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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라파타르, 생애의 고지(高地)에 서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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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PAL HIMALAYA ; Sagramatha National Park
2017—[Khumbu Himal] EVEREST.B.C. TREKKING — (2)
▶ 3월 28일 (화요일) * [EBC 트레킹 제2일]
*[태국의 방콕 공항]-[네팔의 카투만두공항]-[말라호텔](1박)
* [태국 방콕에서 네팔 카투만두까지] — 기상악화를 네팔 상공을 선회하다
☆… 3월 21일, 오늘은 여행의 제2일이다. 화창하고 후끈하게 더운 날씨이다. 오전 7시, 방콕의 호텔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했다. 최고급 호텔답게 신선하고 다양한 음식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태국의 정통음식과 서양식 요리 그리고 남국의 신선한 야채와 과일이 푸짐했다. 넉넉하고 여유 있는 식사를 하며 환담을 나누었다. 오늘 처음 만나는 대원들이므로 함께 식사를 하면서 서로 친근해지고 자연스럽게 대화도 나누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오전 9시 50분, 방콕공항에서 타이항공편으로 네팔의 수도 카투만두(1,317m)로 날아갔다. 인천에서 방콕공항에 올 때의 비행기보다 규모가 작은 비행기(BOEING 777-200ER)이지만 빈자리가 없는 만석이었다. 방콕공항을 이륙한 비행기는 미얀마의 양곤의 상공을 지나 뱅골만을 가로질러 인도 서북부의 칼카타 상공을 지나서 히말라야의 나라 네팔을 향하여 날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네팔의 상공에 진입한 비행기가 예정된 시간이 되었는데도 착륙하지 않았다. 가만히 살펴보니 비행기가 구름 위의 하늘에서 멀쩡하게 선회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처음 그것을 알아차린 것은, 비행기의 오른쪽 창가에서만 보인다는 히말라야 산맥이 왼쪽 창가에 앉은 나의 시야에 들어왔다는 사실이었다. 처음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일정한 시간이 되면 그 설산의 장관이 나타나고, 왼쪽의 날개가 하늘로 치솟으면서 히말라야 모습은 사라졌다가 일정한 시간이 되면 또 히말라야 산맥이 다시 보이는 일이 반복되었다. 한참 뒤에 기장의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카투만두 공항의 기상상태가 좋지 않아 착륙 허가가 내릴 때까지 공중에서 선회하며 관재탑의 착륙허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선회하고 있는 비행기 속에서 시간이 갈수록 불안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한 시간 이상을 공중에서 헛돌다가 비행기는 두꺼운 구름층을 뚫고 카투만두공항에 안착했다. 히말라야는 역시 하늘이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산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난관이 하늘의 문을 통과하는 것이었다.
멀리 운평선 위에 히말라야 연봉이 왔다갔다 한다
우리의 비행기가 카투만두 ‘트리부반’국제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예정보다 한 시간이나 늦은 오후 1시 34분(현지시각)이었다. 네팔은 한국보다 3시간 15분의 시차가 있다. 네팔은 우리나라에서 비자를 발급하지 않으므로, 공항에서 직접 일정 기간 체류하는 ‘여행 비자’를 받아야 했다. 수속을 마치고 나오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 인천공항에서 탁송한 카고백을 찾아서 공항을 나오니, (주) 아시아트래킹의 낯익은 실무자인 ‘리라스’가 나와, 우리를 맞이했다. 지난번에 직접 공항에 나왔던 ‘툭텐(Thukten Sherpa)’ 사장은 우리가 유숙할 시내의 ‘말라호텔’에서 기다린다고 했다. <아시아트레킹>은 네팔의 최고의 등반전문여행사이다. “당신의 즐거움이 우리가 해야 할 서비스이다.”라는 표제로 정성을 다하는 회사이다. 실무자인 리라스는 네팔에 올 때마다 우리를 맞이하였으므로 필자에게는 익숙한 얼굴이다. 그는 우리가 타고 갈 미니버스를 대기시켜 놓고, 기사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시아트래킹>은 이번 트레킹에서 우리의 숙박이나 산행 가이드, 포터 등 현지 인력은 물론 우리가 네팔에 체류하는 동안의 모든 편의를 제공한다.
