 있던 사상계 사무실에서 장준하(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와 동료 직원들이 함께 찍은 사진.
앞줄 맨 오른쪽이 오랜 동지인 김준엽.
어느 날, 새로 들어선 민주당 정부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정부에서 나라를 고루 발전시키기 위해 국토건설사업을 시작했는데 책임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들의 끈질긴 설득으로 장준하는 승낙하게 되었다.
그 사업에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새 나라를 건설하려면 먼저 가난한 농촌을 잘 살게 해야지요. 농촌에 들어가 농민들과 함께 일하고 지도할 젊은이들을 길러야 합니다."
장준하는 이런 생각으로 2천명이 넘는 젊은이들을 일꾼으로 뽑아 교육한 뒤 전국 방방곡곡으로 보냈다.
이렇게 젊은이들과 더불어 국토 건설 사업은 힘찬 발걸음을 내딛게 될 참이었다.
그런데 그 때 난데없이 일이 벌어졌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총과 대포로 무장한 군인들이 국민들이 뽑은 민주당 정부를 몰아낸 것이다.
군인들을 지도했던 이는 박정희 육군 소장이었다.
그는 북한이 쳐들어올것이라며 국민을 불안에 떨게 했다.
그리고 자기들만이 나라를 지킬 수 있다고 말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을 스스로 높여 '5.16혁명'이라고 했다.
5.16 쿠테타가 일어나자 나라 안은 완전히 뒤바뀌고 말았다.
희망에 차 있던 국민들은 총칼을 든 군인들 앞에서 입을 다물었다.
새 나라를 건설하려던 계획은 다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국토 건설 사업을 맡았던 장준하도 하던 일을 그만두었다.
그는 다시 <사상계>을 만드는 일로 돌아갔다.
장준하는 함석헌 선생과 만나 의논했다.
"민주주의 나라에서 군인들이 나라를 다스리다니요? 더구나 박정희는 절대로 안 됩니다. 저는 그 자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아요."
장준하는 지난 날 중국에서 일본군 중위였던 박정희가 저지른 못된 짓들이 생각났다.
"동감이예요. 이럴 때 용감하게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진짜 언론인이요, 참된 지식인이지요."
함석헌 선생과 장준하는 뜻을 같이하고 <사상계>를 통해 5.16 쿠데타를 비판하고 군인들은 당장 물러나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에게는 국민말고는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가 넘쳐흘렀다.
'이제 그자들이 나를 잡으러 올 것이다.'
장준하는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태연히 자기 할 일을 해 나갔다.
과연 <사상계>가 나오고 네댓새 지나자 험상궂은 군인들 한 패거리가 나타났다.
장준하는 5.16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들이 만든 중앙정보부라는 기관으로 끌려갔다.
박정희와 함께 쿠데타를 일으킨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날 늦게 풀려나오며 그는 다짐했다.
'언론인을 탄압하는 사회는 민주 사회가 아니다. 언론의 자유가 없다면 민주주의도 없다. 그러므로 참된 언론인이라면 목숨을 걸고 언론의 자유를 지켜야 한다. 국민들은 모든 일을 알 권리가 있고 언론인은 알릴 권리가 있다. 나는 결코 총칼 따위에 지지 않겠다.'
그의 목숨은 일본군에서 탈출하던 그 때 이미 나라와 민족에게 바쳤다. 그래서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었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어떻게든 장준하의 입을 막고 <사상계>를 없애 버릴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언젠가 장준하는 민주당 정부에서 돈을 받은 적이 있었다.
김영선 재무부 장관은 장준하에게 "<사상계>는 나라를 발전시키는 데 앞장선 언론입니다.
그러니 이 돈은 그동안 나라를 위해 일한 대가로 생각하고 받아주세요."
김영선 장관은 <사상계>가 빚이 많은 걸 알고 좋은 뜻으로 도와 준 것이었다.
