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2월 눈 앞에 닥친 남북분단을 막기 위해 김구와 김규식은 남북지도자회담을 제안하는 서신을 북한의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보냈다.김두봉에게 보낸 편지는 김구가 작성하였는데 중국에서 항일투쟁하던 시기를 떠올리며 유대를 강조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조국의 분단이라는 급박한 상황을 맞아 김구가 옛정을 거론하며 민족통일을 호소했던 사람이 바로 백연(白淵) 김두봉(金枓奉)이었다. 김두봉은 한글학자이자 독립운동가로서 그리고 북한의 정치가로 활동하였으며, 일생 동안 각 분야에서 많은 활동과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공식적인 기록은 고사하고 기본적인 자료조차 유실된 채 북한에서는 물론 남한에서도 잊혀진 인물이 되었다.
김두봉은 1889년 경상남도 동래군 기장읍 동부리에서 김돈홍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는 엄친 밑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신식학문을 접하기 위해 1908년 단신으로 상경했다. 그는 서울에서 기호학교(중앙고등보통학교의 전신)를 졸업하고 배재학당에 입학했다. 1913년 대동청년단이라는 비밀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다 적발되어 이듬해 학업을 중단하게 되었다.
그 길로 김두봉은 최남선이 주재하던 조선광문회에서 소년잡지 '청춘' 등의 편집을 맡아보았으며,건국시조 단군을 숭상하는 대종교에서도 활약하면서 민족혼을 되살리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한편,김두봉은 1913년부터 한글연구에 몰두했는데 스승인 주시경의 영향이 매우 컸다고 할 수 있다. 한글연구의 선구자인 주시경이 우리 말본을 짓고 가르치는 일에 정성을 다하는 동안 김두봉은 국어사전(말모이) 편찬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1914년 주시경이 세상을 떠나자 그는 스승의 못다한 일을 이어받아 1916년 '조선말본'을 저술했다. '조선말본'은 당시까지 발표된 한글에 관한 문법학설로는 가장 깊고 넓게 연구된 대표적인 권위라는 평가를 받았다.
민족의 얼인 한글의 연구와 발전에 커다란 공을 세운 김두봉은 교육활동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28세가 되던 1917년부터 그는 보성,휘문,중앙 등의 고등보통학교에서 우리말을 가르쳤다. 그런데 교원양성소 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조직한 조선물산장려계사건에 관련되는 바람에 보성고보 교장이던 최린으로부터 면직처분을 당하고 말았다.
학교에 나갈 수 없게 되자 김두봉은 한글강습소를 열어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시위에 가담했다. 그는 일본 관헌의 체포를 피해 한 달 동안 서울에서 피신하며 지내가다 중국으로 망명하기로 결심했다.
1919년 중국 상해로 망명한 김두봉은 임시정부내 임시사료편찬위원회의 위원이 되어 '한일관계사료집' 전4권의 편찬에 참여하였고,경남 대표로 임시정부 의정원의 의원으로 선임되었으나 임정내 대립으로 인해 며칠 만에 해임되었다. 이후 그는 임시정부와는 거리를 두고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다.
1921년부터는 한글연구에 몰두하여 1922년 봄 '깁더 조선말본(精解朝鮮語文典)'을 출판하였다. 글자 그대로 앞서 펴낸 '조선말본'의 모자라는 부분을 깁고 더 보태고 하여 펴낸 것이었다. 이 책은 독립운동에 전념해야 한다는 명분 탓에 상해의 교포들에게는 냉대를 받았지만 국내에서는 비교적 좋은 반응을 얻었다.
1923년에는 상해의 교민단이 설립한 인성학교에서 한글을 맡아 가르쳤다. 초대 교장은 교류민 단장이던 여운형이 맡았고,김두봉은 제4대 교장이 되었다. 김두봉은 1932년 인성학교 교장직을 사임하였는데,이즈음부터 그는 적극적으로 항일투쟁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1931년 만주사변의 발발로 중국관내 민족운동진영에서는 효율적인 항일투쟁을 위한 민족운동전선의 통일방안을 모색하게 되었다. 1930년 창설된 한국독립당의 기초위원,이사,비서장 등으로 활동하던 김두봉은 통합운동에 찬동하여 이를 주도적으로 추진하였다. 그 결과 1935년 한국민족혁명당(1937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개칭)이 결성되었고,김두봉은 내무겸 선전부장을 맡았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김두봉은 한민족 자체의 무력양성이 시급하며,무력을 통해 일제를 타도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조선민족혁명당의 노선을 보다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1939년 민혁당원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의용대를 창설하고 총대장으로 취임했다. 일본군에 대한 심리전으로 활약을 보이던 조선의용대는 1940년 공산당 산하 팔로군 주둔지역인 화북지대로 옮겨갔다.
김두봉은 임정요인들과 함께 중경으로 피신했다가 1942년 봄 중경을 떠나 앞서 출발한 의용대원이 활약하고 있는 연안으로 출발했다. 민족주의적이며 심지어 국수주의적인 성향을 띠고 있던 그가 중국공산당의 해방구인 연안행을 택한 데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존재하지만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다. 확실한 한 가지는 이 시기부터 그가 한글학자로서의 명성에 더하여 독립운동가로서의 투쟁경력까지 갖춘 중요한 인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김두봉은 연안에서 최창익,무정,한빈 등과 더불어 1942년 조선독립동맹(독립동맹)을 결성하여 주석에 취임했다. 독립동맹은 자체적으로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조선혁명군정학교를 설치했는데,이는 의용군들에게 군사지식을 가르치고 정치학습을 시키기 위한 것으로 군정학교 교장은 김두봉이 겸하고 있었다. 또한 독립동맹은 김원봉,장건상을 통한 임정과의 연합을 모색하기도 했다. 그리고 국내세력과 협동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공작원을 파견하기도 했는데,이는 주로 건국동맹의 여운형과의 연락을 위한 것이었다.
해방을 맞아 1945년 12월 평양으로 귀환한 김두봉은 소련의 협력자이자 김일성의 지지자로 북한의 정치무대에 등장했다. 1946년 2월 창설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부위원장이 됨으로써 위원장 김일성에 이은 북한정권기관의 제2인자로 부상하였다. 그리고 1946년 독립동맹을 개편한 조선신민당의 주석으로 취임한 후,조선신민당과 조선공산당을 합당하여 북조선노동당(북로당)으로 통합하고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하지만 실권은 부위원장으로 선출된 김일성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후 김일성대학 초대 총장,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상임위원회 위원장, 조국통일전선의장단 의장 등을 역임했다.
게다가 한국전쟁에 중국이 참전하게 되면서 북한내에 중국의 영향력이 증대되자,연안파의 발언권도 강화되었다. 1952년 김두봉의 위상은 어느 때보다 높아 입법부와 행정부 그리고 당을 대표하여 신년사를 발표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56년 연안파 간부들이 김일성의 개인숭배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 '8월종파사건'이 발생하자,이로 인해 김두봉은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1958년 3월 반혁명종파분자로 공격받아 당에서 축출되었으며,지방협동농장에서 일하다가 1960년에 사망하였다고 한다.
김두봉은 냉전과 남북분단의 상황에서 김일성 독재체제를 구축하는 데 기여하다가 희생당한 실패한 정치인으로 남한과 북한에서 외면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70여년의 생애를 뛰어난 한글학자로,무장독립투쟁을 이끈 운동가로,유물론을 신봉한 공산주의자로 자신이 처한 여건에서 최선을 다하여 끊임없이 투쟁하며 살다간 인물이었다. 노기영·부산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