얼굴이 동글동글하게 생긴 ‘리라스’는 밝은 표정으로 반갑게 인사를 하면서, 네팔 현지의 전통적인 의식에 따라, 우리 대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카타(Katar)’라고 하는 연황색의 실크머플러를 목에 걸어 주면서 우리를 따뜻하게 영접했다.
*[카투만두(Kathumandu)] — ‘먼지’ 자욱한 ‘혼돈’의 거리 그러나 활기 넘치는…
☆… 네팔의 트리부반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길, 카투만두의 거리는 역시 ‘사람’과 ‘차량’과 ‘오토바이’가 뒤엉켜 거리마다 먼지가 자욱한 ‘혼돈’의 거리였다. 연전에 올 때보다 차량과 사람은 더 많아지고 거리는 더 복잡해진 느낌이었다. 시내 한 복판을 흐르는 개천, 1960년대 우리나라 서울의 청계천을 연상시키는 천변에는 온갖 쓰레기가 버려져 방치되어 있었고 거기에서 먹을거리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소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그리고 길가에는 크고 작은 개들이 사람 사이에서 어슬렁거리며 다니고 있다. 거의 주인 없는 개라고 했다. 네팔 사람들은 개고기를 먹지 않는다. 그리고 힌두교도들은 소고기를 먹지 않는다. 종교적으로 신성시하는 동물이므로 사람과 짐승이 공생하고 있는 것이다. 종(種)이 다르지만 모든 생명이 공존한다는 의미에서 네팔은 아주 ‘자연적’이다. 문제는 문명의 바람이 스며들기 시작한 이 산간의 고원도시에 앞으로 건강한 자연의 생명성을 유지해 나가는 일은 참으로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지 자욱한 혼탁한 거리가 그 과도기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아 마음이 답답했다.
*[유서 깊은 말라호텔] — 번성했던 고대왕국 말라왕조를 포함한 네팔의 역사
오후 2시 30분, 우리가 오늘 유숙할 '말라호텔'에 도착했다. 카투만두의 가장 도심에 위치한 말라호텔(Malla Hotel)은 카투만두에 이름난 전통의 5성급 호텔이다. 오래된 호텔은 그 시설 규모가 크고 수영장과 깨끗한 잔디정원을 갖추고 있어 경내가 아주 쾌적하고 아름다웠다. 우리가 도착한 호텔 로비에는 (주) 아시아트레킹의 ‘툭텐(Thukten Sherpa)’ 사장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는 네팔에 올 때마다 환대를 해준 바가 있으므로 필자도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이상배 대장과는 30년의 우정을 지니고 있으므로 형제적 우의를 나누는 사이다. 남다른 호의를 가지고 있다.
말라호텔
말라호텔 로비에서 (주) 아세아트레킹 툭텐 사장의 영접
* [서기 1,200년 이후의 네팔의 약사(略史)] *
☆… 네팔의 국제공항의 이름이 ‘트리부반(Tribhuvan)’이다. 그리고 네팔(Nepal)의 아픈 역사가 깃든 길티푸르로 가는 길목에 트리부반대학교(Tribhuvan University)가 있다. 네팔의 국립대학이라는 이 대학의 이름도 카투만두 공항의 이름과 같다. 명칭의 내력은 이렇다. ‘트리부반(Tribhuvan)’은 네팔 왕조의 이름난 왕(王)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네팔은 왕조국가였다. 지금은 왕정이 무너지고 마오주의자(중국의 공산주의)와 민주당이 권력 투쟁을 벌이고 있는 중이어서 나라의 정치가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대학이나 공항이나 거리의 이름에 아직도 왕의 이름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트리부반 왕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트리부반(Tribhuvan)’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네팔의 역사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인도와 티베트 사이에 위치한 네팔의 고대사는 기원전 5세기 불교 발생과 그 이후 이슬람 세력의 침투 등으로 많은 우여곡절을 겪는다. 여기서는 13세기 초에 등장한 말라(Malla) 왕조부터 근세에 이르는 정치사적 흐름을 간략하게 정리해 본다.