그래야 장준하가 아무 걱정 없이 국토 건설 사업을 열심히 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장준하는 아무리 뜻이 좋아도 언론이 나랏돈을 받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해서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민주당 정부에서 자꾸만 권하기에 빚에 쪼들리는 <사상계>를 구하려고 돈을 받고 말았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게 된 박정희 정권은 장준하가 나랏돈을 가로챘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러고는 장준하에게 '썩은 언론인'이라는 딱지를 붙여 붙들어갔다.
결국 장준하는 민주당 정부가 <사상계>에 준 돈을 모두 군사정권에 돌려주기로 할수밖에 없었다.
'부패 언론인 장준하, 가로챈 돈을 모두 돌려주기로 하다.'
신문과 방송에서는 마치 장준하가 큰 도둑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도했다.
사정을 모르는 국민들 중에는 장준하를 썩은 언론인으로 믿는 사람들이 생겼다.
<사상계>는 인기가 많이 떨어져 절반도 팔리지 않게 되었다.
장준하는 뼈를 깎아 내는 아픔을 참으며 더욱 일에 열중하면서 <사상계>와 자기에게 오는 탄압과 오해를 이겨내려고 애를 썼다.
그런 장준하에게 생각지도 못했던 영광이 찾아왔다.
1962년 8월, 필리핀 정부에서 '아시아의 노벨상'인 '막사이사이 상'을 장준하에게 주었다.
<장준하 씨는 지식인으로서 새 나라를 세우는 일에 뛰어들어 바르고 공정한 언론으로 큰 공을 세웠다. 잡지를 내면서도 돈을 벌거나 높은 자리를 욕심내지 않았다. 또한 국민들을 올바로 이끌어 자유로운 사회를 만드는 길로 나서게 하였다.>
필리핀 정부는 장준하에게 상을 주는 까닭을 이렇게 밝혔다.
1962년 8월, 필리핀에서 막사이사이 상 언론.문학 부문을 받고 수상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
뒷줄 왼쪽이 장준하이고 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에 앉아있는 사람이 나중에 노벨평화상을 받은 테레사 수녀.
장준하는 막사이사이 상을 받자 비로소 가슴에 쌓였던 억울함이 가신 듯했다. 하지만 더 큰 시련은 시작되었다.
처음 군인들이 총칼을 들고 나타났을때 국민들은 두려워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군인들이 자유를 억압하고 민주주의를 짓밟자 국민들은 뭉치기 시작했다.
군사정권을 반대하는 국민들의 외침은 날이 갈수록 커졌다.
이럴 때 장준하와 <사상계>가 입을 다물고 있을 수는 없었다.
'민주주의는 총칼 앞에서 이슬처럼 사라지는 듯하나 영영 죽지는 않는다. 이 나라의 주인인 국민은 말한다. 군인들은 당장 물러가라.만약 국민을 위협하는 총칼을 버리지 않으면 국민은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장준하는 피를 토하듯이 민주주의를 외쳤다.
이런 순간에도 박정희 정권은 <사상계>를 없애려는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어느 날부터인지 책방으로 나간 <사상계>가 다시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박정희정권이 책방 주인들을 협박해 꾸민 일이었다.
책들은 폐지 공장으로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장준하는 <사상계>가 폐지 공장으로 실려가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 표지를 뜯었다.
책 표지 뜯어지는 소리는 마치 살가죽을 벗겨 내는 듯한 아픔을 주었다.
되돌아오는 책은 갈수록 늘어갔다.
"<사상계>가 망한대요. 빌려 준 돈도 못 받을지 몰라요."
이런 소문이 사람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빨리 빚을 갚으라는 전화와 편지가 끊이지 않았다.
빚쟁이들은 사무실과 집에 들이닥쳐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나가고 큰 딸 호경이가 아끼는 피아노까지 빼앗겼다.
장준하와 식구들은 완전히 알거지 신세가 되었다.
7년에 걸쳐 지은 신촌의 집도 팔고 한동안 여관에서 살다가 어렵게 돈을 마련해서 서대문에 있는 남의 집의 세를 들어갔다.