* [13세기, 말라(Mallas) 왕조와 네팔의 황금기]
1200년경 인도에서 도래한 말라 족(Mallas) 출신의 왕이 카투만두 계곡에서 왕조의 시대를 연 이래 550년 동안 지속하면서 네팔 문화의 황금기를 꽃피웠다. 1255년 인구의 3분의 1이 목숨을 잃은 엄청난 지진을 겪고, 그로부터 100년이 못 되어 이슬람세력이 쳐들어와 수난을 겪기도 했지만, 1382년 3대왕 자야스티티 말라(Malla)에 이르러 카투만두 계곡 일대를 통일하고 카스트제도를 포함한 법을 시행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1641년 ‘쁘라땁 말라’왕 시기에는 문화의 전성기를 이루면서, 왕조가 지속되어 왔다. 그러나 그 뒤 말라왕조는 왕자들의 권력 다툼으로 카투만두, 파탄, 박타푸르 등 3개의 작은 왕국으로 나누어진다.
* [18세기, 샤(Shah) 왕조의 통일 사업]
1768년부터 작은 산악왕국 고르카(Gorka)의 통치자 쁘리트비 나라얀 샤(Shah)는 카투만두의 3국으로 갈라진 말라왕조의 세 국왕을 공격하여 네팔을 통일하고 샤(Shah) 왕조를 창건했다. 쁘리트비 나라얀 샤(Shah), 그는 네팔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받는다. 그러나 샤(Shah)의 고르카 병사들은 강력하고 잔인했다. 우리가 탐방했던 ‘킬티푸르’의 비극도 그 중의 하나이다. 샤(Shah) 왕조가 영국과의 전투에서 패했지만 고르카 병사의 용맹성을 본 영국군이 그들을 용병으로 편입했다. 대신 네팔은 인도와 달리 영국 식민지에서 제외되었다. 이 용병의 관행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최근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도 고르카 용병이 참전했다.
* [19~20세기, 라나(Rana)의 지배]
1775년 쁘리트니 나라얀 샤(Shah)가 죽자 권좌를 두고 암투가 시작되었고, 암울한 정치 상황이 계속되었다. 1846년에는 최고 권력자 총리대신 바하두르는 정적을 무자비하게 살해하고, 가문의 이름을 권위 있는 라나(Rana) 로 칭하고 후일 국왕을 뜻하는 ‘마하라자’의 지위를 얻고 이를 자손에게 계승한다는 법령을 발표했다. 라나 가문은 왕족과 동등한 지위를 누렸으며 실질적인 권력을 차지했다. 라나(Rana)는 그후 100년 동안 네팔을 지배했으며 샤 왕족과 혼인해 혈연관계를 맺었다. 이 시기에 외국인의 네팔 입국은 극히 제한되었다. 산악지대 농민들의 생활은 아주 피폐했지만 라나 일가는 극도로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 1923년 영국이 네팔을 독립국으로 공식 인정하였으며, 1930년 ‘고르카 왕국’이라는 국호를 ‘네팔’로 바꾸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했고, 중국에서는 공산혁명이 일어났다. 중국이 티벳을 침공하자 티벳 난민들이 히말라야를 넘어 네팔로 밀려들었다. 네팔은 아시아의 두 대국 인도와 중국 사이의 완충국가이다. 동시에 사람들에게서 거의 잊혀지다시피 했던 트리부반(Tribhuvan) 왕이 라나 가문을 몰아내고 샤(Shah) 왕조를 되찾았다. 100년 동안 빼앗긴 권력을 되찾은 것이다. ‘카투만두 공항’과 ‘국립대학’, 그리고 카투만두의 ‘중심대로’의 명칭은 바로 이 왕의 이름인 것이다.
* [20세기 중반, 샤(Shah) 왕조의 복원과 이어지는 폭정]
1950년 기습적으로 인도에 망명했던 트리부반(Tribhuvan) 왕이, 배후의 영향력을 발휘하여 신생 정당 네팔의회당(NCP)의 지지를 받아, 1951년 국민들의 환호 속에 네팔로 돌아와서 세력이 약해진 라나 가문과 네팔의회 당원들로 이루어진 새 정부를 구성했다. 네팔은 쇄국정책을 버리고 외국과의 관계를 개선했으나 새로운 민주정치를 위한 꿈은 실현하지 못했다. 1955년 트리부반 왕이 사망하고 뒤를 이은 마헨드라-가넨드라-비렌드라 왕들이 의회를 말살하고 독재와 폭정을 계속해 나갔다. 네팔의 군사, 정치적 현황은 외부 세계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며 엄격한 검열이 이루어졌다. 정적들에 대한 대규모 구금, 고문, 구타가 자행되고 최대의 반정부 단체가 된 네팔의회당(NCP) 지도자들은 1960~1990년 동안 감옥을 제집 드나들 듯했다.
* [20세기 후반, 인민운동]
1989년 유럽의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대가 중국 천안문 광장에 운집하자, 네팔의 야당 또한 국왕을 헌법수반으로 하는 다당제 민주주의를 위해 연합체를 구축했다. 이러한 대규모 시위가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났는데 이를 '자나 안돌란(Jana Andolan)' 혹은 '인민운동'이라고 한다. 1990년에는 엄청난 소요사태가 끊임없이 이어지자 네팔 정부은 한 발 물러섰다. 4월 9일 비렌드라 국왕은 정당 활동 금지를 해제하고 입헌군주의 역할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3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1991년 5월 선거를 실시하여 의회가 구성되었지만, 이후 10년 동안 혼란한 정국은 계속되었다. 국민들은 극심한 피로감에 젖어들었다.
* [1996년, 마오주의자들의 인민전쟁]
1996년 공산당의 분파인 마오주의자들은 민주정치의 이상이 실패로 끝난 현실에 분노하고 ‘인민전쟁’을 선포했다. 폭력 사태가 네팔 중서부 롤빠지역에서 시작되어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정치권의 부패와 무관심과 경찰의 강경대응으로 민심을 정부에 이반되어 갔다. 공산반군의 정규군이 15,000여 명에다 민병대원이 50,000명에 다다랐다. 전국토의 40%가 공산반군이 장악했다. 네팔의 주요 트레킹코스인 안나푸르나 지역 트레킹도 수 년 동안 공산반군에 ‘통행세’를 내야만 가능했다. 실제로 중국 공산당과는 별다른 유대가 없는 반군은 국가의 기간 시설을 마구 파괴하고 시골지역에는 오히려 가난을 부채질했다. 2005년까지 네팔에서는 민간인을 포함해 13,000여 명이 내전으로 목숨을 잃었다.
* [21세기, 왕족간의 알력과 정치 상황의 변화]
나라얀히띠 왕궁에서 왕자가 부왕 비렌드라를 비롯한 10명의 왕족을 살해하고 권총 자살을 기도했다. 엄청난 사건이었다. 네팔 국민들은 극심한 정신적 충격에 빠졌다. 국왕의 형제인 기아넨드라(Gyanendra)가 새 국왕의 자리에 올랐지만 정치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2005년 2월 국왕 갸넨드라는 정부를 해산하고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2006년 4월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고 16명이 목숨을 잃었다. 정부가 위기에 몰리자 결국 국왕은 의회민주정치를 시행하겠다고 약속했다. 다음 달 선거를 통해 왕은 ‘명목상의 왕’이 되었다. 샤(Shah) 왕조가 200년 이상 향유해온 정치권력이 의회(議會)로 넘어간 것이다. 국왕이 실각하자 공산반군이 다시 협상 테이블에 나왔다. 2006년 후반 평화협정이 체결되어 수십 년에 걸친 유혈내전이 끝을 보게 되었다.
네팔의 정치는 급격한 변화를 맞이했다. 2008년 4월 10일 공산반군이 다수당이 되었고, 한 달 뒤 의회는 560대의 4의 표결로 왕정(王政)을 폐지했다. 이로써 240년 왕족통치가 종말을 고했다. 예전의 공산 ‘테러리스트’들은 정부 각료가 되고, 이들이 이끌던 인민해방군이 정규군이 되었다. 네팔의 마지막 왕 갸넨드라 비르 비끄람 데브(Gyanendra Bir Bikram Dev)는 카투만두 왕궁에서 나와 나가르준의 한 초라한 집으로 이사했다.