아이들은 서대문에서 신촌으로 걸어서 학교를 다녔다.
장준하는 <사상계>가 숨이 끊어질 날도 멀지 않았다고 느꼈다.
가족이 집을 잃고 내몰리는 건 그래도 참을 만했다.
하지만 <사상계>가 죽어가는 모습은 차마 눈 뜨고 보기가 어려웠다.
'죽을 때 죽더라도 처음 세웠던 뜻과 정신은 잃지 말아야지.'
나날이 어려워지는 가운데서도 장준하는 밤늦도록 홀로 남아 일했다.
죽어가는 <사상계>를 끝까지 살려보려는 몸부림이었다.
하지만 그 엄청난 시련을 혼자서 이겨 내기란 몹시 힘에 부쳤다.
1966년 어느 날, 장준하는 <사상계>사무실로 찾아 온 후배 백기완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20대에 총을 들고 왜놈을 몰아 내려다가 처음 실패했소. 그 때부터 내 인생은 실패의 연속이구려. <사상계>는 죽었소. 나는 이제 더 이상 펜을 잡은 언론인이 아니오. 독재자가 총칼로 언론을 짓밟아 버렸는데 언론인이 무슨 필요가 있겠소. 지금부터 나는 직접 국민들을 상대로 호소하며 독재의 무리와 맞서 싸우겠소."
"그럼 선생님께서 정치를..."
"그렇소."
1966년 10월 15일 오후, 경상북도 대구 수성천 모래밭에서는 연설회가 열리고 있었다.
연사로 나선 이는 장준하였다.
"총칼로 민주주의를 짓밟은 박정희는 내년에 있을 대통령선거를 위해서 돈을 마련하려고
눈이 뒤집혔습니다. 그래서 외국에서 값싼 사카린을 몰래 들여와 국민들에게 비싼 값으로 팔아
더러운 돈을 챙겼습니다. 그런 일에 앞장 선 박정희는 밀수왕초입니다."
그 날 장준하가 한 연설이 신문과 방송에 나가자 박정희 정권은 국가 원수모독죄로 그를 잡아들였다.
밀수왕초라는 말 한 마디 때문에 장준하는 석 달 동안 감옥에 갇혔다.
이것이 그의 첫 감옥살이였다.
이 때부터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서른 일곱 번이나 경찰에 잡혀갔으며 그 가운데 아홉 번을 감옥에 갇히게 된다.
이듬해에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장준하는 민주당 후보 윤보선을 지지하며 연설을 했다.
가는 곳마다 박정희 군사정권을 비판하고 공격했다.
그럴 수록 그는 박정희 정권에 가장 무섭고도 미운 사람이 되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며칠 지난 뒤부터 낯선 차가 장준하를 미행했다.
그들은 사복 입은 경찰이었다.
결국 그는 서대문 형무소에 갇히게 되었다.
'아... 장이욱 선생님, 선생님께서 왜놈들에게 끌려와 갇힌 곳에 30년이 지나 저도 왔군요. 선생님께서는 왜놈들에게 끌려오셨지만
저를 끌고 온 자들은 같은 민족이랍니다.'
그는 감옥 철문을 들어서며 중학교 때 교장 선생님이었던 장이욱 선생님을 생각했다.
감옥에서 장준하는 규칙적으로 생활하면서 열심히 책을 읽었다.
장준하가 감옥에 있는 동안 국회의원 선거를 하게 되었다.
그는 서울 청량리 부근인 동대문 을 선거구에 출마했다.
감옥에서 선거에 출마하는, 옥중 출마를 한 것이었다.
아내 김희숙이 선거운동에 나섰다.
연설회때에는 남편을 대신해 연단에 오르기도 했다.
"저는 정치의 정자도 모르는 가정주부입니다. 하지만 남편이 왜 갇히게 됐는지는 아주 잘 알지요. 저는 남편이 국회의원이 된다고 해도 하나도 좋지 않아요. 그저 죄 없는 우리 다섯 아이의 아버지가 하루빨리 철장에서 풀려나기만을 바랍니다. 올바른 사람이 다시는 감옥에 가지 않아도 되는 그런 세상을 바랍니다."
연단을 내려와 보니 둘레에 서 있는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가운데는 장준하와 함께 정치 활동을 했던 고흥문 국회의원도 있었다.
"제 아버님께서 돌아가셨을때도 이렇게 울지 않았는데, 오늘은 마음껏 울었습니다그려." 그는 김희숙에게 이렇게 말했다.
선거를 며칠 앞두고 장준하는 감옥에서 풀려났다.
장준하는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한 외국 기자가 소감을 묻자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총칼로 정권을 잡은 쿠데타 세력은 반드시 자기들이 했던 대로 망하게 될 것입니다."
장준하는 국회의원을 지내는 4년 동안 바른 정치인이 되고자 최선을 다했다.
그는 4년 내내 월급이라곤 만져보지도 못했다.
월급이 나오면 빚쟁이들이 고스란히 가져가 버렸다.
<사상계>가 그에게 남긴 빚은 그만큼 무서웠다.
국회의원 장준하는 검소하고 열심히 일하기로 유명했다.
국회의원 시절 국방위원이던 장준하가 휴전선을 방문하여 멀리 북녘땅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그는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내의를 입지 않았고 외투는 한 벌도 없었다. 장갑도 끼어 본적이 없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을때마다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저는 일본군에서 탈출해 임시정부를 찾아갈때, 눈 덮인 벌판에서 밤을 지새운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죽음과 싸우면서 다짐했지요.
조국이 완전히 독립하고 우리가 못난 조상이 되지 않았다는 믿음이 설때까지는 절대로 몸을 편하게 하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독립된 나라를 세우지 않았습니까?"
"아닙니다. 진짜 독립은 외국 세력의 간섭을 받지 않고 우리 힘으로 갈라진 겨레를 하나로 통일할때 이루어집니다.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민주주의 국가도 세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못난 조상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장준하가 국회의원을 하는 동안 정말 부끄럽고 원통한 일이 일어났다.
박정희 정권이 제멋대로 헌법을 고치고 박정희가 다시 대통령이 된 것이다.
그들은 영구집권을 하고 싶었다. 그러자면 헌법을 고쳐야 했다.
그 때 헌법은 한 사람이 대통령을 두번까지만 할 수 있다고 되어 있었다.
어두운 밤, 박정희 대통령을 따르는 공화당 국회의원들은 국회 작은 회의실에 모여 도둑질하듯 헌법을 고쳐 버렸다.
이것이 우리 역사에 부끄러운 일로 남은 '삼선 개헌'이라는 사건이다.
장준하는 정치인이 된 자기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해야 할 일을 생각해 보았다.
그 길은 하나였다.
독재의 무리와 목숨을 건 싸움만이 있을 뿐이었다.
얼마 전만 해도 평화적으로 남북통일을 하겠다고 약속했던 박정희정권은 1972년 10월 17일, 전국에 비상계엄(나라가 위태로울때 군인들이 잠시 나라를 다스리는 제도)을 선포하고 국회도 강제로 문을 닫아 버렸다.
그들은 그 일을 '10월 유신'이라 했고 멋대로 만든 헌법도 '유신 헌법'이라고 했다.
유신헌법에 따라 박정희는 죽을때까지 대통령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박정희정권은 10월 유신과 유신헌법에 반대하면 모두 잡아 가두고 무자비하게 고문했다.
나라 안은 죽은 듯이 잠잠해졌다.
하지만 뜻있는 사람들은 독재자를 몰아 내고 민주주의를 되찾을 희망을 아주 잃지는 않았다.
1973년 12월 24일,
종로 거리에 있는 기독교 청년회(YMCA)회관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몇십 명이나 되는 신문기자들도 있었다.
그 자리에 장준하가 나서서 글을 읽기 시작했다.