그러나 지금도 네팔의 정국은 안정되어 있지 못하다. 카투만두 유일의 한식당 <빌라 에베레스트>의 앙도로지 셀파의 설명에 의하면 지금 네팔은 마오주의자와 의회주의자가 집단지도체제로 나라를 이끈다고 했다. 40여 년간 40억 달러에 이르는 해외원조금을 쏟아 부었지만 네팔을 여전히 세계 최빈국이다. 총 인구 2,950만 명 중 700만 명이 식량부족에 시달리며 의료 혜택과 교육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네팔은 의료 예산이 아주 낮고 유아사망률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러나 정치 상황과 무관한 대다수의 네팔 사람들은 착하고 순수하다. 열악한 현실 속에서도 억척스러운 삶을 이어가고 있다. 어디를 가나, 일부의 정치권력이 백성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고 그들의 삶을 피폐하게 했다.
*[한식당 <에베레스트>의 만찬, 오리구이] — 앙도로지 셀파와의 만남
☆… 오후, 숙소인 말라호텔에서 여장을 푼 대원들이,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가까운 한식당인 <빌라에베레스트(VILLA EVEREST)>로 갔다. 마당이 있는 식당 입구의 철문에 우리의 ‘태극기’와 ‘네팔’ 국기가 나란히 그려져 있는 곳이다. 지금 이 식당은 셀파족 앙도로지 부부가 운영하고 있다. 앙도로지는 한국의 박영석 등반대의 쿡(요리하는 사람)을 담당하게 되면서 한국요리를 하게 되었는데, 그 경력이 25년이나 되었다고 했다. 이 식당은 한국의 산악인 박영석과 더불어 운영했는데, 박영석 대장이 지난 2011년 안나푸르나 남면 최초등반을 시도하다가 강기훈, 신동민과 함께 조난을 당하고 산 속에 묻힌 후, 지금은 한국요리 전문가가 된 앙도로지가 운영하고 있다. 그는 지난 2006년에는 영남대 산악부의 에베레스트 등반 때의 인연으로 한국의 대구를 방문하는 등 여러 차례 우리나라를 다녀온 사람이다. 식당의 게시판에 한국의 신문에 게재된 그의 기사가 가득히 붙어 있었다. 잠시 후 외출한 그가 돌아와서 반갑게 인사를 하고 우리와 함께 합석하여 환담을 나누었다.
이상베 대장과 앙도로지 셀파
내일 본격적인 트레킹을 앞두고 든든한 체력 보강이 필요하다며 오리구이를 주문하여 건배를 했다. 그리고 된장찌개와 김치를 곁들여서 저녁식사를 했다. 저녁식사를 하면서 이 대장이 말했다. 히말라야 트레킹에 관한 몇 가지 주의와 당부를 하는 것이었다. …
“내일부터는 고난의 행군이 시작됩니다. 매일매일 감당해야 할 멀고 험난한 여정, 불편한 잠자리, 부실한 음식 등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이 전개될 것입니다. 불편함이 있더라고 현실에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열악한 환경 속에 살아가는 네팔 현지인들의 낙천성이 말하는 ‘노 플러블럼’의 정신을 마음속에 담아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히말라야 트레킹은 3,000m 이상의 고지를 오르는 여정이므로 서두르지 말고 아주 천천히 걸어야 합니다. 꼭 명심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히말라야는 무리하면 ‘휘말리게’ 됩니다. 특히 우리가 들어가는 쿰부히말은 유독 고소증이 심하게 나타나는 곳이므로 각별히 유의해야 합니다. 특히 밤과 낮의 일교차가 심한 산중에서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감기에 걸리면 고소증에 휘말리게 되는 것입니다.” … 심신의 관리를 잘해야 할 것을 자상하게 당부했다.