유신헌법을 철폐하라는 성명서를 낭독하고 있는 장준하의 모습.
"지금 우리 나라는 경제가 파괴되고 국민들은 혼란에 빠져있다. 학교와 교회에서 그리고 거리에서 국민들은 울부짖으며 자유를 요구하고 있다. 국민들이 울부짖는 까닭은 바로 유신헌법 아래서는 못 살겠다는 소리다. 이에 우리는 국민의 이름으로 대통령에게 헌법을 고치기를 요구한다. 그 표시로 백만 명 시민들의 서명 운동을 시작하는 바이다."
그리고 그 성명서에 서명한 사람들의 이름을 읽어내려갔다.
"장준하, 함석헌, 법정, 이희승, 김수환, 천관우, 박두진, 김지하, 백기완, 홍남순..."
모두 서른 명이었다.
그 날 신문에서는 이 소식을 큰 기사로 다루었다.
신문들은 처음으로 유신헌법을 반대한 놀라운 사건이라고 보도했다.
다음날부터 수많은 국민들이 앞을 다투어 서명을 하겠다고 나섰다.
그러자 누구보다 가장 두려워하며 놀란 박정희 정권은 장준하와 그를 도운 백기완을 잡아 가두어버렸다.
1974년 1월, 백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하다가 법정에 선 장준하와 백기완.
장준하가 또 감옥에 갇히는 바람에 식구들은 살 길이 막막해졌다. 당장 끼니를 이을 쌀도 없었다.
그런 일이 소문으로 퍼지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이름도 밝히지 않고 쌀가마니를 배달시키는 일도 한두번이 아니었고 몰래 돈을 놓고 가기도 했다.
어렵고 힘든 시절이었지만 국민들은 장준하를 사랑하고 아끼면서 가슴으로 지지해 주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박정희는 제멋대로 만든 유신 헌법 대통령이다. 하지만 장준하는 우리들 마음 속의 대통령이다."
15년 형을 받은 장준하는 병에 걸려 1년 만에 감옥에서 풀려났다.
박정희 정권은 병든 장준하가 감옥에서 죽을까봐 마지못해 석방한 것이었다.
심장병과 간경화증까지 겹쳐 왔다.
병원에서 한달쯤 지나 퇴원했으나 여전히 좋지 않았다.
그래도 그의 가슴은 하루빨리 독재자를 몰아 내고 민주주의를 이루어야겠다는 한 가지 생각으로 뛰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온통 캄캄한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새벽이 오려면 아직도 멀어보였다.
'새벽이 오기만 기다릴 게 아니라 등불을 밝히고 길을 찾아나서야지. 내 한 몸 희생해서 등불을 밝힐 수만 있다면 나는 그렇게 하겠다.'
그동안 봄이 가고 여름이 왔다.
그는 가슴이 답답했다. 그러면 장준하는 훌쩍 산에 올랐다.
아내 김희숙은 건강이 좋지 않은 남편이 걱정되어 등산을 말렸다.
"나갔다 오겠소."
무더운 8월 초순 어느 날, 장준하는 간편한 옷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산에 올라 부모님 산소뿐 아니라 김구선생과 이범석 장군 묘까지 찾아가 풀을 뽑아주고 산소를 다듬으며 뭔가를 깊이 생각하는 듯 했다.
그 뒤부터 장준하는 예전과는 뭔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마지막 길이라도 떠나려는 사람처럼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여러사람을 만나 오래도록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뭔가 중요한 일을 꾸미는게 분명했다.
그러던 어느날 장준하는 김희숙에게 결혼식을 하자고 했다.
1970년대의 어느 날, 장준하와 김희숙이 마당에서 다정하게 웃고 있다.
가까운 성당에서 천주교 결혼식을 올리고 며칠 뒤, 장준하는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 가보처럼 간직해 온 태극기를 챙겨들었다.
그것은 임시정부에서 쓰던 태극기로, 김구선생이 장준하에게 물려준 것이었다.
"여보, 오늘 이화여대 총장 김옥길 선생을 만나기로 했소. 이 태극기를 학교 박물관에 잘 보관해 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오. 왠지 더 이상 지키기 힘들 것 같구려."
장준하는 광주에서 홍남순 변호사를 만나 비로소 자기의 각오를 털어놓았다.
"며칠 있으면 광복 30주년인데, 그동안 우리는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나라는 독재 국가가 되었으니 이보다 부끄러운 일이 어디 있겠소? 두고 보세요. 나는 결코 독재 정권에 굴복하지 않을 거요. 지금도 그들과 싸울 큰 일을 준비하고 있어요."
장준하는 알약을 꺼내보이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 또 감옥에 들어가면 그 때는 죽을지도 모릅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들이 이 약을 넣어주지 않을테니까요. 저는 이 약을 먹지 못하면 살기 힘들거든요."
장준하가 살아서 마지막으로 남긴 사진.
1975년 8월 9일, 장준하는 광주의 홍남순 변호사를 찾아가 같이 무등산에 올랐다.
가운데가 장준하이고, 왼쪽에 서 있는 사람이 홍남순 변호사.
그는 이미 함석헌 선생도 만났고, 대통령 선거에 나와서 큰 인기를 얻은 김대중도 만났다.
장준하가 뭔가 큰 일을 준비하고 있을 무렵, 밤마다 누군가 장준하 집에 돌멩이를 던져댔다.
어른 주먹만큼이나 큰 돌멩이는 장준하가 자는 방으로만 날아왔다.
1975년 8월 17일, 일요일. 장준하는 아침 일찍 산으로 떠났다.
등산모임사람들 40명과 함께 갔는데 일행이 점심먹을 준비를 할 무렵 장준하는 혼자서 산위로 계속 걸었다.
그것이 장준하의 마지막 모습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날 오후, 방송에서 뉴스가 전해졌다.
"오늘 오후,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에 있는 약사봉에서 장준하씨가 등산 중 15미터 벼랑 아래로 떨어져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고 장준하 씨는 광복군 출신으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웠으며, <사상계>의 사장을 지낸..."
뉴스를 듣고 있던 함석헌 선생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 같았다.
"안돼! 장준하가 죽다니,믿을 수가 없어. 그럴 수가 없어."
함석헌 선생은 가슴을 치며 눈물을 흘렸다.
그런 심정은 다른 동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누구보다 슬프고 가슴아픈 사람은
장준하에게 가장 가까웠던 마음의 동지이자 아내인 김희숙이었다.
김희숙과 큰아들 호권이 장준하의 무덤에 향을 피우고 있다.
김희숙은 남편의 주검을 보면서 지난 한 달 동안 장준하가 보여 준 이상한 행동들이 떠올랐다.
"당신은 자기가 죽을 것을 알고 계셨군요. 그런데 왜 나에게 한마디 말도 없었나요? 왜?"
장준하의 주검을 본 동지들은 다시 한번 놀랐다. 장준하의 주검은 15미터 벼랑에서 떨어진 모습이 아니었다.
옷도 찢어진 데가 없었고, 안경도 깨지지 않았다. 배낭 안에 들어있던 보온병까지 멀쩡했다.
"여러분, 여기 좀 보세요. 오른쪽 귀 바로 뒤에 뭔가로 세게 때린 자국이 있군요."
장준하의 몸을 조사하던 의사가 외쳤다.
그 의사는 장준하의 동지들이 경찰 몰래 부른 의사였다.
"양쪽 겨드랑이를 보세요. 피멍이 들었지요? 이건 누가 양쪽에서 강제로 끌고 간 자국이예요. 왼쪽 엉덩이에도 뭔가에 쓸린 자국이 있어요. 그리고 엉덩이와 오른쪽 팔에도 이상한 주사바늘 자국이 있고요."
"그렇다면 누가 죽였단 말입니까?"
그러자 한 사람이 고함을 지르며 외쳤다.