네팔 카투만두 중심의 상가거리 <만다라 스트리트>
▶ 3월 29일 (수요일) * [EBC Trekking 제3일]
<루클라> 진입 좌절→<카투만두> (삼사라호텔)
*[비 내리는 카투만두공항] — 히말라야의 관문, 루클라로 들어가는 비행기가 취소되었다
☆… 오늘은 쿰부히말 트레킹의 관문이 ‘루클라(Lukla, 2,840m)’로 들어가는 날이다. 새벽부터 비가 내렸다. 카투만두에서 루클라까지는 17인승 소형비행기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 말라호텔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카투만두 공항으로 나갔다. 루클라까지 들어가는 비행기 편으로 카고백을 탁송하고 비행기를 탑승을 기다렸다. 비가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공항의 활주로에는 간혹 비행기가 뜨고 내렸으나, 우리가 타고 갈 루클라 행 비행기는 계속 지연되고 있었다. 국내선 비행기들이 대부분 지연되거나 운항 취소가 되는 가운데 대합실에는 많은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갈 듯 말 듯 한 시간을 기다리고 다시 또 두 시간을 기다려도 탑승 안내방송은 없었다. 참으로 답답하고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이 이어졌다. 낮 12시가 넘어가면서 비는 소강상태를 보였으나 끝내 비행기 탑승소식은 없었다. 오후 2시가 되어서야 루클라 공항의 현지의 기상상태가 좋지 않아서, 오늘 비행기 운항은 취소되었다고 했다. 히말라야는 역시 하늘이 허락해야만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실감한 하루였다.
끊임없이 비가 내리는 카투만두 공항
결국 오늘은 루클라 행은 접고 다시 호텔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상배 대장이 아시아트레킹에 차를 불러 카고백을 다시 챙겨서 호텔로 돌아왔다. 천금 같은 하루가 이렇게 허비되고 말았다. 오늘 돌아온 곳은 말라호텔이 아니고 ‘삼사라호텔(Samsara Hotel)’이었다. 오늘의 분위기를 바꾸어 내일 순조롭게 출발하겠다는 이 대장의 생각이 작용한 것이다. 삼사라호텔은 필자가 네팔에 올 때마다, 히말라야에 들고 나면서 이용했던 곳이었다. 아담한 규모에 좀 오래되기는 했지만 정감이 있다. 호텔 정원에는 남국의 아름다운 꽃이 피어있었다.
카투만두 <삼사라호텔> 꽃밭정원
*[네팔식당 <Thamel House Restaunt>의 만찬] — 네팔식 독한 ‘청주’와 정통음식 ‘달밧’
저녁식사는 네팔의 대표적인 전통음식인 ‘달밧(Dalbat)’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에서 자리를 잡았다. <Thamel House Restoraunt>은 아주 오래된 목조건물로 고색창연한 식당이다. 건물의 안쪽 정원에 설치한 식탁이 운치를 더했다. 그리고 음식은 아주 품위가 있는 네팔 정통의 식단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예정대로 루클라 행 비행기를 타지 못한 오늘의 답답함을 바꾸어보겠다는 이 대장의 배려가 작용한 것이다. 주문한 음식이 차례로 나왔다. 그리고 네팔의 정통청주가 목이 긴 주전자에서 쪼로로록 잔을 채웠다. 아주 작은 잔에 따르는 청주는 중국의 고급 백주(白酒)처럼 아주 독하고 진했다.
네팔 전통식당 <타멜하우스> 레스토랑 (좌측 건물)
몇 차례 잔을 비우고 나니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정원에는 작은 무대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풍부한 성량으로 노래를 잘 부르는 기원섭 대원에게 한 곡을 청했으나 끝내 사양했다. 목 상태가 아주 좋지 않다고 했다. 대원들의 환담이 이어지고 작은 술잔을 연신 비웠다. 이런저런 전통음식이 작은 접시에 차례로 나오다가 ‘달밧’ 정식(定食)이 나왔다. ‘달’은 녹두죽이고 ‘밧’은 쌀밥이다. 거기에 신선한 산나물과 닭고기로 조리한 치킨커리가 곁들여진다. 이곳은 네팔의 식당 수준으로 보아 아주 고급스런 정통 레스토랑에 해당한다. 그래서 가격이 아주 높은 편이라고 했다. 주변의 식탁에는 연세가 지긋하신 서양인 부부 등 꽤 수준이 있어 보이는 사람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아주 유쾌하고 즐거운 만찬이었다.
<계 속>