"나는 알고 있습니다. 선생을 죽인 자들은 바로 독재자와 그 하수인들이지 누구겠습니까? 선생께서 갖은 협박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더 큰 싸움을 준비하자 이렇게 해친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선생을 죽인 자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 있습니까?..."
장준하가 살던 비좁은 셋집 안은 순식간에 울음바다가 되었다.
세상을 떠난 지 5일째 되는 날 장준하는 경기도 파주군 광탄면에 있는 천주교 나자렛 묘지에 묻혔다.
아직 할 일이 많은 쉰일곱이라는 나이에 사랑하는 조국의 흙 속으로 돌아간 것이다.
한달 뒤 장준하를 따르던 젊은이들이 약사봉 골짜기에 모였다.
그들은 장준하가 죽어서 처음 발견한 자리에 자그마한 돌비석을 세웠다.
오호! 장준하 선생
여기 이 말 없는 골짝은 빼앗긴 민주주의 쟁취, 고루 잘 사는 사회,
민족의 자주 평화 통일 운동의 위대한 지도자 장준하 선생이 원통이 숨진 곳.
뜻을 같이하는 젊은이들이 맨손으로 돌을 파 비를 세우니,
비록 말 못하는 돌부리, 풀나무여!
먼 훗날 반드시 돌배개의 뜻을 옳게 증언하라.
돌아가신 날 1975. 8.17
비를 세운 날 1975.9.17
고 장준하 선생 추모 동지 일동
장준하가 쉰일곱 해를 살아서 남긴 재산은 셋집을 얻은 돈과 쌀 몇 됫박뿐이었다.
하지만 민족과 나라를 사랑한 마음과 통일의 정신 그리고 민주주의를 지키려던 용기는 우리에게 영원한 재산으로 남았다.
1991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는 장준하에게 건국 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1999년 11월 1일에는 다시 문화 예술 분야의 최고 훈장인 금관 문화 훈장이 더해졌다.
비록 너무 뒤늦기는 했지만, 두 훈장은 평생을 바쳐 우리 민족의 독립과 민주주의 그리고 언론과 문화의 발전을 위해 싸운 장준하에게 우리 사회가 주는 마땅한 보답이었다.
장준하의 정신을 이어받고 그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도 계속되었다.
1979년에 독재자 박정희가 죽은 뒤에도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군인출신 전두환과 노태우가 박정희 이상으로 민주주의를 억눌렀다.
그 시절에 장준하의 죽음은 누구도 내놓고 말하기 힘들었다.
역사의 진실이 밝혀지기를 두려워하고 방해하는 무리들이 버젓이 살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장준하는 억압받는 민주주의와 같은 운명이었다.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곧 민주주의를 외치는 일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장준하와 같은 이들의 피와 땀과 희망을 기억하는 국민들은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독재의 무리에 맞서 민주화를 향한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국민들의 오랜 민주화 투쟁 끝에 민주선거로 대통령을 뽑고 정부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2000년 10월, 김대중 정부는 비로소 민주화를 싸우다 희생당한 사람들의 죽음을 밝히기 위한 기구를 만들었다.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바로 그것이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장준하가 민주주의를 위해 독재의 무리에 맞서 싸운 것도, 그들이 장준하를 억누르고 감시하고 괴롭힌 것도 인정했다.
또한 장준하의 죽음을 둘러싸고 아주 많은 의문이 있다는 점도 다시 확인했다.
그러나 증거를 찾지 못해 진실을 밝히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 조사는 앞으로도 계속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사회의 민주주의가 멈추지 않고 나아가는 것처럼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장준하의 삶과 죽음은 우리에게 빚을 안겨 주었다.
그의 삶과 죽음이 더 이상 슬픔이나 안타까움이 아니라 영예로운 일이 될때 비로소 그 빚을 조금이나마 갚게 될 것이다.
그 빚을 갚기 위해 그리고 우리 자신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장준하와 그의 정신을 결코 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